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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별궁 인덕궁 仁德宮 | ||
설립시기 | 1401년 | |
해체시기 | 1419년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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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2대 왕 정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뒤 살던 별궁. 그래서 정종을 일컫는 궁호이기도 했다.2. 역사
1400년 정종이 태종에게 양위한 뒤, 1401년 당시 수도였던 개경에 처음 지었다.[1], 그러나 1405년 태종이 다시 한성으로 돌아가면서 옮겨 다시 건립했다.위치는 지금의 경희궁과 사직단 사이 언저리인 듯 하다.[2]
1412년 정종의 왕비 정안왕후 김씨가, 그리고 1419년 정종이 이 곳에서 승하했으며 정종의 빈전과 혼전을 인덕궁에 두었다.
이후 관련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3. 기타
- 태종 시절 안하무인으로 권세를 누린 이숙번에게 피해를 입기도 했다. 1413년에 풍수가 최양선이 서쪽 대문인 돈의문의 자리가 안좋다고 주장해 돈의문을 폐쇄했다. 대신 새로 통행할 수 있는 문을 만들어야 했는데 이숙번의 집 앞이 좋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자 당연히 자기 집 앞이 시끄러워질 것을 꺼린 이숙번이 친절하게도 "인덕궁 앞 동네에 문 세우죠."라고 했다. 당시 그의 권세가 대단했기에 조정은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이 때 세운 문이 서전문(西箭門). 여기서 내 집 앞이 조용하자고 상왕 집 앞이 시끄러워도 상관없다는 막무가내인 그의 태도와, 저럴 정도로 권력이 굉장히 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태종이 이를 묵과했던 건 이숙번의 능력과 공훈도 있지만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면 정종의 권위를 낮춰야하는 점도 있어서 결국 이숙번의 뜻대로 됐으나 사적으로는 정종과 화목했던만큼 이때부터 태종은 이숙번을 숙청 대상으로 찍어뒀을 걸로 보인다.
결국 이숙번이 실각하고 세종이 즉위한 후에 세종은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오늘날 강북삼성병원 앞 정동 사거리 자리에 새롭게 문을 세운 뒤 이름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 하였다. 그 문이 바로 우리가 아는 그 돈의문이다. 돈의문은 1915년에 헐리고 현재는 도로가 들어서있다.
- 1418년 이후 태종이 인덕궁에 들어갈 때는 숭례문을 지나 서전문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도 서전문으로 나와 숭례문을 통해 돌아갔다고 한다. 왕궁과 인덕궁 둘 다 같은 한양도성 안에 있는데 굳이 저랬던 데에는 가슴아픈 사연이 있다. 1418년 넷째 아들 성녕대군이 일찍 죽었는데 그의 집이 인덕궁 가는 길에 있어 가다가 보게 되면 슬퍼지기 때문이었다.
[1] 1394년 지금의 서울인 한성부로 천도했으나 1399년 정종이 다시 개경으로 수도를 옮겼다.[2] 당시에는 경희궁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경희궁 경내에 해당될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