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라틴어: Publius Claudius Pulcher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조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아버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형제)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형제)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84년 |
전임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
동기 | 루키우스 포르키우스 리키누스 |
후임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퀸투스 파비우스 라베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그중에서도 '풀케르(Pulcher: 잘생긴)'라는 코그노멘을 쓰는 그의 가문은 아피아 가도의 건설자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장님')의 차남 푸블리우스부터 시작되었으며,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본가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의 조부이기도 한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249년 집정관을 맡아 드레파나 해전을 치렀다가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함선 120척 중 93척이 격침되는 참사를 야기하고 말았고, 전투 전에 전투의 향방을 알아보기 위해 닭들이 모이를 쪼아먹는 의식을 진행하던 중 닭들이 쪼아먹질 않자 "먹기 싫으면 물이나 마셔라!"라고 외치며 바다에 던져버리는 짓을 하는 바람에, 무능과 불경죄로 재판을 받다가 판결 직전 자살했다. 여기에 아버지의 여동생인 고모 클라우디아는 경기장에 참석했다가 평민들이 워낙 많이 있어서 좀처럼 빠져나가지 못하자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이 쓸모없는 평민들을 다시 한 번 물속에 쳐넣었을 것을!"이라고 외쳤다가 고발당하여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하지만 푸블리우스의 아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맹활약해 아버지의 불명예를 씻어냈다. 그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군대에 가담하여 기원전 213년부터 벌어진 시라쿠사 공방전에 참여했다. 뒤이어 기원전 212년 집정관을 맡아 로마와 동맹을 끊고 한니발 바르카와 연합한 카푸아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동료 집정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2년간 카푸아 공방전을 치른 끝에 마침내 카푸아를 정복했으나, 그 과정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는 기원전 212년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차남이다. 형제로 기원전 185년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기원전 177년 집정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있었다. 기원전 189년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와 함께 수석 조영관에 선임된 뒤 여러 곡물 상인에게 곡물을 은폐한 혐의로 벌금을 부과하고 얻어낸 자금을 사용해 로마 사원 중 하나에 12개의 금박 방패를 설치했다. 기원전 188년 법무관에 선임되어 타렌툼에서 근무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그의 형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타렌툼에서 근무한 법무관이었다고 기술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리비우스가 혼동했다고 본다.
기원전 185년 말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 그의 형이자 기원전 185년 집정관 아피우스는 정적과 대다수 원로원 의원의 항의를 무릅쓰고 포로 로마노에서 형제 푸블리우스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당시 퀸투스 파비우스 라베오의 당선이 유력하다고 여겨졌지만, 아피우스의 이같은 행동 때문에 푸블리우스가 차기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동료 집정관은 루키우스 포르키우스 리키누스였다. 두 사람은 리구리아에서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지만, 고대 기록에서는 이후의 상황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기원전 181년 에트루리아에 식민도시 그라비스카를 건설하는 일을 담당한 위원회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으며, 후손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