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제국의 칸나이 전투에 대한 내용은 칸나이 전투(1018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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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나이 전투 / 칸나에 전투 라틴어: Proelium Cannense 그리스어: Μάχη τῶν Καννῶν 영어: Battle of Cannae | ||
시기 | 기원전 216년 8월 2일 | |
장소 | 이탈리아 칸나이 평원[1] | |
원인 | 로마의 조기결전 욕구. | |
교전국 | 카르타고 공화국 | 로마 공화국 |
지휘관 | 한니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한노 마하르발 기스고 |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그 외 원로원 30명 |
병력 | 총원: 50,000명 중장보병: 32,000명 경보병: 8,000명 기병: 10,000명 | 총원: 86,400명[2] 보병: 80,000명 기병: 2,400명 중기병: 4,000명 |
피해 | 사망: 5,700명 부상: 20,000명[3]~28,500명[4] | 사망: 44,500명[5] ~60,000명[6] 포로: 약 19,300명 |
결과 | 한니발의 대승, 그러나 거대한 손실을 입음 로마의 지구전 전개 | |
영향 | 로마 공화정의 재정 및 군대 동원력의 반영구적인 손상[7] 한니발군의 로마 공격 기회 상실 서구 전술학의 기념비적인 발전. |
1. 개요
전투가 벌어진 지역인 Cannae는 당대에 쓰였을 고전 라틴어 발음으로 읽으면 ae 이중모음이 ㅏㅣ가 된다. 고전 라틴어 발음은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에 고증으로 재구성된 것이기는 하나, 최소한 ae 이중모음(dipthong)의 발음은 로마 시대 동방 식민주들과 그리스어 문화권에서 헬라어 알파벳으로 Caesar라는 이름을 "Kaisar"라 음가를 표기했으므로 "ㅏㅣ"라 읽는 것은 확실하다.
이후 ae는 교회 라틴어(그러니까 속라틴어)에서 ㅔ 또는 ㅐ로 읽게 되었는데, 교회 라틴어 발음은 물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이지만 이건 로마 시대 말기의 속라틴어가 전해진 것이니 당대의 발음이 아니었다. 현대 이탈리아어에서는 그냥 Canne(칸네)라고 읽어버린다.
2. 전투 이전의 경과
기원전 218년,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바르카가 히스파니아 반도의 친(親)로마파 도시인 사군툼을 공격하면서(사군툼 공방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한니발 바르카는 전쟁에서 로마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제1차 포에니 전쟁과는 다르게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 본토를 직접 공략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당시, 대부분의 전투는 카르타고의 영역권인 시칠리아 섬과 북아프리카에서 벌어졌다. 그로 인해 상업국가였던 카르타고는 경제력에 점차 타격을 입으며 전쟁을 지속하는 데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패전하고 말았다. 한니발은 이때의 교훈을 가지고, 이탈리아 반도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뒤, 로마의 동맹시들을 카르타고 편으로 끌어들여 로마 연합을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켰다.
한니발은 약 5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히스파니아 반도의 사군툼을 공략한 뒤, 즉각 피레네 산맥을 넘어 남프랑스에 도달했다. 로마군이 대응하기 전에 속도를 높인 한니발의 군대는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알프스 등반을 거쳐 로마군에 방해받지 않고, 북이탈리아 지역에 진입할 수 있었다. 알프스를 등반하며 험한 산세와 산악 민족들의 공격을 받아 한니발의 군대는 보병 20,000명, 기병 6,000명으로 줄어들었으나 한니발은 로마에 원한을 가진 인근 갈리아족을 설득하여 용병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모자란 군대와 물자를 보강했다.
북이탈리아을 장악하고 있는 카르타고군을 저지하기 위해 출격한 로마군은 티키누스 전투에서 로마 기병대가 격파되는 것을 시작으로 트레비아 전투와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참패하며 이탈리아 북부를 상실하고 말았다. 두 전투에서 집정관을 포함하여 무려 50,000명에 달하는 로마 병사들이 전사했고, 로마군은 한니발의 공격을 막을 수단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탈리아 중부를 휩쓰는 와중에도 적의 심장부인 로마를 공격하지 않았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방어에 나설 로마를 공략하기에는 공성무기가 부족한 데다가[8] 사군툼 점령에만 100,000명 이상을 동원했음에도 장기간의 공성전을 벌인 기억으로 인해 섣부르게 공격에 나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에 로마 세력이 건재한 이상,[9] 로마 공성전이 장기화되면 이탈리아에서 규합된 로마군이 동맹시의 보조병들과 합세하여 앞뒤에서 카르타고군을 공격할 위험성도 있었다.
한편 두 전투에서 대패한 로마는 비상사태에 돌입하여,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에 임명하고 전권을 부여했다. 파비우스는 전면전으로 승리를 거두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여 전투를 피하고 적의 보급을 방해하며 물자 부족으로 카르타고군을 소모시키는 지연전략으로 한니발을 괴롭혔다. 그러나 이 전략의 맹점을 간파한 한니발이 인근 지역을 휩쓸어 보급을 충당하고 로마인들의 민심 이반을 꾀하자, 누적되는 피해를 견디다 못한 로마 시민과 원로원은 파비우스를 겁쟁이라며 규탄하기 시작했다. 한니발은 약탈을 거듭하면서도 파비우스 소유의 농지는 의도적으로 건들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파비우스는 더 큰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10]
한니발이 실수로 캄파니아의 분지 지형에 들어가서 카르타고군은 보급이 끊겨 곤란을 겪었는데 이 와중에 파비우스가 뒤따라와 그들을 포위했다. 안내를 맡은 현지인이 카르타고인의 발음을 못 알아들어 카시눔으로 안내를 부탁했는데 카실리눔이라는 곳으로 안내한 것. 이후 로마군이 그 지역의 카르타고군을 포위하자 한니발은 길잡이를 십자가형에 처했다.
이후 파비우스는 한니발에게 전술적으로 농락당하게 된다. 한니발은 자신의 부하를 모아놓고 오늘 밤 이 포위망을 돌파하겠다고 호언했다. 그 뒤 한밤중에 소떼의 뿔에 불을 붙이고 산 위에 풀어놓자 큰 소동이 일어났는데 파비우스는 이것을 한니발의 유인책이라고 판단하여, 자신의 군대에게 일절 대응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때 한니발군은 소리를 죽인 채 전원이 파비우스 부대가 지키는 산길 바로 아래쪽 길을 통과해 그 포위망을 빠져나와 버렸다. 파비우스는 자신의 부대 코 앞에서 한니발군이 통과하는 것을 허용한 것이었다. 안 그래도 파비우스의 지연 전략이 마음에 안 들던 차에 한니발에게 속아서 도망을 허용한 일까지 벌어지자 로마 시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또한 파비우스가 이끄는 병사들과 휘하 장교들도 그의 전략을 강하게 비판했는데, 한니발이 약탈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는 상황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파비우스는 이를 해명하기 위해 로마로 소환되어 민회와 원로원의 집중 성토를 당하게 되었고, 독재관으로서 받은 임페리움을 보좌역의 기병장관과 나누어 가지라는 수모를 당했으며, 뒤이어 이어진 선거에서 결전을 주장하는 민중들의 여론이 반영되어 주전파들이 선출되었다.
파비우스는 독재관 임기를 마무리지었고, 원로원은 독재관 임기를 연장하지 않으면서 다음해에 뽑힐 집정관들에게 군대의 지휘권을 맡겼다. 새로 선출된 집정관들은 바로와 파울루스로 이들은 조기 결전파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니발과 결전을 벌일 예정이었다. 원로원은 로마 군단병으로 8개 군단을 뽑았고, 같은 수의 동맹시 군단을 동원했다. 각 군단은 5,000명으로 총 병력은 보병 80,000명, 기병 6,400명이었다. 이에 대해 로마 공화정 시대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원로원은 8개 군단을 새로 뽑기로 결정하였고 이것은 로마 역사에서 전례없던 일이었다. 각 군단은 5,00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동맹군 역시 이와 비슷한 규모였다. 여태껏 대부분의 전쟁은 한 명의 집정관이 2개의 군단과 그에 해당하는 동맹군을 지휘하였을 뿐이고 4개의 군단이 지휘받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한니발이 이탈리아에 있는 상황은 로마 시민들로 하여금 상당히 위기감과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으므로, 원로원은 4개 군단이 아닌 8개 군단을 한꺼번에 전장에 투입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한니발은 로마가 결전에 나서자 이탈리아 남부의 아풀리아에서 로마군을 맞을 준비를 했다. 한니발의 군대는 보병 40,000명, 기병 10,000명으로 총 병력은 50,000명이었다.
3. 로마군의 준비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로마군이 그냥 병력만 많이 뽑아 빨리 싸우려고만 한 듯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과연 로마군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철저히 준비했다.일단 로마군은 일대 결전의 결심을 한 이후부터 전투를 금지했다. 신임 집정관이 선출되고, 칸나이 전투가 벌어진 7개월에 걸쳐 이탈리아에서는 전투가 없었는데, 이는 새로 징병한 신병의 훈련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 것이었다.
또한 이전의 전투도 철저히 연구해서 전술을 짰다. 배치 부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전 전투에서 모두 박살나긴 했어도 트레비아 전투에서 로마군이 포위당한 상황에서 카르타고군 중앙 전열을 돌파하여 전멸을 면한 바 있었다. 로마는 이것이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해서 보병전으로 적진을 뚫는 것에 주력했다.
또한, 로마군은 이미 한니발과의 여러 교전을 통해, 한니발의 천부적인 병력 기동 능력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과, 기병 전력에서의 절대적 열세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군은 아무리 자신들이 머리를 굴려 봐야 무조건적으로 포위당할 것을 가정하고 작전을 준비했다.
이를 위해 로마군이 선택한 전장인 칸나이는 양쪽으로 방해되는 지형이 있어서(한쪽에는 강, 한쪽에는 숲), 측면 병력 배치가 제한되는 전장이었다. 즉, 압도적 전열 너비에 맞춰 병력을 배치하느라 보병의 진형이 얇아질 수밖에 없는 한니발이, 얇은 진형을 역이용한 우회 기동력 상승을 발휘할 수 없도록 양 옆에 벽을 쳐둔 상태로 싸우려 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로마군은 절대적인 기병 열세, 특히 매우 치명적 열세인 중기병 열세를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을 알았기에, 우회가 불가능한 강변에 에퀴테스를 배치했다. 아무리 간단히 격파 가능한 허접(?)한 물량의 숙련도도 떨어지는 로마의 에퀴테스라지만, 엄연히 중기병인데다가, 무지막지한 로마군의 병력이 만든 무지막지하기 넓은 대열에 대응하느라 무진장 얇아지는 게 강제된 한니발의 보병진 입장에선, 보병 스스로 중기병 습격을 막아내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했고, 따라서 한니발은 맞 중기병 배치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물론, 로마군의 허약한 에퀴테스는 한니발의 중기병들에게 간단히 격파되어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로마군이 의도한 바였다. 이것은 해당 중기병대의 지휘관이 총지휘권을 가져가지 않은 [11] 희한한 정황에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것인데, 로마군이 워낙 대병력을 준비했기 때문에, 한니발의 중기병대가 우회 기동을 시도해 봐야 그 넓은 병력을 측면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기병전 특성상 한번 추격이 시작되면 멈추기 어려우므로, 애당초 중기병대가 적당한 시점에 계획된 대로 퇴각하여, 한니발의 중기병이 할 일을 없애버리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설령 추격을 그만두고 로마군의 후열을 공격한다 해도, 강변이 길을 막기 때문에 로마군은 간단히 트리아리를 움직여서 중기병대를 상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방해물인 숲에는, 비교적 위협적이지 않은 경기병들을 배치하였고, 여차하면 전투 개시 후 물러선 경보병들이 숲으로 이동해서 경기병을 방해할 수도 있게 하여 상대의 원거리 기병 견제를 차단할 수 있게 하였다. 전술하였듯 한니발은 강제적으로 모든 중기병을 강변의 에퀴테스에 맞서 배치할 수밖에 없었기에 이 또한 로마군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로마군의 병력이 어마어마하게 많았기에 상당히 두터운 대열을 쌓았음에도 로마군의 전열 너비는 3km 이상으로 넓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정도 넓이라고 포위를 안 당하는 것은 아니다. 당초 로마군은 상대가 한니발이니까 어떻게든 포위할 것이라 짐작했다. 그래서 포위전의 의미가 없도록, 측면의 강과 숲이라는 기동 방해물을 통해 한니발이 무조건적으로 가로로는 3km, 세로로도 수백 m는 되는 엄청난 대병력을 직접 둘러싸야만 하도록, 즉, 병력을 포위하는 한니발의 대열 두께가 매우 얇아질 수밖에 없도록 강요하여, 얇아진 보병 대열의 돌파 저지력 약화에는 아무리 천재인 한니발이라 해도 대책이 없다는 것을 노려, 설령 실패하더라도 한니발도 대량의 병력 손실을 입도록 강요할 수 있을 상황을 만든 것이다.
한마디로 로마는 로마가 원하는 시점에, 로마가 원하는 방식으로, 로마가 원하는 곳에서 전투하고자 했고, 이는 그대로 전개되었다. 질 가능성을 최대한 배제한 상황을 만들어서 전투를 치르고자 했고, 그 결과 더 이상 준비할 필요가 없을 만큼 완벽한 전장을 갖추었다.[12]
설령 결국 한니발에게 패배하더라도, 한니발 또한 병력 손실을 크게 입고, 그가 천리 타향에서 고립된 상태인 이상, 이전처럼 큰 피해를 가할 수는 없게 세력을 꺾어 버릴 수는 있으리란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한니발이었다. 로마의 적은 단순히 병력 기동뿐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가 잔뜩 모였을 때 어떻게 움직이게 되는지에 대한 근본 원리를 완벽하게 통달한 천재 중의 천재였다.
4. 전투
4.1. 양쪽 군대
7월 30일 양군은 칸나이 평원에서 마주쳤다.역사가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전투 개시 전 온건파인 집정관 파울루스와 강경파인 바로가 대립했다. 파울루스는 평원에서 한니발과 싸우면 안된다고 만류했지만 바로는 그것을 무시했고, 그 바로가 지휘권을 잡은 날 결전이 벌어졌다고 하면서 로마군의 전력을 말아먹은 바로를 신나게 깐다. 그러나 그리스의 인질이었던 폴리비오스 자신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후견을 받는 지위였고, 파울루스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친할아버지였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피드나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왕국군를 격파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막내아들이었는데 훗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양손자가 된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아버지는 한니발과 대결한 파울루스였다. 즉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양손자이자 파울루스의 친손자인 셈이다. 폴리비오스는 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후견을 받는 상태였으므로 파울루스를 비판하기는 어려운 위치였다.
실제로 우익의 기병대 지휘권을 맡는 사람이 전체 지휘권을 맡는 것이 로마군의 관례인데, 리비우스와 폴리비오스 모두 전투 당일, 파울루스가 우익의 기병대 지휘권을 맡았다고 서술했다.
또한 패배 이후 바로에 대한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태도도 미심쩍다. 사상 최대의 참패를 초래하고 도망쳐 온 사령관이면 그 책임으로 정치 생명이 끝나야하는 것이 맞는데[13] 바로는 칸나이 전투 이후 달아난 도시에서 버젓이 집정관,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부터 추가 병력의 제공까지 받으면서 아풀리아 지역에서 3년간 이탈리아 동부 지역의 수비를 담당했고, 그 와중에 카푸아의 사절을 맞아 외교를 한다든가, 로마에서 독재관을 선출해야 하자[14] 로마로 잠시 귀환하여 독재관을 지명하고 떠나는 등 칸나이 전투 이후에도 집정관직을 하자없이 수행했다. 분명한 건 여러 자료들을 분석해볼 때 테렌티우스 바로가 절대로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후에도 바로는 전직 법무관의 자격으로 에트루리아 지역을 담당했으며,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카르타고와 교섭하는 사절로 파견되기도 했다. 칸나이 전투에서 입은 패배의 규모와 로마에 준 타격을 감안할 때[15] 바로가 이같은 패배를 초래했다면 이렇게 잘 대우받는 것은 미심쩍은 일이다.
또한 파울루스는 당대 최고의 귀족 가문 출신 중 한 명에다가 집정관을 역임한 경력이 있었으며 제2차 일리리아 전쟁을 총지휘하여 일리리아군을 진압하고 개선식을 거행해 군사적 경험과 원로원 내에서의 입지 등에서 바로보다 앞서 있었다. 이때문에 바로가 수석 집정관에다가 당시 주전파와 원로원 비판파의 지지를 받는 입장이었긴 했으나, 파울루스의 의견에 정면으로 충돌하기보다는 합의하에 일관성있게 지휘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파울루스는 당시 군사적인 커리어에서 로마인들 중 화려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맡은 제2차 일리리아 전쟁은 함대 100여 척을 동원된 꽤 큰 전쟁이었고, 여기서 전권을 받아 단 1년 만에 마무리지은 큰 공적을 세운 바 있었다. 칸나이 전투라는 대규모의 전투를 지휘할 집정관에 파울루스가 선출된 것은 이러한 공적으로 로마 시민들이 파울루스의 군사적인 재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16]
하지만 누가 지휘했건 8월 2일에 폴리비오스나 리비우스가 묘사하는 바와는 다르게 두 집정관이 전략적으로 결전을 벌이는데 합의를 봤던 것은 분명하다. 로마군의 전략 자체가 일관적으로 한니발을 서서히 압박해서 식량줄을 끊고 결전을 유도하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원로원이 결전을 원하지 않았다면 전례없는 대군을 두 집정관에게 공동으로 맡겨 한 전장에 한꺼번에 투입한 의도와 맞지 않는다.
한니발의 군대는 정예 아프리카 보병대와 이베리아 보병, 갈리아족 용병으로 보병을 구성했고 기병은 이베리아의 기병과 켈트족 중기병, 누미디아 경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프리카 보병대의 무장은 그리스계와 유사한데, 한니발은 아프리카 보병대에게 트레비아 전투와 트라시메노 전투에서 살육한 로마군의 갑옷(로리카)을 노획해서 갖출 것을 명령했기 때문에,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들의 무장은 로마군과 거의 같았다고 한다.[17] 단 이들이 기존의 아프리카 보병처럼 창을 들고 팔랑크스 형태로 싸웠는지, 아니면 로마식 보병처럼 검과 방패로 무장하고 싸웠는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둘 다일 수도 있지만 심증만 있지 확증은 아직까지 없다.
이베리아 보병들은 대개 철로 만든 원판 흉갑을 갖추거나 혹은 간단한 튜닉으로 무장했다. 이들은 투창의 명수로 '글라디우스 히스파니엔시스', 즉 스페인 검이라는 글라디우스의 원형이 되는 무기로 무장했다. 켈트족 보병은 대개 갑옷을 입지 않고 방패와 검으로 무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개 이렇게 되는 이유가, 초창기에는 엘리트 귀족 전사들 위주의 강력한 중보병이 편성 가능했지만 자기들끼리 싸우거나 혹은 로마군과의 교전으로 엘리트 귀족부대가 소모되면서 전투 효율을 높이기 위해 중보병 부대가 중기병 부대로 전환되기 때문이었다. 이베리아 보병은 칼을 '찌르는 방식'으로 사용했고, 켈트족은 '베는 방식'으로 사용해서 한니발은 이들을 교대로 투입해 로마군을 괴롭히기도 했다. 즉, 한쪽 전투방식이 눈에 익을 쯤 되니까 갑자기 패턴이 다른 부대가 들어온다는 뜻이다. 고대 전투에서는 1열이 죽어 무너진 뒤 2열이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1열이 지치면 이들이 후방으로 빠지고 2열이 앞으로 전진했다. 즉 한니발은 패턴이 다른 부대들을 순서대로 열을 이루게 하여 1열과 2열이 교대될 때 다른 패턴으로 로마군을 괴롭힌 것이다. 참고로 이베리아 보병의 칼이나 갈리아 보병의 칼이나 모두 찌르고 베기가 가능하기는 했다. 다만 찌르기는 이베리아 진영이, 베기는 갈리아 진영의 칼이 조금 더 적합했던 것뿐이었다.
이외에 발레아레스 군도에서 활약하는 투석병들이 가담했다. 발레리아스 투석병은 서로 다른 슬링 세 개를 사용해서 원거리, 중거리, 근거리에 모두 대응할 수 있는 명수들이었다.
이베리아 중무장 기병들의 무장은 보병과 유사한데, 철제 투구와 철제 원형 흉갑을 착용했다. 한손으로 쥐는 창으로 적과 충돌한 뒤, 근거리에서는 '코피스'라는 굽은 역날검으로 적과 교전했다. 코피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팔카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외에 당시 항아리의 회화를 보면 말 전체를 사슬갑옷으로 감싸고, 기수도 스케일 아머와 사슬갑옷으로 무장한 무시무시한 중기병도 보이는데,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비용과 유지관리상 다수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 부족 출신의 기병들은 갈리아 중무장 기병대와 같이 서유럽 정상급의 기병으로 확실히 로마군 기병보다 전체적인 전투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갈리아족 중무장 기병은 대개 귀족이나 유력자 출신인 전사들로 체인메일로 중무장했다. 투구는 로마군과 같은 몬테포르티노식 투구로 무장했고, 긴 창 한 자루와 투창 두 자루, 검으로 훌륭하게 무장했다. 스페인 기병대처럼 갈리아 중무장 기병대도 로마 기병대를 능가하는 서유럽 정상급의 중무장 기병이었다.
누미디아 경기병은 '지중해 최고의 기병'이라고 역사가 리비우스가 호평했다. 이들은 뛰어난 승마술과 투창 하나만 들고 싸운 게 아니라 투창 투척 이후 작은 방패와 글래디우스 같은 단검으로 돌격전을 벌이는 게 장기였다. 창 한 두 자루는 남겨뒀다가 격투전에 사용했다는 일부 기록도 있다. 다시 말해 투창이 주특기였지만 백병전에서 창이나 칼을 전혀 안 쓴 건 아니었다는 소리이다. 투창 공격 이후에 적이 약화되거나 적군이 패주하면 그때를 노려 백병전으로 공격하곤 했다. 단 특정 상황에서는 경기병이라는 특성이 약점으로 작용해 유구르타 전쟁에서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갈리아 기병에게 제대로 격파되기도 했다. 단, 누미디아 경기병의 진정한 무서움은 투창을 이용해 치고 빠지는 전술에 능하다는 것에 있었다. 유구르타 전쟁 초기에는 이걸로 로마 보병대에게 큰 타격을 준 적이 있었다. 즉 적을 향해 돌진해서 발리버리는 맹렬한 근접전 타입이 아니라 아주 능숙한 투창 경기병 타입으로, 한니발은 전투에서 누미디아 기병의 특성을 고려해 로마군을 견제하는 임무를 맡겼다. 바로가 지휘한 좌익 동맹군 기병대 4,800명이 많은 피해를 입으며 고전했던 이유도 누미디아 기병의 저런 투창 전술 때문이었다.
로마군의 군대 형태는 자마 전투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래도 트레비아와 트라시메노에서 정규군이 크게 패배한데다 로마군 부대 중에는 신병이 많았다. 하지만 카르타고군의 2배에 달하는 수적 우위는 로마군의 강력한 이점이었다.
다만 이 수적 우위는 보병에 한정된다. 기병 전력은 카르타고군이 2배 가까이 많은 데다가 질적으로도 크게 우세를 점했다. 이는 트라시메누스에서 털린 것이 이유이기도 한데, 운 없게도 게미누스가 보냈던 기병 4,000명이 트라시메누스의 로마군을 도우러 갔다가 전투가 다 끝나고 나서야 도착하면서 그대로 한니발에 의해 증발해버린 것이다. 로마군은 전통적으로 기병대는 다른 동맹에게 의존하여 채우고 있던 만큼 이것은 매우 뼈아픈 손해였다. 그랬기에 로마는 양쪽에 각각 강과 숲이 있어 기병 운용이 힘든 칸나이를 전장으로 골라 기병의 불리함을 상쇄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4.2. 배치
로마군은 10,000명을 후위에 남겨두어 본진을 지키도록 했다.[18] 마크 힐리는 부대 비율상 이들이 트리아리(정규 편제라면 80,000명 중 9,600명)였으리라 추정했는데, 실제로 트리아리가 남았는지 아니면 혼성부대로 10,000명이 남았는지는 알 수 없다. 트리아리의 역할은 후위에서 퇴각할 시 방패가 되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밀어붙이는 게 의도인 로마군에서는 필요가 없었기는 하다.로마군은 로마 군단병을 우익에 배치하고, 동맹군 보병을 좌익에 배치했다. 로마군의 보병 배치는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평소보다 훨씬 조밀하게 서 있었고, '정면보다 종심이 더 깊었다'라고 표현한다.
물론, 전술하였듯, 로마군의 전열 넓이는 엄연히 그 두께보다 훨씬 넓어, 3km 이상 수준이었다. 따라서, 한니발도 그에 맞서 보병 대열을 넓게 펼쳐야하는데, 이렇게 되면 대열 두께가 너무 얇아져서 로마군의 진격을 막아내기 어려워진다.
이 두 로마 사령관이 중앙을 돌파하고자 한 이유는 앞서 트레비아 전투에서 한니발군이 로마군을 포위섬멸작전에 몰아넣은 적이 있었는데 이때 포위된 로마군 보병이 사력을 다해 한니발 군의 중앙을 뚫고 달아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한니발이 아무리 뛰어나도 보병 대열 두께는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명확히 입증되었고, 따라서 로마 지휘관들은 한니발에게 포위 당하는 것을 가정하고, 포위 당하더라도 한니발의 병력 두께가 얇아져 역돌파를 노리거나, 혹 뚫지 못하더라도 한니발에게 맞손실을 강요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로마군의 취약점인 중기병 전력의 절대적 열세는, 애당초 에퀴테스가 퇴각하는 것을 계획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로마군의 중기병대는 강변에 배치되었고, 이들은 압도적인 물량을 가진 한니발의 중기병에 맞서주다가, 적당한 시점에서 퇴각해도 무방하게끔 배치되었다. 전열이 너무 넓고 깊기 때문에, 한니발의 중기병대가 공간을 찾아내더라도, 옆에 강변이 길을 막는 이상 넓게 우회해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고, 반드시 후열의 트리아리와 마주쳐서 돈좌되거나, 저 멀리 도망가는 에퀴테스를 쓸 때 없이 쫓아가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게 만든 것이다.
제 아무리 로마의 중기병이 허약해도, 한니발의 병력 대열은 이미 극한까지 얇아진 상태였기 때문에 보병들이 에퀴테스의 습격을 받으면 그대로 작살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황. 당연히 한니발도 그에 맞서서 중기병을 강변에 맞 배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써 로마군은 중기병 전력을 맞교환해서 전장에서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상대적으로 빈약한 방해물인 숲이 있는 쪽에는 당연히 경기병 위주로 병력이 몰리게 되었고, 숲 지역은 경기병 산전에 아주 큰 방해가 되는데다, 보통은 경기병들의 밥이될 경보병들이 숲으로 들어가서 경기병을 습격할 수도 있어 역시 경기병 전력이 서로 맞교환 되어 무력화 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경기병간의 전투에서 처참하게 로마군이 깨져 숲을 쓰지 못하게 되더라도, 경기병은 보병들이 패주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중보병에 유의미한 타격을 주기 어려웠고, 원거리 경기병들의 견제 공격은 로마군이 그냥 많기 때문에 충분히 견뎌낼 수 있었다. 따라서, 경기병에게 우회 기동을 당한다 하더라도, 로마군을 일방적으로 타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과적으로, 로마군 우익에는 아우피디우스 강을 끼고, 정예 중기병 1,600기을 배치하여 파울루스가 이들을 직접 지휘하고, 바로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숙련되고 덜 무장된 기병 4,800명을 맡겨 좌익에서 한니발의 기병과 서로 맞교환 되게 하였다. 이 두 기병대 모두 격파 당할 것을 가정하고 배치된 것이고, 격파 당하기 전에 최대한 오래 버틸 수 있게 하면서, 격파 당하면서 포위를 허용할때, 그 여파를 무의미한 수준으로 축소할 수 있게 안배한 것이다.
이렇게 세세하게 과거의 기록을 바탕으로 상대의 약점을 파악한 뒤 전술을 짜서 실행하는 국가는 고대에 드물었다. 이러한 고대 로마인들의 장점은 이들이 약소국가에서 출발하여 전 지중해를 제패하는 데 일조했다. 이들이 과거기록을 토대로 준비하는 예로서 과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제패하고 있었을 때 일리리아 지방의 알렉산드로스 사촌이 이탈리아에 쳐들어왔는데 삼니움족이 이들을 처발랐다. 로마인들은 100년 뒤 피로스와 전쟁을 하였을 때 이때 삼니움족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인들을 이길 수 있었는지 철저하게 연구하였고 이는 피로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듯이 그 당시 로마군이 무조건 힘으로만 밀어붙인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적군와 아군의 전투능력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로마 입장에서는 철저하게 작전을 세웠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80,000명이나 모이다보니, 로마군은 종래의 체크무늬 방진을 펼 수가 없었고 애초에 그럴 계획도 아니었다. 물론, 그냥 병력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로마군의 전열은 횡으로만 무려 3km 이상의 엄청난 넓이를 가졌고, 종으로도 고대 병력 배치 치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두께로, 한니발의 기병 병력이 우회하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의 두께로 배치되어, 팔랑크스를 연상케 하는 초밀집 방진이 펼쳐졌다.
로마군은 유기적인 기동력으로 승부를 보는 로마 군단병(레기온)의 특징을 한니발 상대로 도저히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좀 더 고전적 방법을 동원하여 밀집 충격력에 의존하여 필연적인 포위에 맞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한, 로마군 특유의 3열 대열 자체는 여전히 존재하였기 떄문에, 예정된 기병 우회 습격이 발생할 때, 손쉽게 트리아리를 비롯한 후열 예비대가 한니발의 기병 습격을 받아칠 수 있게 준비했다.
한편, 한니발은 그 악명높은 역 초승달 대형으로 상대적으로 오합지졸인 갈리아 보병들을 배치하고, 그 뒤편에서 진짜 방벽이 될 16,000여명의, 알프스를 한니발과 함께 직접 넘은 용자들 중의 용자인 아프리카 및 스페인의 중보병대를 배치하였으며, 로마군의 의중대로 강변을 낀 우익의 로마 기병대에 중기병을 몰아넣고, 숲지대를 낀 좌익에는 누미디아 기병을 비롯한 경기병대를 집중시켰다.
여담으로 전투 직전 한니발이 했다는 농담이 있다. 부하 중 기스코라는 장교가 로마군의 병력 우위를 보고, 아군이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걱정했다. 그러자 한니발이 농담을 던졌다.
"로마군에 기스코라고 불리는 자는 한 명도 없으니 걱정말게."
이에 한니발의 부하들은 폭소를 터뜨리며 걱정을 다소 완화시킬 수 있었다.
여기까진 분명 로마군의 의도대로 된 것이다.
그러나 한니발은 애초에 로마군을 포위할 생각이 없었다.
4.3. 진행
▲빨간색이 로마군, 파란색이 카르타고군. 실제로는 전장이 너무 넓었기에 저렇게 간단하게 되지 않았지만, 결국 저 꼴이 나게 된다. |
4.3.1. 기병 격돌
전투가 개시되자 한니발은 마지막으로 전열을 재정비시켰다.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갈리아 귀족 중기병과 스페인 중기병대로 구성된 카르타고 좌익 기병대가 로마군을 향해 돌진했다. 이때 특별히 세련된 전술을 짠 게 아니라 그냥 돌격했다. 애당초 이것은 로마군의 의도대로 될 수 밖에 없었기에 한니발은 그에 맞춰간 것이다.이때 파울루스가 투석병의 돌에 맞아 심한 부상을 입었다. 로마 기병대는 파울루스를 호위하려고 애썼으나, 파울루스가 말을 탈 수 있는 상태가 아니게 되자 이들도 말에서 내렸다. 누군가가 한니발에게 파울루스가 로마 기병에게 말에서 내리라는 지시를 했다고 보고를 올리자 한니발이 한마디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가 병사들을 사슬에 결박해 내게 인도하는 게 더 낫겠군."
병력도 카르타고 기병대쪽이 우위였기에 굳이 말에서 내리지 않았어도 전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얼마 후 로마군 우익 기병은 카르타고 기병대에게 순식간에 격파당했다. 어찌되었든 이 기병전의 결과는 로마군이 의도한대로다.
전술하였듯 로마군은 기병전을 이길 생각을 하긴 커녕, 오히려 원하는 방식으로 패배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투석병의 어이없는 럭키샷(...) 때문에 파울루스의 기병대가 좀 더 빨리 퇴각하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이 기병대의 역할은 한니발의 기병 배치를 로마군이 원하는대로 이끌고, 서로 기병대를 맞교환 시켜 전장에서 배제하기 위한 목적이었기 때문. 한니발 또한 그것 자체에는 대책이 없음을 알았기에 그대로 따라줬다.
하지만 로마군은 여기에서조차 한니발이 대책을 가지고 있단 것은 몰랐다.
한니발은 로마군이 우회 기동을 방해하려 준비한 강변과 숲 지대를 오히려 로마군을 가두는 장벽으로 활용하기로 한다. 그리고, 로마군이 한니발에게 포위 당하는 것을 가정하고 작전을 준비해왔듯, 한니발 또한, 로마군에게 돌파당하는 것을 가정하고 작전을 준비했다.
4.3.2. 보병 격돌
물론, 한니발은 순순히 빨리 돌파당해줄 생각 따윈 없었다.'양측의 보병대는 상대를 향해 점차 전진하였다. 처음엔 일직선으로 이루어진 카르타고군은 점점 중앙이 빠르게 전진함으로써 초승달 형태가 되었다. 이때 칸나이에선 강한 돌풍이 불었고 모래가 그들의 시야를 가렸으여 이로 인해 양측 군대는 상대가 잘 안 보여 공포는 극대화되었다. 이런 심리적인 영향은 카르타고군보다 로마군이 더 많이 받았다. 한니발 군은 여러 번 지옥을 넘나드는 경험을 한 데다, 심지어 갈리아 병사들까지 한니발에 의해 3박 4일간 수면 없이 늪지대를 돌파하는 강행군을 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기에, 이러한 심리적 변수에 대해 신병이 많은 로마인들보다 우위에 있었다.
여기에 더해, 한니발은 전투 전날 로마군이 강에서 물을 긷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에 로마군은 물을 제대로 마시지 못해서 갈증에 시달렸다. 게다가 한니발은 자신의 부대를 동쪽에 배치해 놓았는데 이는 아침에 전투 시 카르타고군은 태양을 등지고 로마군은 태양을 마주보고 싸워야 하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한니발은 회전 이전에 기후로 인한 심리적인 영향과 태양의 조건을 고려하였고, 물의 보급을 방해해 갈증을 나게 하여 상대방의 전투력을 저하시키는 등 최대한 카르타고군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은 셈이었다. 게다가 한니발의 군대는 칸나이에서 먼저 도착해 머문 3주간 동안 충분한 훈련과 기후에 익숙해질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다.
여기서 한니발의 그 악명높은 역 초승달 대형이 등장한다. 흔히 표현되는 것과 달리 이 초승달 대형은 아주 미약한 굴곡을 가진 대형이었을 뿐인데, 이는 로마군의 전열 너비가 3km를 넘었기 때문에 한니발 병력의 머릿수론 뭔 수를 써도 요란한 굴곡을 주어 병력을 배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초승달 대형의 병력 방진끼리의 횡대 격차는 수 미터를 넘기 어려워서 굴곡을 가진 배치로 보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공중에서 내려다 보는 시각으로 본다면야 생각보다 굴곡이 없긴 해도 초승달 대형인게 느껴지지만, 개개의 병사의 시점이나, 말을 타고 시찰하는 장군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그리 눈에 띌 수가 없는 수준의 이 미묘한 굴곡은, 상상을 초월하는 나비효과를 내주었다. 로마군의 전열이 넓어도 너무 넓다보니, 초승달의 각 보병 대열의 횡대 격차는 극히 미미해도, 초승달 중심과 그 종말부의 횡대 격차는 굉장한 수준이었다.
각 병력간의 미묘한 세로 거리 격차는 좌 우 각각 1.5km를 넘는 거리를 가진 거대 전열이 동시에 돌격할 경우 엄청난 차이를 유발하게 되었는데, 중앙에서 적과 교전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아직 미묘한 거리 차이로 인해 적에게 도달하기 직전 상태에 머무른 더 측면의 병력도 용기를 내어 더 빠르게 달려들게 되고, 이렇게 전장이 달아오르기 시작하면, 아직 적에게 돌격하기 적합하지 않은 거리에 있는 병력도 돌격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로마군에게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어찌되었든 한니발의 전열은 아주 당연히 순식간에 작살나게 되었기 때문. 그러나, 그 "순식간에 작살나는 속도"는 꽤 느렸다. 게다가, 그 미묘한 역 초승달 대형으로 인해, 측면으로 갈 수록 로마군의 병력은 체력 손실을 크게 입었고, 돌격 거리도 점점 길어짐에 따라 충격력의 불균형이 유발되었다.
로마군이 이 전투에서 단 하나 놓친 요소는 바로 군중 심리였다. 일단, 돌격이 시작되면, 기병은 말할 것도 없고, 보병들 또한 어지간한 숙련병이 아니고서는 중도에 돌격을 멈추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19] 그리고, 로마군은 적이 움직일 경로를 제한한 만큼, 로마군이 움직일 경로도 제한받은 상황이었다.[20] 여기에, 로마군의 병력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공격보다는 방어 위주의 전투를 지시한 한니발의 명령을 받은 중앙의 갈리아 중보병들은 집중 공격받은 상황에서도 찌르기보다는 주로 방패를 사용하여 막는 데 집중함으로써 시간을 버는 데 성공하였고, 따라서 긴 시간에 걸쳐 공방을 주고받았다. 여기다 거센 로마군의 공세를 더 효과적으로 버티기 위해 중앙에서 보병과 함께 있었던 한니발은 동생인 마고와 함께 직접 위험을 무릅쓰고 전열 안으로 뛰어들어 돌아다니며 사기를 높였다.
이 미묘한 돌격 시간차와, 측면으로 갈 수록 심해진 체력 낭비는 엄청난 나비효과를 내었다. 물론, 아주 살짝이라지만 좀 더 앞에 튀어나온 중앙 병력은 더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지만, 그게 그렇게 빨리 뚫리지도 않았다. 당시의 전투는 두 군대가 조우하면 서로 방패를 들고 접근하여 찌른 뒤 다시 방패로 보호하고, 다시 찌르고 방패로 보호하고 이를 반복하는 패턴으로 초반에 우열이 바로 가려지지 않으므로 당연한 것.
이를 통해, 아주 당연히 한니발의 상대적인 비숙련 병력들은 쇄도하는 로마군에게 밀려 뒤로 밀려나면서 자연스럽게 초승달 모양으로 로마군에게 밀려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한니발이 고의로 후퇴한 것인지 아니면 로마군의 공세에 밀려 뒤로 밀리게 된 것인지 학자들 간 견해가 엇갈리며 여러모로 확실하진 않다. 어차피 자의든 타의든 로마군의 맹공에 그대로 맞서서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흔히 생각되는 것과 달리, 이 초승달 대열은, 이전의 역 초승달 대열과 같은 이유로 매우 작은 굴곡을 가지고 있어 로마군을 역포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 후퇴로 로마군은 수십 미터 정도 전진하였다. 이러한 전진으로 위로 볼록한 초승달이 아래쪽으로 볼록한 초승달의 형태로 바뀌었고, 초승달 대형 속에 진입한 로마군의 전체 대형은 초기의 조밀한 대열이 기동 때문에 더욱 밀집되어 마니풀라 대형의 형태는 무너지고 이들은 한 덩어리 무리로 바뀌었다.
게다가, 중앙으로 갈 수록 적이 미묘하게 가까운데, 좌우로 갈 수록 점점 미묘하게 멀어지는 적으로 인해 로마군의 돌격 양상은 문명군대의 질서정렬한 일렬 돌격이 아니라, 영화에 나오는 듯한 난잡한 돌격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도 로마군에게 그다지 나쁜 상황은 아니었고 로마군의 의중대로 잘 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대로면 그대로 그 초승달 주머니가 감당하지 못해 터져나가면서, 아무리 한니발이 천재라서 어떻게 이긴다 해도 더 이상 싸움을 못할 수준의 피해를 입을 터였다. 하지만 이것도 한니발의 계획이었다.
애당초 한니발은 초승달로 로마군을 포위할 생각이 없었다. 이 초승달의 진정한 목적은, 로마군에게 가짜 전열을 던져주기 위한 떡밥이었을 뿐이다. 물론, 로마군을 참 자연스럽게도 가운데에 쐐기 모양으로 집적 시켜주긴 했지만 로마군이 그냥 너무 많아서 무의미한 수준일 수 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빈약한 전열의 갈리아족 병력이 로마군에게 뒤로 밀려나는 것을, 한니발과 함께 알프스를 직접 넘은 용자들 중의 용자인 아프리카 정예 중보병대가 가로 막아서 뒤로 밀려나지 못하게 벽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중앙이 너무 빨리 붕괴되어버리지 않도록 한니발이 직접 중앙의 보병을 지휘하였다.
측면에 위치해 공격하는 아프리카 보병들은 한니발 부대에서 가장 정예 중의 정예에 체력까지 비축하였으므로 로마군이 보이는 대로 맹렬히 돌격하여 공격하였다. 정면의 공격에 열중하던 로마군은 아프리카 보병이 갑작스럽게 돌격해오면서 주춤거리게 되었고, 이는, 로마군의 돌격을 유의미하게 지연시켰다.
보병 전투가 이런 상황에 놓인 동안 마하르발이 이끄는[21] 한니발의 우익 누미디아 기병은 성공적으로 바로의 기병을 견제하고 있었다. 이들은 말을 달려 투창을 던진 뒤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오면 즉시 빠졌다가, 적이 되돌아가면 다시 접근해 투창을 던졌다.
바로의 군대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있었지만 어차피 이들의 목적은 아군 보병이 적 보병 전열을 붕괴시키기 전까지 시간을 벌기였기에 피해를 입으면서도 버티고 있었다. 이때 하스드루발이 이끈 한니발의 좌익 중기병 부대가 로마군 우익 로마 시민 기병대를 격파하고 되돌아와 바로의 동맹시 기병대를 덮쳤다. 바로의 기병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격파되어 패주했다. 한니발의 기병부대는 로마군 기병이 더이상 집결하지 못하도록 추격에 나섰다.
이것은 로마군이 강요한대로 그대로 이어진 것일 뿐이지만, 여기에서조차 한니발은 대책이 있었다.
예정대로, 로마군의 우익은 빠르게 무너졌고, 로마군의 좌익도 얼마 못가 무너지게 되는데, 이 기병대가 예정된 퇴각을 하는 시점이 한니발도 예정한 시점이었던 것이다.
분명, 이런 대병력을 상대로 한니발의 기병이 아무리 많아 봐야 방해물도 있는데 우회 돌격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뒤쪽에서 들리는 교전의 소리는 전열의 보병을 압박하기 충분했다. 이것은 로마군이 유일하게 놓친,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요소로 칸나이 전투의 승패를 가른 원인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있는데, 좌우로 충분히 넓지 않고[22], 중앙과 각 측면의 사람들이 서로 움직이는 속도가 미묘하게 다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갑자기 멈춰서게 되었는데, 그 순간 뒤편의 사람들이 앞으로 몰려온다.
또한, 미묘하게 앞으로 과하게 밀어나왔던 로마군은 미묘하게 측면 공격을 받게 되었고, 보통은 별 문제가 아니었을 규모의 측면 공격이, 이미 패닉에 빠진 로마군 덩어리에 더 큰 패닉을 유발하게 된다.
가뜩이나 기묘한 역초승달 대형의 미묘한 종대 배치 차이 때문에 로마군의 돌격이 묘하게 꼬인 상황인데, 뒤로 밀려나던 한니발의 갈리아 보병들이 처음에는 정예 스페인 중보병들에게 강제로 가로막혀서, 이후로는 대기하던 아프리카 정예 중보병들에게 가로막히는 수준이 아니라 역공을 받으며, 갑자기 주춤거리는 로마군의 모습이 보이는 와중에, 뒤에서 독려하는 그 전설적인 한니발의 모습에 사기가 진작되어서, 카르타고 군이 물러서다 말고 맞서기 시작하니, 로마군의 진격은 열과 열을 거듭할 수록 점점 느려지기 시작하는데, 정작 열의 맨 뒤에서는 별 의미 없는 기병들이 깔짝이는 소리에 압박을 받아서 앞으로 밀어재끼고 있다.
아주 전형적인 군중 붕괴 상황이다.
마침내 모든 로마군은 무기도 휘두를 수 없을 정도로 밀집되고 말았다.
4.3.3. 결과
이렇게 로마군의 전진이 중단되고 운신이 불편할 정도로 압축되어 서로 짓이겨저 죽어나갈 판이 되자, 로마 기병을 추격하던 카르타고 기병이 추격을 중단하고 로마군의 후방을 직접 습격하여 패닉을 더욱 가중시켜주었다. 자연스럽게, 로마군의 규모 때문에 완전한 포위가 불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군중 붕괴 상태에 빠진 로마군으로써는 돌파고 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카르타고군은 총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후방에 위치한 기병은 벌판에서 방해받는 일 없이 돌격하거나 투창을 던지는 등 마치 양떼를 사냥하듯 공격했다. 서로 이리저리 뭉쳐버린 로마군은 후열에서조차 도주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포위 없이도 완벽한 포위 상태에 놓여 그저 죽어나갈 수 밖에 없었다. 로마군은 무기를 휘두르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유롭게 무기를 휘두르는 카르타고군에게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살해당했다.
결정적으로 두 집정관이 모두 기병을 지휘한 뒤 기병이 소멸되자 한 명은 전사하고 한 명은 진영을 이탈했으므로 포위된 보병에게 방진을 짜라든가, 아니면 후방의 기병대를 뚫고 퇴각하라거나, 아니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포위한 적 대형을 향해 전군으로 하여금 돌격 명령을 내릴 총사령관이 없었다.[23]
파울루스를 비롯한 로마의 지휘관들이 딱히 문책을 받진 않은 정황을 보면, 애당초 당시 로마군은 기병대에게 무엇을 기대한 바가 없었던 듯하다. 병력 수가 앞서는 데다 역사상 로마가 동원한 보병 중 사상 최대임을 감안, 로마군이 중앙을 돌파하는 데 성공한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전술하였듯, 애당초 이 정도 거대 병력이면 카르타고군이 로마군을 포위하는 것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렇게 기병 우회 공격을 무력화하려한 로마군의 계획이 완벽하게(?) 흘러간 것이 오히려 로마군에게 더 큰 재앙을 선사했다. 그 기병들이나 측면에 우회해 들오온 보병들이나 그 자체로는 로마군을 포위할 수 없었지만, 한니발의 오묘한 전법으로 심각한 교통 정체에 빠진 로마군에게, 그 기병의 별 의미 없는 깔짝임은 결정적인 패닉을 공급하여 총체적 군집 붕괴를 유발, 포위할 필요 없이 셀프 포위당하게 만드는 결과가 나와버린 것이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이 마니풀라 대형의 맹점을 제대로 짚었을 뿐만 아니라, 한니발이 군대만 잘 기동 시키는 게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가 어떻게 움직이고 행동하는지를 정밀하게 파악한 극한의 천재였던 것이 로마군에게 결정적 패인이 되었다.[24] 당시 로마의 3열 대열은 치고 빠지기에 적합한 형태로 되어 있었지, 마구 밀어붙이는 것과는 매우 동떨어진 구조로 되어 있었다. 애당초, 로마군의 작전 계획도, 어떻게든 한니발의 중앙이 돌파될 수 밖에 없고, 또 한니발이 로마군을 포위하더라도 무의미하도록 준비한 것이었지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려 만든 계획이 아니었다.
1열의 하스타티와 2열의 프린키페스는 서로 바톤 교체를 하는 개념이었고, 3열의 트리아리는 이곳 저곳 땜질을 해주거나 아니면 체크보드 배열 사이로 퇴각하는 아군을 흘려보내고 즉시 대열을 전개하여 최후 방어를 제공하는 식이었는데,[25] 이것은 로마군이 퇴각의 여지를 크게 확보할 수 있게 하여 전투 한번에 괴멸당하는 사태를 면하게 하는 효과를 제공하였다.[26]
그러나, 한니발은 자신의 병력을 천천히 뒤로 물러나게 하면서, 전장 전체에 엇박으로 전투가 벌여지게 유도하여,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를 모두 끌어들인 것은, 후열에서의 기병전 상황 때문에 중간 대열이 긴장하여 진격을 더욱 서두르게 만들어, 물론 후방을 지켜야하는 트리아리까지 진군시키게 만들어버렸다.
게다가, 원래는 쉬고 있다가, 정말 피눈물나는 패배를 맞을때서야 그동안 피흘린 청년과 중년 병력을 대신해 죽어야하는 장년층인 트리아리가, 단순히 쉬지 못하고 움직이고 있는 것을 넘어서, 언제든 로마군의 기병대가 격파당해 후방에 가볍게나마 들이닥칠 카르타고 기병대에 맞설 대비를 하느라 긴장을 있는대로 하고 있었으니, 이들은 최후의 예비대라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된 것은 물론, 어디서 어떤 대형을 짜서 대응할 지 전혀 파악할 수 없었는데, 와중에 총 지휘관이 이탈당했으니 수습이 될래야 될 수 없게 되었다.
즉, 로마군의 기초적인 전술 자체가 증발해버리게 만들어서 로마 극초기의 팔랑크스 전술만도 못한 상황이 터지고 만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의 속담에서 트리아리까지 밀렸다는 말이 거꾸로 적용되어 트리아리까지 진군해버린 이도저도 아닌 막장 대형이 탄생해버렸고, 그 결과 떡진 병력이 사방에 둘러싸여 어디부터가 벨리테스고, 어디까지가 트리아리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학살당하다 못해, 군중 붕괴로 인해 서로의 무게에 짓이겨져 압사 당하는 사태에 빠지는 것이었다.
한니발은 초중기 마니풀라 3열 대열의 맹점, 그리고 로마군의 의도한 전략에서 유일하게 빠진 고려 사항이었던 군중 심리를 정확히 짚어내어, 로마군이 성급하게 나서도록 유도하였고, 결국 로마군을 문명군대다운 대형을 갖추지 못한 군대로 전락시켜버린것. 로마군의 부실한 기병 전력은 불바다에 기름을 끼얹은 셈이었다.[27]
5. 전투 이후
5.1. 혼돈의 로마
바깥쪽에 서있던 로마군은 끊임없이 죽어나갔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로마군의 안쪽으로 파고들어 커다란 소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결국 그들이 서있는 자리에서 모두 죽게 되었다.
폴리비오스
폴리비오스
어떤 전열에서는 로마인들이 공포에 질려 도망치려 하였고, 다른 전열에서는 정신없이 희망 없는 싸움을 계속하였다. 그때 하스드루발이 누미디아 기병을 물리고 갈리아, 히스파니아 기병을 동원해 아프리카 보병을 지원하였는데, 아프리카 보병은 전투가 아닌 살육으로 인해 지쳐있었기 때문이었다. (중략) 전투가 끝난 다음날 카르타고군은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 전투지역을 다시 찾았고 그 살육의 현장에 몸서리를 쳤다. 수천수만의 로마인들의 시체가 그 들판을 가득 메운 모습은 마치 누군가가 로마인들의 시체를 한데 모아 그곳에 둔 것처럼 보였다. 피투성이의 형체로서 시체 한가운데에 서있는 사람도 몇 있었는데 카르타고인은 곧바로 그들의 숨통을 끊었다. 어떤 군인은 팔다리가 잘려 피를 쏟는 상태로 그때까지 숨쉬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머리를 구덩이에 묻고 목숨을 끊고자 하였다.
리비우스
리비우스
훗날 역사학자 파울리에 따르면 1분에 로마군 600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는 초당 10명씩 죽은 것으로, 이때는 더이상 전투가 아닌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카르타고 군의 검이 뼈와 살을 베고 베다 칼날이 무뎌지자 나중에는 검으로 때려 죽여야 할 정도였다. 도망치다 자기편끼리 압사당한 로마군 병사들도 대단히 많았다고 한다.
바로는 달아났지만 파울루스는 기병전 초기에 일찌감치 슬링에 맞아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여서 말을 탈 수가 없었고, 뒤이어 추적해온 카르타고 기병들의 투창 세례를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28]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군 보병 4만 7천 명, 기병 3천 명이 전사했고 포로는 2만 명에 달했다. 또한 여기에 지휘관으로 참전한 원로원 80명도 전사했는데, 전사자 중에는 로마 보병의 지휘를 맡은 바로 전 해의 집정관 게미누스와 파비우스의 부관으로 지명된 기병장관 미누키우스도 포함되었다.
후대 연구에 따르면 당시 로마가 동원할 수 있는 시민군과 동맹군 병력의 한계치를 보통 30~40만 사이[29]로 잡는데, 대략 20%에 달하는 7만 명의 병력이 이 전투로 깨끗하게 소멸했다. 집계된 사망자만 해도 4~6만에 육박하는 엄청난 피해였다. 한니발의 피해는 5천 7백(폴리비우스 사료)~8천 명(리비우스 사료)이었고 그나마 대부분 켈트족 병사들(4천 명)이었다.
총 인구수 대비 동원 가능한 병력 비율을 간단히 계산할 때는 총 인구의 1~3% 정도를 상시 유지 가능 병력(상비군), 총 인구의 10% 정도를 최대 동원 가능 병력(상비군+예비군)으로 계산한다. 총 인구의 1/2은 통상 군 복무에는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여성이며, 남성 중에서도 군 복무에 부적합한 어린이, 청소년, 노인, 장애인, 환자 등의 비율이 대략 1/2 정도에 이르므로 총 인구중 군복무가 그나마 가능한 건강한 성인(청장년) 남성의 비율은 대략 전체 인구의 25% 정도에 해당한다. 여기서 사회 유지와 물자 생산을 위한 인원을 남겨야 하므로 '총 인구의 10%'라는 병력 숫자는 사회가 붕괴되지 않는 선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상한으로 보통 여겨진다.
기록에 따르면 로마와 동맹시의 현역 병역 해당자 수는 각각 20만, 60만으로 합치면 80만 명이었다. 이 현역 병역 해당자라는 건 자신의 자산을 소유하고 무기를 구매해 전쟁에 나설 수 있었던 시민 계급 중 17~45세의 건강한 성인 남성을 뜻한다. 즉 현대로 치면 말이 현역이지, 현역 + 예비군 + 전시 민방위(45세)까지 모두 긁어모은 총 수에 가깝다.
로마가 상실한 병력 7만의 비중을 따져보자. 대략 동원 가능한 한계 전력의 20% 가량으로, 위에서 언급한 현역 병역 해당자의 10%, 총 인구의 2%[30]에 조금 못 미친다. 다시 말해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는 상시 유지 가능 상한에 가까운 병력이 한 방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시대의 변화 때문에 1:1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현대 한국으로 치면 5천만의 2%, 즉 전투 한 번에 1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수준이라 어마어마한 손실이었다.[31]
인구의 2%만 해도 엄청난 수치인데, 이건 어디까지나 칸나이 전투에 대한 수치다. 전쟁이 발발한 이래 로마는 계속 한니발에게 참패하며 이미 상당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 이미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누스 호수의 전투로 병력을 6만이나 잃은 후 칸나이의 참패가 발생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전쟁 이후 로마의 인명손실은 13만이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칸나이 전투 직후 집정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가 이끄는 2개 군단과 보조병 포함한 병력 2만 5천여 명이 한니발에 호응하는 갈리아족을 정벌하려다가 역으로 리타나 숲에서 전멸당했다는 끔찍한 소식까지 전해졌다(실바 리타나 전투). B.C 218년에 발발한 2차 포에니 전쟁의 3년차인 B.C 216년에 로마의 누적 병력손실은 15-16만에 달했으며 이는 당시 로마 인구의 4% 가량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한 시민군과 동맹군을 1:1 비율로 동원하는 로마군 특성상 약 8만 명의 로마인, 즉 현역 해당자 20만의 약 40%를 잃어버린 셈이다.
이 전투에서 2개 군단만이 간신히 달아났고, 본진에 남은 부대 중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포로가 되었다. 포로들은 진영에 남겨졌고 한니발의 병력들은 매우 지친 나머지 진영을 공격하지 않은 상태로 밤이 되었다. 이때 본진에 남아있던 병력은 2개 군단병에 달하는 1만여 명에 달했는데, 병력들은 지휘관이 없는 상태에서 공포에 질려 진영에 그대로 남았다.
그중 규모가 큰 진영의 병사들은 전령을 보내 작은 진영의 병사들에게 자신의 진영에 합류하여 같이 도망치자고 하였다. 그러나 그 부대원들은 공포에 질렸기 때문에 600명의 용감한 병사들이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의 인솔하에 큰 진영으로 합류한 것 외엔 그대로 남아 밤을 보냈고, 큰 진영에 남은 병사들 중 일부인 보병 4천, 기병 2백은 그들을 남기고 카누시움으로 달아났다. 남은 병사들은 다음 날 아침 한니발이 부대를 이끌고 오자 모두 항복하고 말았다. 한니발은 이들을 처리하기 위해 로마에 사절을 보내 몸값을 지불하라고 했다. 로마 원로원은 그들의 가족들이 간절히 요청하였으므로 토의에 붙였다.
이때 원로원은 자금이 바닥난 상태인 데다 몸값의 지불이 곧 숙적 한니발에게 전비까지 제공하는 꼴이므로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러다가 논의 중 결정적으로 한 원로원 의원이 포로들이 2개 군단이나 달하는 데도 겁먹고 진영에 머물러 그대로 포로로 잡힌 용기 없는 모습을 지적한 뒤, 이런 겁쟁이들을 구하는 데 돈 쓰기가 아깝다고 반대했다.[32] 몇백 년에 걸쳐 해마다 전쟁을 수행한 로마인들은 고위층, 민간인 할 것 없이 남자들이 프로 전사들에 가까웠으니, 전장에서 용기 없는 모습은 매우 심각한 인간성 결여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몸값을 주고 포로들을 돌려받으면 한니발이 그 돈으로 다시 용병을 사들여 전력을 강화하리란 점도 반대하는 이유였다. 이런 의견이 지지를 얻어 결국 원로원은 이들의 몸값을 지불하기를 거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한니발은 군비도, 포로 관리능력도 부족하여 그들을 모두 노예로 팔아버렸다.[33]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로마와 협상이 잘되기를 은근히 기대했기 때문에 협상 결렬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로마는 대신 노예들을 사들여서, 이들을 입대시켜 병력부족을 채웠다.
칸나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로마군들도 생각 외로 상당수 있었으나, 원로원은 이들이 제대로 못 싸웠다하여 패배의 책임을 물어 시칠리아 섬으로 보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로마에 귀향하지 못하게 했는데, 이는 기약 없는 추방이었다.
한편 로마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이 패배는 신벌이라며 여사제들인 헤스티아 처녀들 중 불륜을 저지른 일이 밝혀진 자들을 생매장하고[34], 그리스인 두 명과 날리나 남녀 두 명 등 총 4명을 포룸에 생매장하는 등 인신공양을 벌이기도 했다. 해당 의식은 그리스의 시빌 예언서에 의해 규정된 그리스 의식인데, 본래 로마인들이 인신공양을 나쁜 것으로 여겨 금기시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할 만큼 충격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장면이다.
5.2. 거대한 손실을 입은 한니발
그날 한니발의 지체가 로마와 제국을 구했다는 건 널리 받아들여지는 생각이다.
리비우스
리비우스
리비우스는 한니발이 승리를 활용하지 못한 것을 지적했지만 정작 한니발군은 병력의 절반 이상이 죽거나 부상당하면서 도저히 로마로 진격할 상황이 아니었다. 즉, 본 문서의 3번 항목인 로마군의 준비 말미에 쓰여 있듯 패배하더라도 한니발의 진군 기세를 꺾는다는 로마군의 의도가 결과적으로는 먹혔던 것이다.
흔히 한니발이 로마군을 궤멸시킨 것에 초점이 집중되지만, 칸나이 전투로 한니발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에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 대표적으로 델브뤼크는 이미 오래 전에 이 점을 지적했고 델브뤼크에 따르면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 한 번으로 최소 25,000명을, 칸나이 전투를 가장 잘 연구한 학자 중 한 명인 데일리에 따르면 최소 3만 이상을 잃었다.
결국 한니발은 자신이 이끄는 병력의 거대한 손실을 잘 알고 있었고 로마로 가지 않았다. 이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는데 지치고 적은 병력으로는 로마 공성이 무리였고 역으로 포위당할 수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병참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한니발은 대승을 거두었으나 정작 그의 병력이 너무 거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승리를 활용하지 못하게 되는 비극이 일어났던 것이다.
물론 한니발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한니발의 진정한 목적은 전투의 승리로 많은 로마 동맹시들을 이탈시켜 로마가 협상에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의 기대와는 달리 동맹시들은 대부분 동맹을 깨지 않았고, 결국 로마를 이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를 놓치게 된다.
6. 의의
역사에서 더 훌륭한 용병술을 찾아볼 수 없는 최상을 보여준 사례이며, 2000년 동안 군사 전술의 방향을 제시했다.
윌 듀란트(Will Durant)
윌 듀란트(Will Durant)
칸나이 전투는 양익 포위 전술의 전형적인 형태이자 고전으로 인정받는다. 망치와 모루 전술을 설명할 때 예시로 가장 많이 제시되는 전투가 바로 칸나이 전투다. 성공적인 포위 섬멸전은 보통 제2의 칸나이 전투로 불린다. 후대의 수많은 포위 전술에 영감을 주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탄넨베르크 전투는 동부전선의 칸나이 전투로 불렸다. 슐리펜 계획은 기동공간의 부족으로 양익포위 대신 우익에 의한 단익포위를 꾀했으나 완벽한 양익포위를 통해 칸나이 전투를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은 독일군 총참모부를 시종일관 사로잡았으며 이는 우익의 약화를 불러오게 된다. 개전 초 좌익이 선전하자 독일군 지휘부는 실제 양익포위를 시도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장기로 삼았던 기동부대에 의한 양익 돌파-돌진-포위-격멸로 이어지는 포위섬멸전(Kesselschlacht) 역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칸나이 전투에 도달하게 된다. B집단군이 모루로 프랑스-영국 연합군을 끌어모으는 동안 A집단군이 아르덴을 돌파해 포위 섬멸전을 벌인 프랑스 전역 역시 칸나이 전투의 성공적인 재현으로 꼽히며,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동부전선에서는 스몰렌스크 포위전, 키예프 포위전 등 수없이 많은 포위전을 만들어냈다.[35]
7. 대중매체
- <왕좌의 게임>
시즌 6 9화 서자들의 전쟁에서 벌어진 존 스노우와 램지 볼턴 간의 윈터펠 전투는 이 칸나이 전투를 모티브로 삼았다. 다만 드라마와는 달리 현실의 로마군은 포위진을 타개해줄 지원군이 없었다.
- <토탈 워: 로마 2>
역사적 전투로서 구현되어 있다. 다만 현실과 달리 과밀집 상태의 구현이 불가능하고 전작들에 비해 포위로 인한 사기 감소 효과도 대폭 하락했기 때문인지 실제보다는 카르타고와 로마군 간의 병력 비율 차이가 훨씬 적게 구현되었다. 그리고 AI 또한 역사대로 움직여주지 않기 때문에[36] 실제 칸나이 전투를 그대로 따라가기는 여러모로 어렵다. 하지만 재현에 성공한 유튜버들도 존재한다. #1 #2 #3
- 포에니 전쟁을 다루는 일본 만화 《아드 아스트라》의 명장면이다. 로마군의 출정전의 묘사를 잘 했는데 스키피오가 우리가 해야할 것은 선조들의 피로스의 승리를 놈들에게 안겨주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말에 파비우스가 "놈(한니발)에게 피로스의 승리가 있을 수 없다"고 한니발을 치켜세우는 모습을 보인다.
8. 여담
- 훗날 한니발과의 자마 전투에서 승리해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되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바로 이 전투의 극소수 생존자 중 한 명이었다. 당시 기병 지휘관으로 참전했는데, 전투 중반 로마군에 비해 기병 규모가 우세했던 카르타고 측 기병들이 로마의 중앙군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본대로 돌아간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1] 현재 이탈리아 동남부 풀리아주. 정확한 위치는 학자마다 차이가 있다.[2] 최대 병력은 10만이라고도 말한다.[3] 델브뤼크 병법사[4] Cannae: The Experience of Battle in the Second Punic War[5] 리비우스 주장.[6] 폴리비오스 주장.[7] 이때 발생한 치명적인 인력 손실과 장기 소모전으로 인한 자영농의 파산이 일으킨 대규모 면세토지 집적(라티푼디움)은 결과적으로 공화정 로마의 경제를 파탄냈으며, 이후 로마는 제정으로 나아가게 되었다.[8] 한니발의 군대는 갈리아 지원군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공성무기를 보유하고 있지도 않았고, 제작하여 운용할 능력도 없었다.[9] 한니발의 군대를 지원해주는 북이탈리아의 갈리아 부족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로마는 근처의 동맹시들을 통해 언제든지 병력과 물자를 보급받을 수 있었다.[10] 파비우스와 한니발이 내통하고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부터 파비우스가 자기 재산만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움직이고 있다는 주장까지 퍼졌다. 어느 쪽이든 파비우스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11] 보통 우익의 기병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이 총지휘권을 가진다.[12] 혹자는 싸워선 안 되었던 전투라고도 평가하지만, 한니발에 맞서 나서자는 의견을 내세운 이들의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칸나이 전투라는 재앙을 내놓고 말았지만, 카르타고군의 약탈이 계속되는데 지연전술만 펼친다면 피해는 점점 누적되고, 동맹시들은 불만을 가지고 이탈했을 것이다. 로마나 한니발이나 똑같이 판단했던 부분은, 바로 로마의 동맹이 얼마나 이탈하느냐에 따라 이 전쟁의 승패가 갈린다는 점이었다.[13] 로마가 패배한 장군에게 관대하다는 평을 받는데, 이는 카르타고와 달리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지, 정치 생명은 사실상 끝났다.[14] 로마 시대의 독재관 임명은 집정관이 지명하는 게 원칙이었다. 단, 파비우스 막시무스만은 원로원이 지명한 예외적인 케이스였다.[15] 패배의 여파로 남부 이탈리아 전역과 중부 이탈리아의 상당수, 시칠리아 섬의 상당수가 떨어져 나갔다.[16] 리비우스에 따르면 당시 집정관 후보들 중에 군사적 능력을 갖춘 인물이 없자 원로원 의원들이 출마를 거절하는 파울루스를 끈덕지게 설득해서 집정관에 출마시켰고, 그러자 다른 후보들이 출마를 포기했다고 한다.[17] 그런 이유로 로마 군단병은 이후에 면도하는 규칙이 생겼다. 그리스인이나 카르타고인 등은 수염을 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18] 더불어 한니발의 군대가 패주할 경우 그들을 쫓아 섬멸할 역할을 맡았다.[19] 이래서 폼페이우스군에게 돌격해들어가다가, 생각보다 거리가 너무 멀단걸 눈치채곤 중간에 멈춰서 좀 숨 돌리고 다시 돌격한 카이사르군의 고참병들이 전설적인 수준의 고인물로 취급받는 것이다.[20] 애당초 포위당할 계획이었으니 당연한 것.[21] 리비우스 출처.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한노라고 한다.[22] 물론 넓다. 다만 그 이상으로 로마군 병력이 많았다.[23] 물론 보병 지휘관인 게미누스가 있기는 했지만 전투의 총 지휘 역할이 아닌 보병 통제 등 국소적인 전술 책임자였기에 대국을 바라보며 판단을 내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24] BBC의 드라마 한니발에서는 로마군의 포진을 본 한니발이 "이번에는 로마군이 머리를 아주 많이 썼지만 나 한니발에게는 그 작전이 안 통한다." 하며 비웃는데 아주 적절한 연출이다.[25] 딱 보면 알겠지만, 정치/경제의 핵심인 기성세대를 최대한 보존하기 위한 대형이다. 당대 로마가 인력이 썩어넘치는 나라인 덕분에 이런 대형을 짜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전투에서 참패해서 다 죽게 되었을 때는 청년들을 보존하고 기성세대인 트리아리가 희생하는 구조이기도 하다. 즉, 마니풀라 대형은 고대 로마의 귀족주의적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시민"이라면 참전하는 것이 의무를 넘어 "권리"였던 고대 그리스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 대로 들어서 내보내봤자 오래 못 싸우는데, 그럼에도 전장에 내보낼 수 있게 합리적으로 구성한 대형이다. 안타깝게도 마니풀라 대형은 개혁과는 별개로 라티푼디움으로 로마군의 기반이 박살난 이후 다시는 재현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26] 냉병기 전투에서는 포메이션만 안 깨지면 사상자가 매우 적게 나온다. 고대에는 더욱 그렇다. 트리아리가 최전열에 나올 정도면 이미 참패한 전투지만, 이들이 방어를 제공함으로써 패주 중인 병력을 살릴 수 있다.[27] 자마 전투에서는 마니풀라 대형에서 진격을 위한 변형의 시행착오적 내지 적절한 시도가 나오는데, 바로 프린키페스와 트리아리까지 합쳐서 전부 1열 대열로 전환하여 길게 늘리는 것으로 역포위를 방지할 수 있을 만큼의 전열 너비를 갖추면서 동시에 이전과 같은 추태를 보이지 않도록 대열을 얇게 한 것이다. 트리아리까지 동원한 것은 물론, 대열이 너무 얇다보니 쉽게 뚫리니까, 돌격 저지에 더 유리한 창으로 무장했지만 나이가 많은 트리아리들이, 트리아리 못지 않게 장비 좋고 경험 많으면서, 아직 체력이 넉넉한 30대 초반 쯤의 나이인 프린키페스와 함께 대열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28] 리비우스에 따르면 당시 트리부누스 밀리툼이던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가 파울루스를 발견하고 자신의 말을 내주며 당신은 이 참상에 가장 적은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당신의 죽음으로 오늘의 패배가 더 끔찍해지게 만들지 말라. 이미 충분한 피와 눈물이 흘렀다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렌툴루스, 앞으로도 계속해서 용감한 일을 하길. 그러나 적의 손아귀에서 도망갈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쓸데없는 동정심으로 낭비하지 마시오. 가서 원로원에게 로마를 요새화하고, 승리한 적들이 올 때까지 방어를 단단히 하라고 전해주시오. 그리고 파비우스에게 전해주시오. 나는 그대와의 약속을 죽을 때까지 지켰다고. 나를 살해당한 병사들과 최후를 맞도록 내버려두시오. 부디 나를 집정관이 아닌 몸으로 스스로를 변호하거나, 아니면 전우를 고발하여 스스로의 결백을 다른 이를 유죄에 빠뜨리며 증명하게 하지 말아주시오." 다만 역사가들은 실제 지휘를 파울루스가 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리비우스가 파울루스를 변호했다고 생각하기에 해당 유언과 일화도 리비우스가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29] 참고[30] 이 당시의 로마 인구는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400만 가량으로 잡는다.[31] 참고로 2022년 기준 대한민국 국군의 상비군은 53만 명, 전시 총동원령이 내려졌을 때 예비군을 포함한 '최대 가용 병력'은 363만 명 정도다. 위 병력 비율 계산의 '총 인구 10%'에는 못 미치는 숫자지만, 이는 민방위를 제외한 수치이므로 고대 로마의 동원 연령 기준으로 확대하면 비율이 일치한다.[32] 발언자는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였다. 집정관과 감찰관을 역임한 그는 다음 해에 사르데냐 섬의 반란을 진압할 총사령관으로서 파견되어 성공적으로 진압했다.[33]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로마의 호의를 기대한 것인지 이들을 노예로 사들여서 자유인으로 풀어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자유가 된 숫자는 약 2천 정도였다고.[34] 불륜을 저지른 헤스티아 처녀를 생매장하는 것은 로마의 전통적인 처벌이었다.[35] 이런 대규모 포위전을 연속적으로 성공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성공을 이뤄내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한니발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36] 카르타고의 보병이 늘어나긴 했지만, 로마군의 기병도 실제역사보다 늘어나 카르타고와 비등비등하다. 상대의 장군부대도 기병대와 함께 움직이지 않고 보병과 같이 움직여 자칫했다가 장군 잡으려다 보병한테 싸먹힌다. 또한 역사에서와 달리 본작에서는 AI 보병들이 그대로 중앙 돌파를 시도하는게 아니라 흩어져서 일부는 기병들을 지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