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19 18:39:49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괴테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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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이다.
TOP 10
1위2위3위4위5위
콘라트 아데나워 마르틴 루터 카를 마르크스 한스, 죠피 숄 남매 빌리 브란트
6위7위8위9위10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오토 폰 비스마르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아돌프 콜핑 루트비히 판 베토벤 헬무트 콜 로베르트 보쉬 다니엘 퀴블뵈크
16위17위18위19위20위
콘라트 추제 요제프 켄테니히 알베르트 슈바이처 카를하인츠 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1위22위23위24위25위
헬무트 슈미트 레진 힐데브란트 알리체 슈바르처 토마스 고트샤크 허버트 그로네메이어
26위27위28위29위30위
미하엘 슈마허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귄터 야우흐 디터 볼렌
31위32위33위34위35위
얀 울리히 슈테피 그라프 사무엘 하네만 디트리히 본회퍼 보리스 베커
36위37위38위39위40위
프란츠 베켄바워 오스카 쉰들러 네나 한스 디트리히 겐셔 하인츠 뤼만
41위42위43위44위45위
하랄트 슈미트 프리드리히 대왕 임마누엘 칸트 패트릭 린드너 하르트무트 엥겔
46위47위48위49위50위
힐데가르트 폰 빙엔 하이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마를레네 디트리히
51위52위53위54위55위
로베르트 코흐 요슈카 피셔 카를 마이 로리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56위57위58위59위60위
루디 푈러 하인츠 에르하르트 로이 블랙 하인츠하랄트 프렌첸 볼프강 아펠
61위62위63위64위65위
알렉산더 폰 훔볼트 피터 크라우스 베르너 폰 브라운 디르크 노비츠키 캄피노
66위67위68위69위70위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세바스티안 크나이프 프리드리히 실러 리하르트 바그너 카타리나 비트
71위72위73위74위75위
프리츠 발터 니콜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윙흐 오토 릴리엔탈 마리온 돈호프
76위77위78위79위80위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로미 슈나이더 스벤 하나발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81위82위83위84위85위
빌리 밀로위치 게르하르트 슈뢰더 요제프 보이스 프리드리히 니체 루디 두치크
86위87위88위89위90위
카를 레만 베아테 우제 트뤼머프라우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헬무트 란
91위92위93위94위95위
알브레히트 뒤러 막스 슈멜링 카를 벤츠 프리드리히 2세 라인하르트 메이
96위97위98위99위100위
하인리히 하이네 게오르크 엘저 콘라드 두덴 제임스 라스트 우베 젤러
출처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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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파일:1280px-Goethe_(Stieler_1828).jpg
출생 1749년 8월 28일
신성 로마 제국 프랑크푸르트
사망 1832년 3월 22일 (향년 82세)
독일 연방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 바이마르
국적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신성 로마 제국1749~1806
파일:external/vignette3.wikia.nocookie.net/Flag_of_the_Confederation_of_the_Rhine.png 라인 동맹1806~1813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독일 연방(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1813~1832
직업 작가, 연극감독, 철학자, 도서관장, 정치인[1]
모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신장 172.7cm[2]
배우자 크리스티아네 폰 불피우스(1806년~1816년, 사별)
자녀 아들 아우구스트 폰 괴테(1789년~1830년)[3]
종교 개신교(루터회) → 무종교(범신론)
서명 파일:요한 볼프강 폰 괴테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문학으로의 입문2.3. 괴테의 여인들2.4. 다재다능2.5. 말년2.6. 괴테와 격동의 시대
3. 괴테에 대한 유명인들의 평가4. 명언5. 주요 작품
5.1. 소설
5.1.1. 단편
5.2. 희곡5.3. 시5.4. 과학저술5.5. 자서전, 일기
6. 여담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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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대표적인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또한 연극감독, 도서관장, 철학자이며 광물학. 식물학에서 두각을 나타낸 귀재이며 독일을 대표하는 천재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그는 작센바이마르 공국재상이었고 여러 위인과 예술인의 중심에 있었다. 근현대 독일의 가장 위대한 문인이며 같은 문인들에게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미겔 데 세르반테스, 단테 알리기에리에 버금가는 문학의 신화로 여겨진다. 살아있을 당시는 물론 현대에까지 독문학을 넘어 서양 문학을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유년기

아버지 요한 카스파어 괴테(Johann Caspar Goethe) (1710년 ~ 1781년)는 평민 출신이지만 꽤 규모가 큰 세탁업 공장을 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 교육을 받아서 왕실고문관(추밀고문관)까지 올라 출세하고자 하였으나, 쿼터제(집안을 돌려서 관리를 뽑는 제도)에 걸려 일찍히 공무원직을 포기하고 가정생활에 남은 일생을 바쳤다. 어머니인 카타리 엘리자베트 텍스토어(Catharina Elisabeth Textor) (1731년 ~ 1808년)도 평민층이지만 고향 프랑크푸르트암마인시장인 요한 볼프강 텍스토어(Johann Wolfgang Textor) (1693년 ~ 1771년)의 딸이라서 어린 괴테도 유복하게 자랄 수 있었고 덕분에 고등 교육도 마음껏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를 낳았을 때 나이가 18살이었고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21살이었다.

괴테는 출산 당시 난산이었고 산파가 조치를 제때 하지 못해 무호흡 상태에까지 빠졌었다가 인공호흡을 통해 살아났다고 전해진다. 볼프강이 태어난 이후 출생한 두 남동생은 어린 나이에 일찍 죽어버렸고 그 두 사건이 어린 괴테를 한때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누이동생 코르넬리아는 무사히 잘 자라서 어린 그가 무척 귀여워해 줬고 매우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여섯 형제자매 중 성인으로 자란 것은 볼프강과 여동생 코르넬리아 뿐이었다. 하지만, 코르넬리아조차 1777년 둘째 아이를 낳고 후유증으로 고작 스물여섯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4]

괴테는 늘그막에 회고하길 "아버진 존경하지만 너무나도 엄격하고 까다로운 면이 많아 어린 나에겐 언제나 엄하고 무서운 분이셨다. 그래도 아버진 책임감이 강하고 약속을 꼭 지키던 분이라 정말 멋진 분이었다. 어머니는 가정적으로 너무나도 훌륭하시고 나에게 자상함을 일깨워주신 분이었다"고 회고했다.[5]

그리고 카스파어는 문학에 대하여 무척 흥미를 가져서 아들 괴테가 글을 잘 썼으면 했다.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어릴 적에 괴테는 무척 글쓰기에 흥미를 보여 작문 학교에서 교사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고, 아버지는 무척 기뻐하며 그때마다 용돈을 푸짐하게 주며 칭찬해줬다.

2.2. 문학으로의 입문

이런 풍족함 속에서 아버지는 그가 원하는 대로 부족함 없는 교육을 받게해줬다. 괴테는 라틴어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를 교육받았으며 뿐만 아니라 성서히브리어, 이디시어 등도 교육받았다. 아버지가 구비해주신 수많은 장서와 언어 교육 그리고 괴테의 호기심은 그가 문인으로 성장하는 촉발제가 되었다. 괴테의 문학적 정신과 문인으로서의 사상은 7년 전쟁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기 시작했다. 괴테의 외할아버지는 구(舊)세계를 대표하는 오스트리아에 의한 질서를 옹호했지만 아버지는 프로이센에 의한 신흥 질서를 지지했다. 이런 대립은 어린 괴테의 정신적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7년 전쟁 와중에 프랑스군이 독일 북부에 진군했을 때, 괴테의 집에 프랑스군 점령군 사령관인 토랑 백작이 머문 적이 있다. 아버지는 무척 그를 싫어했지만, 10살 무렵의 괴테는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고 어머니와 같이 아버지를 설득했다. 아버지는 그래서 아들을 위해서 프랑스군 사령관인 백작을 극진히 대접해 친하게 지냈고 백작은 이런 대접에 고마워하며 어린 괴테에게 독일어를 잘하는 프랑스군 부하장교를 시켜 프랑스어를 가르치게 해줬다. 토랑 백작은 미술과 연극 애호가이기도 해서 프랑크푸르트 시에서는 프랑스 미술과 연극 등 프랑스의 문화를 눈으로 볼 기회가 매일 있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훗날 토랑 백작은 프랑스에 유학 온 괴테를 반갑게 맞이하여 머물 숙소를 알선해주었고 괴테가 유럽에서 이름을 떨칠 때도 서로 편지도 보내고 친근한 사이로 지내게 된다.

프랑스군이 물러간 후 프랑크푸르트에서 거행된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 요제프 2세대관식은 귀족 사회에 대한 괴테의 시각을 확장시켰다. 괴테는 아버지의 권유로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입학하여 법률학을 배웠다. 라이프치히 생활 동안 괴테는 프랑크푸르트와 다르게 보다 선진적이고 인구도 많았던 그 도시에서 계몽주의적 사상을 피부로 느낀다. 괴테는 22살 때, 변호사 사무소를 열었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도 2년 동안 머물면서 법학을 공부했는데, 이 인연으로 지금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는 괴테의 길이라는 길과 괴테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하지만 법학보단 글 쓰길 좋아하던 괴테는 24살 때, 희곡《괴츠 폰 베를리힝엔》을 쓰며 문학에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1년 후인 1774년 '25살에 괴테는《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한다. 발표 직후 괴테는 유럽에 유명세를 떨치는데 심지어는 나중에 "나를 언제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작가로만 기억한다."고 불만을 가질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다. 그가 60년에 걸쳐 완성한 필생의 대작이자 세계 문학 사상 최대 걸작 중 하나인《파우스트[6]도《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인기만은 못 따라갈 정도였다. 30대 후반에 방문한 이탈리아에서도 괴테는《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작가로 유명했으며 실제로 본인이 책을 읽으며 느낀 감동을 괴테에게 열변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그 커다란 유명세와는 반대로 괴테는 작품 자체로는 큰 돈을 벌지 못했다. 출판 계약 당시 출판사는 별볼일 없는 신인 작가일 뿐인 괴테에게 인세를 조금 내줬고 유럽 곳곳에서는 무단으로 출판되는 사본이 마구잡이로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공의 계기가 된 것은 맞고 이 소설을 보고 감탄한 작센바이마르 공국의 공작 카를 아우구스트[7]가 그를 초청해 공무원으로 고용했다.[8] 공무원으로 3년동안 지내면서 바이마르 궁정 내의 공무원 중 최고 수준으로 돈을 두둑히 받았지만, 공무 업무가 주는 스트레스와 권태 그리고 문인으로서 정체된 상황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괴테는 과거부터 이탈리아에 품어 왔던 동경과 문인으로서의 침체 상태를 벗어나려는 의지가 어울려 이탈리아로의 여행을 결정했다.[9]

괴테는 아우구스트 공작은 물론 주변 친우들에게까지 이탈리아 여행을 숨긴 채, 저작 활동을 위한 유급 휴가를 미리 신청해놓았다가 공작과 친우들과 함께 간 보헤미아 왕국의 칼스바트[10] 휴가 도중 몰래 새벽녘에 여행을 떠났다. 공작은 괴테가 신청한 기일이 없는 유급 휴가와 그의 저작 완성이 수개월 내에 끝날 거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공무 업무에 싫증을 느낀 것과 문학에 대한 집념을 이해한 공작은 이탈리아에서의 여행과 예술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그를 후원했다. 이때 괴테의 나이는 30대 후반이었다. 여행이 시작하고 얼마 후에는 바이마르의 친우들과 다시 연락하기 시작했고 출판을 위한 원고도 발송하며 활발한 저작 활동을 이어나갔다.

아우구스트 공작은 괴테가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전처럼 친구로 여겨 늘그막까지 매우 친하게 지냈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은 그에게 문학적 성장을 이루게 해준 계기가 되었고 이는 문인으로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괴테의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괴테가 문학 외의 철학과 식물학, 미술 등등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도 공작의 재정적 지원이 있어 그가 생활적으로 여유를 가진 덕이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널리 이름을 알린 작가였는데 그쯤에는 유명세가 이탈리아에도 파다하게 퍼져 정체를 숨기고 가명까지 사용한 여행에서도 그의 방문이 소문나 여러 예술가와 위정자의 관심을 끌었다.

독일 본국에 있을 때에도 그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싶다며 만남을 청하는 예비 작가들의 산더미 같은 편지를 받았고 실제로도 많은 문인과 만났다.《빌헬름 텔》,《도적들》로 유명한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도 그에게 작품을 보이면서 주목을 받아 괴테의 도움으로 극작가로 대박난 경우이다.[11] 이외에도 슐레겔, 노발리스 등이 그의 집을 찾았다.

2.3. 괴테의 여인들

이렇게 곱게 펼쳐진 인생에서 괴테는 무수한 여자와 사귀면서 사랑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겼다. 오죽하면 괴테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괴테와 사귀었던 여자들도 같이 연구해야지 괴테를 알 수 있다고 할 정도이다. 괴테는 연애를 통해 시인으로서의 생명력과 감성을 습득했으며 이는 죽는 그 날까지 마르지 않는 위대한 시상의 밑거름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괴테가 만난 수많은 여인들은 종종 괴테가 새로운 분야의 눈을 뜨도록 도와주기까지 했다.

괴테는 자신의 연인을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게 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 대표자가 파우스트의 그레트헨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샤를롯테 부프 (1753년 ~ 1828년)이다. 그레트헨은 괴테가 십대 때 첫 눈에 반한 첫사랑의 대상이었고[12], 샤를롯테는 괴테의 친구의 아내였다.[13]

사귀던 여자들과의 나이 차도 폭 넓어서 19살에는 어머니의 친구이자 26살 연상의 과부인 주잔네 폰 클레텐베르크 (1723년 ~ 1774년)란 여자와 사귀었고 그보다 훨씬 뒤인 74살에는 55살 연하인 울리케 폰 레베초프 (1804년 ~ 1899년)에게 청혼하기까지 한다.[14] 첫 결혼은 16살 연하인 크리스티아네 폰 불피우스 (1765년 ~ 1816년)와 했으며 그녀에게서 아들인 아우구스트 폰 괴테 (1789년 ~ 1830년)를 얻었다. 그런데 괴테는 크리스티아네와 동거한 지 18년이나 지난 1806년에서야 혼인했고 결혼 9년만에 크리스티아네는 병사했다. 크리스티아네는 평민이어서 주변에서는 괴테의 사실혼을 말렸으며 괴테와 크리스티아네의 관계를 곱게 보지 않았다. 더군다나 크리스티아네는 사교적으로 활발한 인물도 아니었고 식자층의 교양이 있는 인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친하게 지내던 샤를로테 슈타인[15]과의 관계는 이 일로 인해 잠시 껄끄러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크리스티아네는 괴테가 가진 작가로서의 자유분방함과 감수성을 이해했고 그의 예술적 영감을 자극해 여러 시문학을 남기게 했다.

아내 사후에도 여러 여자와 사귀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울리케 폰 레베초프라는 여성이었다. 울리케는 괴테를 만날 당시 17세였다. 사랑을 처음 느꼈을 때 괴테는 이젠 늙은이가 된 스스로를 타이르며 나무랐지만 내내 사랑을 앓다가 2년 뒤인 1823년에는 울리케에게 청혼을 하고 만다. 이런 청혼에 친구이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은 배를 다 잡고 웃으면서 "일흔 넷에 19살 여자를 사랑하다니 이건 심하다고!"라면서 놀려댔다. 하지만 괴테의 사랑은 마음에서 우러난 진심이었다. 괴테는 의사까지 찾아가[16] 이 나이에 혼인을 할 수 있냐는 진단까지 받았고 의사는 매우 건강하니 걱정할 것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괴테를 놀리던 공작 아우구스트도 괴테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깨닫고 괴테의 부탁을 승낙하여 레베초프 부인을 찾아가 괴테를 소개하고 괴테가 부인의 딸을 좋아한다고 뜻을 전한다. 그러자 울리케의 어머니인 레베초프 부인는 "괴테 씨야 너무나도 유명하고 그런 분이 우리 집안과 한 집안이 되는 건 나쁘진 않지만 아무래도..."라는 식으로 곤란하단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울리케가 괴테에게 보낸 시선은 연인에 대한 성애라기보다는 이름 높고 위대한 인물에 대한 존경 섞인 애정에 가까웠고[17] 괴테의 아들인 아우구스트 또한 결혼을 결사반대했기 때문에 혼인은 이뤄지지 못했다.[18] 그래도 괴테는 이 사랑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서 나는 사랑을 하고 그리하여 사랑받으면서 행복했노라."
"Hier war ich glücklich, liebend und geliebt."

2.4. 다재다능

문학가로서도 명성이 높지만 이 외에 여행기도 쓰고 연극 감독으로서 궁정 무대를 통솔하기도 했다. 특히, 연극 무대 경영·연출·배우 교육에도 재능이 상당해서 자신의 희극들을 유감 없이 연극으로 잘 묘사하여 연극으로도 상당한 대박을 거둬들였다. 오죽하면 그의 연극 연출, 경영, 교육을 두고 다른 연극인들이 "이 분야로도 한 우물을 파도 될텐데..."라는 말까지 했다.

거기에 식물학에도 관심이 깊어서 전문가급의 연구를 했으며 과학자들을 후원하고 식물학에 대한 책도 집필했다. 이 책에서 밝힌 대표적인 사실 중 하나가 바로 "은 잎이 변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저서는 식물학자들에게도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식물학자인 베르너 라이히트아젠이란 사람이 괴테에게 "식물학자로 연구하셔도 되겠습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괴테씨의 열정과 지식을 봐도 그만큼의 가치가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라는 편지까지 썼다. 실제로 괴테의 과학적 업적은 당대 생물학자 중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의외로 치의학해부학에 끼친 영향도 상당하다. 괴테는 치아가 잇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치아의 뿌리가 되는 뼈대가 존재할 것이라 생각한 끝에 간악골(앞니뼈)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어권 학계에서는 이 뼈 부위를 지칭할 때 종종 Goethe's bone이라고도 부른다. 괴테의 발견 전까지는 간악골이 동물에게만 있고 인간에게서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창조론의 과학적 근거로 쓰이기도 했었다. 인간의 간악골은 유아기의 성장 과정에서 턱뼈와 합쳐지기 때문에 발견이 어려웠던 것이다. 괴테는 인간이 척추동물이고 앞니가 있는데 간악골은 없을 리가 없다고 자부했고 태아의 두개골을 연구하다 마침내 간악골을 발견했다. 괴테의 간악골 발견은 당대 유럽 학계에 피어나던 진화론의 사상적 근거에도 영향을 끼친 셈이다.

다만 여러 재능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자로서의 감각은 영 아니었다. 왜냐하면 괴테 본인이 물리학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시 물리학은 아이작 뉴턴 패러다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반면, 괴테는 독일의 낭만주의자로서 뉴턴과 대척점에 서있었다. 괴테는 자연을 나누어 수량화하는 뉴턴 역학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자연은 연속적인 것이라는 유기적 우주관을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사물을 극과 극 간의 조화로 설명하는 자신만의 자연철학까지 시도했었다.[19] 심지어 괴테는 광학에 대한 진실을 아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자신 뿐이라는 허풍까지 늘어놓았다. 당연히 현대의 과학적 방법론으로서 승자는 뉴턴이다. 그런데 괴테가 뉴턴의 학설을 논파하려는 과정에서 빛, 그림자, 색을 탐구하며 집필한 색채론은 훗날 많은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미술사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미술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던 괴테는 회화 속에서의 색 표현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이러한 점이 색채론의 토대에 반영이 된 것이다.[20] 이 색채론은 훗날 하이젠베르크의 논문《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본 괴테와 뉴턴의 색채론》[21]에 의해서 재조명되기도 한다.[22]

더불어 괴테는 작센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으로 재직할 당시 정치인으로서 재능이 상당함을 보여줬다. 바이마르 시의 토목 공사를 계획하고 직접 지휘하기도 했으며 프랑스군과의 전쟁을 대비하여 물자 비축 및 비상 체제로 들어가 자신이 재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다했다. 발미 전투[23]에서는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공작이자 프로이센 왕국군의 원수였던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1735년 ~ 1806년)의 참모로서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다만 전쟁의 결과에서 나타나듯이 괴테에게 군인이나 전략가로서의 재능은 없었다. 심지어 주위에서 "참모라고 쓰고 기록 서기관이라고 읽는다."라는 조롱까지 했다.

그러나 괴테는 글을 잘 쓰는 재능으로 당시 참전 기록에 대하여 세세한 묘사를 했다. 사실 공작부터가 군인으로 유능한 데다 그의 곁에는 이미 화려한 참모진이 있었기에 굳이 괴테가 참모로서 책임을 다 할 필요도 없었다. 또한 발미 전투 당시 프랑스와 프로이센 모두 전투 결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괴테는 "오늘 이곳, 이 날부터 세계 역사의 새 시대가 열린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가 자신이 그 탄생의 순간이 있었다고 말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이 발미 전투는 프랑스 혁명 전쟁의 중요한 분수령 중 하나가 되었다.

아나 아말리아 공작부인 도서관관장을 맡은 적이 있다.[24]

또 그는 그림에도 재능이 있었다. 평생 동안 그림 작품이 1000점이 넘을 정도로 예술에 있어서도 그의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2.5. 말년

괴테는 만 82세까지 장수했지만 아들과 아내 모두를 먼저 여의었기에 이를 늘 서글퍼했다.[25] 10살 밑이던 후배 실러와도 친구처럼 지냈는데 1805년 실러도 만 45살 한창 나이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실러는 귀족이 된지 3년이 채 안되어 이제 좀 잘살게되면서 글도 본격적으로 더 쓰고자 하는 한창때에 갑자기 가버린 셈인데, 이 때의 일화로 1805년 새해 연하장을 실러에게 쓰던 괴테는 실수로 새로운 해를 마지막 해라고 잘못 써서 기겁하고 다시 연하장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괴테는 뭔가 느낌이 안 좋다며 실러를 걱정했고 예상대로 실러는 그 해에 사망했다. 괴테는 실러가 죽었단 소식을 듣고 '그래? 어쩐지 예감이 안 좋았어'라고 말하곤 조용히 서재로 들어가 하루종일 작게 울며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괴테는 1823년 처음 심작발작을 일으켰지만 다행히도 회복하였고, 한동안 괜찮았다. 하지만 1832년 3월 20일에 일어난 두 번째 발작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발작 이후 급격히 쇠약해졌고, 3월 22일 11시 30분 경, 안락의자에 앉은 채 침실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더 많은 빛을! (Mehr Licht!)"

이 유언은 후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이 유언이 진짜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혹자는 이 말이 거창한 의도로 한 것이 아니라, 그냥 평범하게 창문을 열라는 의미로 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괴테의 며느리 오틸리에는 괴테가 자신에게 "오너라. 내 작은 딸아. 나에게 너의 작은 손을 다오."라고 말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괴테의 하인이었던 프리드리히 크라우제만이 괴테의 임종을 지켜봤으며, 그가 그 당시를 기록했던 메모는 훗날 공개되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고 한다. "마지막에 그는 요강을 가져다 줄 것을 부탁했고, 죽을 때까지 그것을 온 몸으로 감싸안았다."[26] [27] 4일 후, 괴테는 그의 친구 실러 옆에 묻혔다.

일생을 위대한 인물로 살아왔던 괴테였지만 그의 핏줄만큼은 이어지지 않았다. 괴테의 아들 아우구스트는 로마 여행 도중 40대의 나이로 사망했다.[28] 아우구스트는 아내 오틸리에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괴테는 어려움을 겪었다. 오틸리에는 괴테 사후에 모든 유산을 물려 받았으며, 바이마르를 떠나 으로 갔다가 다시 바이마르로 돌아왔지만 행복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고 전해진다. 괴테의 손녀인 알마는 17세의 나이로 빈에서 사망했고, 두 손자는 할아버지 괴테와는 다르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어려워해 자식이 없는 독신으로 살다 60대에 세상을 떠났다.

그나마, 직계는 끊겨졌지만 방계로 하나뿐인 누이동생 코르넬리아네 후손인 니콜로비우스(Nicolovius) 집안은 대대로 이어지고 있다. 코르넬리아의 큰 딸인 마리아 앤 루이즈도 36살 나이로 요절했지만 상술한 각주대로 니콜로비우스랑 결혼하여 5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 2명과 딸 1명은 어린 나이로 일찍 죽었으나 나머진 천수를 누리고 후손들을 여럿 낳았다.

2.6. 괴테와 격동의 시대

괴테가 살았던 18세기 중반과 19세기 초반은 그야말로 세계가 격동하는 시대였다. 그가 17살일 무렵에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범세계적 전쟁인 7년 전쟁이 벌어졌고 그 여파가 미국 독립 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프랑스 혁명나폴레옹의 흥망성쇠를 목격했고 후에 이어지는 빈 회의로 인한 유럽의 격변까지 몸소 모두 겪었다. 또한 그의 일생 동안 산업 혁명의 전조가 유럽에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대륙 간의 연결과 식민지 사업이 완전히 정착한 상태였다. 과학의 발전, 합리주의와 관념론 등등 여러 철학 사조와 개념의 대두, 불가침의 권위가 사라진 종교와 교회 등 괴테는 '절대적 개념'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태어나 새로운 시각이 점차 열리게 되는 시대를 살았다. 바로 그러한 배경이 슈투름 운트 드랑이라는 문학 운동의 사상적인 토대가 된다. 문학에서의 '질풍노도'라는 개념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 괴테의 대표작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29] 괴테의 저작 일생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관념론계몽주의적 사상의 연결은 구 시대와 새 시대의 다리에 있던 그의 시대가 문학적으로 드러난 결과일 것이다.

이처럼 괴테의 시대는 기존의 질서와 권위가 전복되는 사건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기존의 정서라는 것은 금이 가고 대체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괴테는 사회 제도적인 역할로서의 결혼에 대해서도 회의가 있었다. 괴테는 신분, 재산, 나이 등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결혼의 범위'에 전혀 구애를 받지도 않았다. 괴테의 연애 감정은 괴테 본인이 느끼는 사랑과 여성의 아름다움[30]에 의한 것이지 사회적 통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었다. 생전 연인 관계는 숱하게 많았던 괴테가 한 번의 혼인만 치른 것도 그런 성향과 무관하지 않았다. 괴테와 연인 크리스티아네의 결혼 또한 순전히 당사자들만의 의지는 아니었다. 괴테의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괴테가 신부를 찾아 결혼하길 종용했고[31] 격변기의 혼란 속에서 괴테는 연인 크리스티아네와 아들 아우구스트의 신변에 두려움을 느꼈다. 괴테는 가족이 법적으로도 신변 보호를 받을 수 있길 바랐고 그 책임감이 결혼에 대한 회의도 무르게 하여 크리스티아네와 결혼을 한다는 결심을 하게끔 만들었다.

3. 괴테에 대한 유명인들의 평가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괴테의 열렬한 팬이었다. 나폴레옹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큰 인기가 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전쟁터에 가지고 다니며 7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독일(바이마르)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에어푸르트에서 유럽 제후 회의를 소집했을 당시, 괴테를 만나길 원했고, 1808년 10월 2일, 마침내 나폴레옹은 그토록 원했던 괴테와의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32] 자연스럽게 화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넘어갔는데, 나폴레옹은 소설의 어느 한 장면을 지적하면서 '괴테 선생은 그것을 왜 그렇게 처리했느냐, 그건 이치에 맞지 않지 않으냐'고 말했다. 괴테는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황제가 지적한 부분은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만약 작가가 어떤 효과를 얻기 위해 은밀한 기교를 사용한다면, 그 작가의 입장은 이해되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나폴레옹은 괴테의 말에 흡족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화를 마친 괴테가 접견실을 나가자,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사람이 있군! (Voilà un homme!)"[33]
  • 베토벤도 한때 괴테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을 만큼 그를 존경했다. 베토벤은 평소에 괴테의 시를 즐겨 읽었고 그의 희곡 에그몬트를 위한 서곡까지 작곡할 정도였다. 둘 다 친분이 있었던 베티나 폰 아르님이 만남을 주선했는데, 베토벤과 괴테의 만남은 1812년 7월 경, 보헤미아의 온천 도시인 테플리츠에서 이루어졌다. 그 둘이 이런저런 담소들을 나누며 산책하고 있을 때 둘은 우연히 오스트리아 황후 일행과 마주쳤다. 베토벤은 팔짱을 낀 상태로 "이대로 걸어갑시다. 우리가 아니라 저 사람들이 비켜서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괴테는 불쑥 베토벤의 팔을 뿌리치고는 모자를 벗어 한 손에 든 채 길 가장자리로 물러나 섰다. 그러고는 황후 일행이 다 지나갈 때까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자세를 취했다. 베토벤은 팔을 휘저으며 황후 일행의 한복판을 황소처럼 거침없이 뚫고 지나가다가 예의상 모자 끝에 가볍게 손을 갖다 대는 자세를 취했을 뿐이다. 일행이 마침내 다 지나가자, 베토벤이 괴테에게 말했다. "나는 선생님을 존경하기 때문에 선생님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저 사람들을 지나치게 존경하시는군요."[34] 베토벤은 시인을 민족의 대표라 생각했기 때문에 자국의 대표 시인 괴테가 귀족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이 못마땅했다. 괴테 역시 예의 자체를 아예 없는 것으로 무시하는 베토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로 두 사람은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35]
  • 그림 형제의 빌헬름 그림도 괴테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는 독일의 문헌과 이야기를 채록하는 과정에서 괴테의 저작 다수를 접하게 되었는데 이때 괴테에게 깊이 매료되어 자택에 괴테의 흉상까지 들여놓았다. 괴테와 우연히 한번 만난 적 있는데, 괴테는 "오랫동안 잊혀진 문화를 선호하는 수고"를 했다며 그를 칭찬했다.
  • 쇼펜하우어가 무명의 청년 시절일 때부터 그와 교류했다. 괴테는 대중적인 작가로 활동하던 쇼펜하우의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살롱에 자주 방문했는데, 그것이 그와 쇼펜하우어와 만난 계기가 되었다. 당시 괴테는 쇼펜하우어의 무시당하던 박사논문을 극찬했다. 괴테는 쇼펜하우어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차린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고 쇼펜하우어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가 대단한 인물이 될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1813년 가을쯤엔 괴테는 쇼펜하우어를 집에 초청하여 토론을 나누기도 했다. 색채 이론과 관련하여 서로 의견이 충돌하는 언짢은 시기가 있기도 했으나, 두 사람은 늘 존중하는 태도로 서로를 대했다. 쇼펜하우어는 괴테의 열렬한 지지자 중 하나이기도 했고 그가 사망한 후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사업에 힘쓰기도 했다.[36]
  • 프로이트는 괴테의 저작 중에서도 파우스트를 극찬했다. 파우스트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감성과 이성 사이의 관계 통찰과 자신의 연구 이론 사이에서 일종의 연관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 모리 오가이[37]가 괴테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독일 유학생 시절에 쓴 일기 중에 "괴테의 전집은 웅장하고 위대하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오가이는 군의관으로서의 복무와 문학 작품 집필을 겸하는 데에서 내부적 고뇌와 외부적 굴욕을 통렬히 느끼기도 하였는데, 괴테는 황제로부터의 부름을 받아 바이마르의 고급 관리를 지내면서 작가 활동을 하여 오가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음에서 동질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또한 오가이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일본에 최초로 소개하고 이에 대한 일본어 번역서도 내었고, 파우스트의 시구 중 다섯 구절을 본인의 작품에서 인용하기도 하였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괴테를 대단히 존경했다. 아인슈타인은 평소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독서를 즐기는 인물이었는데, 괴테에 대해서는 역사상 가장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평했다. 출처 또한 그는 출판된 괴테의 모든 서적을 소장하고 있었고 괴테의 흉상까지도 자택에 가지고 있었다.

4. 명언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느니.[38]
사랑은 지배하지 않지만, 성장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게 더 중요합니다.[39]
가르침은 많은 것을 하지만, 격려는 모든 것을 합니다.[40]
체험하지 않은 것은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줄도 체험 그대로 쓰지 않았다.[41]
선한 영혼을 가진 분들이시여, 베르테르와 똑같은 충동을 느낀다면 그의 슬픔에서 위안을 얻으십시오.[42]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못한 자, 근심에 찬 밤들, 잠자리에 앉아 울어 본 적 없는 자, 너희들은 알지 못하리, 너희 천상의 힘들이여.[43]
새벽 3시, 나는 카를스바트를 몰래 빠져나왔다. 그러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나를 떠나지 못하게 했을 것이므로.[44]
지성과 바른 감각이 있으면, 별다른 기술이 없어도 그로 인해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진다.[45]
모든 똑똑한 것들은 이미 다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뿐이다.[46]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경지는 경탄이라네.[47]
우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이해하는 것만 본다.[48]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항상 적용해야 한다. 의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항상 행동해야 한다.[49]
취향 없는 상상력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다.[50]
재능은 고독 속에서 형성되고, 인격은 세상이라는 폭풍 속에서 만들어진다.[51]
하늘이 어디에서나 파랗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전 세계를 여행할 필요는 없다.[52]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언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53]
길은 시작되었다. 여행을 마저 하라. 근심 걱정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너를 영원히 내동댕이쳐 균형을 잃게 할 뿐.[54]
주여, 마음에 들어하소서, 이 작은 집을. 더 크게 지을 수야 있겠지만, 더 많은 게 나오지는 않습니다.[55]
증오는 편파적이지만, 사랑은 그보다 더 합니다.[56]
우리의 가장 진실된 노력은 모두 무의식의 순간에서만 성과를 거둔다. 장미는 어찌 꽃을 피우고 싶겠는가, 그녀가 태양의 장엄함을 인식해 버렸다면![57]
예술은 인생과 같아서,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것은 더 넓어집니다. 이 하늘에는 내가 계산할 수 없고 나를 당황케 하는 새로운 별들이 거듭 밖으로 나옵니다.[58]
태양을 즐길 수 있는 곳에서는 모든 걱정이 사라집니다.[59]
어쨌든 삶이란 좋은 것입니다.[60]

5. 주요 작품

5.1. 소설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 선택적 친화력 Die Wahlverwandtschaften
  •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Wilhelm Meisters Lehrjahre
  •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Wilhelm Meisters Wanderjahre[61]

5.1.1. 단편

  • 여우 라이네케 Reineke Fuchs
  • 동화 Märchen[62]

5.2. 희곡

5.3.

※ 괴테는 평생 3000여개의 시를 지었다. 어릴 때부터 말년까지 하나하나씩 시를 자유롭게 쓰고 발표했으나, 유일하게 단행본으로 『서동시집 West–östlicher Divan』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대표작은 다음과 같다.

5.4. 과학저술

  • 식물의 변형을 설명하려는 시도 Versuch die Metamorphose der Pflanzen zu erklären
  • 광학에 대한 기여 Beiträge zur Optik
  • 색채론 Zur Farbenlehre

5.5. 자서전, 일기

  • 이탈리아 기행 Italienische Reise[65]
  • 프랑스 종군기 Kampagne in Frankreich
  • 시와 진실 Dichtung und Wahrheit[66]
  • 괴테와의 대화 Gespräche mit Goethe[67]

6. 여담

  • 괴테는 그 명성에 걸맞게 무시무시한 어휘력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학자들에 따르면 괴테는 93,000단어를 쓸 줄 알았으며, 괴테보다 더 많은 어휘력을 발휘했던 인류는 없다고 한다. 성경 번역을 통해 근현대 독일어를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마르틴 루터조차 23,000개의 단어를 사용했다고 하니, 괴테가 얼마나 뛰어난 천재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 추정 iq만 하더라도 205 정도가 된다고 하며, 종종 역사상 가장 뛰어난 두뇌라고 평가받기도 한다.[68]
  • 괴테는 5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 중 유일하게 '아우구스트'만 성인으로 자라 결혼까지 했다. 아우구스트와 아내 오틸리에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둘 사이에서 3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세 아이의 이름은 차례대로 '발터, 볼프강, 알마.' 아우구스트는 괴테의 비서 역할을 자처했는데, 나중에는 궁중의 고위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너무나 위대한 아버지의 명성에 가려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지만, 아우구스트 자신이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에 지나치게 복종하는 면이 있었다. 또한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셨는데, 이는 스트레스와 상관없이 가족력으로 보인다. 아버지인 괴테도 술을 많이 마시는 것으로 유명하다.[69] 아우구스트는 40세에 요한 페터 에커만과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고, 거기에서 마차 사고를 당하고 천연두까지 걸려 로마에서 사망했다.
  • 괴테는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70] 음악가 첼터[71]와 교류하며 오페라제작에 힘쓰기도 했으며 멘델스존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음악을 부활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괴테를 존경하여 그의 시 마왕가곡으로 작곡한 프란츠 슈베르트가 악보와 편지를 보내오자 괴테는 음악은 시와 글보다는 못하다면서 냉정하게 외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슈베르트 사후[72]에 그를 인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 대해선 높이 평가하였으며 바이마르의 궁정 예술감독 시절엔 모차르트의 작품을 자주 공연하였다. 그 외에도 파우스트를 오페라로 만들 인물로는 모차르트를 뽑았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모차르트는 괴테를 몰랐는데 실제로 둘은 만난적이 있긴하다. 모차르트가 7살쯤에 유럽연주회를 다닐 적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많은 관객 중의 한 사람으로 14살의 괴테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어린 모차르트를 작은 칼을 차고 머리는 땋아내리고 있었다라고 당시 제자였던 요한 페터 에커만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그가 최고로 뽑았던 음악은 돈 조반니인듯 하다. 그 외에도 마술피리를 보고 감명받은 그는 마술피리 후속작을 만들기로 하지만 결국 미완성으로 단편으로 남아있다.
  • 직접 발견은 아니긴 하지만 카페인이 발견되는 것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독일의 과학자 프리들리프 페르디난트 룽게의 친우로, 1819년 당시 25살이던 룽게가 고양이의 동공에 근육 이완 효과가 있는 벨라돈나라는 식물[73]의 추출물[74]을 떨어뜨린 후 동공이 확장되는 실험을 시연했는데, 이에 감명을 받은 괴테가 그에게 아라비안 모카 커피콩을 선물하면서 '여기에 들어있는 성분을 분석해서 왜 커피가 사람들을 깨우는 효과가 있는지를 알려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룽게는 이 성분을 단순히 커피의 유효성분이라는 뜻으로 카페바제(Kaffebase)라고 불렀으나, 1821년에 룽게와는 별도로 독자적으로 카페인을 발견한 프랑스의 피에르 장 로비케(Pierre Jean Robiquet), 피에르 조제프 펠티에(Pierre Joseph Pelletier), 조제프 비앵네메 카방투(Joseph Bienaimé Caventou)가 논문을 내고 caféine[75]이라는 명칭을 널리 정착시켜서 이쪽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다만, 후에 펠티에는 룽게가 자기보다 먼저 한발 앞서 카페인을 발견했음을 인정하고 공표했다.
  • 이탈리아 여행 초기, 북부의 한마을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정탐병 내지는 스파이로 몰려 곤란에 빠질 뻔한 적이 있다. 이유는 즉슨 딱 봐도 외부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여행객이 많지 않은 알프스 인근 마을에 침범해 강어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성의 폐허를 기웃거리며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였는데, 괴테는 순전히 성채의 아름다움과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그 성을 둘러보며 스케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몰려온 사람들과 시장은 군의 이동 경로나 친입로를 계산하는 건 아닌가 의심하며 이를 믿지 않았고 괴테는 자신의 출생지가 프랑크푸르트임을 밝힌다.[76] 운이 좋게도 괴테가 어릴 적에 프랑크푸르트의 한 상점에 체류했던 남자가 나타나, 괴테가 묘사하는 프랑크푸르트와 남자가 알고 지낸 사람들의 행적 등을 이야기해주자, 괴테의 진실성을 입증해 주어 괴테는 마을을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게 된다.
  • 도플갱어를 봤다는 일화로 영미권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해당 내용은 괴테의 자서전 『시와 진실』 11장 말미에 나오는데, 사실 내용을 살펴보면, 도플갱어를 봤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느낌을 예감했다는 것, 즉 데자뷰자메뷰 같은 느낌에 더 가깝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771년에 애인과 이별한 22살의 괴테는 낙심한 채 홀로 말을 타고 드루젠하임으로 가는데, 순간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길의 맞은편에서 말을 타고 또다른 자신이 다가오는 것을 심안(心眼)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또다른 자신은 이때까지 괴테가 한 번도 입어본적 없는 금빛이 섞인 엷은 회색 옷을 입고 있었다. 괴테가 깜짝 놀라며 꿈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또다른 자신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괴테가 8년 후에 그 꿈에서 보았던 옷을 우연히 걸치고, 그 길을 다시 지나갔다는 것이다.[77]
  • 초콜릿 광이었다. 집에서 기분이 좋을 때 먹는 초콜릿, 나갈 때 들고 다니는 초콜릿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청혼할 때도 초콜릿으로 했다고 다크 초콜릿 맛의 쾨스트리쳐 슈바르츠비어의 별명도 괴테 맥주. 대신 먹을 때마다 양치를 철저하게 했기에 죽을 때까지 이는 꽤 멀쩡했다고 한다. 괴테가 살던 시대에도 치약이 있었지만 그땐 꽤 비쌌다. 하지만, 꽤 부자 집안에서 태어난 괴테에겐 그리 문제 없었다.
  • 191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독일 유명 작가이던 게르하르트 하웁트만(Gerhard Hauptmann,1862~1946)이 작가로 이름을 떨치던 시절, 무슨 생각을 하며 공원을 산책하다가 잔디밭으로 들어가 걷고 있었다. 그는 미처 그걸 깨닫지 못하고 계속 걸었는데 공원 관리인이 마구 화내면서 나오라고 소리쳤다. 하웁트만은 자신이 잘못은 했지만 그렇게 큰소리로 망신주는 것이 화가 나서 "내가 누군지 아시오!" 라고 맞받아쳤다. 그러자 관리인이 잠깐 말문이 막히다가 대꾸하길 "아, 당신이 그 유명한 괴테 씨라는 거 압니다만 그래도 지킬 건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이 말에 하웁트만은 우울해져서 순순히 바깥으로 나와 집으로 돌아갔고 일기장에 "난 유명하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괴테라는 거인은 죽어도 100년이 되어가도록 내가 따르지 못한다." 라고 적었다고 한다.[78]
  • 독일문화원의 명칭에는 괴테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주한 독일문화원을 가면 간판의 독일어 표기가 Goethe Institut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홈페이지 도메인까지 www.goethe.de일 정도다.
  • 1955년 이후 매년 독일 문화원에서는 예술 부문에서 큰 기여를 한 비독일 국민에게 괴테의 이름을 딴 괴테 메달을 수여한다.
  • 괴테가 태어나고 많은 세월을 지낸 프랑크푸르트는 괴테가 자랑이다. 괴테가 태어난 집도 괴테 하우스라고 하여 그대로 남아있으며 괴테 박물관에 괴테의 흔적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다. 그가 대학을 다닌 라이프치히도 마찬가지로 괴테 학습 박물관을 세우고 괴테를 많이 홍보한다. 위에 나오듯이 유학해 다니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측도 학교 안에 그가 다니던 학교건물 앞에 괴테의 길이라는 이름을 지어붙이고, 동상까지 세웠으며 괴테 학습 박물관을 작게나마 세워 학교 성적표 및 당시 교수들의 평가서 등등을 전시하며 괴테가 우리 학교를 다녔다고 자랑하며 홍보한다.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괴테는 취미로 수석을 무척 모으길 굉장히 좋아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분야에 대해 굉장히 진지하기도 했다. 그는 독일 전역을 넘어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해외에서도 마음에 드는 여러 암석을 가져왔고 수석을 채집하고자 직접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암석지대를 찾아다니거나 화산석을 구하고자 활화산 가까이에 오르기도 했다. 암석에 대한 그의 지식은 꽤나 상세했으며 암석에서 나타나는 색에 대한 집요한 탐구는 색채론을 쓰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지금도 그가 평생 모은 6,500여점이나 되는 수석이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괴테 하우스나 괴테 박물관 등등에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당연하지만 책도 많이 읽어서 그가 평생 모으고 읽던 책도 3,000여권이 그대로 전시되어 남아있다.
  • 대한민국에서는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의 저서 등의 영향으로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지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실제로는 잘못 퍼진 명언이다. 괴테 본인이 독일인이니 만큼 정말 괴테가 한 말이라면 독일어 원문도 함께 존재해야 하는데,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괴테가 했다고 실어둔 해외 사이트에서도 독일어 원문만은 발견되지 않는다.
  • 와인을 사랑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맛없는 와인을 먹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와인을 사랑했다. 괴테가 직접 그린 그림을 레이블로 사용해 '괴테의 와인'이라 불리는 디히터트라움(Dichtertraum)도 있다. 독일어로 디히터(Dichter)는 시인, 트라움(Traum)은 꿈이라는 뜻이다.
  • 아들인 아우구스트가 어릴적에 유럽에서 유행하던 단두대 장난감을 가지고 싶어하자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구할 곳을 질문한 바 있다. 어머니에게 어린이에게 진짜 칼날이 달린 것을 위험하게 사준다는 게 아버지로서 할 일이 아니라는 꾸짖는 답장을 받고 사과편지를 보내야 했다. 실제로 단두대 장난감은 진짜 칼날로 만들어 아이들이 손가락을 넣고 장난치다가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가 여럿 벌어져 제조 및 판매가 금지되었었기 때문이다.
  • 외국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출판하는 일을 한 적도 있으며 비평문을 편집하고 출판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 생전에 권수로만 따지자면 100권을 가뿐히 넘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저작을 남겼다. 그중에는 미완성 작품도 있고 일부만 남은 작품도 상당수 존재한다.[79]
  • 괴테의 할아버지인 요한 볼프강 텍스토어는 훗날 손자인 괴테도 잠시 체류하게 되는 베츨러에서 법률 공부를 하다가 한 유부녀와 눈이 맞아 만남을 가졌는데 정사 도중 발각되어 가발도 내팽개치고 도망친 적이 있다고 한다.
  • 조선의 정약용과 거의 동시대인인데, 두 사람을 비교한 《괴테와 다산 통하다: 동서 지성사의 교차로》(2007)라는 책이 있다.[80]
  • 로마에 체류할 당시 바티칸시스티나 경당에서 이루어지는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때 무려 성가를 들으면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천지창조최후의 심판을 감상했다고 한다. 그런데 너무 피곤한 상태였던 나머지 졸아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괴테는 미술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높고 열정도 대단한 인물이었던 만큼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극찬하다 못해 "이것을 보기 전까지는 한 인간이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평했다.
  • 말년의 괴테는 아메리카 대륙에 관심을 두었다. 그는 미국에서 건너 온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즐겼고 미국의 지식인 층에서 자신의 저작이 인기가 높다는 말에 흡족해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이 파나마 운하를 반드시 건설할 것이라고 예측했으며, 살아생전에 이 위대한 사업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81] 칼 아우구스트 대공 둘째 아들의 미국 여행기를 듣고, 미국에 관한 시(詩)도 지은 적이 있다. 괴테는 이 시에서, 미국은 낭만주의 문화가 없는 지역이기 때문에 기사, 도둑, 유령 이야기만 하는 유럽보다 시를 짓는데 더 좋은 환경이라는 식의 얘기를 한다.[82]
  • 작가로서 괴테에게 불멸의 명성을 안겨준 것은 당연히 '베르테르'이다. 하지만 괴테 본인이 실연의 아픔과 상처를 문학 활동을 통해[83] 극복한 것과 다르게 작품 속 베르테르에 몰입한 많은 유럽인들은 그를 따라 자결하기 일수였고 이는 괴테가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그는 너무나 열광적인 반응에 놀라기도 했고[84] 자신의 작품이 실연한 사람들의 죽음을 부른다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바였다. 그래서 훗날 출판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서두에는 그런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본 문서에도 등재된 문장이 삽입된다.
  • 괴테는 로마 여행 도중 한 귀족 아가씨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밀라노에서 와 로마 체류 중인 영애였다. 괴테는 조금 더 자유롭게 여행하고자 신분을 숨긴 채 여행하고 있었지만 그때는 이미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괴테가 밀라노 아가씨라고 부른 그 귀족 영애도 마찬가지로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괴테는 그녀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며 일종의 스승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괴테는 점차 그녀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느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괴테는 산책을 하던 도중 밀라노 아가씨의 모친이 한 무리의 여인들과 모여 대화를 하는 자리에 합석하게 된다. 그들의 대화는 혼례와 혼수에 관한 것이었고 괴테는 지루함을 느껴 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 혼례 이야기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밀라노 아가씨라는 사실을 알게 된 괴테는 큰 충격에 빠진다. 이날 저녁 괴테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베르테르가 아직도 자기 주위를 맴돈다며 크게 통탄했다. 이때부터 괴테는 밀라노 아가씨에 대한 마음을 접고 언어 스승이자 친구로서 그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간다. 그가 남부 이탈리아로 떠날 무렵에 밀라노 아가씨는 고열을 알아 몇 날 며칠 동안 만날 수가 없었기에 괴테는 계속해서 그녀의 안부를 물으며 쾌차를 기원하고 남부로 떠났다.

    괴테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로마에 두 번째로 체류하며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되는데, 사실 밀라노 아가씨가 고열과 몸살을 앓던 건 다름 아니라 파혼에 의한 스트레스로 몸이 약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괴테가 연신 자신의 안부를 묻고 회복을 기원했단 이야기를 들은 밀라노 아가씨는 전과 다른 호감을 드러내며 아무래도 괴테를 좋아하게 된 듯했지만, 이때 괴테는 그녀에 대한 사랑을 여전히 느끼면서도 좋은 친구 사이로 남기로 결정했다. 그는 곧 로마를 떠나 이탈리아 북부를 거쳐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괴테는 밀라노 아가씨의 집에서 마지막 만남을 갖은 후 길을 나서는데, 저택에서 멀리 떨어질 때까지 그 영애는 창문가에서 괴테를 지켜봤다고 한다. [85]
  • 파일:_________003-01.059.981378922518178628.13105919041359155760.11590597592890960421.jpg파일:DSC0193.jpg

    바이마르 에터스버그에는 "괴테의 참나무(Goethe Eiche)"라고 불리는 나무[86]가 있는데, 이 나무 아래에서 괴테가 <나그네의 밤 노래>와 <파우스트>의 '발푸르기스의 밤' 대목을 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그런데 다른 얘기도 있다. 괴테 사후 약 백 년이 지나 나치 독일은 이 지역에 악명 높은 부헨발트 노동수용소[87]를 세웠는데, 수용소를 지으면서 그곳에 있던 너도밤나무 숲은 전부 밀어버렸지만, 크고 수형이 좋은 참나무 하나는 남겨두었다. 그 나무는 원래 현지인들에게 "뚱뚱한 참나무(Dicke Eiche)"라고 불리던 나무였지만, 수감자들이 괴테가 이 근방을 산책했던 것[88]을 기념하기 위한 별명으로 "괴테의 참나무(Goethe Eiche)"라고 부르면서, 그 이후부터 '괴테의 참나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홀로코스트의 한복판에서 독일이 저지르는 대량 학살마저 목격하게 된 이 기구한 운명의 나무는, 끝내 전쟁 말기인 1944년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불타 죽었다. 타고 남은 잔해는 수용소의 나치 친위대들이 베어버려, 밑동만 남게 되었다. 왼편의 사진이 바로 1943년에 찍힌 것으로, 나무 뒤에 보이는 건물은 부헨발트의 막사이고, 오른편의 사진은 밑동만 남은 참나무를 옆에서 찍은 것이다.

    엘리자베스 로즈너의 <생존자 카페>에 따르면 1945년 초 부헨발트가 미군에게 해방되기 직전에 반란을 일으켜 풀려난 수감자들이 이 참나무를 상징적으로 불태워버렸다고도 하지만, 이에 대한 증언은 엇갈린다. 현재도 이 참나무의 밑동은 부헨발트 수용소에 남아 독일의 명과 암을 증언하고 있다. 한편, 수감자 중 하나였던 브루노 아피츠(Bruno Apitz)는[89] 이 참나무가 불타고 남은 파편 중 하나를 감시병 몰래 가져가 고통받는 부헨발트 수감자의 얼굴을 조각하기도 했다. 1944년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마지막 얼굴(Das letzte Gesicht)>이라고 불린다. # 아피츠 역시 이 나무가 괴테의 참나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괴테와 부헨발트의 역사적인 연결점을 만들고 희생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마지막 얼굴'을 조각했다. 현재는 베를린에 있는 독일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 괴테는 당연하게도 독일 현지에서 위대한 예술인이자 위대한 독일인으로 추앙받지만 문학을 좋아하는 독일의 젊은 세대에게서는 그렇게 큰 호응을 얻지는 않고 있다. 이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조차 단순한 연애 소설이 아니라 시대 변화와 세상의 격변에 대한 이상이 첨가된 이야기라 복잡하게 해석되기 때문이며, 다른 대표작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의 시대와 전 유럽 시대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는 복잡한 문학 작품이기 때문이다. [90] 그래서 그의 시학은 일종의 거대한 것, 전 유럽적인 것, 전 세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91] 독일인들이 조금 더 친밀하게 느끼는 시인은 친밀한 감정에 관해 쉽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시구를 많이 남긴 하인리히 하이네다.

7. 관련 문서



[1] 후술하겠지만 바이마르 공국 재상을 역임한 적 있다.[2] 바이마르 정부에서 1808년에 발급한 괴테의 여권이 남아 있는데, 거기에 괴테의 키가 5피트 8인치라고 나와 있다. #[3] 5명을 낳았지만 4명이 유년기에 세상을 떠났다.[4] 코르넬리아는 오빠 볼프강의 친구인 요한 게오르크 슐로서(Johann Georg Schlosser, 1739년 12월 7일 ~ 1799년 10월 17일)와 결혼해 두 딸을 낳았으며 슐로서는 괴테랑 친구이기도 하던 요한나 팔머(1744~1821)와 재혼했다. 코르넬리아가 낳은 큰 딸 마리아 앤 루이즈(1774~1811)는 쾨니히스베르크 (현재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 출신 프로이센 왕국 관리인 게오르크 하인리히 니콜로비우스(1767~1839)와 결혼해 5남 3녀를 낳았는데 어머니처럼 막내 플로라를 낳은 뒤로 만 36세로 요절했다. 둘째 딸인 줄리에테는 1793년에 16살로 요절하고 말았다.[5] 하지만 일화를 보면 부친이 괴테에게 공부에 대하여 압박을 많이 준 편인듯 하다. 괴테가 등하교하는 걸 맨날 자기 서재 창문으로 감시해서 괴테가 여동생이랑 그쪽에서 안 보이는 길로 귀가했다고 썼다. 사실 아버지도 법대를 나와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는데 신분상 승진 제한이 있어 마음의 상처를 받고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6] 거의 60년을 매달리면서 무수한 수정과 편집을 번갈아가며 썼다.[7] 베틴 가문 출신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은 어머니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아나 아말리아의 영향으로 계몽주의 성향이 강했고 인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만든 도서관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8] 이 고용은 공국 내각의 반발을 일으켰는데, 아우구스트는 반대를 무릅쓰고 괴테를 등용했다. 당시 괴테는 27살의 정치 경력이 전무한 인기 작가였다. 그럼에도 괴테는 맡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외교와 행정 등 주요 업무는 물론 농업 사업과 도로 정비에도 관심을 기울이지만 소국인 바이마르 공국의 태생적인 한계와 곧 닥친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뜻을 완전히 이룩하지는 못했다.[9]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 도중 남긴 기록과 본국에 보낸 편지등을 보면 단순히 공무에 질려 휴가차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이어진 위대한 예술과 그 명맥을 체험하여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발전시키고 함양하기 위함이었다. 언뜻 도피처럼 보이는 이 여행은 어느 정도의 계획 하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괴테는 고대 로마의 유산에 몰두하며 이를 배웠고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내내 회화와 조각 등의 미술을 탐구했고 광물학과 식물학에도 몰두하였다.[10] 현재 체코카를로비 바리.[11] 실러와 괴테가 처음부터 절친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한때 정치관과 생활에서의 성향 사이로 냉담한 사이였지만 우연히 만난 강연회에서 대화를 나눈 뒤부터 가까워져 독일 문학 사상 유래가 없는 친구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괴테와 실러는 11년간 10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았다.[12] 그레트헨 본인은 괴테를 돌봐주는 동생 정도로 생각했고 그레트헨이 귀항하고서 이것을 알게 된 괴테가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겼기에 끝은 별로 좋지 않았다.[13] 롯데그룹은 이 샤를롯테에서 따 온 이름이다. 롯데시네마의 프리미엄 상영관명도 샤롯데다.[14] 여담으로 괴테의 어머니는 괴테가 만나는 여성의 나이나 신분 등을 이유로 간섭하지를 않았다. 훗날 괴테의 부인이 되는 크리스티아네와 괴테가 동거를 할 때에도 괴테의 주변인과 사람들은 여자의 신분이 괴테에 비해 너무 낮고 교양이 없다는 이유로 수군거렸지만 괴테의 어머니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응원했다.[15]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모델이 된 샤를로테 부프가 아니다. 이쪽은 괴테가 거의 서른이 된 뒤에 친해진 여성 문인이자 고위 귀족이었다.[16] 노인의 약한 심장이 사랑의 두근거림을 못 견디고 질환을 얻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17] 처음에는 아예 괴테가 얼마나 유명한 인물인지도 알지 못해 그를 천진난만하게만 대했다.[18] 울리케는 괴테의 아들인 아우구스트보다 15살이나 어렸다.[19] 에른스트 페더 피셔,《또 다른 교양》, 김재영 역, 이레, 2006[20] 색채론의 영향을 받은 화가로는 그 스스로가 커다란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한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가 있다.[21] Die Goethesche und die Newtonsche Farbenlehre im Lichte der modernen Physik[22] 하이젠베르크는 괴테의 시를 즐겨 읽는 괴테 애독자이기도 했지만 색채론 속의 담긴 과학적 사상에 대해서도 감흥했다. 특히 "눈을 통해 색을 인식한다."는 개념에 대한 색채론 속 방법론에 영향을 받았다.[23] 1792년 9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가 거느리는 7만 8천에 이르는 프로이센 왕국군오스트리아 제국군과 연합해 프랑스 파리로 쳐들어간 전투였는데 의용군이 대부분이던 5만여 명 프랑스군이 프로이센군의 침략을 막아낸 전투이다. 사실 병력 수와 달리 전사자는 굉장히 적은 전투로 연합군은 겨우 184명이 전사하고, 2천 명 정도 부상자를 낳았으며 약 5만 명 가까이가 동원된 프랑스군은 3백 명 정도가 전사했다. 그렇지만 혁명 프랑스로서는 프로이센의 파리 침공을 막아낸 사실상 승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전투는 연합군이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다. 탐색전 정도로 전투를 벌였기에 사상자가 동원 병력에 견주면 매우 적었다. 만일 연합군이 죽어라 전력을 다했더라면 양군이 몇 만은 넘는 사망자가 나올 전투였고 프랑스 역사가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프랑스에 힘을 다하여 전투를 벌여봐야 러시아 제국이라든지 다른 나라만 득을 볼 게 뻔할 노릇이기에 그럴 수도 없던 거였다. 프로이센 언론도 그냥 탐색전 벌이다가 우리가 물러났다. 이기지 못 했지만 적어도 패배는 아니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너무 피해가 적고 전투를 대충 하다가 물러났고 페르디난트가 프랑스 측 뇌물을 받았다라는 소문도 가득했다.[24] 상술했듯 아나 아말리아 공작부인은 고용주이자 친우였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의 어머니였다.[25] 괴테의 아내는 요독증을 앓다가 죽었는데 그 과정이 굉장히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아내의 임종 직전부터는 괴테마저 앓아 누운 상태였다.[26] "but at the last he asked for the pot de chambre, and he took it himself and held it firmly to his body until he died." #[27] 죽기 전에 요강을 사용하려고 했지만, 죽음이 닥쳐와서 몸이 굳었다는 것을 말한다.[28] 아우구스트는 지금도 로마에 있는 세스티우스의 피라미드 근처 묘지에 묻혔다.[29] 고전주의, 이성주의, 합리주의, 낭만주의 등 유럽을 감돌던 여러 정신의 충돌과 기존 체재의 대한 반발 등이 귀족 사회 속을 헤매는 베르테르, 알베르토와 베르테르의 사상적 차이, 사회의 법률적 질서인 혼인 제도 안에 있는 로테를 통해 나타난다. 질서가 인간의 '이성'이라면 '감정'의 표출은 질서에 위반하는 것이며 괴테의 초기 저작에서는 그 두 관념 사이의 충돌이 유의미하게 나타난다.[30] 여기서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적인 아름다움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행동이나 일상 생활에서 나타나는 지혜로운 면모도 의미한다.[31] 그런 입김 속에서 괴테는 20대 중반이었을 무렵 연애했던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자제 릴리 쇠네만과 약혼하지만 두 집안의 불화로 곧 파혼하고 만다.[32] 영지 처분에 대한 협상은 칼 아우구스트 대공이 아닌 신하인 뮐러가 했는데, 협상을 잘해서 영지를 보존할 수 있었다. 이때 뮐러는 괴테를 데리고 갔다. 나폴레옹과 괴테의 저 유명한 일화도 뮐러가 기록한 내용에 의거한 것이다.[33] 원문은 다음과 같다. #[34] 로맹 롤랑 『괴테와 베토벤』 박영구 옮김, 웅진, 2000, p.74[35] 베티나 폰 아르민은 이 사건을 괴테가 죽은 후에야 세상에 공개했는데, 오늘날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지만 베티나가 사건을 실제 있었던 것보다 훨씬 극적으로 말했다고 생각한다. 괴테의 인사는 격식을 갖춰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정도였는데, 이를 황후가 지나갈 때까지 고개를 숙였다고 한 부분이라든지, 둘 사이가 이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갈라선 것은 아닌데도 베티나가 등을 돌렸다는 식으로 너무 과하게 왜곡해서 말했다든지 등등. 예를 들어 이 사건이 물론 서로에 대해 코드가 안 맞아서 실망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는 있지만, 둘 사이에 치명적인 갈등을 빚지는 않았다는 점은 입증할 수 있다. 둘은 이 사건 이후로도 적어도 4번은 더 만났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바로 다음 날 괴테와 베토벤은 함께 마차를 타고 근처의 온천 도시인 빌린으로 여행했으며, 그 다음 날에 괴테는 베토벤을 재방문하여 그의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재밌게 놀았다." 그들은 다음 날에도 함께 시간을 보냈다. 같은 해 9월 8일에도 카를스바트에서 둘은 우연히 만나 함께 점심을 먹은 후 근처 전망대에서 경치를 구경하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물론 이 만남 이후 서로에 대한 평가는 박해지긴 했는데, 서로 각기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괴테는 베토벤을 '위대한 재능을 지녔지만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평가했고, 베토벤은 괴테를 '궁정 분위기에 너무 심취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나중에 괴테를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으로 여겼다고도 말했으며, 괴테도 여전히 베토벤을 위대한 음악가라고 사람들에게 종종 말하곤 했다.[36] 괴테를 무척이나 존경했던 아인슈타인은 쇼펜하우어 또한 매우 존경하였다.[37] 일본의 소설가, 의사, 번역가.[38] Es irrt der Mensch, solang' er strebt. (Faust1, 317) 신이 인간을 정의하는 말이다. 『파우스트』의 전체 주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노력'으로 번역되는 'streben'은 '뜻이나 목표를 지니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전영애 번역본에서는 노력이 아닌 '지향'으로 번역했다.[39] Die Liebe herrscht nicht, aber sie bildet; und das ist mehr! (Das Märchen) 여기서 bildet(bilden)는 '형성하다' '생기다' '계발하다' '교양을 쌓다'는 의미인데, 한국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개념이지만, 굳이 설명하자면 백지에 그림을 조금씩 그려서 그림을 완성하는 것처럼, 개인이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점점 자신의 인격과 성품을 성장케 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bilden는 단순히 대중적인 '교양'이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인격 도야와 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그런 높은 수준의 교양이라고 보면 된다. 괴테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핵심 개념으로,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ㆍ편력시대』와 『파우스트』의 주제이기도 하다.[40] Lehre tut viel, aber Aufmunterung tut alles. (Gespräche mit Eckermann, 14. März 1830)[41] Von seinen ›Wahlverwandtschaften‹ sagt er, daß darin kein Strich enthalten, der nicht erlebt, aber kein Strich so, wie er erlebt worden. (Gespräche mit Goethe, 1830, 17. Februar.) 한국에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소개글로 이 글을 종종 인용하기도 하는데, 사실 해당 어록은 『선택적 친화력』이 그렇다는 얘기지, 자신의 모든 글이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42] du gute Seele, die du eben den Drang fühlst wie er, schöpfe Trost aus seinem Leiden.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43] Wer nie sein Brot mit Tränen aß, Wer nie die kummervollen Nächte, Auf seinem Bette weinend saß, Der kennt euch nicht, ihr himmlischen Mächte. (Wilhelm Meisters Lehrjahre)[44] Früh drei Uhr stahl ich mich aus Karlsbad, weil man mich sonst nicht fortgelassen hätte. (Italienische Reise) 『이탈리아 기행』의 첫 구절이다. 카를스바르트는 여름휴가지였는데, 괴테는 그곳에서 같이 휴양을 보내고 있던 자신의 군주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에게 무기한 휴가를 청원하는 편지를 달랑 한 장 남기고, 새벽 3시에 몰래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렇게 시작한 이탈리아 여행은 기한을 정하지 않은 휴가였는데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트 대공의 배려로 여행 내내 유급 휴가로 처리되어 그에 따른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45] 원문은 Es trägt Verstand und rechter Sinn mit wenig Kunst sich selber vor. (Faust I, 550) 직역은 "지성과 바른 감각은 별다른 기술 없이도 스스로로 인해 그것을 산출한다."[46] Alles Gescheite ist schon gedacht worden. Man muss nur versuchen, es noch einmal zu denken. (Wilhelm Meister's Wanderjahre)[47] Das Höchste, wozu der Mensch gelangen kann, ist das Erstaunen. (Gespräche, 1829, 18. Februar.)[48] Man erblickt nur, was man schon weiß und versteht. (Gespräche, 1819, 24. April.) 여기서 man은 '당신', '나', '우리', '그들' 등으로 쓸 수 있는 대명사인데,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앞뒤 문맥에 따라서 결정된다. 여기서는 괴테가 그리스 속담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우리'로 번역하였다. #[49] Es ist nicht genug zu wissen, man muß auch anwenden; es ist nicht genug zu wollen, man muß auch tun. (Goethes Werke, Hamburger Ausgabe in 14 Banden, Maximen und Reflexionen, 235)[50] Es ist nichts fürchterlicher als Einbildungskraft ohne Geschmack. (Wilhelm Meisters Wanderjahre)[51] Es bildet ein Talent sich in der Stille, Sich ein Charakter in dem Strom der Welt. (Torquato Tasso , Act I, sc. ii)[52] Um zu begreifen, daß der Himmel überall blau ist, braucht man nicht um die Welt zu reisen. (Wilhelm Meisters Wanderjahre)[53] Wer fremde Sprachen nicht kennt, weiß nichts von seiner eigenen. (Maximen und Reflexionen 91)[54] verfolge die Weise, Der Weg ist begonnen, vollende die Reise: Denn Sorgen und Kummer verändern es nicht, Sie schleudern dich ewig aus gleichem Gewicht. (West-östlicher Divan)[55] Herr, laß dir gefallen /Dieses kleine Haus, /Größre kann man bauen, /Mehr kommt nicht heraus. (West-östlicher Divan)[56] Der Haß ist parteiisch, aber die Liebe ist es noch mehr. (Die Wahlverwandtschaften)[57] All unser redlichstes Bemühn Glückt nur im unbewußten Momente. Wie möchte denn die Rose blühn, Wenn sie der Sonne Herrlichkeit erkennte! (Zahme Xenien 3, All unser redlichstes) 여기서 '그녀'는 장미를 가리킨다.[58] 원문은 "es geht mit der Kunst wie mit dem Leben: je weiter man hineinkommt, je breiter wird sie. An diesem Himmel treten wieder neue Gestirne hervor, die ich nicht berechnen kann und die mich irremachen. (Italienische Reise. Bologna, den 19. Oktober, abends.)" 이탈리아 여행 중 볼로냐에서 남긴 말이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 내내 고대의 예술과 이탈리아에서 만발한 갖가지 예술을 보면서 큰 감명을 받았다. 괴테는 이탈리아의 각 도시가 가진 문화와 예술 작품 등에 감탄하는 기록을 다수 남겼는데, 로마에 대해서는 '거대한 학교'라고 비유한 바 있다.[59] Wo wir uns der Sonne freuen, Sind wir jede Sorge los. (Wanderlied)[60] Wie es auch sei, das Leben, es ist gut. (Der Bräutigam) 『신랑』이라는 시는 괴테가 죽기 전, 말년에 쓴 마지막 3편의 시 중 하나로서, 해당 어록은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임마누엘 칸트의 마지막 유언도 'es ist gut. (그것은 좋다)' 였는데, 괴테는 이를 말한 것일 수도 있다.[61]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후속편으로 전작으로부터 25년 뒤인 1821년에서야 출간되었다.[62] 영미권에서는 '초록뱀과 아름다운 백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63] 에를코니히(Erlkönig)는 유럽 전설에서 '숲 속에 사는 사악한 요정의 왕'의 이름이다.[64] 동명의 시가 2편 있다. 괴테가 자신의 마지막 생일날, 키켈한이라는 산장 벽에 젊은 시절 적어둔 이 시를 찾아가 읽으며 눈물지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65] 단순한 여행기를 넘어 문학적, 예술적 가치가 상당하다. 예술 자체에 대한 괴테의 사상적 면모를 알아볼 수 있으며 당대 이탈리아 반도의 문화적 상황과 생활까지 이해할 수 있다. 괴테는 바이마르 공국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국소 지역을 거쳐 이탈리아 북부를 지나 베네치아에서 장기간 유람했다. 이때 괴테는 로마로 가야만 했기 때문에 베네치아를 떠났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머무르면서도 아쉬움을 표할 만큼 베네치아를 사랑했다. 그러나 괴테는 로마에 도착하기 이전부터 매우 흥분해있었음을 숨기지 않았다. 괴테는 로마에 도착한 날을 인생의 두 번째 시기를 맞은 날이라고 평했다. 그만큼 공무원과 작가 사이에서 방황하던 괴테는 이탈리아에서의 여행을 겪으며 중흥기를 맞이했다. 훗날 괴테가 완성하는 여러 저작의 사상적, 기술적 뿌리를 이탈리아 기행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괴테는 이 여행 도중 경험한 실연을 두고 '베르테르'를 언급하거나 이 시기에 집중하고 있던 저작이나 탈고 중인 작품의 내면에 대해 언급하기도 한다. 이처럼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더없이 중요한 저작이다. 괴테가 로마에 체류할 당시 머물렀던 여관은 개조되어서 지금은 'Goethe House'라는 이름으로 세간에 전시되고 있다. 괴테가 당시 직접 그린 스케치와 로마 체류 당시 주변인과 주고 받은 서신, 도안 등이 전시되어 있다.[66] 괴테의 자서전격 책.[67] 괴테의 조수 에커만이 쓴 괴테의 생애 마지막 9년 동안 괴테와 나눈 대화를 적은 글이다.[68] 괴테의 아이큐는 205. 물론,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한 수치에 불과하지만, 역사상 최고로 똑똑한 인물 중 한 명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69] 괴테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매일 2리터의 와인을 마셨다고 한다. (한스 할터 『역사를 움직인 157인의 마지막 한마디, 유언』 한윤진 옮김, 서울, 말글빛냄, 2006, p.328)[70] 괴테는 자신이 문학가임에도 음악을 모든 예술 중의 최고로 평했다.[71] 카를 프리드리히 첼터(Karl Friedrich Zelter, 1758–1832). 펠릭스 멘델스존의 스승.[72] 그가 죽고 2년 뒤인 1830년에 그랬다고 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추측들이 있는데 많은 존경과 찬사를 받으며 수많은 편지를 받았던 괴테였는데 그 수많은 편지중에 하나였던 무명의 프란츠 슈베르트 편지를 그냥 넘겼을거라는 추측이 있다.[73] 참고로 이 벨라돈나는 엄연히 독초에 속하는 부류이다. 이러한 마비성 독초의 독을 적당량 사용하여 의약품의 원료로 쓰는 경우가 현재에도 적지 않은데 이 실험 역시도 이와 일맥상통한다.[74] 아트로핀. 알칼로이드 중 하나이다. 현대에도 안과에 가면 시력검사를 할 때 넣어줄 때가 있다.[75] 프랑스어로 커피를 뜻하는 café에 접미사 -ine을 합쳤다.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카페인을 caféine이라고 표기한다.[76] 위기에 몰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괴테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고 자신의 정확한 신분까지도 숨겼다. 이미 유명할 데로 유명해졌기에 조금이라도 더 자유롭게 이목을 끌지 않은 채 여행하기 위함이었다. 로마의 도달해서도 괴테는 신분을 숨기지만 본국에서 퍼진 소문과 독일의 작가 괴테가 이탈리아에 도달했다는 소문 그리고 상류층임이 분명하지만 신원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외부의 독일인이란 신분이 맞물려 결국 정체를 들키고 만다. 그러나 로마의 예술가들은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괴테를 모르는 척 형식을 지켜준다. 그렇지만 형식을 지킬뿐 괴테에게 자신의 저작을 보여주고 그에 대한 생각을 묻거나 낭독해 주길 바라는 작가들이 아주 많았다. 남부로 여행할 때가 되면 이미 괴테의 방문이 소문나 지방 귀족이나 군주가 그를 궁에 초대할 지경에 이른다.[77] 이처럼 분주하고 혼란한 와중에도 프리데리케를 한 번만 더 만나보고 싶은 마음은 억제할 수가 없었다.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괴로운 나날이었다. 말 위에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고, 내 마음은 괴롭기 한량없었다. 거기서 샛길로 말을 타고 드루젠하임으로 갔는데, 그때 아주 기이하기 짝이 없는 예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즉 나는 육안이 아니라 심안으로, 나를 향해서 나와 같은 길을 말을 타고 오는 나 자신을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가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 옷까지 입고 있었다. 그것은 금빛이 섞인 엷은 회색 옷이었다. 내가 몸을 뒤척여 꿈에서 깨자, 순간 그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내가 팔 년 후에 이 꿈에서 보았던 옷을 걸치고, 그것도 일부러가 아니라 우연히 입고서 프리데리케를 다시 한 번 방문하기 위해 이 길을 지나갔다는 것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괴테 자서전: 시와 진실』 전영애 ; 최민숙 옮김, 서울, 민음사, 2009, p.635)[78] 이런 일이 은근히 있긴 하다. 전설적인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살아 생전, 자네 유명해졌다고 극찬하던 친구들에게 "아니..전혀."라고 시무룩하게 대꾸했는데...."얼마전에, 한 시골을 지나다가 시골 풍경이 너무 마음에 들고 사람도 안 보이고 해서 성악연습하고 있었지. 그런데, 지나가다가 이걸 듣고 나를 격찬하던 농부가 있었기에 반갑게 이야기하다가 그가 내 이름을 묻더군. 난 이름을 말했더니 그 농부는 엄청 기뻐하더군. 날 알아보는 사람이 이런 시골에도 있다니! 난 기뻐했는데 ......그 사람이 당신이 그 유명한 여행자 로빈슨 카루소군요!"(로빈슨 크루소로 알았던 것.) 라고 말하는 통에 할 말을 잃었네.... 이런 실화도 있고 카루소가 미국 공연하다가 어느 여성이 시비를 걸어 이게 법적 분쟁이 벌어졌는데 미국 어느 언론은 엔리코 카루소를 여성 소프라노라고 오보 기사를 내서 카루소를 경악하게 하던 적도 있다.[79]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작을 많이 남겼지만 전체 저작에 비하면 그 수가 많지 않게 느껴지기도 한다. 본 문서에도 그의 작품이 일부만 등재되어 있다.[80] 절판되었다.[81] 1827년 2월 21일, '괴테와의 대화'에 나옴.[82] Amerika, du hast es besser Als unser Kontinent, der alte, Hast keine verfallenen Schlösser Und keine Basalte. Dich stört nicht im Innern, Zu lebendiger Zeit, Unnützes Erinnern Und vergeblicher Streit. Benutzt die Gegenwart mit Glück! Und wenn nun Eure Kinder dichten, Bewahre sie ein gut Geschick Vor Ritter-, Räuber- und Gespenstergeschichten. (Zahme Xenien)[83] 정확하게는 실연의 아픔을 문학적 소양으로 삼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는 원동력으로 삼았고 그 과정에서 아픔을 이겨낸 것이다.[84] 그러나 출판 계약의 문제와 불법 복제판의 기승으로 정작 그가 베르테르를 통해 번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의 평생 수익 중 대부분은 바이마르 재상으로서 거둬들인 수익, 즉 공무원으로서의 임금이다. 다만 그런 공무원 활동이 가능했던 것도 작가로서의 명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85] 이는 괴테가 그 긴 이탈리아 여행 동안 남긴 처음이자 마지막의 연애담이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 도중 종종 한 여인에 대한 흥미로운 감정이나 두근거림을 묘사하기도 했지만 정확히 그 여인이 누구인지 묘사하지 않았고 그것은 단순히 순간적인 감정에 불과했다. 그러한 감정들은 일종의 순간적인 인상에 그친 정도로 귀엽다거나 외모가 출중하다, 대화가 흡족했다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묘사된 밀라노 아가씨와의 감정은 괴테에게도 굉장히 절절했던 것으로 보인다.[86] 수종은 독일에 흔한 로부르참나무였다.[87] 총 수감 인원 약 280,000명, 사망자 약 56,000명.[88] 괴테의 산책은 요한 페터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 1827년 9월 26일 자 기록에 나온다. 이날 괴테는 에터스버그에서 에커만과 함께 산책을 했는데, 폭풍우에 시달려 구부정하게 반쯤 자라다 만 참나무들을 뒤로 하고 풀밭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89] 1900년 라이프치히 출생.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당대 나치 독일에서는 정치범으로 간주되던 독일 공산당원이었기에 수감되었다. 전후에는 동독에서 작가로서 살았다.[90] 비슷한 경우로 언어학의 관점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단테 알리기에리는 각각 현지인들에게 작품이 어렵다고 느껴진다. 서사적 방향이 아니라 언어적 방향에서 접근할 경우 그들의 작품 역시 현대와 당대의 언어 그리고 시대적 배경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괴테와 마찬가지로 중고등학교에서 강제로 배운 뒤에 시험을 본다.[91] 단순히 위대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류 보편적인 무언가에 대한 탐구이자 역사성과 시대성에 대한 고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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