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및 한국계 외국인 괴테 메달 수상자 | ||
<rowcolor=#fff> 1995년 | 1998년 | 2007년 |
<rowcolor=#000,#ddd> 윤이상(독일) | 백남준(미국) | 김민기 |
* 괄호는 수상 당시의 국적 |
금관문화훈장 수훈자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 1974 조택원 무용가 | 1975 안수길 소설가 | 1976 홍종인 언론인 | 1977 최석채 언론인 | 1978 방정환 독립운동가, 아동문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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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김우창 문학평론가 | 2022 김지하 시인 | 2022 이정재 배우 | 2022 황동혁 감독 | 2023 이미자 대중음악인 | |
2023 조수미 성악가 | 2023 이미경 기업인 | 2024 이문열 소설가 |
백남준 白南準 | Paik Nam-june | |
<colbgcolor=#a4a4a4> 출생 | 1932년 7월 20일 |
경기도 경성부 서린정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1] | |
사망 | 2006년 1월 29일 (향년 73세) |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 |
최종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수원 백씨 (水原 白氏) |
학력 | 경성수송국민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졸업 / 47회)[2] 홍콩 로이든 고등학교 (졸업) 도쿄대학 문학부 (미술사학 / 학사)[3] 프라이부르크 국립 음악 대학교 (수료) 뮌헨 대학교 대학원 (철학 / 석사) 뮌헨 대학교 대학원 (음악사학 / 박사) 프랫 대학교 (미술학 / 명예박사) |
장르 | 아방가르드 |
가족 | 아버지 백낙승, 어머니 조종희, 3남 2녀 중 막내 배우자 진안 이씨[4], 구보타 시게코(1937~2015) 외조카손자 지누 |
직업 | 예술가 (비디오 아티스트) |
TV 안경을 쓰고 포즈를 취하는 백남준 |
아내 구보타 시게코와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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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출신의 미국 예술가. 20세기를 대표한 세계적인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특히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꼽힌다. 텔레비전과 기술적 매체를 예술 작품에 통합하여 현대 예술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특유의 파격적인 예술 세계관으로 유명하며, 볼프 포스텔과 더불어 20세기 비디오 아트의 세계를 개척한 세계적인 예술가이지만, 비디오 아트 대가 이전 시절에는 전위예술 퍼포먼스 아티스트이기도 했다.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으며, 플렉서스 멤버로 퍼포먼스 예술에서도 한 축을 담당했다.[5]
2. 일생
자세한 내용은 백남준/일생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백남준을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고만 규정하기엔 부족함이 많다. 20세기에 이미 디지털로 연결된 세상을 내다본 선지자였으며 인공위성까지 동원할 만큼 엄청난 배포의 기획자였다. 마셜 매클루언 같은 문명비평가부터 데이비드 보위 같은 가수까지 전 세계 수많은 인사가 그의 친구였다. 백남준이 연하장을 보내는 이는 1000명이 넘었다. 그야말로 국제적인 스타였다."
미술사학자 김홍희 #
미술사학자 김홍희 #
"백남준이 한국에서 예술을 했다면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이 되었을까? 나는 가끔 주변 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아마도 힘들었을 거라고. 아쉽게도 한국 사회는 귤을 맛있는 귤로 키우지 못하고 탱자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일찍 한국을 떠난 덕분에 한국인의 원형적 심성과 내면을 가장 잘 보존한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그가 만든 작품 앞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기억과 한국의 문화적 유전자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어령[6]
이어령[6]
백남준이 높게 평가 받는 이유는 첨단기술매체와 인간이 어떻게 공존해야 할지 상상하고 이를 예술로 표현했다는 점에 있다. 당시 예술가들이 텔레비전 같은 새로운 매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이를 배척하거나 파괴하는 작업을 선보인데 반해, 백남준은 새로운 예술을 선보이기 위해 전자회로 관련 기술도 직접 공부하고 아베 슈야 같은 기술자와 협력할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작품 <etude 1>(1967-1968)을 만들기 위해 벨 연구소에서 포트란 언어로 코딩까지 시도했다고 한다.[7]
백남준은 저술이나 이론 작업도 꽤 많이 했다. '전자 고속도로'를 예견한다든지, '인포 아트'에 대해 논한다든지. 인터넷[8]과 스마트폰[9], 유튜브나 스트리밍[10]이 일상화된 지금 읽어보면 당연하고 뻔하다 싶은 내용을 써놓은 경우가 많지만, 인터넷은 커녕 모든 사람이 컴퓨터를 휴대하고 다닌다는 발상 자체가 공상 과학의 영역이었던 70년대에 그런 예견을 한 것으로, 전자 고속도로의 개념을 작품화한 '전자 초고속도로' 라는 작품을 1974년도에 만들었다.[11] 본문에 나오는 내용 중 일부를 74년도 이전에 예견했고, 93년도까지 현재 21세기의 모습을 예언했으며 전부 현실화되었다. 그 빌 게이츠도 자신의 저서에 비슷한 내용을 저술했지만, 이쪽은 95년도다. Apple의 존 스컬리가 지식 탐색기의 개념을 제안하기 시작한 것도 83년이었고 이 때도 아직 시기상조였다고 여겨졌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야 제대로 구현되었다. 그의 통찰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많은 예술가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는데 당시 TV는 '바보상자'로 취급하고 TV를 비롯한 미디어 컨텐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대부분이었으며 좋은 미래를 전망하지 않았다.[12] 이 때문에 사실상 비디오 아트 뿐 아니라 미디어 아트를 논할 때도 백남준을 빼놓고 말하는 것은 힘들 정도다. 실제로, 미디어 아트 관련 서적에 백남준은 적어도 한 구절씩은 꼭 들어가 있을 정도다.[13]
세계 유명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작품을 소장품목에 넣은 것도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다. 해외 예술 경향을 국내에 소개하거나, 휘트니 비엔날레의 경험을 살려서 광주비엔날레[14] 조직에 큰 도움을 주는 등 한국 미술 역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4. 국내 소장 미술관
2001년 백남준은 경기도와 함께 아트센터 건립을 논의해 왔다. 주제는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으로 백남준 타계 이후 2008년 10월 경기도박물관이 위치한 경기도 용인시 상갈동 일대에 백남준 아트센터라는 이름으로 개관하였다.[15] 주로 현대 미술을 위시한, 퍼포먼스, 개념, 설치 미술이 중점적으로 전시되며, 정기적으로 행위 예술 페스티벌이 열리곤 한다. 백남준 아트센터가 들어선 곳은 도립박물관과 한국민속촌, 도립국악당 등이 인접해 있어 용인시는 용인 G-뮤지엄파크(경기도박물관·백남준아트센터·경기도어린이박물관)를 구축해 문화·예술적 시너지효과를 내고 있다. 또한 용인 마북동에 있는 한국미술관은 그의 작품과 그의 아내의 작품이 자주 전시된다. 이래저래 백남준과 용인은 인연이 깊은 듯.용인의 백남준 아트센터 외에는 다음의 기관에서 백남준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다만 소장 중이더라도 모니터가 나가서 수리 중일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말자. 실제로 백남준 작품은 CRT 모니터가 나가서 수장고에 끌려가거나 가림막으로 가려 놓거나 아예 TV를 꺼 버리는 경우가 있다.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엄청 큰 작품을 갖고 있다. 모니터가 자그마치 1003개... 작품명은 '다다익선'. 수리할 때가 되었는데 이미 단종된 CRT를 구해서 고칠지 이참에 LCD로 바꿀지 고민하더니 최대한 CRT를 구해서 교체하고 대체 부품을 못 찾은 부분은 껍데기만 놔두고 LCD와 OLED 등 최신 디스플레이로 교체했다. CRT의 수명 문제와 부품 노후화로 화재나 폭발 등의 가능성이 있어 2018년 4월 18일 부로 가동이 중단되었으며 보수작업을 거쳐 2022년 9월 재가동을 시작했다.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지하층 통로에 설치되어 있는데 웬만한 사람들은 전시물인지 모르고 지나친다. 작품명은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1965-67>
- 대전시립미술관: 1993년 대전 엑스포 당시 재생관에 전시되었던 비정수의 거북선[16]이 있다. 근래까지 재생관에 방치되어 있었으나 현재 대전시립미술관으로 이동, 수리후 전시 중이다.
- 삼성미술관 리움: 2동 1층에 <My Faust-Communication> 전시 중. 도슨트가 투어 중에 설명해주는 작품에 포함되어 있다.
- 부산시립미술관: 1층 로비의 <덕수궁> 외에 4점 보유.
- 삼성화재교통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 - 1997>가 전시되어 있다.[17]
- 서울시립미술관: 1층 로비에 <서울 랩소디> 전시 중.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바이바이 키플링', '서울 판타지아', '네 마음 속의 서울' 등 영상이 담겨있다.
이 중 2대의 모니터에서는 꽤 야한 누드가 나온다. -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로비에 <호랑이는 살아 있다> 영구 설치.
- 수원역 AK프라자: 6층 문화센터 입구에 전시 중. 2003년 수원역 민자역사(개관 당시 애경백화점) 준공 당시부터 2층 로비에 있었던 작품이지만 AK프라자 측이 매각을 시도한 적이 있어서 논란이 되었던 작품이다.
- 아라리오뮤지엄 탑동시네마: <반 고흐 로봇>, <나의 작은 록키소녀>, <텔레 커뮤닛>, <탈>, <시스 코프>, <TV는 키치다>, <마키우나스> 7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 우리들병원: 병원로비에 <안심낙관> 작품이 전시 중이다.
- 창원 성산아트홀 전시관 로비: <창원의 봄> 상시 전시 중. 현재 작동하고 있지는 않다.
- 포스코: 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 포스코 센터 1층 입구에 <철이철철>이라는 작품을 전시 중이다.
- 한국산업은행: 여의도 영업부 로비에 1점. 산은본점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이 불가능하니 눈으로만 보자.
다이렉트 계좌 개설 핑계 삼아 가보자. - 하나금융투자 여의도 본점: 1층 후문[18] 쪽에 <하나 로보트, 2001>, <초고속 경제, 2001>, <시집온 부처, 2001>, 총 세 점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촬영과 출입이 자유롭다.
- 한양대학교 백남학술정보관(중앙도서관): 로비에 <TV 첼로>라는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출입 통제 및 사진 촬영 금지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로비 앞 출입게이트에 있는 경비가 해당 작품을 감시하고 있다.
- 효성그룹 본사(공덕동): 1층 로비에 <백제무령왕>, <FAUST> 2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 SK증권 여의도점: 1층 로비에 <개선장군>이 전시되어 있다.
- 본태박물관: 제주의 본태박물관 4점 소장. 그 외 백남준의 드로잉작업 등도 전시 중이다. <금붕어를 위한 소나티네>, <TV첼로>, <나는 결코 비트겐슈타인을 읽지 않는다.>, <Rondo in RGB>
- 메종글래드 제주: 1층 로비에 <벤자민 프랭클린>이 전시되어 있다.
- 에코랜드 호텔: G층 갤러리에 <요셉 보이스>가 전시되어 있다.
- 광안리해수욕장: 여름경찰서 앞에 <디지테이션>이 전시 중이다.
5. 국외 소장 미술관
-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 MoMA
- 미국 워싱턴 DC의 허쉬혼 미술관과 아메리칸 아트 미술관
- 예일 대학교 미술관
- UC 버클리 BAMPFA 미술관
- 인디애나폴리스 미술관
- 일본 후쿠오카의 후쿠오카 미술관과 캐널시티 하카타
- 독일 뒤셀도르프의 노르트라인주립미술관
- 독일 쾰른의 루드비히박물관
- 호주 캔버라의 국립미술관
- 호주 호바트의 MONA(Museum of Old and New Art)
- 덴마크 코펜하겐 국립미술관
- 스웨덴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 테이트 모던에서는 아예 백남준의 작품만을 전시한 공간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 현대 자동차 후원관. #
- 하바드대학교 Fogg 미술관
6. 어록
"문화도 경제처럼 수입보다는 수출이 필요해요. 나는 한국의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서 세상을 떠도는 문화 상인입니다."
— 1984년에 "왜 한국 무대를 놔두고 외국 무대에서만 활동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며.#[19]
— 1984년에 "왜 한국 무대를 놔두고 외국 무대에서만 활동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며.#[19]
"인생은 싱거운 것입니다. 짭짤하고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예술을) 하는 거지요."
"1982년에 만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쉰 살이 될 것이다. 2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백 살이 될 것이다. 3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천 살이 될 것이다. 119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십만 살이 될 것이다."
— 1964년, 동료 예술가 볼프 포스텔이 "정확한 자서전을 써달라"고 부탁하자 써낸 답글 중
— 1964년, 동료 예술가 볼프 포스텔이 "정확한 자서전을 써달라"고 부탁하자 써낸 답글 중
''백남준을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라고만 규정하기엔 부족함이 많다. 20세기에 이미 디지털로 연결된 세상을 내다본 선지자였으며 인공위성까지 동원할 만큼 엄청난 배포의 기획자였다. 마셜 매클루언 같은 문명비평가부터 데이비드 보위 같은 가수까지 전 세계 수많은 인사가 그의 친구였다. 백남준이 연하장을 보내는 이는 1000명이 넘었다. 그야말로 국제적인 스타였다.”
미술사학자 김홍희 #
미술사학자 김홍희 #
"백남준이 한국에서 예술을 했다면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이 되었을까? 나는 가끔 주변 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아마도 힘들었을 거라고. 아쉽게도 한국 사회는 귤을 맛있는 귤로 키우지 못하고 탱자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일찍 한국을 떠난 덕분에 한국인의 원형적 심성과 내면을 가장 잘 보존한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그가 만든 작품 앞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기억과 한국의 문화적 유전자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백남준의 오랜 호형호제, 이어령
백남준의 오랜 호형호제, 이어령
"그건 그렇고, 30세기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선생님, 혹시 (곧 다가올) 21세기 말씀이십니까?"
"아니, 1000년 후 30세기."
1994년 미국 휘트니미술관 2인 전시를 함께한 설치미술가 강익중과 나눈 대화[20]
"....선생님, 혹시 (곧 다가올) 21세기 말씀이십니까?"
"아니, 1000년 후 30세기."
1994년 미국 휘트니미술관 2인 전시를 함께한 설치미술가 강익중과 나눈 대화[20]
7. 여담
- 2010년 7월 20일에 구글에서는 그의 탄생 78주년을 기념하여 로고를 특별히 제작하기도 했다.
- 미국의 빌 클린턴, 김대중 대통령 앞에서 실수 아닌 실수를 범한 사건이 잘 알려져 있다. 1998년 6월 김대중 대통령 방미에 맞춰져 백악관에 초대된 백남준은 빌 클린턴 대통령 면전에서 그와 악수하다가 바지가 흘러내렸다. 당시 백남준은 뇌졸중 후유증으로 지체장애인이 되어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악수 직전에 바지가 흘러내린 것. 그것도 아무 속옷도 입지 않은 채 였다. 단순한 실수였다고는 하는데 당시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이 사건을 두고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백남준은 이에 대해서 "My pants dropped. That’s all.(바지가 흘러내렸다, 그게 다야)" 라고 말했다고. 많은 사람들은 연이은 섹스 스캔들에 시달렸던 클린턴을 '빗대어' 이 같은 '퍼포먼스'를 했다거나 'Electric highway(전자 정보 고속도로)'라는 단어를 클린턴이 마음대로 가져다 사용했기 때문에 그랬다는 등 각종 설들이 나왔다.[21] 이 당시 백남준이 바지를 잡고 입장하다가 놓은 점이나, 바지가 흘러내린 이후에도 백남준의 표정이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러한 설들이 더 부추겨진 면도 있는 듯. 그러나 이미 1998년은 한 번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이기에 표정 변화가 없는 점은 감안할 수 있다. 이 사건에 대해 그의 행위예술가적 행보를 잘 알고 있는 서양에서는 항의 내지 풍자성 행위 예술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 백남준아트센터에서는 아예 이를 포스터로 쓰며 그를 '트릭스터'로 칭하기도 했다. 기다리고 걸어오기까지 하다 하필 빌 클린턴 앞에서 했다는 것이 타이밍도 너무 절묘해서 실수가 아닐 것이라 보는 이들이 많긴 하다.
- 원로 코미디언 백남봉과 앞글자 두 자가 동일하고 연령대도 비슷한 데다[22] 두 사람 모두 국내에서는 이름이 잘 알려진 관계로, 80~90년대에는 대중들이 두 사람의 이름을 은근히 헷갈리거나 백남봉이 백남준의 짝퉁 취급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23] 물론 2006년 백남준의 작고와 더불어 2010년 백남봉의 작고로 이런 혼란은 완전히 사그라든 듯 하다.
- 일본의 작곡의 신이자 YMO의 사카모토 류이치가 존경하는 인물이다. YMO의 PV를 보면 백남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걸 볼 수 있다.[24]
- 현재도 백남준의 영향력은 미술사, 예술가, 음악가 등 다양한 예술분야에서 발휘되며, 마틴 게릭스의 Yottabyte 뮤비에서 나온 비디오 아트, 이은결의 일부 마술 트릭도 다 백남준이 개척한 장르라고 하는 걸 생각하면, 전공자가 아닌 사람한테 생소한 현대미술이라는 장르를 대중들한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든 사람 중 한 명임을 알 수 있다. 비디오 아트가 여기저기서 재해석되면서 의외로 대중에게 친숙해졌다.
- 브라운관의 수명이 다하면서 그의 대표 작품인 다다익선의 보존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
- 1998년 예술계에 기여한 그 공로를 인정받아 독일 문화원에서 수여하는 괴테 메달을 수상했다. 한국계로서는 두 번째 괴테 메달 수상자이다. 첫 번째는 작곡가 윤이상.
- 최경한 서울여대 명예교수(서양화가)와 경기고등학교 47기 동기생이다. 고등학교 시절 미술반에서 같이 활동했다. 백남준 사후 백남준미술관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았다. 고교 1년 후배인 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과도 친분이 있었다.
- 백남준의 작품과 관련해서 미술평론가 손철주가 쓴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책에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1992년 8월 한 화가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회고전에 갔다가 본 광경으로, 두 여고생이 전시된 작품들 중 속을 뜯어낸 진공관식 TV 속에 촛불 하나가 켜진 〈TV 촛불〉이라는 제목의 작품 앞에서 대화를 하고 있더란다. 이 때 한 쪽 여고생이 "야, 이것도 예술이냐?"라고 묻자 옆에서 함께 구경하던 다른 여고생 曰, "아니, 예술이 아니고 기술이지. 일주일 전에 봤던 촛불이 아직 안 꺼졌잖아."
- 백남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라는 책이 있다. 백남준의 글을 모아 놓은 총서인데, 백남준의 생전 생각과 아이디어를 잘 볼 수 있다. 방대한 관심사와 깊은 지식, 무엇보다 이를 엮어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이 돋보인다.
-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넷플릭스 로맨틱 코미디 《우리 사이 어쩌면》 여주인공 겸 공동 작가인 앨리 웡의 전 남편 저스틴 하쿠타가 백남준의 조카손주다. 저스틴의 아버지가 백남준의 장조카 켄 하쿠타(백건)으로 하버드 비지니스 스쿨을 백남준의 도움으로 졸업하고 장난감 회사를 차리는 한편, 발명 관련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의 장수 MC(Dr.Fad)였으며 아들 저스틴 역시 하버드 비지니스 스쿨에 보냈다. 하쿠타 일가는 5.16 쿠데타 때 부정 축재자로 몰려 굴지의 대기업 태창방직을 통째로 뺏기고 조국에 대한 배신감을 안은 채 창씨개명했던 성씨 그대로 미국에 정착했다. 물론 해방 후 한국에 남은 백씨 일가는 복성했으며 백남준 역시 Paik으로 활동했다. 백남준의 사후 기념 사업, 유작 관리, 유산 처분을 주도한 것이 켄 하쿠타였다.
[1] 다만 1937년부터 1950년까지 어린 시절을 살았던 곳은 창신동 197번지에 위치한 99칸짜리 한옥집이었던, 속칭 '큰대문집' 이다. 지금은 백남준기념관으로 리모델링했고, 본인도 창신동을 평생 그리워했다.[2] 일제강점기는 5년제, 광복 후에는 6년제 중·고등학교 통합 학제였기 때문에 중학 과정 수료 후 영국령 홍콩으로 유학을 떠났다.[3] 부전공 음악사학[4] 사별했다. 날짜 불명[5] 퍼포먼스 예술은 그 이전 예술에서는 볼 수 없는 현대 예술의 대표적 예술 활동인데, 플렉서스 멤버들과 했던 수많은 퍼포먼스가 이제는 주류 예술이 되었다.[6] 백남준과 오랜 세월 호형호제하는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7] 백남준은 자신이 예술가가 되지 않았다면 물리학자(공학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8] 전자와 고속도로란 명칭 때문에 하이패스를 연상할 수 있지만, 정확히는 '전자초고속도로를 통해 풍부한 정보를 접할 가능성이 있음'을 언급했기에 인터넷 혁명을 예견했단 것이 맞을것이다.[9] 누구나 손에 작은 TV를 가지고 다니면서 전자고속도로를 사용할 것이라고 했다.[10] 영상산업의 종반엔 누구나 쉽게 영상을 찍어 공유하고 소통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견했다.[11] 휴대 및 이동이 가능한 컴퓨터 개념으로 만들어진 IBM 5100의 출시 연도가 1975년이었는데, 그렇게 가볍게 만든 컴퓨터의 무게는 우려 20kg이 넘었다.[12] 백남준은 기술 발달로 인한 미래 비관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TV가 보편화 되기 시작하면서 바보상자뿐 아니라 빅브라더로 유명한 1984 등의 소설도 유명했는데 그는 이를 빗대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업을 1984년 1월 1일 방송한다.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이용하여 전세계 동시 생중계를 한 것이다. 빅브라더는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대중매체라 생각할 수 있는데 백남준은 오히려 전세계에 영향을 미칠 기반이 되는 인공위성을 이용해 TV가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보다는 전세계인을 이어주는 매체이자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는 선언을 한 셈이다. 2020년 시점에서 TV를 넘어서 인터넷과 스마트폰이라는 매개체로 인해 미디어 매체가 일상 속에 녹아들고 단순 유흥을 넘어뉴스, 정치, 다큐 등등 다양하게 녹아들어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된 것을 생각하면 그의 생각은 정확했던 것이다.[13] 백남준이 빠져 있다면, 그 서적의 전문성을 의심해봐도 무방하다.[14] MBC 인기가요에 나와서 광주비엔날레를 홍보하는 영상. 존댓말로 시작해 갑자기 반말을 하더니 애교 섞인 존댓말로 돈 좀 많이 써달라는 마무리가 압권이다. 백남준의 선구안 덕분에 광주 비엔날레는 세계에서 인지도와 명성이 무척 높은 비엔날레 중 하나로 자리잡았고, 해외 관람객도 많이 찾아오는 국제적인 행사가 되었다.[15] 서울을 포함하더라도, 이 정도 수준의 현대미술관은 찾기 어렵다. 난해하고, 많은 관람객을 유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백남준의 세계적 네임밸류로 인해, 해외의 현대미술작가들은 이곳에서 전시를 많이 한다. 때로는, 해외에 엄청난 네임밸류를 가진 작가가 서울이 아닌, 용인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전시를 열기도 한다.[16] 일반에는 텔레비전거북선으로 잘 알려져 있다.[17] 독일 뮌스터 조각예술제 출품.[18] 여의도역 쪽을 정문이라 가정. 사실 정문과 후문이 구분이 안간다.[19] 이 명언은 백남준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랴부랴 일본으로 출국하여 독일과 미국 등 세계 여러나라를 떠돌다가 34년만인 1984년에 다시 고국을 찾았을 때 어느 기자가 백남준에게 물어본 질문과 대답이다. 백남준의 이 명언이 2020년대를 비롯한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한류의 영향력으로 전세계의 국가에서 한국 문화의 수출에 크게 기여하고 경제 분야에서도 큰 효과를 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제대로 미래를 예견했고 소름돋는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나 전쟁 직후 보다는 경제력이 선진국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눈부시게 많이 상승했지만 1980년대 당시에는 대한민국의 전반적인 국력이나 국제적인 위상이 지금보다 크게 부족했고, 문화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내세울 인물이 백남준이나 김연자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40년이 지나 2020년대를 비롯한 현재의 대한민국은 한류의 영향력으로 세계 각국에서 대중문화 수출에 활발히 나서고, 경제분야에서도 매우 큰 효과를 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매우 탁월한 선견지명임을 잘 보여준다. 애초 컬러TV를 만들 의지가 없던 박정희 및 최규하로 인해 비디오 아트 재료로 쓰는 한국산 컬러TV가 들어가는 것은 그들이 죽거나 물러난 80년대를 넘긴 후였다. 그러니 해외에만 나돌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수출 외에는 답없는 나라가 주제 모르고 나댔다고 경제성장으로 극찬받을 것 하나도 없다고 박정희를 대놓고 디스한 셈이다.[20] 2인전이 끝나고 백남준과 강익중, 그리고 미국 월가(街)의 금융인들과 가진 식사자리에서 나온 대화였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광적인 독서와 매일 두 시간씩 여덟 개의 주간지, 네 개의 월간지, 세 개의 일간지를 읽었던 백남준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월가에서 벌어지는 세세한 변화들을 꿰뚫어 본 그는 월가의 금융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 직후에 나온 대화가 바로 문제의 30세기에 관한 질문. 후에 강익중은 30세기의 세상을 상상하던 백남준을 두고 낮에도 별을 보는 사람이라고 했다.[21] 클린턴의 스캔들을 비꼬아 사실 클린턴은 주위 사람의 바지를 벗기는 힘이 있기 때문에 백남준이 당한 것이라는 드립도 나왔었다.[22] 백남준은 1932년생, 백남봉은 1939년생으로 두 사람은 7살 차이밖에 안 난다.[23] 참고로 백남봉의 본명은 '박두식'으로 '백남봉'이라는 이름은 연예인 활동용 예명이었는데, 백남준이 국내에 알려지기 십여 년 전부터 이 예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백남준의 명성을 노린 것과는 전혀 관계 없다.[24] 실제로 사카모토 류이치는 백남준에 대한 존경을 담은 헌정곡 'A tribute to NJP'라는 곡을 작곡해 자신의 앨범에 수록한 바 있다. 그가 작곡한 영화음악 등에 비교해보면 다소 전위적인 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