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Fausse Route(佛) 잘못된 길(韓) Dead End Feminism(英) |
발행일 | 2003년(원서) 2005년(역서-1st) 2020년(역서-2nd) |
저자 | 엘리자베트 바댕테르 (Elisabeth Badinter) 나애리, 조성애 공역(역서 1st, 2nd 공통) |
출판사 | Editions Odile Jacob(원서) 도서출판 중심(역서-1st) 도서출판 필로소픽(역서-2nd) |
ISBN | 9788989524427(역서-1st) 9791157831708(역서-2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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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못 본 체해도 소용이 없다. 최근 몇 년간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거의 발전하지 않았다. ...(중략)... 이제 여성은 목청을 높여 큰 소리로, 남성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면서, 서로 자신이 상대방 성의 피해자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여성들이 남성들의 피해자라고 부연 설명도 없이 일반화시켜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현실은 무한히 더 복잡하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 각자가 서로 상대방의 피해자라고 할 만한 이유들이 다 있는 것이다."
- pp.181; 182 (서술 순서는 나무위키에서 임의로 바꿈)
...모든 여성들이 남성들의 피해자라고 부연 설명도 없이 일반화시켜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현실은 무한히 더 복잡하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 각자가 서로 상대방의 피해자라고 할 만한 이유들이 다 있는 것이다."
- pp.181; 182 (서술 순서는 나무위키에서 임의로 바꿈)
1. 소개 및 출간 배경
본서는 단순한 피해자/희생자의 서사에 매몰된 채, 남성을 절대악으로, 여성을 절대선으로 묘사하면서, 양성 간의 이러한 차이는 생물학적으로 불가변적이라고 인식하는 1990년대 프랑스 페미니즘 동향에 대한 비판서이다. 구체적으로, 본서는 80년대 무렵부터 미국에서 발흥하기 시작하여 90년대에는 마침내 프랑스에 수입된 문화적 페미니즘 혹은 성부정론 페미니즘(sex negative feminism)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 중에서도 본서에서 특히 문제시하고 있는 바 이들의 몇몇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 생물학적 본질주의(biological essentialism):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천성적이고 불변하는 생물학적 신체조건에 있으며 (ex. 남성의 정의는 곧 페니스 그 자체와도 같다) 그 이외의 생물학적 조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 과잉단순화된 흑백논리: "따라서 모든 남성은 본질적으로 악하고, 폭력적이고, 억압적일 수밖에 없으며 (ex. 남성의 페니스는 곧 죽음, 흉기, 침입, 강간을 표상하며, 특권적 폭력 그 자체를 상징한다) 모든 여성은 본질적으로 선하고, 비폭력적이고, 억압받을 수밖에 없다"
- 희생자 서사의 프로파간다 및 입법적 압력: "따라서 모든 여성은 모든 남성과 성적으로 접촉할 때 성적 침해를 경험하며, 이 만연한 피해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ex. 여성이 일체의 성적 불쾌감을 느끼는 모든 사례를 강간죄로 다스려야 한다)
어디선가 많이 본 논리 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 전에,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는 출간 배경을 일단 짚어보기로 하자.
미국에서 페미니즘의 리즈 시절이라 불릴 만한 때가 1970년대라면, 프랑스에서는 1980년대까지 전례없는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온갖 낙관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전통적 여성상은 힘을 잃었고, 금녀의 벽은 허물어졌다. 하지만 80년대의 미국은 분위기가 달랐다. 수전 팔루디(S.Faludi)가 백래시의 시대라고 불렀던 그 때, 미국 여성운동은 깊은 무기력감에 침체되어 있었다. 가부장제는 여전했고, 여성들의 성적 유토피아는 도래하지 않았으며, 그 유토피아를 약속했던 래디컬 페미니즘은 힘을 잃었다. 그 빈 자리는 일차적으로 조이스 트레빌콧(J.Trebilcot)과 같은 젠더분리주의, 여성국가주의,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이 채웠다. 그러나 남녀를 분리하자는 메시지도 먹혀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고, 결국 캐서린 맥키넌이나 안드레아 드워킨과 같은 문화적 페미니즘 및 성부정론 페미니즘이 분리가 아닌 "문화투쟁" 을 외치면서 대신 힘을 얻었다. 이들은 양성이 본질적으로 다르며 여성은 가녀리고 연약하고 힘 없는 존재라는 데 분리주의자들에게 동의하면서도, 남성 폭력을 뿌리뽑기 위해 입법부로 시선을 돌렸다. 이들의 메시지는 훨씬 더 효과적이어서, 1980년대에는 미국 여성계를 주름잡더니 마침내는 1990년대에 프랑스에 상륙한 것이다. 이는 90년대 초 프랑스가 경제불황에 시달리고 있었고, 프랑스의 직장여성들이 육아와 가사노동에 고통 받은 끝에 리버럴 페미니즘에 등을 돌렸으며, 더 이상 "여성의 성공, 성취, 용기" 서사는 대중에게 매력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성들의 현실적 고통은 직장생활만으로는 해결되지 못했고, 그 즈음에 "남성의 잔인한 폭력" 이 대신 타깃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본서는 눈물과 비극의 희생양 서사를 강조하는 것이 당시 여성계에 하나의 신드롬처럼 퍼져나갔음을 보여준다. 한계 없이 성장하고 계발될 수 있는 여성의 잠재력이라든지, 남의 도움 없이 주어진 현실과 운명을 바꾸는 '우먼 파워' 라든지 하는 것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 되었다. 성부정론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이상적" 인 여성상이란 가히 빅토리아 시대의 귀부인을 연상케 할 정도라는 비판마저 받았을 정도였다. 일체의 자기방어 능력이 없는 무방비한 여성, 남성 폭력 아래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가엾은 희생양 같은 여성, 우리 사회에게 가능한 한 최우선적으로 보호받아야만 하는 울고 있는 소녀 같은 여성... 이들은 자신들의 불행하고 한스러운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가능한 더 많은 남성들에게 가능한 더 많은 처벌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은 여성이므로 선한 피해자이고, 그들은 남성이므로 더 볼 것도 없이 폭력배이며 강간범이기 때문. 가장 사소한 성적 불쾌감도 여성에게는 강간과 같으며, 강간죄는 여성에게는 심리적 살인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부성애를 철저하게 부정하기 위하여 선배 운동가들인 리버럴 페미니즘과 래디컬 페미니즘에서 거의 폐기해 놓았던 전통적 어머니상을 페미니즘의 이름을 내걸고 다시 소환했다. 딸을 위해 무한히 희생하는 어머니, 임신을 통해 자녀와 영혼의 유대를 나누는 어머니... 이러한 사상을 정책으로 제도화 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여성들의 일상은 변화하지 않았다. 변한 것이 있다면 단지 "남성들에게 더 많은 처벌"(p.20)이 내려졌다는 것뿐. 그 시절 프랑스 사회가 그런 모습이었다. 이에 대해 저자는 페미니즘이 도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려는 것이냐며 본서에서 탄식을 한다. 당시 여성 운동 내부에서 강간이나 성범죄 문제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되고 의제화되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와 같은 의제 자체는 필요했으되, 그 의제가 실존적 불안이나 안전에 대한 위협에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어떤 '미끄러운 비탈길' 에 빠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저자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자.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는 유대계 프랑스인으로, 시몬 드 보부아르를 사상적으로 뒤따르는 여성학자이며, 여성해방운동(MLF; mouvement de liberation des Femmes)에 30년 가량 헌신해 왔던 운동가이고, 정치적으로는 개혁적 사민주의자에 속한다. 본서 저술 당시에는 프랑스의 최고 명문대로 꼽히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리버럴 페미니즘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2010년에는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 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2012년에는 포브스 지에서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억만장자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저자는 일차적으로 모성신화(myth of motherhood)에 대해 그것이 인위적으로 강요된 사회적 합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즉,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은 애를 낳으면 자동으로 모성애가 생기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으레 모성애를 기대하니까 자꾸 사랑하는 척을 하게 된 것" 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바댕테르의 영향 역시 크게 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당시에도 북아프리카계 이슬람 여성 이주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히잡을 착용할 것을 문화적 상대주의의 이름으로 허용한 것에 대해서 맹렬히 공격한 바 있다.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히잡은 이슬람권에서 그것을 쓰지 않은 여성은 "남성을 성적으로 유혹하고 도발하는 여성, 따라서 마음껏 강간을 해도 OK" 라는 문화적 의미를 갖기 때문에, 여성인권의 측면에서는 재고의 여지 없는 금지의 대상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저자의 논리가 더 궁금하다면 본서의 4장을 참고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저자는 성매매에 대해서도 성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을 강조하는 노선이라고.
국내에 번역된 바댕테르의 다른 저서들로는 《만들어진 모성》(절판), 《남과 여》, 《남성의 본질에 대하여》(절판)가 있다. 《남성의 본질에 대하여》는 절판된 후 《남자의 여성성에 대한 편견의 역사》 라는 다른 제하에 출판사를 달리하여 재판되었으나, 이조차도 절판되었다. 본서도 절판되었으나, 2020년에 필로소픽에서 재판했다.
2. 목차 및 주요 내용
- 서문: 1990년대의 큰 변화
- 1장: 새로운 '방법 서설'
- 아말감의 논리
- 철학적 불안
- 2장: 언급되지 않은 여성 폭력
- 생각지도 못했던 여성 폭력
- 여성들의 폭력
- 권력 남용
- 3장: 모순
- 오늘날 성(性)의 실태
- 길들여진 성의 허구
- 여성적 성 본능의 유형
- 4장: 퇴보
- 우리 각자가 다른 사람의 피해자라고 생각할 때
- '남녀 차이'가 법적 효력을 지닐 때
- 함정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선배 운동가들과는 달리, 90년대 이후의 페미니스트들은 연약하고 무기력한 소녀 같은 여성스러움과 고귀한 모성애에 호소해 왔다.
- 이것은 양성이 생물학적 본질 수준에서 서로 다르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하며, 지금까지의 페미니즘의 철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 페미니즘은 남성들의 악마화와 여성의 피해자 서사에서 벗어나서, 젠더가 사회적으로 합의된 구성이라는 원래 취지로 돌아가야 한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하단에 간략히 정리할 것이다. 먼저 90년대 이후의 성부정론 페미니스트들이 진취적이고 강인한 여성상보다는 가녀리고 연약하며 보호가 필요한 여성상을 더 선호하는 경향, 특히 모성애와 모유 수유를 강조하기 위해 보수주의와도 기꺼이 연대하는 경향을 저자가 어떻게 고발하는지 살펴본다. 다음으로는 이 맥락에서 제시되는 또 다른 주장, 즉 때로는 여성들도 폭력적일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성부정론 페미니스트들이 호소하는 바 섹스에 대한 여성의 동의 여부가 어째서 문제가 되는지 확인한다.- 1. 새로운 '방법 서설'
80년대 미국과 90년대 프랑스의 여성 운동가들은, 여성들이 강간 등의 남성 폭력에 희생당한다고 주장하면서 통계의 왜곡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남성의 공격성과 여성의 무기력함의 원인을 생물학적 본질에서 찾으려 하면서, 보부아르 등이 제시한 '만들어지는' 젠더를 부정했다. 이들은 전통적 모성과 여성다움을 윤리적 덕목으로까지 포장했고, 남성은 악의 근원으로 간주하여, 선한 희생자와 악한 억압자의 구도를 형성했다.
- 2. 언급되지 않은 여성 폭력
많은 이들이 여성이 가하는 폭력에 대해 침묵하거나 정당화하지만, 나치 독일에서, 르완다 내전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여성들도 폭력을 저질러 왔다. 흔히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이 더 큰 젠더 권력을 갖는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오직 여성이 당하는 폭력에만 관심을 갖고 남성의 사례는 무시했기 때문이다. 여성이 가하는 폭력을 강조하는 이유는 남성의 폭력을 옹호하기 위함이 아니며, 남성은 악마이고 여성은 천사라는 젠더 이미지를 깨뜨리기 위함이다.
- 3. 모순
세태가 변하여 사람들은 갈수록 성에 개방적이게 되었지만, 페미니스트들은 구식이고 보수적이며 순진한 섹스 관념을 견지해 왔다. 성폭력의 예방을 위해서 이들은 사전 동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나, 거래와 계약에 입각한 성적 접촉은 도리어 에로티시즘의 종말을 불러왔다. 이들의 공격은 남성의 성욕과 성적 충동을 향했으며, 욕망의 표현 자체가 폭력이므로 가능한 한 그것을 꺾고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4. 퇴보
여러 입법적 영역들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은 여전히 모든 여성이 모든 남성의 피해자라고 믿는다. 양성 간의 본질적인 차이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움직임은, 보편성의 환상에 대한 공격이라는 당시 시대적 흐름과도 관련이 있다. 이런 식의 페미니즘은 히잡 착용이나 모성신화, 모유 수유 캠페인, 경력단절 등의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에서 발생하는 퇴보를 막지 못한다.
이제부터는 편의상 저자가 "90년대 이후의 페미니즘" 이라고 불렀던 페미니즘의 조류를 "성부정론 페미니즘" 으로 대략적으로 통칭하기로 한다.
2.2. 연약한 여성, 고귀한 모성?
당초 북미권에서 강하고 주체적인 여성상이 아닌, 피해 입고 상처받은 여성상에 대한 강조는 강간과 음란물에 대한 여성계의 관심이 커지면서 촉발되었다. 1975년에 출판되어 처음으로 페미니즘에서 강간에 대해 진지하게 다루었던 고전인 수전 브라운밀러(S.Brownmiller)의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80년대 이후 캐서린 맥키넌의 《Sexual Harassment of Working Women》 과 안드레아 드워킨의 《포르노그래피》 가 연속적으로 출판되면서, 가부장제는 강간과 성적 폭력으로 유지된다는 인식이 발생하게 되었다. 무너질 것 같지 않아 보이던 가부장제의 뿌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이에 지지를 보냈다.이 생각에 대해 리버럴 페미니즘을 비롯한 많은 여성 인사들이 발끈했다. 게일 루빈(G.S.Rubin), 베티 프리댄(B.Friedan), 에이드리언 리치(A.Rich), 그리고 래디컬 페미니즘의 얼굴마담 격인 케이트 밀렛(K.Millett) 등이 나서서 이런 성부정론이 매우 위험하다고 비판했다. 이런 식의 방법론은 결국 문화검열주의의 선언이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는 것이며, 남성과의 젠더전쟁의 선전포고라는 것이었다. 이들에 맞서서 드워킨-맥키넌 일파는 음란물 규제를 목표로 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미국 공화당과도 연계했으며, 캐나다 정부는 성범죄 관련 법안을 만들 때 성부정론 페미니즘의 음란물 검열의 논리를 크게 참고했다고 알려져 있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사회과학적 사실확인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의 획득을 목적으로 통계가 악용되기도 했다고 말한다. 맥키넌은 "44%의 미국 여성은 강간(미수)의 경험이 있다" 고 주장했으나, 그 구체적인 근거는 밝히지 않았다. 1985년에 페미니즘 교양지 《미즈》(Ms)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또한 25%의 여대생이 강간(미수) 피해자라고 주장했으나, 실상 이는 원하지 않는 섹스에 참여한 응답자의 비율이었다. 2000년경 프랑스의 설문조사 기관 앙베프(Enveff) 조사에서는 강간(미수) 경험자가 전체 프랑스 여성의 1.2%, 원치 않는 성적 접촉 경험자는 8%로 나타났지만, 이는 성부정론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프랑스 여성의 8%는 강간을 당했다" 고 선전되었다. 악마의 편집은 이듬해에도 이어졌다. 최초로 실시된 프랑스 사회조사 데이터에서는 아내들의 10%가 가정폭력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자세히 뜯어보면 그 중 37%가 정신적인 고통, 2.5%가 신체적인 고통에 해당했다. 이를 두고 성부정론 페미니스트들은 "프랑스 아내들 열 명 중 한 명은 매를 맞는다" 는 식으로 몰아갔다. 통계의 오용에 대해서 리처드 오턴(R.Orton), 케이티 로이프(K.Roiphe),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즈, 닐 길버트(N.Gilbert) 등이 비판했지만 이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성폭력에 대한 선정적인 설명은 통계 인용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남성이 음란물을 시청하는 것조차 본질적 및 실질적으로 강간과 동일하다거나, 캣 콜링을 경험한 여성의 심리상태가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심리상태와 동일하다는 등의 주장으로까지 나아갔다.
이들은 자신들이 상대하려는 '폭력의 카르텔' 이 마치 인종차별이나 파시즘과 같은 무언가 거대한 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적수의 거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들은 남성들의 폭력적 지배가 끊임없이 다시 출현하고, 거짓으로 실패한 척하며, 당장은 양보한 척하면서 지금껏 지배력을 성공적으로 유지시켜 왔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여성들은 언제나 불행한 패배자였고 희생자였으며 일체의 자구책도 없는 존재였(어야 했)다. 지배자에게는 악, 피지배자에게는 선의 도덕적 위계가 설정되면서, "악의 힘에 의해 위협 받는 선" 이라는 구도가 탄생했다.[1] 《하나이지 않은 성》 의 저자로 잘 알려진 뤼스 이리가레는 남성을 전쟁광이자 육식주의자, 식인종, 정복자로서 묘사한 반면, 여성은 자연보호적이고 모성적이며 채식주의적이고 시민성을 갖고 있다고 묘사했다. 결과적으로 여성들의 이미지는 '악한 남성들에게 희생당하는 선한 존재' 이면서, '남성들이 파괴한 것을 다시 일으키고, 남성들이 죽인 것을 다시 살리며, 남성들이 버린 것을 다시 돌보는 존재' 로 표상되었다. 연약하고 고귀한 보호의 대상이라는 관념은, 여성들을 자기 주관이 있는 성인이 아니라 한낱 어린아이처럼 취급 받게 만들었다. 물론 진짜배기 어린이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 어린이들은 1990년대 초엽에 수많은 성범죄 서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드워킨이나 맥키넌처럼 극단까지 가지 않더라도, 결국 여성은 점차적으로 '아동'과 같은 사회 신분으로 떨어지게 된다. 연약하고 무력한 어린아이. 프로이트가 '다형도착자'라고 정의하기 이전의 순수한 아동의 신분이다. 저항할 힘이 전혀 없는 아동, 성인에 의해 학대받는 아동. 영원한 미성년자인 여성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집안의 남자들을 불러대는─옛날의 가부장적 시대의─상투적인 개념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옛날과는 달리 그녀들을 보호할 남자는 이제 없다. 가부장제도는 남성 지배주의에 의해 밀려났다. 모든 남성들은 의심할 여지가 있고 그들의 폭력은 도처에 산재해 있다. 아동이 부모에게 보호를 요청하듯이, 아동과 같은 신분을 갖게 된 여성은 법에 호소해야 한다."
- p.51-52
그러나 옛날과는 달리 그녀들을 보호할 남자는 이제 없다. 가부장제도는 남성 지배주의에 의해 밀려났다. 모든 남성들은 의심할 여지가 있고 그들의 폭력은 도처에 산재해 있다. 아동이 부모에게 보호를 요청하듯이, 아동과 같은 신분을 갖게 된 여성은 법에 호소해야 한다."
- p.51-52
성부정론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을 사상적으로도 퇴보시켰다. 상기했듯이 이들은 자기네 주장을 정초시키기 위해, 기존의 리버럴/래디컬 페미니즘에서 그렇게나 경계하던, 아니,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던(…)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모성애 담론을 끌어왔다. 이들의 동기는 진보적이라기보다는 보수적인 것에 더 가까웠다. 이들은 기존의 리버럴/래디컬 페미니즘이 '여성성이 소멸되고 남성성 하나로 통합되어 정의되는 전체주의' 를 추구했다고 생각했으며, 젠더 이분법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했고, 남성적 여성성에 의해 위협 받는 '여성스러움' 을 구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참고로 이거, 미국의 뉴라이트와 근본주의 개신교계, 안티페미니즘 세력과 똑같은 관점이다. 앞서 소개했던 이리가레를 비롯하여 앙투아네트 푸크(A.Fouque) 같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영원한 적인 남성에게 맞서기 위해 "위대한 모성애", "출산을 통해 부여되는 인류애", "정신적 우월함" 을 칭송했으며, 여성의 임신이 "한 육체가 타자의 육체를 수락하는 유일한 자연 현상이자 모든 결합의 모범" 이라면서 임신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해석을 내놓았다.
이상의 논리는 기존의 페미니즘의 인식론적 프레임에 맞지 않거나 심지어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들이 태반이다. 당장 위의 한 문단만 놓고도 기겁을 하고 뒷목을 잡을 유수의 페미니즘 이론가들과 운동가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2] 일찍이 현대 페미니즘의 바이블로 평가받는 《제2의 성》 을 출판한 여성철학의 거두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은 만들어지는 것" 이라면서 여성이 천성도 운명도 아니고 단지 사회적으로 합의된 젠더(gender)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남겼었다. 하지만 본서 저술 시점에서는 여성의 무력함이 자연의 섭리라는 설명이야말로 페미니즘적이었다. 이들의 눈에는 기존의 페미니즘이야말로 잘못된 논리로 비쳤을 뿐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들에게 보부아르와 그 후신들은 "여성의 배반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거라고. 이 때문에 저자는 "우선 이의 제기부터 하고, 그리고 나서 차후에 그 이의 제기에 대해 이론적으로 설명하기만 하면"(p.56) 되는 식의 위험한 철학적 곡예가 이어졌다고 비판한다.
2.2.1. 때로는 여성도 폭력적이다
"여성 폭력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서 남성 폭력의 심각함을 감소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며, 남성 폭력을 저지해야 한다는 생각이나 여성 피해자를 도와야 하겠다는 생각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다만, ...(중략)... 악마로 상징된 남성에 저항하는 천사 같은 여성의 이미지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 p.115 (일부 구문은 나무위키에서 자체 강조)
- p.115 (일부 구문은 나무위키에서 자체 강조)
저자는 2장에서 많은 장을 할애하여, 여성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해맑고 순수하고 비폭력적이며 평화주의적인 존재처럼 묘사하는 세태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페미니즘에서는 금기와도 같은 "여성이 저지르는 폭력" 에 대한 논의를 시도한다. 물론, 논의를 하려면 그 근거자료나 관련 데이터, 선행문헌 같은 것이 있어야 할 텐데, (당연히도) 이 주제에 대한 가용한 정보원은 지극히 부족했다. 그나마 세실 도팽(C.Dauphin), 아를레트 파르주(A.Farge), 도미니크 고디노(D.Godineau) 등이 관련문헌을 남기긴 했으나, 그 본질을 진지하게 탐구한 사례는 턱없이 부족하며, 언급하더라도 그 난폭함과 자극성은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 저자는 여성들이 폭력에 적극 동참한 역사적 사례가 있다고 말하면서 나치 독일의 기록물과 르완다 학살의 자료를 제시한다. 먼저, 여성들이 나치의 집단 학살에 동참했음을 고발하는 《Feminismes et Nazisme》 은 나치 독일을 남성의 폭력성과 등치시킨 한때의 이미지를 무너뜨린 문헌인데, 예컨대 구드룬 슈바르츠(G.Schwarz)의 연구에 따르면, 여성 친위대원들은 수용소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늘 총을 소지했고 상습적인 고문을 즐겼다는 것이 알려졌다. 또한 르완다 학살에 대한 생존자 보고서인 《아프리카인의 권리》(African Rights)에서 명기된 것처럼, 후투 족 여성들의 폭력은 철저히 계획적이었으며, 지위고하와 교육수준을 막론하고 남성들의 학살과 만행에 적극 가담했다. 하지만 우리는 대개 이런 이미지를 쉽게 상상하지 못하는데, 저자는 그 이유를 고정관념에서 찾는다. 여성들은 무조건 폭력을 두려워하고 싫어할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저자는 현대의 여성들도 일상생활 속에서 폭력을 얼마든지 자행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2000년대 초엽에 프랑스에서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10대 소녀들의 엽기적인 강력범죄 사건들,[3] 그리고 가정에서 아내에게 폭행 당한 남편들에 대한 일화를 소개한다. 공통적인 것은, 젠더는 언제나 사건의 질적인 특성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위험 요인은 남성이냐 여성이냐가 아니라, 가정폭력, 어려운 환경, 정신건강의 문제, 낮은 학업성취, 기타 등등이었다. 일단 여기에 해당된다면, 남학생이든 여학생이든 폭력성이 드러났다. 매 맞는 아내건 매 맞는 남편이건, 가정폭력을 겪고 나면 모욕과 수치심, 그리고 포기와 방치를 호소했으며,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하고 막연히 기대하는 심리 역시 무섭도록 똑같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처럼 남녀가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늘 언론과 대중에 이슈가 되는 건 가해자 남성 & 피해자 여성 구도에 맞는 사건뿐이라는 것.
물론 페미니스트들도 여성이 저지르는 폭력에 대해 할 말은 있다. 우선 첫째로, 이들은 "물론 일부 여성들이 폭력적일 수는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가해자가 남성이라면, 남성에게 포커스를 맞추는 게 상식적이지 않은가?" 라고 답변한다. 어떤 이들은 여기에다, "여성 가해자를 강조하는 것 자체가 가해자의 남녀 비율을 가리려는 것" 이라고도 덧붙인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고개를 젓는다. 지금껏 폭력 피해에 관련된 다수의 프랑스 국내 사회조사들은 으레 여성에게만 물었을 뿐, 남성이 피해자가 되는 것을 고려하고 남성에게도 똑같이 질문한 사례는 없다는 것이다. 폭력의 가해자가 남성이 대부분이더라 하는 것은, 그냥 그렇게 결과가 나오도록 여성들에게만 질문했으니까 그런 결과가 나온 셈이다. 결국, 현 시점에서는 "폭력의 가해자의 남녀 비율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고 보는 게 신중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저지르는 폭력에 대해 "물론 여성도 폭력을 저지르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성의 폭력에 대해 맞서기 위한 정당방위일 뿐이다" 라고 답변한다. 어떤 이들은 여기에다, "남성들은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해 죽이지만, 여성들은 그 압제자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죽일 뿐이다" 라고도 덧붙인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역시 저자는 고개를 젓는다. 우리는 남성이 여성을 압제하는 관계의 커플에게만 관심을 가졌지, 그 반대의 커플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시적으로 보자면 연애 권력은 상호간의 의존관계에 따라 커플 바이 커플로 변화할 수 있으며, 따라서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고 남성이 여성에게 의존적인 커플도 존재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매달리는 남성은 결국 애정을 빙자한 협박이나 정신적 억압 및 통제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고, 설문을 돌려 본다면 이런 남성들의 존재가 확인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것도 아직 우리는 알지 못한다. 설문을 돌려 본 적이 없는데 있는지 없는지를 어찌 안다는 말인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에서는 거북하기 그지없을 이런 반론들을 제기한 뒤, 저자는 사회과학의 본질을 들어서 호소한다. 사회과학이라면 그 동안 무시되거나 연구되지 않았던 것들을 연구해야 하며, 그것에 대해 침묵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성이 저지르는 폭력은 유독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무시되어 왔고, 그 결과 우리는 남성-가해자 & 여성-피해자 서사가 현실에 얼마나 부합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이 서사는 우리의 인간적 품성을 개선시키는 것으로 나아가지조차 못했다. 저자는 이런 문제제기가 자칫 남성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쓰일 것을 염려하지만, 저자가 구태여 2장에서 이 주제를 다룬 것은 "남성은 으레 악마, 여성은 으레 천사" 의 구태의연한 젠더 본질주의를 깨뜨리기 위해서라고 해명한다. 결국, 이 이야기 역시 상기된 것처럼 '평화주의자 여성관' 에 대해 비판하기 위해 끌어온 것이다.
2.3. 강간죄 피하기: "계약서라도 써야 하나요?"
소단락 제목만 봐도 내용이 감이 잡히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대체 요즘 세상은 어째서 깐깐해졌나에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본서는 바로 그 지점을 설명하고자 시도한다. 간략한 질문으로 시작하자면, 페미니즘은 정상인 남녀 간의 섹스에 대해서 어떤 공식 입장을 갖고 있을까? 이에 대한 간략한 대답은, "아직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다" 는 것이다. 먼저, 리버럴 페미니즘 및 래디컬 페미니즘 모두가 섹스에 대해서 "성적 유희의 기쁨" 을 탐험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전자의 경우 개인의 섹슈얼리티의 자유를 강조하고, 후자의 경우 성적 관습의 타파 및 다형도착(polymorphous perversity)을 강조한다. 하지만, 성부정적 페미니즘은 입장이 다르다. 이들은 "여성의 존엄성이 유린당하는" 피해 상황이라고 섹스를 바라본다. 섹슈얼리티의 소위 '해방' 이라는 것도 결국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남성의 성적 광란"(p.141)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저자에 따르면, 성부정적 페미니스트들이 물론 섹스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며, 금욕주의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보수적인 도덕주의에 입각한 것도 아니라고 해명하긴 하나, 비현실적일 수 있는 성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고 한다. 즉 이들에 따르면, 일단 섹스를 해야만 한다면, 서로가 서로의 욕망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서로가 하려는 모든 행위를 투명하게 사전 공개한 뒤, 그 모든 것에 전부 명시적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Yes means No" 가능성에 입각하여, 상대방의 욕망에 한쪽이 양보하는 것은 동의가 아니라고 인식되어야 하며, 아주 작은 정신적이고 상황적인 압력이 가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관계는 실질적인 강간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양보할 수 있는 건 언제나 여성이다. 왜냐하면, 남성들의 성적 본능은 더 '충동적' 이고 '즉흥적' 이며 '단순' 하기 때문에 (즉 더욱 '강간스러운' 섹스를 추구하기 때문에) 여성들의 성적 환상에 부합하지 않는 극단적인 무언가를 요구하기 십상일 테니까. 하지만 저자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불만을 표한다. "아니, 하나하나 그런 식으로 하면 그게 섹스인가?"
저자의 지적을 이해하기 위한 첫 단추는 우선 이렇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남성이 "라면 먹고 갈래?" 를 은근슬쩍 제안했을 때, (그나마 이런 언어적 제안조차 필수적이지 않다는 점은 접어두자) 여성이 "음... 좋아" 라고 대답했다고 가정하자. 하지만 아직 남성들은 환호성을 지르면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긍정적 대답이 "Yes means yes" 인지, 아니면 내키지는 않지만 원한다면 "Yes means no" 수준의 양보를 해 주는 것인지 도저히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전자가 확실하다면 그건 다행이지만, 만에 하나라도 후자일 경우 문제는 심각해진다. 다음날 여성의 신고로 인해서 자신이 강간범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적으로나 비언어적으로나, 이를 판별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이 문제에 대해 답변하기 위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존엄한 인간을 대한다고 생각해라", "여성을 물건 취급하지만 않으면 된다", "이걸 어려워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남성들이 얼마나 강간에 익숙한 마인드인지를 보여준다" 는 식으로 주장해 왔다. 이 경우에도 남성들은 여전히 불확실성이 제거되지 않는다. 자신들이 문자 그대로 '시커먼 남자들' 대하듯이 여성을 대한다고 해서, 그 여성이 자신이 인간적인 대우를 받는다고 느낄 거라는 보장이 여전히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전히 서로가 생각하는 도덕적인 섹스의 기준이 불일치할 가능성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성 본인도 (당연하게도) 스스로의 의향에 확실치 않을 수 있다. 이런 문제는 자연스러운 일상의 일부이지만, 유독 그 주제가 섹스일 경우에는 남성이 경찰서에 끌려가느냐 아니냐의 운명이 갈린다.
이런 어려움을 느낀 남성들은 마침내 "무슨 변호사라도 끼고 합의서나 계약서라도 받으라는 말이냐" 고 불평한다. 페미니스트들은 흔히 이런 불평을 비웃기도 하지만, 실제로 90년대 초에 미국의 안티오크 대학에서 철학자 로이스 피노(L.Pineau)를 중심으로 이런 주장이 진지하게 제기되었던 적이 있다는 걸 인지해 두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이런 발상이 섹스에 대한 비현실적인 관념에 기초한다고 비판한다. 현실에서 두 사람의 성욕이 그렇게 완벽하게 박자를 맞추어 동시에 생겨나고, 동시에 무르익고, 동시에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섹스에는 얼마든지 "무언의 놀이, 남을 놀라게 하는 놀이, 감추는 놀이, 뭔가를 시도해 보려는 놀이"(p.155)가 포함될 수 있다. 설령 처음에는 원치 않았더라도 한쪽의 간청으로 이내 진전되기도 한다.[4] 그리고 바로 그것이 섹스가 갖는 에로티시즘이다. 하지만 성부정론 페미니스트들은 에로티시즘을 부정한다. 이들의 눈에는, 그런 '서프라이즈 파티' 는 여성에 대한 강간일 뿐이다. 여성을 놀라게 한 남성을 기다리는 건 형사처벌이어야 한다. 여성은 섹스에 임하기 전에 자신이 앞으로 관여하게 될 모든 행위의 세부사항에 대해 인지하고 동의할 법적 권리가 있다... 의 논리인 것이다. 저자는 이런 생각이 결국 섹스의 상상력과 즉흥성을 소독시켜 버리는 "에로티시즘의 종말"(p.154)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여성의 일체의 수줍음이나 양보, 튕김 등이 섞여들지 않은, 정말 남녀 모두가 전적으로 수용한, 완벽하게 투명한 성적 접촉을 인식하는 상태에서 벌어지는 '이상적' 인 섹스가 있을까? 저자에 따르면 있다! "유일한 섹스 계약은 바로 매춘 행위에 대한 계약뿐이다!"(p.156) 하지만 이들을 만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아니, 사실 성부정론 페미니스트들은 성매매에 대해 가장 완고한 비판론자들이기도 하다. 물론 성노동자들이 '노동자' 냐 아니면 '성노예' 냐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겠지만, 어쨌거나 이들이 임하는 섹스라면 (적어도 위의 논리대로라면) 진정한 사랑의 결실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성부정론 페미니스트들이 돈으로 여성의 성을 구매했으니 이 또한 진정한 의미의 섹스가 아니라고 (즉 강간이라고) 대답하는 것에 주목한다. 그렇다면 여성이 남성에게 돈을 주고 성적인 서비스를 받았다면 그 남성은 강간당한 것인가? 돈이 오가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사회경제적 지위만 보고 배우자를 고르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럼 이들도 잘못된 것인가? 2002년의 프랑스 설문조사에 따르면 96%의 프랑스인들은 연애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라고 응답했는데, 이들이 타락한 것인가, 아니면 페미니스트들이 순진한 것인가? 저자는 이처럼 성부정 페미니스트들이 요구하는 섹스의 허들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높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그 이유를 이들이 "남성들의 성욕은 본능 수준에서 폭력적이고, 여성들의 성욕은 본능 수준에서 비폭력적이다" 라고 인식한다는 데서 찾고 있다. 결국, 남성을 타고난 가해자로, 여성을 타고난 피해자로 전제하는 이상, 이 둘이 만나는 섹스에 대한 인식은 정해진 셈이다. 섹스를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며 자신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관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잠재적인 가해자가 본질적으로 순진무구한 피해자를 꼬셔다가 남모르는 곳으로 납치하고는 무방비 상태로 만들고 심지어 자신이 준비한 흉기를 피해자의 몸에 들이대면서도 "오빠 믿지?" 를 속삭이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위기일발의 위험을 여성 쪽이 굳이 무릅써야만 하겠다면, 그런 짐승과도 같은 남성의 성욕을 철저히 묶어놓아야만 한다.[5] 그러려면 이 여성이 겪게 될 모든 것들을 사전에 정해 놓아야 하는 것이며, 거기서 벗어나는 순간 그 '야수' 는 격리 조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에 대해 저자는 굉장히 비관한다. 성부정론 페미니스트들의 목표는 단순히 남성들의 성범죄를 억제한다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지나치며, "이 세상 대부분의 남성을 비판하는 것처럼"(p.162)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최초의 질문, 어째서 성부정적 페미니스트들은 그렇게나 깐깐하게 섹스가 강간일지 아닐지를 따지는지로 돌아와 보자. 그 이유는, 이들이 섹스에 대해 비현실적인 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째서 섹스에 대해 그런 비현실적인 기준을 갖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이들이 남성과 여성에 대해 갖고 있는 시각 자체가 생물학적 본질주의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생물학적으로 남성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든지 "미친 짐승"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믿는다면, 그런 짐승에게 인간이 가장 취약해지는 시점에서 그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매달릴 수밖에 없고,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짐승이 욕정에 못 이겨 그 '이빨' 을 드러내는 듯해 보이면 그 짐승을 처벌해야만 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관련 문헌
먼저 나애리(2004)의 문헌은[6] 본서가 저술된 직후에 번역을 하기 전에 미리 국내에 소개하는 차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맞춤법이나 아웃풋 스타일, 규격 등에서 상당히 엉성하긴 하지만 본서에서 소개하는 설문조사 문항들이나 본서에서 문제삼고 있는 새로운 성범죄 방지법 등을 프랑스어 원문과 함께 소개하고 있으므로, 그런 디테일한 정보가 추가로 필요하다면 참고할 만한 문헌이 되겠다.방금희(2006)의 경우[7] 모순형용과 변형성 등의 "낯설게 하기" 라는 페미니즘의 수사법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바댕테르가 비판했던 90년대 페미니즘의 "아말감" 전략과는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즉, 페미니즘이 "개인적인 성생활이야말로 정치적인 것이다" 라면서 수사적으로 익숙한 무언가를 낯설게 할 때, 그것은 본질적으로 안정적인 것을 뒤흔들고 전복시켜서 유동적이게 하려는 성질을 갖지만, 90년대 페미니즘이 "모든 남성은 전부 가해자다" 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안정적인 것을 더욱 고정시키는 성질을 갖는다는 것이다. 방금희(2006)는 이것이 "페미니즘의 왜곡을 이끈 반페미니즘"(p.258)이라고 경계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이현주(2017)는[8] 강남 묻지마 살인사건 이후로 여성이 겪는 위험과 피해를 강조하기 위해서 구태여 선정적으로 피해를 과장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본서를 거론하고 있다. 여기서도 여성들에게 "불필요한 위축감과 무력감을 주고, 여성 차별의 원인을 엉뚱한 데서 찾게 되기 십상"(p.21)이라면서 페미사이드(femicide)를 주장하는 정희진 등의 입장을 비판한다. 여기서는 여성 노동자들의 자의식과 사회적 진출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노동자들을 여전히 손쉬운 착취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 있다. 즉, 마르크스주의적인 시각에서 남성의 폭력적인 권력이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착취+자본의 축적이 여성 노동자들을 차별하고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의 단결과 조직화가 필요하지, 여성을 광범위하게 피해자로 취급하는 것은 "남성 개개인을 고발하는 데 주력하도록 만들어"(p.25) 실제 자본주의 체계의 구조적 모순과 '진짜 지배자와 기득권층' 의 존재를 가리게 한다는 것이다.
국내에 《일베의 사상》 의 출간으로 인해 유명세를 얻은 시사평론가인 박가분의 경우 《포비아 페미니즘》 에서 논리를 전개할 때 본서를 즐겨 인용했다. 본서가 90년대 프랑스 페미니즘이 본질주의로 흐르며 남성을 악마화하고 여성을 피해자화 하는 피해자 서사에 매몰되고 다양한 사회적 퇴보를 일으킨다고 비판한다면, 해당 도서는 그런 피해자 서사를 통해 사회 전반에 공포(phobia)가 재생산됨으로써 이에 대항하는 페미니즘의 독선적인 폭주가 야기되고, 진보진영은 이를 마땅히 막아야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에 함몰되어 제동을 거는데 실패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소모되는 남자》 와 함께, 본 도서에서 큰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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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흥미롭게도 근본주의 개신교, 특히 신사도 운동에서 전제하는 영적 전쟁 역시 (단어만 다를 뿐) 이와 정확히 동일한 논리를 상정하고 있다. 뭔가 페미니즘과 성부정론 간의 관계가 그리스도교와 신사도 운동 간의 관계와 묘하게 겹쳐 보이기도 한다.[2]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Firestone)이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채택한 적은 있었지만, 그나마 그쪽은 인공자궁과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그 생물학적 조건을 극복하면 된다고 낙관했기 때문에 그나마 덜 까일 수 있었다.[3] 당시 오트가론(Haute-Garonne), 샤토루(Chateauroux), 루앙(Rouen), 비트롤(Vitrolles), 오드센 등지에서 미성년 소녀들이 폭행, 성폭력, 모욕, 특수상해 등의 범행을 저질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장 국내에서도 일탈 청소년 여학생들이 힘 없는 다른 급우를 장기간에 걸쳐 감금 폭행하고 심지어는 성매매에 팔아넘기기까지 하여 뉴스에 나오는 사례도 적지 않다.[4]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심지어 양쪽 모두 생각이 없었다가 돌발적으로 시작될 수도 있다. 친구처럼 지내는 남녀가 퍼질러 앉아서 맥주 마시고 오징어 다리를 뜯다가 갑자기 달아올라서 관계를 갖게 되고, 그 이후로도 계속 친구처럼 지내는 상황도 이 복잡한 인간사 속에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5] 저자는 남성들이 침대 위에서 야수가 되는 경향을 체계적으로 억제하기 위해 페미니스트들이 온갖 방법들을 모색하다가 이상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고 말하며, 그 즈음하여 있었던 사례를 소개한다. 90년대 말,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지역에서는 페미니스트들이 소년들에게 소녀처럼 변기에 앉아서 소변을 보는 것이 에티켓이라고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남성이 서서 소변을 보는 것은 마초적인 섹스의 암시를 주는 제스처라고 주장했으며, 이런 것부터 고쳐나가야 남성들이 자기 성욕을 억누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논리에 대해 남성들은 불쾌했지만, 차마 그것에 반대하지는 못했다고. 물론 이와는 무관하게, 서구의 건식화장실에서는 서서 소변을 보는 것이 위생에 매우 좋지 않긴 하다.[6] 나애리 (2004). 1990년대 프랑스의 새로운 페미니즘에 대한 연구. 프랑스문화예술연구, 12, 1-20.[7] 방금희. (2006). 학문적 글쓰기와 페미니즘 수사학. 아시아여성연구, 45(2), 241-269.[8] 이현주. (2017). 강남역 살인, 흉악범죄, 페미니즘. 마르크스21, 20, 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