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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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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와의 대화
Gespräche mit Goethe
파일:괴테와의 대화.jpg
<colbgcolor=#dddddd,#010101><colcolor=#373a3c,#dddddd> 작가 요한 페터 에커만
장르 전기, 대화
언어 독일어
발매일 1부, 2부: 1836년 / 3부: 1848년

1. 개요2. 상세3. 내용
3.1. 현실
3.1.1. 창작성3.1.2. 계승3.1.3. 건강한 것과 병적인 것
3.2. 자연3.3. 소수의 것
3.3.1. 반(反) 민족주의3.3.2. 반(反) 민주주의
3.4. 종교 비판3.5. 데몬적인 것
3.5.1. 운명
3.6. 긍정3.7. 대지
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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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제자이자 조수였던 요한 페터 에커만이, 괴테를 처음 만난 1823년 6월부터 괴테가 죽은 1832년 3월까지 괴테와 나누었던 대화를 쓴 책이다. 『에커만과의 대화』라고 부르기도 한다.[1] 말년의 괴테가 무슨 말을 했고 무엇을 강조했는지를 괴테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비교적 상세하게 알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강점이다.

2. 상세

1부와 2부는 괴테가 죽기 전에 괴테의 감수를 받은 것으로 보이며, 괴테 사후인 1836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의 대부분이 괴테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고, 묘사 부분도 괴테의 문체를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괴테의 어조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래서 괴테의 며느리인 오틸리에는 나중에 이 책을 읽고서 "마치 시아버님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것 같다."라고 말할 정도였다.[2]

하지만 3부는 괴테가 죽은 후 16년이나 지난 1848년에야 출간되었는데, 3부는 괴테의 말을 그대로 옮겼다기보다는 에커만 스스로도 자신의 기억을 기반으로 재구성한 글이라고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3]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1부와 2부는 당시대 유명인사들에 대한 평가와 괴테가 생각하는 문학, 시, 연극 등의 정의와 개념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비해서, 3부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 민중과의 거리감 등 괴테가 오해받고 있는 부분에 대한 변명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필기에 근거하여 해당 내용을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약간의 왜곡이 있을지언정 비교적 괴테의 말을 성실히 옮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3. 내용

3.1. 현실

세상은 너무나 넓고 풍부하며 인생은 너무도 다양하기 때문에 시를 쓸 계기가 모자라는 일은 결코 없어. 하지만 모든 시는 어떤 계기에서 쓰여야 하네. 말하자면 시를 쓰는 동기와 소재가 현실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거지. 그 때마다의 특수한 경우가 보편적이고 시적이 되는 것은 시인의 손길을 거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네. 이런 의미에서 나의 모든 시는 그 어떤 일을 계기로 쓰였으며, 그 모두가 현실에서 자극을 받고 현실에 그 뿌리와 기반을 두고 있어. 그러므로 나는 허공에서 지어낸 시들을 존중하지 않는다네. [4]
특수한 것을 포착하고 표현하는 것 또한 예술 본연의 생명이라네. 보편적인 것에 머무른다면 누구나 우리를 따라할 수 있어. 하지만 특수한 것은 그 누구도 모방하지 못한다네. 왜냐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특수한 것이 공감을 얻지 못할까 염려할 필요는 없어. 모든 특징은 그것이 아무리 고유한 것이라 할지라도 보편성을 가지며, 돌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표현 대상도 마찬가지로 보편성을 가진다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반복되며, 이 세상에 단 한 번만 존재하는 건 없기 때문일세. [5]
나도 그에게 대답했다. 내가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지를 이미 느끼기 시작했으며, 지금까지의 관념적이고 이론적인 방향에서 서서히 벗어나 점점 더 순간적인 상태의 가치를 올바로 알게 되었다고 말이다. 괴테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좋지 않은 일이겠지. 자네는 그 방향만 고수하면서 언제나 현재에 밀착해 있게. 모든 상태, 그래 모든 순간이 다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이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참된 영원성을 대표하는 것이니 말일세." [6]
화제는 극장의 일로 바뀌었고 내일 『발렌슈타인』이 공연된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것을 실마리로 실러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실러라고 하면 묘한 기분이 든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그분의 위대한 희곡들의 몇몇 장면을 읽을 때면 진정한 애정과 탄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자연의 진실과 반대되는 것에 맞닥뜨리게 되면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습니다. 『발렌슈타인』조차도 예외가 아닙니다. 실러의 철학적인 경향이 그의 문학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왜나하면 그런 철학적인 경향 때문에 실러는 그 모든 자연보다도 이념을 더 높은 것으로 생각하고, 그럼으로써 자연을 파괴해 버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일어나야 한다는 식이지요. 그것이 자연에 적합하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7]
독일인은 정말 묘한 존재이지요! 어느 곳에서든 심오한 사상과 이념을 탐구하고 그것을 아무 데나 갖다 붙임으로써 인생을 필요 이상으로 어렵게 만들어버리니까요. 자, 그러니 이제 용기를 내도록 합시다. 감명받은 것에 몰입하고, 스스로 기뻐할 줄도 알며, 감동받을 줄도 알고 자기를 고양시킬 줄도 알며, 기꺼이 배우고, 그 어떤 위대한 것을 향하여 열정을 불태우고 용기를 낼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추상적 사상이나 이념이 들어 있지 않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부질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만은 부디 없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서 이렇게 묻곤 하지요. 『파우스트』에서 내가 어떤 이념을 구현하려 했느냐고 말이지요. 마치 나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어서 말해 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말입니다! 물론 '천국에서 이 세상을 거쳐 지옥까지'라는 정도로는 말해 줄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도 이념이 아니라 줄거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악마가 내기에서 진다는 것, 끊임없이 선을 향해 나아가고자 애쓰는 사람이 고통스러운 방황에서 구제된다는 것, 이런 것들은 물론 효과적인 사상이며 여러 가지를 해명하기에 적합한 사상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상이 작품 전체나 개개의 특수한 장면의 토대를 이루는 이념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내가 『파우스트』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풍성하고 다채로우며 다양하기 그지없는 사람을 단 한 줄기 이념이라는 가느다란 실로 엮어보려 했다면 물론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이 생겨났을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괴테가 계속해서 말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시인으로서 그 어떤 추상적인 것을 구상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나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인상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었습니다. 활기찬 상상력이 나에게 제공하는 감각적이고 생명감 넘치며 사랑스럽고도 다채로운 갖가지의 인상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인으로서 내가 한 일은 그러한 직관과 인상을 마음속에서 예술적으로 다듬고 형성하고 또 생생하게 묘사하여 나타나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내가 묘사한 것을 듣고 읽는 동안 나와 똑같은 인상을 받도록 하는 일 이외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으로서 그 어떤 이념을 묘사하려고 했을 때는, 통일성이 분명하고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짤막한 시로 그것을 표현하였습니다. 예컨대 「동물의 변형」이나 「식물의 변형」, 「유언」이라든지 그 밖의 시들 말입니다. 비교적 큰 부피의 작품으로서 의도적으로 일관된 이념에 따라 쓰고자 했던 것으로는 『친화력』이 유일할 테지요. 그래서 그 소설은 이해하기 쉬운 작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보다 더 잘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문학작품이란 불가해하면 할수록 그리고 이성으로 파악하기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좋다'고 말이지요." [8]
괴테에 따르면 문학은 '이념'보다는 '현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3.1.1. 창작성

"만초니에게 부족한 것은 다름 아니라 자기가 훌륭한 시인이며, 그러한 자신에게 어떤 권리가 주어져 있는지를 스스로가 모르고 있다는 점이네. 그는 역사를 지나치게 존경한 나머지 그것을 토대로 하여 자기의 작품을 기꺼이 부차적인 해설서로 만들어버렸지 뭔가. 그리고 그러한 해설을 통하여 자기가 역사의 세부적인 사항들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입증하고 있는 걸세. 여하간 그의 사실들은 역사적이겠지. 하지만 그가 그린 인물들의 성격은 그렇지가 못하네. 나의 토아스 왕이나 이피게네이아처럼 말이야. 그 어떤 시인도 자기가 묘사한 역사적 인물의 성격을 알지 못했으며, 설혹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이용할 수는 없었을 거네. 시인은 자기가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를 고려해야 하고, 거기에 따라서 인물들의 성격을 만들어야 하는 법일세. 만일 내가 에그몬트를 역사가 전하는 대로 한 다스의 아이들을 가진 아버지로서 그리려 했다면, 그의 무책임한 행동은 매우 불합리하게 보였겠지. 그러므로 나는 다른 에그몬트를 만들어야 했어. 역사적 줄거리와 나의 시적인 의도가 보다 나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그런 에그몬트로 말이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클레르헨이 말하는 '나의' 에그몬트인 거네. 그리고 역사가의 영역인 '사실'들만을 반복하려 든다면 시인의 존재란 도대체 무엇이겠나! 시인은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가능한 한 보다 고귀하고 나은 것을 보여주어야 하네. 소포클레스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가 그 위대한 작가의 고귀한 영혼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지. 마치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이 모두 셰익스피어의 영혼을 비추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그것이 옳은 길이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해. 그래 셰익스피어는 앞으로 더 나아가서 그의 로마인들을 영국인으로 만들어버렸는데,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의 나라의 국민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했을 테니까." 괴테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점에서 볼 때도 그리스인들은 위대했어.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기보다는 시인이 그것을 다루는 방식에 더 중점을 두었으니까 말이야. 다행히도 우리는 『필록테테스』라는 훌륭한 사례를 가지고 있네. 세 명의 위대한 비극 작가가 모두 그것을 소재로 삼았지만, 소포클레스가 최종적으로 가장 뛰어난 결과를 보여주었지. [9]
소재들이 현실에 기반해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에만 집착하면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는 것이 괴테의 주장이다.

3.1.2. 계승

예술이란 그 본질에 있어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걸세. 위대한 거장이 있다면, 우리는 그가 선배들의 장점을 잘 이용하였고, 바로 이 점이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다는 걸 알 수가 있지. 라파엘로와 같은 사람들도 땅에서 그냥 태어나는 건 아니네. 그들은 고대와 그들에 앞서서 이루어진 뛰어난 것들을 토대로 성장하는 것이네. 만일 그들이 자기 시대의 장점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그들에 대해서는 할 말이 거의 아무것도 없을 테지. [10]
나는 난로 가까이에 있는 괴테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선생님은 조금 전에 그리스인들은 개성적인 위대함을 가지고서 자연을 향했다는 훌륭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사람들이 그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깨달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네, 여보게." 하고 괴테가 말했다. "거기에 모든 것이 달려 있어. 사람이란 무언가를 이루려고 한다면 우선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네. 단테는 우리에게 위대해 보이지만, 사실 그의 배후에는 수백 년의 문화가 있네. 로트쉴트 은행은 화려하긴 하지만 그 많은 보물들을 얻기까지는 한 세대 이상이 걸렸어. 이러한 것들의 본질은 그 모두가 생각보다는 깊은 곳에 있네. 우리의 잘난 독일의 예술가들은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고, 개성의 허약함과 예술적 무능함으로써 자연을 모방하고는 그 무언가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지. 말하자면 그들은 자연 '아래에' 있었네. 무언가 위대한 것을 이루려면 그 전에 자신의 교양을 높이 쌓아야 하는 법이야. 그래야만 그리스 사람들과 같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실제적인 자연을 자신의 정신의 드높은 곳으로 이끌어 올릴 수 있고, 자연 현상을 다룸에 있어서 지향점으로만 남아 있는 그것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것이네." [11]
이 세상은 이제 상당한 나이에 도달했어. 수천 년 이래로 정말 많은 중요한 인물들이 살아왔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언급될 수도 없네. 나의 색채론도 완전히 새로운 건 아니야. 플라톤이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리고 다른 많은 뛰어난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나보다 앞서서 동일한 것을 발견하고 동일한 것을 말해 왔네. 그러나 나 또한 그것을 발견하여 다시 말하고 혼란에 찬 세계에 진리로 들어가는 입구를 다시 마련해 주려고 노력한 것, 그것이 나의 '공적'일세. 게다가 진리란 언제나 반복해서 말해져야만 해. 우리들을 둘러싸고 오류가 끊임없이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이지. 그것도 개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중에 의해서 말이야. 신문이나 백과사전, 학교와 대학, 도처에서 오류는 제 세상인 양 흐뭇해하고 있어. 자기 편에 서 있는 것이 다수라고 느끼면서 말이야. [12]
아무리 자기 멋대로 하려고 해도, 우리 모두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집단적 존재이네. 생각해 보게나.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우리의 소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적으며, 우리 자신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를 말일세! 우리 모두는 우리 앞에 살았던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로부터 받아들이고 배우어야 하네. 가장 위대한 천재라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내부로쿠터 끌어내려고 한다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될 테지. 그런데도 다수의 매우 유능한 사람들이 그 점을 깨닫지 못하고서 독창성이라는 미몽에 사로잡힌 채 반평생을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다니는 것이네. 나는 어떠한 대가로부터도 배우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의 천재성으로부터 얻었노라고 자랑삼아 말하는 예술가들을 보아왔지. 멍청이들! 우물 안 개구리들!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그들에게 세상이 밀어닥치고, 비록 그들이 멍청하더라도 거기에서 그 어떤 결과가 생겨난다는 것을 모르다니! 내 감히 말하지만, 그러한 예술가가 이 방의 벽들을 따라 지나가면서 내가 그 벽에 걸어놓은 몇몇 거장들의 스케치를 슬쩍 바라보기만 하더라도, 그는 보다 나은 다른 사람이 되어 여기서 걸어나가게 될 거네. 약간의 재능만이라도 있다면 말이야. 인간들의 뛰어난 점이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수단을 자기 자신에게로 끌어당겨서 우리들의 보다 높은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할 수 있는 힘과 경향 그 자체가 아니라면 말일세. 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느끼는 것을 겸손하게 말할 수 있네. 사실 나는 긴 생애 동안 여러 가지 일을 했고, 어쨌든 보람을 느껴도 좋을 만한 일을 이루기도 했지.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본래 나의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게 어디 있겠나. 보고 듣고 분간하고 선택하고, 본 것과 들은 것에다가 약간의 정신으로 생기를 불어넣고 어느 정도 숙달된 솜씨로 재현해 내는 능력과 경향을 제외한다면 말이야. 나의 작품들은 결코 나 자신의 지혜에 의해서만 생겨난 것이 아니라, 나의 외부에 있으면서 작품의 재료로 주어졌던 수천의 사물과 인물에 힘입은 것이네. 바보와 현명한 자, 총명한 자와 고루한 자, 어린아이와 청년들, 그리고 원숙한 노인들. 그 모두가 자신의 감각으로 느낀 것, 그들이 생각한 것, 그들이 살아오고 활동하고 축적한 경험들을 나에게 말해 주었지. 그러므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하여 씨를 뿌린 것을 손으로 움켜쥐거나 수확하는 일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던 것이네. 그러므로 근본적인 의미에서 어떤 사람이 그 무슨 일을 자기 자신의 힘으로 아니면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이루었는지를 따진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네. 자기 자신을 통해서 아니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 작용했는지 묻는 것도 마찬가지로 무의미하네. 다만 중요한 것은 '뜻을 높게 두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재능과 끈기를 발휘하는' 걸세. 그 밖의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어. [13]
완전히 독창적인 것에 집착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게 괴테의 생각이다. 자신만의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사회와 과거로부터 겸손하게 배울 줄 알아야 하고, 이것이 전제된 상태에서 뜻을 높게 두고 그 뜻을 실행할 수 있는 재능과 끈기를 발휘할 줄 아는 것이 필요하다.

3.1.3. 건강한 것과 병적인 것

이들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어 화제는 최근의 프랑스 시인들 그리고 '고전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의 의미로 넘어갔다. "이 두 개념의 관계를 그런대로 나타낼 새로운 표현이 떠올랐네." 하고 괴테가 말했다. "고전적인 것은 건강한 것, 낭만적인 것은 병적인 것이라고 부르겠네. 예컨대 니벨룽겐의 노래와 호메로스의 작품은 고전적인 것이네. 왜냐하면 이 둘은 건강하고 힘차기 때문이지. 대부분의 현대 작품은 그것이 새로워서가 아니라 허약하고 병든 것이기 때문에 낭만적인 걸세. 그리고 고대의 작품은 그것이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강력하고 힘차며 신선하고 건강하기 때문에 고전적인 것이네. 그러한 특성에 따라 고전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을 구분한다면 우리는 곧 그 진상을 이해하게 되는 것일세." [14]
"그런데 또 자네도 알게 되겠지만 이미 앞의 막들에서도 고전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이 끊임없이 암시되고 있거나 또 이야기도 되고 있는데, 그것은 비스듬히 경사진 길을 오르듯이 헬레나에게까지 올라가기 위함이네. 그곳에서 이 두 개의 문학 형식이 분명히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일종의 화해를 이루려 하는 걸세." 괴테가 계속해서 말했다. "프랑스 사람들도 이제는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 올바르게 생각하기 시작하고 있다네. 그들은 말하네. '고전적인 것이든 낭만적인 것이든 다같이 좋은 것이다. 다만 중요한 점은 이 형식들을 이치에 맞게 사용하여 거기서 뛰어난 것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두 형식을 다 엉성하게 사용한다면, 그 어느 쪽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라고 말일세, 이것은 아주 당연한 이야기고 좋은 말이라고 생각되네. [15]
이 속(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에는 다소간 엉뚱한 것도 있지. 하지만 나는 그것을 특수한 대상에서 분리시켜 보편적인 것 속으로 편입시킴으로써, 독자가 여러 연관을 놓치지 않도록 배려하였네. 하지만 그 본래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를 걸세. 그렇지만 나는 모든 것을 고대적인 정신에 따라 명확한 윤곽으로써 나타내려고 했고, 낭만적인 기법에나 적합할 애매하고 불명확한 것은 없애려고 노력했네." 괴테가 이어서 말했다. "고전문학과 낭만문학이라는 개념은 지금은 온 세계에 널리 퍼져서 여러 가지 논쟁과 분열을 일으키고 있지만, 원래는 나와 실러로부터 비롯한 것이네. 나는 문학에 있어서 객관적인 창작방식을 원칙으로 삼아 그것만 인정하려고 했네. 그러나 실러는 완전히 주관적인 방식을 원칙으로 삼았고, 자신의 원칙이 옳다고 여기면서 나에게 맞서 자신을 방어하려고 소박문학과 성찰문학에 관한 논문을 썼던 걸세. 그의 논증에 따르면 실은 나도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낭만적이며, 나의 『이피게네이아』도 감정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믿는 만큼 결코 고전적이지 않고 고대적인 정신에 따른 것도 아니라는 것일세. 그리고 슐레겔 형제가 이 이념을 받아들여 더욱 발전시켰으므로 지금은 이것이 전 세계에 널리 퍼져서 누구나 고전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에 관해서 토론하고 있는 거네. 오십 년 전만 하더라도 아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지." [16]
괴테는 고전적인 것을 건강한 것, 낭만적인 것을 병적인 것으로 정의한다.

3.2. 자연

그 견해에 대해서는 반대해야겠군요. 나로서는 자연이란 언제나 풍성한 것이며 심지어는 낭비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17]
자연과학 연구에 정진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 모습을 결코 알지 못했을 거야. 자연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는 순수 직관과 순수 사고, 감각의 오류와 오성의 오류, 성격의 허약함과 성격의 강력함에 좌우되고 말지. 모두가 다소간 유연성이 있고 가변적이며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어. 그러나 '자연'에게만은 농담이 통하지가 않아. 자연은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진지하며 언제나 엄격하고 언제나 옳다네. 그러니 결함과 오류는 언제나 인간의 것일 뿐이야. 자연은 어중간한 자를 경멸하며, 다만 전력을 다하는 자, 진실한 자, 순수한 자에게만 복종하면서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네. 오성만으로는 자연에 접근할 수가 없어. 인간은 자신을 최고의 이성에로 이끌어 올려야 하네. 그래야만 근원현상들(물리적인 것, 윤리적인 것을 막론하고)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신성에 도달할 수 있는 걸세. 신성은 그러한 근원현상들 뒤에 자리 잡고 있으며 또 그러한 근원현상들은 신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네. 그러나 신성은 살아 있는 것 속에서만 작용하며 죽은 것 속에서는 작용하지 않는다네. 신성은 생성되는 것과 변형되는 것에만 있으며 생성된 것 그리고 굳어버린 것 속에는 없어. 그러므로 신성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성 또한 생성되는 것, 살아 있는 것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네. 반면에 오성은 생성된 것, 굳어버린 것을 그 대상으로 삼지. 유익하게 이용하기 위해서 말이야. [18]
자연에 대한 연구보다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주는 것은 없네. 자연의 비밀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지만 우리 인간들은 점점 더 깊이 그것을 들여다볼 권리를 가지고 있는 거네. 하지만 그래도 결국은 불가해한 것으로 남게 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자연은 우리에게 영원한 매력을 가지는 걸세. 그리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자연에로 다가가서 새로운 통찰과 새로운 발견을 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 것이네. [19]
자연은 누구에게나 자신의 비밀을 보여주는 건 아니야. 오히려 자연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장난기가 많은 처녀와도 같네. 온갖 애교로 남자를 유혹하지만, 막상 붙들거나 소유하려고 하면 우리 남자들의 팔에서 빠져나가 버리는 처녀들 말이네. [20]

3.3. 소수의 것

그러자 괴테가 대답하기 위해 나를 창가로 데려갔다. "여보게, 많은 점에서 당장 자네에게 유익하고 앞으로도 살아가는 동안 도움이 될 말을 해주겠네. '나의 작품은 대중화될 수가 없네.' 그러니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거나 노력하는 자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셈이지. 나의 작품은 대중을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비슷한 것을 원하고 추구하며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네." 그는 계속해서 말하려고 했으나 한 젊은 부인이 들어와서 이야기가 중단되었고 결국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고, 그 후에 곧 모두들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이 자리에서 오간 이야기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괴테가 한 말의 의미를 골똘하게 되새기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와 같은 작가, 그러한 고귀한 정신, 그러한 광대무변한 천분(天分)을 대중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의 아주 작은 부분마저도 대중화되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유쾌한 사내아이들과 사랑에 빠진 소녀들이 부르는 노래도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모든 특출한 것들은 원래 다 그렇지 않은가? 모차르트는 대중적인가? 라파엘로는 어떤가? 세상은 본래부터 한없이 열정적인 정신적 삶의 위대한 원천에 대해 도처에서 야금야금 핥아먹기만 하고 있지 않은가? 이따금 조금씩 살짝 낚아채어 잠시 동안만이라도 귀한 양분을 취하게 되면 기뻐하면서 말이다. 나의 생각은 계속되었다. 그래 괴테의 말이 옳아. 그의 작품의 영역은 너무나 방대해서 대중화될 수가 없어. 그리고 그의 작품은 비슷한 것을 추구하거나 비슷한 이념을 가지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보면 세계와 인류의 심원한 깊이로 몰입해 들어가기를 원하면서 그의 길을 뒤따라가는 탐구하는 인간들을 위한 것이고, 좁게 보자면 영혼의 환희와 고통을 시인에게서 찾고자 하는 열정적인 도락자(道樂者)들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또한 표현 방식과 대상을 어떻게 예술적으로 다룰 것인가를 배우고자 하는 젊은 시인들을 위한 것이야. 또한 판단의 원칙이라든지, 즐겁게 읽힐 수 있는 흥미로우면서도 품위 있는 평론은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그 모범을 찾는 비평가들에게도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그의 작품은 예술가를 위한 것이기도 해. 그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보자면 예술가의 정신을 깨우쳐주고, 구체적으로 보자면 어떠한 대상이 예술적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표현하고 무엇을 표현하지 말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니까 말이야. 또한 그의 작품은 자연과학자에게도 유용한 것이지. 이미 발견된 위대한 법칙들을 거기서 전해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방법을 배우기 때문이야. 선량한 정신이 자연으로 하여금 그 비밀을 드러내도록 하려면 그 자연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하는 방법 말이다. 이처럼 학문과 예술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작품들이 제공하는 풍성한 식탁의 손님이 된다. 그리고 그 영향 속에서 그들은 위대한 빛과 생의 보편적인 원천, 말하자면 그들이 물을 길어왔던 샘을 확인하는 것이다. [21]
모든 위대한 것과 총명한 것은 소수에게만 존재한다네. 국민과 왕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위대한 계획을 고독하게 수행한 장관들이 있었어. 이성이 대중화된다는 것은 바랄 수도 없는 일이야. 열정이라든지 감정은 대중의 것이 될 수 있겠지. 하지만 이성은 언제나 소수의 뛰어난 자들의 것일 뿐이네. [22]

3.3.1. 반(反) 민족주의

요즈음 들어서 더욱더 잘 알게 되었지만 시라는 것은 인류의 공동재산이며,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수백의 인간들 속에서 생겨난 것이네. 어떤 작가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잘 쓰고, 조금 더 오랫동안 다른 사람보다 두각을 나타낸다는 그 정도가 전부일 뿐이야. 그러므로 폰 마티손도 자기야말로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나로서도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지. 오히려 시적 재능이라는 건 그렇게 진귀한 게 아니며, 좋은 시를 썼다고 해서 자만할 만한 특별한 까닭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아야 하네. 그러나 우리 독일인은 자신의 환경이라는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너무나 쉽게 현학적인 자만에 빠지고 말겠지. 그래서 나는 다른 나라의 책들을 기꺼이 섭렵하고 있고, 누구에게나 그렇게 하도록 권하고 있는 걸세. 민족문학이라는 것은 오늘날 별다른 의미가 없고, 이제 세계문학의 시대가 오고 있으므로, 모두들 이 시대를 촉진시키도록 노력해야 해. 그러나 이처럼 외국문학을 존중한다 하더라도 그 어떤 득수한 것에 매달려서 그것을 모범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지. 예컨대 중국의 작품이 모범적이라든가, 혹은 세르비아의 작품이, 혹은 칼데론이, 혹은 니벨룽겐이 모범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네. 오히려 그 어떤 모범이 필요할 때는 언제라도 고대 그리스인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네. 그들의 작품에는 항상 아름다운 인간이 그려져 있으니까. 그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단지 역사적으로만 검토를 하면서 그중 좋은 것을 가능한 한 받아들이면 되는 거네. [23]
시인이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치려면 하나의 당파에 투신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는 시인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걸세. 그는 자유로운 정신과 편견 없는 전망에 이별을 고하고 그 대신 편협한 태도와 맹목적인 증오라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써야만 하기 때문이지. 시인은 인간으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그 조국을 사랑하겠지. 그러나 그의 시적인 힘과 시적인 활동의 조국은 선이며 고귀함이며 아름다움이어서 특별한 주라든지 특별한 나라에 한정되어 있지 않네. 어디에서든 선과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대로 그것을 붙들어 묘사하는 걸세. 그 점에서는 독수리와 닮았네. 독수리는 여러 나라의 상공을 자유롭게 내려다보고 날아다니다가 쏜살같이 내려가서, 자기가 붙잡으려고 하는 토끼가 프로이센 지방을 달리고 있든 작센 지방을 달리고 있든 상관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24]
"나는 시를 쓰면서 짐짓 허세를 부린 적은 결코 없었네. 체험하지 못한 것, 뼈저리게 느끼지 못했던 것이라면 시로 쓰지도 입에 담지도 않았네. 연애시를 쓴 것도 내가 사랑에 빠져 있을 때뿐이었네. 그러니 증오심도 없는 터에 어떻게 증오의 시를 쓸 수 있었겠나! 그리고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나는 프랑스인을 미워하지 않았네. 물론 프랑스인의 지배에서 벗어났을 때는 하느님께 감사드렸지만 말이야. 문화냐 야만이냐를 중요하게 여기는 내가, 세계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뛰어난 민족의 하나이며, 또한 나 자신의 교양의 커다란 부분을 힘입고 있는 민족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단 말인가!" 괴테는 계속해서 말했다. "대체로 민족적 증오심이란 독특한 것이네. 자네도 알다시피 문화적으로 가장 낮은 단계에 있을 때 그것이 가장 격심하게 나타난다네. 그러나 민족적인 증오심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어느 정도 민족이라는 테두리를 넘어서서 이웃 나라의 행복이나 불행을 자기 나라의 것처럼 느끼는 그런 단계가 있는 법이지. 나의 천성에는 그러한 문화의 단계가 맞는다네. 더욱이 나는 내 나이 예순이 되기 훨씬 이전부터 그러한 단계를 실천하려고 줄곧 애를 써왔네." [25]

3.3.2. 반(反) 민주주의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대한 그의 견해는 정말 뛰어난 것이야. 사람들은 귀족 정치와 민주정치에 관해 언제나 왈가왈부하고 있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다음처럼 아주 간단한 것이네. 젊은 시절, 즉 우리가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거나 평화로운 소유를 제대로 평가할 줄 모르는 시절에 우리는 민주주의자이지.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소유하게 되면 우리는 이 소유가 안전하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들과 후손들이 그 습득물을 아무런 탈 없이 누릴 수 있기를 바라게 되는 거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이가 들게 되면 언제나 예외 없이 귀족주의자가 되는 걸세. 젊은 시절에 다른 생각을 가졌든 말든 상관없이 말이야. [26]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프랑스 혁명의 친구가 될 수 없었네. 혁명의 무자비한 공포가 너무 절절하게 느껴졌고 시시각각 나를 격분시켰기 대문일세. 반면에 혁명의 유익한 결과에 대해서 나는 당시로서는 알아차릴 수가 없었던 거네. 또한 내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사람들이 독일에서도 인위 적인 방식으로 유사한 장면들을 초래하려고 했던 점이네. 프랑스에서의 그러한 장면들은 사실 거대한 필연성의 결과였는데도 말이야. 나는 또한 전제적인 지배의 편도 아니었네. 게다가 그 어떤 거대한 혁명도 결코 민중의 책임이 아니라 통치의 책임이라는 사실도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지. 위정자는 지속적으로 정의롭게 통치하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면서 시대에 맞게 상황을 개선해 나가야 하네. 그렇게 하여 아래로부터 역사적인 필연성이 강요될 때까지 내버려두는 일만 없다면 혁명이란 전혀 불가능한 것이겠지. 그런데 내가 혁명을 증오했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나를 '기존 체제의 벗'으로 불렀다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사절하고 싶은 애매한 칭호이네. 기존 체제가 모든 점에서 뛰어나고 훌륭하고 정의롭다면 나는 그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겠지. 그러나 많은 훌륭한 점과 아울러 많은 잘못된 것, 정의롭지 못한 것, 완전하지 못한 것이 함께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기존 체제의 벗이 이따금 낡아 빠진 사악한 체제의 벗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겠나. 그러나 시대라는 것은 영원한 발전의 도상에 있는 것이고, 인간의 일들이란 오십 년마다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네. 그러므로 1800년에는 완벽했던 제도라 하더라도 1850년에는 이미 결함을 가지게 된다고 보아야겠지. 거듭해서 말하는 바이지만, 한 국가에 유익한 것은 그 나라의 고유한 핵심과 국민의 보편적 요구로부터 생겨난 것뿐이네. 다른 나라의 것을 모방하지 않고서 말이야. 왜냐하면 특정한 시대의 단계에서 한 민족에 유익한 자양분이 될 수 있는 것이 다른 민족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네. 다른 나라의 변혁을 도입하려는 모든 시도는 만일 그 필요성이 자기 나라의 깊은 본질에 뿌리박고 있지 않은 경우라면 어리석기 짝이 없고, 결국 이러한 종류의 모든 의도적인 혁명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된다네. 왜냐하면 그러한 혁명들에는 서투른 행동을 제지하는 하느님이 개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지. 한 민족이 거대한 개혁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하느님도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 개혁을 성공시킬 것이네. 하느님은 그리스도와 최초의 제자들과 함께 있었음이 분명하네. 왜냐하면 여러 민족들이 사랑이라는 새로운 가르침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하느님은 또한 루터와도 함께 하셨음이 분명하네. 왜냐하면 성직자 제도에 의해 일그러진 가르침을 정화시킬 필요가 있었던 게지. 그러나 내가 언급한 이 두 위대한 힘은 기존 체제의 벗이 아니었네. 오히려 이 두 힘은 낡은 누룩을 털어내야 하고, 더 이상 거짓과 불의와 결함이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던 걸세. [27]
누구든 여론을 좇다보면 너무도 쉽게 그릇된 입장에 빠지고 만단 말이야! 나는 지금까지 민중에 반하여 죄를 지은 기억이 없는데, 이제 와서 내가 결코 민중의 벗이 아니라는 말을 들어야 하다니. 물론 나는 혁명을 내세우는 천민의 벗은 아니야. 그들은 약탈과 살인과 방화를 일삼으면서도 공공복지라는 거짓 간판을 내걸고서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이기적인 목적에만 눈이 어두워 있지 않나. 나는 그런 무리들의 편이 될 수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이 15세의 편도 아니네. 여하간 나는 어떠한 폭력적 혁명도 찬성하지 않네. 그것으로 좋은 결과가 얻어지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파괴도 초래되기 때문이지. 나는 혁명을 일으키는 사람이나 그 원인을 조성하는 사람들을 다 같이 미워한다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민중의 벗이 아니란 말인가?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지는 않겠지? 자네도 알다시피 미래에 무언가를 약속해 주는 개혁이라면 나는 언제든 환영이야. 하지만 지금 말한 바처럼, 폭력적인 것이나 돌발적인 것은 모두 내 마음에 들지 않아. 왜냐하면 그것들은 부자연스럽기 때문이야. 나는 식물 애호가일세. 나는 우리 독일의 자연이 선사할 수 잇는 꽃 가운데서 가장 완전한 장미를 사랑하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4월 말경인 지금 벌써 나의 정원에 장미꽃이 피기를 고대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아. 지금으로서는 움트기 시작하는 푸른 잎을 보기만 해도 만족이며, 잎이 한 잎 한 잎 싹터 주일마다 줄기를 이루어 성장해 가는 것을 보기만 해도 족하네. 5월에 봉오리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게 되면 기쁘고, 6월에 마침내 고대하던 장미가 찬란하게 사방으로 향기를 풍기며 만발하는 것을 보면 행복해 진다네. 하지만 그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수 없는 사람이라면 온실에나 가봐야 할 테지. [28]
화제는 곧 다른 일들에로 넘어갔고, 괴테는 생시몽주의자들에 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그들의 교의의 주된 방향은 모든 개인은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 일해야 하며, 그것이 개인 자신의 행복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라는 쪽으로 모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고 내가 대답했다. 그러자 괴테가 말했다. "내 생각으로는 모든 개인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우선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해야 하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마침내 전체의 행복이 틀림없이 생겨나는 거네. 게다가 그 교의는 내가 보기에 전적으로 비실제적이며 실천 불가능한 것이네. 모든 자연과 모든 경험에 반하는 것이며, 수천 년 이래의 모든 일들의 진행과정과 모순되는 것이니까 말이야.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 모두가 자신이 맡은 일의 테두리 내에서 정직하고 유능하게 행동한다면 전체의 안녕은 저절로 이루어지네. 나는 작가로서의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면서 대중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어떻게 전체를 이롭게 할까?라고 물은 적은 결코 없었네. 오히려 언제나 자신의 통찰력을 키우고 자기 인격의 질을 높이면서, 내가 훌륭하고 진실하다고 깨달은 것만을 표현하고자 늘 애를 써왔을 뿐이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이 보다 커다란 범위에서 영향을 미치고 이로운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네. 다만 이것이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전적으로 필연적인 일의 과정, 즉 자연적인 힘들의 작용에 있어서 언제나 일어나는 것과 동일한 과정이라는 점을 알아야 하네. 만일 내가 작가로서 거대한 대중이 원하는 바를 목표로 삼고 그것을 충족시키려 했다면, 잡다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그들을 조롱이나 했겠지. 저 복도 많은 코체부처럼 말이야." "그 점에서는 아무 이견이 없습니다." 하고 내가 대답했다. "그러나 단순한 개인으로서 누리는 행복만이 아니라 국가의 시민으로서 그리고 거대한 전체의 일원으로서 누리는 행복도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국민 전체를 위한 최대한의 행복 성취를 원리로 삼지 않는다면, 입법은 도대체 어떠한 토대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걸까요?" 괴테가 대답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반대할 아무런 이유가 없네. 그러나 그 경우에는 극소수의 선택된 자들만이 자네가 말하는 그 원리를 이용할 수 있을 걸세. 비유하자면, 군주와 입법자에게 맡겨진 처방전이라고나 할까. 이 경우에도 물론 법이란 것이 주제넘게 행복을 가져오겠다고 자처하기보다는 악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노력해야겠지." 내가 이어서 말했다. "그 두 방향은 아마도 하나의 지점에서 서로 만날 테지요. 예컨대 열악한 도로 사정은 커다란 악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국가의 군주가 나서서 저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좋은 도로를 만든다면 커다란 악이 제거될 뿐만 아니라 국민에게 커다란 행복이 주어지는 셈이 아니겠습니까.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느리게 진행되는 재판도 커다란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군주가 나서서 구두로 공적인 처방을 명하여 재판의 신속한 진행을 보장한다면, 또한 커다란 악이 제거되고 다시 커다란 행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괴테가 말을 가로막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네. 그러나 몇 가지의 악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두세. 그래야만 인간들이 자신의 힘을 계속 발휘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남아 있게 될 테니 말이야. 그러나 나의 원칙은 잠정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네. '아버지는 자기 집을, 수공업자는 자신의 고객을, 성직자는 이웃간의 사랑을 돌보고, 경찰은 시민들의 기쁨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이네!" [29]

3.4. 종교 비판

마찬가지로 철학자도 어떤 종류의 이론, 이를테면 영혼불멸설과 같은 것을 입증하기 위해 종교의 명성에 의지할 필요는 없네. 인간은 불멸을 믿어야 하며, 그럴 권리도 가지고 있고, 자신의 본성에도 들어맞는 것이므로 종교의 약속을 믿어도 좋아. 그러나 철학자가 우리들의 영혼 불멸을 전설로부터 이끌어내려 한다면, 그건 정말이지 허약하기 짝이 없고 그다지 의미도 없는 것이 되고 마네. 내가 볼 때 영혼 불멸에 대한 신념은 활동의 개념에서 생겨나는 것일세. 왜냐하면 내가 인생의 종말까지 쉬지 않고 활동하는 가운데, 현재의 생존 형식이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하게 된다면, 자연은 반드시 나에게 다른 생존의 형식을 주도록 되어 있기 때문일세. [30]
즉 모든 종교는 신 자신에 의해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거대한 대중들의 요구와 이해가능성을 감안하여 뛰어난 인간들이 만든 작품의 형태로 생겨났다. 만일 종교가 신의 작품이라면,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작품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도달 불가능한 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교양 수준이 높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종교는 도달 불가능한 것을 특별한 신들의 형태로 구체화시켜 표현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구체적으로 표현된 존재들은 제한된 존재였으므로, 그 전체 연관 속에는 언제나 공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리스인들은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운명의 이념을 고안하였다. 그들은 이 운명의 이념을 그 모든 것의 상위에 올려놓았으나 이것 자체가 다시 도달 불가능한 그 어떤 다양성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완결되기보다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유일신을 생각하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내부에서 완전하다고 느꼈던 그 모든 특성을 그 하느님에게 부여하였다. 그리하여 그 하느님은 그리스도 자신의 아름다운 내면의 본질과 같게 되었다. 이제 하느님은 그리스도처럼 선의와 사랑응로 가득하게 되었고, 착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헌신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대상이 되었다. 또한 하느님은 착한 사람들이 하늘나라와 가장 내밀하게 연결될 수 잇는 이념을 가장 완전하게 보여주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이름 붙인 위대한 존재는 인간들에게서뿐만 아니라 풍성하고 힘찬 자연과 강력한 세계적 사건 속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므로 인간적 특성에 따라 형성되었던 하느님의 관념은 이제 충분하지 않게 되었다. 곧 그 불충분함과 모순에 부닥치게 된 사려 깊은 자들은 회의에 빠지거나 심지어는 절망에 이르게 되었다. 이 사람들은 억지 핑계를 갖다 대며 자신을 달랠 정도로 초라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보다 고귀한 관점에로 자신을 끌어올릴 정도로 위대하지도 않았다. 괴테는 그러한 관점을 일찌감치 스피노자에게서 발견하였는데, 그는 이 위대한 사상가의 견해가 자신의 젊음의 요구에 그대로 들어맞는 것을 깨닫고는 기뻐해 마지않았다. 괴테는 스피노자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였으며, 스피노자를 준거로 하여 자신의 입장을 확고하게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관점들은 주관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하는 하느님의 활동과 표현 속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관점들은 괴테가 나중에 심오한 세계 탐구와 자연 탐구에 몰두하면서 불필요한 것으로 폐기처분하였던 껍질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들은 오히려 오랜 세월에 걸쳐 변함없이 건강한 방향으로 계속해서 자라가다가 마침내 풍요로운 인식의 꽃에 도달하게 되는 그 어떤 식물의 움트는 싹이라든지 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적대자들은 그에게 신앙이 없음을 자주 비난했다. 그러나 괴테는 그들 식의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은 그에게는 너무나 편협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의 신앙을 표명하면, 그들은 놀라 마지않겠지만 그의 신앙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괴테 자신은 지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글과 구두상의 발언의 요지는, 탐구 불가능한 것이 존재하며 인간은 다만 그것에 근접해 가는 흔적과 예감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자연과 우리 인간은 모두 신성으로 차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지상에 머무를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살고 활동하고 존재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법칙에 따라 고통받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법칙들을 이행하고 또 그 법칙들은 우리에게 적용된다. 우리가 그 법칙들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빵 굽는 사람의 존재를 모르고서도 아이는 과자를 맛있게 먹고, 참새도 버찌가 어떻게 자랐는지는 생각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맛있게 먹지 않는가. [31]
"성서의 일들을 바라보는 데는 두 가지 관점이 있네. 그 하나는 일종의 근원종교, 즉 신으로부터 직접 비롯하는 순수한 자연과 이성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네. 이러한 관점은 신이 내린 천부적 자질을 가진 인간들이 존속하는 한 영원히 변함없이 지속되면서 인정을 받겠지.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선택받은 자들만의 것이며, 일반화되기에는 너무나 높고 고귀한 것이네. 다른 하나는 교회의 관점으로, 이는 보다 인간적인 성격의 것이네. 이 관점은 허약하고 불안정하며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 하지만 이러한 관점도 허약한 인간들이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변화하며 지속될 것임은 분명하네. 완전무결한 신의 계시에서 나오는 빛은 너무나 순수하고 눈부신 것이어서 가련하고 허약한 인간들로서는 감달할 수도 없지. 그러나 교회가 선량한 중개자가 되어 그 빛의 세기를 온화하게 누그러뜨려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다수 사람들의 정서를 순화시켜 줄 수 있는 거지. 기독교 교회는 요컨대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계승자로서 인간적인 죄악의 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짐으로써 매우 거대한 권능을 가진 존재가 되었지. 그리고 이러한 권능과 이러한 명망을 유지함으로써 교회 체계를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성직자들의 주된 관심사이네. (중략) 어쨌든 성경 내용의 진위 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정말 딱한 노릇이네. '진짜'라는 것은 가장 순수한 자연 그리고 가장 순수한 이성과 조화를 이루면서 오늘날까지 우리 인간을 최고도의 발전으로 이끌어주는 저 완벽한 탁월성 이외에 그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위조된 것이란 부조리한 것, 아무 결실도 맺지 못하는 공허하고 어리석은 것에 다름 아니며, 최소한 좋은 것은 결코 아닌 터에 말이야! 성서 각 편의 진위 여부를 완전한 진본이 우리에게 전해졌는가를 기준으로 결정한다면, 복음서의 일부는 의심받을 수밖에 없네. 즉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직접적인 견해나 체험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구전되어 오던 것을 나중에서야 기록한 것이네. 그리고 마지막의 요한복음도 사도 요한이 아주 고령에 쓴 것이므로 의심받을 만하지. 하지만 나는 네 개의 복음서를 모두 진본으로 확신하네. 왜냐하면 그 복음서들에는 그리스도라는 인물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지상에 출현한 신성만이 보여줄 수 잇는 숭고함이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네. 만일 누가 나의 천성 속에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겟네. 단연코 그렇다!라고. 나는 도덕성의 최고 원리를 신성하게 계시하는 존재로서의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겠네. 또한 태양을 숭배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다시 한번 대답하겠네. 단연코 그렇다! 라고 말일세. 태양 역시 하느님의 계시이며, 우리 지상의 존재들이 볼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니까 말이야. 나는 태양 속에서 볼 수 있는 그 빛과 창조력을 경배한다네. 우리 모두는 바로 그것 때문에 살아가고 활동하고 존재하며, 모든 동식물도 그 점에서는 우리와 마찬가지라네. 그러나 사람들이 나에게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의 엄지손가락 뼈 앞에 머리를 수그릴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겠네. 제발 내버려두시오. 그런 어리석은 짓거리는 신물이 나오!라고 말일세. 사도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대 정신을 억압하지 말라! 하고 말이네. 교회의 규약들에는 어리석은 요소들이 많이 들어 있네. 하지만 교회는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머리를 수그리고 자진해서 지배를 받는 우매한 대중이 필요한 거네. 그러므로 많은 급료를 받는 고위 성직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 하층민들이 각성을 하는 거네. 성직자들은 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대중들이 성서마저도 멀리하도록 해왔지. 교구의 가난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고액의 봉급을 받는 주교들의 제후와도 같은 호사스러움에 대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제후와도 같은 주교가 여섯 필의 말이 끄는 의전마차를 타고 요란하게 행차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복음서에는 제자들과 함께 겸손하게 걸어갔던 그리스도의 가난함과 곤궁함이 여실하게 나타나 있으니 말일세!" [32]
신교도들이 그 정신적 발전에 있어서 힘차게 앞서 나아가면 갈수록, 구교도들도 그만큼 더 빨리 그 뒤를 좇아갈 테지. 그들은 점점 더 위세를 더해 가는 시대의 위대한 계몽 정신을 느끼면서 그들 나름의 방식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네. 그리하여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하나로 귀결되겠지. 또한 지긋지긋한 신교의 종파주의도 막을 내리게 될 것이고, 아울러 아버지와 아들, 형제 자매 간의 증오심과 적대의식도 그치게 될 테지.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순수한 가르침과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한다면 누구든 인간으로서 위대하고 자유롭다고 느낄 것이며 이런저런 외형적인 예배의식 따위에는 더 이상 별다른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차츰차츰 말씀과 신앙의 그리스도교에서 벗어나 의지와 행동의 그리스도교로 발전하게 될 거네. [33]

3.5. 데몬적인 것

오늘 괴테와 함께 식사를 했는데, 곧바로 데몬의 개념이 다시 화제에 올랐다. 괴테는 보다 자세한 설명을 위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데몬적인 것이란 오성이나 이성에 의해서는 해명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네. 그것은 나의 천성 속에는 들어 있지 않지만 나는 그것에 지배되고 있지." 내가 말했다. "나폴레옹은 데몬적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었네." 하고 괴테가 말했다. "더군다나 최고도로 데몬적인 사람이었기 떄문에 그 누구도 그에게 비교될 수가 없을 정도였지. 돌아가신 대공께서도 마찬가지로 데몬적인 분이었네. 무한한 행동력에 넘치고 쉴 줄을 모르셨기 때문에 자신의 나라가 그분에게는 너무나 작았네. 물론 아무리 큰 나라라도 그분에게는 성이 차지 않았겠지. 그리스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데몬적인 사람을 반신의 대열에 포함시켰던 것일세." 내가 물었다. "데몬적인 것은 사건에서도 나타나지 않을까요?" "특히 그렇다네." 하고 괴테가 대답했다. "우리의 오성이나 이성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나타난다네. 여하간 데몬적인 것은 자연 전체에 걸쳐서,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가리지 않고,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걸세. 많은 생물들은 전적으로 데몬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또 부분적으로 데몬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들도 적지 않네." 내가 다시 물었다. "메피스토펠레스도 데몬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닐세." 하고 괴테가 대답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너무도 부정적인 존재야. 데몬적인 것은 전적으로 긍정적인 행동력 속에서 나타는 것이네." 괴테가 계속해서 말했다. "예술가들로 말하면 화가들보다는 음악가들에게서 많이 나타나지. 파가니니에게서는 데몬적인 것이 아주 뚜렷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에 그처럼 커다란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일세." 나는 이 모든 설명을 듣고 너무 기뻤다. 이제 괴테가 데몬적인 것이란 개념으로 무성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보다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34]
괴테가 말했다. "문학에는 전적으로 데몬적인 그 어떤 것이 있네. 무의식적인 작품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지. 그렇나 작품은 어떠한 오성이나 이성으로도 미치지 못하며, 또 그런 만큼 상상을 뛰어넘어 압도적인 영향을 미친다네. 그러한 현상은 음악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네. 왜냐하면 음악은 어떠한 오성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 또 음악으로부터는 모든 것을 지배하며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생겨나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종교상의 예배에 있어서도 음악은 빼놓을 수가 없네. 여하간 음악은 사람들에게 신령스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수단들 중의 하나일세. 또한 데몬적인 것은 중요한 인물들에게서도 곧잘 나타난다네. 특히 그들이 프리드리히 대왕이나 표트르 1세처럼 높은 지위에 있을 경우에 말이야. 돌아가신 대공에게도 데몬적인 경향이 있었는데, 그 누구도 거기에 거스를 수 없을 정도였네. 그분은 말없이 자리에 계시기만 해도 사람들을 끌어당겼었지. 별달리 호의를 베풀거나 친절하게 대하지 않더라도 말일세. 나의 경우에도 그분으로부터 조언을 받았던 일은 모두 잘되었기 때문에 나의 오성이나 이성으로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그분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여쭈어보기만 하면 되었네. 그러면 대공께서는 직감적으로 의견을 말씀해 주셨고, 그러한 경우에 나는 언제나 좋은 결과를 미리 확신할 수 있었지. [35]
"여하간 『식물 변형론』을 쓰느라고 나는 예상보다 훨씬 고생을 했네. 별로 내키지도 않은 상태에서 일에 착수했었는데, 어느새 그 어떤 데몬적인 것이 작용하여 마침내 중단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일세." 내가 말했다. "그러한 힘에 순종한 것은 잘하신 일이었습니다. 데몬적인 것의 본성은 아주 강력해서 끝내는 자신의 뜻대로 이루고 마니까요." 그러자 괴테가 대답했다. '하지만 인간은 또한 데몬적인 것에 대항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도록 노력해야 하네. 나로서도 현재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과 사정이 허락하는 한 열과 성을 다하여 일을 훌륭히 마무리 짓도록 애써야만 하겠지. 이러한 일은 프랑스인이 코디유라고 부르는 놀이와 같은 걸세. 던져진 주사위가 많은 걸 결정하지만, 그래도 놀이판 위에서 말을 잘 써나간다는 것은 그 놀이를 하는 사람의 현명함에 달려 있으니까 말이야." [36]
괴테가 계속해서 말했다. "마찬가지로 부적절한 것은, 프랑스인들이 자연의 산물에 대해 말하면서 '합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점이네. 조각조각 만들어진 기계의 부분들은 함께 조립할 수가 있고, 그런 대상의 경우에 '합성'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무방하겠지.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살아서 스스로를 형성하며 하나의 공통적인 영혼에 의해서 스며 있는, 유기체의 부분들에다가는 그러한 용어를 적용시킬 수 없네." "제 생각에는 합성이라는 말은 순수한 예술과 문학의 작품들에 대해서도 부적절하고 가치를 떨어뜨리는 표현으로 여겨집니다." 하고 내가 대답했다. "정말 비천하기 짝이 없는 말이네." 하고 괴테가 맞장구를 쳤다. "어쨌든 우리가 프랑스인들 덕분에 가지게 된 말이지만, 가능한 한 빨리 내벗어 던져야겠지. 모짜르트가 『돈 후안』을 합성했다! 이 어찌 가능한 말이겠는가! 합성이라! 마치 계란과 밀가루와 설탕으로 버무린 한 조각의 과자나 비스킷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네! 정신적인 창조물이란, 그 개별적인 부분이나 전체가 마찬가지로 하나의 동일한 정신과 거푸집에서 나오며, 하나의 동일한 입김으로 스며져 있는 것을 말하네. 그 과정에서 창작자가 결코 인위적으로 시험을 하거나 잘게 조각내거나 임의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천재적 재능 속에 있는 데몬의 영이 그를 마음대로 조종하여, 시키는 대로 수행하게 만드는 것이네." [37]
'데몬적인 것'은 괴테의 예술과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그는 그리스 사람들이 말하는 '다이몬'을 '데몬'으로 독일어 번역하였다. 그리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평소와는 다른 짓을 할 때, 그 무의식적 행동을 다이몬이 의도한 것으로 생각했다. 예를 들어, 큐피트도 일종의 다이몬인데, 어떤 사람이 이유도 없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큐피트라는 다이몬이 장난질을 쳐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괴테는 위대한 인물이나 사건에는 이러한 예측불가능한 '다이몬'의 힘이 운명처럼 작용한다고 보았다.

3.5.1. 운명

"자네도 알겠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그 중년기에 전환점을 맞이한다네. 청년기에는 만사가 순조롭고 행복하게 돌아가던 사람도 어느 순간 그 운명이 돌변하여 재난과 불운을 잇달아 겪게 되는 법일세. 내 말의 의도를 알겠나? 사람이란 결국 무로 돌아가는 거라네! 모든 비범한 인간은 그가 이루어야 할 그 어떤 소명을 타고나는 법이며, 그것을 이루고 나면 더 이상 사람의 모습으로 지상에 머물 필요가 없어지는 게지. 그리하여 하느님의 섭리는 그를 또다시 다른 용도로 돌려쓰게 되는 걸세. 이 지상에서는 모든 일이 순리에 따라 이루어지며 데몬은 차례차례 사람의 다리를 걸어 쓰러뜨리는 거네. 나폴레옹도 그랬고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랬지. 모차르트는 서른여섯 살에 죽었고, 라파엘로도 거의 비슷한 나이에 죽었으며, 바이런은 그보다 겨우 몇 년 더 살았네. 하지만 그들 모두 자신의 천명을 완벽하게 이루었지. 그들은 가야 할 나이에 갔네. 그리고 이 땅에 더 오래 살도록 되어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걸세." [38]
괴테는 '데몬적인 것'을 예측할 수 없는 운명으로도 보고 있는데, 괴테에 따르면 '데몬적인 것'은 한 사람을 위대하게 만들긴 하지만, 인생의 절정이 지나면 그 위대한 사람을 몰락시킨다. 그리고 그 사람이 죽으면, 신(자연)은 그를 다른 용도로 돌려쓴다.[39]

3.6. 긍정

인습적인 것이나 애국주의에 결별을 선언한 것이 그토록 탁월한 인간을 개인적으로 파멸시켰으며, 그의 혁명적 정신 및 그것과 연결되기 마련인 감정의 끊임없는 동요가 그의 재능을 제대로 발전시키는 데 장애가 되었던 거네. 뿐만 아니라 계속적인 저항과 반대는 지금 나와 있는 그의 뛰어난 작품들 자체에도 커다란 해를 끼치고 있네. 왜냐하면 시인의 불쾌한 감정이 독자에게 전달될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부정하는 태도는 결국 부정적인 것으로 나아가기 때문이지. 그리고 부정적인 것이란 무와 다름없는 게 아닌가. 이를테면 나쁜 것을 나쁘다고 해보았자 무슨 이득이 있겠나? 게다가 좋은 것을 나쁘다고 하게 되면 그건 더욱 나쁜 일이 되고 마네. 올바른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사람은 결코 비방을 해서는 안 되며, 불합리한 일이 있더라도 개의치 말고 오직 바른 일만 하면 되는 걸세. 요컨대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그 무언가를 건설하는 게 중요하다네. [40]
괴테는 프랑스 문학에 대한 나의 연구에 진척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그래서 나는 틈나는 대로 볼테르를 읽으며, 이 사람의 위대한 재능으로부터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고 말했다. "제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주 조금뿐입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인물을 묘사한 짧은 시를 읽고 또 읽는데 매우 매력적이어서 손에서 놓을 수가 없습니다." 괴테가 말했다. "사실 그래. 볼테르와 같이 위대한 재능을 가진 작가가 쓴 것은 모두 다 좋은 작품이야. 나로서는 그의 거만한 태도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긴 하지만 말일세. 하지만 자네가 인물들을 묘사한 그의 짧은 시들을 그토록 오래 붙들고 있는 건 잘하는 일이야. 그것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가 쓴 것들 중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이네. 단 한 줄도 재기 발랄함과 명료성, 명랑함과 우아함으로 가득하지 않은 것은 없으니 말이야." [41]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경지는 경탄이라네. 그리고 근원현상을 보고 경탄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네. 더 높은 것은 허락되지도 않고, 더 이상의 것도 그 뒤에서 찾을 수도 없으니 말일세. 이것이 한계야. 하지만 근원현상을 목도한 인간은 보통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더 이상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네. 마치 거울 속을 들여다보고 난 후 즉시 뒤집어서 그 뒷면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려는 아이들처럼 말이야. [42]
그러나 아름다운 자연에 매혹당하여 마음과 눈으로 바다와 산과 골짜기를 즐기고 있노라면, 불현듯 그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악마가 저를 유혹하려든다는 느낌이 듭니다. 매번 이러한 시구를 저의 귀에 속삭이면서 말입니다. "내가 이리저리 휘젓고 흔들고 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 모든 이성적인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부조리가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 어떤 것이 거꾸로 치솟아 오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얄팍한 껍질은 결코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순간에 저는 시인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긍정적이어야 함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 시인을 필요로 합니다. 그 어떤 현상이나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람들은 말로 표현하려고 하지만, 자신의 재고품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시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습니다. 그러면 시인이 그를 만족시켜주고 그를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것이지요. [43]

3.7. 대지

어머니들! 어머니들! 이 얼마나 신비한 울림인가! 괴테가 말했다. "더 이상의 말은 자네에게 해줄 수가 없네. 다만 고대 그리스에서 여신으로서의 '어머니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또 내가 그 사실을 플루타크 영웅전에서 찾아내게 되었다는 정도로만 말해 두기로 하세.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서 내가 취한 것은 이것뿐이고, 그 나머지는 내가 창작한 것이네. 원고를 줄 테니 집으로 가지고 가서 철저하게 읽어보고 얼마만큼이나 제대로 이해가 가는지 한번 애를 써보게." 그러고 나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이 불가사의한 장면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차분히 음미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 어머니들의 고유한 본질과 활동이라든지, 어머니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거처에 관해 다음과 같은 견해에 도달했다. 우리가 사는 지구라는 이 거대한 천체의 내부를 텅 빈 공간으로, 즉 일정한 방향으로 몇 백 마일이나 그 속에서 계속 나아가더라도 그 어떠한 물체와도 전혀 부딪치지 않는 그러한 텅 빈 공간으로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그 공간이야말로 파우스트가 찾으러 내려간 저 미지의 여신들의 거처가 아니겠는가. 말하자면 그녀들은 모든 장소를 초월한 곳에서 살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들 주위에는 형체가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들은 모든 시간을 초월하여 살고 있다. 왜냐하면 떠오르고 지고 하면서 밤과 낮의 교체를 알리는 그 어떠한 별도 그녀들의 머리 위를 비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머니들은 이러한 영원한 어스름과 고독 속에서 창조하는 존재이며, '창조하고 보존하는 원리'로서, 지구의 표면에서 형태와 생명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호흡을 중지한 것은 영적 존재가 되어 어머니들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면 어머니들은 이것이 다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기회를 얻을 때까지 보호해 준다. 과거에 존재했거나 미래에 존재하게 될 모든 영혼과 형상은 그녀들의 거처인 무한 공간 속에서 구름처럼 이리저리 떠돌면서 어머니들을 에워싸고 있다. 그러므로 마술사라 할지라도 그녀들이 사는 나라로 가야만 한다. 마술의 힘으로 어떤 존재의 형상을 마음대로 다루고, 이전에 살았던 것을 다시 불러내어 잠시라도 생명을 부여하려면 말이다. 그러므로 생성과 성장, 파괴와 재생이라는 이 세상 존재의 영원한 형태 변형은 어머니들이 끊임없이 이루어내는 작용이다. 이처럼 이 지상에서 끊임없는 작용에 의해 새로이 생명을 얻는 모든 것에 있어서 '여성적인 것'이 주된 역할을 하는 만큼, 저 창조하는 신들을 '여성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도 당연하며, 그들에게 '어머니들'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이치에 어긋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시적인 창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므로, 자신에게 안정을 가져다 줄 만한 어떤 것을 발견하면 그로써 만족인 것이다. 우리는 지상에서 다양한 현상들을 보거나 다양한 작용들을 느끼지만, 그것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우리는 영적인 근원이나 신적인 것의 존재에 대해 추론하지만, 어떠한 개념이나 표현으로도 그것을 나타내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거기에다가 인간의 모습을 부여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막연한 예감이 어느 정도 구체화되고 포착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세기에서 세기로 민족들 사이에 전승되어온 모든 신화는 그런 식으로 생겨났다. 괴테가 지어낸 이 새로운 신화도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이 신화는 적어도 자연의 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장 뛰어난 신화들에 못지않은 것으로 보인다. [44]

4. 평가

독일 산문의 보배ㅡ만약 괴테의 작품들, 특히 존재하는 독일의 책 중에서 최고의 책인 괴테의 《에커만과의 대화Unterhaltungen mit Eckermann》를 간과한다면 : 도대체 독일의 산문 - 문학 중에서 되풀이해서 읽을 만한 책으로 무엇이 남겠는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권 제2장 방랑자와 그 그림자 109.[45]
프리드리히 니체는 『괴테와의 대화』[46]를 '독일 책 중에서 최고의 책'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유고 메모에서도 이 책을 여러 번 극찬한다. 사실 '괴테와의 대화'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니체의 핵심 사상과 거의 비슷한 맥락의 얘기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니체는 이 책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1] 괴테의 말이 주된 내용이고 에커만은 거의 리액션만 하기 때문에, 해외로 번역될 때 일부 지역에서는 괴테가 쓴 『에커만과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2] 에커만이 괴테의 말을 전하는 서술 방식은 비교적 단순하면서도, 생동감에 넘치며 다채롭기 그지없다. 대부분이 괴테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고, 묘사 부분도 괴테의 문체를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괴테의 어조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래서 괴테의 며느리인 오틸리에는 나중에 이 책을 읽고서 "마치 시아버님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것 같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2』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383)[3] 이 책에 있어서 적잖이 다행스러운 일은 몇 대목에 있어서 괴테라는 인물이 이중적으로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말하자면 때로는 나를 통해서 때로는 한 젊은 친구(소레)를 통해서 괴테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2』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14)[4]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59[5]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81[6]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86[7]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94~95[8]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2』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176~178[9]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325~326[10]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280[11]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424~423[12]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428~429[13]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2』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366~368[14]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473~474[15]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540[16]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583[17]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406[18]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449~450[19]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2』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357[20]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2』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360[21]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419~421[22]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447[23]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323~324[24]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736[25]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2』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316[26]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373~374[27]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2』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53~55[28]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2』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93~94[29]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2』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344~346[30]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438[31]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670~675[32]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2』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370~373[33]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2』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373~374[34]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676~677[35]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680~681[36]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696[37]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2』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354~355[38]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2』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241[39] 괴테는 지구를 하나의 호흡하는 유기체로 보는데, 이 지구에서 사람이 죽으면 대지로 돌아가지만, 대지는 그것을 이용하여 또다른 생명을 창조한다는 의미에서, '신은 그 사람을 다른 용도로 돌려쓴다'고 말한 것이다.[40]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205[41]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433~434[42]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454~455[43]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610~61[44]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장희창 옮김, 서울, 민음사, 2008, p.551~554[45] Der Schatz der deutschen Prosa. – Wenn man von Goethes Schriften absieht und namentlich von Goethes Unterhaltungen mit Eckermann, dem besten deutschen Buche, das es gibt: was bleibt eigentlich von der deutschen Prosa-Literatur übrig, das es verdiente, wieder und wieder gelesen zu werden?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2. 2. 109.)[46] 니체는 『에커만과의 대화』라고 말하는데, 이는 『괴테와의 대화』를 가리키는 것이다. 일부 지역에서 에커만이 쓴 『괴테와의 대화』가 괴테가 쓴 『에커만과의 대화』로 소개되었다. 니체는 후자를 봤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