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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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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문화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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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공병우
公炳禹
파일:external/www.hellodd.com/20091008130214.jpg
출생 1907년 1월 24일
대한제국 평안북도 벽동군 남면 남상동
(現 평안북도 벽동군 남중리)[1]#
사망 1995년 3월 7일 (향년 88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김포 공씨
직업 안과의사
학력 평양의학강습소 (졸업)
나고야제국대학 (의학 / 박사[2])
가족 배우자 이용희
슬하 3남 6녀
종교 개신교

1. 개요2. 한글 관련 운동
2.1. 세벌식 타자기 개발2.2. 한글 전용화2.3. 세벌식 워드프로세서 개발2.4. 세벌식 컴퓨터 자판 개발2.5. 기타 한글 관련 활동
3. 국내 최초의 안과전문의4. 기타5. 함께 보기

[clearfix]

1. 개요

한글을 사랑한 괴짜 의사[3]

대한민국 최초의 안과 전문의로서 안과 전문 병원을 개원한 의사.[4] 그러나 한글 자판 연구가이자 전 한글문화원장으로서 한글 기계화, 한글 전산화에 앞장선 인물로도 유명하다. 단순히 한글로만 유명한게 아니라 시력검사판 한글화 및 다양한 안과 진료기술 도입 등 안과의사로서의 업적도 있다. 안과의사이면서 언어 관련 활동으로도 유명하다는 점은 인공어 에스페란토를 만든 루도비코 라자로 자멘호프와 유사한 점이다.

2. 한글 관련 운동

2.1. 세벌식 타자기 개발

파일:대한민국 국장.svg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550호 551-1·551-2호 552호
압사기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 현대자동차 포니 1
오른쪽에 초성·가운데에 중성·왼쪽에 종성을 배치하여 입력하는 체계인 '세벌식 자판'*을 1949년부터 개발하고 계속적으로 연구하여, 6.25 전쟁 때 이미 한글을 타자기로 빠르게 입력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연구에 힘입어 한때 세벌식 점유율은 월등하게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1969년, 세벌식 타자기 특유의 빨랫줄 글꼴(아래 세벌식 워드프로세서 개발 문단 참고)이 '이' 자를 '일' 자로 위조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고 이에 따라 정부는 세벌식 타자기의 사용을 금지하고 세벌식보다 타속이 느린 네벌식 타자기를 표준으로 지정했다. 또한 1983년, 빨랫줄 글꼴의 문제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5공 정부는 네벌식을 마개조두벌식[5]을 표준으로 지정하고 세벌식의 사용을 계속 제한했다. 이러한 탄압들에 대응하여 공병우는 정부에 반발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코렁탕을 당할 뻔하기도 하였다. 참고 동영상

2.2. 한글 전용화

대한민국은 1948년 한글 전용화 정책을 편 북한에 비해 한자 사용률이 여전히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공병우 타자기의 편리함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손으로 글씨를 쓰는 대신 공병우 박사의 타자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공병우 박사의 타자기는 순한글은 입력할 수 있지만 당시에 많이 쓰이던 한자는 입력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한자의 사용을 포기하고 순한글을 사용했다. 1990년대 이후 컴퓨터의 발달로 한자를 타자로 입력할 수 있게 되었지만, 1950년대 당시만큼 한자를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은 공병우 타자기의 영향도 일부 존재한다.

2.3. 세벌식 워드프로세서 개발

파일:attachment/공병우/빨랫줄.png

위 빨랫줄 글꼴은 공병우가 타자기를 빠른 속도로 치기 알맞게 글꼴을 새로이 만든 것이다. 이 글꼴의 특징은 초성, 중성이 빨랫줄처럼 되어 종성을 매달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네모꼴을 벗어난 것으로, 정부에서 세벌식 타자기를 기피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글씨를 칠 때 글씨의 모양이 중간중간에 바뀌는 것이 없다보니 익숙해지면 편리한데다가, 2000년대 들어서 그 디자인을 어느 정도 인정받아 비슷한 글꼴들이 개발되기도 했다.

공병우는 한국어 입력기가 없는 컴퓨터에서도 한글을 입력할 수 있게 이 글꼴을 사용하여 새로운 로마자 대응 글꼴을 만들었는데, 이를 직결식 글꼴이라고 부른다. 이 글꼴을 그대로 영자 워드프로세서에 대입시킨 공병우 박사는 프로그램의 변경 없이 한글 문서를 만들 수 있는 워드프로세서를 선보였다. 여기에서 당시 워드프로세서의 원리를 체험해 볼 수 있다.

2.4. 세벌식 컴퓨터 자판 개발

컴퓨터의 등장 이후 컴퓨터 용으로 자판을 개발할 필요가 생기자, 공병우는 여든이 넘은 몸으로 세벌식 공병우 최종 자판을 개발하였다. 이 자판은 공병우가 직접 개발한 마지막 자판이기 때문에 '세벌식 (공병우) 최종'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렇다고 '최종 자판'이 세벌식의 마지막 자판인 것은 아니다. 1995년 공병우 박사 사후, 공병우 박사의 뒤를 이은 자판 개발자들이 계속해서 세벌식 자판 개선에 힘써왔고, 이는 2021년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공병우 세벌식(공세벌식)은 두벌식보다 손가락 연타 수가 적어서 피로도가 적다는 특징이 있고, 개량 자판에 따라 한 글자를 한 타에 칠 수도 있다. 신광조 세벌식(신세벌식)도 공병우 세벌식에서 비롯되었을 만큼 공병우 박사는 세벌식 자판 계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5. 기타 한글 관련 활동

  • 안과의사였던 공병우가 한글 타자기 개발 등 한글의 이용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한글에 너무 열심히 파고들다 눈이 경악할 정도로 나빠져서 진료를 받으러 방문한[6] 한국어학자 이극로의 영향을 받았다. 이극로와 한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일본어로 적힌 의학서적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한글 타자기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는 한글 타자기를 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 시각장애인용 한글 (점역) 타자기를 개발한 사람도 공병우다. 하지만 이 타자기 대신 점자의 점 한개마다 글쇠를 배당한 타자기를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 나이가 들어도 노익장은 여전하여 한글문화원을 설립할 당시 나이가 82세였다.
  • 실력 있는 젊은 인재들과 정보를 나누어 프로그램 개발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래아 한글도 이러한 지원 아래 태어난 작품. 개발자인 이찬진의 사무실도 맨 처음엔 공병우가 설립한 한글문화원 한켠에 있었다.
  • 안과의사로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 관련되어 6.25 전쟁에서 조선인민군에 억류되어 살해당할 뻔했는데 인민군은 공병우가 한글 타자기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태도를 바꾸어 공병우를 회유하려 했다. 공병우 박사에게 공병우가 만든 타자기 시제품을 주어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를 펴놓고 따라 쓰는 걸 보고 공병우 박사는 다행히 화를 면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민군이 타자기의 설계도를 입수하려고 했지만 공병우 박사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설계도를 들고 몰래 남쪽으로 도망쳐 기술 유출을 막았고, 북한에서 자체적으로 한글 타자기를 만들게 된 것은 전후의 일이 되었다.
  • 1953년 6·25 휴전 협정 당시 한국어 문서는 공병우 타자기로 쳤는데, 다른 나라 측 타자기들보다 더 빨라 찬사를 받았다는 말이 있다.
  • 공병우 타자기는 최초로 '제대로 된' 한글 타자기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한글 타자기는 '가로로 쳐서 세로로 읽는', 상당히 불편한 구조였으며, 풀어 적기 운동의 주 이유가 될 정도로 종성 처리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공병우 박사는 이것 하나를 위해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쌍초점 방식'을 개발했다.

3. 국내 최초의 안과전문의

파일:공병우(동아일보기사).jpg

세벌식 타자기 개발과 한글 연구로 더 유명해지긴 했지만 개요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안과의사, 그것도 대한민국 최초의 안과 전문의였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최초로 안과 병원을 개원하였다. 공병우가 개원한 공안과는 광화문(서린동)에 아직도 그대로 있다.

또한 대한민국 최초의 하드렌즈를 만든 한국 콘택트렌즈 연구소에서 하드렌즈 연구의 주축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국내 최초로 쌍꺼풀 수술을 하기도 했고, 그 전까지 일본 가나로 만들어져 있던 시력 검사표를 한글로 제작하였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안과계의 "선구자"이자,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서 한때 대한민국에서 4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정도로 부를 쌓기도 했다고 하나, 정작 본인은 돈 버는 것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4. 기타

공병우의 좌우명은 '시간은 생명이다.'이다. 그래서 국민들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도록 빠른 자판 개발에 힘써 온 것이다. 이를 통해 세벌식 자판은 두벌식 자판보다 더 빠르고 효율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7] 한글 타자기 개발에 대한 공로로 특허청은 1999년도에 공병우가 대한민국 7대 발명가 중 하나라고 발표했다.# 공병우의 생각을 잘 나타낸 저서로는 자서전인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을 요구받자 자신이 죽었다고 선언했다는 일화가 있고, 시간 절약을 위해 1950년대 당시에 집 구조를 미국식으로 바꾸어서 이웃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했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에는 화장실이 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공병우가 화장실 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화장실을 집 안에 들여놓았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기점으로 화변기가 조금씩 들어왔고, 당시의 글이나 신문을 보면 1920년대에는 웬만큼 사는 집안에선 이미 화변기를 꽤나 설치해 놨었다. 이런 점을 종합해봤을때 공병우 박사가 사는 집 정도면 푸세식은 좀 터무니없고, 최소 화변기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민주주의에도 크게 기여하였는데, 1980년대 민청련 초기자금이 없어서 허덕이던 시절 문제 소지가 될까 현찰을 대주지는 못하고 공병우 타자기를 수십 개 기증하는 것으로 자금마련에 도움을 주었다.

1995년 89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 뉴스가 나오자 당시 PC통신 게시판은 공병우 박사에 대한 조의글로 넘쳐났는데, 당시 PC통신 게시판이 한 사람에 대한 조의글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것은 거의 최초의 일이었다. 한 기자는 이를 네티즌들의 사회장이 열리고 있다라고 표현했다. 타계 당시 유언으로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쓸 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남은 시신도 해부용으로 기증하라. 죽어서 땅 한 평을 차지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서 콩을 심는 게 낫다. 유산은 맹인 복지를 위해 써라"라는 유언을 남겨서 카데바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기증되었다.

생전에 소설가 황석영과 안면이 있었다. 장길산 연재 당시 황석영이 술집에서 지인들과 술 마시다가 본인의 주특기인 약장수재담을 늘어놓고 있는데[8] 마침 그 옆자리에서 공병우도 지인들과 함께 있었다. 한참 재담을 재미있게 듣고 나서 공병우는 황석영을 불러 "자네는 무슨 일을 하나? 그리고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는데, 그 와중에도 장난기가 그치지 않던 황석영은 자신의 직업이 약장수이고, 이름이 황석영이라고 밝혔다. 공병우는 "자네 같은 건달이 약이나 팔 일이지, 어찌 황석영 같은 작가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가?"라고 호통을 쳤다. 잘못하면 오히려 자신을 욕되게 할 것 같아서 황석영은 그냥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부친이 신의주시에서 상점을 운영했는데, 그 곳에서 일한 사람들 중 한 명이 손기정이다.

5. 함께 보기

공병우,《네이버캐스트》, 2014년 5월 1일 작성. 2014년 5월 9일 확인.
공병우 박사를 아시나요? - 따뜻한 하루
한글문화원 홈페이지
[스브스뉴스, 스브스스토리] 참된의사. 나는 내 식대로 행복하게 살아왔다 2016년 1월 30일 15:56
[조선일보] 정전협정문 작성한 '공병우 타자기' 아시나요


[1] 이북5도 기준 행정구역 상으로는 평안북도 벽동군 성남면 남상동. 성남면 전역에 김포 공씨가 많이 집성해 있다.[2] 박사학위논문 : 所謂中心性脈絡網膜炎(増田氏)の本態に関する実験的研究 (1936)[3] 김은식이 펴낸 공병우에 대한 어린이용 평전 제목이다.[4] 공병우는 자신의 성을 따서 병원 이름을 '공안과'로 붙였는데, 이 병원은 현재 아들 공영태 씨가 이어서 계속 운영하고 있다. 종로구 서린동 SK그룹 본사와 광화문우체국 사이의 하나은행 서린지점(구 외환은행)이 들어온 건물에 있다.[5] 이 두벌식은 정작 현대한글에 최적화된 자판도 아니었고, 당시에 이미 나와 있던 박영효-송계범 두벌식보다도 못한 물건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고.[6] 공병우 박사의 공안과와 한글학회는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7] 그러나 백괴사전에서는 몇몇 게임의 단축키가 세벌식에서 작동이 안 된다고 공병우에 대해 불평하기도 했다. 국민들이 게임에 빠질 것을 우려한 예언가라는 반응. 하지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경우는 세벌식도 지원한다[8] 황석영은 이미 1970년대부터 '조선의 3대 구라'로 꼽힐 만큼 재담이 뛰어났다. 요새는 '황구라'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를 싫어하는데 비슷한 이름의 김구라황우석이 또 '황구라'라고 불리는 등 독창성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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