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22:28:47

한니발 바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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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바르카
𐤇𐤍𐤁𐤏𐤋𐤟𐤁𐤓𐤒 | Hannibal Barca[1] | Ἀννίβας Βάρκας
파일:한니발 바르카 정사각형.png
한니발 생전에 만들어진 흉상[2]
<colbgcolor=#eee8aa><colcolor=#000> 출생 기원전 247년
고대 카르타고[3]
사망 기원전 183년 ~ 기원전 181년 (향년 64~66세)
아나톨리아 비티니아[4]
국적 카르타고 (기원전 221 ~ 기원전 202)
셀레우코스 제국 (기원전 198 ~ 기원전 188)
비티니아 왕국 (기원전 188 ~ 기원전 181)
가족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
동생 하스드루발 바르카 (둘째), 마고 바르카 (셋째)
매형 잘생긴 하스드루발, 보밀카르
조카 한노
지위 카르타고 총사령관
참전 전쟁 제2차 포에니 전쟁
- 사군툼 공방전
- 트레비아 전투
- 트라시메노 전투
- 칸나이 전투
- 자마 전투
로마-셀레우코스 전쟁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제2차 포에니 전쟁
2.2.1. 사군툼 공격2.2.2. 이탈리아 원정2.2.3. 칸나이 전투2.2.4. 로마의 반격과 전략/전세의 한계에 봉착한 한니발2.2.5.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침공2.2.6. 자마 전투2.2.7. 정리
2.3. 전후2.4. 최후
3. 능력
3.1. 군사
3.1.1. 비판3.1.2. 반론3.1.3. 종합
3.2. 정치3.3. 인품
4. 로마 멸망 맹세설5. 어록6. 매체에서7. 여담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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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한니발고화질.jpg
세바스티앙 슬로트[5] 作, 1704년. 루브르 박물관 소장[6]
고대 카르타고 공화국장군. 세계사에서 카르타고를 대표하는 위인, 명장이자 조국 카르타고를 꺾은 강대국 로마를 소수의 병력만으로 연파해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로마 최대의 숙적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오죽했으면 로마인들이 우는 아이를 나무랄 때 하는 말이 "한니발이 문 앞에 와 있다(Hannibal ad portas)"였다.

사실상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주인공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바르카 혼자서 철천지 원수 로마의 멸망을 목표로 기획하고 혼자서 수행한 것[7]이나 다를 바 없어 다른 이름으로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끝내 카르타고는 패전했음에도 한니발은 지금까지도 명장으로 칭송받는다. 전쟁 결과와 별개로 그의 뛰어난 지휘력과 전설적인 전과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대의 적국이었던 로마도 그를 명장으로 칭송했다.[8] 그리하여 오늘날 그의 조국인 카르타고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지 몰라도 한니발이라는 이름의 장군을 아는 사람들은 많을 정도로 그의 명성은 200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다.

2. 생애

2.1. 유년기

한니발은 BC 247년에, 카르타고의 식민지였던 시칠리아에서 태어났다. 9살에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를 따라 스페인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하밀카르는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히스파니아에서 사망했다. 하밀카르의 뒤를 이어 그의 전우이자 한니발의 매형이었던 하스드루발[9]히스파니아의 사령관이 되었다. 한니발은 그의 휘하에서 군 경력을 쌓았다.

리비우스의 사료에서 서술된 그의 일생은 위와 다르다. 이에 따르면, 한니발은 하밀카르와 떨어져 카르타고 본토에서 생활했다. 그의 아버지는 1차 포에니 전쟁과 히스파니아 식민 전쟁 때문에 히스파니아에 머물렀다. 한니발이 히스파니아로 향한 것은 이후 매형 하스드루발로부터 초청을 받은 이후였다.

이 초청 서신은 카르타고 원로원에도 보내졌다. 이때 대 한노 2세는 지역 사령관들이 자신의 자식들에게 군대를 세습한다며 한니발의 파견에 반대했다. 그는 한니발이 다른 젊은이들처럼 카르타고에서 관료 경험을 먼저 쌓아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노의 발언은 원로원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 다른 의원들은 이를 남의 가정사(?)에 대한 주제넘은 참견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니발은 예정대로 히스파니아로 건너가 군 경험을 쌓았다.

다만 리비우스의 사료는 오류라는 학설이 정설이다. 한니발이 후일 자마 전투에서 패배하고 카르타고로 돌아올 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도시를 떠날 때가 (하밀카르가 살아 있었던) 아홉 살이었는데, 서른여섯 해가 지나서야 돌아오는구만."[10] 즉, 한니발은 BC 238년 하밀카르와 함께 히스파니아로 떠난 후 BC 202년이 되어서야 돌아온 것이다.

한니발은 곧 27세의 젊은 나이로 히스파니아 주둔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는 그곳으로 한니발을 초청했던 그의 매형 하스드루발이 켈트족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소 급하게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의 직위를 세습했다. 한니발은 이미 병사들부터 인망이 높았다. 용맹, 열정, 성실성을 갖춘 데다 그의 아버지 하밀카르를 빼닮았기 때문이다.
그의 지휘하에 병사들은 항상 가장 힘차게 돌격하고, 사기가 충천했다. 무모할 정도로 위험을 감수하기도 했던 한니발은 일단 위험이 닥치면 뛰어난 전략적 능력을 발휘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칠 줄 몰랐고 지독한 더위나 혹심한 추위도 쉽게 견딜 수 있었다.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먹고 마시지 않았으며, 단지 신체의 활력을 유지할 정도로만 먹고 마셨다. …… 말 위에서든 지상에서든, 전사로서 그를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공격할 때는 항상 앞장섰으며, 전장을 떠날 때는 가장 마지막에 떠났다. 그의 미덕들은 가히 이 정도였으며, 실로 위대했다. 하지만 결점들 또한 그에 못지 않았다. 비인간적인 잔인성, '카르타고적 배신'을 넘어서는 배신 행위, 그리고 진실과 명예, 종교를 완전히 무시하고, 서약의 신성성과 다른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 말이다.
리비우스

2.2. 제2차 포에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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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은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주도하였고 전쟁 전반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2.2.1. 사군툼 공격

한니발의 사군툼 공격을 시작으로 2차 포에니 전쟁이 개전했다. 한니발은 총사령관에 오르자[11] 바로 로마와의 전쟁을 결심했다. 그는 우선 스페인에 있던 사군툼이라는 도시를 포위했다. 사군툼은 당대 히스파니아의 가장 부유한 도시이자 로마의 동맹시였다. 이에 사군툼은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당시 로마의 대외 정책은 군사적 보호를 약속하여 동맹시를 늘리고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동맹시인 사군툼이 함락당하면 로마의 대외적 위신이 크게 훼손될 수 있었다. 이는 스페인에서 로마의 영향력이 감퇴하고 동맹시들이 이탈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로마는 바로 전쟁을 하기보다 우선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다. 이때 로마는 사군툼에 병력을 보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병력이 갈리아인들을 견제하느라 북이탈리아 지역에 묶여 있었다. 그래서 한니발이 이를 예상하고 고의로 이때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따라서 로마는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된 사절을 한니발에게 보냈다. 그러나 한니발은 전투가 급하다고 이들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협상에 기질이 없는 한니발이 만날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으나 실제로 전장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기도 했다.

로마 사절단은 분노하여 카르타고 본국으로 건너가 항의했지만,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다. 카르타고 원로원도 만만치 않아서 로마의 위법 행위를 역으로 추궁했기 때문이다. 당시 양국의 조약에 따르면 로마는 사군툼과 동맹을 맺어서는 안 되었다. 에브로 강을 경계로 양국의 세력권을 정한 뒤 이를 침범하지 않기로 협정을 맺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거 카르타고의 하스드루발이 로마와 사군툼의 동맹을 인정한 일이 있었지만, 이는 카르타고 본국의 의견을 거쳐 비준한 것은 아니었다. 카르타고는 이렇게 근거를 들어 로마 사절단을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의외로 강경한 카르타고의 대응에 로마 사절단은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로마 사절단은 전쟁이냐 사군툼 철수냐 양자택일을 강요하였다. 이는 로마 사절단이 카르타고의 질문에 해명을 하기보다는 전쟁 협박으로 무마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로마의 태도는 카르타고 원로원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카르타고 원로원은 "한니발을 말리지 않겠다. 전쟁을 선포하면 받아들이겠다."라고 강경하게 답변하였다.《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따르면 로마의 사신 파비우스"전쟁과 평화 중 하나를 택하라?"라고 호령했는데, 카르타고 원로회 측에서 "그대가 주고 싶은 것을 줘라."라며 받아치자 파비우스가 "좋다, 전쟁을 주겠다."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로마와 카르타고가 신경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한니발과 사군툼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로마가 지원군을 보내지 않을 것임을 안 사군툼 시민들은 한니발에게 강화를 요청하였다. 그런데 한니발은 "강화를 받아들이겠소. 모든 시민들은 그들이 가진 재산을 그대로 성 안에 두고 옷 두 벌씩을 가지고 나오시오."라고 답했다. 사군툼이 지역에서 가장 부유했던 도시임을 생각해보면 이는 대단히 굴욕적인 조건이었다. 사군툼 시민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재산을 모두 불태운 다음 결사항전을 벌였다. 그러나 마침내 사군툼은 함락당했다. 모든 성인은 죽고, 살아남은 자들은 노예로 팔렸다.

2.2.2. 이탈리아 원정

로마는 선전포고 후 빠르게 전쟁 태세에 돌입했다. 로마는 신속히 정예 군단을 시칠리아프랑스 남부로 이동시켰다. 동시에 로마는 외교적인 술책도 사용했다. 로마는 히스파니아 남부에 있는 부족들과 한니발의 예상 이동 경로에 있는 갈리아 부족에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공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군툼의 함락이 로마에 대한 불신을 낳았기 때문이다. 히스파니아 부족들은 로마 사절단을 쫓아냈다. 갈리아 부족들은 로마를 본래부터 불신하고 있어서 더욱 비협조적이었다. 당시 로마가 북이탈리아에서 정복 전쟁을 벌이는 바람에 갈리아와 로마의 갈등은 한참 고조되어 있었다.

한니발도 본격적으로 로마를 공격하기 위한 움직임을 개시했다. 그는 9만 이상의 카르타고 정예 병력 중 절반을 로마 원정을 위해 징발했다. 이는 보병 3만 8천, 기병 8천, 코끼리 37마리에 해당하는 대병력이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을 떠나 피레네 산맥으로 향했다. 한니발의 북상 소식은 로마에 알려졌고 로마 정부는 놀라며 즉시 두 집정관인 스키피오와 셈프로니우스가 이끄는 군대를 각각 갈리아시칠리아로 보냈다. 게다가 스키피오는 첩자를 풀어 한니발의 북상 경로를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를 눈치채고 갈리아 내부로 깊숙이 이동하여 스키피오의 추적을 피했다.

이후 한니발은 그 유명한 알프스 산맥 행군을 감행했다. 하지만 고립된 적진에서 대병력을 이끌고 험준한 산맥을 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12] 알프스산맥은 매우 험준한 데다 당시 한니발이 행군했던 시기는 초겨울이라서 추위도 심했다. 더욱이 알프스 산맥의 원주민들도 카르타고군을 적대했다. 이러다 보니 한니발은 그곳의 비우호적인 부족들과도 일일이 싸워나가야 했다. 갈리아족은 론 강에서 일대 공격을 해왔고, 한니발은 이들을 격파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알프스 산맥의 갈리아족들이 한니발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그들은 수백 명을 동원해 좁은 길을 막고, 산을 오르는 카르타고군에 바위와 통나무를 굴려댔다. 갈리아족을 맞아 카르타고군은 끊임없이 그들을 격파했으나 많은 피해를 입었다.
험난한 원정으로 카르타고군은 로마군과 만나기도 전부터 엄청난 고생을 했다. 특히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으면서 무려 절반이나 되는 병력을 잃었는데, 보병 3만 8천은 2만으로, 기병 8천 기는 6천 기로 줄어 있었으며 밧줄로 묶어 끌어올리는 등 온갖 고생을 해가면서 끌고 온 전투 코끼리 37마리도 대거 폐사했다. 그래서 소수의 코끼리로는 제대로 된 전술적 운용을 하기 힘들 지경이었다.[13]

어쨌든 한니발은 등정 9일 만에 정상에 올랐고, 이틀 정도 군사들을 휴식시킨 뒤 하산을 시작했다. 하지만 하산에는 훨씬 더 어려운 산행을 하여 내려오는 데만 15일이 걸려서 산을 내려와 마침내 이탈리아 본토에 도착했다. 북이탈리아에 당도하자 그곳의 갈리아 부족들은 알프스의 갈리아 부족들과 달리 한니발을 환영했다. 이들은 로마의 정복에 맞서 싸우고 있는 부족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도 한니발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는 않았다. 한니발의 병력은 3만여 명에 불과해서 결코 많다고 볼 수 없었고 과연 동맹을 맺을만큼 강한 군대가 맞는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니발은 이 지역 부족들에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집정관 스키피오[14]가 한니발을 저지하고자 나섰으나 실패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었음을 뒤늦게 눈치채고 마실리아[15]에서 북이탈리아로 귀환했다. 그는 타키누스에서 한니발과 기병전을 벌였다. 이는 로마 정규군과 한니발군의 첫번째 싸움이었다. 그러나 스키피오의 로마군 기병대는 한니발의 누미디아 기병대에 완패하고 스키피오 본인도 중상을 입었다. 기록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포위되었으나 그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에 의해 구출되었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이 승리하자 갈리아인들은 의심을 거두고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로 한니발은 갈리아족들로부터 원활한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반면, 스키피오는 전투에서 패전하고 중상을 입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한니발을 눈앞에 두고서도 자신의 진영에 틀어박혀 치료에만 전념해야 했다. 한니발은 스키피오가 무력화되었음을 확인하자 점령과 약탈 활동을 급격히 늘렸다. 북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의 세력은 급격히 팽창하고 로마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그 사이에 또 다른 로마 집정관 셈프로니우스와 그의 군대가 한니발을 저지하고자 북이탈리아에 도착했다. 그는 원로원의 훈령을 받아 급히 시칠리아에서 북상한 상황이었다. 셈프로니우스는 스키피오 군과 연합하여 한니발을 조속히 격파하고자 했다. 이는 당시 셈프로니우스가 집정관 임기 말기여서 빨리 군공을 얻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그냥 겨울을 싸움없이 버텨보자고 제안했다. 특히 스키피오는 갈리아인들은 변덕이 심하므로 시간이 지나면 한니발과 갈리아족의 동맹이 와해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군공에 목말랐던 셈프로니우스는 스키피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니발은 셈프로니우스 군대와의 트레비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갈리아인 모두가 한니발의 편에 섰고 로마군은 북이탈리아에서 후퇴했다. 그나마 포 강에 있던 로마 식민지 플라켄티아와 크레모나는 종전까지 함락되지 않고 존속했다. 셈프로니우스는 트레비아 전투의 패전으로 인해 집정관 자리를 잃었다. 그는 로마로 귀국하여 집정관 선거를 주재한 후 원로원 의원 신분으로 되돌아갔다. 스키피오는 원로원의 지시를 받아 그대로 한니발의 본거지인 히스파니아를 공격하러 떠났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실린 사족으로, 이때 한니발은 병사들이 해이해질 것을 우려해 무기 점검을 불시에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무기를 잃어버린 병사들이 몇몇 발생하자 한니발은 이들을 모아두고 "무기를 잃어버린 병사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죽은 자가 먹을 필요는 없다."라고 야단치며 식량을 배급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흘을 내리 굶어 다급해진 병사들은 동료의 것을 훔치려 들었는데, 동료 병사들은 자신의 것을 도둑맞지 않도록 잘 때도 아예 창과 검을 끌어안고 잤다. 그리고 굶은 병사 중에는 나이 어린 소년병도 끼어 있었는데, 한니발이 그 병사에게 "어쩌다 무기를 잃어버렸냐?"고 묻자 병사는 "평소에는 창을 안고 자는데, 눈보라가 심해서 막사로 들어가서 고향 생각을 하다가 그만 창을 잊어버렸습니다."라고 대답했고, 한니발은 "앞으로는 고향 생각을 할 때도 창을 안고 있으라."라고 말하며 무기고로 병사를 데려가 무기를 찾아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 무기고의 벽 한 쪽이 부서졌는데, 덕분에 무기를 분실한 병사들이 자기 무기를 발견하고는 찾아가서 급식을 받았다 한다. 영웅전의 이야기에서는 애초부터 한니발이 순찰 중에 무기 관리를 소홀히 하는 병사들의 무기를 몰래 빼돌려서 병사들에게 경각심을 고취시키려고 이런 연극을 벌였던 것이다.

각설하고, 로마는 한니발을 막기 위해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를 새로운 집정관으로 선출해 파병했다. 이 둘은 당시 원로원의 으뜸가는 인재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플라미니우스는 북이탈리아와 로마를 잇는 플라미니우스 가도를 건설했고, 원로원 의원들의 최종 영예인 감찰관까지 맡았었으며, 평민들의 지지까지 받는 인물이었다. 한니발은 이듬해 봄에 남하를 시작했다. 그러자 두 집정관은 북이탈리아와 중부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의 남하를 저지하고자 했다. 그들은 로마 본토에서 물량을 앞세운 방어전을 계획했다. 따라서 둘은 각기 군대를 이끌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두 가도를 봉쇄한 채 대기했다.

자신이 지형상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한니발은 새로운 주둔지를 찾아 아르노 강 상류의 늪지대로 진군했다. 그런데 그 늪지대는 허리까지 차오르는 지역이 백여 킬로미터나 뻗은 험난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카르타고군은 휴식은 커녕 수면도 없이 3박 4일에 걸친 강행군을 했다. 지체하면 한니발의 행군이 로마군에 들통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카르타고군의 많은 병사들이 과로사하거나 풍토병에 시달렸고 한니발 본인도 눈병을 얻어 애꾸눈이 되었다.[16] 그래도 어쨌든 한니발과 카르타고군은 성공적으로 늪지대를 통과하여 사흘의 휴식을 가졌다.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의 역사가들도 알프스 산맥의 유명함에 가려서 그렇지 실제 난이도는 오히려 이 늪지대 돌파가 더 어렵고 힘들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곧 플라미니우스의 로마군이 한니발을 추격해왔지만 역시나 한니발에게 패배했다. 플라미니우스는 처음에는 게미누스의 지원군을 기다리면서 한니발과의 결전을 미루었다. 하지만 한니발이 지속적으로 약탈과 초토화 작전을 저지르자 초조함을 누르지 못하고 섣부르게 그를 공격했다. 결국 그는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한니발의 매복에 걸려들어 참패했다. 무려 1만 5천이나 되는 병력이 한니발의 손에 궤멸당했다. 곧바로 플라미니우스를 지원하기 위해 로마군 기병 4천여 기가 증파되었지만 이들도 한니발에 의해 전멸당했다. 이는 로마군에 있어, 후일에 칸나이 전투에도 영향을 끼친 뼈아픈 손실이었다. 기세가 오른 한니발은 바로 남부 이탈리아를 향해 진격했다.

플라미니우스의 패배 소식을 들은 로마 정부는 놀라며 파비우스독재관에 임명하여 파견했다. 그런데 파비우스는 한니발과의 결전을 피하며 소극적인 지구전으로 일관했다. 이는 하루빨리 한니발군을 일소하기를 바랐던 로마 원로원과 민중을 실망시켰다. 기병장 미누키우스는 "이 도망자 독재관 때문에 우리 로마군이 전장의 유랑자가 되었다."라며 아예 대놓고 파비우스를 비난했고, 이 일로 병사들의 신임을 얻게 된다. 이에 파비우스의 친구들이 찾아와 충고했으나 파비우스는 "조국을 위하여 쓰는 수치는 수치가 아니며, 독재관인 내 어깨에 조국의 미래가 걸려 있는 한, 어떤 성급한 작전으로도 한니발을 기쁘게 만들 생각이 없다."라며 자신의 지구 전략을 고수했다.

결정적인 작전 실패도 파비우스의 신임에 큰 흠집을 냈다. 파비우스가 한니발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포위한 일이 있었다. 이는 한니발이 외지인의 안내를 잘못 알아듣고 카실리니움 계곡으로 들어간 기회를 파비우스가 놓치지 않고 잡아낸 결과였다. 파비우스는 결사대를 지휘해 카르타고군 1,000여 명을 사살하고 한니발의 군대를 계곡으로 더욱 몰아넣었다.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형세였다. 그러자 한니발은 밤에 황소 2,000마리를 끌어와서 뿔에 짚을 매단 채 불을 붙이고 로마군 진영으로 몰았다. 이로 인해 로마군의 포위망은 와해되었고 한니발군은 탈출했다.

위의 사건으로 파비우스는 로마 정부와 시민들의 신임을 잃었다. 그는 독재관 임기도 연장받지 못 했다. 거기다 파비우스의 신임은 한니발의 계책으로 더욱 추락했다. 한니발은 로마 근방을 공격하면서도 파비우스의 농장은 일부러 건드리지 않았다. 이는 파비우스의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로마를 내부에서 분열시키려고 한 수작이었다. 한니발의 계책은 성공해서 파비우스는 전쟁보다 자신의 영지 보호에 힘쓴다는 누명을 썼다. 그래서 원로원은 다음 해에 선출될 집정관들에게 한니발과의 싸움을 맡기기로 했다. 그동안 한니발은 중부 이탈리아를 가로질러 남부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곡창 지대인 칸나이를 점령했다.

2.2.3. 칸나이 전투

한니발이 칸나이 평야를 점령하자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의 회전이 임박했다. 한니발이 칸나이를 차지한 다음해,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새로운 집정관들이 되었다. 당시 바로는 결전론자였고, 파울루스는 지구전론자였다. 원로원은 8개 로마 군단병과 8개 라틴 군단병, 6천 4백 기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9만 대군을 두 집정관에 맡겼다. 두 집정관은 즉시 칸나이로 진격했다.

그러나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은 로마군을 압도적으로 격파하였다. 이는 한니발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영예이자 로마의 역사적인 대패였다. 한니발은 이 승리로 단숨에 지중해 전역에 자신의 이름을 떨쳤다. 반면, 로마의 상황은 처참했다. 로마군은 9만 명 중 5만 에 이르는 병사가 전사했고, 3만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렇게 증발한 병력은 당시 로마의 가용 병력 1/5에 달했다. 무사히 도망간 로마군은 1만 명도 되지 못 했다. 두 집정관 중 바로는 도주했고 파울루스는 전사했다.

로마가 어마어마한 패전을 하자 로마의 동맹들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칸나이 남쪽의 로마 동맹시들이 가장 빠른 속도로 이탈했다. 심지어는 캄파니아 지역 도시들 몇몇까지 이탈했다. 이 도시들은 로마가 위치한 라티움 지역의 바로 턱밑 지역이자 삼니움 전쟁 때도 함께 해온 오랜 동맹시들이었다. 특히, 카푸아가 한니발 편으로 돌아선 것은 뼈 아팠다. 카푸아는 캄파니아 지방의 맹주이자 이탈리아에서 로마 다음으로 인구가 많고 번영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때 전임 집정관이었던 파비우스가 모범을 보여 명예를 회복했다. 그는 로마 시민들과 원로회를 격려하기 위해 성문에 파수꾼을 세워 사람들이 도망치는 것을 막았다. 의외로 이 일을 계기로 파비우스에 대한 악평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렇게 빨리 로마의 동맹에 균열이 난 이유는 로마가 원래 동맹시들로부터 그다지 환영받지 못 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동맹시들은 로마의 강한 국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로마에 복종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도시의 지배층들은 로마와의 화친을 추구했지만 시민들은 로마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사료에 따르면, 이탈리아 도시들에서는 대개 시민들이 한니발을 지지하고 지배층은 로마와의 동맹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는 로마가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매번 동맹시의 시민들을 보조군으로 대규모 징발해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리품조차도 로마 시민과 동맹시의 지배층에게만 배분되었고, 동맹시의 시민들에게 보상은 없었다. 그래서 동맹시의 시민들은 로마를 증오했다.

2.2.4. 로마의 반격과 전략/전세의 한계에 봉착한 한니발

"역시 신께서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는 않는군요. 승리하는 법을 잘 아시는 장군님이 정작 승리를 활용하는 법은 모르시다니요."
한니발군 기병대장 마하르발[17][18]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에서의 승리로도 로마를 완전히 붕괴시키지는 못했다.

분명 카푸아와 더불어 적지 않은 도시들이 로마로부터 이탈하기는 했다. 그러나 로마와 함께하기로 한 동맹 도시들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이는 각 도시의 지배층이 로마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큰 이유는 동맹에 대한 자치권 보장이였는데, 로마는 전쟁할 때마다 병력과 물자만 지원, 제공해주면 동맹시의 내정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보조군으로 차출되는 시민들만 불만이 있었을뿐, 도시를 좌우지하는 지배층과 로마의 관계는 양호했다.

물론 배신하거나 불복한 동맹시에 대해선 무자비한 보복을 가하여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도 있었다. 위에도 적혔지만 실은 이 쪽이 더 큰 이유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아무리 지배층이 로마에 우호적이라도 이탈리아 도시들이 시민 과두정을 택한 이상 시민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포에니 전쟁 이전과 이후에도 동맹시의 반란이 거듭 일어나는 둥 동맹시 시민들은 항상 불만을 가졌다.

게다가 로마 본국을 공략하는 것도 어려웠다. 일부 역사가들의 주장과 달리 한니발은 두뇌형 무장이었으므로 공성전에도 조예가 있었다. 보통 책략으로 배신자를 만들어 안에서 성문을 열게 하는 쪽을 선호했던 걸 보면 공략전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신경을 많이 쓴 것이다. 어차피 오합지졸 갈리아 용병들에게는 공성전에 순순히 갈려 넣어지기를 기대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한니발의 정치적 계산대로라면 칸나이의 대패로 로마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야 했고 로마의 동맹국들이 죄다 배신하여 자신에게 붙어야 했는데 한니발의 끊임없는 회유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도시들 대부분이 카르타고를 불신하며 로마와의 동맹 서약을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는 포위전을 한다 해도 로마 측 지원군에 의해 오히려 역포위당할 위험이 컸던 것이다.

칸나이에서의 뼈저린 희생 이후 로마군은 전술을 아예 바꾸어 한니발을 곤혹스럽게 했다. 로마의 지배적 여론이었던 화끈하게 맞붙어서 이기자는 강경론은 사그라들고 이제까지 무시당해왔던 주저하는 자 파비우스의 주장에 힘이 실렸다. 한니발이 아무리 유능한들 결국 개인이고, 그가 관리해야 할 병사들과 영토는 그 혼자 관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로마군은 한니발과의 전면전을 철저히 피하고 한니발이 공격하는 도시는 무시로 일관하는 대신, 그가 없는 도시는 바로 공격해 되찾아오고 한니발이 지휘하지 않는 병력은 그가 없다는 게 확인되자마자 달려나가 때려잡았다. 그렇게 로마군은 한니발의 보급을 방해하고 그의 병력을 조금씩 갉아먹어 갔으며, 빼앗긴 땅은 그가 없는 사이 도로 되찾았다. 이렇게 한니발은 추가적인 결정타를 가할 수 없고, 로마도 지구전만을 하다 보니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결국, 전쟁은 소모전의 양상으로 바뀌었고, 한니발은 파비우스의 지구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한니발 개인의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이 미비했던 탓이었다. 사실 카르타고도 한니발에게 지원을 해주지 않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 이후 동생 마고를 보내 본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카르타고 정부도 이에 응했다. 특히 카르타고는 마고에게 보병 1만 5천 명에 기병 1천 2백 기, 전투 코끼리 20마리로 구성된 지원군을 맡겼다. 이 병력은 전투함 60척에게 호위를 받으며 이탈리아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만한 지원군과 물자가 한니발에게 도달하지 못 했던 것이다. 왜냐면 비슷한 시기에 갑자기 이곳저곳에서 카르타고에 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사르데냐 섬에서는 로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원주민이 카르타고 본국에 원조를 요청했다. 반면, 히스파니아에서는 카르타고의 남부 영토에서 대대적인 원주민 반란이 일어났다. 이는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함대가 에브로 강 전투에서 그나이우스 스키피오에게 대패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래서 카르타고 정부는 일단 보병 1만 5천 명과 기병 1천 5백 기를 포함한 새로운 군대를 일으켜 사르데냐로 파견해야 했다. 하스드루발에게도 보병 4천 명과 기병 5백 기를 보내주었다. 각 군대에는 임무를 마치면 이탈리아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카르타고군은 우선 사르데냐를 노렸다. 당시 사르데냐는 로마군의 중요한 식량 보급지였다. 한니발로 인해 이탈리아 본토에서 식량 수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카르타고가 이곳을 점령하면 로마 본국을 더더욱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물론, 로마군도 이를 모를 리가 없어 사르데냐에 대한 방비를 철저히 했다. 특히 제해권을 장악한 로마군은 인근 해역을 철통같이 감시했다. 그래도 운이 따라준 덕분에 카르타고군은 무사히 사르데냐에 상륙했다. 그러나 상륙한 카르타고군은 고작 2만 5천여 명의 병력이어서 로마군에 숫적 우위를 가지지 못 했다.[19] 게다가 로마군의 지휘관들과 병력들이 전반적으로 카르타고군에 비해 우수했다. 그래서 로마군은 코르누스 전투로 사르데냐에 상륙한 카르타고군을 손쉽게 격파했다.

히스파니아에 보낸 카르타고군의 병력 역시 로마군에 격파당했다. 하스드루발이 지휘관으로서 나름 분전했으나 데르토사의 전투에서 로마군에 격파당했다. 이 패배로 이탈리아로 향할 예정이던 마고 바르카의 원군은 스페인으로 항로를 바꾸어야 했다. 당연히 한니발에 대한 지원은 늦어졌다. 다만 코르누스 전투 이후 카르타고 본국의 함대 일부가 이탈리아 로크리에 도착하기는 했다. 한니발은 그나마 누미디아 기병 4천 기와 전투 코끼리 40마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카르타고는 누미디아 시팍스의 반란에 직면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 히스파니아에서 스키피오 형제를 상대하던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아프리카로 소환당했다. 카르타고 본국이 위험에 처하니 더욱 한니발에게 보급을 해줄 여유가 없어졌다. 그나마 히스파니아 전선은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대규모 원군이 도착하여 안정되었다. 그래서 누미디아의 반란을 진압할 수는 있었다.

히스파니아에서 스키피오 형제들은 계속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자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엄청난 돈을 들여서 스키피오 형제와 동맹을 맺고 있던 현지 부족들을 매수했다. 그리하여 현지 부족들의 배신으로 약화된 로마군을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두 스키피오 형제도 전사했다. 그러나 다음해에 곧바로 스키피오 형제 중 동생의 아들이자 형의 조카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침입해 카르타고 노바를 점령했다. 젊은 스키피오는 후대의 명성대로 엄청난 명장이었다. 그와 맞선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모두 패배했다. 히스파니아 주둔군을 돕기 위해 카르타고 본국은 마지막 이탈리아 원정 병력까지 모두 히스파니아에 파견했다.

이렇듯, 카르타고는 한니발을 지원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나 그럴 여력이 남아돌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면 다른 전선에서 한니발 이외의 장군들이 로마군에 계속 패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닥치는 대로 가용 병력을 동원해서 구멍 난 전장에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당장의 급한 불을 끄느라 한니발에 대한 지원이 기약 없이 연기되고 말았다. 한니발의 공적을 시기한 정적들이 고의로 지원을 하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으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료에 따르면, 당시 카르타고의 의회에서 대다수의 의원들이 한니발이 거둔 승리들에 고무되어 어떻게든 그에게 지원을 보내려 애를 쓰고 전쟁을 확대하고자 했다. 소수의 소장파 의원들만이 로마와 협상하자는 의견을 제시했을 뿐이다. 한마디로 카르타고는 한니발에게 충분히 열의를 다한 지원을 했지만, 그 지원이 한니발에게 도달한 건 기원전 214년 딱 1번 뿐이었다.

로마 역시 사실상의 총력전을 벌이고 있었다. 로마는 해마다 20개 군단씩 편성하여 각지에서 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로마는 한니발을 상대로는 전투를 피하면서 많은 병력을 보전하고 카르타고 식민지를 공략하는 전략을 취했다. 병력의 양질에서 밀리는 카르타고는 편성 → 몰살 → 재편성 식의 손실을 계속 감당해야 했다.

결국, 한니발이 지원을 받지 못 한 근본적인 원인은 카르타고군의 전반적인 전투력이 로마군에 비해 열세했다는 데 있다. 한니발을 제외하면 당시 카르타고군은 병력의 규모, 병사들의 숙련도, 지휘관의 능력까지 총체적으로 로마군에 비해 뒤떨어졌다. 그래서 카르타고는 당장 로마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전선에 가용 자원을 쏟아부어야만 했다. 이는 한니발이 받아야 했을 자원까지 잠식해버렸다. 가뜩이나 적에 비해 물량이 밀리는데도 카르타고군은 병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는 카르타고의 지휘관들이 로마군 지휘관들에 비해 지휘력이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소수의 승리를 제외하면 로마군에 연패하며 병력과 물자를 소모하기만 했다.[20]

그 와중에도 한니발만은 로마군을 회전에서 연파했지만, 그래도 전황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칸나이 전투 이후에도 한니발은 이탈리아 중부를 초토화하고 6개 군단을 연이어 전멸시키는 대활약을 했다. 기원전 212년 실라루스 전투에서는 매복으로 3개 군단에 해당되는 1만 5천여 명의 병력을 전멸시키고 그 뒤 헤르도니아에서 3개 군단을 더 괴멸시켰다. 그러나 한니발이 이탈리아 남부의 타렌툼 근처로 내려가자 로마는 그 틈을 노려 한니발이 휩쓸고 간 지역들을 수복했다. 더욱이 두 명의 집정관들이 5만에 달하는 6개 로마 군단병과 6개의 동맹시 군단을 동원해 북부의 맹주였던 도시 카푸아를 포위하였다.

이에 한니발은 로마군과의 결전을 노리고 다시 북상했지만 로마군은 역시나 회전을 피했다. 그래서 한니발은 코끼리를 앞세워 로마군의 카푸아 포위망을 와해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로마군이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지켜 난관에 부딪혔다. 이때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지휘관인 두 로마 집정관 중 한 명이 창에 관통상을 입을 정도였다. 포위망이 풀리지 않자, 한니발은 로마를 직접 공격할 것이라고 거짓 소식을 퍼트렸다. 한니발은 이러면 로마를 방어하기 위해 로마군이 카푸아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기대했다.[21] 그럼에도 로마군은 포위를 풀지 않았다. 사실 로마는 매우 견고한 성벽에 의해 방어되고 있었기에 로마군은 안심하고 포위를 지속할 수 있었다.

끝내 카푸아는 다시 로마에 함락됐다. 이때 카푸아의 배신을 주도한 카푸아 원로원 의원들은 다수가 자살했으며, 살아남은 의원들도 로마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리고 배신을 한 대가로 카푸아는 로마의 동맹국에서 속주로 격하되었다.

로마가 카푸아를 탈환한 이후 이탈리아의 전황은 크게 악화되었다. 타렌툼도 친(親) 로마계의 정치가들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의 동맹에 복귀했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2년 만에 점령당했다. 이 와중에 시라쿠사를 구원하기 위해 상륙한 카르타고군은 또 전멸했다.

설상가상으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군을 궤멸시켰다. 히스파니아에 남아 있던 한니발의 막냇동생 마고와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여전히 7만이 넘는 카르타고군 병력을 보유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스키피오가 이끄는 4만 8천의 로마군과 회전을 벌였으나 일리파 전투에서 전멸했다. 이로써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군은 일소되었다. 스키피오가 일리파 전투에서 거둔 군사적 성과는 칸나이 전투와 비견될 정도로 대단했다. 스키피오에게 패배한 하스드루발은 히스파니아를 포기하고 아예 이탈리아에 있는 형에게 합류하기 위해 남은 부대를 이끌고 갈리아를 거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향했다.

한니발은 한니발을 고립시키고 그 사이 카르타고의 식민지를 평정한다는 로마의 대전략에 점차 수세에 몰렸고 로마 역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고는 있었으나 한니발에게 입은 손실이 누적되어 전쟁 수행에 한계에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한니발과 로마 모두 하스드루발이 지원군을 이끌고 한니발에게 향한다는 급보를 접했고, 전쟁의 큰 변수가 될 소식에 한니발은 동생과 합류하기 위해, 그리고 로마는 당연히 이를 저지하기 위해 움직인다.

그러나 한니발은 여기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알프스를 넘느라 고생한 자신의 경험으로 미뤄보아 하스드루발이 알프스를 넘는 데 오래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여 하스드루발과 아슬아슬한 시점에서 조우할 수 있도록 북상을 늦춘 것이다.[22] 그런데 한니발의 예상과 달리 하스드루발은 형보다 훨씬 수월하게 알프스를 넘은 상태였다. 일단 겨울이 아니었고, 한니발이 주변의 갈리아족들을 대부분 우군으로 포섭해놓았던 결과였다. 오히려 하스드루발은 우호적인 갈리아인들로부터 추가로 병력 지원까지 받아서 병력이 5만으로 늘었다.

그 바람에 한니발의 예상보다 일찍 이탈리아에 도착한 하스드루발의 전령이 한니발에게 가다가 로마군에 의해 붙잡혔다. 하스드루발의 편지를 입수한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바로 정예병 보병 6천 명과 기병 1천 기를 이끌고 신속히 하스드루발의 진격로를 막았다. 거기에 리비우스의 로마군 3만여 명까지 합류해 대군이 하스드루발을 저지했다. 양군은 북이탈리아의 메타우루스 강변에서 격전을 벌였다. 네로에 의해 카르타고군은 궤멸당하고 하스드루발도 전사했다. 결국, 전쟁의 큰 변수가 될 수 있었던 마지막 보급과 지원군도 한니발에 당도하지 못 했다.

그 이후에 한니발의 전황이 워낙 불리해져서 한니발을 지지하던 많은 이탈리아 도시들이 한니발을 배신하고 로마 지지로 돌아섰다. 결국 한니발은 이탈리아 장화 발 끝인 브루티움으로 몰렸다.

2.2.5.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침공

전세가 크게 호전되자 로마는 카르타고 본토 공격을 계획했다. 그러나 의외로 원로원은 이에 회의적이었다. 원로원의 걱정은 "만일 적지 한가운데 쳐들어가서 패배하면 어떻게 하느냐?"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집정관 레굴루스가 카르타고 원정에서 실패한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자신만만히 공격 의사를 타진했고, 그 자신감을 뒷받침할 만한 전공을 히스파니아에서 쌓은 상태이기도 했다. 결국 원로원은 이례적으로 불과 30세였던 그를 시칠리아 담당 집정관으로 임명했다. 이는 로마가 정규군을 편성해 주진 않겠지만, 스키피오가 직접 군대를 모집하는 것은 허용하겠다는 뜻이었다. 스키피오의 명성을 듣고 다수의 신병들이 그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스키피오는 비교적 손쉽게 군대를 편성할 수 있었다.

스키피오의 침공이 임박하자 카르타고는 더욱 적극적으로 한니발에게 물자 보급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카르타고군은 로마 해군의 해상 봉쇄를 뚫을 수 없었다. 간신히 이 감시를 피해 한니발의 동생인 마고가 이탈리아 북부 제노바에 상륙한 적도 있다. 하지만 마고도 바로 한니발에게 향하지 못 하고 그곳의 주둔 로마군과 싸워야 했다. 결국 마고도 패배하고 제노바에 고립되었다.

스키피오는 아프리카에 상륙해 카르타고 침공을 본격적으로 개시했다. 그는 마사에실리족의 왕자 마시니사와 과거 카르타고에 반란을 일으킨 전력이 있었던 마실리 부족의 왕 시팍스를 동맹군으로 회유했다. 시팍스는 처음에는 스키피오와 동맹을 맺었으나 카르타고의 공작으로 카르타고인 미녀[23]를 아내로 맞은 뒤 카르타고 편에 다시 붙었다. 이후 스키피오는 도망쳐나온 마시니사와 동맹을 맺고 우티카에서 시팍스, 카르타고 연합군을 격파해버렸다.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시팍스와 함께 바그라데스에서 다시 한 번 대군을 이끌고 스키피오와 마시니사 연합군 상대로 복수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역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스키피오는 누미디아 수도 키르타를 공격해 완전히 함락시켰다. 그는 시팍스를 잡아가두고 마시니사를 누미디아 왕으로 앉혔다.[24] 이로써 스키피오는 누미디아를 확실히 자기 편으로 만들었고, 누미디아 기병대까지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스키피오가 연이어 승리를 거두자 카르타고는 스키피오와 강화를 맺었다. 이때의 강화 조건은 꽤나 온건했다. 다른 식민지 손실없이 제해권만을 로마에 양도하는 조약이었다. 조약이 이토록 관대했던 것은 한니발이 상당한 병력을 가지고 이탈리아에 아직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이때 카르타고는 그야말로 멸망 직전이었다. 사방의 식민지는 몽땅 잃었고, 핵심 동맹국인 누미디아는 로마에 붙었으며, 아프리카 영토까지 날아갈 상황이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단지 한니발이 철수해주는 것만으로 아프리카에서 아예 손 떼겠다고 제안했다. 그만큼 로마가 한니발에 대해 가진 두려움은 컸다.

그런데 한니발이 건재하다는 소식을 듣자 카르타고 원로원의 과격파가 일방적으로 다시 전쟁을 결정했다. 그것도 모자라 강화를 체결하고 돌아가던 로마 사절단을 기습해 살해하기까지 했다. 카르타고 온건파 총수 한노는 이들을 비겁하고 어리석다며 크게 질책했다. 하지만 과격파는 한니발이 돌아오니까 걱정이 없다며 큰소리만 쳤다. 그들은 너무 감정적이었고, 지나치게 한니발만 믿었으며, 전략적인 식견도 결여됐다.

한니발은 마고와 함께 귀국했다. 그러나 마고는 귀국 도중 이전에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한니발의 귀국 사실에 고무된 카르타고 원로원은 과격파가 실권을 이미 장악한 상태였다. 로마 사절단 공격을 비난한 온건파들도 과격파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강화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한니발에게 군대를 맡겼다.

그런데 정작 한니발은 전쟁의 승패는 이미 났고 강화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이 소식을 듣자 조약을 복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마군과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에 스키피오에게 회담을 요청하여 다시 한 번 강화를 제안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이전의 강화를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은 카르타고였기 때문이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가 다시 협상을 요청하는 것은 도의에 어긋나고 더이상 카르타고를 믿을 수도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한니발은 카르타고 강경파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이 카르타고군 총사령관으로서 조약을 직접 보증하겠다고 답했다. 그는 카르타고는 본토만 지켜낼 수 있으면 해외 식민지 대부분을 로마에 양도할 수도 있다고도 덧붙였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진심으로 강화를 원한다는 것과 카르타고 내부의 파벌 싸움 때문에 불가피하게 일이 틀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독단적으로 조약을 맺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이미 로마 원로원이 전쟁 명령을 내린 뒤였다. 결국은 자마에서 양국의 최종 결전이 벌어졌다.
한니발이 마시니사에게 협상의 중재를 부탁하려했다는 일설도 있다. 한니발은 오래 전부터 마시니사와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 협상 전에 한니발은 마시니사를 만날 수 없겠느냐고 스키피오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마시니사와 한니발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니발의 부탁을 거절했다. 한니발은 카르타고를 대신해 자국의 행위를 마시니사에게 사과했다. 카르타고는 그의 약혼녀를 강제로 빼앗고 정적이었던 시팍스를 지원한 데다 그의 마사에실리족 왕국을 파괴했었다. 그의 사과는 스키피오를 통해 마시니사에게 전달되었다. 마시니사는 한니발에게는 악감정이 없고 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답했다.

2.2.6. 자마 전투

카르타고는 가용 병력을 긁어모아 군을 편성했다. 카르타고의 용병들과 시민병들은 질적으로 열악했지만, 한니발의 직속부대 15,000명은 지중해 최강의 보병대였다. 한니발이 귀환할 때 선박이 부족해서 병력을 가려 뽑아야 했으므로, 결과적으로 이 15,000명은 한니발의 병력 중 가장 우수한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통념과 달리 카르타고에 기병은 부족했다. 당시 카르타고의 주요 동맹국이었던 누미디아가 배반을 해서 더 이상 누미디아 기병대도 제공받지 못 했다. 카르타고에 신성 기병대가 있었지만 정치적 이유로 투입되지 못 했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카르타고 원로원은 한니발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고 전쟁 승리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니발에 대해 정치적 방해공작을 할 세력은 없었다. 당장 성난 시민들도 이런 방해를 가만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스드루발 기스코도 스키피오에게 연달아 패한 후 시민들에게 맞아죽을까봐 패전 후 목숨을 끊을 정도였다. 따라서 한니발이 당시 보유한 병력은 말 그대로 카르타고의 총력이었다.[25]

한니발의 카르타고군과 스키피오의 로마군은 자마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지만, 끝내 한니발은 대패했다. 이는 로마군이 한니발에게 그동안의 굴욕을 완벽히 되갚은 것이었다. 이 전투로 카르타고의 패전은 확정되었다.

2.2.7. 정리

한니발이 로마에 몰고 온 위기와 공포는 굉장했다. 한니발이 무리해서라도 이탈리아 본토로 쳐들어간 것은 과감하면서도 뛰어난 결정이었다. 그 덕분에 한니발은 정말로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한니발이 이탈리아의 로마군을 혼란에 빠트리는 바람에 삼니움족이 지배하던 중부, 그리스계가 지배하던 남부 지역이 일시적으로나마 로마에서 이탈했다. 이렇게 동맹이 균열되다 보니 로마는 본토의 자원을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충분히 동원할 수 없었다. 게다가 로마의 정예 병력 다수가 카르타고와의 전장이 아닌 이탈리아 본토에 묶여 있어야 했다. 사실상 로마는 반신불수가 되었고, 로마의 해외 병력은 고립되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이렇게 한니발이 만든 엄청난 전황을 유지하지 못 하고 끝내 패전했다. 한니발의 계획대로라면, 로마가 혼란에 빠진 사이, 카르타고군이 로마의 외곽 식민지들을 병합했어야 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바로 가까운 시칠리아 섬조차 제대로 점령하지 못 했다. 게다가 한니발을 지원했어야 할 병력조차도 카르타고 영역 방어에만 급급해서 히스파니아에 발이 묶였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한니발과 본국 사이의 의견 불일치 때문은 아니었다. 한니발의 계획을 실현하기에 카르타고는 군사적 역량이 부족했다. 카르타고군은 양적, 질적으로 로마군에 비해 크게 뒤떨어졌다. 본토의 지원을 받지 못 해 약화된 로마군조차도 카르타고는 당해내지 못 했다.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 이후 바로 로마를 공격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서방의 역사학자들마다 논란이 있다. 어떤 역사학자는 한니발이 로마시를 공격하지 않은 것이 그의 전략적 실책이었다고 한다. 칸나이 전투 직후는 명실상부 로마가 가장 큰 위기에 빠졌던 순간이다. 그러므로 한니발이 전쟁 동안 로마를 공격해야 했다면 저 순간을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26][27]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안일한 시각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많다. 로마는 수도였던 만큼 엄청난 대도시였던 데다 성곽으로 견고하게 방어되고 있었다. 그런데 한니발의 병력과 장비로는 대규모 공성전을 감당하기 무리였다. 실제로 한니발도 이 문제로 인해서 로마를 공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정말로 로마가 두고두고 후회한 것은 진작에 사군툼에서 한니발을 저지하지 않은 것이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뒤, 마케도니아가 로마의 동맹이었던 그리스 지역의 도시국가들에 집적거릴 때 이들은 로마에 원군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민회가 "16년 동안 싸움질에 질렸는데 또 전쟁이냐?"며 파병을 거부했으나, "진즉에 사군툼에 원군을 보냈으면 이탈리아에서 고생 안 했을 거요. 또 다시 싸움을 피한다고 과거에 했었던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시오?"라는 원로원의 한 마디에 곧바로 입장을 바꿔 지원군 파병에 동의할 정도였다. 그리고 해당 그리스 지역의 도시국가들은 한니발 전쟁 당시 카르타고의 동맹이었던 마케도니아를 견제하여 로마가 양면전쟁에 빠져드는 것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에 함부로 외면하기도 곤란했다.

물론 사군툼에서 로마가 성공적으로 한니발을 저지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로마가 사군툼에 원군을 파병했으면 주요 전장은 이탈리아가 아닌 히스파니아가 되었을 것이다. 로마는 한니발의 공격으로부터 무사한 이탈리아 본토에서 수월하게 물자와 병력을 동원했을 것이고 한니발도 마찬가지로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 영역에서 보급을 받아가며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전쟁이 전개된다면, 아마 히스파니아에서야 한니발이 계속 로마군을 격파해가며 우세를 점했겠지만, 로마군의 견제를 뚫고 알프스를 건너 이탈리아 반도를 공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제해권이 로마에 있는 상황에서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지 못 하는 정도로 묶어두는 건 로마 입장에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로마는 본토가 무사했을 것이고, 따라서 히스파니아에서 방어를 굳힐지, 아니면 역으로 카르타고 본토를 침공할 것인지 결정하는 등 전쟁의 주도권은 계속 로마가 쥐고 있었을 것이다.[28]

2.3. 전후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이 대패한 뒤, 카르타고는 훨씬 가혹한 조건으로 강화해야 했다. 카르타고는 로마에 향후 50년에 걸쳐 1만 탈란트의 거액을 전쟁배상금으로 납부해야 하며[29] 카르타고는 모든 식민지제해권을 로마에 빼앗겼고, 엄청난 군축도 강요받았다. 카르타고는 해양 국가임에도 3단층 갤리선 10척만 남기고 모든 함선과 해군 병력을 해체하라고까지 강요받았다. 또한 모든 전투 코끼리를 로마에 압수당하고, 함대로마군이 확실히 다 탔는지 감시하는 가운데 불태워야 하며 아프리카 밖의 모든 나라와 동맹 체결 금지 및, 로마의 허락 없이는 어떤 전쟁을 벌이는 것도 금지당했다. 심지어 외침이 임박해도 로마의 허락 없이는 군대를 소집할 수 없었다. 사실상 로마가 카르타고의 생사여탈권을 완전히 손에 넣은 것이다. 결국 이 조항은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멸망하는 빌미가 된다.

한니발은 조국의 생존을 위해 이 모든 가혹한 조건을 카르타고 대표로서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러자 로마는 정말 의외로 한니발의 신병을 로마 측에 넘기라는 요구는 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를 거두면 패배한 적장은 개선식 최대의 구경거리로서 퍼레이드에 끌려 나와 사슬에 묶인 채로 로마 시내에서 조리돌림당하는 게 국룰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로마를 멸망 위기까지 몰아넣으며 뼛속 깊이 원한을 샀던 한니발이 의외로 이런 관대한 대우를 받은 데에는 한니발을 끝내 패배시킨 젊은 맞수, 로마의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의중이 반영되었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한편 카르타고는 자국의 패장을 상당히 가혹하게 대하는 전통이 있었고, 승산이 희박한 전투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석패하고 만 장군이라도 처벌을 피하기는 어려웠으며 처형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후대의 여러 사료들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한 뒤 나라가 로마의 사실상 속국으로 전락한 것에 분노한 카르타고인들이 로마를 점령하는 데 실패한 무능과 이탈리아에서 얻은 전리품을 멋대로 사용한 탐욕의 죄로 한니발을 군법재판에 회부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모든 혐의에 무죄를 선고받은 한니발이 201년 카르타고 집정관(= 수페트)으로 선출되면서, 한니발의 책임은 유야무야되었다.[30] 한니발은 아직 45 ~ 46세에 불과해서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이기도 했다. 한니발은 카르타고를 수습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일했다. 그는 내심 국력을 회복하여 로마에 복수할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후세까지 전해지는 얼마 안 되는 관련 사료를 종합해보면, 한니발은 로마 원정군을 이끌던 시절에 연마한 행정 기술을 발휘하여 그가 만약 평생 전쟁이라곤 없는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더라도, 카르타고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 되었으리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집정관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평민들을 굶주리지 않게 하면서도 로마에 전쟁배상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국가 재정을 건실하게 체계화했다. 카르타고가 세금을 늘리지 않고 배상금을 지불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감사에서 확인된 후, 한니발은 부패를 제거하고 횡령한 자금을 회수하기 위한 국가 재정의 재편을 시작했다. 카르타고 상선단이 다시금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여러 지역에서 교역할 수 있도록 새로운 상업망을 구축하는 데에도 성공했고, 한니발의 개혁이 계속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로마에 50년간 갚아야 할 전쟁배상금 1만 탈란트를 10년 만에 갚을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이 나올 정도였다.

자마 전투에서 승리한 지 7년 후, 한니발이 이끈 카르타고의 새로운 번영과 부흥에 놀란 로마 원로원은 한니발이 셀레우코스 제국안티오코스 3세와 접촉할까 봐 우려하고 있었는데, 카르타고에서 "한니발이 로마의 적을 돕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절단이 온 것이다. 뿐만 아나라 "로마의 가장 큰 원수(= 한니발)가 지중해 동방의 패자 안티오코스 3세와 결탁하여 또 다시 로마를 뒤에서 찌르려 한다."고 중상모략하는 편지들이 다름 아닌 카르타고에서 로마 원로원으로 줄기차게 쏟아져 들어왔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개혁 과정에서 한니발은 또 다시 탐욕스러운 카르타고 귀족들에게 분노를 샀기 때문이었는데, 한니발이 그들이 틀어쥔 권력의 일부를 평민들에게 나눠주려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과두제적인 독직의 기회를 제거한 재정 개혁으로 인해 한니발에게는 많은 적들이 생겼다.

물론 로마 원로원에도 불구대천의 원수가 전후에 십자가에 매달리지도, 쇠사슬에 묶여 개선식에 끌려나오지도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의원이 한가득이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한니발 때문에 가족친지를 잃었던 이들도 수두룩했다. 로마의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그가 존경하는 패장을 변호하고자 애썼지만, 그의 영향력은 약해지고 있었고 한니발이 안티오코스와 결탁했다고 믿고 싶어하는 의원들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안티오코스와 결탁하여 로마를 침공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한니발을 체포, 처벌하라는 로마 원로원의 요구가 도착하자 카르타고 원로원의 반(反) 한니발파들은 더 없이 기뻐하며 즉시 한니발을 범법자이자 원로원의 적으로 선포했지만 눈치빠른 한니발은 이미 카르타고를 떠난 상태였다. 심지어 카르타고의 귀족들은 로마의 지원을 받아 한니발을 암살하려고까지 했다.

그러자 절호의 기회를 놓친 그의 정적들은 대신에 그가 살던 카르타고 시내의 작은 집을 불사르는 것으로 분풀이를 했다. 이제는 남쪽 시골의 농장에 묻혀, 살아갈 길조차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한니발은 레바논 해안에 있는 모든 페니키아 민족의 어머니 도시 티레로 가는 페니키아 무역선 한 척에 몸을 실어야 했다. 그는 외국의 지원을 받아 카르타고로 귀환할 것을 기약하며 망명길에 올랐다.[31]

한니발은 티레를 거친 후 시리아로 가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사 고문이 되었지만, 그곳에서도 일은 수월하게 풀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한니발을 환영했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안티오코스 3세는 육전 명장인 한니발에게 해군 지휘를 맡기고 자신이 육군을 지휘했다가 둘 다 패배했다. 리비우스의《로마사》에 따르면 안티오코스 3세는 처음에는 한니발에게 독립된 군대를 주려고 했었다. 그러나 아에톨리아 출신 신하였던 토아스가 로마를 상대로 승리하면 한니발은 왕에게도 반기를 들 것이라며 반대했다. 결국 안티오코스 3세는 계획을 철회했다. 실제로 위만처럼 망명한 타국 장군이 반기를 드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판단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굳이 안티오코스 3세의 실수를 꼽아보라면, 지상전의 귀재였던 한니발을 해군 지휘에 낭비했다는 것이다. 한니발은 군사적으로는 괴수라서 의외로 해전 지휘력도 부족하지는 않았다. 그는 훗날 비티니아 해군을 지휘하여 로마 해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한니발의 주특기인 지상전 지휘를 그에게 맡기는 것이 백번 나았을 것이다. 로마도 한니발을 두려워해서 스키피오의 동생을 사령관으로 뽑고 스키피오 본인을 동행시켜 파병할 정도였다.[32] 하지만 정작 상대는 한니발이 아닌 안티오코스 3세였다. 안티오코스 3세도 나름대로 유명한 왕이었고 인도 원정까지 지휘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로마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장군으로 뽑히는 스키피오와 그의 로마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안티오코스 3세가 준비한 전력 자체는 꽤나 대단했다. 그는 마그네시아 전투 직전 한니발에게 그의 군대를 보여주고 평가시켰다. 그는 "이 정도면 로마군과 맞설 수 있겠냐?"고 한니발에게 물었는데, 한니발은 "로마놈들이 탐욕스럽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는다."라고 대답했다. 안티오코스 3세의 군대는 헬레니즘 팔랑크스 보병과 로마 기병대를 능가하는 동방의 카타프락토이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망치와 모루 전술에 쓸 최강의 모루최강의 망치를 준비해둔 것이었다. 당연히 한니발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군대의 역량과 별개로 안티오코스 3세의 형편없는 지휘로 인해 셀레우코스군은 패배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군 기병을 격파한 뒤 로마군 보병 대열의 측면을 공격하는 대신 로마군 본진을 공격했다. 그런데 2천 명 남짓한 수비대에게 반격을 당하자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전장에서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왕의 뒤를 따라 카타프락토이 3천 기도 전장에서 이탈했다. 이내 셀레우코스군은 양익이 무너지고 포위 섬멸당했다.[33]

2.4. 최후

셀레우코스가 패망하자 한니발은 타국을 전전하며 도망쳤다. 그는 우선 아르메니아로 도망갔다. 그런데 아르메니아 왕 아르탁세스 1세가 로마와 강화하자 다시 비티니아로 망명했다. 한니발은 비티니아에서는 능력을 인정받아 장군이 되었고 비티니아 해군을 지휘하여 페르가몬 왕국에우메네스 2세를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로마의 세력이 어느덧 비티니아까지 미쳤다.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활약했던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비티니아에 망명한 한니발을 잡기 위해 비티니아로 파견되었다. 다만 그것이 플라미니누스의 독단인지, 원로원의 지시를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당대에 플라미니누스의 행동이 과하다고 비판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역시 원로원이 배후에 있었을 가능성도 높다. 무엇보다 한니발을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로마인도 적지 않았다.

결국 비티니아 왕 프루시아스 1세는 티투스 플라미니누스의 요구를 받아주었고, 이는 한니발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다만 한니발이 죽은 정확한 연도와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183 ~ 181년 사이라고 추정되며, 가장 유명하고 유력한 설은 자살이다. 한니발이 자신이 로마에 넘겨진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마르마라 해의 해안가에서 독을 마시고 죽었다는 것이다.[34] 이처럼 한니발의 죽음에 대한 설은 후대의 인물인 플루타르코스가 특별히 정리할 정도로 로마 시대부터 논란거리였다. 어찌 됐든 간에 한니발이 로마에 잡혀가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며, 한니발의 목숨을 거두러 찾아온 플라미니누스는 기원전 174년에 사망하였다. #

3. 능력

3.1.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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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강대국인 로마군을 농락했고 로마를 멸망으로 까지 몰아세운 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로 개인의 능력으로 카르타고의 힘을 지중해에 떨쳤고 카르타고를 상징하는 위치에까지 올랐다. 전략의 아버지[35]라고 불릴 정도로 서구 전쟁사에 있어서 용병술을 크게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명장으로 찬양받는다. 심지어 현대 사관학교 교육에서도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역시 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하나로 꼽히는 나폴레옹도 그가 존경하는 7대 명장[36]에 한니발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장군 개인이 전쟁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의 한계를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걸출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그의 조국은 끝내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지휘관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총체적인 국력의 차이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전쟁은 혼자서 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진리의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니발은 천재적인 전술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3세망치와 모루 전술을 더욱 발전시켜 양익 포위 전술(double pincer movement tactic)을 고안했다. 이는 군사 전술사에서 매우 중대한 진보였다. 물론 한니발이 처음으로 망치와 모루 전술을 고안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칸나이에서 보여준 양익 포위는 고대 전쟁사를 통틀어 가장 정석적이고 완벽한 형태의 망치와 모루 전술이었다. 그래서 망치와 모루 전술을 가르치는 후대의 사람들은 항상 한니발을 예시로 든다. 완벽한 전투 한 번으로 전술사에 길이 남은 위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한니발이 무조건 알렉산드로스 3세보다 전술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알렉산드로스 3세 또한 아버지 필리포스 2세망치와 모루 전술을 더욱 발전시킨 위인이었다. 게다가 그는 아군보다 적군이 두 배의 기병을 지닌 상황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한니발은 로마를 상대로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항상 기병 전력은 로마보다 우위였다. 더욱이 점령지의 숫자와 넓이 등 전략적 성과도 상당히 차이난다. 게다가 원정 거리와 보급도 알렉산드로스가 한니발보다 훨씬 더 길었다. 그리스에서 파키스탄까지의 거리를 보면 알 수 있다.

한니발을 알렉산드로스보다 높게 평가할 수 있는 점은 전술의 정석을 가장 완벽하게 실전에서 구사했다는 것이다.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를 보면 알렉산드로스의 승리에는 전술만이 아니라 그의 개인적인 능력과 카리스마도 크게 작용했다. 알렉산드로스를 흉내내는 것은 한니발을 따라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즉, 개인의 역량은 알렉산드로스가 더 위였는지도 모르지만 전술 스승으로서는 한니발이 더 나았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한니발은 전술만이 아니라 전략에 대해서도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많이 회자되었다. 그는 적과 자신의 전력차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결단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 유명한 알프스 산맥 행군도 그의 과감한 판단으로 실행한 것이다. 이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로마의 본토를 기습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막힌 우회 기동으로 성공적으로 로마의 핵심부에 안착했다.

3.1.1. 비판

다만, 일각에서는 한니발의 전략적 안목은 그다지 우수하지 않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우선, 알프스를 넘어 로마의 중심부를 친다는 대전략이 그렇게 특출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다. 주변부를 피해 중심부를 직접 타격한다는 발상은 그리 특출날 것 없이 상당히 흔했다. 고대 그리스부터 살펴봐도 아테네를 안 치고 트라키아를 먼저 친 브라시다스, 시칠리아의 카르타고군을 격멸하는 대신 아프리카 본토 상륙을 감행한 참주 아가스토클레스 등이 있다.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공격한 것도 한니발이 최초가 아니다. 폴리비오스의 언급에 따르면 한니발 이전에도 켈트족들이 여러 번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공격했다.

게다가 한니발이 이탈리아를 공격한 것 자체가 무리수였다는 시각도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보급의 어려움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물론, 한니발의 계획은 자신이 이탈리아를 유린하는 사이 카르타고가 로마 외곽을 점령하면서 자신에게 해상 보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르타고에는 로마의 해군을 뚫고 한니발에게 보급을 할 역량이 없었다. 즉, 한니발은 자국과 적국의 격차가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가늠하지 못 한 것이다. 카르타고의 보급이 어려워지자 한니발의 이탈리아 공격은 뒤가 없고 실패가 예정된 작전이 되었다. 이는 아무리 한니발이 잘 싸우고 이탈리아에서 오래 버텨도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니발의 본토 기습 전략이라는 것의 실체에 대한 비판도 많다. 애초에 한니발의 기습은 실패했기 때문이다. 알프스 산맥은 험준하기는 하지만 한니발이 최초로 넘은 것은 아니다. 이미 켈트족이 수차례 알프스를 넘어 로마의 영토를 습격하고 약탈한 바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는 한니발이 알프스를 통과할 수 있음을 충분히 감안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의 진격을 알아챘다. 결과적으로 한니발은 어떻게든 로마 본토에 진입해내기는 했다. 하지만 이는 그가 추구한 기습 효과 덕분은 아니었다.

게다가 알프스를 넘으며 소모한 병력도 상당하다. 로마의 프로파간다일수도 있겠지만 무려 1/3을 소모했는데, 이 정도면 현대전에선 전멸이라고 보며 고대로서도 엄청난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한니발은 가뜩이나 적은 원정군이 더욱 적어지는 결과를 맞이했다.

3.1.2. 반론

우선 한니발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는 걸 알 필요가 있다. 해상을 통한 직접 이탈리아 상륙은 로마의 해군력 때문에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전장을 이베리아 반도에 한정 짓거나 그곳에서부터 서서히 진출해나가는 건 보급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카르타고를 월등히 압도하는 로마의 동원력[37][38]을 고갈시키는 게 불가능하다. 이 경우 전쟁은 소모전으로 흘러가게 되고, 이변이 없는 한 자원이 많은 로마 쪽이 승리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렇다고 전쟁을 안 한다는 선택지 또한 고를 수 없었다. 한니발 개인의 원한을 떠나서, 카르타고보다 몇 배나 국력이 강한 로마는 지속적인 팽창 정책을 펼치고 있었고[39], 이를 방치하면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힘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니발 입장에서는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며 동시에 기울어진 국력차를 극복하고 최종적인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40][41] 한니발은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인들이 이미 로마와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 그들이 자신과 합류할 것을 기대했으며[42]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을 분석해서 굳이 로마 연합에 묶여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상당수의 동맹국들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로마가 칸나이에서 엄청난 패배를 당하자, 실제로 남부 이탈리아의 동맹시들 상당수는 로마를 배신하고 한니발 편에 붙었다.[43]

그리고 위 목차의 본토 기습 전략을 지적한 부분은 한니발의 목적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한니발의 목적은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함으로써, 로마와 동맹시 사이의 정치적 관계를 깨뜨려 로마의 동원체제를 붕괴시키려는 것이었다. 로마가 엄청난 군사적 우위를 갖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정치적 장치 덕분이기 때문이다.[44] 한니발이 피해야 할 상황은 알프스 하산 직후에 지친 상태에서 로마군에게 기습당하는 것이지, 로마에 알프스 입산 자체를 들키지 않을 필요까진 없었다.

무엇보다 한니발은 이탈리아 본토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한니발을 저지하기 위해 마실리아에 상륙했다가, 자신이 너무 늦게 도착했다는 걸 알고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올 걸 대비하여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두 개 군단 병력을 지휘하기 위해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한니발이 북 이탈리아의 평지에 도착해 약간의 휴식을 취하는 걸 막지 못했고, BC 218년 티키누스 강에서 끝내 패해 포 강 이남으로 후퇴하게 된다.[45] 중요한건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는다는 소식에 대한 은폐 여부가 아니라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는 속도였고 실제로 한니발은 알프스를 단 16일 만에 돌파하면서 목표를 달성하는데 성공한다.

뿐만 아니라 한니발 자신이 알프스를 최초로 넘었노라 선전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 그가 최초로 넘은게 아니라는 것이 한니발의 전략적 안목에 대한 비판이 될 순 없다. 켈트족과는 비교하면 안 되는 것도 한니발 군대와의 규모 차이를 생각한다면 켈트족이 오르는 것과 한니발이 오르는 건 엄청난 차이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니발에게 과도한 찬사를 하는 자들의 문제일 뿐이다.

한니발에 대해 비판을 하려면, 우선 "그가 카르타고의 역량을 어디까지 가늠할 수 있었나?"를 먼저 따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대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이에 대해 논하기는 쉽지 않다.[46]

3.1.3. 종합

한니발이 비범한 것은 그의 전략 자체가 참신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성공시킨 그의 지도력 때문이다. 한니발은 막대한 병력손실을 감수하고 기어코 이탈리아에 침투해내서 이탈리아에 전선을 형성하는데 성공한다. 당장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을 보면, 형보다 유리한 조건이었음에도 알프스를 건넌 후 로마군을 돌파하기는 커녕 도리어 요격당해 목숨을 잃은 바 있다. 게다가 한니발은 5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보급도 없이 험난한 원정을 해야 했다. 이런 악조건에서 전력을 잘 추스르며 원정에 성공한 것만 해도 역사적으로 대단히 드문 사례이다. 더욱이 한니발은 그런 원정을 하고도 이탈리아에서 무려 16년을 버티며 적진을 초토화시켰다. 물론, 카르타고와 로마의 국력 차이 때문에 한니발의 전략은 종국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계획을 실현시키고 로마를 위기로 몰아넣은 전과는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더하여 그는 리비우스의 표현을 빌리면 출신도 제각각인 오합지졸의 군대를 자신의 리더십으로 통제해왔다. 처음에는 돈과 전리품을 위해 싸웠던 병사들이었지만, 이들은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위해 전원 목숨까지 바쳤다.[47] 이 또한 한니발의 카리스마가 어떠했는지 말해준다.[48]

그러므로 한니발의 장군으로서의 역량이 상당했다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심지어는 그의 적이었던 로마인들도 한니발을 두려워할지언정 그의 능력에는 경의를 표했다. 로마인들이 한니발을 높이 평가했음은 수많은 기록에 드러난다. 심지어 대부분의 로마인들은 자국의 장군인 스키피오보다도 한니발을 높이 평가했다. 스키피오는 로마를 대표하는 장군이었던 데다 한니발을 회전으로 이긴 전적이 있는데도 이런 평가를 내린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스키피오가 한니발보다 무조건 뒤떨어진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스키피오가 최후의 결전에서 한니발을 이겼다고 그가 한니발보다 우수하다고 무작정 보는 것도 옳지 않다. 자마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은 연이은 패배로 인해 수백 년간 소집된 적이 없던 시민병까지 동원하는 등 상황이 좋지 않았고, 강력하다고 평가받는 코끼리 부대는 코끼리의 훈련도 미달로 인해 제대로 기동이 불가능했다. 사실상 한니발이 신뢰할 수 있는 병력이라고는 그를 따라 이탈리아에서 철수해온 일부 보병이 전부였다. 한편 스키피오의 로마군은 숫자는 적어도 견실하게 준비를 해온 상태였다. 즉, 한니발과 스키피오 중 누가 더 낫다고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으며, 자마 전투에서의 승패는 지휘관의 실력이 아니라 군대의 훈련 정도에 따라 갈렸던 것.

한니발에 대한 로마의 감정은 증오와 경의가 얽혀있다.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면서 헤라 신전의 제단 벽에 자신의 전과를 새겨놓고 갔다. 즉, 로마를 코너로 몰아붙인 전적들을 로마인들 보라고 써놓은 것이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후 폴리비우스가 역사서를 쓰면서 그 기록을 참고했다. 다시 말해, 로마인들은 그들의 적이 자신들 영토에 남겨둔 승전비를 그대로 보관해 놨다는 소리. 심지어 후대에 가면 한니발의 이름을 딴 '한니발리아누스'라는 이름을 왕족에게 붙여줄 정도가 된다.[49]

한니발 때문에 생긴 라틴어 속담으로 "한니발이 바로 문 앞에 있다.(Hannibal ad portas)"라는 말이 있다. 적이 바로 코앞에 와 있다는 말이며, 영화 제목인 에너미 앳 더 게이트(The enemy at the gate)도 여기서 따온 말이다. 로마 여인들은 이 말로 우는 아이들을 달랬다고 하며, 이는 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된다.

전쟁사 연구자로 유명한 역사학자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50] 소장이 한니발의 전략을 비지니스 측면에서 분석한 글도 있다. 2017년 8월 2일 네이버 블로그 비지니스인사이트 양파껍질 벗기듯 로마 학살, 명장 한니발의 천재적 전략.

스키피오와 한니발이 셀레우코스의 한 집회에서 만나 나눈 대화가 유명하다. 당시 한니발은 셀레우코스에 망명해서 군사 고문관을 맡고 있었고 스키피오는 외교적인 일로 방문했는데, 과거의 라이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처럼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동병상련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한니발과 스키피오 모두 자기 조국을 위해 싸워왔던 인물이지만 당시 한니발은 카르타고에서 쫓겨나 망명을 떠나는 신세로 전락했고, 스키피오는 나라에서 쫓겨나진 않았어도 로마 정계에서 심각한 견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알 수 없으며, 후대의 윤색이라는 견해도 있다.
스키피오: 가장 위대한 장군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 마케도니아알렉산드로스이지요. 적은 병력을 가지고 대군을 무찔렀고 인간이 일찍이 가보지 못한 세상의 끝까지 갔기 때문이오.
스키피오: 두 번째로 위대한 장군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 피로스요. 진영을 잘 짜는 방법을 처음 생각해냈지. 지형에 따라 군대를 잘 활용하기로는 그를 따를 자가 없소. 사람들의 지원을 잘 얻어냈고, 그래서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에도 이탈리아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냈소. 그들이 그 땅에서 잘 살아왔는데도 말이오.
스키피오: 세 번째로 위대한 장군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 나!
스키피오: (웃음을 터트리며) 만약 당신이 자마 전투에서 나를 물리쳤다면 그 땐 뭐라고 말했겠습니까?
한니발: 그랬더라면 내가 알렉산드로스, 피로스, 기타 세상의 모든 장군들보다 윗길이라고 말했을 거요.[51]

종합적으로 그가 고대의 명장 반열로 꼽기에는 이견이 없다. 단지 본의는 아니었지만 '너무 잘 싸워서' 카르타고가 멸망하게 된 단초를 제공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물론 이미 1차 포에니 전쟁이란 선례를 남긴 카르타고가 그 이상의 전쟁을 안 벌여도 무사했을지는 의문이긴 하나, 아예 전투를 안한 코린토스나 적극적으로 로마를 침략했던 에페이로스의 상반된 결말을 보면 딱잘라 단정할 수도 없다.

한니발의 전략적 목표가 여러 승전과 동맹시 이탈을 통해서 로마와 유리한 협정을 맺는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당시 헬레니즘 세계 기준이었으면 로마는 진즉에 강화에 나섰을 가능성이 높았다.[52] 사실, 이는 국력이 뒤떨어지는 국가들이 대국을 이기기 위해 흔히 세우는 전략적 목표이기도 하다. 당장 멀리 갈 것도 없이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해군의 대략적인 목표가 미국과의 유리한 강화였다.

문제는 로마가 근현대 서유럽, 대전중 소련, 미국처럼 총력전 체제였다는 것이었다. 한니발의 가장 큰 실수라면 로마의 그런 총력전 의지를 파악하지 못했단 점일 것이다. 한 방 먹이면 강화하자고 하겠지? 때문에 칸나이 이후에는 명확한 전략적 중점을 세우지 못한 것이고, 그것이 한니발의 패인이었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칸나이'에 매혹된 후대의 한니발 워너비들은 모두 사이좋게 한니발의 뒤를 따라갔다.

3.2. 정치

한니발의 정치적 능력은 마냥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의 군사적 역량에 비하면 확실히 뒤떨어졌다. 일단, 그의 관료나 통치자로서의 행정 역량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런 행정 역량에 비해 갈등을 중재하고 술수를 부리는 정치적 감각은 부족했다.

한니발은 우수한 통치 역량으로 전후 수습에서 상당한 성과를 냈다. 한니발은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의 집정관 두 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사실상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오랜 전쟁으로 국고를 소진했고 부의 원천이었던 해상 무역도 금지당한 데다 자원 수급지였던 해외 식민지도 모두 로마에 빼앗겼다. 그런 상황에서 카르타고는 로마에 1만 탈란트의 전쟁배상금까지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세금 누수를 최소화하고 재정을 개혁하여 로마의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배상금을 갚았다. 이는 카르타고가 전성기 시절에도 용병들의 보수를 체불해서 반란이 일어났던 것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53]

그러나 한니발의 정치적 감각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니발이 마흔 살이 될 때까지 정치 경험 없이 야전 지휘관으로 살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그는 행정적 역량은 탁월했지만, 일처리 방식은 군대 지휘와 비슷했다. 그는 독단적인 상명하달을 했고, 부작용은 뒷전으로 한 채 목표만을 최우선시했다. 특히 그는 다양한 정치적 갈등을 중재하거나 상대와 타협하는 데 미숙했다. 즉, 관료로서는 몰라도 현실 정치인으로서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그의 라이벌이었던 스키피오와도 비슷한 점이었다. 한니발은 독선적인 통치로 인해 자국 원로원으로부터 점점 반감을 샀다. 끝내 한니발은 나라에서 쫓겨나다시피 도망쳐야 했다.

3.3. 인품

한니발의 인품이 어떠했는지 명확히 알기는 어렵다. 이는 한니발의 인격에 대해 기록한 당대의 편향되지 않은 사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니발의 인격에 대해서는 그의 행적을 토대로 추측하는 수 밖에 없다.

로마의 사료에도 한니발의 인격에 대한 평가는 상충되는 내용이 많다. 대체로 로마의 역사가들은 한니발이 무자비하고 잔혹했다고 기록했다. 한니발의 실제 인성과 별개로 로마인들은 그렇게 느꼈을 수밖에 없긴 하다. 한니발이 로마에 있어 무시무시한 적이었던 데다 그가 이탈리아를 초토화시켰기 때문이다. 로마의 대표적인 역사가인 리비우스도 한니발이 잔혹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그리스인 역사가인 폴리비오스는 한니발의 인격에 대해 호평했다. 그는 한니발이 키살피나에서 월동하면서 로마 포로들에게 먹을 것을 충분히 주고 로마의 동맹시 시민들은 몸값도 안 받고 해방시켜 줬다고 기록했다.[출처1-3]

한니발이 잔혹했다는 기록에도 구체적으로 그가 벌인 잔혹한 군 행적에 대한 내용은 없다. 그가 전쟁 수행과 무관한 학살을 벌인 정황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그가 사군툼이나 로마의 포로들을 노예로 팔아버린 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는 당대 지중해 문명의 보편적인 포로 처분법이었다. 게다가 한니발은 이미 칸나이 대승 후 포로로 잡은 군사들을 가지고 로마에 몸값 협상을 제안했었다. 그러나 로마가 몸값을 내기를 거부해서 노예로 팔았던 것이다. 즉, 이건 로마의 책임이기도 하다.[55] 게다가, 한니발은 그 정도의 로마 포로들을 지속적으로 수용할 물자가 부족했다.

오히려 한니발은 최소한 아군에게는 모질게 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호평이 지배적이다. 사료에는 일관적으로 그가 부하를 감화시키는 인품과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니발이 젊은 나이에 히스파니아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그곳의 주군과 주민이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원정 때도 한니발의 용병들은 보급도 받지 못하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를 배반하지 않았다.

특히 포에니 전쟁이 벌어진 고대에는 전세가 불리하거나 대우가 안 좋을 때 불만을 품은 부하들에게 목이 따인 장수가 한 둘이 아닌 것을 감안하면 이런 충성심은 이례적인 것이었다.[56] 그것도 금전적인 관계 외에는 전혀 혈연이라곤 없던 용병과 고용주의 관계였는데도 말이다! 용병술의 천재라고 불렸던 알렉산드로스카이사르조차도 병사들의 파업 및 종군 거부를 당했는데도, 열악한 적지 한가운데서 싸우던 한니발은 이런 기록이 없다. 애초에 그런 일이 있었거나 그의 리더십이 조금이라도 부족했다면 진작에 로마가 줄 보상에 눈이 먼 불평분자에게 밤중에 머리를 도둑질당해서 2차 포에니 전쟁은 끝이 났을 테니...
"로마 인들은 아직도 이 사람이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고 느꼈다. 그의 주변 모든 것이 몰락으로 빠져드는 중이었는데도 여전히 후광이 남아 있었다. 실제로 나는 한니발이 성공을 누릴 때보다 운이 기울었을 때 더욱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고국에서 머나먼 적의 영토에서 13년 동안 싸우면서 많은 흥망성쇠를 겪은 그의 군대는 카르타고 인으로만 구성된 게 아니라 온갖 국적의 천민들이 뒤범벅된 그런 군대였고, 병사들은 법, 관습, 언어가 모두 달랐으며, 예절, 의복, 장비는 물론 섬기는 신과 종교 의식의 형태도 어느것 하나 같은 점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이 잡다한 무리를 굳게 결속시킬 수 있었고, 그리하여 자기들끼리 단 한번도 싸우는 일이 없었으며, 한니발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적도 없었다. 놀라운 건 급료를 지급할 자금이 빈번히 부족하고 식량도 자주 떨어졌음에도 일절 반항의 기미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제 1차 포에니 전쟁 때는 그런 일로 장교와 병사 모두가 형언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바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승전의 희망이 전부 사라진 데다 하스드루발이 전사함과 동시에 휘하 병력이 괴멸하고, 이탈리아의 작은 구석인 브루티움 하나를 제외하고 이탈리아 전역을 포기한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 진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리비우스, 로마사

적국의 한복판에서 장기전을 벌이는 극한 상황에서도 용병들로부터 이런 충성심과 복종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한니발의 지도력은 고금을 넘어 매우 드문 케이스. 순전히 잔혹함만으로는 급료도 제때 지급하지 못 하는 용병들을 적지에서 이끌고 한두해도 아닌 무려 17년을 싸우는 리더십을 발휘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한니발은 최소한 같은 편은 인간적인 대우를 넘어 깊게 감화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서《로마사 논고》에서 한니발을 극도로 잔혹한 장군이었다고 서술했다.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한니발을 대조적인 유형의 장군으로 놓고 비교했다. 그는 스키피오가 고결하고 인자해서 승리와 명예를 획득했다면, 한니발은 잔혹함과 공포로 승리와 명예를 획득했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는 서술이라고 보기 힘들다. 애초에 그의 로마사 논고는 역사책이라기보다는 정치학책에 가깝다.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중】
>스키피오가 스페인을 침공했을 때 그곳은 즉시 그의 우방이 되었고 그곳의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칭송하게 되었는데 이는 전부 그의 인정과 자비가 이끌어낸 결과였다.
반면에 한니발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그와는 정반대의 방법을 활용했다. 그는 잔혹함, 폭력, 약탈, 그 외의 온갖 기만술을 사용했지만 스키피오가 스페인에서 성취한 것과 같은 결과를 성취했다. 이는 이탈리아의 모든 도시가 한니발의 편을 들어 반란을 일으키고 모든 사람이 그를 따랐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략)
사람은 두 가지 주된 자극에 이끌리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과 두려움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사랑이나 두려움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면 다른 이들을 쉽게 휘어잡을 수 있다.
(중략)
사랑을 받으려는 열망이 너무도 강력한 사람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면 비열한 사람이 되고, 두려움을 안기려는 열망이 너무도 거대한 사람은 중도를 넘어서게 되면 불쾌한 사람이 된다. 정확히 중용을 지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람의 본성이 그런 일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니발과 스키피오처럼 월등한 능력으로써 지나친 사랑 혹은 지나친 두려움에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삶의 방식으로 칭송받기도 하고 손해를 보기도 했다.
두 지휘관의 영광은 이미 언급했다. 스키피오는 스페인에 있던 그의 군대가 동맹의 일부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피해를 보았다. 이 일이 발생한 원인은 그가 두려움을 심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좀처럼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야망으로 통하는 문이 조금이라도 열리면 그 즉시 인정 많은 지도자를 향한 사랑은 깡그리 잊어버리게 된다. 자신의 병사들과 동맹이 그런 모습을 보였기에, 스키피오는 그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그동안 피해 왔던 잔혹한 조치를 일부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한니발은 그의 잔혹함과 기만으로 인해 손해를 본 특정한 사례는 없다. 하지만 나폴리와 많은 다른 도시들이 로마인들에게 충실한 채로 남은 것은 그의 잔혹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로마인들은 한니발의 무자비한 삶의 방식을 경험하고 그 어떤 적보다 그를 혐오했다. 피로스가 이탈리아에 군대를 이끌고 침입했을 때 로마인들은 피로스를 독살해 주겠다는 인물을 오히려 피로스에게 알려 주었지만, 한니발만은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군대를 잃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도 로마인들은 끝까지 추적하여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따라서 한니발은 무자비하고, 신뢰할 수 없고, 잔혹했다는 이유로 이런 불이익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모든 역사가가 칭찬했던 막대한 이득을 얻기도 했다. 한니발의 군대는 다양한 부류의 병사들로 구성되었지만, 서로 간에 알력이 일어나거나 한니발 본인에게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 이런 현상은 한니발이 안겨준 두려움이 그 원인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 자체도 너무나 큰데, 한니발의 출중한 능력이 가져온 명성까지 더해지니 병사들은 압도되어 단결할 수밖에 없었다. (중략) 두 위대한 지휘관 중 한 사람은 선한 행동으로, 한 사람은 악한 행동으로 같은 결과를 달성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3-21 中

오히려 그가 부하들을 배려한 행적에 대한 기록이 많다. 아래와 같은 기록도 있다.
"하루는 한니발이 야영지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병사들은 누구 한 명 예외 없이 한니발이 깨지 않도록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조용히 하며 그곳을 지나갔다."

여담으로 한니발은 여성 관계도 깔끔했다. 흔히 다른 정복자들이 여성 편력을 발휘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한니발은 여성에 관심이 그다지 없었거나 절제력이 높았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4. 로마 멸망 맹세설

“When I come to age, I shall pursue the Romans with fire and sword and enact again the doom of Troy. The Gods shall not stop my career, nor the treaty that bars the sword, neither the lofty alps, nor the Tarpeian Rock. I swear to this purpose by the divinity of our native god of war, and by the shade of Elissa.”
"제가 장성한 때에, 불과 칼을 들어 로마인들을 쫓아가 트로이의 운명을 다시 행하겠습니다. 신들께서는 저의 생애를 막지 않을 것이며, 칼을 금하는 조약도, 알프스의 높음도, 테르페이아의 바위도 그러할 것입니다. 저는 맹세합니다. 우리의 전쟁신의 신성에, 엘리사(디도)의 그림자에."
한니발의 맹세. 실리우스 이탈리쿠스, 《Punica》 1권[57]
또 너희 튀리아여! 영원히 의 핏줄 모두에
미움을 버리지 말라! 너희는 내 주검 앞에 이를
약속하라! 저들과의 평화는 일체 없으리라!
이제든 언제든 아무 때나 무력을 갖출 때에
내 무덤에서 누군가 생겨나 원수를 갚을 것,
불과 칼을 들어 달다냐[58] 백성을 쫓아갈 것이니,[59]
해안이 해안에 대립하고, 바다가 바다에 맞서
원컨대 무기에 무기로 당대도 후손도 싸우라!
디도의 저주.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제4권 622-629행, 김남우 번역[60]

한니발이 어릴 적에 아버지와 함께 로마를 멸망시킬 것을 신에 맹세했다는 것은 역사에도 기록된 꽤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구체적으로는, 한니발이 10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가 카르타고의 신인 바알-함몬의 신전에서 로마를 멸망시킬 것을 맹세시켰다는 일화이다. 로마와 전쟁을 하는 데 일생을 바친 한니발과 드라마틱하게 잘 어울리는 일화라서 제법 유명하다.

하지만 이 일화가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일단, 구전과 기록에 등장하는 일화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라고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 일화가 한니발의 일생과 포에니 전쟁의 드라마틱함을 강화시키기 때문에 후대 역사가들이 지어낸 얘기일 가능성도 높다. 아무튼, 이 일화가 사실인지 검증할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다.

사실 한니발이 로마를 멸망시키려는 맹목적인 증오심에 불타는 사람이었다고는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이런 의견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한니발에게 느낀 자신들의 두려움 때문에 한니발을 "로마를 멸망시키려는 잔인하고 무서운 인간"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가령 어느 로마 집정관은 사절을 만난 뒤 한니발과 그의 군대를 설명하면서, 다리와 진영을 건설할 때 전사자의 시체로 만들고, 배고프면 전사자의 고기를 먹는 매우 무시무시한 집단이라는 묘사를 하기도 하였는데[61] 이는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물론 한니발이 이탈리아로 진군한 것은 대단히 과감한 결단이었으며, 직접 군대를 이끌고 로마의 성문 앞까지 쳐들어 온 인물이었다. 그런 한니발에 대한 로마인들의 공포가 위와 같은 이야기로 나타났을 것이다.

실제로 한니발의 움직임을 보면 한니발을 로마를 멸망시키겠다는 맹세에 집착한 자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애초에 한니발은 2차 포에니 전쟁의 시작이 된 사군툼 점령에 앞서 카르타고 원로원에 정세 분석 보고서를 보내며 조언을 요청했고,[62] 사군툼 공격에 분노한 로마가 한니발을 요구하자 카르타고 원로원은 그 요구를 거절하고 전쟁을 택했다. 이는 복수에 미친 사람과 그에게 휘말린 자들의 행동이라고 보기 힘들다. 또한 한니발 자신이 칸나이 전투 직후 같은 유리한 상황에서도 로마와 협상으로 전쟁을 끝맺으려 한 적이 여러 차례 있으며, 또 마케도니아와 협정을 맺을 때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로마가 멸망하지 않을 것을 혹은 로마가 다시 부활할 것을 전제로 하는 협정을 맺었다. 심지어 자마 전투 직전까지 한니발은 로마와의 협상을 시도했을 정도였다.

독일의 역사학자 하이켈하임의 의견으로는 한니발이 로마 멸망을 맹세한 사실 자체는 공상적이지만 사실일 가능성이 큰 이야기라고 평가하지만, 한니발이 복수심으로 로마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는 견해는 로마와 카르타고 모두에게 편리한 허구라는 입장이다.[63]

어쨌든 한니발이 로마 멸망을 맹세했다는 것은 로마인 역사학자인 티투스 리비우스와 그리스인 역사학자 폴리비우스의 기록에 분명히 남아 있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이 이야기를 마냥 허구로 보진 않는다.[64] 어디까지나 이럴 수도 있다는 정도로만 이해하는 편이 옳다.

5. 어록

"내가 길을 찾아내거나 직접 길을 만들겠다."
"알프스 산에는 길이 없다."고 보고하는 휘하 장군들에게
"불굴의 의지 앞에서는 높은 산도 몸을 낮춘다."
"눈물 흘릴 눈이 하나뿐이라는 것이 원망스럽구나."
"나는 감은 눈으로 작전을 생각하고, 뜬 눈으로 적을 바라보겠다."
"숙명이 부여하는 많은 문제는 깊이 검토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65]

6. 매체에서

6.1. 소설

6.1.1. 카르타고 3부작

로스 레키의 소설《카르타고 3부작》중 1부에서는 한니발의 아내인 시밀케가 전투 도중 무방비한 후열을 덮친 로마인에 의해 잔인하게 윤간성고문을 당하고 살해당한 것으로 묘사한다. 이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소설의 허구로서 한니발의 증오와 분노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이다. 종종 실제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6.2. 만화 및 애니메이션

6.2.1. 드리프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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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 아드 아스트라

일본 만화 《아드 아스트라》에서 스키피오와 함께 두 주인공 중 하나로 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지성을 지녔으나 감정이 거의 없었다가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후 로마의 오만한 행보에 괴물[66]로 각성, 이후 성장하여 역사대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켰다. 여담으로 어린 시절엔 거의 악마왕의 아들급 포스를 보였으나 어른이 되면서 포스가 상당히 죽었다. 외견은 예수 그리스도로 보이지만 작가의 해명으로는 외견은 체 게바라를 모티브 했다고.

적장 중 파비우스는 캄파니아에서 한니발을 놓치고 게로니움 전투에서 부관 미누키우스가 참패한 뒤로 로마에서 집정관에서 축출 바로가 임명되어 칸나이 전투가 발발하기 전 파비우스는는 한니발은 인간미가 없는 현실주의자고 치고 들어갈 점이 없는 철저한 전략가인데 대군에 위협을 느낀다면 망설임 없이 싸움을 피할것 하지만 그가 싸운다는건 8만 6천의 병사들을 몰살시킬수있다고 확신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카르타고를 개혁하려고 했으나 회생 불가능한 조국의 참상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6.3. 영화

2025년 개봉 예정. 배우는 덴젤 워싱턴. 따라서 블랙 워싱 논란이 있으며, 튀니지인들이 매우 불편해하고있다.

6.4. 게임

6.4.1. 문명 시리즈

  • 문명 2에서 문명 4에 이르기까지 카르타고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문명 2의 경우 디도와 함께 나왔으며, 문명 5에서 디도에게 배턴을 넘기고 나서는 위대한 장군으로 나온다. 다른 문명은 대체로 유명하면서도 해당 문명이나 국가를 번영시키거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이나 정치가가 나오는 반면 장군이 지도자로 선정된 특이한 경우인데, 고대 카르타고의 역사에서 한니발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67] 카르타고의 고유 유닛마저 생전에 한니발이 애용한 누미디아 용병[68]이다. 다만 한니발의 몰락을 가져온 자마 전투의 패배 요인 가운데 하나가 누미디아 용병의 배신이었다는 것이 애매한 점.[69]

6.4.2. 토탈 워 시리즈

토탈 워: 로마 2 DLC 한니발 앳 더 게이트에서 주인공 격으로 등장하며 장군으로서의 능력치는 그야말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 한니발이 문앞에 왔다 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될 때 로마 사절단이 카르타고 의회를 방문하여 "평화냐 전쟁이냐."라고 묻자 카르타고 의원들이 "당신들 좋을 대로 하라"라고 하자 "그렇다면 전쟁이다!"라고 한 것을 카르타고 측에서 "그렇다면 우린 단결하여 싸울 것이다!"라고 했다는 일화를 각색한 듯하다.
"정말 그런다면 꽤 굉장한 업적이 되겠군요. 제 아무리 그 위대한 한니발 바르카라 해도 말이오!"
토탈 워: 로마 2 트레일러
원래 저게 사군툼에서 사라진 한니발에 대해 원로원 의원들이 왈가불가할 때 누군가 마실리아를 거쳐 우회한다 하자 "그럼 알프스 산이라도 넘어서 오는 거냐(비웃음)"라면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을 묵살하고 비웃는 와중에 나온 말. 이때 "코끼리 끌고 잘도 산 타겠다"와 "야만인들이 아주 반갑게 맞이하겠는데"라는 둥 말도 안 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런데 저 말을 한 바로 다음 장면에서 코끼리를 끌고 야만인들을 포섭하며 알프스를 넘어오는 한니발을 보여준다. 즉 말 그대로 굉장한 업적을 실현시켰다.

여담으로 그랜드 캠페인 시작시 카르타고 팩션에 있는 장수 한니발은 하밀카르의 아버지로 되어 있는데 이 사람은 한니발의 조부가 된다.

토탈 워: 아레나에서는 동생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함께 카르타고 팩션의 지휘관으로 나온다.

6.4.3.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확장팩 로마의 부흥에서 무장 코끼리 영웅으로 등장. 유닛 모습은 무장 코끼리지만 포트레이트는 전쟁 코끼리다. 하지만 다른 코끼리들에 비해 속도가 빠르다.《로마의 적들》캠페인 첫 번째인 <알프스를 넘어>에서 등장한다.

6.4.4. 로맨싱 사가 2

일본 비디오 게임 로맨싱 사가 2에서는 아바론 제국의 근위병과인 임페리얼 가드가 등장하는데, 8가지 캐릭터명은 역사상 유명한 서양사 장군들의 이름을 따왔으며, 이 중에도 한니발은 최후의 순번으로 등장하며 힘 25, 체력 25로 최강의 평가를 받고 있다.

6.4.5. 도미네이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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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기타

  • 미국 Spike TV의 가상 대결 프로그램인 Deadliest Warrior 시즌 3에 등장했다. 상대는 칭기즈 칸이며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였다. #

7. 여담

  • 한니발의 이름에 마치 성씨처럼 따라붙는 '바르카(페니키아어 𐤁𐤓𐤒, BRQ)'는 성씨가 아니고, 가문명도 아니다. 고대 카르타고인들은 성씨를 쓰지 않았으며, 동명이인을 구분해야 할 때는 주로 별명이나 부칭을 붙여서 구분했다. 바르카는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의 별명이었는데, 페니키아어로 번개라는 뜻이며 전쟁에서 번개처럼 빠르고 매섭게 공격한다는 뜻으로 얻은 것이다. 이후 하밀카르의 아들들인 한니발, 하스드루발, 마고가 하밀카르의 이베리아 정복지를 기반으로 군권을 차지하고 정치세력화했는데, 셋 다 당시 카르타고 귀족들 사이에서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그 아버지 하밀카르의 별명인 바르카를 붙여 구분했던 것이다.
  • 코끼리 이미지로 유명해진 장군이지만 실제로 한니발이 코끼리를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패배했던 자마 전투뿐이다. 한니발이 아프리카에서 끌고온 코끼리는 알프스산맥을 넘으면서 상당수 죽어 이탈리아 본토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력외가 되어 있었고, 그나마도 최초의 회전인 트레비아 전투에서 전열을 완전히 이탈해버렸다. 오히려 한니발은 기병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편이며, 칸나이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정 당시 한니발군이 운용한 전투 코끼리 37마리 중 대부분은 지금은 멸종하고 없는 북아프리카 숲 코끼리로, 스키피오가 칼로 찔러 죽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크기가 작게 진화한 종이었다.[70]

    수루스라는 이름이 붙은 한니발의 승용 코끼리는 다른 코끼리들보다 훨씬 체격도 크고 힘도 셌는데, 학자들은 인도 코끼리로 추정한다. 수루스는 수컷이었고 주인을 닮아 애꾸눈에 한쪽 상아가 없었다. 수루스는 트레비아 전투 이후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코끼리였다고 한다. 다른 코끼리들은 알프스를 넘으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 하고 고생한 탓에 모두 그 전투 이후 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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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로마 동전에 그려진 이미지가 떠돌지만 그것은 후대의 상상화이며, 실제로는 흑인이었고 어떤 초상도 남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한니발은 흑인이 절대로 아니다. 카르타고는 엄연히 페니키아인들의 국가였고, 한니발은 순혈주의를 고수하던 카르타고 귀족이다.[71][72] 현재 쾰른 박물관에 있는 주화 중에 한니발로 추정되는 인물의 주화가 있는데, 흑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지금의 북아프리카 사람들이나 유목민들의 주축을 차지하는 인종은 흑인이 아니고[73] 카르타고인의 조상 격인 페니키아인들은 현재 레바논 일대에 살았다. 이들의 후손들은 대개 현대의 아랍인에 동화된 데다가, 현대의 레바논인들과 튀니지인들은 아랍인으로 분류되기는 하나 애초에 북아프리카와 레반트 일대의 아랍인들은 외형적으로 남유럽 백인과 큰 차이가 없어 백인으로 본다. 흑인이나 흑백혼혈에 가까운 스테레오타입을 가진 아랍인들은 대다수가 북아프리카와 중남부 아프리카의 경계에 거주하며, 이집트 남부와 수단 공화국에 거주하는 누비아계 아랍인이 대표적이다. 히스토리 채널에서 제작한 다큐 드라마 바바리안 라이징에도 한니발이 흑인으로 나오는 고증 문제가 있다.
  • 알프스에서 바위로 길이 막히자 식초로 녹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불로 달군 다음 찬 식초를 부어 쪼갰다는 말이 오역되어서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당시 병사들이 식수 대신 식초를 들고 다니기도 했다고는 하지만, 바위가 식초에 녹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식초를 부어서 바위의 강도를 약화시킨 후에 바위를 부쉈을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 한니발이 셀레우코스 제국에 있었을 때, 포르미오라는 그리스 철학자의 강의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포르미오는 장군의 의무라는 주제로 강의하였다고 한다. 강의를 한 뒤 포르미오가 한니발에게 의견을 물었고 이때 한니발은 "내 생애 많은 어리석은 노인들을 만나왔는데 이 자는 그들 모두를 능가하오."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실제로 전쟁이 무엇인지 겪어보지도 않은 채 탁상공론이나 하는 그리스 학자의 강의에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특히 실전 경험이 많은 한니발이었던 만큼 백면서생들의 미련하고 실속 없는 태도가 더욱 불만이었을 것이다. 원래 페니키아 문화가 그리스 문화와는 달리 철학보다는 농장 경영 같은 실용 학문을 중시한 것도 한 가지 원인이 아닌가 싶다. 재미있는 점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당대 로마에서 대표적인 그리스 애호가였다는 사실이다.
  • 한니발이 죽기 전에 한 말은 "로마인들을 그들의 가장 큰 염려에서 해방시킬 때가 되었군. 그들은 이 노인의 죽음을 그토록 고대해 왔으니."이거나 "아! 카르타고여! 나를 용서해다오!"라고 한다.
  • 현재의 튀니지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현대 튀니지에서는 영웅이자 대표적인 위인으로 손꼽힌다. 과거 여러 차례 튀니지 5 디나르 지폐 도안으로 쓰였었으며 튀니지 최대 방송국 이름이 Hannibal-TV라는 점 등에서 보이듯 튀니지 사람들은 한니발을 대단히 존경한다. 비무슬림의 이름이지만 이름으로도 많이 쓰이고 이웃 북아프리카의 나라인 리비아에서도 멋진 영웅이라고 하여 이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다. 리비아의 전 독재자인 카다피의 5남 이름 역시 한니발이다. 레바논에서는 페니키아는 레바논의 조상이라면서 이런 튀니지를 코웃음친다.[75] 참고로 한니발이 묻혔다고 추정되는 무덤이 현재 튀르키예에 있는데[76] 튀니지 측에서 한니발의 시신을 양도할 것을 요구한 적도 있다. 물론 튀르키예 정부에서는 이를 무시했다.
  • 로마인들이 보기에도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심지어 로마에서도 한니발은 인명으로 쓰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카의 이름이 한니발리아누스(Hannibalianus)였다. 콘스탄티누스의 후계 구도에 조카인 이 사람도 있었으나, 아들 3형제가 우리끼리 해먹자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 사후, 아버지의 이복형제들인 삼촌들과 그들의 아들인 이 한니발리아누스를 포함한 사촌들 전부를 죽였다. 예외로 살려둔 이가 아주 어렸던 율리아누스와 그 형제였다. 현대 이탈리아어에서는 안니발레(Annibale)라고 하는데, 천주교 성인으로 시성된 이 중에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차(Annibale Maria di Francia)' (1851년 ~ 1927년)란 신부도 있다. 천주교 성직자요 성인으로 시성된 사람의 이름이 바알의 은총이라니, 참으로 얄궂은 일이라 하겠다.
  • 한니발의 전공이 워낙 대단해서 훗날 한니발 워너비들이 다수 생겼는데, 가장 유명한 건 독일 제국 참모부 장교단일 것이다. 칸나이는 그들의 군사 저술에 흔히 언급되는 대명사가 될 정도였다.[77]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역시 대단한 전공을 세우고도 연합군의 저력을 꺾지 못해서 망했다.

8. 관련 문서


[1] '한니발'은 '주(바알)께서 페니키아어/히브리어/셈어로 은혜로웠다/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의 이름으로 '주(엘/일루)께서 은혜로웠다'라는 뜻의 하나넬이나 '야훼께서 은혜로웠다'라는 뜻의 하나냐와 비슷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바르카'는 페니키아어/히브리어/셈어로 '천둥'을 뜻한다.[2] 카푸아에서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나폴리 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3]튀니지 튀니스주 아밀카르[4]튀르키예 코자엘리주 게브제[5] Sébastien Slodtz. 생몰년: 1655년 ~ 1726년. 프랑스의 조각가로, 베르사유 궁전의 조각을 담당한 궁중 예술가였다. 이 작품도 원래는 베르사유 궁전의 장식용으로 제작되었다.[6] 왼손으로는 전리품으로 챙긴 수 많은 로마군의 반지를 쥐고 있으며, 오른손으로는 카르타고군이 노획한 로마 군단기를 한니발이 거꾸로 든 모습이다. 독수리 장식을 단 군기는 로마 군단의 절대적인 상징이었다. 즉, 한니발이 노획한 군기를 거꾸로 들고 독수리 장식을 땅바닥에 처박은 것은 로마군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었다. 한니발의 조각 바로 옆에는 다름아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다.[7] 농담이 아니라 카르타고에서도 한니발의 쾌진격과 승승장구에 스페인을 통해 지원군을 보내거나 로마군이 뭉쳐 한니발 후방을 노리지 않도록 맞붙었지만 1승 빼고는 전부 격퇴당하는 졸전을 벌였고 로마군이 전황이 다시 좋아지자 카르타고 본진을 치는 바람에 로마에서 후퇴하게 될 정도였다.[8] 한니발에게 호되게 당한 로마는 보병과 기병의 유기적 운용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고, 이를 습득해 군대에 적용한 로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중해의 강대국들을 모조리 쓰러트리는 군사강국으로 성장했다. 한니발 본인의 의도와 달리 로마의 성장에 그 누구보다도 많이 기여한 인물이 된 셈이다.[9] 잘생긴 하스드루발(Hasdrubal the Fair).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과는 동명이인이다.[10] Liv.30.37[11] 사료가 너무 없어서 한니발이 정확히 무슨 지위에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한니발이 당시 카르타고 육군을 총괄하고 있었기에 총사령관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당대 카르타고 관직 표라도 있으면 짐작이라도 가겠으나 그런 건 없다.[12] 훗날 나폴레옹도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한니발은 성공했다."라며 러시아 원정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물론 한니발이 최초로 알프스를 넘은 것은 아니다. 역사가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켈트족은 상시로 알프스를 그냥 드나들었다.[13] 나중에 트레비아 전투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코끼리들이 전투에 참여했다가 이마저 소실된다. 마지막 남은 코끼리 1마리는 그 뒤 한니발이 타고 다녔다.[14]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이다.[15]마르세유[16] 다만 코르넬리우스 네포스라는 로마 역사가는 해당 일화를 부정했다. 그는 한니발이 오른쪽 눈에 시력 손상을 입었으나 애꾸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17] 칸나이의 대승 직후 한니발에게 기세를 몰아 즉시 로마 본국을 치자고 제안했다. 그는 자신이 기병대를 이끌고 앞서가고, 한니발이 뒤따라가면 5일 이내에 원로원 의사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다만 한니발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하르발의 한니발에 대한 평가.[18] 하단의 정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칸나이 대승 이후 한니발로선 자군의 역량으로 로마를 조기에 점령하기 어려웠다. 또 이제껏 보여준 한니발의 지휘 능력을 감안하면 로마 수도를 함락하면 끝나는 싸움에서 로마 공격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그 한니발조차 자군 역량으로 로마 공격이 무리라고 생각했다는 게 현 역사학자들의 평가다.[19] 여기엔 불운한 뒷사정도 있었다. 카르타고의 원군이 상륙하기 전 그들은 해상에서 폭풍을 만나 이를 피하기 위해 발레아레스 제도에 잠시 정박하였다. 그런데 그 사이 로마군과 사르데냐 반란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져 반란군 측이 상당한 병력 손실을 입은 것이었다. 이 손실은 나중의 전투에서의 카르타고군의 패배를 초래했다.[20] 제2차 포에니 전쟁 동안 한니발 없이 카르타고군이 로마군을 상대로 승리한 적은 단 1번 뿐이었다. 특히, 대규모 회전에서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에 맥을 못 추었다. 베티스 고지에서 스키피오 형제를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이긴 것이 유일한 승리였다.[21] 한니발이 로마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자 로마 시민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고 리비우스는 기록했다. 이 뒤로 라틴어에 "문 앞에 한니발이 왔다.(Hannibal ad portas)"라는 관용어가 생겼다. 주로 풍전등화, 박두한 위험, 위기가 코앞까지 들이닥친 다급한 상황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된다.[22] 이탈리아 반도 장화 끝까지 몰린 상태에서 동생과 합류하기 위해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혹시나 로마한테 빈집털이라도 당할까 우려해서 점령지에서 최대한 버티다 움직이려는 목적도 있었다. 기껏 군대 이끌고 나가 동생이랑 합류해서 돌아왔는데 점령지가 털려버리면 말짱 꽝이니까. 실제로 로마군 역시 이 점을 노리고 한니발을 지독하게 견제했다.[23]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딸이자 당시 마사에실리 부족의 왕자였던 마시니사의 약혼녀이다. 정치적 이유로 마시니사와의 약혼을 강제로 파기하고 마실리 부족의 왕 시팍스에게 아내로 보냈다. 이름은 소포니스바였다.[24] 참고로 시팍스를 유혹해서 카르타고 편을 들게 했던 소포니스바는 스키피오와 마시니사의 승리 후 마시니사와 재혼했다. 그러나 이내 마시니사는 소포니스바에게 독약을 주면서 자살을 종용했다. 소포니스바는 마시니사에게 감사를 표시한 후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25] PC 게임《로마: 토탈 워》의 카르타고 팩션에 Sacred Band Cavalry가 있고, 해당 게임의 고증 모드로 통하는 EB모드의 Sacred Band Cavalry 유닛 설명에서 위의 에피소드가 언급되어 몇몇 역덕들이 받아들인 듯하다. 하지만 리비우스나 폴리비오스 등 신뢰할 만한 사료에서는 신성 기병대라는 존재가 언급되지 않는다. 게다가 EB모드의 후속작인 EB 2의 카르타고 유닛 소개에서 "신성 기병대"가 "카르타고 귀족 기병대"로 대체되었으며, 귀족 기병대의 설명에서 "신성 기병대는 오해의 산물이었다."라고 제작 팀이 인정했다.[26] 칸나이 전투 직후 공성은 무리더라도 로마를 포위하면 로마의 동맹시들에게 심리적 영향을 주어 더 많이 이탈시킬 수도 있는 가능성도 없지 않으며, 일단 로마를 포위해 놓으면 로마 시민들이 심하게 패닉에 빠질 가능성과 칸나이에서의 손실 회복이 더뎌질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당대 로마인들은 전부 한결같이 한니발이 실수한 것이라고 여겼다.[27]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당장 칸나이에서 전사한 집정관 파울루스마저 부상입은 자신을 구하려던 장교에게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만류하고, 원로원에게 달려가 승리한 적들이 올 때까지 로마를 요새화하고 방어를 굳히라고 전하라 했다. 그러므로 칸나이 전투 직후 로마가 실제로 방어태세가 부족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28] 단, 카르타고와 한니발이 히스파니아를 확실하게 장악했다면 이탈리아 침공은 어려웠을지라도 히스파니아의 인력과 생산력으로 로마에 버금가는 국력 신장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로마에게 있어서 히스파니아를 카르타고에 내주고 카르타고 본토마저 온전해지는게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오는 것보다 더 큰 장기적 위협이 됐을 수도 있다.[29] 부유한 카르타고 원로원(= 아다림) 의원들은, 이 돈을 자기들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내는 대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힘들게 애쓰는 농민들에게 추가로 세금을 물려야 한다고 주장했다.[30] 로마에서는 집정관이 '콘술'이라고 불리나 카르타고에서는 '수페트'라고 불렸다.[31] 출처: 필립 프리먼 저《한니발 : 로마의 가장 위대한 적수》[32] 사실상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사령관이었다. 하지만 지병으로 마그네시아 전투에서는 지휘를 맡지 못 했다.[33] 심지어 안티오코스 3세는 약 20년 전 라피아 전투에서도 거의 다 이겨놓고 똑같은 실수를 저질러 역전패당해버린 적이 있었다. 물론 안티오코스 3세가 이전에 동방 원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도 했고 팔레스타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밀어내는 등 군사적 업적이 모자란 왕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야전 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은 부족했다.[34] 헤르만 괴링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청산가리를 빼돌려 자살하기 전 유서에 한니발 장군과 같은 방식으로 죽기로 결심했다고 썼다.[35] 이 말은 'Theodore Ayrault Dodge'라는 미국의 전쟁사 전문가의 저서인《Hannibal: A History of the Art of War Among the Carthaginians and Romans Down to the Battle of Pydna》,《168 BC. With a Detailed Account of the Second Punic War》에 나온다.[36] 나머지 인물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카이사르, 구스타브 2세 아돌프, 튀렌 자작, 사부아 공자 외젠, 프리드리히 대왕[37] ‘‘폴리비우스는 BC 225년 현재 로마에 복무 중이던 70만 명 이상의 보병과 7만 명 이상의 기병을 언급하면서 "한니발이 장차 공격해야 하는 병력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한니발 역시 로마의 병력이 카르타고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공격을 강행했다.’’ - 마크 힐리,《칸나이 BC 216(플래닛 미디어, 2007)》, 23쪽.[38] 한니발이 이탈리아 침공을 결심한 배후에 깔려 있던 훨씬 더 강력한 이유는 그가 잠재적으로 카르타고의 여섯 배나 일곱 배가 되는 로마의 군사력의 뿌리를 절단하고 싶어한 데 있었다. 로마의 동맹시 체제를 와해시켜야만 그 막대한 군사력을 무력화시키고 파쇄해볼 생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프리츠 M. 하이켈하임,《하이켈하임 로마사(현대지성, 2017)》, 313 ~ 314쪽.[39] 애초에 제1차 포에니 전쟁 부터가 시칠리아 섬에 대한 로마의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물론 로마 입장에서도 안보 문제가 걸려 있긴 했다.[40] 한니발이 인력과 물자를 충당할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은 히스파니아였고 그에게는 잘 훈련되고 믿을 만한 부대가 그가 직접 지휘하는 부대 단 하나 밖에 없었기에, 그가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전선을 하나로 축약하는 데 있었고 그 전선이 로마의 본토인 이탈리아에 형성되면 더욱 좋았다. 로마의 본토가 침략당하는 위기에 처해 있는 한 로마인들은 대군을 이탈리아에 결집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서는 반드시 이탈리아 반도를 직접 침공해야만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 프리츠 M. 하이켈하임, 2017, 313 ~ 314쪽.[41] 대군을 이탈리아에 결집시킨단 말은, 그만큼 로마가 주변 지역에 병력을 파견하기 힘들어진다는 걸 뜻한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한니발이 만들어 준 이러한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 한다.[42] 프리츠 M. 하이켈하임, 2017, 314쪽.[43] 마크 힐리, 2007, 24쪽.[44] 마크 힐리, 2007, 23쪽.[45] 프리츠 M. 하이켈하임, 2017, 314 ~ 316쪽[46] 역사가 폴리비우스로마군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카르타고군의 조직에 관한 자료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 마크 힐리, 2007, 45쪽.[47] 마크 힐리, 2007, 33쪽.[48] 알렉산드로스 대왕조차 장기간 원정으로 인해 병사들과 휘하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걸 막지 못 했다. 군의 상당수가 자신과 같은 마케도니아인과 그리스인이었음에도 말이다.[49] 참고로 한니발리우스는 여러 명이 있는데, 콘스탄티누스 대제이복형제 중 한 명의 이름이기도 하고, 또 다른 이복형제인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 (333년 감찰관)의 아들, 즉 조카 한니발리아누스의 이름이기도 했다. - 에이드리언 골즈워디,《로마 멸망사 (루비박스, 2012)》, 249쪽 및 영문위키 참고.[50] 구(舊) 한국역사고전연구소[51] 이 발언은 기록자 리비우스에 의하면 한니발이 스키피오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한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를 능가할 수 있었던 자신을 이긴 명장이 바로 당신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52] 한니발의 스승은 스파르타인이었다.[53] 후에 로마가 망할 때처럼 국가 위기 상황에서도 본인들의 주머니만 챙긴 카르타고 지배층의 이기심 때문에 일어났던 일로 추정된다. 하지만 당시 카르타고가 명목 자산만 많고 실질적으로 융통할 수 있었던 현금은 적었던 것일 수도 있다.[출처1-3] 폴리비오스, 역사, 3.33[55] 처음에는 원로원 의원들 사이에서는 죽을때 까지 싸우지 않은 자들의 몸값을 대주어야 하냐며 반발 했지만 포로들의 가족들이 몰려와 울부짖자 진지하게 고심했다. 칸나이 전투까지 로마는 8만이 넘는 시민병을 잃었기 때문에 인력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했기에 원로원으로서는 돈을 주고 포로로 잡힌 시민들을 구출해 전투원으로 다시 써먹을 수도 있고 협상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눈물겨운 호소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돈을 주고 받아오게 된다면 한니발이 그 돈으로 용병을 고용하여 군세를 부풀릴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자 원로원은 수천의 시민들 보다 한니발의 군세를 강화시킬 기회를 주지않겠다는 자발적인 선택을 했다.[56] 게다가 그를 제2차 포에니 전쟁 내내 따르던 고참병 1만 5천은 자마 전투에서 단 한 명의 투항 없이 그를 위해 싸우다 전멸했다.[57] 영어 번역으로부터 중역했다.[58] Dardania, 트로이가 위치하고 있던, 아나톨리아 북서쪽에 위치한 반도의 명칭. 다른 이름으로 트로아다(Τρωάδα)라고도 한다.[59] 로마는 트로이 전쟁에서 아이네이아스가 함락된 트로이를 탈출해 이탈리아로 건너와 로마의 전신 격인 라비니움을 건설한 신화를 들어 아이네이아스와 트로이의 후예를 자처했다.[60] 엄밀히 말하면 베르길리우스의 경우 여기서 한니발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건 아니지만, 이탈리쿠스의 시와 연결한다면 불과 칼을 들어 트로이 백성을 쫓아가는 복수자는 한니발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즉 한니발의 행적, 나아가 카르타고와 로마의 대립에 대한 숙명론적 해석이다. 포에니 전쟁은 단순히 강대국의 패권 다툼이 아니라 예로부터 정해진 숙명의 대립이라는 것.[61] Savage and barbarous by nature and habit, their general has made them still more brutal by building up bridges and barriers with human bodies and - I shudder to say it - teaching them to feed on human flesh - Livy 23.5[62] 원로원의 회신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후 한니발이 사군툼을 포위한 것을 보면 원로원의 재가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63] 로마인들에게는 전쟁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한니발과 바르카 가문의 복수심 탓으로 돌릴 수 있고, 패배한 카르타고인들에게는 바르카 가문만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게 해주는 편리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64] 구체적으로 기록을 보면, 한니발이 로마 사절을 만났다는 이유로 의심을 사자(그 유명한 스키피오와의 명장론이 여기서 나왔다.)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신전에 가서 영원히 로마와 싸우겠다고 맹세했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보면 단지 한니발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꾸며낸 말일 가능성도 있다.[65] Many problems that nature puts in one’s way are solved by thinking them through (Liv 25-11)[66] 다른 사람들의 의식을 강자가 유일하게 뺏을 수 없는 약자의 마지막 무기인 '가진 것 없는 자의 광기'를 주저 없이 사용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데 특화된 사이코패스.[67] 상술되어 있듯 2차 포에니 전쟁 이후 국정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이 부분 때문에 선정되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문명 4 시빌로피디아의 경우 전쟁 중의 행적에 대해서는 몇 문단에 걸쳐 서술했으면서도 전쟁 이후 자결하기까지는 한 문단에 밀어넣었다.[68] 문명 3에서는 창병을 대체하는 누미디아 용병, 4에서는 궁기병을 대체하는 누미디아 기병.[69] 타국의 용병을 고유 유닛으로 받은 부분도 지적하자면 할 수 있지만, 문명 3과 4에는 이보다 고증 면에서 더 좋지 않은 사례가 여럿 있다. 문명 3 네덜란드의 스위스 용병이나 이로쿼이의 기마 전사, 수메르의 엔키두 전사, 문명 4 인도의 숙련된 일꾼 등.[70] 사하라 사막이 형성되면서 북아프리카의 코끼리들은 남쪽의 동족들과 교류가 단절되었다. 즉, 생태학적으로 섬에 자리잡은 것이다. 포유류는 조류와 달리 섬에 들어간 동물들이 일반적으로 왜소화되는 경향이 있다.[71] 단, 한니발의 아내는 이베리아 원주민 족장의 딸이었으며, 그 사이에 아들도 한 명 있었다고 한 걸로 보면 한니발 본인은 순혈주의를 고수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더불어 이탈리아에서 한니발 무쌍을 시전하던 동안 여자를 가까이 한 적도 없다고 한다.[72]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카르타고는 카르타고 적자와 혼혈 서자 간 차별이 존재했다.[73] 북아프리카의 원주민은 베르베르인이고 현대의 아랍인들은 아랍화된 베르베르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론 전부 백인에 속한다.[74] 한니발에서 이름을 따왔다.[75] 다만, 카르타고인에는 이주해온 페니키아인들과 토착민인 베르베르인들이 같이 포함되고 둘의 혼혈 역시 많이 이루어졌다. 카르타고인들은 카르타고가 망한 이후에도 계속 튀니지에 대를 이어 거주해서 현대 튀니지인들의 조상이긴 하다. 어떻게 보면 같은 조상을 가진 튀니지인들을 레바논인들이 오해한 거라고도 할 수 있다.[76] 제2 대도시인 이스탄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단, 이 무덤도 한니발이 묻혔다고 추측만 할 뿐 확실하지는 않다.[77] 사실 21세기 사관학교들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