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0 -15px 0" | ※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이다.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콘라트 아데나워 | 마르틴 루터 | 카를 마르크스 | 한스, 죠피 숄 남매 | 빌리 브란트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 오토 폰 비스마르크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아돌프 콜핑 | 루트비히 판 베토벤 | 헬무트 콜 | 로베르트 보쉬 | 다니엘 퀴블뵈크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콘라트 추제 | 요제프 켄테니히 | 알베르트 슈바이처 | 카를하인츠 뵘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헬무트 슈미트 | 레진 힐데브란트 | 알리체 슈바르처 | 토마스 고트샤크 | 허버트 그로네메이어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미하엘 슈마허 |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 귄터 야우흐 | 디터 볼렌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얀 울리히 | 슈테피 그라프 | 사무엘 하네만 | 디트리히 본회퍼 | 보리스 베커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프란츠 베켄바워 | 오스카 쉰들러 | 네나 | 한스 디트리히 겐셔 | 하인츠 뤼만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하랄트 슈미트 | 프리드리히 대왕 | 임마누엘 칸트 | 패트릭 린드너 | 하르트무트 엥겔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힐데가르트 폰 빙엔 | 하이노 |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 마를레네 디트리히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로베르트 코흐 | 요슈카 피셔 | 카를 마이 | 로리오 |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루디 푈러 | 하인츠 에르하르트 | 로이 블랙 | 하인츠 하랄트 프렌첸 | 볼프강 아펠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알렉산더 폰 훔볼트 | 피터 크라우스 | 베르너 폰 브라운 | 디르크 노비츠키 | 캄피노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 세바스티안 크나이프 | 프리드리히 실러 | 리하르트 바그너 | 카타리나 비트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프리츠 발터 | 니콜 |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윙흐 | 오토 릴리엔탈 | 마리온 돈호프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토마스 만 | 헤르만 헤세 | 로미 슈나이더 | 스벤 하나발트 |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빌리 밀로위치 | 게르하르트 슈뢰더 | 요제프 보이스 | 프리드리히 니체 | 루디 두치크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카를 레만 | 베아테 우제 | 트뤼머프라우 |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 헬무트 란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알브레히트 뒤러 | 막스 슈멜링 | 카를 벤츠 | 프리드리히 2세 | 라인하르트 메이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하인리히 하이네 | 게오르크 엘저 | 콘라드 두덴 | 제임스 라스트 | 우베 젤러 | |||||
출처 | |||||||||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000><colcolor=#fff> 하인리히 하이네 Heinrich Heine | |
본명 | 크리스티안 요한 하인리히 하이네[1] Christian Johann Heinrich Heine |
출생 | 1797년 12월 13일 |
프랑스 제1공화국 라인란트 뒤셀도르프 | |
사망 | 1856년 2월 17일 (향년 58세) |
프랑스 제2제국 파리 | |
직업 | 작가, 언론인, 평론가 |
장르 | 시, 수필 |
학력 | 본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괴팅겐 대학교[2] |
종교 | 유대교,(세속주의), → 개신교,(루터교회),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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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시인. 괴테, 실러와 더불어 19세기 독일 문학의 거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그의 초기 시들은 로베르트 슈만이나 프란츠 슈베르트와 같은 낭만주의 음악가들에 의해 가곡으로 작곡되어서 높은 인지도를 자랑한다.본 대학에서 공부할 때 낭만주의 시인 슈텔른의 강의를 듣게 되고 그 영향을 받아 창작 초기에는 낭만주의 풍의 시를 썼으나 이후에는 낭만주의를 비판하면서 신랄한 풍자와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가득 담긴[3] 시를 많이 남겼다. 특히, 허무주의, 자기비판적 아이러니가 담긴 작품들을 주로 썼다.
슈만의 가곡 때문에 많은 이들이 하인리히 하이네를 그저 낭만주의 시인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낭만주의적 작풍은 초기에나 나타나고 이후에는 독일의 봉건적인 구체제를 풍자, 비판하는 참여 문학에 경도된 작품을 썼다. 즉 청년독일파의 일원으로 구분된다. [4] 괴테, 쉴러 등 독일 고전주의, 낭만주의 거장들을 신랄하게 까기도 했다.
14살때는 직접 나폴레옹을 보기도 했고, 괴테, 슈텔른, 마르크스, 헤겔, 뷔르거 등 그 당시 유명인사는 다 만나고 다녔다. 무엇보다 그는 괴테 이후 유럽 전체에서 흥행한 유이한 독일 문학가였다. 하이네 스스로도 "괴테의 요람에서 태어나 죽음으로 끝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낭만주의 작가들의 말로가 다들 좋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하이네는 물주 삼촌과 흥행으로 벌어들인 수익으로 충당하며 나름 잘 살다갔다. 대신 병을 많이 앓았는데, 인생 초반부터 끝까지 거의 40년을 병과 싸웠다. 그런데도 59세까지 산 것을 보면 대단하기도 하다.
2. 생애
1797년 프랑스 혁명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령으로 편입된 뒤셀도르프에서 유대계 가문의 4남으로 태어났다. 다만 그의 집안은 독실한 유대교 집안은 아니었다. 어릴때 잠깐 유대교 학교를 다닌 것을 제외하면 하이네는 가톨릭 재단이 세운 김나지움으로 진학했을 뿐더러, 궁극적으로 프로이센 당국의 유대인 차별을 피하기 위해 1825년에 신교도로 개종한다. 하이네 본인은 신교도로 개종하고 나서 일신의 이득을 위해 신념을 져버렸다면서 다소 떨떠름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있다.[5]아버지는 직물 상인이었으며 어머니는 의사의 딸로 전형적인 부르주아 가문이었는데,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인해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기 때문에 하이네의 어린 시절은 유복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의 유년기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점철되었고, 그의 고향이었던 라인란트의 뒤셀도르프 역시 아예 프랑스의 영토로 편입된 상황이었다. 바꿔 말해서 하이네는 어린 시절 프랑스의 영향을 가득 받으면서 자라날 수 있었고, 이는 (아버지가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인해 파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평생토록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파산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성공한 상인이었던 숙부 잘로몬 하이네가 하이네를 함부르크로 데려와서 양육했는데, 여기서 하이네는 상인이 되고자 상업과 영어[6]를 학습했다. 그렇지만 하이네는 상업에는 별다른 재능을 보이지 못했고, 이에 따라 숙부는 법을 공부할 것을 하이네에게 지시하면서 1819년 하이네는 본 대학교 법과로 진학하게 된다. 하지만 법학 역시 하이네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고,[7] 오히려 대학교를 다니는 시기 내내 하이네는 역사 및 문학 공부와 자유주의를 위한 정치 투쟁에 활발하게 가담한다.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시인 및 극작가로 데뷔한 것도 본에서의 일. 이후 괴팅겐과[8] 베를린에서 대학을 다닌 후 1826년에 다시 함부르크로 돌아온다.
상인들의 자유도시였던 함부르크는 당시 독일 연방 내에서 가장 검열이 느슨한 국가였기 때문에 하이네는 비교적 마음 놓고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1826년 낭만주의 성향의 <여행그림들(Reisebilder)>을 출간한 데 이어 다음해인 1827년에는 <노래들의 책(Buch der Lieder)>을 출간하는데, 특히 <노래들의 책>은 처음에는 평범한 반응을 이끌어냈지만, 나중에 로베르트 슈만을 비롯한 낭만주의 작곡가들이 가곡으로 써내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하이네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슈만의 가곡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하이네를 낭만주의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정작, 1827년 이후 하이네는 낭만주의 성향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를 조롱하는 풍자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827년 이후 하이네는 사회 비판 및 풍자시를 본격적으로 쓰게 되는데, 특히나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크게 퍼져나가고 있던 민족주의와 독일 당국의 검열 제도가 주 타켓이었다. 아래는 민족주의와 검열에 대한 풍자가 가득 담긴 하이네의 이 무렵 시들.
게르만족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또 어디에서 끝나는가? 하지만 맥주는 마실 것이다. 아니, 게르마니아의 참된 후예라면 반드시 마셔야만 한다. 타키투스가 특별히 게르마니아의 맥주 세르비시아를 언급했을 정도니까.
하인리히 하이네, 독일 민족주의자들의 <게르마니아> 열풍을 비꼬는 풍자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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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en: Das Buch Le Grand> 속의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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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en: Das Buch Le Grand> 속의 산문
이후 영국과 이탈리아 여행을 거친 하이네는 괴테와 프리드리히 실러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지만 이를 거절하고 7월 혁명의 열기가 식지 않은 자신의 이상향 프랑스로 이주한다. 이후 그가 사망하는 1856년까지 그는 쭉 파리에 머무르게 된다. 꾸준히 독일어로 작품을 쓰는 한편으로[9] 특파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또한 하이네의 영향을 받아서 1840년을 전후로 독일 내에서는 청년독일파라는 자유주의 성향의 젊은 문인들의 모임이 결성되는데, 하이네는 이들의 정신적 지주였다.[10] 1841년에는 파리에서 구두상점 점원으로 일하던 18세 연하의 여성 마틸드(애칭으로 본명은 Crescence Eugénie Mirat)와 동거 끝에 결혼하기도 했다.(둘 사이에 자녀는 두지 않았다.)
한편 1843년부터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신문 지면에서 마구 비판하다가 결국 추방되어 파리로 망명을 온 카를 마르크스와 교제를 하기 시작한다. 망명객이라는 공통 분모로 인하여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하이네는 마르크스의 공산 혁명 개념을 "예술 작품과 예술가들을 파괴시킬 끔찍한 생각"이라며 반대한데다 결정적으로 마르크스가 파리에서도 프로이센 국왕과 정부에 대한 비판을 계속하다가 프랑스 당국에 의해[11] 결국 벨기에로 추방되면서(이후 마르크스는 런던으로 다시 이주해서 엥겔스와 함께 그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집필하는 한편 인터내셔널을 창립한다.) 둘 사이의 교류는 끝을 맺는다.[12] 게다가 1847년 오랫동안 재정적으로 그를 후원해온 숙부 잘로몬 하이네가 사망하면서 경제적으로도 하이네는 어려움에 처하기 시작한다. 이듬해인 1848년 신경계통의 문제로 인하여[13] 상반신이 마비되어 하이네 본인의 표현을 쓰자면 '침대 무덤(Matratzengruft)'에 갇히게 되었고[14] 시력도 크게 악화되는 악재까지 뒤따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이네는 활발하게 정치 참여를 하는 한편[15], 작품 활동도 병행하였으나 이미 약해진 몸은 이러한 활동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 1856년에 숨을 거둔다.
3. 이모저모
- 유대계 혈통으로 인하여 나치 독일 시기 내내 그의 책은 금서였고, 심지어 나치가 주도한 집회에서 불태워지기도 하였다. 그나마 대표작인 시 <로렐라이>는 워낙 유명해서 차마 없애지는 못했고, 대신 '작자 미상'이라고 쓰였다. 하이네는 분서에 대해 "책을 불태우는 곳에서는 결국 사람도 불태우게 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 백인 우월주의적인 시각이 있었다. 특히, 유럽에 있을 자격도 없다고 헝가리인들을 깠는데 당시 헝가리인들은 이미 천 년 가까이 유럽에서 살면서 인종적으로 백인계로 동화되었고 프란츠 리스트 같이 헝가리인으로서 당시 유럽에서 이름을 날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네는 헝가리인이 미개한 아시아에서 왔다며 헝가리를 질색했다고 한다.
-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자이기는 했지만 입헌군주정을 지지하고 공화정에는 거부감을 표했는데, 이로 인해서 파리 망명 시기에 같은 망명객들 및 좌익 성향의 프랑스 지인들과 자주 키배를 붙었다고 한다.
- 프랑스를 평생 흠모했던 것에 반대급부로 영국은 무척 싫어했는데, 산업혁명이 활발히 일어나던 당대 영국인들의 이해타산적인 태도를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그의 영웅 나폴레옹을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 부대가 꺾은 것 때문에 배영감정이 더욱 강화됐다고 전해진다.
- 영화 어파이어에서 나디아(파울라 베어)가 하이네의 로만체로(Romanzero)에서의 사랑의 떨림을 주제로 하는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연구자로 나온다. 그녀는 아스라(Der Asra)를 읊는 장면도 보여준다.
[1] 1825년 이전의 초명은 '하리 하이네(Harry Heine)'.[2] 본 대학, 괴팅겐 대학, 베를린 대학을 등 대학을 3번이나 바꾸었다. 결국엔 법학박사가 되기는 한다.[3] 이로 인하여 프로이센 왕국 정부에게는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고, 생의 마지막 20여년은 프랑스로 망명하였다.[4] 생몰연월을 보면 알겠지만, 이미 독일에서 탄생한 낭만주의는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5] 그 유명한 카를 마르크스도 라인란트 출신인데, 하이네와 혈연적으로 먼 친척관계이다.[6] 물론 19세기 초에도 유럽에서 가장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프랑스어였지만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영국의 경제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영어 역시 그 중요도가 급부상했다. 게다가 하이네 가문은 직물업에 종사했는데, 초기 산업 혁명의 핵심은 직물업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영어를 배울 수 밖에 없었다.[7] 훗날 《회상록》(Memoiren)에서 "이기주의의 성경인 로마법 대전은 얼마나 끔찍한 책인가!"(Welch ein fürchterliches Buch ist das Corpus iuris, die Bibel des Egoismus!)라고 디스한 이야기가 유명하다.[8] 정작 하이네는 두고두고 괴팅겐에서의 지낸 나날들을 혐오했다. 당시 괴팅겐은 하노버 왕국에 소속되어있었는데, 하노버 왕국은 독일 연방 내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국가였고 자유주의 성향의 하이네에게 하노버의 보수적인 법을 공부하는 것 자체가 죽을 맛이었을 뿐더러, 혈통적으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생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와 약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멘탈이 터져서 그 남자와 결투를 벌이다가 정학을 먹기까지 한다.[9]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지만 회화에서는 독일어 억양이 잔뜩 묻어있었고, 글쓰기도 그리 능숙하지는 않아서 작품을 독일어로 쓴 뒤에 엑토르 베를리오즈와 같은 주변 프랑스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고 한다.[10] 이들 청년독일파는 유미주의를 배척하고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시 속에 반영할 것을 주장했는데, 청년독일파 중에서 문학적 가치와 현실 비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평가받는 작가는 사실상 하이네 뿐이다.[11] 프로이센 당국이 마르크스를 추방시킬 것을 요구했다.[12] 이후로도 이따금씩 서신을 주고 받기는 했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게 인지상정인지라..[13] 방탕한 성생활로 인한 성병으로 추측되며, 납 중독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14] 하이네가 사망하는 1856년까지 8년 동안 이 '침대 무덤'을 떠날 수가 없었다.[15] 그가 쓰러진 1848년은 유럽 전역을 뒤흔든 혁명이 일어난 해였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는 제2공화정이 수립되었고, 독일에서도 일시적으로 자유주의 체제가 수립되어서 하이네를 크게 고무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