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인 기원전 418년 스파르타, 테게아 연합과 아테네, 아르고스, 만티네아 동맹이 맞붙은 전투. 스파르타 측이 승리했다.2. 배경
기원전 421년 봄,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8년간의 전쟁과 2년간의 불안한 휴전 끝에 50년간의 평화를 약속하는 니키아스 협정을 맺었다. 양측은 서로가 점령한 영토를 돌려주기로 했으며, 서로 동맹을 맺어서 스파르타에서 헤일로타이가 반란을 일으킬 경우 아테네가 원군을 보내주기로 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스파르타의 많은 동맹국들의 불만을 샀다. 특히 스파르타를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음에도 아무런 대가를 얻지 못한 코린트의 분노가 대단했다. 그들은 스파르타에 대항하기로 마음 먹고, 아르고스에게 새로운 방어 동맹을 결성하자고 제안했다.아르고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스파르타와 대립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8년간 전쟁을 벌였을 때는 스파르타와 평화협정을 맺어두고 있었기에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제 평화 협정이 만료되었고, 코린트는 이 틈을 타서 아르고스를 열렬히 부추겼다. 여기에 아테네의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한 알키비아데스가 호플레테스와 궁수병을 파견하여 아르고스를 지원했다. 아르고스는 아테네의 지원에 힘입어 만티네아, 엘리스 등 여러 도시 국가들과 동맹을 체결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코린트는 곧 뜻을 바꾸어 스파르타에 충성하기로 했다.
기원전 419년, 아르고스가 에피다우로스를 침공했다. 에피다우로스는 스파르타의 동맹이었기에, 이들을 잃는다면 스파르타에게 있어 큰 타격이었다. 이에 스파르타 국왕 아기스 2세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아르고스를 향해 출진했다. 그들은 테게아, 코린트, 보이오티아, 에피다우리아, 시시오니아, 메가라 등지에서 파견된 부대와 함께 했다. 아르고스는 즉시 만티네아, 엘리스 동맹군과 합세해 이들을 저지하러 갔다. 두 군대는 네메스크 도로에서 조우했다.
그러나 아기스 2세는 회전을 벌이고 싶어하지 않았고, 양측 지휘관들은 짧은 협상 끝에 병사들이 불만을 심하게 제기하는 걸 무시하고 4개월간의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얼마 후 아테네의 지원군이 도착하여 동맹국들에게 계속 싸우자고 설득했다. 그들은 오르코메노스를 점령하고, 스파르타의 핵심 동맹인 테게아를 공격하기 위해 만티네아로 이동했다.
한편 군대를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간 아기스 2세는 맹렬한 비난에 직면했다. 스파르타 시민들은 국왕에게 1만 드라크마의 벌금을 물렸고 집을 부숴버렸다. 궁지에 몰린 왕은 다음 전투에서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호소했고, 시민들은 회의 끝에 10명의 장로로 구성된 위원회를 선출하고, 국왕은 이들의 승인 없이 군대의 행보를 결정할 수 없게 하였다. 얼마 후, 테게아에서 보낸 전령이 와서 아르고스 동맹군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전령은 만약 스파르타가 원군을 보내주지 않는다면, 테게아는 편을 바꿀 거라고 덧붙였다.
테게아가 편을 바꾼다면, 스파르타의 다른 동맹국들도 죄다 이탈할 것이 자명했다. 이에 스파르타는 전쟁을 결의했고, 아기스 2세는 스파르타 역사상 가장 큰 군대[1]를 이끌고 테게아를 구원하러 떠났다. 여기에 코린트, 보이오티아, 포시아, 로키아에게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아르카디아 동맹군과 테게아에서 조우했다. 한편 아르고스 동맹군은 만티네아 인근 언덕에 진영을 세웠다.
아기스 2세가 이끄는 스파르타군은 만티네아로 진군하여 약탈을 일삼다가 가파른 언덕에 진을 치고 있는 적을 목격했다. 아기스 2세는 즉시 공격하려 했지만, 장로 한 사람이 "일전의 과오를 다른 과오로 덮으시려 합니까?"라며 경고했다. 이는 유리한 위치에 있는 적을 쳐서 쓸데없는 피해를 보지 말라는 충고였고, 아기스는 이에 따라 군대를 테게아로 철수시켰다.
아기스 2세는 어서 결전을 벌이고 싶었지만, 아르고스 동맹군은 굳이 유리한 지점에서 내려와서 싸울 이유가 없었다. 그는 적을 평지로 유인하기로 마음 먹고, 만티네아 일대를 침수시키기 위해 사란다포타모스 강의 물줄기를 더 작은 강인 자노비스타스 강으로 돌렸다. 이로 인해 만티네아 일대가 물바다가 되어버리자, 이를 방관할 수 없었던 아르고스 동맹군이 평지로 내려와 요격하면서 만티네아 전투가 벌어졌다.
3. 양측의 전력
3.1. 스파르타 - 테게아 연합
- 지휘관: 스파르타 국왕 아기스 2세
- 병력: 스파르타군 6,000명(스파르타인 3,500명, 헬롯인 2,000명, 스키리타이 600명), 테게아군 3,000명으로 총합 9,000명이었다.
3.2. 아테네 - 아르고스 동맹
- 지휘관: 아테네 장군 라키스, 니코스트라투스
- 병력: 아르고스 3,000명, 아테네 1,000명, 만티네아 2,000명 아르카디아 동맹 1,000명, 클레오니아 인 1,000명, 그밖의 여러 도시 국가에서 차출된 병력을 합해 총 8,000명이 집결하였다.
4. 전투 경과
동이 뜰 무렵, 아기스 2세는 아르고스 동맹군이 언덕에서 내려와 스파르타군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걸 목격했다. 그는 즉시 전군에 전투 대형을 편성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우익에는 아르카디아 동맹군이 배치되었고, 중앙에는 아기스 2세가 직접 이끄는 스파르타의 정예부대가 있었으며, 좌익에는 지난날 브라지두스의 지휘하에 트라키아에서 아테네와 맞서 싸운 경험이 있던 호플리테스 대대가 배치되었다. 스파르타 기병은 양쪽 측면에 섰다.아르고스 동맹군의 좌익에는 아테네인 천 명과 기병, 그리고 아르고스 민병대가 배치되었다. 가장 뛰어난 전사 1,000명을 포함한 아르고스 주력군은 중심부에 배치되었고, 우익에는 만티네아인과 소수의 아르카디아 동맹군이 배치되었다. 이윽고 전투가 개시되자, 양 군대는 서로를 향해 진격했다. 그런데 전투가 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좌익에 배치되어 있던 1,000명의 아테네인이 형편없이 무너졌다. 반면 아르고스 동맹군의 우익에 배치된 만티네아인은 호플리테스 대대를 수적 우위를 활용해 밀어붙였다.
상황을 지켜본 아기스 2세는 스키리타이 600명에게 좌익을 보강하라고 보강하고, 스파르타 2개 대대에게는 오른쪽에서 움직여서 공백을 메우라고 지시했다. 스키리타이 부대는 명령에 따라 움직였지면, 스파르타 2개 대대는 격렬한 전투를 치르느라 움직이지 못해 대열에 틈이 생겼다. 이때 아르고스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 1,000명이 이 틈으로 들어가 중앙의 스파르타군 본대를 측면에서 공격했다. 이로 인해 스파르타군은 열세에 처했다.
한편 스파르타와 테게아 우익부대는 전열이 붕괴된 아테네인들을 추격하려 했다. 하지만 아기스 2세는 아군이 고전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우익 부대를 그쪽으로 파견했다. 그 덕분에 아테네군은 전멸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전장에서 탈주할 수 있었다. 구원병이 도착하자, 아르고스 정예군과 만티네아 연합군은 어쩔 수 없이 퇴각해야 했다. 스파르타 군은 이들을 굳히 추격하지 않고 전장을 정리했다. 이리하여 만티네아 전투는 스파르타 측의 승리로 종식되었다.
5. 결과
아르고스는 만티네아 전투에서 700명의 사망자를 기록했고, 만테네아는 200명, 아테네와 아르카디아 동맹군의 손실은 200명을 기록했다. 반면 스파르타 측의 사상자는 300명을 조금 웃도는 수준에 그쳤다. 이후 스파르타는 아르고스에 사절을 보내 인질을 넘기고, 에피다우로스에서 철수하며, 엘리스 및 아테네와 동맹을 파기하고 스파르트의 편을 들라고 요구했다. 아르고스는 이에 따르기로 했다.이번 전투에서 아테네인들이 형편없이 깨졌기 때문에, 펠레폰네소스 반도 내 민주정에 대한 지지도가 급락했다. 결국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도시국가들은 민주 동맹을 그만두고 펠로폰네소스 연합에 다시 가입했다. 이리하여 스파르타는 위기에서 벗어나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지배권을 회복했다. 하지만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정면전까지는 원하지 않았기에, 양측은 기원전 414년까지 니키아스 휴전을 이어갔다.
[1] 사실상 스파르타가 동원할 수 있는 전 병력에 가까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