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30 14:38:59

트레비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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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비아 전투
라틴어: Proelium Trebianum
그리스어: Μάχη του ποταμού Τρεβία
시기 기원전 218년 12월 18일
장소 이탈리아 트레비아 강
원인 한니발 바르카의 북부 이탈리아 진공.
교전국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카르타고 공화국 파일:attachment/mon_256.png 로마 공화국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한니발 바르카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마고 바르카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하스드루발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한노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마하르발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기스고
파일:attachment/mon_256.png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1]
병력 총원 40,000 명 총원 42,000 명
중장보병 21,000 명 보병 38,000 명
경보병 8,000 명
기병 11,000 명 기병 4,000 명
전투코끼리 7 마리
피해 사망 4,000 ~ 5,000 명 사망 26,000 명 ~ 32,000명
결과 카르타고군의 대승.
영향 한니발의 이탈리아 횡단
1. 서문2. 사료3. 전조4. 갈리아족들의 불만5. 로마의 병력6. 카르타고군의 병력7. 마고의 매복8. 누미디아 기병의 유인9. 한니발의 우세한 기병10. 민중의 반응11. 마지막 군사활동12. 전술적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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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문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인 218년 한니발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티키누스 전투에서 승리 후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로마군과의 전투로 로마 공화정에게 처음으로 군사적 타격을 준 전투이다.

로마군은 상당한 전사자를 내고 완패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만여의 로마 군단병은 그들의 우수함을 보여주며 부분적이나마 우세함을 보이고 명예롭게 후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은 그의 독창적이고 뛰어난 재능을 보여줌으로써 승리한다. 성급하고 무모했던 로마군의 지휘관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2][3]는 로마군을 육체적으로 힘든 전투로 내몰아 카르타고군을 정면으로 상대하게 하여 패배를 자초하고 만다.

2. 사료

이 전투를 기록한 것 중 후대에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폴리비오스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역사서이다. 그러나 두 저명한 역사가의 저서는 여러 면에서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중 하나는 로마의 두 집정관의 군단이 어떻게 합쳐졌는가에 대해서이다. 폴리비오스는 두 집정관이였던 티베리우스와 스키피오는 여러 차례의 회담과 논의 끝에 티베리우스의 휘하에 군단을 합치기로 결정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단이 합쳐진 방식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문이 남는다. 두 집정관은 상당히 떨어진 곳에 서로 머물고 있었다. 폴리비오스는 군단이 연합하여 티베리우스 휘하에 4개 군단이 있었다고 하였고 이에 따라 전투의 경과를 설명하였으나 티키누스 강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스키피오가 트레비아 전투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혀 설명을 안 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리비우스는 스키피오가 트레비아 전투 이후 그의 부대를 이끌고 패잔병이 달아나서 머물고 있었던 크레모나 시로 갔다고 서술하였다. 이것을 미뤄본다면 아마도 두 집정관 휘하의 군단이 하나로 합쳐진 것은 아닌 것으로 여겨지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리비오스와 리비우스가 서술한 트레비아 전투의 로마군 참전 병력의 숫자는 일치하고 있다.

만일 스키피오의 부대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면 두 집정관은 서로의 부대를 지휘하지도 않았고 또한 전투를 서로 도운 것도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사실 티베리우스가 전투를 개시했을 때 스키피오한테 전투를 하겠다고 통보했을지도 의문시되어진다. 이전에 티베리우스가 스키피오에게 싸워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조언을 구했을 때 스키피오는 싸우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대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티베리우스가 전투를 치르라고 스키피오가 그에게 자신의 군대를 넘겨주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사실 한니발은 두 집정관이 연합하던지 따로 있던지 전혀 관심이 없었고 따라서 티베리우스가 동쪽에서 진군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렇다면, 두 집정관은 병력을 서로 합치기보단 자신의 지휘권을 그대로 유지하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여진다.

3. 전조

한니발은 기원전 219년 현재의 발렌시아에 위치하고 있었던 사군툼을 공격함으로써 2차 포에니 전쟁을 시작하였다. 사군툼을 정복한 뒤 한니발의 총병력은 무려 10만이 넘었는데, 보병 9만, 기병 1만 2천에, 전투 코끼리도 수십마리 있었다.

그러나 이 병력이 전부 로마로 간 건 아니고, 이베리아 반도카르타고에 수비병력을 배치한 후, 남은 보병 3만 8천, 기병 8천, 코끼리 37마리만 데리고 스페인을 떠나 이탈리아로 진군하였다.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은 피레네갈리아를 거쳐 알프스를 지나면서 병력 손실이 컸고, 그 결과 보병 2만, 기병은 6천, 코끼리는 고작 7마리만 살아남았다. 즉, 절반에 가까운 병력을 전투를 하기도 전에 잃은 셈이다.

한니발은 이탈리아에 도착한 후 티키누스 강에서 스키피오와 기병전을 벌여 승리하였고 그 결과 갈리아인들이 한니발 휘하에 자원하여 그의 병력은 순식간에 4만여 명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이 병력 중 1만은 기병이였다. 뿐만 아니라 한니발은 북이탈리아에 있었던 모든 갈리아 족과 동맹을 맺었는데 그 결과 한니발은 갈리아 족의 보급과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로마 원로원은 한니발의 도착에 놀라 시칠리아에 주둔하고 있었던 집정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에게 급히 북이탈리아로 올라가 다른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를 지원하라고 명령하였다. 원로원은 이때 스키피오가 티키누스 강에서의 기병전(티키누스 전투)으로 인해 심한 부상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스키피오가 이 부상으로 인해 플라켄티아(피아첸차)의 언덕에 꼼짝을 못 하고 있었으므로 최근에 로마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던 갈리아인들은 모두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한니발은 스키피오가 머물고 있던 군사 기지의 바로 밑에 병사를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다.

시칠리아의 릴리바이움이라는 도시에 있었던 셈프로니우스는 원로원으로부터 북상하라는 명령을 받은 즉시 자신의 병사를 해산시킨뒤 그들에게 아리미눔이라는 도시에서 집결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 셈프로니우스는 가도를 거쳐 아리미눔으로 북상하였다. 셈프로니우스 휘하의 2개 군단은 아마도 12월 초에 집결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북상하는데 걸린 시간은 대략 40일 정도 걸렸으며 이들은 만나자마자 바로 한니발을 향해 북상하였고 트레비아 강을 건넜다.

비록 갈리아족이 기꺼이 한니발을 지원해 주고 있었으나 한니발은 갈리아족들이 급증한 그의 병력을 지원하는데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시 로마는 클라스티디움이라는 곳에 상당한 곡물을 저장하고 있었고 한니발은 이 도시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근처에 집정관과 그의 부대들이 견제하고 있었으므로 한니발은 공격하는 대신 그 도시를 맡은 지휘관인 다시우스 브룬디시우스를 매수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로마인이 아닌 동맹시 출신이므로 이 제안에 넘어갔으며 따라서 한니발은 싸움 없이 이 도시를 점령하고 곡물 창고를 손에 넣는다.

4. 갈리아족들의 불만

알 수 없는 이유로[4], 카르타고군은 포 강과 트레비아 강 사이에 있는 갈리아 족들이 배반할 것이라고 의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한니발은 분개하여 5000의 보병과 1000의 기병을 보내 주변 마을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갈리아족에게 어느 쪽에 설 것인가를 결정하라는 경고였고, 갈리아족들은 로마에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 답했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1000의 보병과 약간의 기병을 이끌고 강을 건넜다. 그들은 약탈하고 있던 카르타고 병사 몇 명을 생포하였고 남은 이들을 한니발의 기지로 몰아넣었다. 한니발은 군사를 더 내보내 로마군을 다시 강가로 내몰았으나 티베리우스도 군사를 더 증원하여 맞섰고, 결국 한니발은 때와 장소가 적절치 않다고 판단해 자신의 군사를 철수시켰다.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이 전투에서 이겼다고 생각했고, 다른 집정관인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 패배했던 것을 생각하며 우쭐했다.

한니발은 이번 전투를 통해 티베리우스의 공격적인 성향을 파악하고 그를 유인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는 강 건너의 로마군을 자신의 캠프 바로 앞으로 유인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전투는 로마인들의 사기를 크게 올렸으므로 티베리우스는 기세를 몰아 즉각 한니발과 결판을 내길 원했고, 스키피오는 겨울까지 기다리길 원했다. 티베리우스와 스키피오는 다음과 같이 논쟁을 벌였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전쟁을 질질 끌어야 하는가? 지금 세 번째 집정관과 그의 군대를 기다리겠다는 것인가? 이 장소는 우리의 땅이며 우리가 지켜야할 장소다."
티베리우스는 "이탈리아 심부에서 겁먹어 숙영지에 숨어있다"며 싸우지 않으려는 스키피오의 태도를 비난했고, 스키피오는 "로마군은 이대로 캠프에 머물며 겨울을 보내야 한다. 변덕스럽기로 유명한 갈리아 인들이므로 겨울 내내 카르타고군을 지원해줄 것 같지는 않다."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이러한 충고를 무시하고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5]

5. 로마의 병력

스키피오가 마실리아를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왔을 때, 형인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에게 군단을 주어 이베리아로 보냈기 때문에 스키피오 휘하엔 병력이 없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북부에 도착해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의 두개 군단을 넘겨받는다. 그리고 가이우스 아틸리우스에게서도 1개 군단과 5000여 명의 동맹군을 넘겨받는다. 리비우스가 자신의 저서에 1개 군단을 4000의 보병, 300의 기병으로 서술했으므로 스키피오는 최소 1만 2000명의 로마군과 900기의 기병 그리고 5000여 명의 동맹군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스키피오는 대략 1만 8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원로원이 4만의 동맹시 보병과 1800기의 기병을 징병하라고 명령하였으므로 스키피오는 추가적인 동맹군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대략 2만 5천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 추정된다.

티베리우스는 2개 군단(8000명의 보병, 600기의 기병)과 1만 5천의 동맹시 보병을 가지고 있었다. 리비우스는 서술하길, 전투가 벌여졌을때 티베리우스에게는 1만 8000명의 로마군과 2만여 명의 동맹시 보병이 있었다고 하였다. 폴리비오스는 1만 6000명에서 2만여 명의 동맹시 보병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며 말하길 "이 숫자는 두 집정관이 그들의 병력을 합친 결과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두 집정관이 연합했는지 쓰지 않았다. 만일 이들이 합쳤다면 이들의 병력은 4개 군단과 5개의 동맹시 군단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숫자는 대략 의문을 자아낸다. 그 이유는 만일 두 집정관이 합쳤다면 로마 군단병은 2만에 동맹시 병력은 4만에 이르렀을 것이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합치지 않았다면 티베리우스에겐 고작 2개 로마 군단병만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 설명은 아마도 스키피오가 티베리우스에게 2개 로마 군단병을 주고 2만여 명의 보조병을 그의 캠프에 머물게 하였을 지도 모른다. 리비우스는 스키피오가 티베리우스에게 전쟁 수행의 모든 권한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스키피오와 티베리우스가 전쟁 수행에 대해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미뤄보면 여기엔 의문이 남는다.

두 저자가 어쩌면 전투에 참여한 로마군의 수를 두 배로 부풀려 서술했을 지도 모른다. 따라서 티베리우스에겐 오직 8천에서 9천의 로마 군단병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문제를 낳는데 두 저자는 전투에서 1만의 로마 보병이 카르타고군의 중앙을 돌파해 피아첸차로 달아났다고 서술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티베리우스는 2개 군단 병력보다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게 확실하다. 스키피오는 앞서 티베리우스에게 그의 군단병은 전투 경험이 적어 겨울 동안 캠프에서 머물며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충고한 적이 있었다. 이것으로 미뤄본다면 어쩌면 티베리우스는 북상하는 도중 2개의 로마 군단을 새로 뽑아 보충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신병 모집에 대해서는 어느 저자도 기록해 두고 있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을 돌파하고 달아난 1만의 베테랑들이 이 전투의 생존자의 대부분이었다. 두 저자들은 피아첸자로 달아난 생존자의 수가 적었다고 분명히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한니발의 그동안의 관습으로 보아 틀림없이 전멸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군은 강을 건너 티베리우스의 캠프를 점령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들이 전투로 지쳤거나 혹은 스키피오가 많은 병력을 보존한 상태로 주변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후자라면 티베리우스는 아마 신병을 모집해서 병력을 증원했을 가능성이 높다.

6. 카르타고군의 병력

한니발은 갈리아군과 스페인, 아프리카 보병으로 구성된 2만의 보병과 1만의 기병, 7마리의 전투 코끼리, 그리고 마고가 이끄는 2천의 매복군과 8천의 발레리아스 투석병으로 구성된 4만여 병력을 휘하에 두고 있었다. 카르타고군의 사상자에 대한 언급은 되어있지 않으나 1만의 로마 보병이 중앙을 돌파했을 때 카르타고군의 중앙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서술되고 있다. 만일 한니발이 5만여 명의 병력을 전투에 투입했다면 이러한 중앙돌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7. 마고의 매복

기원전 218년 12월은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기간이었다. 부상을 당한 스키피오는 회복 중이었고 티베리우스는 성급하고 공격적이였다. 그는 스키피오가 회복되거나 자신의 집정관 임기가 끝나기 전에 한니발과 결판을 내고 싶어했다. 게다가 새로운 집정관 선거가 다가오고 있었다. 티베리우스에겐 불행하게도 한니발은 그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한니발은 이러한 티베리우스의 성격을 이용하기로 계획을 세운 뒤, 로마군과 차갑고 폭이 넓은 트레비아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친다.

한니발은 주변의 지형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강 근처엔 하나의 늪이 있었는데 이 늪 주위엔 가시나무와 그 밖의 숲이 자라고 있었다. 한니발은 여기에 병력의 일부를 숨겨놓기로 결정하였다.

한니발은 갈리아인 스파이를 통해 로마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 스파이들이 한니발에게 로마군이 전투에 나설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자 그는 100명의 정예를 각 부대로 보내 이들이 각각 10명씩을 뽑게 하였다. 그 결과 1000명의 보병과 1000기의 기병이 새로 편성되었으며 이들은 한니발의 동생인 마고에게 주어져 앞서 말한 숲에 매복하게 하였다. 이들은 밤에 숲으로 들어가 다음날 아침에 있을 공격을 준비하였다.
파일:attachment/트레비아 전투/trebia.jpg 1.카르타고 군의 진영

2.카르타고 기병

3.카르타고 보병

4.마고 바르카의 매복군

5.트레비아 강

6.로마 기병

7.로마 보병

8.로마 진영

9.포 강

10.피아첸차

8. 누미디아 기병의 유인

다음 날 아침 한니발은 그의 누미디아 기병을 모두 내보내 트레비아 강을 건너 티베리우스의 캠프를 공격하고 후퇴하게 하였다. 이로써 로마인들을 한니발의 복병이 공격하기 좋은 위치까지 유인하고자 하였다. 누미디아인들은 로마 캠프 바로 앞까지 도착하여 그들의 투창을 보초를 서고 있었던 로마군에게 던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티베리우스는 즉각 로마 기병을 투입하여 누미디아 기병을 쫓게 하였다. 그 뒤, 6천여 명의 투창병 벨리테스를 투입하고 남은 보병대는 전투 대형을 짜도록 하였다. 이 캠프엔 1만 2천 명의 로마 군단병과 2만여 명의 동맹시 중보병이 있었다.
  • 다음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의 장교였던 시어도어 닷지의 위 전투에 대한 서술이다.
그날은 춥고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로마군은 아직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두 내보내져 트레비아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트레비아 강은 로마군의 가슴까지 차올랐고 또한 매섭게 차가웠었다. 로마인들은 이 강을 건널 때 덜덜 떨었고 간신히 그들의 무기를 들어올릴 수 있었을 뿐이었다. 한니발은 이들을 자신의 배불리 먹고 또한 따뜻한 횃불 앞에서 몸을 녹인 뒤, 온몸에 기름을 바른 병력으로 맞서게 하였다. 한니발은 로마인들이 강을 절반 정도 건넜을 때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그들이 강을 완전히 건낼 때까지 내버려 두었는데, 이것은 이들을 완전히 쳐부숨으로써 갈리아인들에게 완벽하고 철저한 승리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강을 건널 때 공격하면 보다 손쉬운 승리가 가능하지만 로마군이 모두 강을 건넌 것이 아니므로 상당수 살아서 도망갈 수 있기 때문에 로마군이 강을 모두 건너 오길 기다려줬던 것이다. 즉, 병법에서도 하지 말라는 행위를 한 한니발이었고, 이 전투에서 이기면 한니발은 명장이 되겠지만, 지면 송양지인의 서양 버전이 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니발은 송양공이 아니었으니...

9. 한니발의 우세한 기병

강을 건너온 로마군에게 한니발은 8천 명의 투창병과 발레아레스 투석병을 투입하였다. 이들이 로마군을 견제하는 동안 한니발은 2만 명의 아프리카, 스페인, 갈리아 보병대로 이루어진 보병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런 다음 1만여 명의 기병과 약간의 코끼리 부대를 양익에 배치하였다.

누미디아 기병은 카르타고군에서 나와 로마 기병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티베리우스는 공격받는 기병을 양익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그러자 누미디아 기병은 벨리테스(투창병)를 공격하여 벨리테스의 투창을 모두 소모하게 하였다.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이 점차 가까워지자 티베리우스는 이들 경보병을 모두 중보병 뒤로 물리게 하였다.

한니발 또한 투창병과 발레아레스 투석병을 모두 물러나게 하였는데 중보병 뒤로 물린 로마군과는 달리 한니발은 이들을 양익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이 시점에서 양쪽의 포진은 다음과 같다. 중앙에서 3만 2천여 명의 로마 중보병은 2만여 명의 카르타고 중보병과 맞섰는데 이는 1.6 대 1의 비율로 로마가 우세하였다. 양익에선 각각 2천여 기의 로마 기병이 5천여 기의 카르타고 기병과 4천여 명의 투창병을 상대해야 했으므로 1대 4.5의 비율로 로마가 열세였다. 더군다나 양익엔 코끼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경보병이 물러난 뒤 중보병이 서로 점점 다가서서 싸우기 시작하였다. 그와 동시에 카르타고 양익이 로마 기병을 4.5 대 1의 비율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숫적으로 대단히 열세였던 로마 기병은 순식간에 강으로 밀려났고 곧 전장을 이탈했다. 그 결과 로마 중보병의 양익은 완전히 노출되었다. 역사학자 사무엘은 로마 기병이 밀렸다고 서술되어 있으나 사실상 격파 당해 패주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말하였다. 로마의 배후가 노출된 것을 보고 근처에 매복하고 있었던 마고의 복병은 진군하여 로마군의 배후로 돌아 뒤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피로에 젖어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로마군은 이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들의 위치를 버린 채 강을 건너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두 로마 역사가의 저서에서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이렇게 달아난 로마군은 대부분이 새로 편성된 신병들이고 고참병들은 그 자리를 지킨 것으로 보여진다.

로마군이 흩어져 강을 건너 달아나자 이것은 한니발에게 이들을 전멸시킬 기회를 주었다. 한니발은 이들을 추격하여 대부분의 병사들을 강 위에서 죽이거나 익사시켰다. 그러나 고참병으로 구성된 2만여 명의 로마 중보병은 그대로 남아 티베리우스의 지휘를 받았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티베리우스는 양익보단 중앙에 자신의 주력을 배치하였고 그 또한 직접 중앙에서 그 주력을 지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로마군에서 가장 경험이 많고 또한 가장 우수한 질을 가진 병사들이었다. 이들의 우수함은 포위당한 상황에서 두드러졌는데, 그것은 뒤쪽에 있던 병사들이 재빨리 뒤로 돌아 방원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 결과 로마 보병은 모두 바깥을 향하였고 빙 둘러싼 원형으로 포진을 하였다. 그리고 그 빈 가운데 공간엔 티베리우스가 서서 지휘를 하고 있었다. 그 진형으로 로마군은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카르타고군에게 맹렬히 맞섰다. 이렇게 되자 카르타고군은 이들을 공격하기보다는 강을 건너고 있는 로마군을 향해 공격을 집중하였다.

중앙의 로마군에 포함되어 있었던 투창병들은 코끼리들을 향해 맹렬히 투창을 퍼부었다. 그 결과 코끼리들은 성이 나서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날뛰기 시작하였다. 이에 한니발은 이 코끼리들을 왼쪽으로 물려 좌측에 있었던 로마 측의 갈리아 병사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 로마측의 갈리아 부족은 세노마니 부족이었고 이들은 유일한 로마의 동맹 부족들이었다. 이들은 곧 대부분이 전사하고 만다.

비록 티베리우스는 한니발의 적수는 안되었으나 우수한 야전 사령관임을 입증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런 상황에서 침착하게 카르타고군의 중앙을 돌파하라고 지시하였기 때문이다. 로마군이 모든 전력을 중앙에 집중해 맹공을 퍼붓자 카르타고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된다. 카르타고군에 포함된 두 민족인 카르타고인과 갈리아인 중, 갈리아인들이 이 공격으로 인해 대부분의 피해를 입게 된다. 한참을 싸우다 로마군은 곧 이들이 어느덧 카르타고군의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6] 로마군은 뒤를 돌아보았고, 동맹군이 카르타고군의 공격으로 매우 위급한 상황임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이들 동맹군을 구원하는 것을 포기하였고(이것에 대해 폴리비오스와 리비우스는 거세게 내리는 비 때문이라고 변호했다) 대신 피아첸차로 향했다.

10. 민중의 반응

리비우스는 그날 밤의 일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캠프에 남겨진 수비병과 많은 생존자들, 그리고 부상병들은 트레비아 강을 뗏목으로 건넜다." 스키피오가 이들을 맞이하였다. 그는 "그의 병사를 소리내지 않고 진군시켜 포 강을 건넌 뒤 크레모나 지역에 도달하였다. 크레모나는 로마가 마지막으로 보유하고 있는 북이탈리아의 식민지였다. 스키피오는 곧 패잔병이 머물고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스키피오는 이렇게 진군하는 동안 한니발이 머물고 있는 캠프를 지났으나 한니발은 이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스키피오에겐 아직 상당한 병력이 있었고 한니발의 병력은 대규모 회전을 치른 직후였기 때문이었다.

스키피오의 로마군이 카르타고군의 캠프를 지나갔을 때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으나 공격하기엔 기후가 혹독했는데 아침에 내린 비는 추운 기후 때문에 모두 눈과 얼음으로 얼어있었다. 그리고 카르타고군 역시 한 마리를 제외한 모든 코끼리가 죽었으며 많은 부상병과 전사자의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따라서 한니발은 더이상의 군사행동을 할 수 없었다.

두 집정관이 티키누스 강과 트레비아 강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시민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들은 한니발이 로마의 성문 앞에 곧바로 나타날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었다. 사실 전투의 패배는 그들이 생각한 것만큼 심각하지 않았는데 2.5개 군단 병력이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스키피오 휘하의 3개 군단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스키피오가 이전에 이끌었던 2개 군단은 이베리아로 향한 스키피오 칼부스의 휘하에 남아있었으므로 로마 원로원은 총 7.5개 군단을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동안 카르타고군은 병력을 재정비하였다. 카르타고군은 포 강을 통해 갈리아인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카르타고군을 피해 로마로 되돌아왔고 집정관 선거를 주관하였다. 두 명의 새로운 집정관이 선출되었는데 한 명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였고 다른 한 명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네포스였다. 이들 집정관은 집정관 임기가 교체되는 3월 15일까지는 집정관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티베리우스는 집정관 선거가 끝난 뒤, 즉각 지휘권을 다시 넘겨받는다. 새로 선출된 집정관들은 로마와 동맹시에서 더 많은 병사를 뽑기 시작하였다. 이들 신병은 사르데냐와 시칠리아, 그리고 타렌툼과 그 밖의 많은 도시들의 수비를 강화하는 데 배치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60여 개의 군함(퀸쿼레메)을 건조하였고 아리미눔과 아레티움에 군수 물자 거점을 세워 북상할 준비를 한다. 그들은 시라쿠사의 왕 히에로 2세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하여 1천 5백 명의 병력을 지원받는다. 플라미니우스는 아레티움에 있는 캠프로 이동하였고 세르빌리우스는 아리미눔에 있는 캠프로 갔다.

11. 마지막 군사활동

로마군은 플라켄티아에 요새화한 숙영지를 지었다. 한니발은 이들을 시험해 보기 위해 야습을 해보지만 로마군은 대비가 단단히 되어있었다. 보초들은 카르타고군을 보고는 크게 고함을 질러 플라켄티아에 있는 주둔군이 알아챌 수 있게 하였다. 다음 날 새벽 티베리우스의 기병이 출전하여 카르타고군을 내쫓았고 한니발에게 경미한 부상까지 입힌다. 이러한 방어에 대해 리비우스는 "매우 훌륭한" 것이라고 서술했다.

며칠 후 한니발은 빅투비아이라는 도시로 진군한다. 이곳은 한니발에 반대하는 모든 갈리아 부족들이 피신한 도시였다. 이들은 훈련이 부족한 상태에서 한니발과 맞서기 위해 3만 5천여 명의 병력으로 싸우러 나오나 금세 패배하고 모두 항복한다. 한니발은 이 도시를 약탈한다.

이후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추위로 인해 카르타고군은 군사 활동을 멈춘다. 봄이 다가오자 한니발은 에트루리아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아펜니노 산맥에서 이들은 대단히 강력한 돌풍을 만나 캠프를 칠 수 없게 된다. 뒤이어 엄습한 강한 비와 눈이 오자 이들은 텐트를 평평하게 핀 뒤 그 밑으로 들어간다. 그 돌풍 이후 강한 추위가 찾아왔고 많은 말이 죽는다. 이틀 뒤, 한니발은 피아첸차로 되돌아와 캠프를 친다. 이제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티베리우스는 다시 전투를 하기로 결정하고 북상하여 카르타고군으로부터 3마일 떨어진 곳에 캠프를 친다.

그때 한니발 휘하엔 1만 2천 보병과 5천의 기병만 있었는데 이렇게 수가 줄은 이유는 전사로 인한 것이 아니라 갈리아인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그들의 부족으로 되돌아 갔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아침 한니발은 병력을 이끌고 나와 티베리우스의 로마군 캠프를 공격한다. 한니발은 많은 보병을 배치한 뒤 로마군이 중앙을 공격하길 기대했지만 티베리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로마군은 해질 무렵 후퇴하기 시작했고 한니발은 그 배후를 공격하였으나 로마군은 이 공격을 견뎌냈다. 밤이 오자 한니발은 공격을 멈췄다. 사상자는 양측이 거의 비슷했다. 이것은 그해의 집정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의 마지막 군사 행동이었다. 이 해에 로마인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그 다음 해에 벌어진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의 손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12. 전술적 분석

  • 다음은 영국 역사학자 왈터 랠레이그의 분석이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는 3가지의 큰 실수를 하였다. 첫째, 그는 기병이 매우 부족한 상태에서 한니발과 평원에서 정면으로 대결을 한 것이었다. 그는 고르지 못한 땅, 숲 등의 여러가지 지형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둘째, 그는 싸우기 전 지형의 상태를 전혀 조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로마군은 추운 겨울날 아침에 강을 건넜고, 마고의 복병에 그대로 당한다. 셋째, 그는 자신의 병사를 식사도 안한 상태에서 차가운 강에 그대로 내몬다. 그 결과 병사들은 평소보다 전투력이 훨씬 손상된 상태에서 싸워야 했었다.

[1] 티키누스 전투에서 중상을 입어서 참전하지 못했다.[2] 롱구스는 개선장군에게 붙이는 별칭으로 한니발의 칸나이 전투 승리 이후 벌어진 이탈리아 전역의 전쟁에서 셈프로니우스의 군공을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 한니발이 카푸아 인근의 캄파니아 지역에서 머물면서 주변지역 점령에 집중할 때 남부를 맡은 한노가 브루티움 대부분을 손에 넣고 캄파니아와 브루티움 사이의 루카니아로 북상했을 때 셈프로니우스는 그를 상대로 2천의 카르타고군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고 로마인들은 그에게 롱구스라는 별칭을 붙여준다. 이는 공화정 당시의 로마인들이 전투에서 패배한 지휘관에게도 꽤 좋은 대우를 해주었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3] 1차 사료 저자인 그리스의 폴리비오스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후원을 받았고 이 때문에 스키피오 일족의 패배를 변명하는 곡필을 했다는 의혹이 있다. 이는 칸나이 전투에서도 마찬가지.[4] 이를 기록한 역사가 폴리비오스와 리비우스 모두 갈리아족이 중립을 지켰다고만 언급했을 뿐, 자세한 언급은 없다.[5] 티베리우스는 스키피오의 보조 자격으로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부상을 입은 스키피오가 군사행동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6] 즉, 돌파에 성공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