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욱트라 전투 | ||
시기 | BC 371년 7월 6일 | |
장소 | 그리스 보이오티아 | |
원인 |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내부 갈등. | |
교전국 | 보이아티아 연맹(테베) | 스파르타 |
지휘관 | 에파미논다스 | 클레옴브로투스 1세† |
병력 | 중보병 6,000~7,000 명 기병 1,500명 | 중보병 10,000~11,000명 기병 1,000명 |
피해 | 디오도로스 주장 | 디오도로스 주장 |
300 명 | 4,000명+@ | |
파우시니아스 주장 | 크세노폰 주장 | |
47명 | 1,000 명 | |
결과 | 테베의 승리 | |
영향 |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붕괴. 서구 전술학의 전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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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투의 서막
기원전 371년, 테베는 보이오티아 연맹의 재건을 선언하고 연맹의 집정관인 '보이오타르크' 7인을 뽑아 중부 그리스에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전 그리스의 맹주이자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맹주였던 스파르타는 이를 반대했고, 보이오티아 대표 에파미논다스에게 보이오티아 대표가 아닌 테베 대표라고 할 것이 아니면 조약에 서명하지 말라며 강하게 나온다. 마침 중부 그리스까지 영향력을 넓히고 싶었던 스파르타는 테베로 번개같이 진군하여 요새를 점령하고 군함을 노획한 후, 레욱트라로 진군한다.2. 전개
스파르타 펠타스트가 테베의 민간인들을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된다. 이어서 스파르타 기병이 공격을 시도했으나 완전히 삽을 푸고, 이들이 도망치면서 오히려 스파르타 정예보병들의 진군을 방해하는 트롤링을 시전한다. 당시 스파르타는 중보병들을 12겹으로 평평하게 배치하는 매우 일반적인 진형을 썼는데, 이때 정예를 우익에 놓는 역시 이 시대의 일반적인 배치를 들고 나왔다[1]. 다시 말해 잔꾀 하나도 안 부리고 아주 솔직담백한 진형을 짠 것.그런데 테베군은 이렇게 정공을 고집하는 스파르타의 특성을 이용해 특이한 전략을 구사한다. 우선 300명의 신성부대가 횡렬 6열 종렬 5열 대형으로 정렬했다. 그 앞의 1500명의 기병대와 경보병이 신성대 앞에서 신성대를 가렸다. 그뒤로 기병대와 경보병이 시야를 가리는동안 계속해서 중장보병대를 배치해 50열이 되었다. 이전까지 중장보병간의 전투에서는 대열이 승패를 가르기에 일자로 평평하게 대열을 짜는 전술이 일반적이며 방패를 왼손에 드는 특성상 대열의 맨 오른쪽은 피해에 취약해 쉽게 무너질 수 있어 우익에는 정예병을 두는 것이 상식이다. 그련데 테베는 주력을 우익에, 대열은 평평하게 라는 전술을 뒤집어 주력을 좌익에 두고 전체대열에서 좌익이 앞으로 튀어나오게 해서 대각선 모양으로 대열을 짠 것이다.
기병대와 경보병이 가렸다해도 중장보병들의 움직임은 흙먼지 등으로 감지가 가능하니 스파르타군도 바로 테베군의 사선대형을 눈치채고 우측으로 빗겨나가게끔 전열을 짜기 시작했다. 테베군의 우익은 원래도 병력이 적었는데 좌익을 강화해서 더 약해질 수밖에 없으니 그 우익을 휩쓸어 버린다는 전술을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전열을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전체적인 모양새가 우익으로 휘어지며 대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 300명의 신성대가 스파르타군을 향해 돌격했고 그 무너진 대형은 다시는 복구되지 못했다. 두 군대의 이론적인 전투력 총합은 비슷하다 평가되었으나 테베군은 전술적으로 국지적인 병력의 우위를 확보했고, 이미 전열이 무너진 상태에서 좌익의 스파르타 동맹군과 지원부대도 그대로 당황하며 관망하고 있었기에 스파르타군은 전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시계방향으로 차례차례 격파되었다.
3. 영향
스파르타는 이 전투로 전체 중장보병의 25%인 500명이 전사하고 스파르타의 왕 클레옴브로토스가 중상을 입는 등의 피해를 입으며 완전히 패권을 잃어 끝없는 추락을 겪게 된다.한편 테베는 당대 그리스의 맹주인 스파르타를 꺾고 그리스의 패권을 잡으나 명장 에파미논다스가 만티네아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국력이 기울기 시작했고 이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일으킨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패배하며 마케도니아에게 패권을 내주게 된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등장한 사선진과 유기적인 공격은 마케도니아군의 전술교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야말로 고대 유럽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4. 전술의 혁신성
레욱트라 전투는 일반적으로 번뜩이는 재치로 피아의 강세를 뒤집은, 혁신적인 전술의 본보기처럼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우선 이것이 정말 고대 그리스사에서 흔히 발견되는 호플리타이 전투의 상궤를 벗어나는 '혁신'인지, 아니면 '그저 전통대로 싸우다 보니 이긴 전투'인지는 논란이 있다. 다시 말해 이전 세대의 전술적 흐름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전술을 에파미논다스가 개발해낸 것인지, 아니면 기존에 있던 고대 그리스[2]의 전술적 전통을 잘 조합해내서 이루어낸 결과인지는 논란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전술의 형태 자체의 혁신을 차치하고, 레욱트라 전투가 끼친바는 크다. 우선 300명의 정예부대, 신성대를 하나의 단위부대로 모아 운영한 것이다. 그전까지의 전투방식은 정예 병력을 단위부대로 따로 편성하지 않고 중장보병대 사이사이에 배치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신장시키려 했다. 그러나 레욱트라 전투에서 테베는 기존의 분산배치가 아닌 정예병의 집중운영을 내세웠고 이들은 전장에서 망치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특히 사선대형에 관해서도 전술의 패러다임을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이전까지 적을 분할시켜, 분할된 적을 집중공격하는 방법은 유인하거나 서로 다른 지역에서 공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선대형은 동일 공간에서 우익, 중익, 좌익이 같은 패턴의 전투를 치르지만 시간차를 두고 전투를 벌인다. 즉, 공간이 아닌 시간을 분할한다. 연락수단이 없는 전근대의 특성상 전황을 파악하기란 전장 한가운데 장군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역에 따라 다른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면 병사들은 허둥대기 마련이다. 이런 허둥댐을 유도하는 것이 사선대형의 핵심이며 실제로 스파르타의 부대는 사선대형을 파악하고도 적과 가까운 부대와 먼 부대의 판단차이로 인해 전열이 무너지고 말았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