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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헐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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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안장자
호머 베절릴 헐버트
訖法 | Homer Bezaleel Hulbert
파일:external/photo-media.daum-img.net/20100720165805250.jpg
한국명 헐벗, 흘법(訖法), 할보(轄甫)
출생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 주 뉴헤이븐
사망 1949년 8월 5일 (향년 86세)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 위생병원
(現 삼육서울병원)[1]
묘소 서울특별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선교사, 독립운동가, 교사
부모 아버지 캘빈 헐버트
어머니 메리 우드워드 헐버트
배우자 메이 헐버트
자녀 슬하 3남 2녀
학력 다트머스 대학교 대학원 (졸업)
종교 개신교 (감리교회)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금관문화훈장
약력 육영공원 교수
대한제국 학부 자문관
연희대학교 특임초빙교수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조선으로의 여정2.2. 조선의 외교관으로서2.3. 한글 연구에 기여2.4. 이후
3. 어록4. 기타5.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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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헐버트의 유언.[2]}}}

미국 출신의 선교사이자 고종의 독립운동을 보좌한 대한민국의 외국인 출신 독립운동가.

2. 생애

2.1. 출생과 조선으로의 여정

1863년 미국 버몬트[3] 뉴헤이븐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들버리 칼리지의 총장을 지낸 목사였고 어머니는 다트머스 대학교 창립자의 증손녀였다. 다트머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대를 수료한 뒤 1886년 길모어(George W. Gilmore) 부부, 벙커(Dalzell A. Bunker) 부부와 함께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영어 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고종의 요청에 응해 국내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점차 한국의 생도들이 학업에 열정을 보이지 않자 이에 실망하였고[4] 1891년 12월에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한국에서 사역하다 일시 귀국한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권유로 1893년 9월에 재입국하였다.

이때 그는 외국 서적의 한글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1896년, 구전으로만 전하는 형편이던 아리랑을 최초로 악보로 기록한 것도 그이다. 헐버트는 평소에도 역사, 문화, 언어, 예술분야에 해박했으며, 특히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남달랐다 한다. 그의 학술서적들도 그러한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재입국 후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당시 그는 언더우드 그리고 에비슨과 함께 고종을 보호한 3인의 외국인 중 한명이였다.[5] 이후 1896년 4월 서재필, 주시경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는데 지원하기도 했다. 독립신문은 헐버트가 책임자로 있던 삼문출판사에서 인쇄하였다.
1897년 5월 조선정부와 고용계약을 맺고 조선 최초의 사범대학인 한성사범학교의 책임자가 되었다.

2.2. 조선의 외교관으로서

조선에 대한 일제의 압박이 점점 심해지자 헐버트는 조선 내외의 정치, 외교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최측근의 자리에서 보좌, 자문의 역할을 하며, 미국 등 서방 강대국들과의 외교 관련 업무에도 힘썼다. 비슷하게 고종의 신임을 받고 이런저런 일을 맡으며 조선 주재 미국공사까지 역임했던 미국인 호러스 뉴턴 알렌은 조선의 국권 상실이 가시화되고 있던 1905년에 일찌감치 조선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었지만,[6] 그는 조선이 가장 약해진 시기에도 줄곧 한국의 자주 독립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하였다. 특히, 1905년에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 한 시도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한 사전 작업이 유명하다. 이런 공로로 3인의 헤이그 특사에 뒤이어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1906년, 고종은 헐버트를 '특별 위원'에 임명하여 외교 업무에 전권을 부여하고, 조선과 수교한 나라들 중 미국을 비롯한 9개국[7]의 국가 원수에게 1906년 6월 22일자로 된 을사늑약 무효를 선언하는 친서를 전달하게 했다. 그러나 헤이그 특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1907년 7월 20일자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여 헐버트의 밀사 임무는 중단되고 만다.

2.3. 한글 연구에 기여

또한 한글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 표기에 띄어쓰기쉼표, 마침표 같은 점찍기를 도입하고,[8] 고종에게 건의해 국문 연구소를 만들도록 했다. # 이 공을 인정받아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에 금관 문화 훈장을 받게 되어 그의 증손자가 행사에 참석해서 훈장을 대신 수여 받았다. 한글 학회에서는 한힌샘 주시경을 위시한 여러 근대 국문학자들 가운데 유일한 외국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또한 1892년 <한글>(The Korean Alphabet) 논문을 시작으로 한글과 한국 문화에 대한 논문을 발표해 해외 학술지에 활발히 기고하였으며, 1903년 미국 스미스소니언협회 연례 보고서에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재미있게도 헐버트는 평상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3년 만에 한국어를 익혔다고 한다. 이러한 한글연구를 바탕으로 세계 지리서를 한글로 간략하게 정리해 1889년에는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책을 쓴다. 이 책은 한국 최초의 세계 지리 교과서이기도 하다.

파일:사민필지1.png
사민필지의 세계전도와 아메리가 부분

2.4. 이후

파일:Dr. Homer B. Hubert, Dr. Paul F. Douglas, Syngman Rhee at the Korean Liberty Conference.jpg
1942년,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인 자유 대회에서. 왼쪽부터 호머 헐버트 박사, 아메리칸 대학교 총장 폴 더글라스(Paul F. Douglas) 박사, 구미위원부 의장 이승만.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제의 압력으로 미국으로 출국했으나, 이후에도 독립 활동에 힘을 보태는 등 한국을 잊지 않았다. 그는 1918년에는 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열릴 파리 강화 회의를 앞두고 여운형과 함께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과 함께 올리기도 했으며, 1942년에는 이승만한미협회에도 참여했다.

이후 2차대전에서 일본이 편을 든 추축국이 패전하면서 한국의 광복을 살아서 보게 되었고 1949년 7월 29일, 광복절을 맞아 국빈으로 한국에 초대되어 40여년만에 해방된 한국 땅을 밟게 되지만 기관지염으로 8월 5일에 별세했다. 당시에 한국으로 가는 배편에 오르면서 언론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한 달여에 가까운 여행은 역시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인 그에게는 너무 무리였는지 한국에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별세했다. 그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면서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던 그의 말은 지켜졌다.
파일:Syngman Rhee gave wreath to Homer Hulbert's grave.jpg 파일:Homer_hulbert_grave_with_mr_and_mrs_Rhee.png
1957년 12월 25일, 이승만의 평생의 동지이자 스승인 헐버트 박사가 잠든 양화진을 방문할 당시 영정전 비석에 올린 자필 예문과 헌화.[9]

헐버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 이승만 대통령묘비명을 써주겠다고 했지만 아쉽게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대신 작은 추모 비석을 헌정하였다. 이후 여전히 이름이 적히지 못한 채 한가운데가 비어 있던 묘비는 50년이 지난 1999년에 와서야 헐버트 기념 사업회 집행 위원장 정용호가 수차례에 걸쳐 청와대에 청원한 끝에 동년 8월 5일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로 '헐버트 박사의 묘' 일곱 글자를 새겨넣었다. 1999년 8월 4일 동아일보 13면 기사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을한의 취재기 《인간 이은》에 따르면, 제물포(인천) 항으로 배를 타고 방한한 뒤 차를 타고 서울로 이동하면서 여기가 제물포, 인천이라는 지명을 똑똑하게 구사했다고 하며, 자신이 떠나왔을 때보다 훨씬 발전했다며 연신 놀라워했다고 한다.

사실 헐버트는 고종황제내탕금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왔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강제로 폐위된 고종 황제는 헐버트를 통해 상하이 독일 은행에 숨겨두었던 내탕금을 되찾아 독립 운동에 투자할 예정이었고, 출국이 자유로웠던 헐버트에게 그것을 찾아오도록 부탁하였다. 독일은 러시아를 비롯해 대한제국을 지지하던 국가 중 하나였다. 이에 헐버트는 상해로 가서 내탕금을 찾으려 하였으나, 이미 고종의 내탕금 정보를 알고 있었던 일제가 가짜 증명서와 차용증으로 고종의 내탕금을 털어간 후였다. 설사 남아있었다 하더라도 독일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겪은 초인플레이션 문제 등으로 휴지 조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0] 그의 비자금 관련 서류는 현재 국립 정부 문서 보관서에 보관되어 있다.

헐버트는 천명을 다하기 전 이승만에게 내탕금을 되찾아서 황실에 돌려달라고 부탁한 후에 눈을 감았지만 조선 황실을 안 좋게 보던 이승만은 도리어 황실 재산을 모두 몰수해 국고로 환수했다. [11]

3. 어록

비방이 극에 달하고 정의가 빛을 잃은 이 때에
나의 큰 존경의 표시와 변함 없는 충성의 맹세로서
대한제국 황제 폐하에게

그리고

지금은 옛 한국이 낯선 한국에게 자리를 내주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으나
민족 정신이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은 죽음의 모습을 하지만'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 국민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호머 헐버트,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의 헌사, 1906년[12]}}}
조선인들은 즉흥곡의 명수이자 조선인들이 노래하면 워즈워스 같은 시인이 된다.
Koreans become poets like William Wordsworth when they sing, and they are master of the improvisation.
호머 헐버트의 논문, 《조선의 성악(Korean Vocal Music)》中.
오래지 않아 한국은 세계에 우뚝 설 것이다.
Before long, Korea will stand tall in the world.
호머 헐버트, 《한국사(History of Korea)》, 1905년


4. 기타

  • 저서로는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와 《한국사(History of Korea)》, 《한국어와 드라비다어의 비교 연구(Comparatives Grammer of Korean and Dravidian, A Search for the Siverian Klondike)》, 《대동기년》 등이 있다.
  • 조선 세종에 대해서 고대 페니키아 문자를 그리스에 전한 카드머스 왕자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면서 인류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했다.#
  • 헐버트는 중국과 일본도 한글을 공식문자로 사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중국에 한글 사용을 제안하기도 했다.#
  • 조선의 번역어이자 관용적 어구로 쓰이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대해서도 번역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서광이 비치는 아름다운 아침’이라는 뜻인 ‘Radiant Morning’이나 ‘Morning Radiance’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1950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외국인 대상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 2014년 한글날에 한글 보전과 보급에 헌신한 공로로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 2014년 그의 친동생 아처 헐버트(Archer Butler Hulbert)가 생전에 구한말 당시의 한국에서 수집한 각종 자료 모음인 '아처 헐버트 컬렉션'이 공개되었다.
  • 헐버트는 고종을 보좌하며 다양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고종을 폄하하는 일제 식민사관을 타파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그가 고종의 독립운동을 도운 것도 식민사관 반박에 효과적이다. 2022년 문화재청에서 고종의 근대화와 애민정신, 독립운동 업적을 알리기 위해 석조전에 연 황제 고종 전시회에서도 헐버트가 소개될 정도다.

5. 대중매체에서

  • 2018년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등장 인물 '요셉 스텐슨'의 모티브로 추정된다. 대한제국을 도운 미국인 선교사라는 점, 고종의 밀사로 활동했으며 한국 에 묻혔다는 점 등 다수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사인이 요셉 스텐슨은 살해당한 것과 헐버트는 자연사라는 것 정도.


[1] 기관지염으로 인해 병사했다.[2] 양화진에 있는 그의 묘비에 쓰여 있다. 지금이나 당시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미권에서는 구국영웅, 손꼽히는 큰 업적을 세운 위인들이나 묻힐 수 있는 대단히 영예로운 장소로 꼽힌다. 이 곳의 무덤들은 왕족들조차 함부로 묻힐 수 없는 곳으로 헐버트가 얼마나 한국에 대해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3] 같은 버몬트 출신인 타일러 라쉬의 인터뷰에 따르면, 버몬트 지역은 자유와 인권에 대한 인식이 유독 강하다고 한다. #[4] 당시 육영공원의 학생중 대부분이 고급 양반 가문의 자제들인 걸 생각하면, 부모로부터 내려온 보수성과 성리학적 이념과 충돌되는 서구식 교육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듯 하다. 유일하게 열의를 보였던 학생 이완용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배운 바를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사용하였다.[5] 당시 고종은 거듭된 암살 위협으로 조선 주재 외교관들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했었는데, 이때 자원한것이 헐버트였다. 이들은 3인 1조로 활동했으며, 독살을 막기 위해 음식은 정동의 언더우드의 사가에서 조리했다 한다.[6] 그렇다고 해서 일본에 협조하거나 한 건 아니고, 고종의 풍경궁 건설이나 캐딜락 자동차 구입 등의 본인 마음에 들지 않는 정책을 보면서 정이 떨어져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낸 것에 가깝다. 다만 정이 있는 대로 떨어지긴 했는지 금광 채굴권 등을 챙겨서 미국에 넘긴 것은 사실이다.[7] 독일, 러시아, 미국, 벨기에, 영국, 오스트리아 - 헝가리, 이탈리아, 청나라, 프랑스[8] 이런 서구 언어식 표기 요소가 도입된 덕분에, 한국인은 한글이라는 단일 문자만 사용함에도 가독성을 위한 장치가 마련이 되어 상당히 빠른 독서 속도가 가능해졌으며, 2010년대 이후 한류가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상황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한 한국어 교육이 비교적 수월해지는 이점이 생겼다.[9] 오른쪽에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 여사가 살짝 보인다[10] 고종 황제가 예치한 내탕금 액수는 52만 마르크였는데 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에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우표 1장 값도 안 될 정도로 가치가 폭락했다. 하지만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의 증명에 걸렸던 상금 10만 마르크가 1996년에 4만 달러쯤 했으므로 그것을 기준으로 비교하면 현재 고종 황제의 내탕금은 디노미네이션을 거쳤더라도 2억 원 정도 될 것이다.[11] 이승만은 1954년 8월 구황실재산법을 제정하여, 영구보존재산과(1조) 단,묘,궁,릉과 기타 왕실 미술품과 역사적 기념품 등 황실재산을 전부 몰수했으며(2조), 황실 소유의 1억5천만평 토지나 금전도 모두 매각시켰다. 급하게 매각을 시키다 보니, 궁역과 왕릉 권역, 사직단, 환구단 등 복원기록을 미처 남기지 못하고 실행된 경우도 있어 후대 복원에 애로사항이 있기도 했다. 황실에 대한 이승만과 국민감정은 뒤로하더라도 당시 법으로 명시된 국유화로 인한 보상과 재산권을 보장하지 않은 점은 이후에도 법적인 쟁점으로 남았다.[12] Dedicated/To his majesty the Emperor of Korea/As a token of high esteem and a pledge of unwavering allegiance,/at a time when calumny has done its worst and justice has suffered an eclipse/and/To the Korean People/who are now witnessing the passing of old Korea to give place to a new,/when the spirit of the nation, quickened by the touch of fire,/shall have proved that though "sleep is the image of death" it is not death itself[13] 다만 크롬웰은 철저한 금욕주의자인 반면 태종은 사냥이며 여색이며 놀고 싶은 건 칼같이 챙겨서 놀았다는 것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