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2-14 05:17:09

남자다움에 관하여


도서명 남자다움에 관하여(韓)
Manliness(英)
발행일 2006년(원서)
2010년 7월 1일(역서)
저자 하비 맨스필드
(Harvey C. Mansfield Jr.)
이광조 역
출판사 Yale University Press(원서)
도서출판 이후(역서)
ISBN 9788961570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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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및 출간 배경2. 목차 및 주요 내용
2.1. 챕터별 내용 정리2.2. 남자다움이란?
2.2.1. 독립성과 자기확신2.2.2. 두모스(thumos)
2.3. 래디컬 페미니즘의 한계2.4. 번외: 여자다움이란?
3. 서평
3.1. 학계3.2. 언론
4. 유의점과 비판점
4.1. 성차에 대한 남은 이야기
5. 둘러보기

"남자다움은 체념과 기도에 앞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다."
(Manliness is the next-to-last resort, before resignation and prayer.)
- p.6

1. 소개 및 출간 배경

이 책은 미국보수 지식인의 관점에서 프리드리히 니체허무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남자다움" 에 대해 인식하는 철학 서적이다. 본서는 전반적으로, 남자다움(manliness)을 연구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과학을 거부하고, 그 대신 정치학철학 텍스트의 강독 및 문예비평을 시도하고 있다. 즉, 과학은 남자다움이라는 개념을 연구하기에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며, 그보다는 철학적 통찰이, 심지어는 흔한 사람들의 상식이 남자다움의 개념에 있어서는 훨씬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본서는 《Taking the Sex Differences Seriously》 와 같은 생물학적 성차에 대한 도서를 인용하는 등, 남녀 간의 성차에 대한 많은 과학적 정당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데이터들을 굳이 철학 도서를 쓰면서 동원하는 동기는 어디까지나 남자다움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함이다. 이후 "The American Enterprise Online" 에 투고한 글에서 그는 최신 신경과학과 생물학적 연구를 통해 볼 때 남녀 간의 성차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하며,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Wollstonecraft)의 선언 "마음에는 성별이 없다"(The mind has no sex)는 슬로건이 반박되었다고 다시 주장하기도 했다. #Archive 여러 저작물들을 통해 보면, 저자는 젠더 역할에 대해 긍정하고, 남성과 여성이 각각 따라야 할 규범적 가이드라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이를 뒤섞고자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페미니즘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낸다.

본서의 출간 배경은 결론 부분에서 알 수 있는데, 저자는 "이 책은 자기계발서나 처세서가 아니다, 이 책은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p.432)라고 밝힌 바 있다. 출간 몇 달 전인 2005년 9월 4일, C-SPAN 케이블 채널과의 인터뷰에서 저자는 본서가 "위대한 사상가들이 남자다움에 대해 무엇을 말했는지 살펴보는 책" 으로, 그 목표는 남자다움의 훼손된 미덕을 회복시키는 것을 포함한다고 하였다. 물론, 저자 역시 남자다움이라는 것이 늘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는 선하고 한편으로는 악한 것이 남자다움이지만, 저자는 그 선한 면이 페미니즘의 발흥으로 인해 잘 부각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의 공세로부터 남성들의 남자다움을 지켜내려는 의도는, 서두에서 "남자다움에 대한 온건한 방어"(p.7)라고 표현한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저자를 잠깐 소개하자면, 그는 정치철학 분야에 있어서 영향력 있는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저자는 본서를 출판하던 당시 하버드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現 퇴직) 또한 미국인문학센터(National Humanity Center) 연구원을 역임했다. 2004년에는 정치철학에서 연구성과를 인정받아 국립인문학재단(NEH)의 인문학 훈장 "National Humanities Medal" 을 수여받기도 했으며, 레오 스트라우스, 에드먼드 버크, 알렉시스 드 토크빌,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의 권위자로 통하고 있다. 주요 저작으로서 《Machiavelli's Virtue》, 《America's Constitutional Soul》 외 다수가 있다.

헌데 저자를 따라다니는 또 다른 중요한 설명이 있는데, 그가 미국 내에서 유명한 네오콘 논객으로서 자신의 제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F.Fukuyama)와 함께 보수측의 정치학자로 대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공화당 등의 진영에서는 소위 "네오콘의 대부" 라고까지 불리기도 한다고. 자신의 학교인 하버드 대학교에 여성학 교수 추가임용 때마다 늘 앞장서서 반대했으며, 로런스 서머스(L.Summers) 총장의 "여자들은 역시나 수학 과학을 못 한다" 던 설화 사건 때에도 총장 지지파에 속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전반적인 포지션을 염두에 둔 상태로 본서를 읽는 것이 권장된다.

2. 목차 및 주요 내용

  • 여는 글: 남자다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1장: 성 중립적인 사회
  • 2장: 스테레오타입으로서의 남자다움
  • 3장: 남자다운 주장
  • 4장: 남성적 허무주의
  • 5장: 여성적 허무주의
  • 6장: 남자다운 자유주의자들
  • 7장: 남자다운 미덕
  • 결론: 버려진 남자다움
  • 책을 펴내며: 『남자다움에 관하여』 그 이후

전체적으로 챕터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철학서에 가까워지는 경향을 보인다. 1장에서는 남자다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이유를, 2장에서는 기존의 과학적 방법으로 남자다움을 연구하는 것이 갖는 한계를, 3장에서는 기존 학계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남자들의 자기주장성(self-assertiveness)을 보여준다. 이후 본서는 본격적으로 철학적 논의를 시작하는데, 4장과 5장에서 저자는 프리드리히 니체허무주의, 즉 자기초월에 대한 논리를 남성들이 보이는 남자다움과 페미니즘(?!)이 보이는 남자다움으로부터 드러내고 있다. 이후 6장은 남자다움에 대해 정치철학자들이 갖고 있는 생각들을 개관하고, 7장에서는 남자다움의 미덕으로서 "철학적 용기" 를 제시한다.

6장은 근현대 정치철학자들에 대한 텍스트가 소개되고 있으므로 홉스, 스피노자, 로크, 버크, 칸트, 헤겔, 에 대해 관심이 있는 정치학철학 전공자들이라면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철학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본 문서에 들어올 가능성은 낮아 보이므로, 여기서는 r.1 기준으로 자세한 설명은 피하기로 한다.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젠더 중립적 사회 속에서 남성들은 사적 영역에서의 남자다움을 드러내지 못하지만, 사실 남자다움은 생물학적 본성에 의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 철학적 접근을 따를 때, 남자다움은 자기초월을 위한 주장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측면이 있으며, 심지어 페미니스트들도 이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 남자다움의 덕목으로서는 진리 앞에 진실하고자 하는 철학적 용기를 들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통찰하려면 선배 철학자들을 참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몇 종류로 추려서 하단에 다시 챕터의 순서와 무관하게 소개할 것이다. 먼저 본서에서 굳이 표현을 구별하고자 하는 '남자다움' 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이를 위해 독립성, 자기확신, 그리고 '두모스' 를 제시할 것이다. 다음으로, 본서 5장에서 비판하는 바 래디컬 페미니즘에 대한 저자의 관점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남자다움에 대응될 만한 '여자다움' 의 개념적 가능성에 대해 타진한다.
  • 1. 성 중립적인 사회
    오늘날의 양성 평등을 위한 젠더 중립적 사회는 남자다움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적어도 그것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더라도 유해한 것으로서 묘사한다. 하지만 남자다움은 젠더 중립적 사회에서도 나타나고 있고, 우리 사회나 남자다움 모두 쉽게 바뀌지 않는 현실을 고려하면, 먼저 남자다움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남자다움은 성찰이 결여된 자기확신으로부터 추동되는 독립성으로 특징지어지며, 이를 선한 면과 악한 면 모두를 포괄하여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2. 스테레오타입으로서의 남자다움
    현대 사회과학은 남자다움을 하나의 고정관념으로서 간주하고, 계도를 통해 시정되어야 할 잘못된 생각이라 여겼지만, 연구 결과는 오히려 남자다움에 대한 상식이 옳았다. 사회과학은 개념적 환원과 정량화 및 조작화를 거치면서 발생하는 구성 타당도의 저하 외에도, 통계학과 진화생물학에 의해 정의가 왜곡됨으로써, 남자다움을 적절히 연구할 수 없다. 반면에, 남자다움을 제대로 논의하려면, 과학이 말하는 남자다움이 불완전한 것이라고 전제해야 하고, 상식과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인문학적 통찰이 필요하다.
  • 3. 남자다운 주장
    문학 작품들에서 확인되는 남자다움은 자신의 명예가 대우받아야 한다는 완고한 자기주장의 행동으로 나타나며, 여기에는 이성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는 대의가 결합된다. 물론 여성들도 명예를 인식하고 권력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은 위험회피와 같은 정반대 특성을 보이며, 남자다움의 핵심 요소들을 활용하지 않는다. 남녀 간의 자기주장의 차이는 현대 사회에까지 이어져서, 정책 및 이념적 선호에까지 차이를 나타내고, 통치에 있어서도 여성들은 남성보다 더 간접적인 전략을 선호한다.
  • 4. 남성적 허무주의
    제국주의 시대의 사상가들과 작가들을 살펴보면, 이들이 공통적으로 남성이 남자답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고민은, 과학과 문명이 진보하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허무주의와 다윈주의의 영향을 받아 남자다움을 안내할 의미의 기준이 사라져 버린 현실에 기초한다. 니체에 따르면, 남성이 혼란 속에서의 유일한 의미의 원천이라면, 남성이 남자답기 위해서는 이성과 문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진정성을 갖추어야 한다.
  • 5. 여성적 허무주의
    당초 19세기에 여권운동을 벌였던 인사들은 남녀 모두에게 성 역할에 기초한 책임과 도덕성을 강조했으며, 이는 여성을 일정 부분 규정하고 본성적 역할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반면 일체의 규정과 본성의 영향을 거부하는 급진적 페미니즘은, 니체의 허무주의에 힘입어 다형도착 등의 도덕적 방종을 정당화했으며, 이로 인해 온건파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허무주의의 한계를 노출했는데, 이것은 모든 인간들이 독립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추구함에도 끝내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6. 남자다운 자유주의자들
    자유주의에 직간접적으로 공헌한 많은 근현대 정치철학자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남자다움을 이야기하면서 긍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했다. 자유주의는 공적 영역에서의 형식적 평등을 호소력 있게 관철시킬 수 있었기에, 19세기 리버럴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권리를 강경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페미니스트들은 니체와 보부아르의 자기초월의 논리에 매료되었고, 자유주의의 메시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 7. 남자다운 미덕
    그리스 철학자들에 따르면, 남녀 간의 성차는 상호보완적 관계로서 존재하며, 남성들이 자기주장의 미덕을 보이는 한편 여성들은 침묵과 절제의 미덕을 보인다. 남성들의 이 자기주장은 동물적 격분인 두모스에서 기원하는데, 그 이면에는 우월감과 자만심이 존재하여, 자칫 대의를 명분 삼아 억압을 정당화할 위험이 있다. 우리가 추구할 남자다움은 철학적 용기로서,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려는 용기를 내려놓고, 사물과 가치의 본질 및 자신의 이성에 진실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 결론. 버려진 남자다움
    오늘날 남자다움은 근대 사회의 합리적 통제에 의해 통치를 받으며 그 발현이 억압되고 있는데, 이는 남자다움의 특성들이 합리적 통제에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다움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며, 그 이유는 합리적 통제가 모든 삶의 영역에서 남자다움을 몰아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사회는 남녀를 공적 영역에서는 젠더 중립적으로 대하되, 사적 영역에서는 그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남/여자다움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역서에서 지속적으로 "성 중립적 사회" 라고 번역하는 단어는 원서에서는 gender-neutral society를 의미한다. 대개 "젠더" 가 그대로 음역하여 사용되는 학술용어인 만큼, 여기서는 이제부터 "젠더 중립적 사회" 라고 표현하기로 한다. 또한 역서에서 "미덕" 이라고 번역되는 단어는 어감을 위해 "덕목" 이라고 표현할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더 나은 쪽으로 자유롭게 수정바람.

2.2. 남자다움이란?

우선 페미니즘 측에서 "성차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남자답다는 것이나 여자답다는 것 모두 사회가 억지로 부여한 인위적인 구성물에 불과하다" 라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저자는 이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처지이다. 저자는 "젠더 중립적 사회" 라는 표현으로 현대 사회를 정의하는데, 이는 1970년대 이래 확산되어 온 삶의 형태로서, "양성이 서로 수렴되어 차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포기한 독립적인 남성과 여성의 사회"(p.21)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적어도, 취업이나 승진, 투표와 같은 공적인 영역에서만큼은 어떤 개인이 남성인가 여성인가의 문제로 차별하지 않는 사회이며, 19세기 페미니스트들이 꿈꾸던 사회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래디컬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인해, 이것은 사적인 영역에서도 남성들이 남성성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고, 여성들 역시 굳이 여성성에 부합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존재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이를 철학적인 표현으로 바꾸자면, 구성원들이 성별로부터의 자기초월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이런 젠더 중립적 사회에서조차 남자다움은 멀쩡히 존재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차라는 것은 결국 생물학적 기반 위에서, 남녀유별(男女有別)의 양상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는 《Taking the Sex Differences Seriously》 와 같은 과학 도서를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미 이 주제에 익숙한 위키러라면 조금은 생소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대개 젠더학 분야에서 남성들의 남성됨을 연구하기 위해 동원하는 단어는 남성성(masculinity)이지, 저자가 제안하는 남자다움(manliness)이라는 생소한 표현은 거의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남성성이라는 단어가 전적으로 페미니즘 분야의 목소리만이 반영되어 연구되었다는 저자의 거리감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성을 이야기할 때, 이들은 남성의 남자다움을 해체하면서 그것이 어떤 개념적 가치도 없다고 주장해 왔고, 설령 독특성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남자다움의 독특성이 아니라 남성으로서의 젠더 권력이 갖는 독특성이라고 인식해 왔다.[1] 저자는 이런 인식 속에서 남성이 갖고 있는 많은 덕목(virtue)들이 부정되어 왔고, 오히려 남성에 대해 공격성(aggression)이나 폭력성(violence)과 같은 부정적인 측면만이 강조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남자다움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드는 의도는, 이를 통해서 남성들이 갖고 있는 덕목들을 조명하고자 하는 목적성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래윈 코넬(R.W.Connell)의 《남성성/들》 과 같은 여러 문헌들에 익숙하다면, 남성성에 대한 대개의 접근방식은 "남성성은 여러 종류로 구분될 수 있다" 의 관점을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이와는 달리, 남자다움은 종류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수준들' 을 갖는다고 본다. 우선, 남성들은 남자답지 못한(unmanly) 남성과 남자다운(manly) 남성으로 나누어진다. 남자다운 남성들은 남자답지 못한 남성들을 경멸하고 자신의 남자다움을 과시한다. 다음으로, 남자다운 남성들 중 일부는 신사다움(gentlemenness)을 갖춘 남성들이다. 이들은 잘 포장된 남자다움을 갖고 있어서, 여성들이나 남자답지 못한 남성들에게도 예의를 잃지 않으며 경의를 표할 줄 안다.[2] 마지막으로, 이런 신사들 중의 일부는 진정으로 고귀한 덕목인 철학적 용기를 지닌 남성들이며, 이들이야말로 저자가 추구하는 이상적 남성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서의 81-82페이지에서 지적하듯이, 진실로 남자다운 사람들은 뭇 남성들 대다수가 공유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극히 일부의 예외적인 남성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며, 뭇 남성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는 존재이다.

남자다움이 남성 보편의 문제가 아니다 보니, 저자는 이 주제에 대한 연구는 (사회)과학이 아니라 오히려 인문학이 주도해야 한다고 본다. 여기에는 과학이 갖는 연구방법론적인 한계, 혹은 78페이지에서 암시하듯이, 어쩌면 과학이 속해 있는 민주주의적 사회 자체의 한계가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저자는 본서에서 과학을 불신하는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실증주의로 무장한 과학은 성차에 대해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을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고정관념(stereotype)이라 명명함으로써 사회를 계도하려 했다. 둘째, 서구 지성은 전통적으로 특정한 '잘 정의되지 않은' 개념을 연구할 때, 그 개념을 다수의 하위 요인들로 잘게 쪼개어 각각을 연구한 다음, 이 설명들을 긁어모아 합쳐놓고 그것이 당초 연구하려던 개념 그 자체와 정확히 같다고 믿어 왔다. 이것은 남자다움이라는 개념을 우리 사회 전반에 갖는 일상적 인식과 연결시키는 데 장애를 초래한다.[3] 셋째,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남자다움은 예외적인 극소수의 아웃라이어 남성들에 대한 찬사에 가깝지만, 과학은 평균표준편차에 의지하기 때문에, 평균의 장난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과학은 종종 유전자, 호르몬, 진화론으로 관심을 돌리는 경향이 있는데,[4] 남자다움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 역시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남자다움과는 다소 차이가 있어 보인다.

2.2.1. 독립성과 자기확신

남자다움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장 간결하게 답하자면 결국 이는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강력한 신념으로 추동되는 독립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다운 남성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늘 자신이 택한 바가 옳다고 여기고, 선택에 있어서 타인의 권위나 지도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는 사전지식이나 가용한 관련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나타나는데, 저자는 여기서 남자다움의 어두운 면을 인식한다. 이러한 "성찰의 결여" 는 경우에 따라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데, 어떤 마초들은 심지어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남자다움의 우월성에 대한 도전"(p.47)이라고까지 반발할 수도 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페미니즘이 말하는 '남성-폭력-전쟁 연결고리' 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저자는 결국 이를 막을 방법 역시 남자다움이라고 말한다. 폭력과 전쟁에 대항해 싸우는 남성들 역시 자신들이 옳다는 확신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

부정적으로 본다면 한없이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대개 이런 남자다움은 많은 남성들에게 환영을 받는다. 왜냐하면, 남자다움은 자기확신을 드러냄으로써 복잡한 상황을 빠르게 해결하고, 혼란을 명확히 정리하며, 집단의 동료 남성들까지도 영감을 주고 그들 역시 자기확신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꼭 '모든' 남성들이 다 환영한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어떤 남성들에게는 남자다움이 자신의 남성으로서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논의는 이 가능성에 대해서는 더 깊게 파고들지 않고 넘어간다.)

3장에서 저자는 강한 자기주장의 목적이 사적인 문제를 공적인 문제로 끌어올려서 공론화, 쟁점화하는 데 있다고 이야기한다. 즉 이들은 자신이 겪은 사적인 사건이 다른 사람들도 주목할 만한 것임을 호소하며 자기 편을 만들어 정치화하려 한다. 어찌보면, 페미니스트였던 캐롤 하니쉬(Carol Hanisch)의 저 유명한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the political) 구호는 굉장히 남자다운 구호인 셈이다. 남자다움은 남성들로 하여금 때로는 "내가 옳다" 를 주장하기 위해 기존의 사회적 질서에 대항하게도 하고 혁명을 일으키게도 한다. 남자다운 남성은 심지어 자기주장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데, 저자에 따르면, 남자다움은 생존을 추구하지 않으며, 명예롭지 못하게 생존할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고. 여기서 명예란 "그 사람의 인격과 가족, 재산, 그리고 그 속에 구현된 믿음을 지키려는 욕구"(p.133)인데, 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걸고 질서와 체제에까지 도전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남자다움의 완고함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맹목성 같은 것으로 이해되면 곤란하다. 저자는 남성들의 자기주장에는 그 행동적 완고함 이외에도 이성적 사유가 함께 결합되어 있다고 본다. 남자다운 남성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무언가를 강경하게 주장할 때에도 한편으로는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작업에 냉정하게 착수한다. 이를 위해, 이들은 자신의 논지를 가다듬고, 보편적 가치에 호소하고, 이 문제가 개인적인 불운이 아니라 모두에게 유관한 문제임을 입증하고자 한다. 저자가 이와 관련하여 드는 예시는 《일리아드》 의 등장인물 아킬레우스인데, 여기서 자기 애인을 아가멤논에게 빼앗긴 그는 "아가멤논은 그리스 최고의 전사를 대우할 줄 모른다!" 라고 외치면서 다른 '전사들' 의 동조를 호소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정리하는 바는, 만일 자기주장에 행동적 완고함이 빠진다면 그 사유는 골방철학에 불과하게 될 것이고, 사유 없는 행동적 완고함은 그저 (남성성 연구자들이 말하는) '권력추구' 를 위한 남성들의 '공격성' 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남성들이 자기주장을 펼칠 때 사용하는 논리와 이성은, 한편으로는 남자다움의 가능성에 한계를 짓기도 한다. 남성들의 강경하고 완고한 자기주장은 남성들을 남자답게 하지만, 그 이면에는 '내 논리와 대의가 너보다 우월하다' 라는 우월감과 자만심이 가득한 메시지가 깔려 있는 것이다.[5] 특히 이 메시지는 그 기본 전제로서 '최고의 우월함에 대해서는 그것에 복종하라' 는 내용도 담고 있는데, 열위에 있는 남성이 우위에 있는 남성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은 남성들의 책임의식을 이끌기도 하다. 저자는 이런 경향이 극단적이게 된 사례가 바로 제국주의라고 말한다. 우월한 문명에게 열등한 문명이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우월감과 자만심이 가득했던 제국주의자들의 남자다움이 뒷받침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책임감 자체가 항상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남자다움이 곧 '목에 힘을 주고 다니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면, 남자다움에도 결국 중용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남자다움은 현대사회처럼 너무 적어도 안 되지만 제국주의 시대처럼 너무 많아도 안 되는 것이다.

2.2.2. 두모스(thumos)

본서에서 남자다움의 한 종류로 잠정적으로 이해되는 용어로서 그리스어인 "두모스" 가 있다. 이것의 의미는 대략 '기개', '용맹함', '호연지기' 정도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하며, 영어로는 spiritedness와 근접하다고 한다. 본서에서 이 용어가 남자다움이라는 개념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지만, 남자다움에 동력을 부여하는 용기의 한 종류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론에서 저자는 두모스를 연구할 수 있는 과학 분야로서 사회심리학진화생물학이 있겠지만 이들을 활용해 연구하는 데에는 반대한다고 밝힌다. 저자에 따르면, 과학적 방법은 "...이처럼 인간적 중요성을 띠는 거대한 문제에 잘 조응하지 못한다"(p.9)고 하며, 남자다움을 가장 저급한 형태인 '공격성' 만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으로 두모스를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는 흥미롭겠지만, 저자는 이를 뛰어넘는 설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두모스는 문학과 철학을 통해 이해되어야 하며, 이때 두모스는 이견에 맞서서 단호하게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킬 수 있는 용기에 관련이 있고, 공격성은 그저 그 관철의 과정에서 취해질 수 있는 가장 저급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본서에서 산발적으로 두모스의 개념과 특징을 암시한다. 우선 7장의 설명에 따르면, 두모스는 인간이 동물과 공유하는 격분하는 기질로서, 동물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위험에 빠뜨리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남성들의 자기주장과 관련하여 더 정확히 말하면, 육체가 없는 대의를 위해 육체를 헌신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육체를 통해 정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사하는데, 인간은 자기방어를 위해 정작 자기 육체를 위험에 빠뜨림으로써 육체 이상의 '무언가', 즉 더 높은 이상적인 목표야말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4장에서는 니체의 저 유명한 "신은 죽었다" 를 소개하면서, 남자다움의 관점에서는 남자다움을 이끌고 계도하고 제약하던 외적 권위들이 사라졌음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하며, 그 결과 내 남자다움은 내가 알아서 챙기는 것이라는 인식이 나타났다. 사회적으로 두모스를 드러내도 괜찮다는 승인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얘기다.

철학자들의 고담준론에 크게 의지하는 7장에서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두모스와 용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우선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국가》 에서, 두모스를 "털을 곤두세운 개의 사나움" 에 비유하면서, 자신과 자기 삶의 영역, 즉 자기 존재의미와 가치를 방어하려는 야수적인 특징이라고 하였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덕목으로서의 용기가 두모스와는 다르다고 보았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에서 그는 두모스를 플라톤과 유사하게 "상처 입은 짐승의 반응" 으로 비유하였는데, 고통에 자극 받고 위험을 무릅쓰며 용기를 발생시키지만, 용기 자체는 아니라고 정리했다. 물론 모든 용기가 두모스에서 기원하는 것은 아니다. 용기는 덕목으로서의 포괄적인 의미와 두모스라는 맥락의 용기로 나누어지지만, 후자와 달리 전자는 남성에게만 국한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즉, 일단 "용기 있는 사람" 이기만 하다면, 여성들도 얼마든지 덕목으로서의 용기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6]

두모스는 용기의 근원적 동력이지만, 앞서 보았듯 남자다운 용기는 그 이면에 자만심과 우월의식이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즉 다수의 남성들이 저마다 대의에 호소하면서 자기주장을 펼칠 때, 이들은 하나같이 논쟁 중에 상대방을 꺾고 승리하고자 하는 남자다움의 용기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이상적인 형태의 용기를 원했던 플라톤은 자신의 문헌 속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서 철학적 용기의 가능성을 낙관하고 있다. 이는 알지 못하는 것을 탐구할 때 필요한 용기인데, "관습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옹호하는 사람들의 조롱과 자신보다 열등한 사람들의 압력"(p.415)에 맞서기 위한 용기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이는 자기주장 과정 도중에 논쟁에 임할 때 자신의 이성에 진실하고 정직하고자 하는 것으로, '내가 틀렸을 가능성' 을 성찰하지 않는다면 그 남자다움은 아무리 용감하더라도 결국 허세나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고.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본질' 을 보는 것이지만, 남자다운 남성들은 자기 자신의 중요성과 우월함을 확인받기 위해 자기주장에 집착하게 되며, 그 결과 자기 가치를 인간 가치의 본질과 조화시키는 데 실패한다. 따라서 두모스는 철학적 용기라는 숭고한 목표를 향한 초월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단순히 근거 없는 우월의식에 도취된 '남자다운' 용기를 위해 자기희생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저자의 주장.

본 문서는 지금까지 남자다움의 행동적 주체를 암묵적으로 남성으로 표기했지만, 본서에서 저자는 여성들도 남자다운 모습을 보일 수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본서 전반에서 남자다움, 특히 두모스는 지속적으로 남성만의 전유물로서 묘사되었고, 특히 여기에 성차의 본질에 대한 생물학적 논의가 겹쳐지면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비판했던 것도 사실이다. 본서를 둘러싼 이런 느낌까지 전달하기 위해, r.1 기준으로 본 문서 역시 부득이 지속적으로 남성의 남자다움, 남자다운 남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2.3. 래디컬 페미니즘의 한계

"...여성에 대한 정의는 모두 폐기되거나 파기되고 그 대신 '여성은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 는 강력한 결단이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전통적인 성 윤리는 권력과 초월성을 요구하는 새로운 윤리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윤리에는 명시적인 목표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페미니즘을 '허무주의' 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된다는 것은 명확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며 그 불명확함을 대의로 추진하는 것이 바로 여성의 의무라고 말한다. 대의가 무엇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대의에는 어떤 고귀함이 부여된다. 이는 단지 우리가 여성의 정의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지식을 부정한다."
- pp.281

저자가 페미니즘 진영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기 때문에, 본서 5장에서도 페미니즘, 특히 래디컬 페미니즘 진영에 대해 저자가 갖고 있는 비판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니체허무주의보부아르실존주의를 배경으로 하여, 저자의 지적의 초점은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의 명확한 정체성을 창조하지 않은 상태로 자기규정과 자기초월 사이에서 불가능한 목표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저자가 가장 불편하게 바라보는 지점은 이들이 여성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 남녀 간 (생물학적) 성차, 여성의 젠더 역할과 규범을 일체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19세기의 페미니즘이나 급진 세력에 대립각을 세우던 온건한 페미니스트들과는 대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우선적으로 이들과 대조하기 위해 19세기 페미니스트들을 불러온다.

먼저 비교를 위해 살펴볼 사람들은 앞서 지나가듯 언급했던 울스턴크래프트, 그리고 엘리자베스 스탠튼(E.C.Stanton)이다. 19세기 미국 사회에서 리버럴 페미니즘을 이끌었던 이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남녀 간 차이와 여성의 사회적 역할 자체에는 긍정하되, 이를 바탕으로 양성평등의 구체적 방안을 제안했다. 이들의 메시지는 "우리 여성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니, 우리가 남성들을 계도해 주자" 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 사람들은 보편적 인권(천부인권)이라는 자유주의적 이상에 호소하는 전략을 선택했으며, 여성의 가치가 과소평가되어 있으므로 양성의 권리를 대등하게 조정하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양성의 도덕적 수준과 책임을 끌어올리자는 높은 도덕적 목표를 가진 페미니스트였다는 것이다.[7] 이들은 남성을 비판하더라도 공적인 영역보다는 사적인 영역에서만 비판해야 한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저자는 래디컬 페미니즘 세력을 거론한다. 특히 시몬 드 보부아르와 그 뒤를 이은 주요 작가들인 저메인 그리어(G.Greer), 케이트 밀렛(K.Millett),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Firestone)이 그들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들은 19세기의 선배들과는 몇 가지 지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우선, 다형도착(polymorphous perversity)이라는 프로이트와 마르쿠제의 개념을 끌어와서, 인간의 원초적 성욕을 가감없이 발산하여 성적 해방을 할 것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움직임이 예전과는 반대로 "여성의 도덕성을 남성의 수준으로 떨어뜨림으로써 평등을 창출"(p.244)하고자 하는 무책임한 방종이라고 비판한다. 다음으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본질주의를 거부한다. 그 대신 이들은 상황과 환경의 힘을 강조하면서, 여성의 삶이 미래를 향해 광범위하게 열려 있다고 생각한다. 이후 이는 여성에게 부여되는 것이라면 "어떤 자질과 미덕도 여성을 옭아매는 감옥일 뿐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는 것이 해방"(p.283)이라는 논리로 이어졌다고.

우선 각각을 살펴보자면,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저자가 볼 때 니체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아 섹스가 억압과 착취의 방식이라고 이해한 인물에 속한다. 보부아르는 여성의 본성 자체를 거부하고 일체의 타협을 배척했으며, 보편적 인권과 같은 자유주의적 피난처에 호소하지 않았고, 유물론실존주의라는 어려운 조합에 호소했다고 하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초월성(transcendence)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은 저자에게는 페미니즘 내면에 존재하는 허무주의를 떠올리게 했다고 한다.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동물적 삶을 의미하는 내재성(immanence)에 맞서는 자기초월, 즉 '실존' 은 보부아르가 강력히 강조한 것인데, 이는 혼돈에 맞서 자기주장을 펼치라는 남자다움의 허무주의와도 상통한다는 것이다.

그 후신으로 등장하여 1970년에 제각기 래디컬 페미니즘의 명저들을 내놓은 바 있는 그리어, 밀렛, 파이어스톤은 서로간에 공통점과 차이점을 몇 보인다. 우선 첫째 공통점으로서, 이들은 성적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고 권력화되기를 원했으며, 이들이 주장하는 해방된 섹스의 목적은 그들이 진정한 인간으로 초월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공통점은, 세 명 모두 젠더를 사회적 구성물로 이해하며, 성 윤리에서의 도덕주의적 발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 사람은 중요한 차이점 또한 보인다. 그리어는 여성이 혀를 무기로 삼아서 외설과 음란을 통해 전복적 실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밀렛은 가부장제의 보편적 확고함을 강조했고, 파이어스톤은 여성억압의 원인이 자궁과 같은 신체적 재생산능력에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들은 입을 모아서, '여성' 이란 곧 남성들이 인위적으로 형성하고 이상화한 타자이며, 즉 "여성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정의하는 것 자체가 여혐이다!" 의 메시지를 퍼뜨렸다. 이들은 도덕이라는 여혐(?) 프레임에서 여성을 성공적으로 탈출시켰고, 그 결과 다형도착과 같은 극심한 방종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저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은 이제 일체의 도덕적 비난을 회피하기 위한 철학적 변호수단으로써 "여성은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 는 허무주의적인 (그러나 극도로 고귀한) 대의로 치장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비슷한 시기에 이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던 온건한 페미니스트들도 없지는 않았다. 우선 베티 프리댄(B.Friedan)은 자신의 저서 《여성의 신비》 에서 전업주부들의 이름붙일 수 없는 문제(권태기)에 대한 솔루션으로 일-가정 양립의 가능성을 논의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래디컬 페미니즘이 허무주의 속에서 모든 남성들의 여성 규정 시도를 억압으로 판단한 반면, 프리댄은 남성들에게 그런 억압의 혐의를 씌우지 않았다. 또한 저자는 다른 사례로서 나오미 울프(N.Wolf)를 거론하고 있다. 모성에 대한 거부와 다형도착의 장려에 대해, 울프는 《Promiscuities》 에서 반대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즉, 여성들은 섹스를 통해서 다형도착을 깨닫거나 충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남성과 얼마다 다른지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저자의 관점에서, 래디컬 페미니즘의 방법론은 굉장히 특이한 양면성을 보인다. 즉, 이들은 메시지는 남자다웠지만, 그 실천은 남자답지 않은 것이었다. 메시지가 남자답다는 것은 남자다운 남성들이 자기주장의 세계관으로서 활용하는 허무주의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에게서도 발견된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그 실천과 관련하여, 저자는 이들의 전략이 의식 고양(consciousness-raising)이라는 얌전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가부장제여성혐오건 간에 이들이 싸워야 할 적이 그렇게나 강하다면 19세기 참정권 운동처럼 가능한 한 최대한의 폭력을 가해야 할 텐데, 이들은 폭력을 불사할 정도로 완고하게 자기주장을 펼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 의식 고양이라는 방법론은 신마르크스주의에서 주창했으며,[8] 파이어스톤의 《Red Stockings Manifesto》 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의식 고양의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바로 정치적 올바름으로서, 올바른 언어를 통해 여성에게는 해방의 의식을 고양시키고 남성에게는 편견을 바로잡거나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돕는 것이다. 자기주장을 동원하지 않는 또 다른 의견 관철의 방법은 바로 젠더 감수성이다. "당신은 감수성이 부족해서 이해하지 못하겠지!" 라는 말은 남자다운 논리와 논리의 충돌 및 우열을 가리는 과정을 모두 생략할 수 있기 때문. 이는 기존에 정립되어 있던 훈련법으로서,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타인의 정체성에 상처를 주는 경향이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게 하고, 그 목표는 공격성의 감소에 있다고 한다.[9] 아이러니한 사실이지만, 페미니즘이 남성들의 공격성을 꼬집기(?) 이전부터 이미 남성들은 이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한편으로는 "여성들은 정의되지 않는 존재이다" 라고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젠더 감수성 개념에 입각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으려 시도했다. 이들은 "여자란 어떠한 존재인가?" 에 대한 답을 함으로써 자기규정을 하려 했다. 물론 이것이 반드시 전자의 허무주의와 상충된다거나 허무주의를 거부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기존의 외적인 정의를 거부하면서도 스스로가 창조한 정체성으로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이들의 한계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는 것, 따라서 제대로 된 정체성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무엇을 창조할지, 무엇으로 대체할지, 무엇을 선택할지에 대한 어떤 구체화의 고민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다' 만을 읊조리는 것은, 정체성이 아니라 기존의 본질 담론에 대한 부정의 되풀이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이제 여기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허무주의는 굉장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스스로를 규정하려다 보니 여성은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 없다던 자신들의 선언이 신경 쓰이고, 허무주의에 따라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을 경우 이는 의식 고양의 일환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을 다 갖고 싶어하는 경향은 철학의 관점에서는 인지상정이지만, 그럼에도 자기규정과 초월성을 동시에 달성하지는 못한다는 모순이 존재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비단 래디컬 페미니즘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완전함과 불완전함을 동시에 추구함을 보인다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라고 한다. 단지, 페미니스트들은 이상주의자들이기 때문에, 굳이 끄집어내지 않아도 될 만한 인간의 모순적인 측면들을 끄집어내는 경향만이 있을 뿐이라고.

래디컬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젠더 중립적 사회와 관련하여, 본서에서 언급해 볼 만한 중요한 쟁점 중 하나가 또 있다. 6장과 결론 파트에서 저자는 과연 래디컬 페미니즘이 남성성을 상처입혔는지에 대한 의문을 다룬다. 즉, '버려진 남자다움'(unemployed manliness)의 책임을 여성 운동으로 돌려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남성들이 래디컬 페미니즘에 관련하여 "남성성에 상처를 입었다", "남자인 나를 모욕했다" 와 같은 불만들을 토로하지만, 적어도 이 남성성이 본서의 남자다움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저자의 관점에서는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본서에서 밝히듯이, 래디컬 페미니즘은 남자다움을 억압하기는커녕 오히려 가장 남자다운 메시지를 송출해 왔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대 사회에서 남자다움이 "버려지게" 된 이유를 근대 국가의 통치 방식에서 찾고 있다. 미셸 푸코(M.Foucault)의 용어를 차용하자면, 남자다움의 상처는 오히려 근대 국가가 '합리적 통제'(rational control)를 활용하여 남자다움의 '변덕' 을 제거해 왔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이다.[10] 늘 예측 가능하고 일상적이며 계획대로 돌아가야 하는 근대 시스템 속에서, 늘 극적이고 위험을 추구하며 과시적이고 어디로 튈지 모르게 만드는 남자다움은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경향이라는 것.

2.4. 번외: 여자다움이란?

이쯤에서 생각할 만한 것은, 어차피 성차라는 것이 자연적으로 존재하여 드러나는 것이라면, 남자다움이 있듯이 여자다움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주제가 남자다움이므로 깊게 다루지는 않지만, 저자 역시 여자다움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장에서 간략하게 설명한 바에 따르면, 숙녀(ladies)들은 상황에 관계 없이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사람으로, 자기확신을 물론 가질 수는 있지만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는다. 즉, 이성을 통해 자신이 분명히 옳다는 마음을 갖고 있더라도, 남성들이 이를 관철시키려고 덤벼드는 동안, 이들은 어지간해서는 그런 논리 다툼에 굳이 끼지 않는다는 얘기다. 저자는 여성들이 의사결정을 할 때에는 예상 가능한 최악의 결과까지 신중하게 고려할 것이며, 확신 여부와 무관하게 모험심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여성들도 위험한 상황을 구태여 무릅쓰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3장에서 이를 지적함과 함께, 본서 전반에 걸쳐 저자가 반복적으로 예시화하고 있는 작품인 〈Highnoon〉 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마을 전체의 운명은 평시 게리 쿠퍼라는 남성에 의해 좌우되지만, 그가 위기에 처하는 결정적 순간에 그를 돕는 것은 여성인 그레이스 켈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레이스 켈리가 작품 내내 활약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저자는 때때로 여성들 역시 명예를 지키려 한다거나 소중한 사람을 보호하는 과감함을 보일 수 있지만, 그보다는 사회가 남자다운 남성들에 의해 돌아가도록 한다고 본다. 여성들이 명예를 지키려는 방식 역시 "~하면 안 된다" 의 규범으로 나타나며, 이는 "~해야 한다" 는 남성들의 행동적 완고함과는 정반대되는 양상이라고. 비록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우리나라의 예를 들자면 여성들이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 바로 은장도라는 점도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렇다 해도, 때로는 여성들도 남자다움을 내면화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3장에서 이 가능성을 좀 더 들여다본다. 젠더 중립적인 사회에서 여성들은 인위적으로 남자다움을 개발할 수 있다고 믿고, 실제로 일부 페미니스트들이나 직업여성들은 공격성과 권력추구를 내면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도 여성들의 여자다움을 목격하는데, 이들은 권력을 추구할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위험조차도 최소화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11] 게다가 이들이 자기주장을 펼칠 때에도, 여성들은 직접적인 화법보다는 도리어 '맞받아치는 대꾸하기' 를 더 선호하며, 그런 "입이 트이는 화술" 들에 크게 매료된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이런 여성들이 남자답다고 말하기에는, 그 정도로는 택도 없다(…). 종합적으로, 젠더 중립적인 사회에서 남녀 모두 적극적으로 권력을 추구할 수는 있지만, 이는 여성들이 남자다움을 내면화했다고 보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는 것과 같은 남자다움의 핵심 요소들을 활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12]

본서의 설명은 여기서 끝이지만, 굳이 조금 더 찾아보자면 본서 출판 직후에 그가 내놓은 짧은 코멘터리를 참고할 수 있다. Mansfield(2007)에서 저자는,[13] 전통적 성 역할은 남녀가 따라야 하는 규범적 가이드라인으로서,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남자는 남자고 여자는 여자라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그 여성의 삶은 《위기의 주부들》 에서처럼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얘기다. 여성의 여자다움에 대해서는 도덕적 권위(moral authority)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는 남성들의 신체적 우월함에 대응된다고 본다. 즉 남자다운 남성이 부도덕한 행동을 한다면, 여자다운 여성은 이를 막는 역할에 가깝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저자의 보수주의적인 가치관이 가감없이 드러나는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3. 서평

일단 이 책은 저자가 저자이다 보니 상당한 반향을 불러왔다. 하버드 대학교 교수이자 정치철학 분야의 권위자로 여겨지는 인물이 페미니즘을 까는 책을 썼다는 소식에 네오콘들은 환호했고, 네오콘들의 우상이자 성차별주의자에 제국주의자가 페미니즘 욕하는 책을 썼다는 소식에 페미니스트들은 발끈했다. 게다가 바로 직전에 하버드에서 로런스 서머스 설화 사건으로 미국 지식인층이 발칵 뒤집힌 상태에서 서머스 총장을 대놓고 옹호했던 데다 그 후속타로 책까지 썼다고 하니... 물론 책의 포커스 자체는 여성보다는 남성에 맞추어져 있었던 데다, 페미니스트들이 억울해할 부분들도 있었던 탓에, 그리고 일단 너무 어렵고 해서 결과적으로는 양쪽 모두에게 물어뜯기고 양쪽 모두에게 조금 심드렁해진(…) 모양새가 된 것도 있다.

언론에서도 많은 학자들이 접촉하여 책을 평하는 칼럼을 썼고, 저널 코멘터리 같은 지면을 빌려서 서평도 꽤 나왔다. 학계의 확인 가능한 서평이 4건 가량 있는데, 여기서는 먼저 이들을 우호적인 순서대로 정렬하여 소개한 뒤, 각 언론사들에 학자들이 개별적으로 접촉하여 의견을 밝힌 것들을 확인하기로 하겠다.

3.1. 학계

가장 우호적인 서평으로서 Cooper(2007)를 들 수 있다.[14] 이 서평은 사실 서평이라기보다는 소개 및 요약에 가까운데, 왜냐하면 본서가 기존 학계와 어떤 관련이 있고 어떻게 시사점을 주고 있으며 어떤 점에서 한계를 드러내는지에 대한 판단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서평은 꽤 유능한 학부생 정도도 도전해 볼 정도의 퀄리티의 글이다. 어쨌거나 이 서평은 전체적으로 호의적인데, Cooper(2007)는 저자 맨스필드가 우리 시대의 제일가는 니콜로 마키아벨리 권위자로서, 이 책도 마키아벨리의 용어로 잘 설명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마지막 결론 부분은 현대의 합리적 통제를 통한 보편화되고 동질적인 사회에 대한 저자의 성찰로 읽힌다고 하였다. 종합적으로, Cooper(2007)는 이 책이 남자다움에 대한 '명예회복' 과도 같은 책이라고 정리한다.

좀 더 신중한 서평으로서, Norton(2006)은[15] 저자가 페미니스트들과 반목하는 관계라는 것이 학계에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라고 설명하면서, 본서는 성차를 지우려는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저자의 응답이 된다고 위치시킨다. 그러나 '상처 입은 남성들을 위한 치유' 를 기대했다면, 물론 언뜻 그렇게 읽힐 수도 있겠지만, 실상 본서에서 저자가 제시한 남자다움의 의미와 강조점은 조금 다르다는 점에 놀랄 것이라고 하였다. 저자가 칭송하는 남자다움은 대중적인 '남자다움' 보다 더 좁은 의미로서, 누구든지 저자의 찬사를 받기 위해서는 조금은 덜 남자다우면서도 더 철학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규제하고 세련된(cultivated)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Norton(2006)은, 남자다운 남성들이 뽐내며 거들먹거리기를 좋아한다는 저자의 주장과 달리, 실제로는 겁쟁이나 악당들, 풋내기들이나 그러는 법이 아니냐고 의문을 표한다.[16] 구체적으로, 저자와는 달리, 《일리아드》 에서 진정으로 남자다운 인물은 겉만 번지르르한 아킬레스가 아니라 오히려 묵묵히 책임을 감당했던 헥토르(Hector)일 것이라고 이견을 표한다. 호메로스(Homer) 역시 아킬레스의 성품에 대해 묘사할 때 여성성의 단어들을 활용했으며, 마침내 그 시체가 개들에게 던져졌다고 폄하한 바 있다는 것이다. 찬사의 대상이 되는 것이 남자다움이라면 이런 식으로 묘사될 이유가 있겠냐는 것. 그 대신, Norton(2006)은 진정 남자다운 인물들은 오히려 겸손하고 자신의 성취와 업적을 잘 과시하려 하지 않으며[17] 이 때문에 저자가 존 웨인 같은 과시적인 사람들은 (더 쉽게 눈에 들어오므로) 거론하면서도 이런 과묵한 남성들은 놓쳤을 것이라고 하였다.

여성학 저널에서도 서평이 나온 적이 있다. Newart(2006)에 따르면[18] 본서는 로런스 서머스 설화 사건 당시 공개적으로 그를 지지하고 나섰던 저자의 직전 이력과 맞물려서 더욱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여기서는 본서에서 서양철학사의 주요 인물들을 논의하는 부분에 한해서는 칭찬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비판적이다. 무엇보다도, 본서는 남성성 연구 분야에 흥미로운 논의의 확장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본다. 왜냐하면, 용기와 덕목은 분명 중요하지만 이는 결국 남녀 모두의 것인데, 이를 남성의 것으로 국한시키고 그것의 "버려짐" 에 페미니즘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처음에는 성차를 부정한 페미니즘에 책임을 돌리다가 나중에는 근대성에 책임을 돌리고, 그러면서도 상당량의 지면을 할애하여 페미니즘을 비판한다. 기왕 비판한다 해도 그 이론가들을 포괄적으로 인용하기보다는, 네오콘의 입장에서 '위험해 보이는' 몇몇만을 선별하여 논의하는 데 그쳤으며, 다형도착을 통한 성적 방종의 합리화 역시, 자신에게 동조할 것으로 의도된 청중을 위한 비난이라는 것이다. 여성들의 정계 진출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팩트체크조차도 틀렸다고 한다.[19]

확인 가능한 가장 신랄하고 적대적이며 냉담한(…) 서평은 섹슈얼리티 연구자들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인다. Alpert & Jensen(2006)은[20] 본서를 진지하게 취급할 필요가 없는 이유로 "근거도 논리도 없으며 철학자들과 작가들의 어록과 인용구들만 잔뜩 늘어놓아서 혼란만을 초래" 하기 때문이라고 치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지하게 취급해야 하는 이유로 "저자가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이며 매스미디어에 '주류 학계' 를 대표하는 양 자주 소개되어서, 우리 사회가 젠더에 대해 빠져 있는 혼란을 고려하면 심각하게 봐야 할 문제작" 이라고 한다. 이 서평은 크게 세 가지 지점에서 본서를 공격하는데, 성차와 젠더 중립성, 남자다움의 개념화, 그리고 강간 문제에 대한 저자의 태도가 그것이다.

첫째로 Alpert & Jensen(2006)은 생물학적 성차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인터섹스가 고려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해야겠지만) 우리 사회가 자꾸 차별의 근원을 생물학의 불변하는 속성으로 돌리면서 불평등에 대한 도전을 가로막는다는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이 보기에 저자는 생물학적 성별이 운명과 같지 않음을 받아들이기 힘겨워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내재적인 성차의 존재를 현대 사회가 숨기고 있다는 것과 그 배후에 페미니스트들의 암약이 있다는 것 역시, 오히려 최근의 대중매체에서는 젠더를 갈수록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사실과는 다른 주장이라고 한다. 둘째로 저자의 개념인 남자다움에 대해서는 그것이 무슨 개념인지 이해할 수도 없기에 비평할 수도 없다고 힐난한다.[21] 특히, 저자는 남자다움이 무엇인가를 궁금해하는 독자들에게 저 악명 높은 제국주의자들을 들면서 그들의 '호연지기' 를 칭송함으로써 독자들을 당혹시킨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본서가 강간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최상의 강간 대처법이라며 저자가 본서에서 제안하는 것은 "여성이 먼저 여자다운 정숙함(ladylike modesty)으로 처신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젠더로서의 '여성' 을 해체했으니 그럴 수도 없을 것" 이기 때문(…).

3.2. 언론

이번에도 우호적인 서평부터 살펴보자. 《The Weekly Standard》 에 기고한 서평에서, 《Who Stole Feminism》 의 저자로 잘 알려진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즈(C.H.Sommers)는 본서에 대해 극찬하면서, 저자의 논증에 여성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하였다. #WeeklyStandard 소머스는 여성학자들이 언급하는 것을 간과한 점들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본서의 가치가 있으며, 남자다움이라는 인간 본성에 맞서 싸우려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프리드리히 니체를 "페미니즘적 허무주의의 기원" 으로서 거론한 것에 있는데, 물론 니체의 텍스트에 대한 철학적 해석은 놀랍지만, 페미니즘 진영에서 니체는 여성혐오 경향으로 유명하다는 점을 놓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저자는 페미니즘이 보부아르나 그리어의 계보를 이어가는 과격한 양상을 이어간다고 주장했지만, 소머스에 따르면 페미니즘이 모두 그렇게 무모한(reckless) 경향이 있는 건 아니었으며, 조용하고 온건하며 합리적으로 노력하려는 페미니스트들도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물론 프리댄이나 울프를 언급함으로써 이들의 존재를 인식했지만, 그 중요성을 과소평가했다는 것.

2006년, 《The New York Times》 에 기고한 서평에서, 데보라 솔로몬(D.Solomon)은 저자에게 보내는 가상의 편지 형태를 취하여, 간결체 형태의 질문의 반복을 이어가면서 저자의 주장에 반론하였다. #NYTimes 논점을 두 가지로 정리하자면, 먼저 위험추구 경향이 남자다움의 가장 정확한 정의가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하였다. 예컨대, 현대사회는 기술의 발달로 신체적 위험성이 점차 감소하고 있으며, 과감히 위험을 감수한 전적이 있는 사람들도 때로는 위험회피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으며, 강하고 억센 이미지를 가진 사람들도 얼마든지 부드러워지기도 한다는 것. 솔로몬이 지적하는 또 다른 부분은, 현대사회에는 더 이상 신체적 완력이 남성만의 장점이라고 주장하기 힘들어질 만큼 시대가 변화하고 있어서, 덩치 작은 아내를 위해 남편이 가구를 나르는 정도의 일을 제외하면 더는 남성으로서의 장점을 발휘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동년 동 언론에 기고된 다른 서평에서, 미국의 문예평론가이자 해당 언론의 정기 서평 기고자인 왈터 키른(W.Kirn)은, 수사로 가득한 문체를 동원하여 본서를 신랄하게 비꼬았다. #NYTimes 저자는 특히 허무주의라는 것을 아무때나 여기저기 붙여놓으며, 보부아르를 추앙하는 여성들이 독립적이고자 하기만 하면 전부 "니체의 사상을 훔쳐갔다!" 고 몰아붙인다는 것이다. 저자의 '철학적 용기' 에 대한 제안 역시 책의 문제의식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결국, 키른은 저자의 인식이 40년 전에 멈춰져 있으며 도저히 제대로 된 분석이라고 볼 수가 없다고 비관하면서, 이는 그가 학계를 떠난 지 너무 오래되었거나 아니면 아마도 "멀리 떨어진 은하계에서 망원경으로 지구를 들여다보는 외계인" 이어서일 거라고 조롱했다.

가장 조목조목 반론을 펼치는 인물로, 《혐오와 수치심》 의 저자로 잘 알려진 마사 너스바움(M.Nussbaum)은, 《The New Republic》 에 기고한 서평에서, 본서가 저자가 누리는 명성에 비하면 너무 한계가 많다고 지적했다. #NewRepublic 첫째, "세상은 남성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는 주장과는 달리, 세상에는 여성 정치인들의 사례가 숱하게 많이 있다. 특히 너스바움이 드는 예시 중에는 우리나라의 한명숙 같은 인물도 있다. 둘째, "남성은 위협에 직면해서도 확신에 차서 그것을 감수한다" 는 주장과는 달리, 위협에 대한 두려움과 위협에 용감하게 대처하는 것은 다르며, 가장 용감한 사람도 두려움은 당연히 느끼는 것이다. 셋째, 페미니즘 사상을 비판할 때 저자는 시몬 드 보부아르, 프리댄, 밀렛, 그리어, 파이어스톤을 언급하긴 하지만, 이런 초기 텍스트 이후로는 마치 페미니즘이 멈춰버렸다는 인상을 준다. 넷째, 저자는 처음부터 맹목적인 자기 옹호자들 이외의 다른 누군가를 설득할 의지가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다섯째, 페미니즘의 목표는 남녀 간 성차를 희석시키는 게 아니라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자유로운 활동을 방해하는 사회적 규범을 고발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자다운 용기가 단지 신체적 완력으로 정의되는지 아니면 '가치 있는 목표를 세우고 그것에 정열적으로 매진하는 것' 으로 정의되는지 불분명하다.

한편 본서의 461페이지에 따르면, C-SPAN 케이블 채널에서는 나오미 울프가 본서를 읽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고 반응했다는 걸 알자, 2006년 3월 26일에 저자와 만나는 자리를 주선했했다. 참고로 나오미 울프는 래디컬 세력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온건론자 페미니스트로서 저자도 인식하고 있는 인물인데, 현장에서 울프와 맨스필드의 대화 사이에서, "남자다운 남자는 원래 여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는 저자의 발언이 다시금 세간에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4. 유의점과 비판점

남성성/들》 이나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에서 그렇듯, 남성성을 연구한다고 하면 기본적으로는 그것의 분류나 종류에 입각하여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본서는 남성성의 '수준' 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남자다움 자체부터가 이미 극소수의 예외적인 남성들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찬사이고, 심지어 모든 남자다운 남성들이 전부 '신사' 인 것은 아니며, 모든 신사들이 전부 '철학적 용기' 를 갖춘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통계학의 관점에서 이 사람들은 평균적인 남성들과는 전혀 판이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모든 사물에는 서열이 존재한다" 는 기본 전제를 따르는 것으로, 높은 수준과 낮은 수준은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양립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처럼 남성성에 대해 접근하는 주류 연구자들과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기존에 자주 지적되어 오던 "남성들이 자신의 남성성을 남들에게 확인 받고 싶어하는 경향" 에 대해서는 오히려 관심을 갖지 않거나 부정하고 있다. 42페이지에서는 남성들이 자신의 남자다움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파시즘에 자연히 빠지게 될 거라는 거라는 주장을 소개한 뒤, 그에 대해서 수많은 다른 남성들이 파시즘에 대항해 싸웠음을 들고 있다. 또 183페이지에서는 "남자다움은 실제로는 자신이 사회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을 은폐하기 위해 남성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자기확신이다" 라는 주장을 소개하지만, 저자는 남자다움이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며, 설령 인위적이라 해도 우리 사회에서 순기능을 담당한다고 낙관한다. 마지막으로 219페이지에서는 남자다운 남성들이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남자답지 못한 모습까지도 전부 직시하고 긍정한 후, 이러한 자기부정을 바탕으로 마침내 더욱 내적으로 강해지는 진정성(Redlichkeit)을 창조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본서는 몇 가지 측면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는데, 우선 위의 Norton(2006)이 지적한 것처럼, 남자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범문화적, 역사적 고찰은 하지 않았다. 즉, 남자다움의 개념 역시 문화와 역사에 따라 변화해 왔지만 저자는 오늘날 통용되는 개념이 초역사적으로 유지되어 왔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 있다. 예컨대, 비서구권, 제3세계의 이상적 남성상은 미국에서 생각하는 이상적 남성상과는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신사'(gentlemen)라는 표현만 하더라도 단어의 발생지인 영국에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인식은 그 용어가 수입된 다른 문화권의 국가들에서 상상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

그리고 본서가 과연 저자와는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의문이 남는다. 저자는 본서의 지적 여정을 기차에 비유하면서, "...종착점에 이르러서는 그 역(驛)이 진실이라는 점을 회의적인 독자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기를 기대한다"(p.7)고 서문에서 언급했지만, 이는 실패한 듯 보인다. 183페이지 등에서 보듯이 예상되는 반론 등을 취급하는 경향을 보면, 그 반론이 예상 독자층에서도 나올 수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예상 독자층과 배타적 관계인) 타자화된 다른 집단에서 나오는 것으로 전제하는 느낌을 주게 된다. 그 반론에 대응하는 논리를 보더라도, 차근차근 설명하기보다는 단지 몇 개의 수사적 문장으로 빠르게 압축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22] 그렇다면 설령 건설적인 마음으로 저자에게 설득되고 싶어하는 독자들조차, 저자와 의견이 다를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저자에게 납득하지 못한 채로 책을 덮을 수밖에 없게 된다.

더불어, 저자는 여성들에 대해서 "대부분은 가사에 대한 은밀한 선호를 보인다"(p.32)고 언급하며 여성들이 사실은 가사노동을 좋아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남성인 저자가 어떻게 여성의 삶과 마음을 이해하고 확신에 차서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23] 페미니즘 분야에 도는 유명 구호이자 관련도서의 제목이기도 한, "집안일을 하면서 오르가즘을 느끼는 여자는 세상에 없다" 를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가사노동이 여성들의 자기실현을 좌절시킴으로써 끼치게 되는 악영향은 이미 프리댄을 필두로 수많은 사상가들이 지적해 왔다. 다시 말해, 가사노동이 그렇게 즐겁다면 어째서 여성들이 '이름붙일 수 없는 문제(권태기)' 로 고통을 받는가? 비슷한 주장으로서 저자는 본서에서 낙태 찬성론이 사실은 즐길 건 다 즐겼지만 그 책임은 지기 싫어하는 심리라거나,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성적인 방종만을 원하고 있다거나 하는 심리분석을 제시한다. 물론 정말 그런 사람들도 없진 않겠지만, 이토록 일반화된 주장을 이토록 강하게 피력하기에는 어떠한 면접법도 없고 체계화된 연구방법론도 없다. 그렇다면 저자는 대체 어떻게 그걸 알고 확신할 수 있느냐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리고 바로 이런 비판을 우리 사회에 제기하는 것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의 요점이기도 하다.

저자는 또한 2장에서 과학적 방법으로서의 현대 심리학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우리가 상식을 통해서 남자다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저자가 제시하듯이, 성차에 대한 많은 "고정관념" 들은 의외로 정확한 것이라고 알려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심리학이 필요 없다" 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성차에 대한 상식들이 의외로 진실의 핵(kernel of truth)을 갖고 있다는 것뿐이며, 이를 확인시켜 준 것은 다름아닌 심리학의 과학적 방법이었다. 성차와 무관한 매우 많은 고정관념들이 심리학적 연구를 통하여 틀린[24] 것으로 밝혀졌는데, (여기에는 저자가 언급하지 않은 다른 성차 관련 고정관념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들에도 상식을 통해 알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설령 '남자다움' 의 개념적 특성을 고려하여 양적 접근이 어렵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미 현대 심리학에서 활용하는 몇몇 질적 연구방법들, 즉 현상학적 연구나 내용분석, 담론분석, 근거이론 등을 통한다면 상식에 의존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노력은 보통 문화심리학 분야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이다.[25]

4.1. 성차에 대한 남은 이야기

본서에서 주장하는 것은 결국 성차라는 것은 그 생물학적 기원을 고려해 본다면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 나타남 자체를 억압하면서 억지로 '사적 영역' 에서의 젠더 중립성을 관철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서에서 지적하듯이, 여성계에서의 주류 의견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사회적으로 합의되고 학습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며, 그 중에 저메인 그리어 같은 일부는 이런 사회적 조건들이 심지어 골반과 같은 뼈에까지 새겨질 수 있다고도 말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매우 많은 논쟁이 벌어지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포괄적인 설명은 되지 못하겠지만, 마침 1995년에 유명한 심리학 저널인 《American Psychologist》 가 이런 (반쯤은 학술적이고 반쯤은 정치적인) 논쟁과 관련하여 몇 건의 논문을 함께 실어준 적이 있다.

《American Psychologist》 50권 3호에서, Eagly(1995)[26]는 그간의 성차 연구 결과들이 대개 '매우 약한 차이', '차이 없음', 혹은 '재현되지 않음' 으로만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일각의 목소리를 비판하였다. 실제로 확인된 성차들은 종종 매우 일관되게 지속되는 패턴으로 강하게 나타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성 관련 편견 연구자 앨리스 이글리(A.H.Eagly)는 성차 연구 관행에 있어서 과학 외적으로 정치적 압박이 가해지고 있으며, 이는 젠더 간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압력 때문일 수 있다고 의심하였다. 이 기고에 대해서 저널 에디터를 포함한 몇몇 동료 연구자들이 의견을 함께 내놓았다. 진화심리학 분야에서 유명한 데이비드 버스(D.M.Buss)는[27] 다윈이 언급한 성선택(sexual selection)을 고려하면, 동성 간 경쟁을 위한 성차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잔 마레체크(J.Marecek)는 자신의 짧은 기고에서,[28] 과학적 연구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엄격하게 분리해야 한다는 이글리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정치적 영향력이 어떻게 심리학의 발전에 영향을 끼치는지의 관계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해야 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공감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심리학자들을 대표하여, Hyde & Plant(1995)는[29] 젠더 간 차이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일관되게 합의된 바가 없는 논쟁적인 것이라고 해명했으며, 어떤 행동을 측정하느냐에 따라 성차의 크기는 크게 달라지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 효과 크기(effect size)가 작은 것이 더 많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서 더 자세한 내용은 《테스토스테론 렉스》 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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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본서에서 "남성들이 권력에 더 가까이 있다는 논변에 따르면, 남성들은 여성들보다 권력의 추구에 더 뛰어나다는 것인가? 그것이야말로 PC하지 못한 논리가 아닌가? 여성들도 권력을 추구할 능력이 있는가? 그렇다면 왜 인류 역사에는 남성중심적 지배구조가 보편적인가?" 로 정리될 수 있는 반론을 제기한다. 그런데 하단의 서평들에서도 보게 되겠지만, 저자는 이 과정에서 여성 정치인이 출현할 가능성을 지나치게 비관함으로써 많은 평론가들에게 비판을 받았다.[2] 젠더 중립적 사회에서는 신사들의 이런 예의조차도 의심 가득한 시선을 받게 마련이라는 게 저자의 평이다. 다시 말해, 이들조차도 남성으로서 속으로는 자만하고 있을 것이며, 실리에 따라서만 기사도적인 예의와 호의를 베풀 것이고, 매력적인 친절함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숨기지만, 언젠가는 그 속내를 반드시 드러낼 것이라는 의심이다. 저자는 이런 의심은 젠더 중립적 사회에서 신사들이야말로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3]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대안적으로, 심리학현상학을 도입하라고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런 시도가 주류 심리학계 내에서 유의미한 질적 연구방법으로 정착되어 있다. 예컨대, 클라크 무스타카스(C.E.Moustakas)는 실제로 《Phenomenological Research Methods》 라는 저서를 통해서 심리학계에서 현상학적 연구법을 활용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4] 본서에서 이 단락에 이르면 진화론에 대한 장황한 평론이 나오는데, 본질적으로 철학 도서이다 보니 주로 "진화론이 인간관세계관에 끼친 영향" 에 포커스를 맞추어 논리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길을 잃기 쉬운 철학 텍스트 속에서, 이따금씩 저자 본인이 길을 잃은 것은 아닌가 싶은 껄적지근한(?) 비판이 진화론에 가해지는 지점들도 존재함은 부인하기 어렵다(…).[5] 남자다운 남성들은 이 때문에 상대방의 말을 잘 들으려 하지 않기도 하는데, 본서에서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여성은 남성들의 목소리에 관심이 많지만 남성은 여성들의 목소리에 관심이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페미니스트들은 이것이 젠더 권력 탓이라고 하겠지만, 저자의 대안적 논리에 따르면, 이는 이 남성들이 그냥 제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자기 관점만으로 젠더 문제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간과한 것은 도통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6] 그러나 플라톤은 용기에 대해서는 또 굉장히 비판적이어서, 용기는 다양한 덕목들 중 가장 작은 부분이라고 말할 정도로 폄하했으며, 특히 정치적인 속성을 갖는 용기는 전제주의적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지성이나 성찰과는 가장 거리가 먼, 우둔한 사람들의 미덕" 에 불과하다고.[7] 현대의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거부되고 있기는 하나, 울스턴크래프트는 순결과 정숙함을, 스탠튼은 모성의 위대함을 강조했다. 여기서 유의할 사실은, 이런 가치들에 대해서 이들은 남성들 역시 마땅히 지키고 존중하며 함께 가꾸어 나가야 한다는 데까지 주장했다는 것이다.[8] 저자는 이것을 볼 때 20세기 중엽 페미니스트들이 마르크스주의에 크게 빚을 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9] 본서의 소개를 따를 경우, 사회심리학자 쿠르트 레빈(K.Lewin)이 감수성(sensitivity) 개념을 주창하고,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Erikson)이 정체성(identity) 개념을 제시했던 것에서 기원한다. 이는 조직심리학 분야에서 상하급자 간의 반목과 갈등을 줄이기 위한 소집단 치료 테크닉으로 초기에 많은 인기를 끌었다. 치료 장면에서 부서 구성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속칭 "야자타임" 을 갖는데, 이때의 대화를 통해서 상급자들이 "아하, 내가 부지불식간에 했던 말과 행동들이 아랫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상처를 주는군, 앞으로는 좀 더 민감하게 신경써야겠어" 라고 다짐하게 만드는 것이다.[10] 사실 많은 평론가들도 지적했지만, 본서가 남자다움의 약화에 대해서 정확히 어느 쪽으로 비판의 화살을 겨누는지 다소 불명확한 감은 있다. 젠더 중립적 사회를 이야기할 때에는 이를 추구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사적 영역에서의 남자다움을 억누른다는 식으로 주장하면서도, 근대 사회를 이야기할 때에는 남자다움과는 상반되는 '합리적 통제' 의 통치 방식이 남자다움을 억누른다는 식으로 주장하기 때문이다. 일단 확실한 것은, 래디컬 페미니즘의 기획 자체는 굉장히 남자다운 쪽에 속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성 "개개인에게" 상처를 주었을지는 몰라도, "우리 사회에서" 남자다움을 말살했느냐고 묻는다면, 적어도 이들은 아닐지도 모른다.[11] 저자가 구체적으로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바로 남성들의 사회운동은 흔히 분열되기 십상이지만 페미니즘은 반대로 연대와 상호지지를 강조하는 이유일 수 있다. 즉, 페미니즘에는 남성 집단들 사이에서 흔히 보이는 내부고발이나 속칭 '저격' 이 흔치 않다는 것이다.[12] 마찬가지로, 저자는 155페이지에서 언급하길, 리버럴 여성들은 국가 제도에 호소하고, 보수 여성들은 남편에게 호소함으로써 똑같이 위험의 최소화를 도모한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13] Mansfield, H. C. (2007). A new feminism. Society, 44(2), 7-10.[14] Cooper, B. (2007). What a man's gotta do. The review of politics, 69(3), 471-474.[15] Norton, A. (2006). Manliness. Perspectives on politics, 4(4), 759-761.[16] 군대 무용담에 대해서도 군 부적응이나 군생활에 대한 충격이 심했을수록 전역 후 가능한 한 뽐내듯이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이 정신적인 극복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와도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많은 창작물들에서도 악역들의 묘사를 보면 오만하고 과시적이며 거들먹거리기를 좋아하는 악역일수록 오히려 동료들과 비교하면 가장 약한 축에 드는 경우가 많다.[17] 예컨대 큰 화재를 진압했지만 언론의 찬사에는 손사래를 치는 소방관들, 숱한 전쟁에 참전했지만 전쟁 무용담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는 베테랑(참전용사)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18] Newart, T. (2006). A review of: "Harvey C. Mansfield. Manliness". Women's studies, 35(7), 693-696.[19] 여성 정치인에 대해서는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B.Bhutto), 인도의 인디라 간디(I.Ghandi),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G.Meir) 등을 꼽을 수 있으며, 남자다운 여성으로는 샌드라 오코너(S.D.O'Connor), 콘돌리자 라이스(C.Rice), 힐러리 클린턴(H.Clinton), 엘레노어 루즈벨트(E.Roosevelt), 엠마 골드만(E.Goldman) 등이 있다고 하였다.[20] Alpert, R. & Jensen, R. (2006). Book review: Manliness. Sexuality research and social policy, 3(3), 98-100.[21] 본서를 주의 깊게 읽었다면, 실제로 저자가 '뭇 사람들의 상식으로 통하는 남자다움' 을 언급하면서 정확한 개념화를 생략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즉, 저자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어떠한 면접법이나 사회조사, 담론 분석, 텍스트 분석을 하지도 않고, 그냥 "내가 요즘 쭉 보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 남자다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더라" 는 일방적 주장만을 반복한다는 것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22] 심지어 우리 사회에 남자다움이 상존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자칫 반론이 불가능한 방식으로 옹호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저자는 이의를 제기하고 도전하는 것이 남자다운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주장에 대해 반론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 자신의 남자다움을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23] 이는 여성들의 정치적 참여나 위험회피 성향 등을 설명하는 3장의 메시지에 대해서도 고려될 수 있는 것으로, 여성의 내면에 대해서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보면 저자 역시 "몹시 남자다운"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24]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과장된"(exaggerated)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겠다. 본서의 저자는 "고정관념이라는 건 젠더 중립적 사회를 원하는 과학자들이 자꾸 상식을 '틀린 것' 으로 취급하기 위해서 만드는 거다" 라고 주장하는데, 실상 심리학자들이 바라보는 고정관념은 실재하는 차이를 인지적으로 과장시켜서 타인을 배제하는 편견에 봉사하는 역할을 한다. 틀린 것과 과장된 것은 측정 수준에서부터 전혀 다른 것이다.[25] 본서와 비슷한 사례를 들자면, 성격(personality)이라는 단어는 원래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쓰지 않았으나 근대화의 과정에서 함께 수입되었다고 여겨지는 한자어이다. 그 결과 이 단어를 접하는 서구권 사람들의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 우리만의 '상식' 이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간혹 국내의 어떤 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우리가 사용해 왔던 '인품'(人品) 또는 '인격'(人格)이라는 단어를 발굴해서 학술용어로 재개념화할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이는 본서에서의 남성성과 남자다움 사이의 관계를 연상시키지만, 그렇다고 이 학자들이 "상식으로도 알 수 있다" 고 주장하진 않는다. 오히려 이런 미묘한 개념적 차이는 상식에 의존하면 더더욱 혼란에 빠지기 십상이다.[26] Eagly, A. H. (1995). The science and politics of comparing women and men. American psychologist, 50(3), 145-158.[27] Buss, D. M. (1995). Psychological sex differences: Origins through sexual selection. American Psychologist, 50(3), 164-188.[28] Marecek, J. (1995). Gender, politics, and psychology's ways of knowing. American Psychologist, 50(3), 162-163.[29] Hyde, J. S., & Plant, E. A. (1995). Magnitude of psychological gender differences: Another side to the story. American Psychologist, 50(3), 159-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