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18:40:06

대 디오니시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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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쿠사 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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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bfff><colcolor=black> 대 디오니시오스
Διονύσιος
파일:대 디오니시오스.jpg
생몰년도 기원전 430년대 ~ 기원전 367년
출생지 시칠리아 시라쿠사
사망지 시칠리아 시라쿠사
지위 시라쿠사 참주
국가 시라쿠사
가족 헤르모크리토스(아버지)
도리스(첫째 아내)
아리스토마체(둘째 아내)
소 디오니시오스(아들)
헤르모크리토스(아들)
히파리노스(아들)
니사이오스(아들)
아레테(딸)
소프로시네(딸)
시라쿠사의 참주
재위 기원전 405년 ~ 기원전 367년
전임 민주정
후임 소 디오니시오스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참주가 되다2.3. 카르타고와의 전쟁2.4.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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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라쿠사 4대 참주.

2. 생애

2.1. 초기

시칠리아의 저명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출생년도는 불명확하며 대략 기원전 430년대에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아버지 헤르모크라테스가 초빙한 뛰어난 변설론자들로부터 웅변술을 익혔다. 초기에는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공직 경험을 쌓았으며 시라쿠사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해군 지휘관인 헤르모크라테스[1]의 당파에 들어갔다. 기원전 410년 키지코스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에게 패배하고 추방당한 헤르모크라테스가 기원전 407년 시라쿠사로 복귀하기 위해 쿠데타를 시행했을 때, 그는 소수의 용병들을 거느리고 이에 가담했다. 그러나 쿠데타는 실패하고 헤르모크라테스는 피살당했으며 디오니시오스도 중상을 입었다. 시라쿠사 정부는 헤르모크라테스 추종자들을 죽이거나 추방했지만 그는 처벌을 모면했을 뿐만 아니라 능력을 인정받아 시라쿠사군 장성들의 개인 비서로 취직할 수 있었다.

기원전 406년 12월 시라쿠사의 오랜 숙적인 고대 카르타고가 시라쿠사군을 격파하고 아르라가스(오늘날 아그리젠토) 시를 정복했을 때, 전투에 참여했던 그는 민중 웅변가로서 패배를 막지 못한 장군들을 비난하면서 대귀족과 부자들이 비애국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일로 시라쿠사 정부로부터 선동 혐의로 막대한 벌금을 지불해야 했지만, 그의 확고한 지지자였던 상류층 인사 필라스토스가 대신 지불해줬다. 이후 대표적인 민중파를 자처한 그는 민회를 설득해 시라쿠사 장군들을 해산시키고 새로 선출된 장군들 중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기원전 405년 봄, 그는 민회에 의해 무제한의 권한을 가진 스트라테고스 아우토크라토르(strategós autokrátor: 단독 지휘관)에 선출되었다.

2.2. 참주가 되다

기원전 405년 여름, 그는 군대를 일으켜 쿠데타를 단행하고 헌법을 사실상 전복하고 참주에 올랐다. 이후 어느 젊은이를 매수해 자신을 암살 시도하는 척 하게 한 뒤, 이를 빌미로 600명의 경호원을 두는 걸 민회로부터 허락받았다. 얼마 후엔 그 숫자가 1,0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오직 그에게만 충성을 바쳤고, 민회와 완전히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제공했다. 그러면서도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기원전 398년 또는 393년에 로크리의 도리스와 히파니오스의 딸인 아리스토마체와 거의 동시에 결혼했다. 이러한 중혼은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이 일로 큰 비난을 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는 결혼을 진행하기 전에 이탈리아 남부의 레기온인들이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는 걸 막고자 레기온 여인과 결혼하여 동맹을 강화하려 했지만 거절당하자 차선책으로 시라쿠사의 유력 귀족 집안의 두 여식을 아내로 삼은 것이다. 그는 도리스와의 사이에서 소 디오니시오스와 헤르모크리토스를 낳았으며 아리스토마케와의 사이에서는 히파리노스, 니사이오스, 아레테, 소프로시네를 낳았다.

한편, 그는 카르타고의 공세에 위협을 받고 있는 겔라 시로 이동했다. 당시 겔라 시는 민주파와 과두파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는데, 그는 민주파의 승리를 도왔다. 부유한 상류층에 대한 재판과 처형을 주선했으며, 그들로부터 압류한 재산을 활용하여 용병들에게 급료를 지불했다. 그 결과, 겔라 시의 빈민과 군대 모두에게 인기를 얻었다. 기원전 405년 7월, 카르타고 장군 히밀코가 겔라 시를 포위했다. 그는 3개 분견대를 편성해 적의 정면과 양 측면을 동시에 타격하는 작전을 구사했지만, 각 분견대가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움직이다가 각개격파당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 후 겔라 시민들을 동쪽으로 이동시키면서 카마니아 인들에게도 대피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시칠리아 남부 해안 전체가 카르타고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하지만 기원전 405년 말 카르타고 군영에서 역병이 발생하면서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하기 어렵게 되자, 카르타고인들은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고, 그는 이를 수락했다. 그는 시라쿠사의 참주로 인정받았지만, 그가 자신의 제국에 통합하기를 원했던 그리스 및 비 그리스 도시 일부는 카르타고인들의 속국이 되었고 성벽을 부숴야 했으며, 나머지는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이 협약은 카르타고나 시라쿠사 영토와 국졍을 접하지 않은 메사나(지금의 메시나) 같은 도시를 포함하여 시칠리아 전체에 적용되었다. 이 협약은 힘의 균형에 대한 전반적인 규정으로서, 카르타고와 시칠리아 그리스인 간의 협약의 전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영토 확장을 불가능하게 만든 협약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원전 404년 협약을 파기하고 헤르베소스 시를 공격했으나, 병사들이 도중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충성을 유지한 용병들과 함께 가까스로 빠져나온 뒤 시민들의 소요를 막기 위해 시라쿠사로 서둘러 향했다. 그러나 반란군은 한 발 앞서 시라쿠사 내 참주 반대파와 손을 잡고, 메사나와 레기온의 도시들과 동맹을 맺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라쿠사를 지킬 수 없었던 그는 오르티가 섬으로 후퇴해 요새를 세웠다. 이 섬은 둑길로 시라쿠사 시와 연결되었으며, 외해로부터 항구를 봉쇄했다.

시라쿠사인들은 몇달 동안 오르티가를 포위 공격했다. 그는 굳건히 버텼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용병들이 "항복하면 시민권을 주겠다"라는 적군의 회유에 넘어가 배신하기 시작하자 입지가 크게 약해졌다. 그는 일단 시라쿠사인들과 항복 협상을 진행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전에 카르타고 편에서 싸웠던 서부 시칠리아 출신 용병들을 모집했다. 여기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하여 그리스의 지배 세력이 된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았다. 병력을 성공적으로 규합한 뒤, 방심하고 있던 시라쿠사를 기습 공격해 공략했다. 하지만 시민들에게 보복하는 대신 관용을 베풀었다. 이때부터 그가 사망할 때까지 어떠한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2.3. 카르타고와의 전쟁

실각 위기에서 벗어난 후, 그는 기원전 403년에 팽창 정책을 재개했다. 중앙 및 북동 시칠리아 지역의 자치 도시들에 대한 공세를 개시해 그들의 영토를 황폐화했고, 정복한 도시의 시민들을 노예로 팔았다. 또한 시라쿠사에 새로운 대규모 요새를 건설하기로 하고, 도시의 북서쪽에 있는 에피폴라이 고원을 성벽으로 둘러싸고 시라쿠사의 고리 성벽에 포함시켰으며, 고원 위에 에우랄로스 요새를 건설했다. 한편 200척 이상의 선박을 건조했는데, 그 중 일부는 신형 공성 무기를 장착했다.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뒤 실직한 장병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그렇게 군비 증강이 완료된 뒤, 그는 민회를 소집하고 카르타고의 지배로부터 모든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시키자는 명분을 내세우며 카르타고와 전쟁을 재개하자고 제안해 승인을 받아냈다.

기원전 398년 봄 카르타고를 향해 전쟁을 선포한 그는 8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시칠리아 전역을 휩쓸며 시칠리아 극서쪽으로 진군했다. 이후 카르타고 함대의 기습 공격을 격퇴해가며 모티예 시를 포위 공격한 끝에 그해 겨울에 함락시켰다. 기원전 397년 봄, 히밀코가 이끄는 카르타고 함대와 육군이 파노르모스(현재 팔레르모)에 상륙한 뒤 모티예를 비롯한 여러 마을을 재빨리 탈환했다. 그는 서부 시칠리아를 포기하고 동쪽으로 후퇴했다. 히밀코는 서부 시칠리아를 회복한 뒤 시칠리아 북쪽 해안을 따라 진군하여 남부 이탈리아에서 원군이 오는 걸 사전에 차단하고 메사나를 정복했다. 이에 수많은 시라쿠사 동맹 도시들이 카르타고 편을 들었다. 게다가 카타니아 해전에서 카르타고 함대가 시라쿠사 함대를 상대로 100척을 격침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전세가 악화되자, 그는 시라쿠사에서 농성하기로 했다.

카르타고군은 시라쿠사에 도착한 뒤 기원전 396년 여름까지 공성전을 이어갔다. 그러나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많은 병사가 사망했고 사기가 저하되었다. 새로운 용병을 모집하고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은 그는 기습 공격을 감행해 카르타고 육군을 격파했다. 이와 동시에, 시라쿠사 함대는 적 함대를 시라쿠사 앞바다에서 쳐부쉈다. 히밀코는 잔여 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로 달아났다. 그는 적이 패전의 여파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재공격을 가해 상당한 영토를 회복했다. 카르타고는 이에 맞서 기원전 392년 다시 대규모 함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양측은 거듭된 전쟁으로 탈진했고, 양측은 평화 협상을 맺기로 했다. 기원전 392년에 체결된 평화 협약은 두 나라가 시칠리아 섬을 분할하는 걸 다시 합의했지만, 세부적인 사항은 기원전 405년에 맺은 협약에 비해 그에게 훨씬 유리했다. 그는 이 협약에 따라 카르타고에 속하지 않은 도시 국가들을 카르타고의 동의 없이도 공격할 수 있었다.

기원전 390년 가을, 그는 메시나 해협을 장악하기 위해 레기온 시로 진격했다. 그러나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상호 방위 협약을 맺어뒀기 때문에, 그의 공세는 별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에 작전을 변경해 중부 이탈리아의 루카니아인과 동맹을 맺고 기원전 388년 엘레포로스(오늘날 스틸라로) 강 어귀 북쪽의 카울로니아 시를 포위 공격했다. 이에 남부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국가들이 원군을 보냈지만, 엘레포로스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이후 카울로니아를 함락한 그는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주민들을 시라쿠사로 이송시켯다. 뒤이어 스카일레티온(오늘 스퀼레이스)를 정복했다. 하지만 주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대신 몸값을 받지 않고 1만 명의 포로를 석방시키는 등 온건 정책을 구사해 그들의 마음을 사고자 했다. 그는 정복한 도시인 카울로니아, 스카일레티온 및 히포니온을 동맹국인 로크리 인에게 넘겼다. 로크리는 공식적으로는 자치권을 유지했지만, 실제로는 그의 통제를 받았다. 남부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 국가들은 그와 전쟁을 벌이길 꺼려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리하여 남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시칠리아에 개입할 여지를 차단한 뒤, 기원전 387년 레기온을 공격하여 11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기원전 386년 함락시킨 뒤 도시를 철저히 파괴했다. 많은 돈을 주고 자유의 몸이 된 이들을 제외한 대다수 시민이 노예 신세로 전락했다. 이리하여 그는 칼라브리아 남쪽부터 스퀼라체 만과 에우페미아 만까지 시라쿠사의 영향력으로 삼는 데 성공했으며,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사이의 해협을 성공적으로 통제했다. 그는 이와 더불어 아드리아 해로 진출하여 오트란토 해협을 통해 에페이로스로 가는 항로를 통재하고 아드리아 해 연안에 항구 도시를 건설했다. 그러나 여전히 동맹을 맺고 있던 스파르타가 반발할 것을 예성해 북서 그리스로의 추가 공세는 벌이지 않았다. 기원전 384/383년, 그는 이탈리아 서부 해안을 따라 진군하여 에트루리아를 상대로 공세를 벌였다. 그의 군대는 에트루리아의 카에리 시의 항구인 피르기를 공략하고 상당한 전리품을 획득했다. 여기에 별개 함대를 코르시카로 파견해 역시 상당한 전리품과 노예를 획득했다.

이렇듯 세력을 확장하던 그는 카르타고의 영향권에 있던 서부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은밀히 동맹을 맺고 카르타고를 축출할 기회를 노렸다. 이 사실을 간파한 카르타고는 기원전 382년 전쟁을 선포하고 남부 이탈리아의 반 시라쿠사 세력과 동맹을 맺은 뒤 처음으로 이탈리아 본토에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그는 이탈리아 본토의 적군 기지인 크로톤 시를 공략하고, 시칠리아의 카르타고군을 상대로 카발라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카르타고인들에게 시칠리아에서 완전히 철수하라고 요구했으나, 카르타고인들은 단호히 거부하고 다시 반격을 가했다. 기원전 374년 크로니온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시라쿠사군의 기세가 꺾여버리자, 그는 어쩔 수 없이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양측은 할리코스 강을 경계로 삼아 시칠리아를 양분하기로 했다. 기원전 368년, 그는 대형 화재가 나서 카르타고 함대 전체가 파괴되었다는 잘못된 소식을 전해듣자 평화를 깨고 카르타고를 다시 공격했다. 그의 군대는 처음에는 시칠리아의 서쪽 끝까지 이르렀지만, 카르타고 함대의 성공적인 반격으로 인해 보급이 끊기자 본국으로 철수해야 했다. 이후 양측은 이전의 국경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2.4. 말년

이렇듯 카르타고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이는 한편, 권력 기반을 다지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는 구 헌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지 않았으며 시민의 대표자로서 민회를 계속 열고 중요한 결정에 대해 그들의 승인을 얻는 관행을 이어갔다. 그러나 민회는 최고위직을 선출할 권한을 상실하고 법안을 스스로 발의할 수 없었다. 또한 그는 정적들을 추방하고 자신의 고위 장교들과 부하들을 새로운 귀족으로 세웠다. 이 새로운 귀족들은 참주의 가족과 인척들을 중심으로 뭉쳤으며 이들이 시라쿠사의 정치, 외교 및 군사적 임무를 장악했다.

한편 그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마무리한 후 페르시아를 모델로 삼아 왕실 예복을 입고 궁정을 화려하게 치장해 자신이 사실상 시칠리아의 국왕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과시했다. 그리고 당대의 명사들을 초빙하여 시, 연극, 조각상 등 예술 활동을 마음껏 벌이게 했다. 이 시기(기원전 387년 경)에 아직 그리 유명하지 않았던 플라톤도 시라쿠사를 찾아왔는데 디오니시오스는 특별히 그의 주장에 귀기울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이 디오니시오스의 참주 정치와 궁정에서의 호화로운 생활을 비판하자 디오니시오스가 격노하여 플라톤을 노예로 팔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나 현대 학자들은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로 간주한다.[2] 플라톤은 대 디오니시오스가 죽은 후부터 시라쿠사에서 주목할 만한 정치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의 출생만큼이나 죽음도 베일에 쌓여 있는데, 사망년도가 기원전 367년이라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몇몇 문헌에 따르면 아테네에서 열린 레나이아 축제에서 자신이 출품한 비극 작품인 "헥토르의 몸값"이 수상하자 너무 기뻐서 술을 흠뻑 마시다가 죽었다고 한다. 일부 문헌에 따르면, 아들 소 디오니시오스가 의사들을 설득해 아버지가 복용할 수면제의 양을 과도하게 늘려서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유스티누스는 그가 친족들의 음모로 살해되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설들은 모두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큰 풍파 없이 자연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원전 367년에 사망한 뒤 아들 소 디오니시오스가 시라쿠사 참주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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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 디오니시오스의 아버지와 동명이인이다.[2] 다만 노예로 팔지 않았을 뿐이지 디오니시오스가 플라톤의 비판에 분노해서 그를 시라쿠사에서 쫓아낸 것은 사실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