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15 14:17:16

바이쿨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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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로마군3.2. 카르타고군
4. 전투 경과5. 전투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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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208년 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바이쿨라(현재 스페인 하엔 지방 산토 토메) 언덕에서 맞붙은 전투.

2. 배경

기원전 209년 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베리아 반도 카르타고 식민지의 수도인 카르타고 노바를 기습하여 이틀 만에 공략했다.(카르타고 노바 공방전) 그는 도시를 접수한 뒤 약탈을 엄격히 금지하고, 사흘에 걸친 축제를 개최해 시민들의 환심을 샀다. 그리고 군영을 설치하고 성벽을 수리해 카르타고군의 예상되는 반격에 대비했다. 또한 도시에 있던 이베리아 부족 인질들을 아무런 대가 없이 집으로 돌려보냈고, 부족들은 이에 크게 기뻐하며 카르타고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하고 로마를 따랐다. 스키피오는 뒤이어 주변 도시들을 별다른 저항 없이 공략했으며, 카르타고에 아직 귀속되어 있는 도시들도 그에게 가담할 기미를 보였다.

한편, 이베리아의 지배권을 지킬 임무를 맡았던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로마군이 에브로 강을 건너 자신들을 각개 격파하려 들 거라 여기고 이에 대응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다가 스키피오가 함대를 이끌고 카르타고 노바를 기습해 단숨에 함락시켰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오자, 그들은 급히 대응에 나섰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스키피오가 더 이상 세력을 뻗치지 못하게 하고자 군대를 이끌고 카르타고 노바로 향했고,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주변 도시에 사절을 보내 원군이 곧 오니 이탈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마고 바르카는 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와 함께 용병을 소집하여 병력을 증강했다. 하지만 섣불리 로마군과 맞붙지 못하고 전열을 가다듬기만 했다. 스피키오 역시 카르타고 노바에 수비대를 남겨두고 함대를 이끌고 본거지인 타라코나로 돌아간 뒤 병력을 증강하는 데 공을 들이면서, 기원전 209년은 더 이상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채 지나갔다.

기원전 208년 초, 스키피오는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그는 3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타라코나에서 남쪽으로 진군했다. 여기에 6,000에서 12,000명의 이베리아 부족민도 합세하면서, 그의 병력은 40,000~44,000명으로 늘어났다. 스키피오는 해안가를 따라 카르타고 노바로 빠르게 이동해 수많은 부족들의 복종을 받아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스키피오가 이대로 남하하는 걸 방관했다간, 가뜩이나 카르타고 노바 함락 후 동요하는 자기 부대 내 이베리아인들이 대거 이탈하리라 여겼다. 그는 2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바이쿨라 언덕에 진영을 세워서 스키피오와 대적하면서,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마고 바르카가 원군을 이끌고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바이쿨라는 카르타고 노바 주변의 은광이 공략된 뒤 카르타고인들이 이베리아 반도 내에 가지고 있는 마지막 은광이 위치한 곳이었기에 매우 중요했다.

스키피오가 바이쿨라 근처에 이르렀을 때, 그가 앞서 보낸 경기병들이 카르타고군 전초 기지를 발견하고 곧장 공격했다. 그곳을 지키던 병사들은 급히 달아나 하스드루발에게 적이 근처에 왔다고 보고했다. 하스드루발은 급히 전투 대형을 결성하게 했지만, 스키피오가 전군을 이끌고 언덕 아래에 포진할 때까지 완료하지 못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다른 2개의 카르타고 군대가 인근에 도착하여 자신을 포위 섬멸하려 들지도 모른다고 우려했기에, 언덕 위에서 허둥지둥하는 적을 이틀간 공격하지 않았다. 이후 인근에 사는 부족민과 정찰병들을 통해 다른 적군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그는 전투를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바이쿨라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로마군

3.2. 카르타고군

4. 전투 경과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하스드루발이 누미디아 기병대와 경보병대를 능선으로 보내 스키피오의 부하들을 먼저 공격했다고 한다. 반면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스키피오가 보병대를 능선쪽으로 먼저 보냈다고 한다. 어느 쪽이 먼저 공격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초기 전투가 치열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카르타고군은 언덕을 올라오는 로마군에게 돌과 다트 세례를 퍼부었지만, 로마군은 우직하게 밀어붙였다. 첫번째 능선에서 격투를 벌인 끝에, 카르타고 경보병대가 패퇴했고, 로마군은 정상을 차지했다. 스키피오는 뒤이어 절친한 친구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에게 적군의 본부가 위치한 두번째 능선의 우측면을 공격하게 했고, 자신은 좌측면을 공격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하스드루발은 로마군이 언덕을 곧장 기어올라 공격해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고, 방어 태세를 아직 완비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특히 코끼리들을 중앙 대열에 배치하는 작업도 완료되지 않았기에, 로마군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항전해봐야 승산이 없다고 보고, 로마군이 언덕의 양측면으로 진군해오자 더 많은 경보병대와 일부 중보병대를 파견해 최대한 저지하게 한 뒤, 전 병력의 3분의 2를 이끌고 퇴각했다. 뒤에 남겨진 카르타고군은 그대로 섬멸되거나 항복했다. 리비우스는 8,000명이 전사하거나 생포되었다고 기술했고, 폴리비오스는 12,000명이 죽거나 잡혔다고 서술했는데, 현대 역사학자들은 리비우스가 밝힌 수치가 좀더 믿을 만 하다고 본다.

5. 전투 이후

스키피오는 언덕을 완전히 장악한 뒤 그의 숙영지를 카르타고 진영으로 옮겨 적의 구원군과 맞서 싸울 태세를 갖췄다. 며칠 후 전장에 도착한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마고 바르카는 로마군이 이미 언덕을 장악한 걸 보고 전투를 회피했다. 그들은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함께 앞으로 어떻게 할지 논의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이 회의에서 자신이 3만 장병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가서 한니발과 합세할 테니, 두 사람은 히스파니아에 남아서 스키피오와 전투를 지속하라고 권했고, 두 사람 모두 동의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로마군이 점거한 피레네 산맥의 동쪽 고개를 피해 서쪽 고개를 건너 크게 우회하여 알프스로 진격했다.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베티스 계곡으로 이동했고, 마고는 용병을 모집하기 위해 발레아레스 제도로 향했다.

스키피오는 여름 내내 바이쿨라에 머물면서 이 지역의 부족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그는 붙잡힌 모든 원주민들을 몸값 없이 풀어줬고, 족장 인디빌리스에게 적군으로부터 노획한 300마리의 말을 주고 나머지는 이베리아 병사들에게 나눠줬다. 몇몇 부족장들이 그를 "왕"이라 부르자, 그는 "나는 왕이 아니라 임페라토르다."라고 정정했다.[1] 그러다 겨울이 오자 타라코나로 돌아가서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그러나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이탈리아로 진군하는 걸 막지 않았기 때문에, 후에 원로원으로부터 두고두고 비판받았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섣불리 추격했다가는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마고 바르카가 위협을 가할 테고,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돌아서서 두 장군과 함께 로마군을 섬멸하려 했을 테니, 스키피오가 현실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본다.


[1] 훗날 제정시대때 황제를 프린캡스 혹은 임페라토르라고 불렀지만 공화정 시기 임페라토르는 원로원의 명에 따라 해당 군단의 지휘권을 부여받은 최고 사령관이라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