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3 19:57:56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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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이다.
TOP 10
1위2위3위4위5위
콘라트 아데나워 마르틴 루터 카를 마르크스 한스, 죠피 숄 남매 빌리 브란트
6위7위8위9위10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오토 폰 비스마르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아돌프 콜핑 루트비히 판 베토벤 헬무트 콜 로버트 보쉬 다니엘 퀴블뵈크
16위17위18위19위20위
콘라트 추제 요제프 켄테니히 알베르트 슈바이처 카를하인츠 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1위22위23위24위25위
헬무트 슈미트 레진 힐데브란트 알리체 슈바르처 토마스 고트샤크 허버트 그로네메이어
26위27위28위29위30위
미하엘 슈마허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귄터 야우흐 디터 볼렌
31위32위33위34위35위
얀 울리히 슈테피 그라프 사무엘 하네만 디트리히 본회퍼 보리스 베커
36위37위38위39위40위
프란츠 베켄바워 오스카 쉰들러 네나 한스 디트리히 겐셔 하인츠 뤼만
41위42위43위44위45위
하랄트 슈미트 프리드리히 대왕 임마누엘 칸트 패트릭 린드너 하르트무트 엥겔
46위47위48위49위50위
힐데가르트 폰 빙엔 헤이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마를레네 디트리히
51위52위53위54위55위
로베르트 코흐 요슈카 피셔 카를 마이 로리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56위57위58위59위60위
루디 푈러 하인츠 에르하르트 로이 블랙 하인츠 하랄트 프렌첸 볼프강 아펠
61위62위63위64위65위
알렉산더 폰 훔볼트 피터 크라우스 베르너 폰 브라운 디르크 노비츠키 캄피노
66위67위68위69위70위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세바스티안 크나이프 프리드리히 실러 리하르트 바그너 카타리나 비트
71위72위73위74위75위
프리츠 발터 니콜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윙흐 오토 릴리엔탈 마리온 돈호프
76위77위78위79위80위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로미 슈나이더 스벤 하나발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81위82위83위84위85위
빌리 밀로위치 게르하르트 슈뢰더 요제프 보이스 프리드리히 니체 루디 두치크
86위87위88위89위90위
카를 레만 베아테 우제 트뤼머프라우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헬무트 란
91위92위93위94위95위
알브레히트 뒤러 막스 슈멜링 카를 벤츠 프리드리히 2세 라인하르트 메이
96위97위98위99위100위
하인리히 하이네 게오르크 엘저 콘라드 두덴 제임스 라스트 우베 젤러
출처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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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바이에른 주총리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Franz Josef Strauß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anz_Josef_Strau%C3%9F_1982.jpg
<colbgcolor=#0098d4> 출생 1915년 9월 6일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뮌헨
사망 1988년 10월 3일 (향년 73세)
서독 바이에른레겐스부르크
국적 파일:독일 국기.svg 서독
학력 뮌헨 대학교
재임기간 제6대 바이에른 주총리
1978년 11월 6일 ~ 1988년 10월 3일
정당

배우자 마리안느 슈트라우스
자녀 3명
종교 로마 가톨릭
경력 재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원자력에너지부 장관
특임 장관
기민당/기사당 연합 대표 겸 총리 후보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 당대표
바이에른 주총리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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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독의 정치인.

서독 연방정부 재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원자력 에너지 장관, 특임 장관, 기독교사회연합 총재, 기민당/기사당 연합 총리 후보, 바이에른 주 총리 등을 역임한 서독의 거물 정치인이었다. 1970년대 헬무트 슈미트, 헬무트 콜독일 총리 자리를 놓고 경쟁했으나 끝내 총리에 오르지는 못했다.

2. 생애

바이에른 지역에서 도축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교원 자격을 땄지만, 곧바로 닥친 2차대전으로 인해 징집된다. 독소전쟁 초기 심각한 동상을 입은 뒤로는 주로 방공포 부대에서 근무했으며, 1945년 종전 당시 최종 계급은 중위였다.

종전 이후 바이에른을 점령한 미군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미군정에 의해 바이에른 주의회(Landrat) 의원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그는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CSU)의 창당에 기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인으로서의 행보를 시작한다.

1949년, 전후 처음 실시된 서독 총선에서 연방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기민당/기사당 연합의 한 축인 기사당의 핵심 요인이었던 슈트라우스는 직설적인 언행과 과감한 행동력, 추진력으로 빠르게 정계의 주요 인물이 되어 갔다.

이후 1953년 콘라트 아데나워 2기 내각에 입각하여 특임 장관에 임명되었다. 선비 같이 점잔 빼는 인물들이 넘쳐나던 아데나워 내각에서 야당에 대해 직설적인 언사를 주저하지 않고 저돌적인 추진력을 가졌으며 투철한 반공, 보수주의자였던 그는 아데나워에게 꼭 필요한 인물이었고, 이후 아데나워 내각에서 계속 중용되며 1955년 원자력에너지부 장관, 1956년 국방장관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슈트라우스는 기민당/기사당 연합의 핵심 정치인으로 성장했고,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61년 국방부 장관 재임 시절 F-104 전투기를 구매하는 조건으로 록히드 사로부터 1000만 달러를 받았다라는 뇌물 스캔들이 터지면서 곤욕을 치렀다.[1] 여기에 1962년 시사 잡지 슈피겔나토의 작전에 대해 보도하자 슈피겔의 편집진들을 반역죄 혐의로 기소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대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 행위에 대한 정계, 언론계 등의 공격이 잇따랐고, 이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슈트라우스가 독일 연방의회에 거짓 증언을 한 것까지 밝혀지면서 엄청난 비난의 십자포화가 그에게 쏟아졌다. 결국 슈트라우스는 장관직에서 사퇴해야만 했다. 슈트라우스 본인은 이 행위에서 자신을 유대인으로, 언론을 나치에 빗대서 툴툴거렸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이 발언으로 한번 더 욕을 들어야만 했다.

1966년, 기민당-자민당 연정이 무너지고 키징어사민당대연정 구축하며 총리에 올랐다. 키징어에 의해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복귀했다. 당시 사분오열하던 기민당/기사당 연합에서 그는 더욱 정치적 입지는 더욱더 커졌다. 특히 슈트라우스는 초유의 기민-사민 대연정에서 재무부 장관이라는 중책을 맡았고, 경제부 장관에는 사민당의 칼 쉴러가 임명되면서 두 사람의 날선 대립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의외로 슈트라우스는 칼 쉴러와 서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며 잘 이끌어 나갔다. 하지만 기민당과 사민당은 근본적으로 정책적 지향점이 상이했고 특히 경제 정책은 그 첨점에 있었다. 때마침 60년대 말 서독 정계는 마르크화 평가절상 및 미국 금태환 문제로 홍역을 치루고 있었다. 결국 기민-사민 대연정 붕괴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대연정이 붕괴되고 실시된 1969년 총선에서 기민당/기사당 연합은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과반을 차지하는 못했고 또다시 연정을 구성해야 했다. 하지만 기민당/기사당 연합은 사이가 벌어진 자민당을 포섭하는데 끝내 실패했고, 이때 제2당인 사민당의 당수 빌리 브란트가 자민당을 포섭하여 좌우 연정을 구성하는데 성공하여 독일 연방공화국 역사상 최초로 제2당 당수가 총리가 되는 파란을 연출했다.

기민당/기사당은 1949년 서독 출범 이후 줄곧 여당이었고 야당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들 점잔 빼는 인물들만 넘쳐나던 기민당/기사당은 야당 역할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이 와중에 야성이 강한 공격수 슈트라우스가 기민당/기사당 연합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슈트라우스는 사회민주당이 주도하는 빌리 브란트 내각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저격수로 활약하며, 특히 브란트의 동방정책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퍼부으면서 이름값을 다시 올렸다.[2] 때마침 브란트가 소련 주도로 축소된 독일의 국경선인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을 승인해 버리자 이는 서독에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브란트에게 매국노라는 비판이 쏟아졌고 기민당/기사당 연합이 차기에 재집권할 가능성은 점차 높아졌다.

점잔 빼는 인물들이 넘쳐나던 기민당/기사당에서 슈트라우스 같은 공격수가 있어서 그나마 제대로 야당 구실을 할 수 있었긴 하지만, 슈트라우스의 지나친 강성 행보는 오히려 중도 표심을 잡는데는 마이너스 요인이 컸다는 평도 있다. 기본적으로 극단적인 언행을 싫어하는 중도 성향의 지지자들에게 슈트라우스는 너무 강성으로 비춰졌던 것이다.

한편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외우내환의 위기 속에서 연정 내부에서조차도 균열이 생기며 불신임 투표가 진행되는 등 총리로서 국정 장악력을 상실했고 결국 조기총선 승부수를 띄웠다. 이 조기총선에서 브란트는 결국 판세를 뒤엎는데 성공하고 기적같은 역전승을 거뒀다. 라이너 바르첼을 총리 후보로 내세운 기민당/기사당 연합은 자만하여 브란트 내각의 실책만을 지적하는 일방적인 전술을 구사하다가 오히려 선거에서 패하는 이변을 겪었다. 이 선거 이후 독일 우파 내부에서도 세대 교체가 이루어져 슈트라우스와 헬무트 콜이 양대 거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한편 브란트가 재집권 후 간첩 사건 및 섹스 스캔들로 실각하고 헬무트 슈미트가 수상 자리를 잇자, 슈트라우스는 슈미트 수상과도 임기 내내 긴장 관계를 이어갔다.

사민당의 슈미트 내각이 집권하던 70년대 중후반 슈트라우스는 기민당/기사당의 대표 자리를 놓고 기민련의 헬무트 콜과도 경쟁을 계속했는데, 1976년 총선에서 헬무트 콜헬무트 슈미트에게 패배하자 슈트라우스는 콜의 정치력을 비판하면서 기독교사회연합기독교민주연합의 자매관계[3]를 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고자 했다. 당연히 기민련은 이에 대해 노발대발해서 기사련의 기반인 바이에른 지역에도 기민당의 독자 후보를 출마시키겠다고 기사련과 슈트라우스에게 엄포를 놓았고 결국 갈등은 봉합되고 슈트라우스는 기민당과 자매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본인이 기민/기사 연합의 대표로 야심차게 나섰지만 1980년 총선에서 1976년보다 무려 20석을 더 잃는 처참한 참패를 당하고 만다. 이 총선은 콜과 슈트라우스 간 싸움의 종결선언과도 같았고 슈트라우스는 사실상 중앙정계에서 은퇴해 바이에른 주 총리직을 수행하는데 전념한다. 이후 슈트라우스는 1988년 10월 1일 레겐스부르크 근교에서 사냥을 하다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 이틀후인 3일에 숨을 거둔다.

또한 뮌헨 국제공항에 그의 이름이 들어가있다.

[1] 결과적으로는 증거부족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2] 다만 브란트와 슈트라우스 사이가 그렇게까지 비우호적인건 아니었다. 브란트는 슈트라우스에 대해 훗날 "평범하면서도 비범했던 자. 그는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도 아니었다."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슈트라우스도 강성 보수 이미지와 달리 1972년 총선 참패 이후 시대의 변화를 수용해 동독 학생들의 바이에른 수학여행을 전폭 지원하고, 1984년에는 헬무트 콜 내각과 동독 간의 차관지원 협상 당시 콜 총리의 특사를 맡아 협상의 원만한 타결에 기여했다.[3] 정확히 설명하자면, 둘의 관계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며(기사련은 바이에른에서만 출마하고, 기민련은 나머지 독일 지역에서 출마) 원내에서 같은 노선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