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4-08 18:28:07

김혁(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김혁
金赫[1]으로 표기된 문헌도 있다.]
파일:김혁2.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김학소(金學韶)
이명 김오석(金五石)
오석(吾石, 烏石)
본관 경주 김씨[2]
출생 1875년 10월 6일[3]
경기도 용인현 기곡면 농사동
(현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농서동)
사망 1939년 4월 23일 (향년 64세)
서대문형무소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32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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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75년 10월 6일 경기도 용인현 기곡면 농사동(현 용인시 기흥구 농서동)의 양반가에서 대한제국 때 법부 참서관을 지낸 아버지 김태식(金泰植)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현숙[4] 사이의 외아들태어났다.

8세 때부터 10년간 고향 용인현에서 맹보순(孟輔淳)의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이후 한성부로 이주하여 북서 가회방 재동계 맹현(孟峴)[5]에 거주했다. 1898년 6월 22일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생도로 뽑혀 사관교육을 받았으며, 1900년 1월 17일 졸업하고 같은 달 19일 육군 참위(參尉)로 임관하였다.

그해 7월 23일 그는 대한제국군 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에 배속되었고 1901년 7월 9일 6품으로 승륙(陞六)되었다. 1902년 4월 24일 대한제국군 시위대 제1연대 제3대대로 옮겨졌고 1903년 4월 6일에는 육군 부위(副尉)로 승진되었으며, 1905년 4월 18일 시위대 보병 제1연대 제3대대에 배속되었다. 1906년 4월 22일 동 소속 대대에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육군 정위(正尉)를 거쳐 참령(參領)으로 진급했다가 1907년 8월 대한제국군이 해산을 당하자 일제와 싸울 것을 결심하고, 고향인 용인에 돌아가서 청년들을 규합,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용인군에서 만세운동에 가담한 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무송현(撫松縣)[6]으로 망명하였다.

같은 해 8월 김호(金虎) 등과 함께 수백 명의 애국청년들을 모아 흥업단(興業團)을 조직, 단장에 김호를 추대하고 김혁은 부단장으로서 항일투쟁에 전력하였다. 1920년 9월경에는 봉천성 동변도 안도현(安圖縣)[7] 삼인방(三人坊)에서 홍범도·지청천 등 수백 명의 동지들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하고 부단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그해 10월 청산리 전투를 겪은 다음 이듬해인 1921년 1월 길림성 의란도(依蘭道) 밀산현(密山縣)[8]에서 서일·홍범도·지청천·김좌진 등과 합세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용군·북로군정서·대한독립단·광복단 등 만주에서 활동하던 10개 독립군단체를 통합,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이때 군사부장에 선임되어 노령(露領)에서 항전하다 자유시 참변을 겪었다.

1925년 3월 15일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영안현(寧安縣)[9]에서 김좌진과 함께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고 중앙위원회를 열어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이후 신민부가 길림성 의란도 목릉현(穆棱縣)[10]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자, 교장을 겸임하여[11] 500여 명의 사관생도를 양성, 독립운동 요원을 안정적으로 배출하였다.

그 뒤 조선혁명군을 창설하여 중국구국군(中國救國軍)과 합작하고 중한연합군(中韓聯合軍)을 편성, 항전하였다. 1927년 2월 중동선(中東線: 동청철도) 석두하자(石頭河子)[12]에서 신민부 총회를 개최하던 중 일본과 만주 경찰 합동수색대의 기습을 받고 항전하다, 박경순(朴敬淳)·유민식(兪民植)·이춘섭(李春燮) 등 1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1928년 3월 20일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 해 4월 4일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1929년 6월 5일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징역 7년형을 구형받았다. 이후 최종 판결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평양감옥에서 복역하였다. 그 뒤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1935년 5월 28일 병으로 가출옥했다. 이후에는 경기도 경성부 평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112번지 돈의문 부근에서 거주하다가 옥고의 여독으로 1939년 4월 23일 순국했다. 향년 64세.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으며, 그의 유해는 1973년 10월 31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1985년에는 '오석 김혁선생 독립운동기념비'가 건립됐으며 2008년 용인시 기흥구 구갈동 강남대학교 부근에 그의 이름을 딴 '김혁공원'이 조성되었다.#


[1] [2] #. 계림군파-갈천공파 21세 학(學) 관(冠) 항렬. 아버지 김태식(金泰植)은 20세 식(植) 항렬.[3]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0월 16일로 기재되어 있으나,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는 10월 6일로 기재되어 있어 이를 따른다.[4] 윤헌식(尹憲植)의 딸이다.[5]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6]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바이산시 푸쑹현(撫松縣).[7]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안투현.[8]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지시시 미산시(密山市).[9]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닝안시(寧安市).[10]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무링시(穆棱市).[11] 부교장은 당시 신민부 군사위원장을 맡았던 김좌진 장군이었다.[12]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상즈시(尙志市) 스터우허쯔진(石頭河子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