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의 주요 훈장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 |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21년 | |
이름 | 박서보 | |
분야 | 화가 | |
금관문화훈장(1등급) | ||
연도 | 2011년 | |
이름 | 박서보 | |
분야 | 화가 | |
은관문화훈장(2등급) | ||
연도 | 1994년 | |
이름 | 박서보 | |
분야 | 화가 | |
옥관문화훈장(4등급) |
본명 | 박재홍 (朴在弘) |
출생 | 1931년 11월 15일 |
경상북도 예천군 | |
사망 | 2023년 10월 14일 (향년 91세)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홍익대학 문학부 (미술과[1] / 학사) |
링크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단색조 미술가.
현대 한국 미술계의 거장으로서, 한국 미술계를 단색화의 시대로 이끌어낸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1970년대 자기절제와 세련미를 보여준 대표 연작 '묘법'으로 유명하다.
2. 경력
- 홍익대학교 명예교수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학장
-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3. 작품
여인좌상, 캔버스에 유채, 121 x 88cm, 1955. |
닭, 박스지에 유채, 19.7 x 14cm, 1956. |
3.1. 의사-앵포르멜
繪畵 No.1-57, 캔버스에 유채, 95 x 82cm, 1957. |
原形質 No. 1-62, 캔버스에 유채 및 복합재료, 161×131cm, 1962. |
3.2. 기하추상과 그 변주
遺傳質 No, 2-68, 캔버스에 유채, 131×131cm, 1968. |
遺傳質 No, 7-69-70, 캔버스에 유채, 90.9×116.5cm, 1970. |
3.3. 초기 묘법
Ecriture(描法), No.6-69, 캔버스에 연필 및 유채, 91.6 x 69cm, 1969. |
3.4. 민족기록화
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당, 캔버스에 유채, 197 x 290.9cm, 1976. |
3.5. 중기 묘법
Ecriture(描法), No.890503-3, 캔버스에 혼합 재료, 300.5 x 228cm, 1989. |
3.6. 후기 묘법
Ecriture(描法), No.20220405, 세라믹에 아크릴, 91 x 74.5, 2022. |
4. 기타
- 2022년 광주비엔날레에 박서보의 이름을 딴 예술상이 제정되었다가 " ‘광주비엔날레의 국제적 위상’과 오월정신,광주정신을 매판 하는 행위"라는 지역예술계의 비판을 받고 1회만에 폐지되었다.* 당시 지역예술계에서는 "1960~70년대에 지금은 박제된 당시 한국의 모더니즘 미술의 상징적 대표로서, 1960년 4·19혁명에 문화권력의 기회를 엿보고 박정희 정부에 순응하며 기록화 사업에 활발히 가담했으며, 1970년대 유신정권 시절 관변미술계의 수장으로서 1980년대 민주화운동라 외면하고 개인의 출세와 권력 지향과 영달을 위해 살아왔을 뿐이다"라고 비판했다.
[1] 동양화 전공으로 입학했다가 2학년 때 서양화 전공으로 전과했다.[2] 당시 서구/구미의 형식 및 미학은 미군이나 일본 잡지를 통해 피상적으로 수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미술계에서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 경향은 동일한 것으로 혼용되었다. 게다가 다다-앵포르멜 경향의 피상적인 이해 탓에, 추상표현주의=앵포르멜 모방을 통한 계파 운동이 곧 반국전적 반예술-전위 운동 비스무리한 것으로 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