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19 02:12:29

게르마니아(타키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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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니아
Germania
<nopad>파일:Codex_Aesinas_Germania_Incipt_facsimile.jpg[1]
<colbgcolor=#dddddd,#010101><colcolor=#373a3c,#dddddd> 사본 제목 De Origine et situ Germanorum [2]
작가 타키투스
언어 라틴어
발매일 서기 98년
장르 역사, 민속학

1. 개요2. 내용
2.1. 위치와 기원2.2. 외모적 특징2.3. 정치2.4. 종교2.5. 전쟁2.6. 생활
3. 후대에 미친 영향
3.1. 게르만 민족주의에 미친 영향3.2. 나치즘에 미친 영향
4. 비판 및 평가5. 여담

[clearfix]

1. 개요

타키투스서기 98년에 집필한 역사, 민족지학적 저서로 게르마니아 지역의 문물과 풍습 등에 관한 기록이다. 총 46장으로 구성되는데 1장부터 27장까지는 게르만족의 영역과 법, 관습을 설명하고, 후반부에서는 다양한 게르만 부족들의 상대적인 위치와 특징을 서술한다.

2. 내용

2.1. 위치와 기원

게르마니아는 전체적으로 갈리족, 라이티족, 판노니이족과는 레누스 강다누비우스 강에 의해, 사르마타이족, 다키족과는 상호간의 두려움과 산맥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3]
나는 게르마니족이 원주민이며 이주나 교류를 통해 이민족들과는 거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믿는다. (... 중략 ...) 누가 아시아나 아프리카나 이탈리아를 떠나 황량하고 일기불순하며 살기에도 보기에도 음울한 게르마니아를 찾겠는가? 그곳이 고향이라면 몰라도.

게르마니족은 그들의 유일한 역사 기록으로 옛날부터 전해오는 노래들에서 투이스토 신이 대지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투이스토에게서는 그들 종족의 시조인 만누스라는 아들이 태어났고 만누스에게서는 또 세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 아들들의 이름을 따서 대양에 가장 가까이 사는 자들은 잉가이보네스족, 중앙에 사는 자들은 헤르미오네스족, 나머지는 이스타이보네스족이라 부른다고 한다.

(... 중략 ...) 하지만 게르마니아라는 이름은 오래된 것이 아니라 근래에 와서 사용되었다. 맨 먼저 레누스 강을 건너가 갈리족을 내쫓은 지금의 퉁그리족이 그때는 게르마니족이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종족이 아니라 한 부족의 이름이 차츰 통용되었으니, 처음에는 갈리족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승승장구하던 퉁그리족만이 자신들을 게르마니족이라고 불렀지만, 나중에 이 이름이 일단 통용되자 종족 전체가 스스로 자신들을 게르마니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4]
타키투스에 따르면, 로마 제국과 게르마니아의 경계는 라인강다뉴브강이다. 또한 그에 따르면, 게르만족(게르마니족)은 그 땅의 원주민이며, '게르마니아'라는 이름 자체는 오래된 것이 아니라 근래에 와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2.2. 외모적 특징

개인적으로 나는 게르마니아 주민들은 다른 종족과의 혼인으로 피가 섞이지 않았으며, 유례없이 순수한 특별한 종족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견해에 동조한다. 그래서 그들은 인구가 많음에도 매섭게 쏘아보는 푸른 눈, 붉은 머리털, 순간적으로 힘을 쓸 때에만 효과적인 큰 체구 등 모두 생김새가 비슷하다. 외모와 달리 그들에게는 힘들고 지속적인 노력을 견뎌낼 만한 참을성이 없으며, 갈증과 더위는 전혀 참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기후와 토양 덕분에 추위와 굶주림에는 익숙하다.[5]
타키투스는 게르만족이 그 땅의 순수 혈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단일 종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타키투스는 책의 후반부에 게르마니아에 사는 수많은 종족들을 나열한다. 그리고 이들을 다 게르만족이라고 부른다.

2.3. 정치

게르마니족은 왕들은 혈통에 따라, 장군들은 용기에 따라 선출한다. 그들의 왕들에게는 절대적인 또는 전제적인 권한이 없다. 장군들은 권위에 의해서보다는 정력적이고 탁월하고 대열 앞에서 싸우는 등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대중의 호감을 산다. 게다가 사제가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사형을 명하거나 투옥하거나 태형을 언도할 수 없다. 그리고 사제들은 처벌을 하기 위해 또는 장군의 명을 받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싸움터에 와 있다고 믿는 신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6]
사소한 일은 귀족들이 결정하고, 중대사는 공동체 전체가 결정한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최종 결정권이 있는 사안들도 귀족들이 사전 심의한다. 예기치 못한 사건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는 한, 그들은 초하루나 보름날처럼 정해진 날에 집회를 연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업무 처리를 위한 가장 상서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날수를 계산할 때 우리처럼 낮의 수가 아니라 밤의 수로 따진다. 그들은 그렇게 날짜를 잡고 약속을 하는데, 밤이 낮을 인도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명령받은 것처럼 동시에 모이지 않고 참석하기를 꾸물대다가 둘째 날이나 심지어 셋째 날도 놓치는데, 이는 구속받기 싫어하는 그들의 성향에 수반되는 폐단이다. 모여든 군중은 마음이 내켜야 완전무장한 채 자리에 앉는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나이, 신분, 군사적 업적, 달변의 정도에 따라 왕이나 지도자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이때는 명령권보다 설득력이 더 중시된다. 어떤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백성들은 고함을 질러 싫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러나 마음에 들면 단창을 맞부딪친다. 무기로 찬성의 뜻을 표하는 것이 지지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가장 명예로운 방법이다.[7]
게르만족은 왕이 있지만 절대적인 권한은 없으며, 설득하는 역할이 크다. 보통 사소한 일은 귀족들이 정하고, 중대사는 백성을 포함한 공동체 전체가 결정한다. 회의에 참여할 때 완전무장을 하는데, 지도자 격의 사람들이 나와서 설득을 하면, 백성들은 이에 대한 찬반을 무기 부딪치는 소리로 표현한다.

2.4. 종교

게르마니족은 신들 가운데 메르쿠리우스[8]를 가장 숭배하며, 정해진 날들에는 사람을 제물로 바쳐서라도 그를 달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헤르쿨레스마르스에게는 허용된 종류의 동물을 제물로 바쳐 호감을 산다. 수에비족 가운데 일부는 이시스에게도 제물을 바친다. 나는 이방의 이런 의식이 어떤 이유에서 어떤 경로로 도입되었는지 단언할 수 없지만, 여신의 상징이 리부르니족이 사용하던 소형 쾌속전함 모양을 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해외에서 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그들은 신들을 벽 안에 가두거나 인간을 닮은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천상의 신들의 위대성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숲과 원림을 신들에게 바치며, 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신비로운 존재에게 신들의 이름을 붙인다.[9]
게르만 민족에게 전승되는 노래에 따르면 게르마니아 땅에서 '투이스토'라는 신이 나왔고, 그의 아들 만누스가 게르만 민족의 조상이 된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외래에서 도입된 신들을 믿고 있다. 그리스ㆍ로마와 다른 점은 그리스ㆍ로마는 신을 건물 안에 모시는데, 게르마니아는 신을 건물에 가두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건물 밖 숲에서 의식을 치룬다.

2.5. 전쟁

그들은 바르리투스(barritus)라 불리는 이 노래들을 부름으로써 자신들의 용기를 북돋우고, 그 노랫소리만으로도 임박한 전투의 결과를 점치곤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열(戰列)들이 지르는 소리에 따라 적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거나 공포심에 휩싸이는데, 그들에게는 전열들이 지르는 소리가 단순한 목소리가 아니라 용기의 합창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거친 소리와 둔탁한 굉음을 내려 하는데, 목소리가 되울려 더 낭랑하고 굵직해지도록 방패를 입에 갖다 댄다.[10]
검이나 장창을 쓰는 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들은 단창을 들고 다닌다. 그들의 말로 '프라메아'라고 불리는 이 단창은 무쇠 양끝이 좁고 짧기는 해도 날카롭고 다루기 쉽다. (... 중략 ...) 그들은 여봐란듯이 무구를 장식하지는 않지만, 방패에만은 최고급 물감을 칠한다. 흉갑을 가진 자는 소수뿐이고, 금속이나 가죽으로 만든 투구를 가진 자도 한두 명에 불과하다. 그들의 말들은 눈에 띄게 아름답지도 날래지도 않으며, 우리 로마인들의 말들처럼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는 훈련도 받지 않았다. (... 중략 ...) 전체적으로 보아 그들의 강점은 보병에 있으며, 그들의 기병대가 보병들과 혼성부대를 이루어 싸우는 이유도 그렇기 때문이다. (... 중략 ...) 그들은 전투가 백중지세를 이룰 때도 전우들의 시신을 수습한다. 방패를 버리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치욕이다. 그렇게 창피스러운 자는 제사나 회의에 참석할 수 없다. 그래서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많은 자들이 목매달아 자살함으로써 치욕을 끝냈던 것이다.[11]
무엇보다 그들의 용기를 북돋우는 것은 그들의 기병대나 쐐기 모양의 전열이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구성된 것이 아니라 가족과 씨족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이 바로 가까이에 와 있어서, 그들은 여인들의 비명 소리와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 중략 ...) 기록에 따르면, 돌파당해 붕괴될 뻔했던 군대가 여인들이 젖가슴을 드러내 보이며 이러다가는 머지않아 포로가 될 것이라고 간절히 호소하자 다시 집결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게르마니족은 자신들보다는 여인들을 위하는 마음에서 포로가 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한다.[12]
싸움터에서 시종들만큼 용감하지 못한 것은 주군에게 치욕이고, 주군만큼 용감하지 못한 것은 시종들에게 치욕이다. (... 중략 ...) 주군은 승리를 위해 싸우고, 시종은 주군을 위해 싸운다. 자신이 태어난 부족이 오랜 평화에 빠져들어 활기를 잃으면, 수많은 귀족 출신 젊은이가 당시 전쟁을 하고 있는 다른 부족들을 자진하여 찾아간다. 게르마니족은 평온이 싫고 위험 속에서 더 쉽게 명성을 얻는 데다 폭력과 전쟁이 아니고서는 시종들의 대집단을 부양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중략 ...) 이렇듯 선심을 쓰는 데 필요한 자금은 전쟁과 약탈로 충당한다. 땅을 경작하여 해마다 수확을 기다리라고 게르마니족을 설득하기는 적에게 도전하다가 부상당하라고 설득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을 것이다. 천만에! 그들은 피를 흘려 빨리 얻을 수 있는 것을 땀을 흘려 천천히 얻는 것은 나태하고 김빠진 짓이라고 생각한다.[13]
게르만족은 평온이 싫고 위험 속에서 더 쉽게 명성을 얻는 데다 폭력과 전쟁이 아니고서는 그들을 따르는 대집단을 부양할 수 없기 때문에 전쟁을 자진해서 찾아다닌다. 그들은 피를 흘려 빨리 얻을 수 있는 것을 땀을 흘려 천천히 얻는 것은 나태하고 김빠진 짓이라고 생각한다. 기병보다는 보병이 주력이며, 검이나 장창보다는 대부분 단창을 무기로 들고 다니고, 장식은 거의 하지 않지만 방패만은 정성스레 색칠하여 꾸민다. 전쟁에 나서서는 적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거친 소리의 노래를 부르며, 그들은 전투 중에도 전우들의 시신을 수습한다. 무엇보다 전쟁에 가족들을 다 데리고 오는 것이 그들의 특징인데, 전쟁 중에 아내들이 옆에서 비명을 지르고 아이들 우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사내들은 자신의 가족들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 필사적으로 전쟁에 임한다.

2.6. 생활

게르마니족은 전투를 하지 않을 때는 가끔은 사냥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잠을 자거나 음식을 많이 먹는 등 하는 일 없이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가장 용감하고 가장 호전적인 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사와 가정과 농사는 여자와 노인과 가족 내에서 가장 약한 자들이 돌본다. 그들 자신은 빈둥거리기만 한다. 같은 사람들이 이토록 게으름을 좋아하면서도 이토록 평온을 싫어한다는 것은 성격상의 심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14]
게르마니족 부족들은 도시에서 살지 않으며, 서로 연결된 집들에서 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샘이나 들판이나 작은 숲에 마음이 이끌리는 곳이 있으면 그곳에 여기저기 흩어져서 서로 떨어져 산다. (... 중략 ...) 그들은 석재나 벽돌도 사용하지 않으며, 겉모양이나 미적인 즐거움을 무시하고 모든 목적에 다듬지 않은 목재를 사용한다. 그러나 몇 군데에는 밝고 광이 나는 진흙을 정성껏 칠해서 그림이나 채색 도안처럼 보인다.[15]
그들은 모두 짧은 외투를 브로치 또는 브로치가 없을 때는 가시로 고정해서 입고 다닌다. 그 밖에 다른 옷은 입지 않고 그들은 온종일 화롯불 가에서 보낸다. 사지의 생김새가 다 드러날 정도로 꼭 끼는 속옷은 가장 부유한 자들만이 입고 다닌다. 그들은 야생동물의 모피도 입고 다닌다. (... 중략 ...) 여자들이 입는 옷도 남자들이 입는 옷과 다르지 않다. 다만 여자들은 자주색 단을 댄 리넨 옷을 더 자주 입으며, 옷의 윗부분에 소매를 내지 않고 팔뚝과 위팔뿐만 아니라 젖가슴도 어깨 가까운 부분은 노출한다.[16]
그들의 부부 생활은 엄격하고, 그들의 관습 가운데 그보다 더 칭찬받아 마땅한 것은 없다. 야만족 중에서 그들만이 거의 유일하게 한 명의 아내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 중략 ...) 지참금은 아내가 남편에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아내에게 가져간다. 부모와 친척들이 입회하여 지참금을 감정하는데, 그것은 여자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거나 신부를 치장하기 위해 고른 선물들이 아니라, 소 몇 마리, 고삐를 단 말 한 필, 단창과 검을 곁들인 방패 하나이다. 남자는 이런 선물들에 대한 답례로 아내를 얻고, 아내도 답례로 남편에게 몇 가지 무기를 선물로 가져온다. 그들은 이렇게 선물을 교환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단단한 유대이고 신성한 의식이며 결혼을 지켜줄 신성이라고 믿는다. (... 중략 ...) 따라서 게르마니족 여인들은 정조를 보장받으며 살아간다. 그들에게는 유혹적인 흥행도, 자극적인 연회도 없다. (... 중략 ...) 그들은 인구가 많은데도 간통사건은 매우 드물다. 간통죄의 처벌은 즉각적이고 남편에게 일임되어 있다. 남편은 간통한 아내의 머리털을 자르고는 아내의 친족들이 보는 앞에서 발가벗은 알몸뚱이로 집에서 내쫓은 다음 매질을 하며 온 마을을 돈다. 정조를 잃는 것은 용서받지 못한다. (... 중략 ...) 자녀의 수를 제한하거나 늦둥이를 죽이는 것은 범죄로 간주된다. 그곳에서는 좋은 관습이 다른 곳의 좋은 법률 못지않은 효력을 발휘한다.[17]
그들은 무장을 하고 일하러 가지만, 연회장에 가는 때가 더 많다. 밤낮없이 술을 마셔도 수치스럽다고 여기지 않는다. 술 취한 자들 사이에 흔한 일이지만 말다툼이 자주 벌어지는데, 말다툼은 욕설로 끝나는 경우가 더 흔하다. (... 중략 ...) 그들은 보리나 밀을 포도주처럼 발효시켜 마신다. 그들의 먹을거리는 간단한데, 야생 과일, 사냥해서 얻은 신선한 육류, 굳어진 우유가 그것이다. 그들은 세심하게 조리하거나 양념을 치지 않고 공복을 채운다. 그러나 음주와 관련해서는 그들에게 그런 자제력이 없다. 원하는 만큼 술을 대줌으로써 그들의 주벽에 맞장구쳐준다면, 그들은 무기 못지않게 그들 자신의 나쁜 버릇에 의해 쉽게 정복될 것이다.[18]
그곳에는 구경거리가 한 가지밖에 없는데, 그것은 어떤 모임에서나 똑같다. 말하자면 젊은이들이 심심풀이로 옷을 벗고 자신들을 겨누고 있는 검과 단창 사이에서 껑충껑충 춤을 추는 것이다. 훈련은 숙련을 낳고 숙련은 우아함을 낳지만, 그들은 이익이나 보수를 바라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토록 대담한 놀이의 유일한 보답은 관객의 즐거움이다. 그들은 놀랍게도 정신이 맑을 때 진지하게 주사위 놀이를 하는데, 이기고 지는 것에 어찌나 강하게 집착하는지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면 마지막으로 주사위를 던질 때는 자신의 인신의 자유를 건다. 지면 자진해서 노예가 된다.[19]

3. 후대에 미친 영향

3.1. 게르만 민족주의에 미친 영향

게르만족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또 어디에서 끝나는가? (...) 하지만 맥주는 마실 것이다. 아니, 게르마니아의 참된 후예라면 반드시 마셔야만 한다. 타키투스가 특별히 게르마니아의 맥주 세르비시아를 언급했을 정도니까.
하인리히 하이네, 독일 민족주의자들의 《게르마니아》 열풍을 비꼬는 풍자시에서
다른 많은 고대의 저서와 마찬가지로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도 중세를 거치면서 소실될 뻔했다. 그런데 1425년 이탈리아의 어느 수도사가 《게르마니아》의 필사본 하나를 발견했다. 게르마니아의 내용은 곧 요한네스 아벤티누스와 율리히 폰 후텐 등 독일의 초기 르네상스를 이끈 휴머니스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독일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게르마니란 단어가 부활했다.

그런데 가톨릭 교회가 《게르마니아》에서 묘사된 용맹스러운 게르만족의 모습을 기초로 反오스만 십자군을 선동하는 데 이용한 것을 시작으로[20],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의 일부 독자들이 저자인 타키투스의 의도는 신경쓰지 않고, 제멋대로 자기 입맛에 맞게 텍스트를 해석했다.

종교개혁프랑스 혁명전쟁 등을 거치면서 민족주의가 대폭발을 일으킨 19세기가 되면, 모든 게르만 민족주의자들에게 《게르마니아》는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필독서가 되었다.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의 민족주의자들은 《게르마니아》에서 묘사된, 약속을 지키고 용감하며 명예를 존중하는 고대 게르만족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사회적으로 '고대 게르만족 시절의 모습으로 회귀하자!' 하는 목소리가 곳곳에 울려퍼졌다.[21]

3.2. 나치즘에 미친 영향

우리는 다시 그렇게 될 것이다.
- 하인리히 힘러, 청년 시절 《게르마니아》를 읽고 난 뒤 일기장에
나치1933년 자신들이 집권한 이후 《게르마니아》에서 묘사된 고대 게르만족의 모습을 20세기 현대 독일 사회에 다시금 재현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게르마니아》는 공교육의 필수 교재로 사용되었고 1936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당 전당대회에서도 인용되었다.

《게르마니아》는 나치 친위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친위대원의 벨트에 새겨진 문구 Meine Ehre heißt Treu(충성심이 나의 명예이다) 또한 《게르마니아》에서 따왔다. 하인리히 힘러가 친위대원을 장신금발, 푸른 눈을 가진 사람 위주로 뽑은 것도 《게르마니아》의 영향인데, 정작 《게르마니아》에서 묘사한 게르만족의 신체적인 특징은 '붉은 모발(rutilae comae)'이었고, 힘러나 히틀러나 괴벨스는 이러한 외모를 갖추지 못했다.

4. 비판 및 평가

타키투스는 『게르마니아』에서 게르만족을 자유, 용기, 도덕성, 단순함 등의 미덕을 가진 종족으로 서술하는데, 이러한 미덕이 이제 로마 제국에는 없지만, 게르마니아에는 아직 남아 있다고 보았다. 물론 동시에 이러한 게르만족의 미덕은 다른 모든 문화 활동을 포기한 대가로 얻어진 결과였음을 타키투스는 밝히고 있다. 게르만족의 자유에 대한 의지는 고도로 훈련된 로마 군단의 공격을 막아 냈지만, 동시에 그런 의지가 동족 간의 피비린내 나는 다툼을 불러오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 게르만족에게서 발견되는 미덕은 대부분 그들의 단순한 생활 습관에서 비롯한 것인데, 이러한 생활 습관은 게르만족의 도덕성을 배양하는 대신 교양을 허용하지 않아, 그들 대부분은 미개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게르만족의 야만성을 비판하기 위해서든, 혹은 게르만족을 도덕적인 전사로 미화하기 위해서든 간에,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는 20세기 초까지 진정한 게르만족의 삶을 제시하는 주요 원전으로 널리 읽혀 왔다. 하지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이런 식의 비난 섞인 칭찬(?)은 로마인들이 이민족에게 상투적으로 사용하던 문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더군다나 다른 동시대 글과 비교해 볼 때, 타키투스는 그 지역에 직접 가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여러 문헌 자료를 긁어모으고, 현지를 경험한 상인이나 군인들에게 들은 정보에 살을 붙여서 게르만족의 초상을 완성했던 것으로 보인다.[22] 『게르마니아』가 사료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여러 면에서 볼 때 이 책에 나오는 게르만에 대한 묘사는 적어도 로마인이 생각한 전형적인 북부 야만인의 모습에 가깝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 단편적인 묘사가 나치를 포함한 독일 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오독되어, 그들의 게르만 우월주의를 강화시키는 쪽으로 사용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겠다.

5. 여담

  • 정작 히틀러 본인은 고대 게르만족을 숭상하는 게르만 민족주의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봤자 그리스인들이 아크로폴리스 짓고 있을 때 우리 조상들은 토굴에 살면서 돌도끼를 던지고, 모닥불 주변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라고 힘러에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반 나치 계열의 작가였던 하인리히 뵐마저 이 《게르마니아》를 읽고서는 게르만 민족주의에 경도된 어투의 글을 1970년대 잡지에 기고해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1] 15세기에서 작성된 Codex Aesinas 사본. 타키투스가 쓴 『아그리콜라』와 『게르마니아』가 함께 쓰여져 있다. 1902년에 발견되었고, 히틀러가 게르만 민족주의에 도움이 되는 이 사본을 무솔리니에게 달라고 요청했지만, 이탈리아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쳐 무솔리니는 이 요청을 거절했다. 이후 연합군의 침공과 내부의 쿠테타로 인해 무솔리니가 실각하자, 혼란한 상황을 틈타 1943년 하인리히 힘러는 이 사본을 압수하려고 했으나 소유주가 꽁꽁 숨겨서 확보에 실패했다. 이후 소유주는 이 사본을 피렌체 은행에 보관했는데, 1966년 아르노 강의 홍수로 물에 의한 손상을 받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소유주가 1994년 이탈리아 정부에 판매해서, 현재 이 사본은 로마 국립 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다.[2] 타키투스가 명명한 원래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며, 이를 중세 학자들이 사본을 만들 때 임시 제목으로 《게르만인들의 기원과 위치에 대하여 De Origine et situ Germanorum》라고 부르기도 했고, 《게르만인들의 기원과 관습에 대하여 De origine et moribus germanoru.》라고 부르기도 하는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학계에서는 이 책을 보통 《게르마니아》라고 부르게 되었다.[3]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파주, 2012, p.24[4]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파주, 2012, p.26~27[5]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파주, 2012, p.30[6]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파주, 2012, p.36[7]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파주, 2012, p.44~45[8] 메르쿠리우스는 로마 신화에서 '상업의 신'이다.[9]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파주, 2012, p.40[10]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파주, 2012, p.28[11]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파주, 2012, p.34~35[12]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파주, 2012, p.36~38[13]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파주, 2012, p.50~51[14]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파주, 2012, p.52[15]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파주, 2012, p.56[16]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파주, 2012, p.58~59[17]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파주, 2012, p.60~63[18]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파주, 2012, p.68~70[19]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파주, 2012, p.71[20] 가톨릭 성직자들이 독일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독일인들한테 "여러분의 조상들은 무적의 로마군에 맞서 싸웠던 용감한 게르만족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용맹스러운 조상들처럼 이교도 튀르크족에 맞서 싸우기 위해 십자군에 나서십시오!"라고 연설을 하며 십자군 결성을 부추겼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한 가톨릭 성직자들이 로마 교황청에 보내는 편지에는 "독일인들은 무식하고 미개한 족속입니다."라는 험담을 적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가톨릭 성직자들한테 분노한 독일인들이 보낸 욕설이 섞인 쪽지들이 빗발쳤다고 한다(...) 출처: 《가장 위험한 책》/ 크리스토퍼 B. 크레브스 저/이시은 역/ 민음인[21] 혹자의 주장에 따르면 《게르마니아》가 이웃 국가인 프랑스와 달리, 수많은 소규모 공국으로 갈라져 한 번도 통일된 중앙집권적 국가를 이루어보지 못한 독일인들에게 '상상의 공동체'를 제공해준 셈이라고 한다. (독일이라는 중앙집권적 정치체는 1871년 독일 제국이 성립되기 이전까지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당장 프랑스에서도 1871년까지는 '독일'을 가리키는 단수명사가 없어서 '독일들', '독일어 문화권' 같은 표현을 썼다.)[22] 저명한 로마사 연구자인 로널드 사임은 타키투스가 현재는 소실된 대 플리니우스의 저서 《게르마니아 전쟁》을 카피했다고 추정한다. 또한 학자들은 타키투스가 카이사르, 스트라본,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등의 글을 전거로 이용했음을 밝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