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23:48:09

돈의문

한양도성의 성문 및 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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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0호 한양도성
돈의문
敦義門 | Donuimun
<colbgcolor=#bf1400><colcolor=#fff>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112번지[1]
건축시기 1422년 (창건)
1915년 (훼철)
2035년 (예정)
시설 1동
이칭 서대문(西大門)
신문(新門)
파일:external/munhwai.com/14081940592185.jpg
파일:돈의문 엽서.jpg
<colbgcolor=#bf1400> 철거 이전의 돈의문

1. 개요2. 이름과 위치3. 역사4. 복원 시도

[clearfix]

1. 개요

조선 한양도성의 사대문(四大門) 중 서문(西門)이었던 건축물이다. 조선 시대한성부에서 평안도 의주부까지 이르는 제1간선도로와 강화도로 가는 간선도로의 시작점이었으며, 외교사절이 오면 국왕이 직접 마중을 나가고 조선 외교사절이 중국으로 갈 때 이용하는 중요한 문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전차 선로를 놓는다는 명분으로 철거되어 소실된 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돈의문 터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112번지에 해당한다.

2. 이름과 위치

파일:돈의문_현판.png
파일:external/www.polinews.co.kr/focus_103983_2.jpg
돈의문 현판. 현재까지 잔존하는 돈의문의 유일한 흔적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2]
'돈의문(敦義門)' 뜻은 '의(義)를 두텁게 하는(敦) 문(門)'이다. '의(義)' 자는 전통적으로 서쪽을 가리켰기 때문에[3] 돈의문 이름 뜻을 '서쪽을 두텁게 하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명(異名)은 '서대문(西大門)'이다. 한양도성의 서쪽 대문이란 뜻이다. 이때문에 서울 서대문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중구 정동 현 경향신문 사옥 앞 정동사거리 건너편의 현재 행정구역인 종로구 평동에 위치한다. 중구 서쪽 지역 및 종로구 서부 지역[4]은 1975년에 서대문구에서 중구 및 종로구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1975년까지는 실제로 서대문구에 돈의문 터가 있었다. 동대문동대문구와 유사한[5] 경우이다.

3. 역사

1396년 한양의 2차 성곽공사를 마무리할 때 8개 성문을 지었는데, 돈의문도 이때 세워졌다. 당시 위치는 지금의 독립문 근처 사직동 고개쯤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태종 13년(1413)에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풍수적으로 돈의문의 자리가 좋지 않다고 주장하여 돈의문이 폐쇄되었다.[6]
경복궁의 좌우 팔과 같은 지역의 지맥을 손상시키지 않으려면 사람과 말의 통행을 금지시켜야 합니다.
ㅡ 조선왕조실록 1413년 6월 19일
태종은 대신할 문을 어디에 세울지 의정부에 명하여 찾게 했는데, 이때 태종의 대표적 권신 안성군 이숙번의 집 앞에 있는 옛길을 따라서 문을 세우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자 이숙번은 상왕 정종이 기거하는 인덕궁 앞 작은 동네가 길을 새로 내어 문을 설치할 만한 곳이라고 다른 의견을 내자 조정이 그대로 따라 서전문(西箭門)을 세웠다. 서전문은 경희궁이 있던 서쪽 언덕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7]

세종 4년(1422)에 세종은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오늘날 신문로 언덕 위에 새롭게 문을 세운 뒤 이름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 하였다. 이 문이 바로 지금 우리가 아는 그 돈의문이다. 백성들은 세종이 세운 돈의문을 '새로 세운 문'이라는 뜻으로 '새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개화기 정동에 들어선 새문안교회도 '새문 안에 세운 교회'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육조거리에서 돈의문까지 잇는 길을 새문안길(신문로)라 불렀으며, 이게 현 도로명 체계에서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새문'이라는 호칭이 '막을 색(塞)'에서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권신 이숙번은 돈의문 근처에 큰 집을 짓고 살았는데, 문으로 사람이 통행하고 마소가 오가므로 시끄럽다는 이유로 문을 막아버리고 통행을 금했다 하여 색문(塞門)[8]이라 부르고 부근 마을을 색문동(塞門洞)이라 하였는데, 후에 새문, 새문동으로 음이 변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 돈의문의 성문과 성루가 낡자 숙종 37년(1711)에 다시 지었다. 이 당시 돈의문으로 어가가 지나다녔기 때문에 규모를 크게 할지 논의가 있었는데, 남아있던 석축의 폭이 너무 좁고 수평이 안 맞는 등 구조적인 문제가 있으며 정문인 흥인문, 숭례문과 격이 다르다는 등의 여러 사정으로 단층 문루로 짓게 된다.[9]



시간은 흘러 일제강점기 1915년, 일제는 경성(서울)을 개발하며 전차궤도를 복선화[10]하려 했는데 서쪽 돈의문과 동쪽 흥인지문이 방해가 되었다. 총독부가 처음에는 둘 다 헐기로 했으나,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로 헐지 않고 문 양쪽 성벽만 없애기로 결정해 전차 노선을 유지하였고 돈의문만 철거했다.

그렇게 조선 초부터 약 500년 간 서쪽 대문 역할을 하던 돈의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총독부 토목국 조사과에서는 돈의문의 경매입찰은 진행하였고 염덕기라는 사람에게 205원 50전에 낙찰되었다.
ㅡ 1915년 3월 7일. 매일신보
그 이후 철거된 돈의문의 기와와 목재는 경매에 부처져 염덕기(廉德基)라는 자에게 205원 50전에 팔렸다. 당시 쌀 한가마니가 16원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시세로 치면 200만원. 나머지 체성의 석재와 주변 성벽은 도로 공사 자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철거과정에서 돈의문의 편액(현판)만은 남았는데, 창덕궁의 행각에 보관해 오다가 1992년에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 수장고를 거쳐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되었고, 2014년부터 한양도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4. 복원 시도

파일:external/imgnews.naver.com/20091022000010_0.jpg
<colbgcolor=#bf1400> 돈의문 가상 복원도
숭례문흥인지문, 숙정문만이 남아있던 탓인지, 돈의문의 이명인 서대문은 각종 지명에 남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서대문은 어디 있는지 관심도 없는 비운의 대문이 되었다.

복원에 대한 논의 끝에 서울특별시는 서대문고가도로를 철거하고 2013년 완공을 목표로 돈의문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2015년까지 서울 성곽도 복원될 예정이었으며, 그러면 복원된 숭례문과 함께 4대문과 성곽이 복원되는 셈이었다. 이는 돈의문 복원을 위한 자료수집 중에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돈의문 현판을 발견하였기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돈의문 외형 사진 몇 장, 현판 말고는 복원 근거 자료가 전무하다는 의견으로 복원이 불가능이다.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숭례문이나 흥인지문과는 다르게 한가운데에 크게 문이 있고 성루는 (2층 누각인 숭례문, 흥인지문과 달리) 단층 누각으로 되었다는 게 중론이다. 교통체증, 교통문제, 예산문제, 토지문제 등 현실적인 문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항이며, 복원한다면 서울적십자병원도 철거하고 이전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인근의 경희궁마저 2004년 이후 사실상 복원이 중단되었으므로 돈의문 복원은 끝내 불가능하게 되었다. 굳이 복원하려 한다면 혜화문의 사례 처럼 원래 위치와는 다른 위치에 돈의문을 복원하는 방법 밖에 없어 보인다.

한편 2018년 12월 6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우미건설, 문화재청, 서울특별시, 제일기획이 현실적인 문제를 감안하여 돈의문의 증강현실 복원을 결정, MOU를 체결했다. 약 8개월 뒤인 2019년 8월 20일 증강현실 복원이 완료되어 터로 알려진 정동사거리에 돈의문 조형물을 설치하여 스마트폰의 증강현실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돈의문을 현실감 있게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기사

강북삼성병원 아래 나무판을 짜맞춰 세운 담장이 있는데 옛 돈의문 자리임을 표시하기 위해 설치한 공공미술 작품 '보이지 않는 문'이다.[11] 그리고 2010년쯤엔 새문안길과 정동길이 만나는 사거리에 돈의문 터임을 알리는 하얀색 성돌 모양의 페인트를 도로에 칠했는데 도로를 재포장하면서 지워졌다.

2023년, 서울시가 장기적으로 돈의문의 실물복원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기사 관리비로 매년 2-30억 원 가량이 투입되는 박원순 시장 시절에 건설한 돈의문 박물관마을을 철거하고 그 일대에 짓겠다는 추가보도가 나왔다. 기사 그러나 돈의문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 터에 도로와 각종 건축물이 들어섰기 때문에, 교통 문제나 토지 보상 문제 등이 산적해 있는 상황이라 복원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른다.

2024년, 서울시가 돈의문 복원계획을 발표했다. 기사 먼저 1단계로 돈의문박물관마을을 철거한 후 공원화를 하며 2단계로 새문안로를 지하화하고 그위에 돈의문 복원과 함께 경희궁 복원의 일환으로 흥화문과 숭의문을 제자리에 복원할 예정이다.

[1] 이 자리에 돈의문터가 있다.[2] 현판 뒷면에는
辛卯十一月十五日 幼學臣 趙潤德 奉敎書, 己巳二月十八日 營建所改造
신묘년(1711) 11월 15일 유학 조윤덕이 쓰고, 기사년(1749) 2월 18일 영건소에서 개조
라는 글이 음각되었다.
[3] 실제로 한양도성에서 돈의문말고도 서쪽에 있는 문들에는 다 '의(義)' 자가 들어가있다. (서북문), (서소문) 등.[4] 교남동, 평창동, 부암동, 무악동[5] 흥인지문은 지번주소 상 종로6가에 속한다. 즉, 1975년 창신동과 숭인동이 종로구로 편입되기 이전부터 종로구 소속이었다는 것.[6] 같은 이유로 창의문과 숙정문도 함께 폐쇄되었다.[7] 아무리 바지사장이었다지만 당시 공정왕이던 정종은 엄연한 상왕이며 왕실 어른 중 한사람인데 그런 그를 찍어누른 이숙번이 당시 얼마나 권세가 강하고 오만했는지 알 수 있다. 일단 태종은 묵인해줬으나 훗날 이숙번을 숙청하는데 왕실을 우습게 여겼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을 이 사건도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8] 그 후로 사람들이 이숙번의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색문가'. 즉 성문을 막아버린 집안이라며 손가락질했다고 전한다.[9] 돈의문은 언제부터인가 문루가 없는 상태였다. 이에 대해선 왜란 당시 소실되었다는 등의 추측이 오간다. 그런데 숙종 대 개수 당시 형조판서 김석연(金錫衍, 1648~1723)은 홍예 석축의 구조상 원래부터 문루가 없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요약하자면 문루가 있는 성문은 석축 안팎에 홍예를 틀고 사이에는 판자를 덮는 것이 일반적인데, 돈의문은 전부 홍예로 채워져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국초에 모든 성문에 문루를 건립했다는 실록 기사#와 배치되는 주장이여서,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돈의문 문루 건립에 관한 김석연의 상소, 『승정원일기』 숙종 37년 7월 11일 기사[10] 당시 한양의 전차 노선은 마포에서 돈의문, 흥인지문을 지나 청량리까지 운행되었다. 현재의 수도권 전철 5호선 마포역 ~ 종로3가역, 수도권 전철 1호선 종로3가역 ~ 청량리역 구간이 이에 해당된다.[11] 돈의문 터 1422~1915 라고 쓰여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