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기원전 436년 아테네 - 기원전 338년 아테네
1. 개요
이소크라테스 (그: Ἰσοκράτης)는 고대 아테네의 정치인이자 아티카의 10대 웅변가 중 하나였다.2. 생애
기원전 436년, 즉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터지기 5년 전에 부유한 플루트 공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테네에서 고르기아스와 프로디코스같은 소피스트,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당시 부유한 영주 가문들이 그랬듯이, 그의 집안 또한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절 스파르타의 공세 때문에 토지가 망가지면서 가세가 기운다. 이소크라테스는 돈을 벌기 위해 연설 대필해주는 (현대의 변호사 격인) 로고그래프로 일했다. 그는 10년 동안 뛰어난 대필가로써 명성을 얻었지만, 순수한 수사학을 숭상하고 정치에 야망이 있었던 본인은 이런 상업적 대필을 업으로 사는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직접 연설을 하기를 꿈꾸었지만 천성적으로 목소리가 작고 무대 체질이 아니라서 글을 쓰는 수사학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393년에 이소크라테스는 아티카에서 웅변학교를 설립하고, 자신보다 6살 더 어리고 동시대 활동하던 플라톤의 학교 "아카데미"와 경쟁했다. 수업료는 아테네인들에게는 무료였지만, 외국학생들로부터는 1천 드라크마[1]의 거금을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이소크라테스 학교와 플라톤의 학교 사이에서 갈등했다고 한다.
그는 "찬양"이란 책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했다. 반 페르시아주의자로, 일평생 동안 "야만인"이라 지칭한 페르시아를 상대로 그리스인들이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가 패배한 이후 9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여담
베르사유 궁전 공원에 피에르 그라니에가 조각한 대리석상이 있다.[1] 0.5드라크마는 숙련된 공인의 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