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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황제와 황후의 칭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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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페라토르(Imperātor)는 로마 공화정에서 임페리움(통솔권)을 거머쥔 자를 일컫는 군사 호칭이다. 제정 로마 시대에는 로마 황제를 이르는 칭호 중 하나로 자주 쓰이게 됐다.2. 단어
영어 단어 Emperor(엠퍼러)의 직접적 어원이다 보니 오해가 많지만, 후술하듯이 Imperium은 그 자체로는 황(皇)이나 제(帝)라는 의미가 아니다. 바로 그렇기에 공화정 로마에서도 Imperium이란 말은 쓰였고, Imeperium Romanum은 '로마 제국(Roman Empire)'이 아니라 '로마(인)의 다스림(Roman Dominion)'이라는 의미였다. 제정 후기에도 이 뜻은 보존되었고, imperium은 여전히 통솔권이었다. 가령 불가타 요한 묵시록 1장 6절에서는, 예수에게 'gloria와 imperium'이 영원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영광과 제국'이 아니라 '영광과 권능'이라는 의미이다. 이 구절에서 imperium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원문도 힘, 지배 등을 일컫는 κράτος(kratos)이다.임페라토르라는 말은 영어 단어 엠퍼러(Emperor)의 어원[1]이다. 라틴어를 풀이하면 접두사 'im- (in-; 주다)'과 어근 'perāre(prepare; 채비)', 접미사 '-tor(agent; 대상자)'의 결합어로, '통솔권(Imperium)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동양에서는 율령제에 대응하여 '황제'로 의역한다.[2] 본래는 고대 로마에서 개선장군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쓰이다가, 이후 전체 로마군에 대한 임페리움인 "임페리움 마이우스(Imperium Maius[3])"를 특권으로 수여받은 시점에서 이는 현재까지도 내려오는 국가원수의 제1권한인 통수권이 되었고, 통수권의 소유자가 되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이후로 점차 황제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2.1. 로망스어권에서의 임페라토르
임페라토르는 라틴어의 후계 언어인 로망스어를 사용하는 여러 나라에서 황제를 뜻하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영어의 Emperor,[4] 프랑스어의 Empereur,[5] 스페인어의 Emperador, 포르투갈어의 Imperador, 이탈리아어의 Imperatore, 루마니아어의 Împărat가 모두 라틴어 Imperator를 어원으로 한다.2.2. 비(非) 로망스어권에서의 임페라토르
독일어권 국가인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에서 유래한 단어인 카이저가 황제를 뜻하는 칭호로 쓰이긴 했지만, 非 독일계 민족도 많았고 라틴어가 링구아 프랑카였기에 공식적으로는 임페라토르를 칭했으며, 카이저는 비공식적인 칭호였다.[6]한편 슬라브계 국가들은 카이저와 마찬가지로 카이사르에서 유래한 단어인 차르를 황제의 칭호로 사용했지만, 러시아 제국은 표트르 1세 시대부터 공식적으로 임페라토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어를 비롯한 동슬라브계 언어들과 그 영향을 받은 불가리아어에서 차르는 임페라토르보다는 급이 낮고 왕(코롤)보다는 높은 애매한 칭호가 되었지만, 세르보크로아트어에서는 여전히 차르가 황제를 뜻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3. 역사
3.1. 공화정 초중기
본디 고대 로마에서 임페리움은 통치자의 권한, 즉 로마 왕정 당시의 왕의 권한을 의미했으며, 법률로 제한되는 범위 내에서 무한한 권한을 지니는 것을 의미했다. 공화정이 성립되고 명예로운 경력의 관직들이 확립됨에 따라, 임페리움은 관직별로 정해진 범위 내에서만 주어졌으며, 이 범위는 추상적인 임무 내용일 수도 있고, 일정 범위의 지역 또는 행정구역을 임지(Provincia[7])로 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조영관의 임페리움은 "수도 로마 내부"에서 "공공사업"에 한해서 부여되었다. 즉, 임페리움은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공공사업의 실시, 각종 정책의 설정, 그리고 군대의 지휘 등을 모두 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했다.임페리움을 수여하는 것은 원로원이 가진 권한이었다. 로마 공화국의 관직들 중 집정관(Consul)과 독재관(Dictator)은 "로마 공화국의 모든 것"을 임지로 하는 막강한 임페리움을 당연직으로 수여받았다. 집정관이 평상시의 국가원수, 독재관이 비상시 임명되는 국가원수임을 고려하면 사실상 이 정도 수준의 임페리움은 국가원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당연히 대부분의 관직들이 아직 설치되지 않았던 공화정 초창기에는 임페리움은 집정관 둘과 유사시 집정관을 제치고 선정되는 독재관에게만 부여되었다.
군사 분야에서 이 임페리움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데, 군대를 임지로 하는 임페리움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복수의 군단을 지휘할 수 있었다. 즉, 앞서 예로 들었던 조영관의 임페리움은 그 임지가 군대가 아니기 때문에 조영관이 군단을 이끌 수는 없었다. 기본적으로 각 군단의 군단장 (레가투스, Legatus)이 각각의 군단을 이끌지만 군대를 임지로 하는 임페리움이 없다면 아무리 군단장이라도 다른 군단을 추가로 지휘할 수 없었다. 이는 행정의 우두머리가 군대의 우두머리를 겸하는 것을 의미했다.
로마 초기 도시국가 시기에는 군단을 4개 이상 편성하는 일이 없었다. 따라서 한 해에 뽑힌 두 집정관이 각자 임페리움을 받아 각각 2개 군단을 이끌면 그것으로 로마군 전체를 지휘하기 충분했다. 그러나 로마가 확장하며 상황이 바뀌었다.
사실 제1차 포에니 전쟁까지만 해도 이전까지의 시스템이 꽤나 잘 굴러갔다. 이 시기에는 집정관 2명에게 4개 군단을 주고 전부 전선에 내보내야 했기 때문에 그 동안 수도에 남아있는 법무관(Praetor)에게 임시로 임페리움을 수여하여 수도 방위를 맡긴 정도였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한니발을 상대하던 제2차 포에니 전쟁때 터졌다. 이 때 로마는 본토 이탈리아가 외부 강대국에게 공격받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이전과 달리 매년 20개가 넘는 군단을 편성하고 이탈리아 반도와 이베리아 반도 전역(全域)에서 끊임없는 전투를 벌여야 했고, 때문에 현직 집정관 2명과 4개 군단으로는 제대로 된 전선을 형성해 적에게 대항하는 전략을 쓸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이 시기부터 법무관에게도 상설 임페리움이 부여되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지휘관이 부족해 결국 전직 집정관(Proconsul)들에게도 임페리움을 주고 각 전선에 사령관으로 배치하게 되었다. 전직 법무관(Propraetor)들이 임페리움을 받고 전장에 나가기도 하였다. 한니발 전쟁이 끝나고 로마가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잡으며 속주(Provincia) 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임페리움이 점차 각지의 총독들에게 수여되는 "군사 지휘권"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전직 집정관들이 임페리움을 받고 각지의 속주 총독으로 부임하여 해당 지역에 주둔하는 복수의 군단을 이끌고 속주를 몇 년간 통치하게 되었다.
3.2. 공화정 말기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는 명실공히 지중해 세계의 패권국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각 점령지에 속주를 설치하였다. 속주에는 임페리움을 받은 총독(전직 집정관)이 파견되었다. 이 시기 로마 군단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을 통해 징집병에서 상비군으로 대체된 상태였다. 이제 군단은 전쟁이 끝나면 귀환하는 원정군이 아니라 속주 각지에 영구적으로 주둔하며 현지에서 병력을 조달하는 체제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본국에서 파견된 총독이 전임 총독으로부터 속주 주둔 군단 지휘권을 인수하는 체계였다. 이들 총독들은 야만족이나 반란군, 해적 따위를 상대로 싸워 로마를 지키는 역할을 맡았고, 대부분 우월한 로마의 군제와 기술력으로 승리를 거뒀다. 이 시기부터 임페라토르라는 말의 의미가 다소 변하게 된다. 이전까지 임페라토르는 민회 선출직 관직에 있는 사람(magistratus 마기스트라투스) 중에서 임페리움을 받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이후 시작된 군단의 사병(私兵)화가 지속되면서 개선식(triumphus)[8]를 거행할 정도의 군공(軍功)을 세운 고위 지휘관에게 붙이 명예로운 칭호가 되었다. 그런 사령관은 승리를 거둔 뒤에 거창하게 연설 한 번 하고, 열광적인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 임페라토르!"라는 환호성을 들은 뒤 원로원에 개선식을 요청했다. 원로원은 보통 이런 개선식을 승인했고, 사령관은 개선식을 위해 수도 로마로 귀환했다. 개선식이 끝나면 거기에서 군단을 해산하고 임페리움을 반납하는 것이 관례였다. 개선식을 끝낸 사령관은 임페리움을 반납했으므로 공식적으로 임페라토르가 더 이상 아니게 된다. 후일 클리엔테스가 된 퇴역병들이 가끔씩 존칭의 의미로 자기의 옛 사령관을 임페라토르라 부르는 일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카이사르는 집정관 임기를 마치고 일리리아,[9] 갈리아 키살피나[10] 두 속주의 총독으로 내정되었다. 추후 원로원 의결을 통해 갈리아 트란살피나[11] 총독 직책까지 맡게 되면서 4개 군단의 명령권(임페리움)을 받았다. 카이사르는 이렇게 공화정 로마의 관례대로 3개 속주에 주둔한 4개 군단의 임페라토르가 되었다. 여러 속주의 총독을 겸임하는 것 역시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이 세 속주의 위치를 고려하면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하려는 목표가 있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인접 지역에 정착한 갈리아족의 내부 분쟁에 개입하는 형태로 갈리아 전쟁을 시작해 8년이라는 초유의 짧은 기간 안에 갈리아 전역 제패라는 유례가 없는 업적을 남긴다.
카이사르의 업적과 그를 향한 민중의 지지를 경계한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원로원 최종 권고를 보냈지만 카이사르가 그에 불복하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다. 카이사르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을 승리로 마쳤다. 내전이 끝난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수도 로마에서 종신 독재관에 취임하면서 로마군 전체에 대한 종신 임페리움도 함께 가지게 되었다. 즉 로마군 전체를 지휘할 수 있는 통수권을 쥐었음을 뜻한다.
3.3. 제정
그러나 이런 카이사르의 움직임을 왕이 되려는 야욕을 드러내는 것으로 판단한 극렬 공화정주의자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라 누나 율리아의 외손자 옥타비아누스가 그의 양자로 입적됨과 동시에 그의 물질적, 정치적 자산을 모두 상속받게 되었다.옥타비아누스는 본인이 남긴 자서전 <업적론>을 통해 임페라토르를 총 21번 병사들에게 선포받아 누렸고, 기원전 43년 처음 받았다고 강조했다.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로서 황제에 즉위한 뒤, 임페라토르는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칭호 중 하나로 쓰이게 되었다.
[1] 라틴어 'imperātor' - 앵글로노르만어 'empereor' - 중세 영어 'emperour'. 영어 외의 파생어들은 하단의 '후계 언어들에서 임페라토르의 후신' 참조.[2] 로마의 총독, 속주, 장관 등의 관직명도 동양의 율령제의 예에 준하여 의역한 것이다.[3] 영어의 Major와 같은 단어인 Maior의 중성형이다. 임페리움 마이우스는 '무제한' 임페리움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총독(전직 집정관)의 임페리움을 넘어서는 최상위의 임페리움이었다.(단, 현직 집정관과 독재관의 권한은 제외.)[4] 영어는 게르만어파에 속하지만 노르만 정복으로 인해 프랑스어의 Empereur를 차용했다.[5] 이 칭호를 공식적으로 쓴 사람은 나폴레옹 부자와 나폴레옹 3세가 있다. 그 전의 왕정에서는 족보 문제로 황제를 칭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에 있어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코에이의 게임인 랑펠로의 원제는 L'EMPEREUR인데, The emperor라는 뜻이다.[6] 다만 후대로 갈수록 라틴어는 사문화되고 독일어가 주요 언어로 자리잡으면서 공공연하게 'Römisch-deutscher Kaiser'로 불렀다.[7] 나중에는 이 말이 속주라는 뜻이 된다.[8] 영어로 대승(大勝)을 의미하는 triumph의 어원이다[9] 현대의 발칸 반도 서북부, 즉 아드리아해 연안부에 해당한다. 구 유고슬라비아 영토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10] 루비콘강 이북, 알프스산맥 이남 이탈리아 북부지방에 해당한다.[11] 지중해 연안의 프랑스 남부지방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