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 | 기원전 480년 ~ 기원전 306년 | |
장소 | 시칠리아 섬, 북아프리카, 서부 지중해 | |
교전국 | 카르타고 공화국 | 시라쿠사 코린토스 |
지휘관 | 하밀카르(1차) 한니발(2차) 히밀코(2차, 3차) 마고(3차) 마고(4차)[1] 히밀코(4차)[2] 하스드루발(6차) 하밀카르(6차, 7차)[3] 대한노 1세 기스코(6차) 히케타스(6차) 하밀카르(7차)[4] 보밀카르(7차) 한노(7차) | 겔론 1세(1차) 대 디오니시오스(2차, 3차, 4차, 5차) 티몰레온(6차) 아가토클레스(7차) 아르카가토스(7차) |
병력 | 불명 | 불명 |
피해 | 불명 | 불명 |
결과 | 카르타고와 그리스 세력권의 시칠리아섬 양분 이후 로마의 성장에 따라 피로스 전쟁과 제1차 포에니 전쟁으로 전개 |
1. 개요
기원전 480년부터 기원전 306년 사이에 카르타고와 그리스 식민도시들이 벌인 7차례의 전쟁. 카르타고는 이 전쟁을 승리하지 못하면서 시칠리아 완전 장악에 실패했고, 이후 피로스 전쟁과 포에니 전쟁으로 전개되면서 페니키아계 식민도시들과 그리스계 식민도시들의 지중해 패권 상실로 이어진다.2. 배경
모도시 티레의 몰락으로 페니키아계 국가들의 맹주가 된 카르타고는 지금의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일대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와 발레아레스 제도[5], 코르시카, 사르데냐, 시칠리아에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술 수준이 낮아 식민화가 용이했던 다른 지역과 달리 시칠리아섬만큼은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일부로 그리스계 이주민들의 도시인 시라쿠사, 메시나 등의 도시가 할거하고 있었기에 완전한 장악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내륙 지역은 원주민인 엘리모이인이나 시카노이인과의 동맹을 유지하는 정도로 만족하고, 섬의 서쪽 해안은 카르타고가, 동쪽 해안은 그리스계 식민 도시들이 들어선 상태로 세력권이 유지되었다.초기에는 카르타고도 그리스 도시들도 딱히 상호 적대할 의사가 없었고, 그러할 이유도 없었기에 큰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6] 실제로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카르타고 마고 왕조의 왕 중 한 명인 하밀카르의 어머니가 시라쿠사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칠리아 전역에 전쟁이 발발하게 된 세 가지 원인이 발생하는데, 첫째, 동쪽의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한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했다. 페르시아는 산하 페니키아 민족들을 카르타고로 파견해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에 발맞춰 카르타고 또한 출병하여 시칠리아를 평정하고 그리스까지 진격할 것을 요구했다.[7] 둘째, 시칠리아 남동부 작은 폴리스였던 겔라 출신의 겔론 1세가 겔라, 시라쿠사, 카마리나, 마가라히블리아이아를 정복하여 대세력을 형성했다. 실제 크세르크세스의 우려대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겔론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겔론이 중장보병 2만명, 기병 2천명, 함선 200척을 파견하는 대가로 자신을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에 임명해 줄 것을 요구하여 교섭은 파토났다. 시점을 바꾸어 카르타고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 정도의 병력이 시칠리아 섬에 웅크린 것은 중대한 위협이었다. 셋째, 메시나와 레기움은 본디 카르타고의 동맹이었던 히메라의 동맹이었다. 카르타고는 히메라를 통해 메시나 해협의 제해권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히메라의 지배자 테론이 추방당하면서 메시나 해협을 상실하고 나아가 티레니아 해의 제해권까지 잃어버릴 위험이 있었다. 이는 카르타고의 중대한 동맹국인 에트루리아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질 수 있음을 의미했다.[8] 이에 기원전 480년, 카르타고가 시칠리아에 대군을 파견하면서 본격적인 시칠리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참고로 시칠리아 전쟁으로 합쳐 부르지만 1차 시칠리아 전쟁과 2차~5차 시칠리아 전쟁, 6차/7차 시칠리아 전쟁으로 국면을 나눌 수 있다. 1차 전쟁이 카르타고 세력과 그리스 세력 간 전초전 격이라면, 2차~5차 전쟁은 시라쿠사의 대 디오니시오스가 주도하여 시라쿠사와 카르타고가 본격적인 패권을 다툰 전쟁, 6차/7차 시칠리아 전쟁은 티몰레온과 히케타스, 아가토클레스로 대표되는 시라쿠사의 내분이 시칠리아 섬 전채로 파급된 전쟁이다. 따라서 1차 전쟁과 2차 전쟁 사이에는 무려 50년의 전간기가 있고, 6/7차 전쟁은 이전과 달리 그리스측 우두머리가 계속 바뀐다.
3. 전쟁의 전개
3.1. 제1차 시칠리아 전쟁
카르타고 마고 왕조의 3대 왕 하밀카르는 친정을 결심하고 시칠리아 서북부 파노르무스(오늘날의 팔레르모)에 상륙한다. 카르타고군은 곧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히메라로 진격하여 도시를 포위하는데, 히메라의 구원요청을 받은 겔론이 5만의 보병과 5천의 기병으로 카르타고 숙영지 외곽을 습격하자 방심한 카르타고군이 무너졌다. 와중에 하밀카르는 시라쿠사의 기병을 동맹인 셀리노스의 기병으로 착각하는 사고까지 벌어졌는데, 이는 하밀카르가 방심한 것이 아니라 겔론이 하밀카르의 전령을 가로채 예정된 시간과 지점에 가짜 원군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카르타고군은 전사자 1만 이상, 포로는 그 이상 발생했으며, 하밀카르 자신은 바알-하몬신에게 바칠 제물을 태우는 장작더미에 투신하여 스스로를 제물로 바쳤다.헤로도토스는 이 히메라 전투가 살라미스 해전과 같은 날 벌어진 일로 그리스가 지중해의 동서쪽에서 모두 승리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프로파간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겔론은 포로로 잡힌 카르타고인들을 노예로 부려 아그리젠토에 거대한 제우스 신전을 지었다고 한다.
3.2. 전간기
카르타고는 마고 왕조의 권위가 무너져 원로원의 지배가 강화되었고, 지중해 동부로의 진출이 제한된 카르타고는 대서양으로 뻗어 한노의 아프리카 항해, 히밀코의 영국 항로 개척이 이 시기에 일어났다.한편 카르타고의 동맹국 에트루리아는 기원전 474년 시라쿠사와의 해전에서 대패한 이후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하여 그리스인들에게 본토가 노출되었다. 와중에 로마까지 성장하여 압박하자 에트루리아의 토스카나 지배력이 무너져내렸는데, 히메라 전투에서 대패한 카르타고는 에트루리아의 구원 요청에 응할 여력이 없었다.
3.3. 제2차 시칠리아 전쟁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자 시라쿠사의 그리스 식민도시들 또한 친아테네계와 친스파르타계로 양분된다. 기원전 415년 아테네의 시라쿠사 원정이 대실패로 끝나자, 아테네를 격파하기는 했으나 시라쿠사의 피해도 막심했다는 것을 간파한 카르타고는 다시 시칠리아로 출병을 결정한다. 총사령관은 하밀카르의 손자인 한니발이 맡았다. 카르타고군은 기원전 410년 시라쿠사에 상륙해 기원전 409년에는 셀리누스와 히메라를 파괴했고, 기원전 406년에는 아크라가스를 함락했다.[9] 아크라가스 공성전 중에 지휘관 한니발이 병사하고 히밀코가 지휘권을 인계했다. 이어 기원전 405년에는 디오니시우스의 시라쿠사군을 겔라에서 격파하고 겔라와 카마리나까지 점령한다. 연이은 패배에 내부반란까지 직면한 디오니시우스가 카르타고에 강화를 요청하자, 전염병의 창궐로 병력의 절반 가까이를 잃은 카르타고군이 응하면서 2차 전쟁은 카르타고의 승리로 끝났다.여담이지만 이 2차 전쟁이 카르타고의 시칠리아 통일이 가장 근접했던 때였다.
3.4. 제3차 시칠리아 전쟁
2차 전쟁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은 디오니시우스는 300척이 넘는 대함대를 건조하고 공학자를 초빙해 투석기를 양산[10]한 뒤 기원전 398년 카르타고에 사자를 파견해 '그리스 권역에서의 철수할 것'을 통보했다. 이에 카르타고 원로원 역시 전쟁을 결의하고 용병을 모집했는데, 군대 구성에 시간을 너무 오래 잡아먹는 바람에 디오니시우스의 시칠리아군이 카르타고의 동맹국인 에릭스와 모티아를 점령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에릭스에는 이슈타르의 신전이 있었고(훗날 아프로디테의 신전으로 개조당한다), 모티아는 400년 이상 페니키아 식민지였든 근본있는 땅이었음에도 주민 전체가 학살당하고 도시가 파괴되었다. 기원전 396년 히밀코의 육군, 마고의 해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이 시라쿠사 항을 봉쇄하고 디오니시우스를 포위했으나, 또다시 전염병이 카르타고 숙영지를 엄습하는 바람에 어처구니 없게 원정군이 궤멸해버렸다.[11] 설상가상으로 리비아인들의 반란까지 터지자 카르타고의 전쟁 수행 능력이 한계에 달하기 시작했다. 이는 시칠리아측도 마찬가지여서, 메시나는 5년이나 포위했음에도 결국 함락에 실패했고, 모티야, 리파리, 카타나에서 연패하고 있었다.결국 기원전 393년 카르타고와 시칠리아 양측이 휴전에 합의하면서 3차 전쟁은 끝을 맺는다.
3.5. 제4차 시칠리아 전쟁
근성의 사나이 디오니시우스는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인들과 동맹을 맺고 기원전 383년 다시 카르타고와 전쟁을 시작했다.378년 시라쿠사군이 디오니시우스의 친정 하에 카발라에서 마고의 카르타고군을 대파했다. 카르타고는 전사자만 1만 이상, 포로로 5천 이상이 발생한 참패를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사르데냐와 아프리카에서 카르타고에 대한 반란이 터졌다. 전선의 확대를 감당하지 못한 카르타고가 시라쿠사에 강화를 요청했다, 그러나 시라쿠사가 강화 조건으로 요구한 것은 카르타고 세력의 시칠리아 완전 철수로, 이는 카르타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원전 376년, 이번에는 카발라 전투 패장의 아들 히밀코가 크로니움에서 시라쿠사군을 대파, 시라쿠사군은 1만 4천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전쟁에 지친 양국은 시라쿠사가 카르타고에 1000 탈렌트를 배상금으로 지불하고 아크라가스와 셀리누스를 카르타고가 차지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는다.
3.6. 제5차 시칠리아 전쟁
기원전 368년, 디오니시우스가 릴리바이움을 포위하면서 제5차 시칠리아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전쟁 이듬해 디오니시우스가 병사하면서 디오니시우스 2세와 카르타고의 강화로 끝을 맺는다.3.7. 전간기
카르타고에서는 5차 시칠리아 전쟁 와중 이적행위를 명목으로 다카당(대 시라쿠사 강경파벌)의 대한노가 하토당(대 시라쿠사 온건당)의 수니아톤을 체포하고 처형하면서 다카당의 득세가 시작되었다. 대한노는 이어서 하토당 의원들을 암살하고 리비아, 누미디아에서 반란을 사주하는 등 왕위에 오를 야심을 품었으나 결국 폭주의 대가로 멸문당하고 말았다. 와중에 왕권은 점점 약화되었고, 귀족 공화정으로 점차 이행하게 된다.카르타고의 마고 왕조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나 주도권은 원로원이 쥐고 있었고, 원로원은 전간기 약 20년 동안 걸출한 참주 디오도시우스의 사망 이후 혼란에 빠진 시칠리아에 대해 직접적인 원정 대신 반카르타고 파벌을 억제하고 친카르타고 파벌을 지원하는 식으로 대외 정책을 유지했다.
와중 시라쿠사에서는 디오니시우스 2세가 디오니시우스의 친구 디온에게 부탁하여 플라톤을 초빙하고 철인정치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 그러나 결국 플라톤의 정치가 너무 이상적이라 판단해 그를 추방하고 마는데, 이에 분노한 디온이 쿠데타를 일으켜 디오니시우스 2세를 추방하고 권력을 잡는다.[12] 그러나 디온의 정치는 지나치게 이상적이었고, 결국 독재정이 되어 시민들에게 추방당하고 말았다. 이후 시라쿠사는 공화파의 분열과 내분으로 혼란에 빠졌다.[13] 디오니시우스 2세는 기원전 346년 군대를 끌고 시라쿠사의 참주로 복위했으며, 이번에는 반대로 공화파 인사들이 추방되어 레온티니로 망명했다. 레온티니 참주 히케타스는 디오니시우스가 장악했던 패권을 자신이 이어받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기에 공화파 인사들을 앞세워 시라쿠사 해방을 약속했다.
히케타스는 카르타고, 코린토스 등과 외교적인 협상을 벌였는데, 시라쿠사의 모도시인 코린토스가 혹시라도 시라쿠사에 구원군을 파견할 것을 우려하여 카르타고의 대군에 대한 허장성세로 코린토스군의 출병을 막으려 들었다. 그러나 이 얄팍한 술책은 금세 들통났고, 분노한 코린토스는 티몰레온을 사령관으로 삼아 원정군을 편성했다. 히케타스가 카르타고의 지원을 받아 디오니시우스 2세의 군을 격파하고 시라쿠사를 포위했으나, 티몰레온은 고작 1000명 정도의 병사로 히케타스를 대파하고 시라쿠사의 구원에 성공했다. 이에 감격한 디오니시우스 2세는 영토와 군대를 티몰레온에게 넘기고 일개 시민의 신분으로 코린토스에 망명해버렸다.
티몰레온의 승리에 고무된 코린토스는 추가 증원군을 편성했고, 히케타스를 구원하기 위해 출병했던 마고는 싸움도 없이 후퇴했다가 카르타고 시민들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렸다. 티몰레온은 그리스 식민도시들의 영역을 대부분 수복한 후 그리스인들에게 이민을 권유했고,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6만이 넘는 그리스인이 응했다고 한다. 티몰레온은 기원전 343년 카르타고 영역까지 공격했다.
3.8. 제6차 시칠리아 전쟁
기원전 341년[14], 카르타고는 하스드루발과 하밀카르를 장군으로 임명하고 보병 5만과 전차 300대, 공성장비와 군수물자 등을 릴리바이움에 양륙시켰다. 특이한 점은 카르타고 신성 기병대을 비롯한 시민병들이 참전했다는 건데, 보통 용병을 군대의 근간으로 삼던 페니키아인들로서는 흔치 않은 시민병의 동원이었다. 카르타고 대군의 등장에 그리스 군은 공포에 질렸고, 당장 용병 4천여명이 탈영해버렸다. 티몰레온은 이에 대해 겁쟁이들의 이탈은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요지의 연설로 사기를 진작하고 카르타고군과 크리미소스 강변에서 대치했다(기원전 339년).티몰레온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크리미소스 전투에서, 양군이 근접전에 돌입할 무렵 폭우로 불어난 강물이 난데없이 카르타고군을 덮치는 상황이 발생했고, 카르타고군은 물살을 피하려다 혼란에 빠져 궤멸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신성 기병대와 카르타고 시민 중장보병 1만을 포함하여 3만이 넘는 카르타고군 전사했다. 티몰레온은 200대의 전차, 1만개의 방패, 갑옷 1000벌, 엄청난 양의 귀금속과 포로 5000명을 노획했다.
카르타고는 패장 하스드루발을 처형하고 대한노의 아들 기스코를 후임으로 삼아 그리스 용병들과 함께 시칠리아로 파견했다. 일부 참주들이 카르타고와의 동맹을 유지했고, 카르타고와 시칠리아 참주 연합은 두 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또 다시 티몰레온에게 대패하면서 히케타스도 붙잡혀 처형당했다. 결국 전투 의지를 잃은 카르타고는 기원전 338년 라쿠스강을 경계로 하고 시라쿠사로 이주하는 이들의 안전을 보장하며 참주들과의 동맹을 해제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는다.
3.9. 제7차 시칠리아 전쟁
시라쿠사 과두정에 반대하다 추방된 아가토클레스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추방된 후 남이탈리아의 용병대장으로 일하다 레온티니의 참주로 등극했다. 참주가 된 그가 시라쿠사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자 시라쿠사가 시칠리아 주둔 카르타고군 사령관 하밀카르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하밀카르는 시라쿠사 과두정이 가망없다 보고 양자 화해를 주선했다. 이 과정에서 하밀카르가 아가토클레스에게 리비아 용병 5천을 보내주었는데, 아가토클레스는 그 병사들을 써서 1만에 달하는 시민을 살해, 혹은 추방한 후 시라쿠사를 완벽하게 장악해버렸다. 이후 그는 겔라, 아크라가스, 메시나 등 이웃 도시들까지 공격해서 병합했다.뒤통수를 맞은 카르타고는 분노하여 하밀카르를 해임하고 기스코의 아들 하밀카르를 사령관으로 삼아 원정군을 파견했다. 하밀카르는 기원전 310년 시라쿠사군을 격파하고 시라쿠사를 포위했는데, 궁지에 몰린 아가토클레스는 위위구조라는 계책을 떠올리고 실행한다. 해방노예와 자유민 1만 4천 명을 60척의 배에 태워 카르타고 본진에 드랍한 것이었다. 아가토클레스의 원정군은 아프리카에 상륙하자마자 배를 불태워 파부침주까지 실행한 후 대대적인 약탈에 돌입했다.
뜬금없이 등장한 시라쿠사군에 대해 시라쿠사군이 여기 왔다는건 시라쿠사에 나간 원정군이 전멸했다는 말이겠지?라고 오해한 카르타고는 패닉에 빠져버렸고, 시민들이 원로원에 몰려가 대책 마련을 따졌다. 와중 하밀카르가 '원정군 건재'를 연락해 와 상황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카르타고 원로원은 보밀카르와 한노를 사령관으로 삼고 신성 기병대를 포함한 3만을 편성하여 응전했다. 문제는 보밀카르와 한노의 당파가 달랐다는 점. 보밀카르는 전선을 이탈해버렸고, 한노는 신성 기병대 대부분과 함께 전사해버렸다.[15] 또다시 패닉에 빠진 카르타고는 멜카르트 신에게 바치는 황금을 모도시 티레로 보내고,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귀족 자녀 300명을 인신공양했다.[16] 카르타고 본토에서의 패배는 카르타고의 식민 지배력 또한 약화시켜 리비아인들의 이탈을 불렀고, 키레나이카 총독 오펠라스[17]까지 시라쿠사군에 참전했다. 설상가상으로 이탈한 보밀카르가 귀환해 카르타고 신시가지에서 쿠데타까지 일으켰다. 카르타고가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나뉘어 내전에 돌입하는 난리가 나자 장로들의 중재로 면책할테니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권고했다. 이에 보밀카르가 순순히 무기를 내려놓자 보밀카르를 제외한 전원은 용서하되 보밀카르는 고문당하고 처형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최측근이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오펠라스가 아가토클레스를 무시하자 아가토클레스는 키레나이카군을 속여 기습했고, 오펠라스는 자결하고 말았다. 이미 근거지에서 2000km 이상 떨어져 갈 곳이 없었던 키레나이카군은 시칠리아군에 흡수되었고, 시칠리아군은 히포와 우티카를 점령하고 함대를 건조했다. 원정군을 이끌고 있엇던 아가토클레스는 아들 아르카가토스와 교대해 시칠리아로 귀환한다. 아가토클레스가 사라진 것을 눈치챈 카르타고는 다시 3만을 편성해 시칠리아군을 공격, 튀니스에 몰아넣고 격파했다.
전쟁이 길어지자 지친 양측은 강화에 나섰고, 양측의 시칠리아 기존 국경을 회복하고 카르타고가 시라쿠사에 200 탈렌트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합의에 성공했다(기원전 306년). 아가토클레스는 왕위에 올랐다.
4. 결과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전쟁에 묶여 성장 동력의 대부분을 빼앗겨버렸다. 비슷한 시기 수 차례의 대전쟁을 겪었던 라이벌이 상대방을 흡수하여 성장한 것과 비교하면 이후 카르타고의 역사에 암운을 드리운 신호탄이라고 볼 수 있다.이후로도 시칠리아는 핀티아스, 히케타스, 티니온 등 유력 참주들에 의한 혼란이 계속되었고, 와중 카르타고는 기원전 278년 5만의 육군과 100척의 함대를 동원해 마지막 시라쿠사 공성전을 감행한다. 그러나 이 전쟁은 시칠리아 전쟁에 포함되지 않는데, 동쪽 그리스에서 새로운 참전자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참전자에 대항하기 위하여 카르타고는 로마와 동맹을 맺었고[18], 결국 로마는 육지에서, 카르타고는 바다에서 그를 꺾는데 성공했다.[19] 브로델은 이 전쟁을 지중해의 중심축에 로마 대신 그리스를 두려던 최후의 시도가 실패한 것이라고 평가했는데, 그리스 문명이 등장한 이래 줄곧 그리스와 해양 패권을 두고 경쟁했던 페니키아 문명이 이제 지중해 중심축에 설 로마의 마지막 대항마로 남게 되었다.
한편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는 피로스에 대해
"피로스는 주사위를 던질 줄은 알지만 그 주사위를 활용하지는 못하는 것 같네."
라고 평가했는데, 모 국내 작가는 이를 두고 피로스는 전쟁만 잘하고, 카르타고는 전쟁 빼고 다 잘한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뒤에 의미심장한 말을 붙인다. 이제 본격적으로 등장할 로마는 그 모두를 잘하는 나라라고.
5. 주요 전투
5.1. 1차
- 히메라 전투(BCE 480)
5.2. 2차
- 셀리노스 전투(BCE 409)
- 히메라 전투(BCE 409)
- 아크라가스 공성전(BCE 406)
- 겔라 전투(BCE 405)
- 카마리나 전투(BCE 405)
5.3. 3차
- 모티야 포위전(BCE 398)
- 세게스타 포위전(BCE 398)
- 메시나 전투(BCE 397)
- 카타나 전투(BCE 397)
- 1차 시라쿠사 포위(BCE 397)
5.4. 4차
- 카발라 전투(BCE 378)
- 크로니움 전투(BCE 376)
5.5. 5차
- 릴리바이움 포위전(BCE 368~367)
5.6. 6차
- 2차 시라쿠사 포위(BCE 344~342)
- 크리미소스 전투(BCE 339)
5.7. 7차
- 히메라 강 전투(BCE 311)
- 3차 시라쿠사 포위(BCE 311~309)
- 1차 튀니스 전투(BCE 310)
- 2차 튀니스 전투(BCE 309)
5.8. 피로스 전쟁
- 4차 시라쿠사 포위(BCE 278)
- 메시나 해전(BCE 276)
[1] 3차의 마고와 다른 인물[2] 2차, 3차의 히밀코와 다른 인물[3] 1차의 하밀카르와 다른 인물[4] 기스코의 아들[5] 이 제도의 명칭은 페니키아 민족의 주신인 바알의 섬들이라는 데서 비롯되었다.[6] 오히려 시칠리아섬 북단-동단의 이오니아계 그리스 식민도시들과 동단-남단의 도리아계 그리스 식민도시들 간의 분쟁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카르타고 세력과 그리스 세력의 충돌이 아예 없지는 않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스파르타의 왕자 도리에우스(300으로 유명한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의 형이다)가 시칠리아 개척에 나섰다가 카르타고 세력과의 분쟁으로 객사한 적이 있다.[7] 사절을 파견한 크세르크세스 1세는 카르타고를 티레의 종속국으로 착각한 듯 하다. 그 착각에 따르면 카르타고는 페르시아 종속국의 종속국이 되는 셈이다. 카르타고 해군이 그리스 앞바다까지 진출할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시칠리아를 공격하여 현지의 그리스 도시들이 본토에 원군을 보내지 못하도록 묶어두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계산한 모양이었다.[8] 카르타고가 지중해 서부에서 유일하게 식민지를 건설하지 않은 지역이 이탈리아라는 것(딱 하나를 나폴리 근방에 건설하기는 했으나, 여기는 에트루리아가 아니라 그리스 세력권이다)을 생각해보면 카르타고-에트루리아의 동맹이 생각보다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9] 카르타고군은 팔라리스의 황소를 노획해 카르타고로 보냈는데, 제3차 포에니 전쟁 후 이를 발견한 로마군이 재건된 아크라가스로 반환한다.[10] 이 덕분에 디오니시우스는 전쟁에 공학적으로 설계된 투석기를 처음 사용한 인물이 되었다.[11] 지휘관 히밀코는 노예 복장으로 귀국해 칩거한 뒤 자살했다.[12] 이 과정에서 카르타고의 지원을 받았다.[13] 디온은 추방에서 돌아와 살해당했고, 디오니시우스 2세가 복위하게 되는 기원전346년까지 시라쿠사의 참주는 디온, 칼리포스, 히파리노스, 니사이오스 등으로 계속 바뀌었다.[14] 카르타고의 직접적인 참전은 이 때이지만, 보통 티몰레온이 히케타스를 격파한 기원전 345년을 6차 전쟁의 시점으로 잡는다.[15] 이 시점을 끝으로 신성 기병대에 대한 기록은 역사에서 퇴장한다.[16] 로마가 칸나이 전투에서 받은 충격과 비슷했을 것이다.[17] 알렉산드로스의 친위대원 출신으로 디아도코이 때 프톨레마이오스 1세 진영에 참가하여 키레나이카 총독이 된 인물이다.[18] 카르타고가 로마와 맺은 첫 조약의 내용은 카르타고가 에트루리아와 맺었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카르타고는 초기의 로마를 에트루리아계 소국으로 생각했던 듯 하다.[19] 피로스가 시칠리아에서 퇴각할 때 카르타고는 그의 함대를 공격해 2/3를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피로스의 기함도 노획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