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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215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한니발 바르카의 카르타고군으로부터 놀라 시를 또다시 사수한 전투.
2. 전투 경과
기원전 216년, 한니발 바르카는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뒤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을 대거 복종시켰다. 그러나 놀라 시에 대한 공세는 법무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에 의해 격퇴되었다.(1차 놀라 공방전) 칸나이 전투의 참상에 깊이 상심했던 로마인들은 마르켈루스의 승리에 매우 기뻐했고,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215년 초 귀족 집정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가 실바 리타나 전투에서 보이족의 습격으로 전사한 직후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원로원은 평민 출신 집정관이 두명 뽑힌 것에 반감을 품고 불길한 징조를 핑계로 마르켈루스의 취임을 무효로 처리하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선출했다.파비우스는 집정관에 선출된 뒤 마르켈루스에게 수에술라 언덕에 주둔한 군대를 계속 통솔하도록 했다. 마르켈루스는 놀라에 본거지를 마련한 뒤, 한니발에게 굴복한 이르피니와 산타니 카우디니 일대를 약탈하고 주거지를 불태웠다. 두 지역 지도자들이 한니발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호소하자, 한니발은 그들에게 풍부한 선물을 주며 곧 도우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마르켈루스가 한창 약탈에 열중하고 있는 사이에 놀라를 포위하길 희망해 강행군했다. 그러나 마르켈루스는 항상 퇴로를 마련해둔 채 급습 작전을 벌였고, 정찰병들을 수시로 사방에 보내 한니발의 움직임을 확인하게 했다. 얼마 후 한니발이 전속력으로 놀라로 진군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그는 즉시 전군을 놀라 시내로 이동시켰다.
자신이 한발 늦었다는 걸 알게 되자, 한니발은 도시를 포위한 뒤 성벽을 향해 진군하게 했다. 그때 마르켈루스는 기병대를 이끌고 성문 바로 앞에 있다가, 적이 성벽으로 바짝 다가갔을 때 성문을 열고 갑작스럽게 출격해 적군을 기습했다. 카르타고군은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다소 희생을 치렀지만 곧바로 반격했다. 이때 폭우가 내려 전투가 중단되었고, 양측 모두 철수했다. 다음날까지 비가 내렸기 때문에, 양군은 한동안 전장에 나가지 않았다.
놀라 시를 포위한 지 사흘째 되던 날, 한니발은 놀라 시 주변의 농경지를 약탈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파견했다. 마르켈루스는 적 진영에 사람이 줄어든 걸 보고 전군을 이끌고 성문을 박차고 나와 쳐들어갔다. 한니발은 진영에 남아있는 병사들을 이끌고 평원에 진을 치고 맞서는 한편, 농경지로 파견했던 병사들을 소환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마르켈루스는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격려했다고 한다.
"카르타고인들은 카푸아의 쾌락에 빠졌다. 그들은 겨울 내내 술과 창녀들과 즐거운 나날을 보내면서 쇠약해졌다. 과거의 힘과 활력은 떨어졌고,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나들던 투지가 사라졌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팔다리와 무기를 거의 들지 못한다. 카푸아는 한니발의 '칸나이 패배'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후 벌어진 격전에서 로마군은 1,000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한 반면 카르타고군은 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600명이 포로로 붙잡혔다고 한다. 한니발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군대를 도로 진영으로 불러들었고, 마르켈루스는 농경지를 약탈하던 적군이 돌아오는 걸 보고 도시로 돌아갔다. 사흘 후 누미디아, 이베리아 기병 272명이 로마군에 귀순했고, 로마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정착할 토지를 줬다. 한니발은 이번에도 놀라 시 공략을 포기하고, 한노에게 분견대를 맡겨 브루시움으로 보내고 자신은 아르피 주변에 겨울 숙영지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