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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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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전체 영어 명칭은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이지만
영연방의 정부(내각), 관보(런던 가제트), 왕실 등 공공기관 웹사이트에서 약칭 Companion of Honour로 표기, 안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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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 메달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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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데 슈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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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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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am Krzemiń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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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프 마리아 카란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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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르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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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스 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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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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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 이슈트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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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시엘라 파라스케바이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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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와일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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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 외르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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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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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마리아 페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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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움 클레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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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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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폰데르둥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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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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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무라 나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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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아나 쿠추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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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K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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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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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프 리베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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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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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bastian koug be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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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guel Sáe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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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디르 카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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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o Barren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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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크람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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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미셸 발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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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 카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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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그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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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플레스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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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레이먼드 포퍼 경
Sir Karl Raimund Popper
파일:Karl_Popper2.jpg
본명 카를 라이문트 포퍼
Karl Raimund Popper
출생 1902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망 1994년 9월 17일 (향년 92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켄리
국적
[[오스트리아|]][[틀:국기|]][[틀:국기|]] (~1945)
[[영국|]][[틀:국기|]][[틀:국기|]] (1945~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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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사상
3.1. 과학철학
3.1.1. 귀납논증 거부3.1.2. '반증'에 입각한 과학적 방법론3.1.3. 반증주의 유사과학 구분법3.1.4. 반증주의에 대한 비판
3.2. 열린사회와 그 적들
3.2.1.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 대한 비판
4. 일화
4.1. 부지깽이 논쟁4.2. 명언 진실 여부
5. 주요 저서6. 어록7. 관련 강의 영상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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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출생의 영국 철학자. 대표작인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 워낙 유명해 사회철학자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만 본업은 과학철학자이다.

2. 생애

오스트리아 에서 태어났으며, 1922년 빈 대학에 정규학생으로 등록을 하여, 26세가 되던 1928년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유대인이었던 관계로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질 즈음에는 아돌프 히틀러나치의 박해를 피해 뉴질랜드, 그리고 2차대전이 끝난 후에는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23년간 교수 생활을 하게 된다. 나치의 잔혹한 인종차별 행위가 미친 영향은 당대 지식인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엄청난 충격이었으며, 포퍼는 자신도 유대인이었기에 충격을 많이 받아 그 유명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책을 집필하게 된다.

3. 사상

포퍼는 이성을 중시했으나 개인 이성의 불완전함을 인정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논박가능한 이성, 그 이성을 보완하기 위한 대화, 반증을 강조했다. 반대로 이를 차단하는 사상은 싫어했다.

그의 주장 중(아래 어록 문단 참고) 행복과 불행(또는 쾌락과 고통)은 대칭이 아니며 당장 고통받는 사람들의 처우 개선을 우선해야 한다는 대목을 소극적(부정적) 공리주의(negative utilitarianism)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3.1. 과학철학

포퍼의 주된 업적은 과학철학에서의 업적이다. 역사주의, 전체주의 등을 불같이 공격했던 것이나 열린사회를 옹호할 때의 포스가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과학철학자로서의 이미지가 흐릿해져서 그렇지 포퍼는 본래 과학철학을 본업으로 삼던 사람이다. 포퍼의 견해는 과학철학적 입장은 대개 보통 20세기 전반의 논리 실증주의20세기 후반 분석철학 및 과학철학 간의 교량 역할을 한다고 비유적으로 받아들여지고는 한다.

포퍼의 과학철학적 업적 가운데 여전히 가장 많이 관심을 받는 것은 이른바 "구획 문제", 즉 과학유사과학을 구분하는 기준을 마련하는 문제다. 이러한 과학철학적 내용의 기틀은 1934년 저작인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2]1963년 저작인 『추측과 논박(Conjectures and Refutations)』에 잘 담겨 있다.

3.1.1. 귀납논증 거부

포퍼는 귀납논증을 과학의 정당한 추론 방식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그 주된 이유는 데이비드 흄이 귀납논증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이른바 '귀납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흄은 경험을 통하여 과학적 법칙을 포함한 일체의 앎을 증명할 수 있다는 개념에는 모순이 있다고 지적했다. 흄은 어떤 과학적 가설에 대해서도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기란 불가능하고 따라서 어떤 과학적 법칙도 명확하게 진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가령 우리가 보아온 모든 백조들이 흰색이라고 해도 "모든 백조가 흰색이다"라는 가설이 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흄은 귀납논증의 결과를 앎이라고 정당화할 수 없다고 보았다.[3] 자세한 내용은 귀납논증 문서 참조.

포퍼는 이런 측면에서 귀납논증을 거부했기에, 그의 과학철학은 귀납논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기존의 경험주의나 실증주의 과학철학과는 구분되며, 포퍼는 이러한 철학적 차이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3.1.2. '반증'에 입각한 과학적 방법론

그러므로 포퍼는 오직 연역추론만이 합당한 과학적 추론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연역추론은 통상 '새로운 경험적 데이터'를 반영할 수 없는 추론 방식이라고 여겨진다. 자연과학은 명백히 실험이나 관찰 같은 경험적 데이터를 필요로 하므로 포퍼의 분석은 과학에 대한 분석에 실패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포퍼는 이런 관점이 오해라고 말한다. 물론, 연역추론에서 경험적 데이터는 가설을 입증 혹은 검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연역추론에서 경험적 데이터는 반대로 가설을 꺾는 것, 즉 그 가설이 틀렸다고 보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즉 귀납추론을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경험적 데이터는 여전히 가설을 반증(falsify)할 수는 있다. 예시를 들면 다음과 같다:
* 가설: 철수는 매일 학교에 간다.
* 예측: 만약 철수가 매일 학교에 간다면, 철수는 내일도 학교에 갈 것이다.
* (대우명제): 철수가 내일 학교에 가지 않는다면, 철수가 매일 학교에 가는 것은 아니다.
* 경험적 데이터: 다음 날 확인해보니 철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 (대우명제와 경험적 데이터를 삼단논법에 적용시키면) 철수가 매일 학교에 가는 것은 아니다.
* 따라서 당초 가설 '철수는 매일 학교에 간다.'는 반증되었다.

위 추론 방식에서 쓰인 건 오직 연역논리뿐이다. 여기서, 경험적 데이터는 결코 "쌓이지는" 않지만,[4]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적 데이터는 "가설을 무너뜨릴 수는" 있다. 즉, 가설에 경험적 데이터를 하나하나 대입해서, 그 하나하나에 반증의 연역추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포퍼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과학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검은 백조가 발견되면 "모든 백조가 흰색이다"라는 가설이 무너지는 것처럼, 포퍼의 이론에서 과학적 가설의 테스트는 매번 그것을 거부하거나 오류로 만드는 시도와 관련되며, 하나의 진정한 반례는 이론 전체를 오류로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오류는 새로운 가설을 촉진한다. 과학은 이러한 반증의 방법을 통해 "비틀대며 나아가는 진보"[5]이다.

반대로 정신분석이나 마르크스주의는 거짓이라고 간주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것도 이 두 이론을 반박할 수 없으며, 그래서 오류가 될 수 없으므로 그것은 포퍼에게 점성술과 같은 것이었다.

3.1.3. 반증주의 유사과학 구분법

포퍼는 이런 '반증' 개념을 통해 과학유사과학을 나누는 기준을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위 "반증주의(falsificationism)"이라 불리는 포퍼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어떤 가설이 과학적이다 iff 그 가설이 경험적 데이터에 의해 반증가능하다.

이때 "가설이 과학적이다"라는 말은 결코 "가설이 이다"라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어떤 가설이 인지 거짓인지는 과학적인지 여부와 무관하다. 거짓인 과학적 진술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티코 브라헤의 천문학은 결국 틀린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게 티코 브라헤의 가설이 "비과학적이었다"라는 얘기를 결코 함축하지 않는다. 위 예시에서 가설 "철수는 매일 학교에 간다"는 반증가능하기 때문에 과학적이다. 만약 철수가 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경험적 데이터가 확보되는 한, 위 가설은 명백히 틀린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가설 "신은 존재한다"은 반증가능하지 않다. 그 어떤 경험적 데이터를 가져댄다 한들 그 가설이 틀렸다는 것을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설 "신은 존재한다"는 비과학적이라는 게 포퍼의 요지다.[6] 마찬가지로 정신분석, 마르크스주의, 점성술 등도 경험적 데이터로 반증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비과학적이며 유사과학이다.

포퍼가 반증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진화론을 거부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정확히는 한때 진화론에 대해 그러한 견해를 가졌던 적이 있으나 자신의 저서 <객관적 지식>에서 그 견해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 이후로 포퍼는 자신의 과학철학을 설명할 때 줄곧 진화론을 비유로써 써먹었으며 진화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지식론을 확장시키기도 했다.

또한 포퍼는 비과학적이라는 것이 무의미함을 함축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즉 반증가능하지 않은 "형이상학적" 주장들 가운데서도 유의미한 사례들이 있으며, 이는 그 자체로 과학적이진 않더라도 과학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는 포퍼의 견해가 논리 실증주의, 나아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반형이상학적 견해와 충돌하는 대표적인 지점 중 하나다. 포퍼는 고대 원자설, 과학적 인과에 대한 믿음 등이 유의미한 '형이상학적' 주장들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보았다.

3.1.4. 반증주의에 대한 비판

대중적인 인식과 달리, 현대 과학철학계에서 포퍼의 주된 과학철학은 설령 근사적인 휴리스틱으로 쓰일지는 몰라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더 이상 주류 입장으로 남지는 않게 되었다. 왜냐면 1960년대 이후 포퍼 이론의 치명적인 약점들이 밝혀지고 그 대안들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토머스 쿤은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포퍼의 이론이 실제 과학사에 부합하지 않고, 규범적 의미에서 과학적 합리성에도 항상 부합하는 것이 아님을 보였다. 과학자들은 자신의 소중한 가설을 포기하는 것을 포퍼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반증을 찾는 대신에, 자신의 가설을 지원하는 보조적인 가설들을 가지고 자신의 가설을 옹호하는 경향이 있다. 과학자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시간과 지적인 노력에 더해서 돈까지 많이 들어간 자신의 가설을 쉽사리 포기하기 힘들다. 지동설 탄생시기에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증거가 발견되었음에도, 천동설을 보조하는 가설을 만들어내면서까지 연주시차를 어떻게든 천동설로 설명하려고 하였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 쿤은 이렇게 핵심이론은 쉽사리 변하지 않고 그 핵심이론을 지원하는 보조가설만 계속해서 변형될 뿐이라는게 역사적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보조가설들이 더 이상 핵심이론을 지원하기가 불가능해지게 될 혼란스러운 순간이 올 때, 핵심이론은 그제서야 갑작스레 바뀌게 된다. 쿤은 이것을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불렀다.[7]

또한 보다 일반적으로, 쿤의 문제제기는 '특정한 경험적 시험을 통해 한 과학적 가설을 단독으로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윌러드 콰인의 '뒤앵(Duehm)-콰인(Quine) 논제'와도 깊이 연관된다.

또한 포퍼 과학철학의 핵심은 상기한 바처럼 귀납법을 거부하는데서 출발한다. 하지만 과학 활동의 실상을 고려할 때 이는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으며,[8] 포퍼가 내놓은 무마책들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특히 베이즈주의 인식론 등 경쟁 이론의 부상은 그 쐐기를 박았다.

결국 현재 주류 과학철학의 입장은 과학과 유사과학을 나누는 명쾌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과학과 유사과학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법칙이 없다는 것이다. 즉 그 경계가 다소 모호하거나 기준에 대한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포퍼 이후 과학철학의 발전 과정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항에 관해서는 과학철학, 유사과학 항목 등 참조.

3.2. 열린사회와 그 적들

비록 소수의 사람만이 정책을 발의할 수 있다 해도, 우리들 모두는 그것을 비판할 수 있다.
- O.S 1, p.7.
우리는 금수(禽獸)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으로 남고자 한다면 오직 하나의 길, 열린사회(the open society)의 길이 있을 뿐이다.
- 이한구 역 《열린사회와 그 적들 I》 285pp.
포퍼의 열린 사회론은 쉽게 말해 전체주의를 무자비하게 비판하고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옹호한 내용이다. 인간의 이성은 불완전하므로 아무리 훌륭하고 똑똑한 사람의 주장이라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목표가 명확하고 불변할 경우 목표 달성은 급진적이고 맹목적으로 변하여, 목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과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배제되고 심하면 숙청당할 수 있다고 포퍼는 경고한다. 따라서 내.외부와 끊임없는 이성적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사회의 목표를 계속 점검하는 동시에 점진적으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가능한 사회가 열린사회다.

반면 절대적인 가치를 제시하고 지배 계층만의 의사결정을 강조한 플라톤, 헤겔, 히틀러, 그 외 독재자나 독재를 옹호한 자들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공산주의는 필연적으로 닫힌사회로 갈 수밖에 없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 카를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었다.[9] 그의 1994년 에스파냐 세비야 엑스포에서 한 연설에서 이것이 잘 드러나는데 그는 그 강연에서 마르크시즘은 본질적으로 광기, 폭력으로 이어지며 논리적 오류가 빈번하다고 말했다. 공산주의는 검증이나 비판을 수용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도그마처럼 유지한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포퍼는 자신의 과학 철학 이론을 바탕으로 마르크스의 이론들을 비판하였는데, 포퍼에 의하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그 예측의 언명이 모호하며[10], 때문에 이론에 반하는 현상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기에 검증의 기회를 효과적으로 회피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위기에서 벗어나거나, 공산주의 혁명이 실패 할 때마다 혹은 현황이 바뀔 때마다 그러한 유연성에 기반하여 각종 보조 가설이나 Ad Hoc 등으로 이론의 수명을 연장시켰으며 여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포퍼에 의하면 이와 같이 마르크스의 이론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기 힘든(검증 가능하지 아니한) 이론이고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 이론의 한계인 것이다. 앞 문단에서처럼 포퍼는 검증 가능한 이론(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이야말로 좋은 이론으로 보았으며 이러한 포퍼식 관점에 의하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나쁘거나 비과학적인 이론이다.

마르크스의 관점 외에도 역사엔 특정 방향으로 흘러가는 법칙이 있다고 주장하는 역사주의는 모두 거부하였다. 사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역사주의를 까는 책이다. 역사주의는 정체 불명의 역사 법칙을 주장해 역사를 바꿔나가려는 사람들의 힘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했다.

3.2.1.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 대한 비판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의 자유주의적 가치를 옹호하는 가장 인기 있는 책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버트런드 러셀은 이 책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한 강력한 방어"이자 "최고 수준의 중요성을 가진 작품"이라고 치켜세웠을 정도다. 하지만 플라톤과 헤겔, 마르크스를 문자 그대로 읽고 텍스트가 애매한 경우에는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게 해석해서, 그의 전체주의에 대한 증오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은 "불행히도 전체주의 '학자'의 방법과 유사하다"는 비판을 받았다.[11]

즉, 목적론적 사상을 비판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포퍼 자신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를 의도적으로 오독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라는 지나치게 단순한 이분법적인 프레임을 제시하고,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를 그 프레임에 속하게 함으로써 이 사상가들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 포퍼를 비판하는 학자들의 지적이다.

4. 일화

열린사회론과 반증주의는 큰 영향을 끼쳤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많았고 포퍼 자신도 논쟁을 피하지 않는 편이라 수많은 학자들과 토론과 대결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4.1. 부지깽이 논쟁

파일:external/bureau.comandantina.com/FA-Popper-Wittgenstein.jpg

그러한 토론 중 포퍼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 중 하나가 1946년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벌였던 이른바 '부지깽이 논쟁'. 증인들의 증언이 엇갈리기에 정확히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불확실하다는 것은 감안할 것. 포퍼는 당시 최고의 석학 중 하나로 평가받던 비트겐슈타인을 자신의 적수로 여겨 오래전부터 그와 대결하기를 꿈꾸었다고 하는데, 1946년 10월 비트겐슈타인이 회장으로 있던 케임브리지 대학 도덕 과학 클럽에 포퍼가 세미나 발표자로 초청이 되어 실현할 기회가 생겼다. 포퍼의 진술에 따르면 '철학적 문제가 실재한다'는 포퍼와 '철학적 문제란 언어적 유희에 불과하다'는 비트겐슈타인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오갔으며, 이에 포퍼는 철학적 문제의 예시를 들고, 비트겐슈타인이 그것들은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며 (논리학, 수학의 문제이며 철학의 문제가 아니다) 반박하는 모양새였다. 포퍼가 도덕 규범을 철학적 문제의 예시로 들자, 비트겐슈타인이 부지깽이를 흔들며 "도덕 규범의 예시를 들어 보시오!"라고 하자, 포퍼가 "초청 발표자를 부지깽이로 위협하지 않는 것."이라고 받아쳤고, 비트겐슈타인이 화내며 나갔다는 것이다. 증언에 따라서 나가기 전 러셀이 개입했다는 버전도 있다.[12][13][14]

논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스캔들에 가까운 모양새인데, 정작 당시의 정황에 대해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포퍼와 비트겐슈타인을 포함한 당시 참석자들의 진술들이 워낙 엇갈리기 때문. 또한 이때의 '승리'를 자랑으로 여겨 자신의 저작에서 여러 차례 이 사건을 언급했던 포퍼와는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포퍼에 대해 공식적인 언급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 당시 인지도가 떨어지던 포퍼를 비트겐슈타인이 듣보잡 취급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시 리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이 사건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적이 있는데, "런던에서 포퍼 박사라는 고집불통이 와서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한 감상적이고 쓰레기 같은 말들을 늘어놓았다."라고 적었다. 다만 이 둘의 논쟁이 크게 철학적으로 의미 있는지는 불명이다. 사실 단기간에 해결되거나 깊이 다룰 수 없는 큰 주제인 "철학적 문제가 실재하는가?"로 싸웠고, 결국 사건이 유명해진 것은 논쟁의 내용이 아니라 부지깽이를 흔들었다는 자극적인 가십 때문인지라, 포퍼가 비트겐슈타인의 전기/후기 철학을 구분하지 못해 맥을 잘못 잡았다는 말은 부당한 비판이다. 애초에 전기 철학에 특정되지 않는, 거대 담론이기에 비트겐슈타인도 반박을 했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물론 이 논쟁이 왜 발생했는가에 대해서는 포퍼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관련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철학의 정수가 담긴 <논리철학 논고>는 논리실증주의 (Logical Positivism)의 요람인 비엔나 서클 (Vienna Circle)의 철학자들에게 성서와도 같은 취급을 받았으며, 이들은 비트겐슈타인을 사상적 아버지로 여겼다.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관두고 오스트리아에 살 때 이들 중 몇 명과 만나고 철학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지만, "어린아이가 내 사과를 훔치는 건 봐줄 수 있지만 걔가 그 사과를 내게 받았다고 하는 건 화난다"며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자신의 독특한 성격으로 비엔나 서클을 곤란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모임에서 오늘은 철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벽을 보며 시를 낭송한 적이 여러 번이라고 한다.) 반면 포퍼는 비엔나 서클의 철학자들 몇몇과 친분이 있었고 (카르납, 페이글과는 휴가를 같이 간 적도 있다)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스스로를 비엔나 서클에 포함되지 않은 것을 자랑스려워했다. 포퍼는 비엔나 서클의 비공식 적 (unofficial enemy)라는 타이틀도 있었는데, 이를 자랑스러워 했다. 비엔나 서클의 논리실증주의는 결국 침몰했고 (왜 그랬냐는 질문에 영국에서 자주 방문하던 명예 멤버 에이어는 "거의 모든 생각이 틀렸었기 때문"이라고 자조적인 회상을 하기도 했다), 포퍼는 그 결정적인 원인을 비엔나 서클 바깥에서 제기했다는 데에 자부심이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로 비트겐슈타인과 포퍼는 나이 차이가 13살 나기는 하지만 둘 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태어나서 자란 동화-유대인이었고 (혈통은 유대인이지만 종교는 기독교),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함에 따라 피난을 가야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합병 당시 영국에 있었으나 가족의 피난을 위해 영국 국적을 취득하고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후 다시 영국으로 피난했고, 칼 포퍼는 뉴질랜르로 피난했다가 나중에 영국 런던으로 왔다) 이 둘은 공동의 지인은 많았으나 둘이 만난 것은 부지깽이 논쟁 단 한 번이었다.

우리나라에선 비트겐슈타인이 화가 나서 지팡이로 포퍼를 때렸다고 표현해 놓은 매체가 많다. 사실은 격렬한 논쟁중 비트겐슈타인이 설명하면서 부지깽이를 허공에 휘저었을 뿐이다.

4.2. 명언 진실 여부

만약 누군가가 20대에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그는 심장이 없는 자다. 만약 누군가가 20대가 지나서도 공산주의자라면 그는 뇌가 없는 자다.
마르크스 비판과 관련해서, 만약 누군가가 20대에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그는 심장이 없는 자다. 만약 누군가가 20대가 지나서도 공산주의자라면 그는 뇌가 없는 자다.라고 말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칼 포퍼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이 문구는 19세기 프랑스의 작가 쥘 클라레티(Jules Claretie)가 쓴 당대 인물들의 전기 모음집 속 정치인 앙셀름 바트비(Anselme Batbie) 항목에서, 앙셀름 바트비가 에드먼드 버크의 정치적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인용했던 말이라고 기록해놓은 것이 원형이다.
파일:앙셀름 바트비_발췌.jpg


스물에 공화주의자가 아닌 이는 마음의 관대함이 의문스럽다. 그러나 서른이 넘어서도 공화주의자인 이는 정신이 온전한지 의문스럽다.
Celui qui n’est pas républicain à vingt ans fait douter de la générosité de son âme; mais celui qui, après trente ans, persévère, fait douter de la rectitude de son esprit.
앙셀름 바트비(Anselme Batbie)[15]
이 문구는 공화주의자 대신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등으로 바꾸어 프랑수아 기조, 빅토르 위고, 스웨덴의 오스카르 2세, 케니언 니콜슨, 조지 버나드 쇼, 벤저민 디즈레일리, 윈스턴 처칠, 막스 베버 등이 한 말로 알려지기도 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칼 포퍼가 한 말로 잘못 알려진 "20대에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심장이 없는 자다. 40대에 공산주의자라면 머리가 없는 자다."라는 표현은 1946년 《코먼웰(commonweal)》이라는 미국 저널에서 글 유머로 나온 것이다.

이는 먼나라 이웃나라이원복 교수가 송병락 교수와 공동저술한 '자본주의 공산주의'라는 80년대 후반 베스트셀러 서적에 그가 한 말로 등장하면서 잘못된 명언이지만 널리 전파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원복 책에는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보지 않은 자는 바보요, 나이가 들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있는 자는 더 바보다."라고 나와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도 비슷한 말을 했다. 항목 참조. 또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에서는 저 '공산주의자' 이야기가 '무정부주의자'로 바뀌어서 주인공 쥘리 팽송이 사랑하던 철학 선생의 대사로 등장한다.

한편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일랜드 작가 버나드 쇼는 "20세에 혁명가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면 50대에 이르러서는 답이 없는 늙은 화석이 되겠지만, 20세에 이미 사회주의 혁명론자가 됐다면 마흔이 되더라도 시류를 쫓아갈 가망이 그나마 있다."면서 정반대되는 말을 한 적이 있다.

5. 주요 저서

제목 발간 연도
<colbgcolor=#fff,#1f2023> 탐구의 논리[16]
Logik der Forschung
<colbgcolor=#fff,#1f2023> 1934년
역사주의의 빈곤
The Poverty of Historicism
1936년
열린사회와 그 적들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1945년
양자 이론과 물리학의 분열
Quantum Theory and the Schism in Physics
1956/57년
열린 우주 : 비결정론을 위한 논증
The Open Universe: An Argument for Indeterminism
1956/57년
추측과 논박
Conjectures and Refutations
1963년
객관적 지식: 진화론적 접근
Objective Knowledge: An Evolutionary Approach
1972년
끝없는 탐구: 지적 자서전
Unended Quest: An Intellectual Autobiography
1976년
더 나은 세상을 찾아서
In Search of a Better World
1984년
우리는 20세기에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The Lesson of this Century
1992년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All Life is Problem Solving
1994년
프레임워크의 신화[17]
The Myth of the Framework
1998년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The World of Parmenides
1998년

6. 어록

우리가 불관용한 사람에게조차 무한한 관용을 베푼다면, 우리가 불관용의 맹공에 맞서 관용의 사회를 지켜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관용적인 사람들은 파괴될 것이고, 그들과 함께 관용도 파괴될 것이다. [18]
추상적인 을 실현하려고 하지 말고 구체적인 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라. [19]
내가 쓰는 합리론자라는 말은, 논쟁을 통해, 가능하다면 어떤 경우에서든 폭력보다는 타협을 통해 결정을 내리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는 무력, 협박, 위협, 심지어는 선동적인 프로파간다를 통해 다른 사람을 압도하는 데 성공하기보다는, 논쟁을 통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다. [20]
내가 이성이나 합리주의에 대해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실수와 오류에 대한 비판, 특히 다른 사람에 의한 비판을 통해, 그리고 결국에는 자기비판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다는 확신이다. 합리주의자는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단지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람이다. [21]
나는 인류를 사랑하는 비합리주의자들이 있으며 모든 형태의 비합리주의가 범죄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성이 아닌 사랑으로 통치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증오로 통치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준다고 생각한다. [22]
우리는 정치적 자유가 우리에게 이러저러한 약속을 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정치적 자유를 선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유일하게 우리 스스로에 대해 완전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엄한 형태의 인간 공존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23]
과학의 역사는 모든 인간 사상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무책임한 꿈, 고집, 그리고 오류의 역사이다. 그러나 과학은 오류가 체계적으로 비판되고 결국엔 꽤 자주 수정되는 몇 안 되는 인간 활동 중 아마도 유일한 것이다. [24]
열린 사회는 어느 정도 금기를 비판하면서 판단의 근거를 그들 자신의 지성에 권위를 두는 사회이다. [25]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시도가 늘 지옥을 만들어 낸다. [26]
낙관주의는 도덕적 의무다. [27]

7. 관련 강의 영상

[navertv(1856448)]
[navertv(1858225)]

8. 여담

  • 오늘날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 덕에 한국에서 널리 읽히고 있지만, 정작 제4공화국 시절에는 황당하게도 단지 2권 부제에 마르크스의 이름이 언급되어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금서가 되었다. 제5공화국 시절인 1982년 유화 정책 무드를 타고 나서야 해금되었다. #

[1] 사회자유주의/자유사회주의자로 보는 시각도 있고, 고전적 자유주의/자유지상주의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2] 원제는 『발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3] 그렇다고 흄이 귀납법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다른 방법을 써도 앎의 지식을 정당화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에, 그 중에서도 가장 최선의 방법인 귀납법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았다. 다만, 귀납법에 이러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4] 귀납추론이 아니라는 얘기다.[5] "정확히 자연과학이 비틀대며 나아가는 진보는 (중략) 우리의 시선을 지속적으로 새로운 무지로 열어준다. 심지어 자연과학분야 자체에서도 무지의 영역이 계속해서 열린다." (『the Positivist Dispute in German Sociology』에 수록된 포퍼의 첫 논문. p.87)[6] 다만 칼 포퍼는 말년에, 생전에 공개하는 것을 거부한 마지막 인터뷰에서 자신이 유신론자라는 암시를 내비친 적이 있다.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신의 마음을 언제나 충족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신을 대놓고 부르는 조직 신학을 비판했는데, 아마도 포퍼는 유대인으로서, 신을 대놓고 부르는 것을 꺼리는 유대교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7] 가장 유명한 사례로는 역시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일 것이다. 하지만 막상 아인슈타인 본인도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이 밝혀질 무렵에는 우주 상수를 동원하면서까지 정적 우주론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결국 빅뱅 우주론을 인정하고 우주 상수를 폐기했다. 다만 우주 상수 자체는 암흑 에너지 때문에 다시 연구대상이 됐다는 게 아이러니다. 다만 아인슈타인은 정적 우주론을 유지하려고 무리하게 우주 상수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이 연구하던 시기에는 아직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이 관측되기 이전이었다. 따라서 정적 우주론 틀 안에서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우주상수가 도입된 것이며 팽창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선 우주 상수가 더 이상 필요없게 되어 폐기한 것일 뿐 그가 정적 우주론을 지지했다고 볼 순 없다.[8] 당장 간단히 생각해 봐도, '사실에서 사실을 낳는' 연역론만으로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9] 다만 마르크스의 업적이나 인도주의적 사상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했다. 포퍼는 한때 사회주의 중등학생연맹의 열성적인 회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전체주의적 면모와 그 역사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자유주의의 열렬한 대변자가 된 것.[10] 일례로 공산주의 혁명의 발생 시기를 보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붕괴-공산주의 혁명이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으로 인해 '언젠가'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언제'는 언제인가? 1년 후인가, 10년 후인가, 수 세기 후인가? 이러한 시기의 모호성은 마르크스 이론이 가져야 할 반증의 시기를 끊임없이 유예시켜 줄 수 있다.[11] Kaufmann commented that despite Popper's hatred of totalitarianism, Popper's method was "unfortunately similar to that of totalitarian 'scholars'". (Kaufmann, Walter (1996). Stewart, Jon (ed.). The Hegel Myths and Legends)[12] 출처: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해제), 신상규, 2004[13] 포퍼가 자서전에서 회상한 부지깽이 사건이다.#[14] 이 사건을 아주 자세하게 다룬 책으로 <Wittgenstein's Poker>라는 책이 번역되어있다. 2001년에 <비트겐슈타인은 왜?>라는 제목으로 나왔는데 개정하면서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기막힌 10분>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 진중권의 서평 이송희일의 에세이[15] 에드먼드 버크는 민주공화제에 반대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인용을 썼다. 당대 미국 독립 혁명을 지지하였지만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을 한 군주제 지지자이자 보수주의자인 그였다.[16] 1934년에 독일어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를 낸 것을, 1959년에 영어로 다시 써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17] 생애 마지막에 쓴 에세이 모음집.[18] If we extend unlimited tolerance even to those who are intolerant, if we are not prepared to defend a tolerant society against the onslaught of the intolerant, then the tolerant will be destroyed, and tolerance with them.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19] Work for the elimination of concrete evils rather than for the realization of abstract goods. <추측과 논박> 2권에 나오는 말이다.[20] A rationalist, as I use the word, is a man who attempts to reach decisions by argument and perhaps, in certain cases, by compromise, rather than by violence. He is a man who would rather be unsuccessful in convincing another man by argument than successful in crushing him by force, by intimidation and threats, or even by persuasive propaganda.(Utopia and Violence)[21] When I speak of reason or rationalism, all I mean is the conviction that we can learn through criticism of our mistakes and errors, especially through criticism by others, and eventually also through self-criticism. A rationalist is simply someone for whom it is more important to learn than to be proved right.(On Freedom)[22] I do not overlook the fact that there are irrationalists who love mankind, and that not all forms of irrationalism engender criminality. But I hold that he who teaches that not reason but love should rule opens up the way for those who rule by hate.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23] We do not choose political freedom because it promises us this or that. We choose it because it makes possible the only dignified form of human coexistence, the only form in which we can be fully responsible for ourselves.(On Freedom)[24] The history of science, like the history of all human ideas, is a history of irresponsible dreams, of obstinacy, and of error. But science is one of the very few human activities — perhaps the only one — in which errors are systematically criticized and fairly often, in time, corrected. (Conjectures and Refutations)[25] The open society is one in which men have learned to be to some extent critical of taboos, and to base decisions on the authority of their own intelligence.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26] 영어로 "The attempt to make heaven on earth invariably produces hell." <열린사회와 그 적들> 2권에서 나온다. 그런데 이 말은 원래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말이다. 횔덜린은 『휘페리온』에서 "지구상에 지옥이 만들어졌던 것은 항상 인간이 자신들의 천국을 만들려고 할 때였다." (Immerhin hat das den Staat zur Hölle gemacht, daß ihn der Mensch zu seinem Himmel machen wollte.)라고 말했다. 아마도 칼 포퍼는 이 말을 인용표기 없이 베낀 듯 보인다.[27] 영어는 "Optimism is a moral duty." 포퍼가 자주 쓰는 이 말은 원래 임마누엘 칸트가 『영구평화론』에서 한 말이다. 이 역시 인용표기 없이 베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