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 20세기 이후에 벌어진 사건만 기술. ⚖️: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된 사건. | ||
사건 목록 | <colcolor=#000,#ddd> 세부 사항 | ||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1904 ~ 1908, | 발생 위치 | ||
후기 오스만 인종 청소 | 아시리아인 대학살 ,1914 ~ 1924, | 발생 위치 | |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15 ~ 1917, | 발생 위치 | ||
관련 인물 이스마일 엔베르 | |||
그리스인 대학살 ,1914 ~ 1922, | 발생 위치 | ||
관동대학살 ,1923, | 발생 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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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대학살 ,1937, | 발생 위치 | ||
롬인 말살 정책 ,1935 ~ 1945, | 발생 위치 | ||
파슬리 학살 ,1937, | 발생 위치 | ||
관련 인물 라파엘 트루히요 | |||
제2차 세계 대전 | 슬라브인 말살 정책 ,1939 ~ 1945, | 발생 위치 | |
홀로코스트 ⚖️ ,1941 ~ 1945, | 발생 위치 | ||
재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 |||
관련 인물 아돌프 히틀러 | 헤르만 괴링 | 하인리히 힘러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 아돌프 아이히만 | 하인리히 뮐러 | 루돌프 회스 | 프란츠 슈탕글 | 크리스티안 비르트 | 아몬 괴트 | |||
관련 단체 나치당 | 친위대 | 국방군 | 게슈타포 | 무장친위대 | 아인자츠그루펜 | 질서경찰 | |||
수용소 틀:나치의 주요 절멸수용소 | 다하우 강제 수용소 | |||
크로아티아 홀로코스트 및 세르비아인 학살 ,1941 ~ 1945, | 발생 위치 | ||
관련 인물 안테 파벨리치 | 딘코 사키치 | 미로슬라프 필리포비치 | 알로이지예 빅토르 스테피나츠 | |||
관련 단체 우스타샤 | 우스타샤 민병대 | |||
수용소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 | |||
보슈냐크인 및 크로아티아인 학살 ,1941 ~ 1945, | 발생 위치 추축국 점령하 유고슬라비아 | ||
관련 인물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 |||
관련 단체 체트니크 | |||
크림 타타르족 추방 ,1944 ~ 1948, | 발생 위치 | ||
관련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 |||
체첸인 및 인구시인 추방 ,1944 ~ 1948, | 발생 위치 | ||
관련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 |||
과테말라 마야인 제노사이드 ,1960 ~ 1996, | 발생 위치 | ||
방글라데시 제노사이드 ,1971, | 발생 위치 | ||
이키자 ,1972, | 발생 위치 | ||
아촐리족과 랑고족 학살 ,1972 ~ 1978, | 발생 위치 | ||
관련 인물 이디 아민 | |||
동티모르 제노사이드 ,1975 ~ 1999, | 발생 위치 | ||
킬링필드 ⚖️ ,1975 ~ 1979, | 발생 위치 | ||
재판 ECCC | |||
관련 인물 폴 포트 | 키우 삼판 | 깡 겍 이우 | 누온 체아 | 이엥 사리 | 이엥 티릿 | |||
관련 단체 크메르 루주 | |||
수용소 뚜올쓸라엥 | |||
구쿠라훈디 학살 ,1983 ~ 1987, | 발생 위치 | ||
관련 인물 로버트 무가베 | |||
안팔 학살 ,1986 ~ 1989, | 발생 위치 | ||
재판 안팔 학살/재판 | |||
관련 인물 사담 후세인 | |||
이사크 학살 ,1987 ~ 1989, | 발생 위치 | ||
관련 인물 시아드 바레 | |||
보스니아 전쟁 | 보스니아 제노사이드 ⚖️ ,1992 ~ 1995, | 발생 위치 | |
재판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 |||
관련 인물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 라도반 카라지치 | 라트코 믈라디치 | 젤리코 라즈나토비치 | 니콜라 요르기치 | 프라뇨 투지만 | 슬로보단 프랄략 |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 |||
관련 단체 스릅스카 공화국 | 헤르체그 보스니아 | 스릅스카군 | 세르비아 의용방위군 | |||
세부 사건 스레브레니차 학살 | 프리예도르 인종 청소 | 포차 학살 | |||
르완다 제노사이드 ⚖️ ,1994, | 발생 위치 | ||
재판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 |||
관련 인물 르완다 제노사이드 가해자 목록 |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된 인물들 목록 | |||
관련 단체 후투족 민병대 (인테라하므웨 | Impuzamugambi) | |||
제1차 콩고 전쟁 중 후투족 학살 ,1996 ~ 1997, | 발생 위치 | ||
밤부티 피그미족 학살 ,2002 ~ 2003, | 발생 위치 | ||
다르푸르 학살 ,2003, | 발생 위치 | ||
관련 인물 오마르 알바시르 | |||
야지디 학살 ,2014 ~ 2019, | 발생 위치 | ||
관련 단체 ISIL | |||
중국의 위구르인 탄압 ,2014 ~ , | 발생 위치 | ||
미얀마의 로힝야 탄압 ,2016 ~ , | 발생 위치 | ||
[!] 논란의 여지가 있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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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말기 후투족 반군들이 버리고 간 마체테와 소총 더미. 소총 더미를 확인하는 병사는 자이르 군인이다. | |
발생 지역 | |
발생 기간 | 1994년 4월 7일 ~ 7월 15일 |
피해자 | 50만 ~ 100만 |
"친절했던 이웃집 아저씨와 학교 선생님, 목사님이 하루아침에 저를 죽이려고 달려들었어요. 저는 죽어라고 계속 달렸어요. 그들이 계속 뒤에서 제 이름을 불렀어요.
너를 꼭 죽이고 말겠다고요."
- 르완다 대학살 생존자 인터뷰 中
너를 꼭 죽이고 말겠다고요."
- 르완다 대학살 생존자 인터뷰 中
"처음에는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언제고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다만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죽더라도 잔인하게 죽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요. 칼에 맞아 죽느니 차라리 총에 맞아 죽기를 바라지요. 돈을 주고 죽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대개 총으로 죽여 달라고 말할 겁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게 오히려 예삿일이다 보니 절로 체념이 되더군요. 싸울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습니다. 키갈리의 이웃 도시인 카시루에서만 투치족 4,000명이 살해되었습니다. 군인들이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한데 모여 앉으라고 말하더군요. 수류탄을 터뜨려 한꺼번에 살해할 생각이었던 게지요. 사람들은 모여 앉았습니다."
- 당시 대학살의 생존자 중 한 명이었던 로랑 은콩골리가 필립 고레비치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
- 당시 대학살의 생존자 중 한 명이었던 로랑 은콩골리가 필립 고레비치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
르완다어: Itsembabwoko ry'u Rwanda ry'1994
프랑스어: Le génocide des Tutsis au Rwanda
영어: Rwandan genocide
1. 개요
르완다 학살은 후투족의 국가개발혁명운동 정권과 투치족의 르완다 애국전선 간의 르완다 내전 기간 중 1994년 4월 7일부터 7월 15일까지 정확히 100일 동안[1] 약 50~80만 명이 학살당한 사건으로[2]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민주 캄푸치아의 킬링필드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의 근간을 뒤흔든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자 가장 대표적인 제노사이드 중 하나로 유명하다.[3] 특히 시간당 사망자 수는 저들을 뛰어넘은 역대 최악으로 꼽힌다.[4] 1990년대 전세계에서 발생한 비극으로 고난의 행군, 유고슬라비아 전쟁,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점령 중 일어난 1991년 산타크루즈 대학살 참사, 콩고 전쟁 등과 함께 가장 자주 꼽히며, 이들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참혹한 비극으로 꼽힌다.게다가 이 사건의 경우 국가 주도의 체계적인 학살 시스템이나 대량살상무기의 사용 같은 요소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칼, 도끼, 몽동이, 활, 특히 마체테 같은 냉병기에 의한 원시적인 수법을 동원한 살인이 높은 비율을 차지했기에 더욱 경악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는 가해자들의 숫자 역시 피해자들 못지않게 많았음을 암시한다.
르완다 내에서는 마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허구설과 네오나치 불법화와 비슷하게 투치족에 대한 학살을 부인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5] 또 어떠한 이유로든 종족을 구분하는 것은 '제노사이드 이데올로기'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는 행동으로 간주됨과 동시에 형법으로 금지되어 5~9년 정도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6]
2. 주도 세력
후투족 출신 대통령 암살로 촉발된 이 인종 대학살은 후투족 정치 단체와 펠리시앵 카부가, 조르주 루타간다와 같은 부호들로부터 지원받은 후투족 민병대인 인테라하므웨[7] 및 임푸자무감비[8]가 실행했고 르완다군 수뇌부와 아카주[9]라는 후투족 권력 집단이 지도했다.3. 무기
신청서를 작성하면 AK-47이나 UZI 따위의 총기가 지급되었으며, 수류탄과 마체테는 서류를 작성할 필요도 없이 그냥 뿌렸다. 수도 키갈리에서는 자동화기로 무장한 군과 민병대가 학살에 동원되었다. 그때는 그나마 그냥 죽이는 식이었다. 그러나 학살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가담자가 많아짐에 따라 원시적인 살인 무기들이 동원되기 시작했고, 여기에 보태서 평소 쌓였던 개인감정과 분노를 학살에 반영하기 시작했다.칼과 창, 네일배트, 마체테[10], 망치 등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모든 도구가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되었으며,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는 한쪽 손에는 무기를, 다른 한쪽 손에는 라디오를 들고 있는 때도 잦았다. 사냥용으로 쓰던 전통 활을 들고 나온 이들도 영상에 자주 잡혔다. 당시 송출되던 라디오 방송은 르완다의 제일가는 부자였던 펠리시앵 카부가가 사이비 역사학자였던 페르디낭 나히마나와 함께 설립한 라디오 텔레비지옹 리브르 데 밀 콜린[11]][12]으로 교묘한 언변을 통해 투치족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켰는데, 르완다 내전 내내 투치족의 몰살을 촉구하는 내용의 방송, 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나히마나의 사이비 역사 왜곡 코너, 저 멀리 '유럽의 배운 사람들'도 투치족을 싫어하고 후투족을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한 벨기에 현지인 조르주 루지우가 진행하는 '백인이 보는 르완다 코너' 등 다양한 구성으로 이루어졌고, 사이사이에는 시몽 비킨디[13]의 투치족에 대한 증오가 가득 담겨있는 인기 선전가요들을 쉬지 않고 내보냈다.[14]
당시 송출되던 RTLM 방송(1994년 6월 19일)
4. 원인
이 대학살이 가능했던 건 당대 르완다의 청년 실업률과 양극화가 매우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르완다는 1980년대 중반까지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국가로 꼽혔고,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인구는 늘어났지만 1986년 르완다의 주요 수출품이었던 커피와 차의 가격이 폭락하면서 경제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를 해결하려면 커피와 차를 대신할 대체작물이나 제조업의 육성이 필요했지만, 대체작물의 재배나 제조업 육성책은 미비했고, 자연히 후투족 청년들의 대다수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당연히 은둔형 외톨이로 살거나, 청년 실업자로 마을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무시당하기 일쑤였던 이들은 대학살 명령을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하고 불만을 해소할 기회로 생각했고, 때마침 후투족 지도부에서 사실상 무제한적으로 폭력을 부추기자 쌓여 있던 악감정이 극단적인 형태로 방출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자기가 평소에 당한 억울함과 분노를 투치족 학살로 풀면서 학살의 양상이 더욱 잔혹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학살은 상당히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현의 지사는 수도 키갈리에서 내려온 명령에 따라 코뮌의 지도자들에게 학살 지시를 하달했으며, 코뮌의 지도자들은 코뮌 내 각각의 구역과 마을의 지도자들에게 그 지시를 다시 하달했다.
5. 피해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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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널부러져 있는 피해자들의 시신 |
르완다 내전 기간 동안 영유아 사망률은 무려 1000명당 341명이었으며, 심지어 이 전쟁으로 인해 르완다인의 평균수명은 단 1년 만에 1993년의 42.2세에서 1994년의 14.1세로,[17] 즉 단 1년 만에 이전의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고, 비슷한 기간 동안 르완다의 총 GDP/1인당 GDP도 19.7억 달러 -> 7.5억 달러/249.4달러[18]에서 111.94달러[19]로 이전의 절반 미만으로 추락했으며,[20] 경제성장률은 무려 -50.2%를 기록했다.[21] 당연히 1994~1995년 르완다의 물가상승률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
르완다의 인구도 내전 1년 전인 1993년에 790.5만 명이었던 것이 내전이 일어난 1994년에는 568.7만 명으로, 내전 1년 후인 1995년에도 568.7만 명을 기록하여 단 2년 만에 당시 인구의 28%에 달하는 221.8만 명이 줄었다.
학살 중에는 서양이나 유엔의 외부 조력이 전혀 없었기에 정부 요인들[22]도 대통령 경호대에 의해 암살되었다.[23] 유일하게 살아남은 포스탱 트와기라뭉구[24]][25] 총리는 르완다에 주둔 중이었던 유엔 평화유지군의 보호를 받아 학살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보호받지 못한 투치족이나 학살에 동조하지 않은 후투족은 당연히 후투족 청년 실업자에게 살해당했다.
6. 학살 당시에 자행된 만행과 그로 인한 참상들
후투족 젊은이들과 노인들도 민병대를 본받아 살인 임무에 가담했다. 이웃이 이웃을 집에서 칼로 찔렀고, 동료가 동료를 항해 일터에서 칼을 휘둘렀다. 의사들은 환자들을 살해하고, 학교 선생들은 학생들을 살해했다. 겨우 며칠 만에 대부분의 마을에서 투치족 거의 모두가 목숨을 잃었고, 키갈리에서는 죄수들이 도로에 즐비한 시체를 수거하는 작업에 투입되었다. 르완다 전역에서 살인에 이어 집단 강간과 약탈 행위가 이루어졌다. 술에 취한 민병대원들이 약국을 약탈해 손에 넣은 각종 향정신성 약품을 복용하고 버스로 이곳저곳을 누비며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라디오 아나운서는 청취자들에게 여성들과 아이들에게도 인정을 베풀지 말라고 독려했다. 살인자들을 더욱 고무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라디오, 소파, 염소 등과 같은 투치족의 재산을 미리 분배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여자를 강간할 수 있는 기회까지 보장했다. 키갈리의 한 시의회 여성 의원은 투치족의 머리를 잘라올 경우 50르완다프랑(당시의 화폐 가치로 약 30센트에 해당함)을 나누어 주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런 관행은 '양배추 팔기'로 알려졌다.
《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 걸 제발 전해주세요!》144쪽에서
《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 걸 제발 전해주세요!》144쪽에서
지옥에는 악마가 남아있지 않다. 그들은 모두 르완다에 모였다.
르완다 학살을 목격한 선교사들의 단평 출처
르완다 학살을 목격한 선교사들의 단평 출처
- 수도 키갈리에서는 르완다군의 정예 부대인 대통령 경호대가 집단 학살을 주도했다. 그들은 수도 전역의 도로를 통제하고는, 도로 블록을 통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민족이 포함된 국가 신분증을 제시하게 했으며, 물론 신분증에 '투치족'이라고 적힌 사람은 모두 처형되었다.[26]
- 키갈리에서는 자동 화기로 무장한 르완다군과 민병대가 학살에 동원되었으나, 지방에서는 칼, 창, 마체테, 망치, 못이 박힌 곤봉[27], 활 같은 원시적인 살인 무기들이 동원되었다. 마체테로 사지와 목은 기본에 발뒤꿈치를 잘랐으며, 심지어 임산부의 배까지 갈라 태아와 산모까지 죽이는 만행도 벌였다.
- 도주를 막기 위해 "적절한 키로 줄인다." 는 명목으로 희생자의 손발을 함부로 잘랐다.
- 단순히 "투치족처럼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된 사람도 있었다. 당시 영상에도 "코 모양 보면 다 안다."고 주장하는 민병대원이 나온다.
- 후투족 민병대가 학교의 여학생 기숙사에 쳐들어가 여학생들을 모아놓고 후투족과 투치족을 구분한 후 후투족은 살려주고 투치족은 죽이려고 했으나 여학생들이 나눠지길 거부하자 전부 다 죽여버린 참혹한 비극도 있었다. 이 사건은 이드리스 엘바 주연의 영화 <4월의 어느 날>에 나왔다.
- 병원에서는 후투족 의사가 투치족 환자들을 죽였고, 회사나 마을에서도 살생부를 작성해 투치족을 골라서 죽였으며, 성당으로 대피한 사람들은 가톨릭 사제들이 교묘히 속여 살인마들에게 넘기거나, 아예 직접 죽이기도 했으며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가 나오게 하는 처참한 살육이 벌어졌다.
- 어떤 곳에선 "총알을 아낀다." 는 이유로 희생자들의 몸에 돌을 넣어 강에 던지기도 했는데, 시체가 얼마나 많았는지 살해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탄자니아와 우간다, 케냐 인근의 빅토리아 호수까지 떠내려왔다.
- 학살 당시 죽은 사람들의 사체들 주위에 흰등독수리, 루펠독수리 같은 독수리들[28]이나 점박이하이에나와 가로줄무늬자칼 같은 청소부 육식 포유류들이 몰려와 학살당한 사람들의 사체를 뜯어먹었을 정도였다.
- 당시 르완다 학살의 참상을 말해 주는 일화 중 하나로 후투족 민병대에게 칼로 난도질당하던 투치족 소년이 울부짖으며 "다시는 투치 안 할게요! 살려 주세요!"라고 애걸했다. 너무 어려서 투치가 뭐고 후투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들까지 모조리 도륙된 것이다. 이 말은 영화 <호텔 르완다>에서도 나온다.
- 1995년 12월 18일《뉴요커》의 인터뷰에 실린 르완다 학살의 주범 중 한 명은 "투치족은 투치족이라서 죽은 것이 아니라, 르완다 애국전선의 동조자였기 때문에 죽었다. 투치족의 99%가 르완다 애국전선을 지지하는 세력들이다. 인종과 정치 사이에 차이가 없다."라고 발언했으며, 아프리칸 라이츠의 조사에 따르면 한 인테라하므웨 출신은 "우리는 모든 투치족을 절멸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투치족 사람들 모두가 르완다 애국전선에 협력했다고 말할 수 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제 사회는 이런 르완다의 비극을 철저히 외면했다. 물론 언론들에서는 해외 토픽급으로 쉴틈없이 보도했지만[30], 보도들도 대부분 학살보다는 난민 사태에 집중되었다. 프랑스의 유력 주간지인《르 포엥》은 "CNN의 진가는 세계적인 대사건이 벌어질 때 발휘되었다. 그러나 현재 지구촌에 벌어지고 있는 보스니아 사태, 르완다 참상, 남아공 문제, 북한 핵위기 등은 미국 시청자들을 흥분시키지 못하고 있다.며[31] 홀로코스트, 킬링필드와 동급의 비극이 '세계적인 대사건'이 아니란 투로 언급했다.(#) 한편《조선일보》에도 한국 사회가 르완다 학살에 너무 무관심하다는 독자 투고가 실렸다. # 폴 카가메 현 르완다 대통령도 르완다 학살 30주기 추모식에서 "우리를 저버린 건 국제사회였다."고 언급했다. # 국제 무대의 완전한 변방인 동아프리카 오지에 있는 극빈국이자 약소국에서 벌어진 일이었기에 내용으로 따지자면 소련 붕괴 이후 최악의 대사건들로 꼽히는 9.11 테러,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도 비할 바 없이 극악무도했음에도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던 것이다.[32] 게다가 동시에 유럽에 있는 발칸반도에서 유고슬라비아 전쟁[33]이 벌어졌고, 서양의 언론들은 세계 무대의 완전한 변방에서 일어난 내전이었던 르완다 학살보다는 유럽에서 일어난 내전이었던 유고슬라비아 전쟁 쪽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6.1. 대량 강간
학살 기간 동안 약 25~50만 명의 여성들이 강간당했고, 이 강간으로 인해 태어난 아이들은 2,000~10,000명에 달했다. 민병대는 여성들을 성노예로 삼기도 했다.미국의 비영리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가 1996년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사춘기를 넘긴 여성 생존자들은 대부분 강간 피해자였다. 피해자들의 연령대는 2세~50세였으며, 28%는 미성년자였다.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은 AIDS 환자들을 '강간반'으로 삼아 병원에 풀어 놓기도 했는데, 그들이 강간할 투치족 여성들에게 '천천히, 냉혹한 죽음'을 초래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이 자신을 강간하기 전에 직접 죽이지 않고 에이즈로 천천히 죽게 할 것이라며 말했다고 증언했으며, 내전 후 르완다 시골에서 에이즈 감염율은 2배로 증가했다.
[1] 24일(4월)+31일(5월)+30일(6월)+15일(7월)=100일[2] 1994년 당시 르완다의 인구는 594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즉, 단 100일 만에 전체 인구의 8.4~13.4%가 죽어나간 셈이었다.[3] 심지어 현 시점에서 저 학살이 일어난 지 고작 3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홀로코스트는 80년, 킬링필드는 50년 되었다.[4] 특히 내전의 첫 2주 동안 25만 명이 죽었으며, 전반 6주 간 전체 사망자의 무려 80%가 나왔다. 100일 만에 50~80만 명이 죽었다는 것은 단 하루 만에 5~8천 명, 1시간 만에 약 210~330명, 1분 만에 3.5~4.6명이 죽었다는 뜻이며, 더 쉽게 말해 13~17초마다 1명이 죽었다는 뜻이다. 악명 높은 난징 대학살조차 여기 비할 바가 못된다.[5] 이는 현직 대통령이자 독재자인 폴 카가메가 투치족인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이나, 선술했듯 이 사건은 홀로코스트, 킬링필드와 동렬로 평가받을 정도로 비극적인 사건으로 꼽히는지라 카가메가 집권하지 않았더라도 이 사건을 부인하는 것이 불법화되었을 확률이 높다.[6] 링크에 따르면 2024년 3월 12일 르완다 학살 제노사이드 추모 행사 때 추모를 거부하고, 제노사이드 희생자를 폄훼하는 발언을 한 니아비후 시의 클라리스 무칸상가 부시장이 구속되는 일이 있었다.[7] Interahamwe: 르완다어로 '함께 일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나마 우두머리들은 제대로 처벌받았으나, 잔당들은 르완다에서 쫓겨나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도피한 후, 콩고의 후투족들 및 지역 토호들과 손을 잡고 르완다 해방군(ALiR)을 거쳐 르완다 해방을 위한 민주군(FDLR)으로 신분을 세탁하여 콩고 민주공화국 등지에서 반르완다 반군 활동은 물론이고, 지역 분쟁과 테러 등으로 수많은 콩고 민간인들을 강간, 학살하고 다니는 중이다. 그것도 2025년 현재까지다. 웃기게도 인테라하므웨의 수장 로버트 카주가(Robert Kajuga, 1960~2007?)는 순혈 후투족은 커녕 아버지가 투치족인 투치족 혼혈이었다. 후투족이 투치족과 결혼한 후투족을 반역자로 취급했기에 순혈 후투족으로 신분을 세탁한 것이었다. 콩고 내 이들의 활동은 과거 모부투 세세 세코가 이들을 지원한 사실과 함께 현 르완다의 폴 카가메 정권이 3월 23일 운동(M23)같은 친르완다 반군들을 후원하며 DR콩고의 자원을 약탈하고 발전을 가로막는 주 명분으로 사용되고 있다.[8] Impuzamugambi: 르완다어로 '같은 목적을 가진 이들'이라는 뜻이었다.[9] Akazu: 르완다어로 '작은 집'이라는 뜻이었다. 쥐베날 하뱌리마나 대통령의 영부인이었던 아가테 하뱌리마나(Agathe Habyarimana, 1942~)의 친척과 친구들로 구성된 집단이었다.[10] 당시 학살 피해자 중 38%가 마체테로 살해당했다고 한다.[11] RTLM, 르완다 자유 라디오 텔레비[12] 밀 콜린은 '1,000개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산과 언덕이 많은 지형이었던 르완다를 프랑스어로 일컫는 말이었다. '르완다' 자체도 '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13] 여자친구와 입양한 아들의 아버지가 모두 투치족이었다고 한다(!!!). 여자친구는 2008년《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비킨디가 (투치족을 혐오했다기보다는) 단지 기회주의자였다고 주장했다. #[14] 당연히 증오 발언, 살인 독려, 가짜 뉴스 배포 등 문제가 많은 방송이라 당대 르완다 정부 청문회에도 관련 내용으로 인해 불려가기도 했다. 쉽게 말해 투치족을 탄압하던 국가개발혁명운동 독재정권이 보기에도 RTLM의 방송 수준이 차마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저질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카부가를 비롯한 RTLM 경영진은 항상 교묘한 변명으로 이를 빠져나갔고, 오히려 해당 청문회를 주도한 장관이 감히 투치 놈이 RTLM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청취자들에 의해 가족과 함께 암살당하는 일도 있었다.[15] 당시 투치족 중 무려 70~75%가 내전 당시에 살해되었다. 이들 중 1~30,000명은 르완다 애국전선에 동조한 혐의가 있는 투치족이었다.[16] 이들은 '배신자'로 간주되어 가장 먼저 살해되었다. 학살된 후투족 중에는 이미 살생부에 올라와 있었던 온건파 후투족 각료와 정치인도 있었다.[17] 참고로 중세 영국에서 흑사병이 창궐할 당시 영국인의 평균 수명이 17세 정도였으며, 킬링필드 당시 캄보디아의 평균 수명이 14.5세였다. 르완다 내전이 어느 정도로 끔찍한 일이었는지 알 수 있다. 다만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 우크라이나의 평균 수명은 무려 남자 7세, 여자 10세였다.[18] 2025년 가치로 548.3달러[19] 2025년 가치로 240달러. 이때 르완다는 세계에서 16번째로 가난한 나라에서 세계에서 3번째로 가난한 나라로 추락했다. 참고로 5위 콩고민주공화국은 136.5달러, 4위 에티오피아는 127.7달러, 2위 미얀마는 105.4달러, 1위 라이베리아는 61.5달러였다.[20] 물론 이는 단기간의 전쟁으로 인한 일시적인 변동이라 1995년에 르완다의 평균 수명과 GDP, 1인당 GDP는 각각 39.97세/12.94억 달러/227.46달러로 어느 정도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물론 그 올랐다는 것도 2025년 가치로 약 475달러에 세계에서 13번째로 가난한 나라 수준이었다. 1996년에는 206달러(2025년 가치로 417달러)로 떨어지며 세계에서 8번째로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21] 물론 1995년 경제성장률도 기저효과로 35.2%를 기록했다.[22] 상술한 것처럼 후투족들도 포함되었다.[23] 특히 후투족 온건파 출신의 여성 총리이자 하뱌리마나 대통령의 암살 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던 아가테 우윌링기아마나[34]]도 있었는데, 그녀는 내전이 발발한 바로 그 날 아침, 자택에서 대통령 경호원들(후투족 출신)에 의해 남편과 같이 머리에 총을 맞고 살해당한 후, 시체가 벌겨벗겨지고 질에 맥주병이 꽂힌 채 발견되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그녀의 자식들은 살아남아 스위스로 피신할 수 있었다.[24] Faustin Twagiramungu, 1945~202[25] 초반에 대통령 경호대에 살해된 아가테 우윌링기이마나의 후임자였다. 후투족 출신이었으나 본인은 자신을 '르완다인'으로 봤고, 르완다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그레구아르 카이반다의 사위이기도 했으며, 쥐베날 하뱌리마나에 저항하는 공화민주운동(MDR)을 창설하고(1991년) 지도부로 일하는 등 반독재 운동에도 앞장섰다. 1994년 7월 19일에 총리로 임명되었고, 총리로 일하던 시절에는 투치족에게 어느 정도는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1995년 8월 28일에 사임한 후 가택연금을 받았으나, 같은 해에 간신히 브뤼셀로 망명을 간 후 2023년 12월 2일 브뤼셀에서 향년 7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브뤼셀로 망명한 후에도 트와기라뭉구는 2014년 4월 4일(카가메가 브뤼셀을 방문한 지 고작 2일 후였다) 카가메 산하 요원들이 자신을 암살할 것이 두려운 나머지 4일 동안 벨기에 경찰의 보호를 받기도 했다. 2003년에는 르완다 대통령 선거에서 폴 카가메와 격전을 벌여 3.62%의 득표율로 3명 중 2위를 기록하기도 했는데, 이 선거에서 카가메의 득표율이 무려 95.05%였기에 부정선거 논란이 있었다.[26] 다만 이는 아프리카에 상주하던 민족 간 분쟁이라 누가 봐도 르완다인이 아닐 법한 서양인이나 동양인 등 외국인들은 통행이 자유로웠고, 실제로 영상을 검색하면 외국인들이 촬영한 도로에 경계석 같이 형태를 유지하는 시체들의 줄이라든지, 밀 콜린스 호텔로 짐작되는 높은 곳에서 촬영한 집단 린치 및 학살 자료를 볼 수 있다.[27] 르완다어로 '마수'라고 불린다.[28] TV에서 방영되는 자연 다큐멘터리의 아프리카 국립공원 방영분에서 자주 출연하는 아프리카의 독수리들이 바로 저 새들이다.[29] 르완다 애국전선에 가담한 투치족의 상당수가 1959년 후투족 혁명 당시 르완다에서 탈출하거나 쫓겨난 투치족의 후손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30] 하지만 신문 1면에 실리는 일은 없었다.[31] 실제로 걸프 전쟁의 CNN 보도가 미국 시청자들을 열광시키며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대통령의 역대 최고 지지율 기록에 일조했다.[32] 이는 6.25 전쟁 이후 최대 인명피해를 낳은 전쟁인 콩고 전쟁도 마찬가지.[33] 여기서도 스레브레니차 학살이라는 만만찮은 학살 사건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