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0 21:23:11

베티나 폰 아르님

파일:external/www.kunstkopie.de/bettina-von-arnim.jpg
베티나 폰 아르님(Bettina von Arnim, 1785-1859)


1. 개요2. 생애3. 베토벤과의 관계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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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작가. 베토벤의 여인들 중의 한명으로도 유명하다.

2. 생애

본명은 '엘리자베트 카타리나 루도비카 막달레나 브렌타노(Elisabeth Catharina Ludovica Magdalena Brentano)'. 이 분은 후술할 안토니 브렌타노의 남편인 프란츠 브렌타노의 이복누이이기도 하다.[1] 8살 때 엄마를 잃고(이 부분은 귀차르디와 똑같다) 수녀원에 보내졌는데, 한동안 헤어져 있던 오빠 클레멘트 브렌타노[2]의 보호를 받고 지내면서 본격적으로 문학과 예술에 눈을 뜬다. 특히 이 시절부터 오빠의 영향으로 괴테에 심취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일생동안 괴테의 광팬이 되었다.

베티나는 탁월한 친화력으로 아래의 베토벤과 괴테 이외에도 슈만, 리스트, 브람스 등 시대를 이끌어 가는 대 음악가와 친분을 유지하였으며 그들로부터 재능을 찬양받았고 작곡가로서도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아르님(Arnim) 스타일을 창안하였으며 조각에서도 재능을 보였다.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던 셈.

그녀의 가장 대표적인 세 작품인 '괴테가 한 아이와 나눈 편지들', '귄데로데', '클레멘스 브렌타노가 받은 봄의 화환'은 베트나가 괴테, 귄데로데, 그리고 오빠와의 사이에서 이루어진 편지 왕래를 각각 기록한 것이다.

낭만주의적 성향의 소유자로 , 본인의 개인적인 자유를 중시했으며 이 때문에 거의 기인에 가까울 정도로 인습에 얽매이지 않으려 했고 제멋대로였지만 그래도 남편과 아이들에게는 각각 충실하고 헌신적인 아내이자 어머니였다.

여담으로 소외 계층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었으며 이에 관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위해 특별히 쓴 책에 드러내기도 했다.

3. 베토벤과의 관계

1809년, 베티나는 독일의 젊고 유능한 작가이자 작곡가, 소설가로서 빈을 방문하여 베토벤과 그의 음악을 접하자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을 느꼈고 그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특히 테레제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깊이 좌절하고 있던 베토벤에게 정열적이고 감동적인 우정과 자상한 이해심을 보여주었다. 1810년 7월 베토벤은 "행복이 나의 뒤를 따라온다. 사랑스런 베티나, 사랑스런 어린 소녀여..."하며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열렬했던 우정은 나름 사랑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베티나는 1810년 12월 오래 전부터 그녀를 사랑해온 시인 요아힘 폰 아르님과 약혼하고 이듬해인 1811년에 결혼했다. 베토벤은 그녀가 결혼하던 시점에도 여전히 친밀하고 뜨거운 어조로 다시 편지를 썼으며[3] 베토벤은 베티나를 통해 괴테와도 만나게 된다. 베티나 부부는 결혼 직후 베를린으로 이사가서 7명의 자녀를 낳고 평생 거기서 살았다. 베티나의 개인적 능력이나 업적과는 별도로 베토벤의 인생에서 그녀는 그리 비중이 큰 인물이라고 볼 수는 없다.

베티나는 1807년 글로만 흠모했던 괴테를 직접 만날 기회를 얻었는데 이 때부터 1811년 아르님과 결혼할 때까지 베티나의 관심사는 오직 괴테였다. 괴테와 베티나는 무려 36살의 나이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괴테에게 단순한 팬심을 넘어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게 되었으며, 베티나가 아르님과 결혼한 시점은 괴테에 대한 구애가 결국 실패로 끝나버린 직후였다.[4] 이때 괴테에게 상심한 베티나는 한동안 괴테에 대한 관심을 접었는데 1831년 남편이 사망할 때쯤 다시 괴테 전문가로 활동하게 된다.

이 와중에 세련된 사교계의 명사 베티나는 촌스럽지만 순수한(?) 베토벤[5]을 만나 나름 독특한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결코 깊은 관계로 진전될 정도의 호감은 아니었으며, 베토벤 입장에서도 베티나는 힘든 시기에 위안을 주고 자기 음악의 적극적인 팬이 되어준 고마운 여성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따라서 베티나와 베토벤 두 사람이 설령 일시적으로 끌린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베티나가 약혼할 때 쯤에는 그냥 서로 존경하는 사이 정도의 관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1811년 베티나가 베를린으로 떠난 후에는 두 사람 간에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도 없다.[6]

한편 베토벤과 관련하여 베티나에게는 흑역사가 있는데, 베토벤의 사후 공개한 베토벤으로부터 받았다는 3통의 편지 중 2통은 베토벤이 보낸 적이 없는 가짜로 드러났다. [7]

4. 여담

아르님 가문은 아직도 독일에 현존하는 명문가다. 홈페이지도 있다. 베티나의 남편 아힘 폰 아르님, 막내딸 기젤라 폰 아르님[8]도 작가이다. 그들의 후손들도 지속적으로, 주로 예술 직종에 이름을 날렸다. 후손들 중에는 군인으로 에르빈 롬멜의 후임으로 이름을 남긴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도 있다. 소설 룬의 아이들 데모닉에 등장하는 아르님 가문은 이 베티나의 성씨에서 따왔다.


[1] 베티나는 (이복)올케이자 베토벤의 연인이었던 안토니 브렌타노 부친의 사후, 빈에서 안토니가 부친의 미술 수집품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2] 이후 상당히 뛰어난 시인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독일문학계에 이름이 알려져 있을 정도.[3] 그런데 베토벤의 편지내용을 인용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베토벤이 여자들에게 편지를 쓸 때 사용했던 강렬한 헌사의 상당수가 단순히 상투적/의례적으로 사용된 것이라는 점이다. 즉 베토벤은 특별한 연애감정이 없는 여인에게도 우정과 존경의 표시 차원에서 연애편지식의 글쓰기를 즐겼다. 따라서 단순히 편지에 애정 표현이 난무한다고 무작정 사랑고백으로 단정지어서는 안된다.[4] 괴테에게 베티나는 일찍이 알고 지낸 집안의 자제이자 유능한 작가였지 연애 감정을 느끼는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5] 베토벤은 당시 기준으로 시골 촌구석인 본 출신인데다 무뚝뚝하고 자부심이 강한 성격 탓에 사교생활도 서툴렀다. 빈에서는 일단 그의 본 사투리부터 촌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6] 게다가 베티나와 베토벤이 알고 지내던 시기는 베토벤이 테레제 말파티나 안토니 브렌타노와 본격 연애를 했던 시기와 겹친다는 것도 염두에 두자.[7] 김주영 편집의 베토벤의 편지 모음집인 <베토벤, 불멸의 편지>(예담)에 나오는 내용이다. 심지어 그녀는 괴테와 주고받은 서간문을 출판했을 때에도 일부분을 자기 멋대로 괴테의 글로 사칭하거나 내용을 바꿔서 발표하는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8] 동화작가. 베티나와 기젤라의 작품은 국내에도 〈그녀들의 메르헨〉이란 이름으로 출판되어 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