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이타마현에 있는 도시에 대한 내용은 한노시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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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 셰켈 | |
문화 | 페니키아어 | 페니키아 문자 | |
신화 | 바알 | 아세라 | |
지리 | 가나안 | |
인물 | 디도(카르타고) | 한니발 바르카 | 한노 | }}}}}}}}}}}}}}} |
한노(𐤇𐤍𐤀; Hanno)는 한니발, 마고, 하스드루발, 히밀코와 함께 카르타고에서 자주 쓰이던 인명 중 하나로 포에니 전쟁에서 동명이인 한노가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하였다. 그 중 유명한 인물은 기원전 5세기에 아프리카 북서 해안을 탐험한 항해자 한노와 포에니 전쟁 때 하밀카르 바르카, 한니발 바르카의 반대파에 있던 대한노 2세가 있다.
2. 동명이인
2.1. 항해자 한노(Hanno the Navigator)
한노의 아프리카 항해일지의 주인공으로, 기원전 425년 함선 60척과 선원 3만 명을 이끌고 아프리카 북서 해안을 탐험하였다. 해안을 따라 남하하던 한노는 식민지 5곳을 세웠고, 릭소스강에서 가축을 방목하는 릭시태라는 부족과 만나자 그들로부터 통역사를 구해 강 상류를 따라 내륙으로 진출했다. 여기서 한노는 릭시태 부족과 적대적인 에티오피아 원주민과 조우하였는데 학자들은 이 지역이 아틀라스 산맥일 것이라 추정한다.한노는 다시 남하를 시작하여 섬 3개가 있는 호수에 도착했다. 14일 동안 탐사를 진행한 한노는 만으로 들어가 많은 섬과 화산 지대에서 고릴라를 발견했다. 한노는 이를 신기하게 여겨 생포하고자 했으나 고릴라들은 나무로 올라가 저항하였다. 한노는 고릴라 3마리[1]를 생포했는데, 고릴라들이 카르타고 병사들을 거세게 공격하면서 부상을 입히자 어쩔 수 없이 생포한 고릴라를 죽였다.탐사를 끝낸 한노의 원정대는 탐사에서 얻은 전리품을 가지고 카르타고로 귀환하였다. 이때 한노가 기술한 원전 항해일지는 바알 함몬의 신전에 기록되었으나 이후 소실되었다. 그리스인이 기술한 한노의 아프리카 항해일지는 대영박물관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었다.
2.2. 대한노 1세(Hanno I the Great)
대한노 1세 문서 참고.2.3. 제1차 포에니 전쟁의 한노들
한노(제1차 포에니 전쟁) 문서 참고.2.4. 대한노 2세(Hanno II the Great)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제1차 포에니 전쟁 말기에 리비아의 헤카톰필로스를 정복한 것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당시 카르타고가 시칠리아에서 로마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한노는 아프리카에서의 영토 확장을 중시한 것으로 추정되며,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의 말에 따르면 군대를 훈련시키고 유지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쟁을 했다고 한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용병료를 받지 못한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하밀카르 바르카와 함께 토벌에 나섰으나 달리 군사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이후 로마와의 전쟁을 지속적으로 반대해왔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도 카르타고 원로원 안의 반전세력을 이끌었으며 자마 전투의 패배 이후에는 평화 협상에 참가했다.
별칭 "위대한"은 카르타고의 아프리카 영내 확장에서 거둔 성과를 기려 붙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무능한 인물도 아니고 로마를 상대로 나름의 외교적 성과도 거둔 인물이었으나, 한니발 바르카의 반대파라는 편견 때문인지 대체역사 소설 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에서는 전형적인 삼류 악역 귀족으로 심히 왜곡되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