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8:34

고대 아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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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페르시아 전쟁 이전의 아테네3. 민주주의의 탄생4. 그리스의 학교
4.1.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4.2. 아테네 민주주의의 문제점
5. 아테네의 사회6. 펠로폰네소스 전쟁7. 민주주의의 귀환8. 헬레니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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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들을 이끌어가는 이는 누구이며, 그들의 군대를 지배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들은 노예로 불리지도 않고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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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킬로스, 《페르시아인》중에서}}}

고대 그리스도시국가.

같은 고대 그리스 시기에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또다른 도시국가 스파르타와의 라이벌 관계로 유명하다.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이자, 철학의 도시, 고대 그리스 문명의 꽃이자 모든 유럽 국가들의 문명 요람이 된 본거지가 아테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테네에서 절정을 이룬 그리스 문명은 이후 로마와 중세 유럽, 근대 유럽, 현대 세계로 이어진다. 심지어 계몽주의자들이 그리스의 유산을 망각했다고 신나게 디스하던 중세인들도 실은 극렬한 아테네빠들이였다.

2. 페르시아 전쟁 이전의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모든 것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겠지만, 오로지 ‘나무 성벽'만은 파괴되지 않으며 그대들을 지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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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포이의 신탁, 아테네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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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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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에릭토니오스 왕조
페리파스 오기고스 악타이오스 케크롭스 1세
에릭토니오스 왕조
크라나오스 암픽티온 에릭토니오스 판디온 1세
에릭토니오스 왕조
에렉테우스 케크롭스 2세 판디온 2세 아이게우스
에릭토니오스 왕조
테세우스 메네스테우스 데모폰 옥신테스
에릭토니오스 왕조 멜란토스 왕조
아페이다스 티모이테스 멜란토스 코드로스 }}}}}}}}}}}}


아테네고전 그리스어 도시 명칭은 아테나이(=아시네)[1][2]로 전략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와 관련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아테네라는 도시가 처음으로 생겨났을 때 포세이돈과 아테나가 아테네를 대표하는 수호신이 되고자 했다. 어느 한 쪽이 아테네의 수호신이 되라고 양보하면 좋으련만 두 신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싸우자 이를 본 어떤 신이 시민들에게 유용한 선물을 해줘서 좋은 반응을 받은 신이 아테네를 대표하는 수호신이 되는 것이 어떻겠냐라고 제안했다. 두 신은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포세이돈은 시민들에게 호수를 하나 선물해줬는데, 아무래도 포세이돈이 바다를 관할하는 신이다 보니 그 호수의 물은 짜서 시민들이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불가능했다.[3] 반면에 아테나는 시민들에게 올리브를 선물했는데 시민들한테 좋은 반응을 얻어 결국엔 포세이돈이 패하고 아테나가 이겨서 제안대로 아테네를 대표하는 수호신이 되어서 도시 이름이 아테네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오늘날에도 아테네와 주변 지방은 올리브와 포도로 유명하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테세우스가 왕이 된 도시로 언급되고 다양하게 등장할 정도로 미케네 문명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유서 깊은 도시였다. 하지만 실제로 미케네 문명 시기에 아테네가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듯 활약했을 가능성은 극히 미미하다. 아테네의 극작가들은 그리스 신화를 각색해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거나 자신들이 칭송하고 싶은 것의 명성을 드높이는 것을 일상적으로 수행했고, 특히 아테네와 민주주의에 관련되어서는 더더욱 그러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덧붙임 설정으로 인해 현대인이 보기에는 조금 이상한 것들이 많이 있는데, 개중에서도 테세우스가
아테네의 평등과 민주주의는 테세우스 시절부터 비롯되었으며, 테세우스는 왕인 동시에 민주주의의 창시자이고, 수호자이며 아테네 해군의 창시자
라는 칭호를 얻은 경우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4]

어쨌든 트로이 전쟁 관련으로는 언급이 거의 없을 정도로 미케네 문명 시기에는 중소도시였다.[5] 하지만 미케네 문명이 몰락한 이후의 이른바 그리스 암흑기 무렵에는 쫄딱 망했다가 고전기에 들어와 재건된 스파르타, 테베 등 다른 도시와는 달리 암흑시대에도 도시가 붕괴하지 않고 유지된 특이한 케이스였다. 그래서 고대 아테네인들은 여기에 큰 자부심을 가졌다고 한다.[6] 기원전 7세기 정도에 사실상 귀족정인 왕정이 시행되었으나 왕의 존재가 거의 의미가 없어 곧 9명의 아르콘(집정관)이 통치하는 귀족정으로 변모했다. 관습법 체제로 귀족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던 국정에 불만을 품은 아테네 민중들의 정치개혁 요구에 드라콘이 기원전 621년 성문법 체제를 갖추었으나 이는 사형을 남발하는 가혹한 법이라서 민중들의 불만을 샀다. 그러던 중 조정자 솔론이 집정관이 되어 금권정을 시작하여 평민들에게도 일부 참정권을 주는 등 정치개혁을 단행했으나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불만을 사고 결국 물러났다.

이후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곤봉잡이'라 불리는 정치깡패들을 거느리고 권력을 잡아 빈민을 구제하고 국가적 제전과 토목공사를 통해 민중영합적인 정치, 즉 포퓰리즘적인 정치를 펼쳤다. 이 시기를 참주정이라 부르는데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죽은 이후 그의 아들들인 히파르코스와 히피아스가 권력을 물려받았으나 히파르코스는 암살되고 히피아스는 축출당했다.

다시 귀족과 민중 간의 갈등이 이어지다가 기원전 508년 클레이스테네스가 집권했다. 그는 기존의 4개 부족 체제를 데모스라 불리는 10개 부족 중심의 행정으로 개편하고 500인회(불레)와 민회(에클레시아)를 설치했으며 도편추방제를 도입하는 등 정치 개혁을 실시했다. 솔론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의 7현인 중 한 명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하지만, 보다 중요한 민주정의 기틀을 마련해준 클레이스테네스는 덜 유명한 편으로 그의 정확한 생몰년도도 알려져 있지 않다.[7]

다만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다른 그리스 폴리스의 정치체계와 그렇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당시 그리스에서 병사의 대부분이었던 호플리테스(Όπλητης, 그리스 중장보병)에게는 참정권이 있었다. 원래 전쟁터를 독무대로 삼았던 귀족 출신의 기마병(Ίππεῖς, 히페이스, 그리스어로 '기병')과는 반대로 호플리테스들은 중산층이었는데, 그 수가 많다보니 전장에서도 귀족 출신 기마병을 압도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시민들의 권위가 귀족에 꿀리지 않게 되어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 것이 그리스 전체의 추세였다. 이런 추세의 극단적인 사례가 아테네와 정 반대로 언급되는 도시국가 스파르타이다.[8] 그래서 이 시점까지 아테네의 정치는 돈이 있어서 중장보병의 무장을 갖출 수 있는 중산층만이 참여 가능한 것이었으며, 아테네 군사력의 핵심과 사회의 핵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시대의 아테네를 대표하는 전투가 바로 마라톤 전투이다.

경제적으로는 솔론의 개혁 이전에 무식하게 산지에다가 농사를 지으려고 했다가 후에 상공업으로 분야를 바꾸면서 번창해갔다. 아티카는 땅 파면 돌이 나오는 동네였다. 하지만 아테네를 대표하는 해군 함대가 대규모로 편성되고 당대 세계 최고의 해운국가가 된 것은 테미스토클레스의 함대 구축과 페르시아 전쟁 이후였다. 본래 아테네는 내륙의 육상국가였고, 이 시기 라이벌이었던 아이기나 섬의 해군에게 탈탈 털리던 수준이었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미래를 내다보고 해군력 증강을 계속 주창했으며, 아테네의 외항인 피레우스 항구의 항만 시설을 확충하고 아테네를 함께 보호하는 장성을 쌓는 것을 주장하는 등 끊임없이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테네 인근의 라우리움 은광에서 갑작스럽게 대박이 터지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자금으로 아테네 함대를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델포이의 신탁에서 아테네를 마지막까지 수호하리라 예언된 나무 성벽이 이렇게 건설된 아테네 목제 갤리선 함대를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이 제안이 민회에 받아들여져 200여 척으로 편성된 아테네 함대가 탄생하게 된다. 이것은 크세르크세스 1세가 아버지 다리우스 1세의 뒤를 이어 다시금 그리스를 공격하는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일이었다.

3. 민주주의의 탄생

"우리의 정체가 민주주의로 불리는 까닭은 권력이 민중 모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도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합니다. 누군가를 다른 사람에 앞서 공직자로 뽑는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특정 계층의 일원인지보다는 실제적인 능력을 중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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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클레스.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몰자 추도연설> 中}}}
"감히 말하건대 빈자와 평민이 명문거족을 눌러 이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함선들을 추진시키고 도시에 힘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평민이 아니던가?"
{{{#!wiki style="text-align: right;"
<아테네의 헌법>크세노폰[9]}}}
사실상 강자는 그들이 할 힘이 있는 것을 하는 것이며, 약자는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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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스의 대화> 중 아테네의 발언.}}}
이렇게 편성된 아테네 함대는 페르시아 전쟁의 진정한 주역이 되었다. 아테네 함대는 아르테미시아 해전에서 효과적으로 페르시아 함대를 저지했지만, 육상의 테르모필레 전투의 패전 이후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로 진격, 요새화된 아크로폴리스를 제외한 아테네 전역을 초토화시켰다. 하지만 이미 아테네인들은 살라미스 섬으로 피신한 상황이었다. 그리스 연합함대의 실질적인 사령관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는[10] 크세르크세스 1세를 유인, 페르시아 함대를 살라미스 섬으로 끌여들여 격멸시키는 살라미스 해전의 대승리를 이끌어냈다. 이후 아테네 함대는 미칼레 해전에서 다시 승리해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했고, 스파르타를 위시한 여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대승한 이후 페르시아 전쟁에서 사실상 이탈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단독으로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을 지속해 나갔다. 아테네는 소아시아 서부 해안의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국가들을 모두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켰고, 그들을 아테네 중심의 군사동맹인 델로스 동맹에 가입시켜 영향력 아래에 두었으며, 막강한 해군력으로 페르시아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일개 도시국가가 페르시아 제국을 위기에 몰아넣는다는 것이 과장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의 의미다. 아테네 함대는 흑해와 동지중해 전역을 제압하다시피 했으며, 크레타 섬, 키프로스 섬, 아나톨리아 해안가 전역, 심지어 북아프리카의 이집트까지 공격했다. 이집트는 키루스 대제와 달리 캄비세스 2세가 폭압적으로 점령한 이후로 계속 페르시아 제국에 대해 적대적인 땅이었고, 아테네 함대는 이집트의 반란군과 연합해 페르시아군을 이집트에서 몰아내기 직전까지 밀어붙였다. 결국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이이제이의 전략으로 스파르타를 매수해 아테네를 격퇴하려고 시도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 와중에 스파르타와 그에 내통한 아테네의 귀족, 부유층과 스파르타의 해상 동맹국들이 승천하는 아테네를 경계해 아테네를 공격했으나, 아테네는 그들 모두를 격퇴하고 승리하는 가공할 포스를 보여주었다.[11]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이런 이이제이를 통해 시간을 벌어 이집트의 반란을 제압하고 아테네의 이집트 원정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지만, 스파르타를 격파한 아테네 함대가 다시 이집트로 돌아와 또 페르시아 함대를 궤멸시켜버렸다. 결국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더 이상의 군사적•재정적 소모를 피하기 위해 에게 해, 헬레스폰토스 해협, 마르마라 해,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테네 제해권을 인정하고 페르시아 함대를 파견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평화조약을 맺었다. 페르시아 전쟁은 이렇게 아테네의 승리로 끝났다.

아테네는 제해권을 바탕으로 하여 그리스 최대, 최강의 도시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아테네의 상공업은 이러한 제해권을 바탕으로 급격히 팽창했으며, 지중해 전역에 아테네의 상업 교역망이 미치고 수공업 제품이 팔려나갈 정도의 발전을 보였다. 이런 경제적 팽창을 기반으로 아테네의 인구는 급증해 흑해 북쪽 현재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곡물을 수입해 올 정도의 거대 도시로 성장했다. 또한 아테네의 무적함대는 아테네가 역사상 처음으로 그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12]이 참정권을 얻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를 이루는 근간이 되었다. 이유는 당시 해군을 구성하는 갤리선 함대를 운영하려면 테테스라 불리는 무산자 및 빈민들 역시 노잡이로 동원해야 했기 때문이다. 테테스들은 해군력 유지에 끼치는 공적을 내세워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넓혀 갔고, 참정권을 얻는 동시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시행해갔다.

이전까지의 아테네 평민들은 실질적으로 아르콘(=집정관)과 스트라테고스(=장군) 등의 고위직이 될 수 없었다. 중장보병 수준의 소득을 가진 이들조차 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재산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무산자 테테스들은 500인회에 소속될 수조차 없었다. 실질적으로 아테네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극소수 부유층뿐이었고, 중장보병이 될 수 있는 중산층조차 제한적인 영향력이 있었으며, 무산자 테테스들은 입법, 행정, 사법 등의 모든 영역에서 사실상 배제된 상태였다. 실질적으로 아테네를 지배하는 것은 아르콘을 역임한 부유층 시민으로 구성된 아레이오스 파고스, 즉 300인 귀족 과두의회였다.

이러한 현실을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 군사력의 중핵이 된 무산자 테테스들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들은 에피알테스를 중심으로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 무혈혁명을 추진해나갔다(BC 462). 에피알테스는 아레이오스 파고스 의원 개개인에게 직권남용죄를 적용하고 고소해 법정에 세워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귀족의회의 권한과 특권을 500인회(불레[13], 행정부. 입법의 역할도 일부 수행했다.), 민회(에클레시아, 입법부), 시민법정(사법부)으로 분산시켜나갔다. 또한 아크로폴리스의 격리된 곳에 숨겨져 있었던 아테네 법률의 석판을 공개된 아고라로 옮겨 모든 시민이 법률을 읽고 참조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법치주의적인 시도를 일으켰다. 결국 아레이오스 파고스 귀족의회는 살인사건과 아테네의 신성한 올리브나무에 관한 범죄에 대한 재판권만 갖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인류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 무혈 혁명을 이끈 에피알테스는 귀족들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암살로 최후를 맞았다.

하지만 에피알테스가 죽었어도 민주주의는 죽지 않았다. 에피알테스를 이어받은 페리클레스배심원과 공직에 대한 보수 지급을 통해 부유층이 아니더라도 공직을 수행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을 만들었으며[14] 아테네의 민회, 500인회, 시민법정 등에서 재산을 통한 제한을 철폐시켜, 모든 시민은 단 한푼의 재산도 갖지 못한 무산자 테테스라 할지라도 아테네의 모든 민주적 시스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다른 시민들의 투표를 통해 아르콘과 스트라테고스가 될 자격을 보장받도록 했다.[15] 이를 통해 아테네 민주정이 완성되었으며, 민주정으로 인해 아테네는 다른 국가와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민주주의 시스템을 통해 아테네의 정치는 여론과 시민의 지지를 통해 이뤄졌으며 다른 국가와 차별화되었다. 또한 민주주의로 확립된 시민 모두가 아테네의 주인이라는 인식은 아테네인들의 긍지가 되었고, 전장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4. 그리스의 학교

"아테네 전체가 그리스의 학교이며, 사람들은 그곳에서 제각기 아주 다양한 형태의 삶을 펼쳐 가며 매우 품위 있고 유연하며 자족적인 시민으로 길러져 사회로 배출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 행동으로 이루어낸 진실이라는 것은 우리의 자유로운 삶의 방식들을 통해 획득한 아테네의 힘이 바로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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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클레스,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몰자 추도연설> 중.}}}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로 이어지는 민주주의 혁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아테네는 황금기를 맞았다. 아테네는 인구 200,000~300,000명에 달하는 당대 최대이자 최고의 도시였으며, 그 중 4~50,000명의 성인 남성들이 시민권을 인정받아 자산 규모와 상관없이 민주주의에 참여하고 아테네 국력의 혜택을 얻었다. 아테네 함대는 흑해의 우크라이나에서 이집트, 리비아에서 나폴리에 이르는 영역까지 제해권을 확립하고 활발한 물류 유통을 이끌었다. 또한 아테네인들은 우크라이나의 밀을 주식으로 삼았고, 리비아의 약초로 병을 치료하며, 상아와 가죽으로 몸을 치장했고, 이집트의 파피루스에 글을 적고 범포로 옷을 지었으며, 크레타 섬의 삼나무로 신상을 조각하고 시리아의 향수를 쓰며 카르타고의 카펫과 방석에 몸을 기대고 이탈리아 반도 중북부 에트루리아의 청동 램프로 불을 밝혔다.

이러한 물적 자산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아테네는 최고조를 달리고 있었다.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등의 그리스 3대 비극작가들이 아테네를 빛냈다.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희극을 통해 모든 무지와 미신을 풍자했다. 최초의 역사가들로 언급되는 헤로도토스가 아테네로 찾아왔으며 투키디데스가 성장해가고 있었다. 소피스트들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회의론적 접근과 상대주의를 주장했다. 종교의 자유가 있었고 어떤 신을 믿든 관용을 베풀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역사상 처음으로 과학적인 접근을 의학에 시도했으며, 밀레투스의 히포다모스는 피레우스의 외항에 계획도시를 설계해 건설했고, 페이디아스원근법을 이용해 파르테논 신전의 외견을 보다 완벽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페리클레스는 아낙사고라스로부터 일식의 원리를 배워 일식에 두려워하는 선원들을 달래며 과학미신을 이겨야 한다는 신념으로 동료 아테네인들을 이끌었다. 아테네 정부는 정치학, 수사학, 철학과 여타 학문들을 시민들에게 거의 무료로 제공했다. 심지어 다소 노골적일 수도 있는 아테네와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적인 견해 역시 자유롭게 발표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젊은 시절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어린 플라톤을 비롯한 제자들과 어울리며 남긴 대화로 증명된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말처럼 그리스의 학교였을 뿐 아니라 서구 문명의 요람이었다.

페리클레스는 델로스 섬에 있었던 델로스 동맹의 금고를 아테네로 이전했고, 동맹국들의 공납금을 통해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완전히 파괴되었던 아크로폴리스를 재건했다. 여기서 파르테논 신전과 아크로폴리스의 성문 프로필라이아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적인 건축을 남겼다. 이러한 건축은 예술적인 측면 외에 실용적인 면도 갖추고 있었다. 페이디아스가 파르테논 신전과 함께 만든 금과 상아로 만든 아테나 여신상은 신전 건물 서쪽의 특실에 보관된 델로스 동맹의 금고를 지키는 역할을 했다. 페리클레스는 필요하다면 녹여서 함선이나 무기 구입에 쓸 수 있도록 여신상과 신전의 금도금도 제거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아테네와 외항 피레우스는 장성을 통해 견고하게 둘러싸져 방어되었으며, 이 강력한 성벽은 아테네 무적함대가 외부로부터의 식량 공급을 지켜내는 한 무너지지 않을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를 통틀어 장기간의 공성전을 수행할 역량을 가진 국가는 아테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많은 아테네 시민 모두가 소소한 나랏일에 이르기까지 참여했다. 이러한 투표는 에클레시아(=민회)라고 불리는 대규모 집회[16]에서 치러졌는데, 국가의 중대한 사항은 전부 이 집회에 회부되었고 이 모든 것이 투표를 통해 결정되었다. 아테네 민주주의자들은 수준 이하의 법안이 통과될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과거의 귀족적 제도라도 필요하다면 존속시키는 관용을 발휘했다. 에클레시아에 법안이 통과되기 이전에 불레라고 불리는 500인회[17]에서 법안을 준비했고, 준비된 법안이 평가된 이후에 에클레시아에 제시되는 심의 과정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고 했다. 민회와 500인회가 입법권을 관장했다면, 행정권은 10인의 스트라테고스[18]내각을 구성해 빠르고 효율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되었다. 사법권 역시 시민 배심원들 600명으로 구성된 시민법정이 관할했다. 그리고 독재를 막기 위해 스트라테고스를 제외한 모든 관직은 추첨을 통해 배분되었으며, 행정을 관할하는 10인의 스트라테고스는 실력에 의해 선출했지만 그 임기는 1년이었다.

아테네의 부와 강력한 해군,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를 통해 얻은 명분, 화려한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주의는 아테네가 당대 그리스의 헤게모니를 쥐는 근본적인 요인이 되었다. 페르시아 전쟁 초기의 경우, 그리스 도시국가 중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스파르타가 연합군 총사령관직을 맡는 등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지만, 플라타이아이 전투 이후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사실상 방관하고, 오히려 홀로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아테네를 공격하기까지 한 것에 반해 아테네는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가면서도 페르시아의 샤한샤가 페르시아 전쟁의 발발 원인이었던 이오니아의 도시국가들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승인할 때까지 전쟁을 수행했으며, 이는 아테네의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성장과 함께 자연스럽게 헤게모니가 아테네로 옮겨가게 된 요인이 되었다. 초기 동맹국들이 아테네와 함께 군사력을 부담하던 델로스 동맹은 아테네 함대의 질이 압도적으로 상승함에 따라 동맹국들이 전쟁비용을 부담하는 형태로 바뀌어갔고, 이런 변화를 통해 아테네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전쟁비용(에이스포라)이 부담스러웠던 델로스 동맹 소속국가들은 아테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반기지 않게 되었다.

4.1.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

"민중(데모스)은 비록 그들이 당신들보다 가난할지라도, 한 번도 돈을 위해 당신들에게 정의롭지 못한 일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 우리들 중 누구보다도 부유한 당신들은 이익이 된다면 우리 민중들을 희생시키면서 어떤 파렴치한 짓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정의는 당신들 편에 서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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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시불로스, 민주주의를 되찾고 반민주주의자와 스파르타 지지자들에게. <헬레니카> 중}}}
하지만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해 극렬히 반대하고 저항하는 이들 역시 존재했다. 그들은 아테네와 민주주의에 대한 수많은 비난을 기록들 속에 남겼고,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비난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전진은 이전까지 아테네를 지배하던 귀족 계급을 붕괴시켰고, 귀족들은 신분적 특권을 모두 상실하며 그저 부유할 뿐인 일개 시민으로 무산자들과의 평등을 감내해야 했다. 귀족의 후예임을 자부하며 스스로의 별 근거 없는 우월성을 믿는 부자들은 아테네의 빈민 테테스들이 자신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도저히 견디지 못했다. 그들의 공격 목표가 된 것은 민주주의와 해군이었다.
알키비아데스: 참주가 시민들을 설득하지 않고 법을 성문화해서 강제한다면, 무법인가요?
페리클레스: 내가 보기에 그런 거 같군.
알키비아데스: 민중(데모스)이 재물을 가진 사람들을 지배하여 설득하지 않고 성문화하는 것은 법일까요? 폭력일까요?
페리클레스: 우리도 그만한 나이 때에는 그런 생각이 강했지.
알키비아데스: 페리클레스, (제가) 그 시절 당신과 함께했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wiki style="text-align: right;"
청년시절 알키비아데스가 그의 후원자 페리클레스와 나눈 대화. 크세노폰, <회상> 중}}}
과거에 귀족이었던 부유층이 민주주의에 대해 적대감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해군에 대한 증오도 당연했는데, 이미 그 시점에 테테스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보증하는 것이 아테네의 해군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확했기 때문이다. 아테네 함대의 총기함 파랄로스 호[19]의 선원들은 마지막 한 명까지 열렬한 민주주의자로 군주참주, 과두정의 기미가 보이는 어떤 제안에도 반대했으며, 이 때문에 파랄로스 호민중의 몽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페리클레스가 둘째 아들의 이름을 '파랄로스'로 지어 해군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보여 줄 정도였다. 부유층들은 물질적인 이유로도 함대를 증오했는데, 선박 건조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공적 기부제(leitourgia)는 일종의 누진세로, 테테스가 함대 승무원으로 복무하고 함대 비용은 부유층이 납부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테네의 함대와 해운업의 발달로 인해, 아테네 주변의 소작농들은 얼마든지 아테네의 테테스가 되어 노잡이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아테네 인근지방의 토지를 소유한 부유층은 이전처럼 소작농들에 대한 인신적 지배를 시도할 수가 없었다.

물론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부자와 구 귀족층들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제공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해군증강정책에 격렬하게 반대한 아리스테데스테미스토클레스에게 당해 악명 높은 도편추방을 당한 바 있었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다시 아테네로 복귀해 테미스토클레스 이후의 아테네 함대사령관에 취임하기도 했고, 테미스토클레스를 몰아붙여 도편추방으로 복수하기도 했다. 이후로도 키몬, 니키아스, 알키비아데스 등은 아테네 정계에서 얼마든지 활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테테스들은 부자들이 원하는 것처럼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고, 에피알테스, 페리클레스, 클레온, 트라시불로스 등으로 이어지는 민주파 지도자들은 역량에서 과두정을 원하는 지도자들을 압도했다. 또한 부유층이 주장하는 별 근거 없는 엘리트, 귀족, 부자 우월론은 아테네의 대중들에게 당연히 설득력을 가지지 못했고, 대중적 영향력이 필요한 극작가, 웅변가, 교사, 정치가 등은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자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다만 민중파가 우세일 때도 일반대중인 무산계급 테테스는 내각을 구성하는 지도자를 거의 배출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기도 했다.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페리클레스는 왕정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성골 귀족출신이었으며, 그에 대항한 대표적인 파퓰리스트 클레온 또한 상업파벌에 속한 귀족이었다. 위에 민주정의 복고를 이룩한 트라시불로스도 자비로 3단 전함의 비용을 내놓는 1급 귀족이었다. 한마디로 아테네의 정치는 이념이 다른 귀족 정치인들끼리 치고박는 형국이었다. 공공교육이란 개념이 없는 시대였기 때문에, 교육에 필요한 비용과 자유시간을 가진 것은 최소 시민계급이었고, 따라서 아테네의 인재풀도 좌우를 떠나서 귀족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다만 그러한 귀족들 중 민중파가 대중의 선택에 따라 지도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을 뿐.

또한 아테네는 전근대 사회에서는 예외적일 정도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고,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저술활동을 남길 수 있는 것은 대개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부유층들이었고, 그러한 저술은 현대까지 내려오기도 좋았다. 플라톤은 아테네 시민들을 보고
"정치가 오락이라도 되는 양 즐겨본다"
고 비난하고, 철인정치를 지지하며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아테네 민주주의에 있다고 몰아붙였지만, 사실 소크라테스는 늙을 때까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고, 플라톤이 열렬히 옹호하는 그의 외삼촌 카르미데스와 당숙 크리티아스가 매국노 독재자가 아니었다면 소크라테스는 죽기는커녕 재판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플라톤 본인도 아테네가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가 있어서 마음껏 아테네를 깔 수 있었다.

사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당대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별달리 부족한 면을 보인 적이 없다. 물론 큰 오판도 여럿 저질렀다지만, 과두정 지배하의 다른 도시국가나 전제군주정 페르시아 제국 역시 큰 오판을 여럿 저지른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테네 민주주의의 장점은 당대의 다른 국가들이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잘 드러난다. 아테네가 민주주의를 통해 얻어낸 소속감으로 말 그대로 멸망 직전의 위기에서 모든 시민이 모든 것을 헌신해 아르기누사이 해전의 승리를 얻어낸 것과 같은 성과는 다른 국가들은 보여주지 못한 것이었다[20] 아테네가 제해권을 쥐고 동맹국들에게 패권주의를 강요했다는 비난은 많지만, 아테네의 이오니아 지배는 당대의 다른 국가들보다는 분명히 관대하고 효율적인 것이었다. 페르시아의 지배는 이오니아의 반발로 인해 붕괴되었고, 스파르타는 그 폭압적인 지배로 인해 아테네를 굴복시키고도 이오니아를 얻지 못했지만, 아테네는 몇 번이고 붕괴한 델로스 동맹을 재건시킬 수 있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가 동맹국을 제압할 군사력이 없는 상황에서도 델로스 동맹은 유지될 수 있었다.
파일: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인구구성.png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현대 민주주의와 비교할 경우 의미를 갖지만, 이 역시 과다한 경우가 많다. 아테네가 여성참정권이 전혀 보장되지 않았고, 이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는 점은 분명한 아테네 민주주의의 한계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빈민 및 무산자 계급이 민주적 권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은 아테네 힘의 핵심이였던 해군에 합당한 공헌을 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참정권 요구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흑인의 권리, 여성의 권리 등 현대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은 아무런 기반 없이 바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해당 집단의 정치적 발언력이 상승함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예로 미국 흑인들 같은 경우, 남북 전쟁 이전에는 일부 북동부 뉴잉글랜드 주들을 제외하고, 국가적으로 시민권과 참정권이 인정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쟁 직전에는 Dred Scott v. Sandford을 통해 흑인은 미국 시민이 될 수가 없다는 연방법원 판결까지 나왔었으나, 남북전쟁에 흑인들이 대거 미군에 입대하면서 미국 정부가 단순히 흑인노예해방이 아니라 어쩔수 없이 흑인 참정권을 인정할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 때도 군대에 전투병으로 참가할 자격이 있었던 흑인남성의 시민권과 참정권이 보장되었지, 여성은 제외되었다. 실제로 미국 <수정헌법 15조>를 논의할 때 노예제 해방에 참여했었던 여성운동가들이 미국 <수정헌법 15조>에 여성의 참정권을 넣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프레드릭 더글라스같은 흑인 인권운동가들, 엘리자베스 스탠튼루크레시아 모트같은 백인 여성인권운동가들, 그리고 프랜시스 하퍼같은 흑인 여성인권운동가들이 서로 비난하면서 싸우다가 각각 서로 다른 단체를 만들어서 찢어진건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현대의 여성참정권 역시도 산업혁명으로 기계문명이 발달하여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담당했던 집안일 등의 부담이 줄어들어 여성들도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20세기에나 겨우 얻어낸 성취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21] 이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한계라기보다는 당대 기술의 한계로 봐야 할 것이다.

또한 노예제도 역시 아테네 민주주의의 한계이나, 이는 일반적으로 과장된 비난이 많다. 우선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노예주들의 민주주의라는 비난이 있으나,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무산자 테테스, 당연히 노예도 소유하지 않은 이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리고 아테네는 아르기누사이 해전 이후에 참전 노예들을 해방하고 시민권을 지급했으며, 트라시불로스는 민주주의를 회복한 이후 아테네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모든 노예들을 해방하고 시민권을 지급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다수의 노예를 소유한 부유층의 반발로 트라시불로스의 구상은 실패했지만, 아테네 민주주의 역시 노예를 당연시한 것도 아니고, 이를 개선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쉽게 무시되는 부분이다. 결국 아테네 민주주의를 현대 민주주의와 비교하며 비난하는 것은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을 현대의 엔진과 비교하며 비난하는 것과 다름없다. 고대 그리스 민주정은 현대 민주주의의 '시작점' 흑은 '프로토타입'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점을 감안하지 않은 비판은 그저 비판을 위한 비판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외국인미성년자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도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외국인의 경우 지방자치제도의 일환으로 거주민에게 지방선거에서 투표권을 주는 정도이며, 미성년자의 기준은 점차 내려가는 추세지만 어쨌든 일정 연령 미만의 인구를 성인이 아닌 것으로 취급하여 투표권을 주지 않는다는 원칙은 어떤 나라에서도 불변이다. 아테네의 경우, 아테네 시민권자의 요건을 부모가 모두 아테네 시민일 경우에 한정시킨 페리클레스의 법률을 들어 외국인에게 폐쇄적이었다고 비난하는 경우가 잦지만, 이는 극히 짧은 기간에만 적용되거나 사실상 적용되지 않은 법률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테미스토클레스만 해도 어머니가 아테네 시민이 아니었고, 페리클레스의 시대에도 아테네로 귀화한 외국인 철학자, 예술가는 많았으며,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반기에는 아르기누사이 해전에 참전한 이들은 외국인, 노예를 불문하고 시민권을 지급했고, 아테네에게 마지막까지 동맹의 신의를 지킨 모든 사모스 섬 주민 전원에게 아테네 시민권을 지급하는 등의 일이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모든 성인 남성 자유민에게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준다는 것만으로도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19세기 후반의 미국이나 유럽민주주의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22]

4.2. 아테네 민주주의의 문제점

하지만 이러한 옹호와는 별개로, 아테네의 민주주의에도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통치에 적합한 능력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이었다. 이는 플라톤의 비판점이기도 하다.

통치자를 뽑는 아테네의 방식을 살펴보면 이 문제점은 명백해진다. 플라톤의 관점에서든 현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든, 통치자는 능력에 따라서 판별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플라톤은 어린 시절부터 똑같은 출발선에서 개인들을 교육시켜, 성장한 후에 적합한 소수를 판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또한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선거를 통하여, 능력이 있는 소수를 판별해내려고 한다. 선거는 물론 간접민주주의를 잘 보여주는 제도이지만, 동시에 명백하게 통치에 적합한 소수를 긍정하는 제도이다. 따라서 현대 민주주의는 '능력의 긍정'이라는 점에서는 플라톤주의적이다.

하지만 아테네는 '소수가 가지고 있는 통치 능력'을 극단적으로 배격했고, 통치자를 추첨으로 뽑았다. 모든 시민이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추첨을 통하여 공평하게 돌려먹자는 것이었다. 플라톤이 비판하는 것도 이것이었다. 하지만 아테네 민주주의는 중우정치로 변형될 위험이 있는 차원을 뛰어넘어, 중우정치라는 개념을 인정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 있는 사람을 판별하여 권력을 맡기겠다는 의지가 없었다.[23] 이는 현대 민주주의와의 비교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이 아니라, 당대의 기준에서도 명백한 문제점이었다. 아르기누사이 해전 이후의 광기는 비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라고 변호할 수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아르기누사이 해전처럼 그로기 상태의 도시에서 시민들이 최후의 힘을 짜내어 기적을 만들어낸 사례는 비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있다. 이 반론이 부당하다면, 같은 원리로 아테네가 해전 이후 장군들에게 보여준 광기도 아테네 민주주의의 특성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물론 아테네 민주주의가 현대 민주주의와 비교할때 가지는 장점도 있기는 있다. 아테네는 성인 남성 시민의 수가 30,000명 밖에 안되었으며 근본적으로 도시국가였다. 때문에 현대 국가와 비교한다면, 직접 민주주의의 요소가 상대적으로 더 드러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소규모의 도시국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한 도시의 공간적 한계에 얽매일 수 밖에 없었다. 아테네 시민들 역시도 인구가 늘어날수록 모든 시민의 의견을 일일이 반영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때문에 오늘날의 대의 민주주의처럼, 아테네 역시도 소수의 개인들에게 권력을 부여하려는 시도를 하여 이를 보완하기는 했다. 그러나 '통치 능력의 차이'라고 하는, 인간에게 분명히 존재하는 사실들을 부정했기에, 통치자들을 시민 중에서 추첨으로 뽑는다는 (당대 기준으로 볼때도) 논란이 일어나는 결론이 도출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아테네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를 몰랐다는 점에 문제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통치 능력의 차이를 부정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문제점을 보여주었다.[24]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하여 공격할때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오류는, 현대 민주주의와 비교하여 아테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는 점이다. 반대로 현대의 옹호자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오류 역시 현대 민주주의와 연결하여 아테네의 문제점을 덮으려 하는 오류를 쉽게 범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아테네는 '통치 능력'의 차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이 차이점을 무시하는 것은, 마치 전제군주정과 입헌군주정을 '군주정'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억지로 묶는 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현대 민주주의는, 아테네 민주주의를 계승하되 성문화된 헌법을 도입하고 플라톤의 비판[25]을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아테네 민주정은 '단순 다수정'의 의미인데 반해, 현대 민주정은 '혼합정'을 지지한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즉 국가권력을 3등분하여, 행정부는 군주적 성격의 1인 지도자가, 입법부는 (고전적 의미에서) 민주적인 국민 대표들이, 사법부는 철저한 검증을 거친 소수 엘리트들이 이끈다는 점에서 아테네식 민주정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즉
'행정부는 군주정에, 입법부는 아테네식 고전 민주정에, 사법부는 귀족정'
에 바탕을 둔 것이 현대 민주정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이러한 혼합정은 로마 공화국이 아테네의 체제를 보완하여, 정치 체제를 민주정 요소(민회), 귀족정 요소(원로원), 군주정 요소(집정관)로 구성한 것에 기원을 둔다.

5. 아테네의 사회

아테네 사회는 다른 그리스 국가들, 특히 스파르타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개방적이었다. 이 때문에 구성은 귀족-시민-거류외인(居留外人)-노예로 구성되어 있었다.[26] 정식명칭으로는 귀족도 상위계층과 하위계층이 존재했는데 최상류층으로는 유파트리데(Eupatridae) 상류층으로는 지오모리(Geomori)로 각각 불렸고 시민계급에서 중산층은 펜타코시오메딤노이 (Pentacosiomedimnoi) 중소득층은 히페스(Hippeis) 저소득층은 제우기테(Zeugitae)라고 불렸다. 각 계층의 명칭은 재산상의 세금이나 수익을 기점으로 내놓은 명칭이라 할 수 있으나 시민내 경제적 수준에 맞추어서 불리는 명칭이기도 했다. 즉 솔론의 개혁에서 나왔던 그 명칭이 사회적 클라스를 구분하는 형태라고 볼 수 있었다. 거류외인의 경우에는 바로 메틱(Metic)이라고 불렸고 노예는 페네스테(penestae) 또는 헬로트(helots)라고 불렸다. 노예말고도 시민에서 채무등으로 인하여 농노나 노예가 된 사람들을 세이사크테이아(Seisachtheia)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솔론의 개혁때 부채탕감등으로 사라졌다.

귀족시민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시민만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시민으로서 권리뿐 아니라 의무도 수행했는데, 농지 경작과 납세의 의무를 다하며 정치에도 참여해야 했고, 농업에 종사하며 군인이기도 했다. 시민은 부모 한쪽이 아테네 시민권자라면 외국인과의 혼혈도 시민권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 보통 시민이 확실한 아테네 남성을 아버지로 두었다면 거의 자동으로 아테네 시민으로 대우받았다. 다만 이 것을 기원전 451년부터 양쪽 부모가 아테네 시민권 출신이어야 시민권 부여로 바꾸었으나 흐지부지되기도 했다.[27] 그리스내에서만의 기준으로 본다면 시민권 부여에 있어서는 거의 로마급에 가까운 국가가 아테네였다.[28]

반면에 거류외인(居留外人)/메틱(Metic)[29]들은 자유인으로서 신체적인 자유는 누릴 수 있었지만, 아테네 시민권은 가질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아테네의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고, 재판에 출석할 수도 없어 필요한 경우에는 아테네 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건 생각보다 심각했는데 아테네에서 시민보다 낮은 입장의 여성의 경우에도 재판을 출석할 수 있었던 점을 고려해보면 거류외인 즉 외국인은 아테네 시민의 도움이 없이는 사법권의 방어가 불가능했다는 소리이다.

노예 신분의 경우에는 거류외인들보다 차별을 당연하게 심하게 받았다. 다만 이는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이나 특히 스파르타에 비한다면 매우 온건한 편이었다.[30] 아테네에서 노예는 돈을 모아 스스로의 자유를 사거나 다른 사람이 몸값을 치러준 경우, 혹은 주인의 호의로 해방된 경우에는 거류외인과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즉, 아테네의 노예는 대체로 나쁜 대접을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른 문명과는 달리 신분의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웠을 뿐 아니라 의복과 행색 등에서 시민과 거류외인, 그리고 노예의 차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예제도에 가장 먼저 비판의 목소리와 사법제도를 정비한 것도 아테네였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아테네 노예제도는 상대적으로 상당히 온건했다.[31] 다만 노예들도 혜택을 누리는 쪽과 아닌 쪽이 존재했는데 은광이나 채석장, 조선소 같은 곳에서 일하는 노예들의 처우는 가정이나 소규모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의 경우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가정에서 일하는 노예들의 경우는 많은 경우 상당히 따뜻한 대접을 받은 편이었고, 노예 해방의 기회도 더 많이 잡을 수 있었기에 노예들도 업종별로 복불복이 갈렸다.

여성의 경우에는 고대 그리스가 다 그렇듯이 입지가 낮았다. 여성은 항상 남성의 보호 아래에 있어야했고, 축제나 장보는 걸 제외하면 집안에서 함부로 나오지를 못했을 정도였으며, 어떤 것이든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없었고, 언제나 남편이나 아버지, 남자 친척과 같은 남성 후견인이 있어야만 했다. 여성은 가정에서 실잣기, 직물 짜기 등의 활동을 하고 있었고, 가난한 여성은 생계를 위해 시장에서 상업 활동을 하며 가정경제에 기여하기도 했다. 또한 여성이 결혼할 때 가지고가는 지참금은 상속받는 재산이었으며 스스로 지참금을 사용하지는 못했으나, 지참금이 여성의 부양과 재혼에 쓰이고, 남성 집안의 재산 형성에 기여함으로써 이혼을 방지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음을 고려해 본다면 여성의 역할이 그리 작은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교육은 주로 가사 활동에 관한 것과 여성 고유의 수작업 기술 및 읽기와 쓰기, 셈하는 것을 기초적인 정도로 배우는 정도였다. 또한 교육에 대한 기회는 하층 계급으로 내려갈수록 더 적었다. 다만 '헤타이라'(Hetaira)의 경우, 특이하게 성노동자이면서도 고급 여성 지식인으로서의 대우를 받았다. 헤타이라는 조선시대의 1패 기생이나 유럽의 코르티잔과 유사한 계층으로, 아테네의 고위 귀족이나 지식인 등을 상대했기 때문에, 그들과 수준 높은 담론을 나눌 정도의 교양과 지성을 갖추어야 했기 때문이다.[32]

여성은 평균 만 15세부터 혼인 적령기로 보았고[33] 남성은 30세 즈음으로 보았다.[34] 이 때문에 남성간의 동성애 문화가 유독 발달했고 여성은 그저 애낳는 기계 수준의 대우를 받았던게 사실이다. 물론 여성도 동성애가 있었으나 남성 동성애처럼 존중받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천박하다는 비난을 받았었다. 여담으로 첩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첩은 팔라케(Pallakae)/팔라카이(pallakai)라고 불렸다.

참고로 아테네를 포함해서 그리스에서는 남성의 성기가 작으면 성욕이 절제되어 아름다운(?) 성생활의 상징으로 보아서 존중받았다고 한다. 동시에 남녀 모두 음모를 전부 다 제모했다.[35]

종교의 경우 아테네 역시 고대 그리스였기에 다신교였다. 특히 아테네에서의 상징인 아테나을 매우 숭배했으며 아폴론 등도 숭배했다. 또한 고대 그리스가 그러하듯이 아테네도 신전에서의 종교적 숭배는 보통 찬가와 기도를 낭송하면서 가축을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런 다음 제물로 바친 가축의 일부는 불태워져 신들에게 번제로 바쳐졌으며 나머지는 숭배자들이 먹었다. 신전에서는 또한 앞서 말했던 신탁을 내리기도 했는데, 이는 국가의 정치적인 문제와 전쟁에서부터 개인의 일까지 신탁을 내려 알 수 있었다. 신탁에 대한 믿음도 대단했는데, 고대 그리스인들은 ‘최고의 예언능력’을 지녔다는 아폴론 신을 대신한 무녀(巫女) '피티아'(Pythia)가 미래를 여는 비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피티아는 지금의 교황이나 달라이 라마 못지않은 명성을 누렸다.

6. 펠로폰네소스 전쟁

사람으로 태어난 몸은 조심스럽게 마지막 날을 기다릴지니, 그 어떤 괴로움도 당하지 않고 삶을 끝내기 전에는 세상의 누구도 행복하다 부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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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 코러스 중[36]에서.}}}
페르시아 전쟁으로 성립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동맹은 파탄난 지 오래였다. 하지만 페르시아 전쟁 도중 아테네가 스파르타의 공격을 격퇴한 이른바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30년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고,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각자의 세력권을 존중한다는 평화조약 속에서 어느정도 평화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에피담노스 분쟁(기원전 436~ 433)으로 이러한 평화는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서북쪽 변방에 위치한 식민도시 에피담노스의 두 파벌을 코린토스와 코르키라(코르푸 섬)가 서로 지지하면서 발생한 이 분쟁에서 아테네는 소극적이나마 코르키라의 편을 들었고, 그 결과 코린토스는 다시 원한을 품게 되었다. 또한 이전 전쟁에서 마지막에 아테네를 배신했던 보복으로 메가라에 대해 경제적 금수조치를 취하자 스파르타도 본격적으로 개입해, 아테네에 대하여 이러한 조치를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아테네는 이를 거부했고, 결국 스파르타는 다시 전쟁을 결의했다.

페리클레스가 이끄는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비해 강력한 국력과 델로스 동맹의 견고함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고, 이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전략을 세웠다. 성벽으로 보호받는 아테네와 외항 피레우스에 인근 아티카 지역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아테네 육군은 지상전으로는 수성전으로 일관해 강력한 스파르타 육군과의 정면 승부를 피하며, 아테네 해군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봉쇄하여, 스파르타의 취약한 경제력을 압박하고, 스파르타 동맹국들을 고사시켜 스파르타 주도하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무너뜨리고, 전쟁 수행능력을 상실시킨다는 대전략이었다. 아테네에 밀집한 인구는 우크라이나에서까지 식량을 수송해 올 수 있는 아테네의 함대가 얼마든지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이론상 최강의 전략이었다.

특히 상황이 아테네에게 나빴는데 아테네 인근에 전염병이 좁은 성벽 내에서 돌기 시작하면서 대역병으로 발전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식량을 수송해 온 함선에서 장티푸스로 추정되는 대역병이 아테네로 퍼지기 시작했고, 이 역병의 결과 아테네는 주민의 1/3 가까이(대략 7~80,000명의 시민들)를 상실하는 끔찍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아테네는 더 이상 압도적인 재정의 힘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인력을 동원하는 것조차 위태로웠으며, 그들을 이끌던 페리클레스 역시 자신의 전략 실패로 실각하고 역병으로 사망했다. 그리스 비극의 최대 명작이라 불리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이렇게 위기에 처한 아테네를 그려내고 있다고 평해진다. 합리주의의 신봉자였던 페리클레스를 오이디푸스 왕에 비기고, 대역병에 신음하던 아테네는 오이디푸스로 인해 역병이라는 징벌에 처해진 테베에 비긴 것이다. 또한 페리클레스는 이렇게 계속된 견제로 스파르타를 협상으로 이끌려고 했지만, 스파르타는 전혀 그러지 않았고, 이 와중에 자신들의 논밭이 불타는 것을 본 아테네 시민들에게 페리클레스는 계속해서 공격받았다.

아테네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전쟁을 계속해 나갔다. 육상의 공격은 성벽으로 방어하면서 함대를 보내 펠로폰네소스 반도 각지를 타격했다. 스파르타 입장에서는 바닷가에 가까운 지역이면 어디를 공격받을지 모른다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지만 스파르타의 억압받던 농노 헤일로타이들이 봉기할 수 있다는 것도 위험 요인이었다. 아테네 함대는 대역병 등으로 규모가 크게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계 최고의 선원들과 항해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은 77척의 함대로 포르미온이 이끄는 20척의 아테네 함대와 나우팍토스 해전을 벌였으나, 아테네의 노련한 승무원들을 적극 이용한 충각돌격 전술에 휘말려 역으로 괴멸되었다. 이를 계기로 아테네는 제해권을 되찾았고 스파르타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테네의 명장 데모스테네스는 스파르타 동맹국이었던 암브라키아에 괴멸적인 타격을 가하여 전쟁에서 철수시켰고, 스파르타를 상시적으로 괴롭힐 수 있는 위치(필로스)에 기지를 구축했다. 이를 무너뜨리려고 접근한 스파르타 육군을 상대로 클레온은 데모스테네스와 함께 경보병 전술로 승리를 거두어 스파르타 정예 중장보병 3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무적으로 여겨졌던 스파르타 육군이 무기력하게 항복한 사실은 당시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일으켰다(필로스 곶 전투스팍테리아 섬 전투).

그러나 아테네군은 보이오티아 지방의 중심 도시 테베를 굴복시키고자 했다가 델리온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게 되었고[37], 스파르타의 명장 브라시다스가 북쪽 트라키아 일대로 파견되어 암피폴리스를 포함한 그 지역 도시들을 제압하면서 성공적으로 보였던 아테네의 공세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일로 트라키아 지역의 책임자였던 투키디데스가 추방당했다. 이후 이 지역을 다시 제압하고자 파견되었던 강경파의 수장 클레온이 브라시다스와 같이 전사하면서(암피폴리스 전투) 양측의 강경파는 힘을 잃게 되었고, 아테네측의 온건파였던 니키아스의 주도로 평화협정(니키아스의 평화)을 맺었다. 공식적으로는 평화협정을 맺고 동맹까지 맺었지만 이는 표면상의 것이었고, 양측은 전쟁으로 얻은 성과를 포기하지 않아 평화협정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간접적으로 서로를 공격하고자 했다. 결국 평화협정은 오래가지 못하고 전쟁이 다시 터지고 만다. 이 시기에 바로 악명 높은 멜로스 공격이 있었다. 아테네는 소규모 중립국인 멜로스를
'정의는 힘 있는 자가 정하는 것'이며, '약자는 힘 있는 자가 만든 정의에 순응할 때 행복과 안정을 얻을 수 있다.'
라는 식의 논리로 굴복시키려 들었지만 멜로스가 이를 거부하자 도시를 점령한 후 모든 남자를 죽이고 여자와 아이를 노예로 팔아버렸다. 이 때 아테네 사절과 멜로스 대표단이 협상한 내용이 바로 유명한 <멜로스의 대화>이다.[38]

<멜로스의 대화>는 투키디데스를 통해 전해진다.
아테이인 사절단: 우리는 지금 이를테면 우리가 페르시아인들을 물리쳤으니 우리에게는 지배할 권리가 있다든가, 또는 여러분이 우리에게 불의한 짓을 해서 응징하러 왔다든가 하는 따위의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지 않을 것이오. 그런 말을 아무리 장황하게 늘어놓아도 여러분을 설득하지 못할 테니까요.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여러분은 라케다이몬의 이주민이지만 이 전쟁에서 라케다이몬 편을 들지 않았다든가, 우리를 해롭게 한 적이 없다는 말로 우리를 설득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 마시오. 대신 여러분은 우리 양쪽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감안하여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도록 해보시오. 인간관계에서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는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쯤은 여러분도 우리 못지않게 아실 텐데요.

멜로스인 의원들: 여러분이 정의를 도외시하고 득실에 관해서만 논의하자고 하니 하는 말인데, 우리가 보기에는 보편적인 선(善)이라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 여러분에게 이익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위기에 처한 사람은 누구나 공정한 처우를 받아야 하며, 다소 타당성이 결여된 소명에 의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원칙이 여러분에게도 이익이 될 것입니다. 귀국이 넘어졌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심하게 보복하는 것인지 당신들이 남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줄 날이 올 테니 말입니다.

(중략)

멜로스인 의원들: 여러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는 것이 여러분에게 이익이 되듯 우리가 여러분의 노예가 되는 것이 어떻게 우리한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테나이인 사절단: 여러분은 항복함으로써 무서운 재앙을 면하고, 우리는 여러분을 살육하지 않고 살려두는 것이 이익이니까요.

멜로스인 의원들: 여러분은 우리가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적대적이 아니라 호의적인 중립 국가로 남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단 말입니까?

아테나이인 사절단: 용인할 수 없소. 여러분의 호의가 여러분의 적대감보다 우리에게 더 위험하오. 여러분의 호의는 우리가 무력하다는 징표로, 여러분의 증오심은 우리가 강력하다는 증거로 우리 속국들에게 받아들여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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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5.89-95.}}}
또한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알키비아데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북부의 아르고스와 아테네의 동맹, 그리고 아르고스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만들어 이를 통해 스파르타를 무력화시키고자 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중부 도시들인 만티네아, 엘리스 등이 이에 응했고, 스파르타는 북쪽의 다른 동맹국들과 고립되는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라도 스파르타와 동맹인 아테네는 적극적인 지원을 할 수 없었고, 아르고스-만티네아-엘리스 동맹군은 만티네아 전투에서 스파르타에 참패하여, 새로운 동맹을 통한 스파르타 공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아테네는 다시 시켈리아(시칠리아) 섬 동부의 대도시 시라쿠사를 공격해서, 스파르타를 고립시키고자 했다. 이때 아테네는 160척의 아테네 직속 함선을 포함한 총 216척의 함선과 40,000명에 달하는 인력, 4,500탈란트[39]에 달하는 막대한 비용과 데모스테네스, 라마코스, 니키아스, 에우리메돈, 알키비아데스 등의 아테네 최고의 지휘관들을 대원정에 투입했으나(시칠리아 원정, BC 415~BC 413), 여러 실책 및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의 트롤링, 스파르타에서 파견한 길리포스의 전략 덕에 완벽한 참패를 당했다. 이로 인해 아테네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고,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약화를 노려 아테네가 먼저 휴전을 깼다고 주장하며 다시 군대를 일으켰으며, 페르시아의 샤한샤 다리우스 2세는 스파르타에 재정과 지상군을 지원했다. 시칠리아 대원정의 참패로 약화된 아테네에 대항해 반항적인 델로스 동맹의 종속국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약화된 민주주의를 전복하고 과두정을 세우기 위해 부유층들이 스파르타와 결탁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아테네는 모든 것을 잃었고, 모든 그리스인들은 아테네가 곧 멸망할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테네는 굴복하지 않았다. 쿠데타를 일으킨 과두정 세력에 맞서 사모스 섬에 주둔한 아테네 함대가 민주주의를 지켜낼 것을 결의하고, 아테네 내의 중도파가 이에 호응해 쿠데타 세력을 다시 추방했다. 그리고 아테네는 다시 한 번 반격에 나섰다. 가장 중요한 식량공급로를 다시 되찾기로 결의한 아테네는 모든 함대를 동원해 헬레스폰토스 해협으로 파견해 스파르타와 맞섰다. 키노세마 해전아비도스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는 페르시아의 자금과 지상군 지원까지 받는 스파르타 해군을 연파해, 키지코스 해전에서 완전히 전멸시키고, 페르시아군까지도 몰아냈다. 이후 아테네는 이 지역의 반란 종속국들을 다시끔 제압해 식량수송로를 다시 뚫었다. 그리고 이오니아 일대를 남하하면서 대부분의 반란 종속국들을 제압해 전황을 다시금 유리하게 뒤집었다. 하지만 리산드로스는 스파르타인의 자존심을 굽히고 페르시아의 젋은 키로스 왕자[40]의 마음을 사는 데 성공하여, 막대한 지금 지원을 약속받고 그 힘으로 우수한 뱃사람들을 끌어들이며 대규모 함대를 구축해, 노티온(노티움) 해전에서 승리해 다시금 아테네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결국 아테네는 뛰어난 지휘관들도, 그리스 제일로 불리던 부유한 재정도, 세계 최고로 여겨지던 선원들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제야말로 아테네는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지원 없이도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리산드로스를 귀환시켰다.

하지만 아테네는 이번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아테네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반격에 나섰다. 페리클레스 시절에 건설한 신전들의 금박까지 떼어내고 긁어모아가며 자금을 모으고, 가능한 모든 인력을 총동원했으며, 노예들에게도 자유와 아테네 시민권을 약속해가며 승무원들을 모았다. 그래서 지휘권 통일에는 실패했고 질적으로는 형편없이 떨어진 함대였지만, 아테네는 110척의 함선을 건조해 도합 155척의 대함대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아테네 최후의 함대는 질적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스파르타 함대를 궤멸시키고 바다를 완전히 지배했다. 그러다보니 엄청난 타격을 입은 스파르타는 마지막으로 아테네에게 평화 협정을 요청했다. 하지만 니키아스의 평화 이후 아테네인들은 스파르타를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이를 거부했다. 그런데 아르기누사이 해전의 전후처리가 미흡했고, 이와 관련된 장군들의 재판에서 아테네인들은 장군들을 처형해 지휘관들을 많이 잃어버리는 큰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를 알게된 스파르타는 정치적으로 몰려 있었던 리산드로스를 사면하여 다시 투입하고, 페르시아의 지원을 이끌어내 함대를 재건했다. 그리고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해군을 격멸시켰다. 이 패배로 아테네는 큰 타격을 입었는데 모든 함대를 상실하게 되었고, 식량 공급까지 끊긴 상태로 최후까지 아테네와의 동맹을 지킨 사모스 섬과 함께 6개월간 절망적인 저항을 벌였으나, 결국 버틸수가 없어 스파르타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굴욕적인 항복으로 아테네는 장벽을 파괴해야 했고, 민주정의 근간이자 위대한 자부심이었던 함대를 모두 폐기해야 했으며,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민주주의마저 버리며 '30인 참주'를 받들 것을 강요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아테네의 숨통은 끊어졌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7. 민주주의의 귀환

"당신들은 견고한 성벽과 무기들, 그리고 자본과 강력한 동맹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들은 이런 것들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한 우리에게 이미 패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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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시불로스, 민주주의를 되찾고 반민주주의자와 스파르타 지지자들에게.}}}
하지만 아테네는 이번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아테네의 항복 이후 민주주의에 적대적이었던 아테네 부유층-귀족 30명은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아 30인 참주정을 세웠다. 크리티아스[41] , 테라메네스, 카리클레스 등이 이끈 30인 참주정은 부유한 시민 3,000명에게만 투표권과 공직의 권리를 주고, 기존 수만명의 시민들의 권리를 박탈했으며, 정적들에게 불법적으로 빈번한 사형 선고를 내렸다. 아테네 민중의 저항이 거세지자, 그들은 스파르타 군대를 아테네에 주둔시킬 것을 요청했으며, 스파르타군의 지원을 받아 반대파를 축출했다. 하지만 그들은 채 1년도 지배할 수 없었다. 겨울, 트라시불로스와 70명의 민주주의 세력들이 필레의 군사 기지를 점령했다. 30인 참주들의 군대는 이를 공격하려 했으나 눈보라로 인해 실패했다. 70명으로 시작된 민주주의 저항세력은 이내 세력을 불려, 1,000여 명이 되었을 때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를 탈환했다. 이어진 몇 차례의 전투에서 그들은 승리했고, 30인 참주들의 수뇌부들은 죽었다. 마침내 민주주의 저항세력은 아크로폴리스에 이르렀다. 트라시불로스는 여기서 참주들이 부유한 시민들로만 만든 3,000인 의회를 소집해 민주주의의 부활을 알렸다.

스파르타는 1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아테네의 30인 참주정을 포기하며, 참주정 세력들의 범죄행위에 대한 사면불기소만을 조건으로 아테네 주둔 스파르타군을 철수시켰다. 이로서 스파르타의 패권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스파르타는 이오니아 도시국가들의 민주주의를 전복하고 과두제를 강요하며 아테네가 이전에 요구했던 것의 두 배가 넘는 공납금을 강요하고 온갖 전횡을 일삼았으며, 전쟁 자금의 대가로 페르시아 제국에 소아시아의 도시들을 넘겼기에 다른 그리스 국가들의 반감을 크게 사서 최소한의 명분마저 상실했다. 페르시아는 그들에게 큰 위협이었던 아테네를 쓰러뜨리기 위해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지만, 오만한 스파르타인들을 좋아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페르시아는 코논이 이끄는 8척의 아테네 망명 함대를 지원해 스파르타를 공격했다. 페르시아에서 오는 자금이 끊기자마자 취약한 스파르타의 경제 구조는 붕괴해버렸고, 다시 아테네인들은 열렬히 호응하며 코논의 함대에 합류했다. 스파르타 함대와 제해권은 재건된 아테네 함대의 공격에 공중분해되었다. 아테네 함대와 함께 이오니아 일대에서 폭압적인 스파르타와 과두정에 반대하는 민주주의 혁명이 잇달아 일어났으며, 그들은 다시 아테네와의 동맹에 가입하는 것을 원했다. 그리하여 제2차 델로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제2차 델로스 동맹은 이전과 달리 공납금, 아테네의 동맹시 토지 소유, 이주민 파견 등의 제국주의적 색체가 지워진 것이었다. 아테네는 1,200명의 부유층들에게 함대 편성비용을 부담시키는 심모리(Symmory) 제도를 도입해 함대 유지비를 충당했다.

이러한 아테네의 회복 과정에서 주목할만한 사건은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회복시킨 트라시불로스는 이방인과 노예를 비롯하여 민주주의를 복원하기 위해 싸운 모든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할 것을 주장했으나, 반발이 커서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두 번째로 소크라테스의 처형이다. 소크라테스 개인은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인물은 아니었으나[42] 최소한 수없는 트롤짓의 결과로 거진 반역자가 된 알키비아데스나 30인 참주정을 이끌고 스파르타에 붙은 매국노가 되어 반민주적인 만행을 자행한 크리티아스 등이 소크라테스의 제자임은 명확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주변에 반민주주의 귀족-부유층-과두정 지지자들이 결집해 있었다는 것 역시 명확했다. 아테네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왔고 소크라테스는 노년기까지 이를 향유해 왔지만, 아테네는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할 수 없었다. 스파르타와 공식적으로 사면과 불기소를 약속했기에 명목상으로는 반역죄나 내란죄로 소크라테스가 기소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반역 혐의를 적용해 소크라테스에게 침묵하거나 아테네를 떠날 것을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죄를 변호하는데 실패하자 침묵하거나 추방당해서 사느니 순교를 택하고, 배심원들을 도발했으며, 결국 원하는 대로 사형을 얻어냈다.[43]

어쨌든 아테네는 다시 함대를 재건하고 제해권을 장악한 강대국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문화적으로도 다시 전성기를 맞이해, 안정을 되찾은 아테네는 아테네와 민주주의, 해군에 관한 모든 것들에 대해 늘상 폭언을 내붓는 플라톤을 보호하는 관용 역시 되찾았다. 플라톤은 자신의 폭언과는 별개로 아카데미아를 아테네에 건립했고,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마케도니아 출신의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에서 활동하며 리케이온을 아테네에 건립했다. 이소크라테스크세노폰이 다양한 저술을 남겼고, 데모스테네스가 고대 최고의 연설가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동시대 스파르타가 에파미논다스가 이끄는 테베신성부대에게 레욱트라 전투(BC 371. 7)에서 단 한번 대패한 것만으로 메세니아가 해방되어 농노인 헤일로타이들을 잃고 2류 국가로 추락해 다시는 강대국의 반열에 오를 수 없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아테네는 수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다의 최강자였고, 육지의 테베와 함께 그리스 최강의 도시국가였으며, 그리스 문화의 정수였고,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있었다.

8. 헬레니즘 시대

"필리포스는 부하들에게 전쟁의 가장 유리한 점으로 꼽을 수 있는 절대권을 행사합니다. 또한 전쟁에 대비하여 병사들을 일 년 내내 무장시키기도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필리포스는 재정이 풍부하여 결정된 모든 사항을 즉각 실행에 옮길 수도 있습니다. 포고령을 발표할 필요도, 악랄한 자들에게 고발당해 시도 때도 없이 법정에 불려 다닐 필요도, 불법 혐의에 대해 자신을 변호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우두머리이자 지배자인 자신에게만 책임을 지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는 어떻습니까? 제가 지배할 수 있는 것은 뭐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정책에 대해 발언할 때조차, 필리포스의 부하들이나 여러분이 제게 똑같이 부여해준 것이 유일한 특권 -아니, 특권이라기 보단 공유권이라고 해야 맞겠지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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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스테네스, 필리포스 2세와 투쟁하는 것의 어려움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호소하며.}}}
특기할 점은 저 데모스테네스가 얼마 후 벌어진 마케도니아와의 지상전에선 방패를 내던지고 도망을 쳐서 그 자신조차도 크게 부끄러워할 오점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웅변 실력과 달리 뇌물을 받은 적도 있었다. 장점과 더불어 단점도 뚜렷한, 어찌 보면 아테네라는 도시 자체를 축약한 것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필리포스 2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왕국이 팽창하고 있었다. 필리포스 2세는 보이오티아의 중심 도시 테베에 인질로 잡혀 있으면서 군사 개혁을 구상했다. 당시 아테네는 함대를 편성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목재를 마케도니아로부터 수입하고 있었고, 필리포스 2세는 이 자금으로 구상한 군사 개혁을 실현해나갈 수 있었다. 우선 필리포스 2세는 그리스식 시민 중장보병과 달리 장비를 국가에서 마련하고 1년에 12번 월급을 받고 일하는 직업 군인을 마련해 상비군을 편성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리사라는 장창을 가진 밀집대형 팔랑크스를 편성했다. 팔랑크스의 약점인 기동력과 측면 공격의 취약함을 보완하기 위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맞서 아테네가 했던 것처럼 보조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투창병, 궁병등의 경보병을 대폭 강화했다. 그리고 기병의 비율을 크게 늘렸고, 그 중 국왕을 호위하는 헤타이로이 중기병을 왕의 친구들과 혹은 가까운 인척, 또는 유난히 왕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용맹한 병사로 구성하여 정예 기병 중의 정예로 육성해나갔다. 이렇게 탄생한 마케도니아의 막강한 군대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아테네에서는 데모스테네스가 등장했다. 말더듬이었던 그는 유산상속분쟁에서 이기기 위해 웅변과 연설을 다듬어 이윽고 아테네 최고, 고대 세계 제일의 웅변가로 자리매김한 인물이었다. 데모스테네스는 수차례의 <필리피카이>라 불리는 필리포스 2세 탄핵 연설을 통해 마케도니아의 위협을 경고했다. 데모스테네스의 각고의 노력 끝에 아테네는 반 마케도니아 동맹군에 참전했으며, 무적에 가까운 마케도니아의 육군이라도 아테네의 해군을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 데모스테네스는 비잔티온을 아테네에 끌어들이고, 아테네 함대는 필리포스 2세가 공격한 비잔티온을 방어해 내는데 성공하며 마케도니아의 팽창을 일시적으로 저지했다. 데모스테네스는 부유층에게 보다 많은 비용을 부담시키는 심모리(Symmory) 제도 개편을 통해 아테네 해군을 개혁하고 함대를 확충해 마케도니아에 맞섰다.

하지만 바다에서의 아테네의 힘과는 별개로, 육지에서는 달랐다.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네와 매우 오랜 적대관계였던 테베와의 동맹을 체결하는데 성공해내고, 그리스 연합군을 편성하여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에 맞섰다. 하지만 필리포스 2세가 개혁하고 총지휘한 마케도니아 육군의 강력함과 헤타이로이를 지휘해서 연합군의 약점을 강타한 젊은 왕자 알렉산드로스 3세는 카이로네이아에서 그리스 연합군을 괴멸시켰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아테네는 다시 한 번 농성전을 각오했지만, 페르시아 공격을 계획 중이던 필리포스 2세는 매우 우호적인 평화조약을 제안했다.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코린토스 동맹의 일원으로 아테네가 참여하되 기존의 아테네 해외 영토권을 인정하고, 아테네는 해군으로 페르시아 원정을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아테네는 이를 받아들였다.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되고 그리스가 마케도니아에 저항하며 테베가 알렉산드로스 3세에 의해 파괴되는 와중에서도 아테네는 안전했으며, 알렉산드로스 3세의 페르시아 원정에서도 아테네 함대는 수송함대의 역할을 수행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바빌론에서 죽자(BC 323), 아테네는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이끌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이었던 디아도코이들을 상대로 자유와 독립을 위한 해방전쟁을 일으켰다. 지주와 부자들은 이를 반대했지만, 대다수의 아테네 시민들은 자유를 원했다. 아테네가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은 안티파트로스에 맞서 테르모필레 협곡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이에 안티파트로스는 그리스 연합군을 압도하지 못하자 아시아의 디아도코이들에게 지원군을 요청했고 디아도코이들은 그리스를 제압할 필요가 있어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미 알렉산드로스 3세 이래로 마케도니아의 해군은 대폭 팽창해 있었고, 클레이토스크라테로스가 지휘하는 240척의 마케도니아 대함대가 전설적인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가득 채운 채로 진격해왔다. 그러자 아테네는 4단노선 200척과 3단노선 40척으로 증강된 함대를 파견해 맞섰다. 하지만 에우에티온이 지휘하는 아테네 함대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마케도니아 해군에게 패배했고, 아테네는 다시 함대를 재편성해 170척의 함대를 출진시켰다. 그러나 아모르고스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 사령관 에우에티온은 함장들과 함께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해버렸다.

게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래 외세를 등에 업고 아테네 민주주의를 위협하던 부유층들이 아테네를 결정적으로 배신한 것이었다. 이윽고 테살리아의 크란논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의 육군이 패배한 이후, 그리스 연합군은 안티파트로스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승리한 안티파트로스는 아테네에게, 무엇보다 아테네의 무산자 테테스들에게 가혹한 평화조건을 강요했다.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데모스테네스를 위시한 반 마케도니아 인사들을 인도할 것,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를 마케도니아에 넘길 것, 마지막으로, 부유층을 제외한 모든 아테네 시민들을 추방시킬 것이었다. 아테네 시민의 60%가 안티파트로스가 제시한 자산을 가지지 못했고, 이 때문에 아테네의 무산자이자 함대와 민주주의의 등뼈였던 테테스들은 동북방의 트라키아로 강제 추방당했다. 신전에 숨어있던 데모스테네스는 그를 체포하러 온 마케도니아군에 끌려가기 전 독약을 먹고 자결했다. 결국 아테네는 공식적으로 멸망했으며 아테네의 민주주의도 이렇게 무너져 내렸다.

[1] 자음 Θ와 이중모음 αι를 어떻게 발음하느냐의 차이. 고전 그리스어에서는 각각 /tʰ/와 /ai/로, 현대 그리스어에서는 /θ/와 /e/로 발음한다.[2] 이는 테베, 미케네, 델피처럼 문법상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3] 포세이돈이 시민들에게 을 주었다는 전승도 있다. 혹은 호수와 말 둘 다 주었다는 전승도 있다. 짠 물이 아니라 소금기둥, 혹은 소금으로 해석하자는 역사 연구도 있다.[4] 물론 이 서술은 사실과 거리가 멀긴 하지만 왕이면서 민주주의의 창시자란게 불가능하진 않다. 민주주의는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체계이기 때문에 헌법에 기반해 헌법이 정하는 범위 내에서 군주가 제한된 권한을 갖는 현대적 의미의 입헌군주국은 동시에 민주주의 국가인게 가능하다. 대표적으로 영국. 군주국과 반대되는 개념은 공화정이다. 즉 테세우스가 왕으로서 본인의 초법적 통치권을 내려놓고 최초로 입헌군주제를 정립했다면 말이 된다. 물론 입헌군주제는 테세우스보다 훨씬 늦게 등장했으므로 서두에 얘기했듯 이건 그냥 헛소리다.[5] 테세우스미노타우로스 이야기에서 보듯 아테네는 약소국이라 억지로 남녀를 제물을 바쳐야 했다.[6] 아테나 여신 자체도 사실 도리아인의 신이 아닌 원래부터 거주하고 있었던 비유럽인들의 신이었다. 도리아인들은 전통적으로 남성 신만을 믿었으며, 원주민들은 크레타 섬에서 믿었던 뱀의 여신과 같이 여신을 믿었다.[7]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의 귀족 가문인 알크마이온 가 출신이었으나, 아테네에 민주정을 확립시키려는 목적 및 알크마이온 가문이 오만함으로 악명을 높였다는 것을 피하려는 본인의 겸손 탓으로 추정된다.[8] 호플리테스들로 짜는 팔랑크스 대형은 지휘관 및 장교의 구분 없이 모두가 창을 들고 일렬로 서서 싸우는 형태이기 때문에 이로써 귀족들이 전공을 가져가 그들의 영향력을 넓히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는 로마와는 상반되는데, 그 이유는 로마엔 장교와 사병의 구분이 뚜렷했고 이 장교의 역할을 로마의 귀족들이 맡았기 때문이었다.[9] 저자가 크세노폰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위서이다. 다만 위서라고 가치가 결코 낮은 것은 아니다. 분명히 그 시대 무명이지만 뛰어난 누군가가 고대 아테네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했기 때문.[10] 공식적으로는 스파르타인이 그리스 연합함대의 최고 사령관이었지만, 함대 대부분이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아테네 함대였다.[11] 다만 스파르타 육군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 것은 아니었다. 육상전에선 스파르타가 미세하게 승리했지만, 아테네를 공략하기엔 역부족이라 물러났고, 그 동안 아테네 함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 곳곳을 강타해 그곳의 반 스파르타 세력을 봉기시켜 스파르타가 꼼짝도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12] 20세기 이후에야 도입된 여성참정권이 없었다는 점을 논외로 둔다면[13] 이 단어가 현대 그리스입법부의 이름인 불리(Βουλή)의 유래가 됐다.[14] 의외로 보이지만, 이것은 고대 아테네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적 개혁 중 하나이다. 공직자들의 임금은 도덕주의적 선동으로 비난하기 쉬워 취약한 지점이지만, 공직자가 임금을 받지 않는다면 부패하거나 부유층이 공직자를 독점하게 되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의 개혁 이후 2,00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선출직 공직자의 임금을 줄이거나 없애려는 반민주적 선동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엄청난 업적인지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15] 이는 흔히 아테네와 함께 화자되는 고대 로마의 정치제도와 비교했을 때 확연히 차이점이 드러난다. 로마의 켄투리아회에서 무산자 프롤레타리이는 전원이 합쳐서 단 한 표만을 행사할 수 있었고, 이것은 귀족 수십명이 행사할 수 있는 한 표와 같은 수준에 불과했다. 이런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트리부스 민회가 별도로 존재했지만, 트리부스 민회를 통한 입법은 언제나 원로원과 승리하기 힘든 정면 충돌을 각오해야만 했다.[16] 한번에 대략 8,000명에서 10,000명 정도의 시민이 모였다. 아테네의 전체 시민권자 인구는 거의 언제나 몇 배나 많았지만, 엄청난 규모의 해상활동을 하던 아테네인들이 아테네에 전부 모일 수는 없었으니 일부만 모일 수밖에 없었다.[17] 행정부의 역할도 수행했다.[18] 보통 장군으로 번역되지만, 내각의 일원이라는 성격이 매우 강하다.[19] 갤리선을 처음으로 만든 것으로 알려진 포세이돈 신의 아들 파랄로스의 이름을 땄으며, 뜻은 '해변의 사나이'였다.[20] 국민국가가 과두정 국가를 총력전으로 밀어붙여서 압도하는 이런 장면은 프랑스 혁명기 발미 전투까지 역사 앞에 나타나지 못했다.[21]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핀란드같은 예외가 있지만, 시기적으로 보면 제1차 세계대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22] 미국 남부같은 경우 선거인 등록 세금이라든가 가난한 백인 하층민과 흑인의 선거권을 봉쇄하는 법들(소위 <짐 크로우 법>)이 20세기까지 남아있었다.[23] 다만 그렇다고 아테네가 콩뽑기로 공직을 배분했다는 점 때문에 무능한 인물도 공직자가 된다고 오해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민회에서 1차적으로 자격이 되는 사람들을 배수로 뽑은 다음에 그 중에서 콩으로 추첨하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아테네가 유난히 유능하고 야망이 높은 젊은이가 많았다는 점도 감안해야한다. 경제적 여유가 있던 시민 계급은 사회적 명예를 인생의 목표로 삼았고 그래서 어려서부터 정치가와 군인으로 필요한 역량을 쌓는데 열심이었다. 그래서 발달한게 사설 교육이고 소피스트다. 아테네는 이들중에서도 최고의 소피스트들이 모인 곳이었는데, 이는 그만큼 사교육 시장이 크고 그만큼 야심많은 유능한 학생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야심가들이 모인만큼 공직을 놓고 경쟁은 치열했고, 그 과열을 막기 위한 차원에서 추첨제가 유용한 측면도 있었다. 무능함을 가리지않고 완전 무작위 추첨으로 정부 조직의 일부를 구성한건 오히려 스파르타가 운영한 에포로이 제도다. 그리고 이렇게 무작위로 추첨된 인사들은 대부분 역량이 부족해서 본래 기대되었던 감사 역할이나 견제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아테네의 주요 기록은 플라톤, 크세노폰, 투키디데스 인데 이들은 모두 귀족출신이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모두 엘리트주의에 젖은 시각에서 바라봤다는 점을 주의해야한다. 게다가 소피스트 교육을 받아서 이들은 일반인들의 종교와 전통을 그다지 존중하는 마음이 없었는데, 때문에 이러한 배경에서 나타난 정치적 결정을 비이성적이라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그런한 편협함 때문에 플라톤과 투키디데스는 정치적으로 상당히 무능한 인물들이었다. 특히 플라톤은 상아탑의 학자보다도 더 심한 수준으로 세상물정에 어둡고, 인간에 대한 이해력도 부족해서 말년에 시칠리아에서는 실소만 짓게만드는 실책을 여럿 벌인다.[24] 통치 능력의 차이에 대해서는 사실 아직도 논란적인 문제긴 하다. 현대의 기초가 된 근대 사회계약자들이 아무리 싸워도 전부 다 동의하는 것은, 인간의 통치 능력에 대해서는 개개인에게 있어서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현대의 능력주의는 개인이 개인을 통치하는 능력에 대해서 차이가 없으므로 참정권은 동일해야 한다는 식이고, 다수를 상대하는 정치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에서 인간의 개성이나 재능에 차이가 있으므로 차이가 난다. 플라톤 역시 인간의 능력이나 재능은 개각기 별개라는 것을 인정한 바 있다.[25] 타고난 재능에 차이가 있으므로 예술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거나 과학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거나 하는 것과는 달리 정치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26] 구분상 귀족-시민이긴 하나 공식적으로는 모두가 아테네 시민이었다. 즉 시민-거류외인-노예라는 단계로 신분제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27] 법을 이렇게 개정한 것이 페리클레스라고 하는데 훗날 본인의 서자에게 상속권을 주기 위해 시민권을 부여할 필요가 생겨서 자신이 만든 법을 스스로 거슬렀다고 한다. 왜냐면 이 서자의 생모인 페리클레스의 연인 아스파시아가 아테네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28] 물론 로마와 비교해본다면 아테네는 로마에 비해서 극도로 폐쇄적이었다.[29] 비아테네 출신 자유인으로서 아테네에 거주하는 외국인으로 주로 선원, 노동자였으며, 종종 상인이나 의사도 포함되었다.[30] 사실 스파르타가 헤일로타이에게 한 대우는 당대의 기준으로도 도를 넘을대로 넘는 것이었다.[31] 노예에게 과도한 학대와 처벌을 방지하는 법률과 판결이 나올 정도였다.[32] 대표적인 사례가 페리클레스의 연인 아스파시아였다. 페리클레스의 연설문 원고를 써 줄 정도로 박식하고 명민한 인물이라 소크라테스에게 극찬을 받을 정도였다. 연회에서 당대 아테네의 저명한 지식인들과 담론을 나누곤 했다고 한다. 아스파시아가 주최했던 연회는 근대 유럽에서 귀부인들이 주최하던 살롱과도 비슷한 모습이었다.[33] 사실 이건 딱히 그리스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의 전세계적으로 근세까지의 당연한 인식이었다. 오늘날에도 혼인가능연령을 16세부터로 보며 14세로 낮추는 국가도 있다.[34] 군복무를 포함하여 참정권을 갖는 시민으로서의 역할이 가능한 시점이 이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만 18세부터 참정권이 있으나 공직수행은 30세부터 가능했다.[35] 조각상에서 나온 모습 그대로가 이러한 이유때문이다.[36] 오이디푸스가 아테네에서 공연 될 때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한가운데 있을 때였다. 때문에 이 작품은 전염병이 돌고 전황이 안좋았던 아테네의 상황을 오이디푸스에 빗대어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론이다. "죽을 때까지 그 누구도 행복하다 말하지 말라."는 아테네의 솔론이 했던 대표적인 말이기도 하다.[37] 소크라테스가 이 전투에 중보병으로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었다.[38] 이는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통해 결정된 일이므로 모든 시민이 이 결과에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39] 전쟁 이전 아테네의 수입은 1년에 약 1,000탈란트였다.[40] 페르시아 제국의 샤한샤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동생으로, 대제 키루스 2세와 구분하기 위해 흔히 '젊은 키루스'라 불린다. 훗날 크세노폰 등의 그리스 용병들을 고용해서 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쿠낙사 전투에서 전사했다.[41]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플라톤의 친척이었다.[42] 그를 화자로 한 저술 대부분을 남긴 플라톤은 극렬 반민주주의자였으며 《국가》 등에 소크라테스의 반민주주의적 발언이 꽤 많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어쨌든 본인이 민주적 절차에 따른 공직에 참여한 경험이 있으며, 제자들이 주축이 된 30인 참주정에도 적극적인 협력 하지 않았고, 대화편 중에선 민주주의의 장점을 찬양한 부분도 있다. 문제는 소크라테스 본인이 남긴 저술은 없다는 것이다. 아예 소크라테스의 반민주적 언행은 모두 플라톤의 조작이라고 강변하기까지 한 칼 포퍼 같은 인물도 있다.[43]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성실하게 자신을 변호하던 소크라테스는 적은 표차로 유죄 선고를 받자, 자신의 행적과 가르침에 외려 상을 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배심원들을 도발했고, 이 어그로는 그 가르침을 받아 두 번이나 스파르타와 결탁한 쿠데타를 일으키며 민주주의를 전복한 그의 매국노 제자들을 기억하게 하여, 스파르타나 매국노 과두정 세력들에게 가족 한 명쯤은 다들 잃어 본 배심원들에겐 매우 효과적이었다. 덕분에 소크라테스의 무죄에 투표했던 배심원들마저 기소된 추방이나 침묵 대신 사형에 표를 던지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중우정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결과지만, 사실 그 어떤 재판관이라도 이런 종류의 도발을 참아내긴 힘들다는 점을 고려하면 소크라테스가 대단한 것일 뿐이다. 그래도 객관적으로 보면 배심원들에게 도발한다고 유무죄 여부가 달라지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고, 제자들이 엇나갔다고 스승의 책임인 것도 아니니 만큼 직접민주주의와 대중주의가 단점을 보인 사례로 꾸준히 지목되어 왔다. 다만 인구 수십%가 사상당하는 대전쟁을 수십년동안 겪고, 종속당했다가 독립한 상황에서 도발을 걸었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사상자는 3% 정도였는데, 그런 상황에서 북한과 엮인 사람이 대놓고 도발을 했다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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