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8 14:34:31

아르세니오스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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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3. 영향

1. 개요

Arsenian schism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 아우토리아노스가 공동 황제 요안니스 4세를 실명형에 처한 미하일 8세파문에 처하면서 촉발된 분열. 라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면서 부흥하려던 동로마 제국의 상승세를 꺾어버린 결정적인 사건이다.

2. 전개

1258년 8월 18일 테오도로스 2세가 사망한 뒤, 아들 요안니스 4세가 제위에 올랐다. 아직 8살밖에 안 되었기에, 요르요스 무잘론과 형제들이 섭정하였다. 그러나 9일 뒤 소산드라 수도원에서 열린 황제의 추모식 때 귀족들이 정변을 일으켜 무잘론과 그의 형제 1명을 주제단에서 살해했다. 귀족들은 뒤이어 테오도로스 2세에게 심한 견제를 받아 감옥에 갇혀 있던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석방시킨 뒤 섭정을 대신 맡게 했다. 미하일은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국유지를 빈농에게 하사해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1259년 1월, 미하일은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어 공동 황제가 되기로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 아우토리아노스는 요안니스 4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요안니스와 미하일이 상호 서약을 맺어서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관식을 치를 때 요안니스 4세가 먼저 즉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두 명의 고위 성직자를 제외한 주교들은 미하일이 먼저 대관식을 치를 권리가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아르세니오스는 미하일과 아내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에게 먼저 왕관을 씌웠고, 뒤이어 요안니스 4세에게 특별한 머리 장식을 씌웠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승복할 수 없었던 그는 파스카시오스 수도원으로 들어간 뒤 총대주교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고, 니키포로스 2세가 그를 대신하여 세계총대주교를 맡았다.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후, 미하일 8세는 아르세니오스에게 세계총대주교에 복귀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에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고, 1261년 8월 15일 미하일과 아들 안드로니코스 2세의 대관식을 주관했다. 다만 요안니스 4세의 권리는 그대로 유지됨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데 미하일은 이 시점에서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1261년 12월 25일, 이제 11살이 된 요안니스 4세를 붙잡아 실명형에 처한 뒤 비티니아의 마르마라 해 디키비제 요새에 감금한 것이다.

황위 경쟁자를 배제하여 팔레올로고스 왕조를 굳건히 하려는 의도로 그리 했겠지만, 굳이 극단적인 방식을 동원할 필요는 없었다. 요안니스 4세가 명목상의 황제로나마 남아있게 해놓고, 자식들을 공동 황제로 세워서 황권을 굳히는 게 정석이었다. 로마노스 1세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뒤에도 콘스탄티노스 7세를 공동 황제로 인정하고 자식들을 뒤따라 황위에 올려서 후계구도를 정해뒀던 전례도 있었다. 그러나 미하일은 여론이 자신을 지지하는 것에 연연한 나머지, 민중의 신망을 받던 라스카리스 왕조를 부정해버리는 조치를 내렸다.

아르세니오스 세계총대주교는 미하일이 서약을 지키지 않고 어린 공동 황제를 실명형에 처하고 유페한 행위에 격노하여 파문을 선고했다. 미하일이 파문을 거두어 달라 청하자, 그는 알렉시오스 1세가 쿠데타로 제위를 차지한 뒤 거친 옷을 입고 맨바닥에서 자며 40일 동안 참회했던 것처럼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그가 라스카리스 왕조의 지지자들과 결탁했다는 참언을 믿고 요구를 거부했고, 두 사람은 4년간 대립했다. 미하일은 교황에게 항소를 하겠다고 위협하며 파문을 철회받으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자, 1265년 5월 공의회를 소집한 뒤 아르세니오스를 파면하고 프로코네소스 섬으로 유배했다.

그러나 2년 후인 1267년 새로 세계총대주교에 착좌한 예르마노스 3세는 미하일의 파문을 풀어주길 거부했다. 이에 미하일은 예르마노스 3세를 파면하였고, 뒤이어 세계총대주교에 선출된 요시포스가 파문을 거뒀다. 그러나 여론은 악화될 대로 악화되었고, 소아시아의 주교들은 전임 세계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의 복귀를 요구하며 황제에게 집단 항의했다. 소아시아의 민중 역시 미하일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제국 재건에 큰 공을 세우며 60여 년간 니케아에서 군림한 라스카리스 왕조를 선망의 눈길로 바라봤는데, 미하일이 하루아침에 라스카리스 왕조를 지방 정권으로 격하하고 황족들을 숙청하며, 소아시아의 재원을 발칸 반도로 끌고 가자 분노했다.

급기야 니케아와 니코메디아 사이의 육상 연락망을 통제하던 트리코키아 요새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미하일은 진압군을 파견했지만, 트라코키아 주민들은 요새에서 농성하며 몇 년간 항전했다. 미하일은 협박과 회유를 동시에 구사해 반군이 스스로 분열하도록 유도하여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하일에게 반감을 품은 많은 주민이 룸 술탄국으로 망명하는 걸 막지 못했다. 반면 발칸 반도의 주민들은 미하일을 지지했다. 그들은 미하일이 라틴인들의 지배로부터 구원해줬다고 여겼고, 제국이 발칸 반도의 고토를 회복하기를 희망했다. 이들은 미하일의 파문을 취소한 요시포스를 지지했다. 이리하여 정교회는 '아르세니오스파'와 '요시포스파'의 대립 양상으로 흘러갔다.

그런데 미하일은 자신을 지지해주는 요시포스파마저 적으로 돌리고 말았다. 그는 수많은 전선에서 전쟁을 동시에 치르는 걸 더 감당할 수 없었고, 라틴인과의 전쟁을 멈추고 동방의 투르크 전선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교회를 이단으로 단죄한 교황령에게 접근해 화해를 제안했다. 마침 1268년에 선출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동서 교회 일치에 긍정적인 입장을 내비치자, 미하일은 교황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협상을 이어갔다. 1272년 제2차 리옹 공의회가 소집될 때, 미하일은 자신을 따르는 주교들을 파견했다. 이들은 서방 교회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그해 7월 17일 미하일의 신앙 선서를 낭독했다.
거룩한 로마 교회는 전체 가톨릭교회 위에 최고의 충만한 수위권과 우선권을 가졌다. 로마 교회는 이러한 권한을 사도들의 으뜸이요 대표인 복된 베드로의 존재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진정으로, 그리고 겸손하게 인정한다. 그리고 로마 교회는 무엇보다도 신앙의 진리를 수호할 의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앙에 관해서 야기되는 논쟁들은 로마 교회의 결정에 따라 해결되어야 한다.

또한 동방 주교들은 필리오케에 관한 합의문에도 서명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믿음과 헌신을 다해 고백하노니, 성령께서는 영원히 성부성자로부터 발출하시며, 이는 두 원리로부터 발출이 아니라 단 하나의 원리로부터 발출이다. 즉, 두 개의 창조가 아니라 하나의 창조이다. 이것이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이자 돌보는 여주인인 거룩한 로마 교회가 지금까지 고백해 왔고, 선포해 왔고, 가르쳐 온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로마 교회가 강하게 붙들고, 선포하고, 고백하고, 가르치는 내용이다. 이것은 바른 신앙의 교부들과 교회 박사들의 변치 않는 참 믿음이고 라틴인들이나 그리스인들에게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논쟁이 되지 못할 진실에 대한 무지로 인해 다양한 오류에 빠진 몇몇 사람들이 있는바, 우리는 이러한 오류로 인도하는 길을 모두 막고자 신성한 공의회의 승인을 통해 비난하고 꾸짖노니 곧 성령께서 영원히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셨다는 사실을 부정하고자 하는 자와 성급하게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하나의 원리가 아닌 두 개의 원리로써 발출하셨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미하일은 이를 통해 서방과의 분쟁을 끝내고, 더 나아가 그들의 지원을 받아 투르크에 맞서길 희망했다. 그러나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돌아와서 공의회의 법령을 낭독하자, 아르세니오스파와 요시포스파 모두 분노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서방 교회와 대립하였고, 필리오케는 분명한 오류라고 간주했는데, 하루아침에 서방 교회에 굴복하여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라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난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파괴하고 학살을 자행한 라틴인들에 대한 뿌리깊은 원한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세계총대주교 요시포스 역시 황제의 결정에 반발하여 1275년 사임했다. 이에 미하일은 자신을 지지하는 몇 안 되는 대주교 요안니스 11세를 세계총대주교 자리에 앉혔다. 요안니스 11세는 동서 교회의 교리 차이가 포티오스 때문에 과장되었다고 확신하고, 성령의 발출에 대해 견해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동서 교회는 같은 진리에 대한 표현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했을 뿐, 어느 한쪽이 틀린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황제의 뜻에 공감하여 교회 일치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대다수 주교들과 신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미하일은 재위 기간 내내 교회와 적대해야 했다.

1282년 12월 11일, 미하일 8세가 트라키아 원정에 착수했다가 라이데스토스 근교에서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정교회 수도자들은 동서 교회 통합 정책을 강요한 그에게 강한 반감을 품었기에 장례식 집전을 거부하였고, 미하일의 유해는 잠시 암매장되었다가 셀림브리아의 한 성당에 이장되었다. 여기에 미하일의 누이 에우도키아는 미하일이 지옥에서 영원한 저주를 받을 거라고 선언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새 황제로 즉위한 안드로니코스 2세는 부황의 교회 일치 정책을 폐기하기로 마음먹고, 그해 12월 25일 요안니스 11세를 해임했다. 이후 새 세계총대주교에 선임된 그리고리오스 2세는 1285년 블라허나이 공의회를 개최하여 필리오케를 부정하는 내용의 신조를 발표해, 공식적으로 제2차 리옹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거부했다.

그러나 팔레올로고스 왕조에 가까운 요시포스파와 적대적인 아르세니오스파 간의 대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요시포스파는 아르세니오스파를 반역 분자로 몰아세웠고, 아르세니오스파는 서방의 앞잡이라며 맞대응했다. 세계총대주교 그리고리오스 2세는 분열을 치유하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289년 사임했다. 이후 아르세니오스파 인사인 아타나시오스 1세가 세계총대주교에 선임되었지만, 교회 개혁에 반발한 성직자들의 탄핵으로 1293년 사임하였다. 하지만 신임 세계총대주교 요안니스 12세 역시 아르세니오스파의 맹공을 견디지 못하고 1303년 사임했고, 아타나시오스 1세가 복귀했지만 1310년 초 동서 교회 일치 지지 성향의 성직자들의 압력으로 사임했다. 그러다 1310년 네폰 1세가 세계총대주교에 착좌한 뒤 양자의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아르세니오스 분열은 50년 만에 마무리되었다.

3. 영향

아르세니오스 분열은 라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막 부흥하려던 동로마 제국의 상승세를 꺾어버리고 도리어 쇠락의 길을 걷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라스카리스 왕조의 지지 기반이던 소아시아의 주민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팔레올로고스 왕조를 더 이상 추종하지 않았고, 투르크인들은 이 틈을 타 소아시아를 수월하게 공략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점에 비해 방어에는 취약했던 소아시아의 상실은 팔레올로고스 왕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여기에 서방 교회와의 통합 문제까지 맞물리면서, 가뜩이나 서방 교회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던 제국민들의 분노를 야기했고, 팔레올로고스 왕조를 지지하는 요시포스파와 적대적인 아르세니오스 파간의 극한 대립으로 총대주교가 제 역할을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후임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는 부친의 실책으로 인해 분열된 민심을 수습하고, 거듭된 전쟁으로 파탄 지경에 이른 재정을 수습하기 위해 긴축 정책을 오랜 세월 실시해야 했다. 외세는 이 틈을 타 영토를 갉아먹었다. 그나마 안드로니코스 2세를 밀어내고 새 황제에 오른 안드로니코스 3세가 할아버지의 긴축 정책 덕분에 개선된 재정을 토대로 적극적으로 반격할 수 있었지만, 안드로니코스 3세가 1341년 급사한 뒤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발발하면서, 제국은 쇠망의 길을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