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특별시 중구의 법정동
貞洞자세한 내용은 중구(서울특별시)/행정 문서 참고하십시오.
소공동에서 관할하고 있다. 덕수궁이 이 동네에 있으며 각종 역사 깊은 건물들이 이곳에 몰려있어서 관광객들이 많이 방문하는 곳이다. 원래의 동네 이름은 정릉동(!)인데 성북구 정릉동과 지명 유래가 같다. 원래 이 동네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였던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이 있던 동네여서 정릉동이 됐지만 태종 이방원이 무덤을 현재의 정릉동으로 옮겨버리면서 정릉동에 정릉이 없는 상태가 됐다. 일제강점기 이후 경성부 내 동명 정리를 하면서 중구 정릉동을 정동으로 개명하면서 현재에 이른다. 정동길이 유명하다.
2. 대전광역시 동구의 법정동
{{{#!wiki style="margin:-12px -0px" | <tablebordercolor=#2d2926> | }}}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color: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 행정동 | 법정동 | |||||||||
<colbgcolor=#bdb76b> 중앙동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원동 | 정동 | 중동 | 소제동 | 신안동 | }}} | ||||
신인동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신흥동 | 인동 | }}} | |||||||
효동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효동 | 천동 | 구청 가오동 | }}} | ||||||
판암1동 | {{{#!wiki style="margin: -16px -11px -5px;" | }}} 판암동 | |||||||||
판암2동 | |||||||||||
대동 | 대동 | ||||||||||
용운동 | 용운동 | ||||||||||
자양동 | 자양동 | ||||||||||
가양1, 2동 | 가양동 | ||||||||||
용전동 | 용전동 | ||||||||||
성남동 | 성남동 | ||||||||||
홍도동 | 홍도동 | ||||||||||
삼성동 | 삼성동 | ||||||||||
대청동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추동 | 효평동 | 직동 | 용계동 | 마산동 | |||||
세천동 | 신촌동 | 사성동 | 내탑동 | 오동 | |||||||
주촌동 | 신상동 | 신하동 | 비룡동 | 주산동 | }}} | ||||||
산내동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낭월동 | 대별동 | 이사동 | 대성동 | 장척동 | |||||
소호동 | 구도동 | 삼괴동 | 상소동 | 하소동 | }}} |
행정동 중앙동에서 관할하며, 대전역이 정동 1-1번지이다. 이 점에서 알 수 있듯 이 지역은 대전이라는 지역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라고 볼 수 있는데, 애초에 대전역이 처음 세워지던 시점에 이 마을 이름이 대전리였다.
3. 심리학 용어
情動affect
대중적인 의미의 감정에 어느 정도 대응하는 학술용어. 외부 자극에 대하여 생리적인 수준에서부터 심리적인 수준에 이르는 정적(+)이거나 부적(-)인 반응을 의미하며, 표정이나 행동으로 굳이 나타날 필요는 없다. 만일 외현적 표현이 더해질 경우 이는 따로 정서(emotion)라고 불리나, 때로는 affect를 정서로 번역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국내 학계에 번역 논란을 초래하기도 한다.
한편 feeling은 보통 "느낌" 으로 번역되며, 심리학에서 이 단어는 막연하게 좋거나 나쁜 것으로서 설명을 기다리고 있는 느낌을 의미한다. 심리학계에는 비슷한 다른 개념으로서 mood가 있는데, 이는 보통 "기분" 으로 번역되며, 외적 자극에 귀인되지 않으면서 장기적으로 개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내적 상태이다.
4. 철학 용어
일반적으로는 일시적인 감정의 변화, 즉 충동 혹은 정념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였지만, 니체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하는 철학자들은 정동 개념을 본격적으로 철학적 용어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스피노자, 니체, 들뢰즈, 푸코의 사상에서 정동 개념의 활용을 발견할 수 있다.바뤼흐 스피노자의 정동 개념을 이해하려면 먼저 코나투스(Conatus)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코나투스는 '자기보존의 본능' 혹은 '자기파괴를 부정하는 본능'이라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이다. 스피노자의 시대는 과학혁명이 막 태동하던 시기였고, 근대적 역학은 관성의 법칙이라는 개념을 낳았다. 스피노자는 역학적 법칙인 관성의 법칙처럼 존재는 자기파괴를 부정한다는 존재의 법칙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신은 완전하며 어떤 것도 새로 창조되거나 파괴될 수 없기 때문에, 스피노자는 모든 유한한 양태들이 코나투스를 '현행적 질서'로 갖는다고 표현했다.
이 코나투스가 인간에게 드러날 때 스피노자는 그것을 '욕망(Appetitus)'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욕망이란 것은 인간이 그 자신의 파괴를 부정하고자하는 본성 그 자체이다. 이 본성에 반하는 것, 즉 자기 자신의 역량을 깎아내리고 파괴하려 하는 것에 대해 인간은 슬픔을 느낀다. 반대로 이 본성과 합치하는 것에 대해서 인간은 기쁨을 느낀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정동(Affectus) 이론의 개관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에서 정동(Affekt)이라는 용어는 힘에의 의지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즉, 더 나은 등급(Rang)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정념(Pathos)이 바로 니체의 정동이며, 간혹 Affekt를 정동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논쟁이 니체 연구자들 사이에서 진행되고는 한다. 니체 연구자들은 대체로 Affekt를 정동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아펙트라고 그대로 옮기는 것을 선호하는데, 그것이 단순히 개인의 감정 변화를 기술하기보다는 역사와 시대의 근거(Ursprung)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세계의 근거를 세계 바깥에서, 다시 말해 형이상학에서 찾기보다는 세계 내에서 찾고 있으며, 세계 내의 수많은 정동들에 의한 파괴와 창조의 반복이 시대를 구분짓는다고 쓰고 있다. 따라서 니체의 세계관을 개략적으로 기술해본다면, 정동들에 의해 생성되는 세계가 하나의 시대가 되고, 그 시대를 근거로 해서 새로운 시대가 이어지며, 그러한 역사가 영원히 회귀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미셸 푸코는 그의 주요 저작들을 통해 이 정동 개념을 재해석하고 있다. 푸코는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을 앎의 의지라는 개념으로 변용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지식욕은 권력욕과 거의 구분될 수 없으며, 오히려 힘에의 의지는 언제나 앎의 의지를 동반하는 것이다.
『성의 역사』는 앎의 의지라는 개념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그의 저작으로, 서구의 부르주아 사회는 성을 금기시하는 척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끊임없이 고백하도록 함으로써 앎의 의지를 충족시켜왔다. 성은 금지되어온 것이면서 동시에 공공연한 비밀처럼 떠도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에 관한 지식은 충족되었으며, 산아제한 정책이나 여성의 대상화 등을 비롯한 '성의 과학'이 성립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압제하지 않고 오히려 고백하도록 함으로써 권력은 성의 미시적 차원까지 뿌리를 내리게 된다. 『감시와 처벌』에서 언급되고 있는 판옵티콘의 구조 역시 이와 유사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판옵티콘의 감시 구조에는 주체가 없다. 거기에 있는 것은 피감시자들의 모든 것을 드러내보이는 앎의 구조다.
이처럼 푸코는 정동이론이라는 바탕 하에서, 권력의 구조가 변모해온 과정을 조명한다. 그에 따르면 금지와 압제에 기반을 둔 고대의 권력 구조는 죽음을 명령하거나 혹은 살도록 방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개인을 제어하는 권력의 장치가 보다 교묘해지면서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권력은 더는 죽음을 명령할 필요가 없으며, 죽음으로 권력을 실현하는 주체는 사라졌다. 그러므로 이제 권력의 대상은 죽음에서 삶으로 이동한다. 변화된 권력은 삶을 명령하고 죽음으로 소외시킨다. 이것이 푸코의 정동이론을 통해 본 권력의 계보이다.
니체와 푸코의 정동에 관한 분석은 이후 페미니즘 진영으로 역시 흡수되었으며, 아래 문단의 정동 개념은 사회심리학 용어로서의 정동뿐만 아니라 철학용어로서의 정동 개념에도 영향을 받았다.
5. 사회문화 비평 용어
구조적 정동, 정치적 정동이라고도 하며, 여기서는 일반적인 정동 중에서도 사회구조적 및 정치적 효과를 갖는 정동을 말한다.정동이라는 단어를 학술적으로 활용하는 심리학 및 사회학, 비판이론 및 문화비평 담론들에서는 제각기 서로 다른 맥락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구조적) 정동이라는 표현은 특히 정신분석학, 그중에서도 라캉 철학 등을 배경으로 하는 문화비평 이론가들이 즐겨 동원하는 용어이다. 이때 정동은 말 그대로 실재하는 사회적 구조를 가정하는 분석 수준(level of analysis)을 갖는다. 따라서 나무위키에 한정하여, 이제부터는 상단의 문단2의 용어는 "개인적 정동" 으로, 구조적 분석 수준을 포함하는 정동은 따로 "구조적 정동" 으로 부름으로써 구분하기로 하겠다.
갈등론적인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의 세계관을 상정하는 사회비판 담론의 흐름에서 구조적 정동은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고, 이는 최근의 신자유주의 및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으로서 즐겨 활용되었다. 이에 따르면 사회구조적 위치와 권력을 일정하게 점유하는 계급에서는 그들의 위치의 특성을 반영하는 정동을 타자에게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이는 정동의 본질이 아니라 정동의 사회정치적 효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라 아메드의 제안과도 상통하며, 사회구조적인 수준에서 이해되는 것이므로 특정 개인이 타 계급의 개인에게 보이는 개인적인 정동과는 무관할 수 있다. 예컨대 하단에 설명하게 될 혐오 정동의 경우, 일반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개인적인 수준의 적개심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억압과 압제를 반영한다.
구조적 정동에는 개인의 정동만큼이나 매우 다양한 사례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가장 자주 이슈가 되곤 하는 혐오와 분노를 우선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이하의 서술은 r.1 기준으로 임옥희(2015)의 문헌[1]을 일정 부분 참고하였다. 더 많은 개관과 리뷰를 원한다면 문화평론가 손희정(2017)의 《페미니즘 리부트》, 여성학자 사라 아메드(S.Ahmed)의 《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 를, 그리고 법학적 논의를 위해서는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 도서를 참고할 수 있다.
5.1. 혐오
그간 가장 비상한 관심을 받았던 구조적 정동은 역시나 혐오[2]일 것이다. 이는 흔히 타자에 대한 대상화(또는 객체화; objectification)를 지칭하며, 자신과 상대방의 주체로서의 동등함을 부정하고, 오염의 메타포를 포함한다. 실존주의 철학의 거장 장폴 사르트르는 자신의 저술 속에서, 주체가 불멸과 초월로서의 실존을 지향할 때 그것은 물질성에 대한 혐오를 갖는다고 하였으며, 특히 이는 물질성이 갖는 속성인 점액성에 대한 혐오를 포함한다고 하였다. 체액을 상기하는 것은 인간의 주체로서의 초월과 불멸을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계보를 이어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이를 페미니즘과 접목시켜서 주체로서의 남성은 자신에게 침범하는 객체로서의 물질성을 갖는 여성들을 대상화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남성들은 여성의 몸과 그 여성성을 끈적거리는 점액으로 이해한다는 설명이 가능해지게 되며, 이를 다시 말하면 여성만의 신체적 특징인 월경과 질, 분만 등에 대한 끈적거리는 이미지와 연결됨으로써 여성의 신체에 대한 혐오가 형성된다고도 볼 수 있게 된다.[3]마사 누스바움은 이렇게 만들어진 혐오감이 객체화된 타자에게 투사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투사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면 차라리 "우웩 에퉤퉤!"에 가까울 정도의 급격한 반응이라고도 볼 수 있다. 초월과 불멸을 목표로 삼은 주체들은 자신의 영역에 침입해 들어온 혐오감의 근원을 "내뱉고", "추방시키며", "쫓아내 버려야 할" 긴급한 필요성을 느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함께 오염되고 썩어 문드러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의 권력적 우위항의 강자들에게 여성'스러움', 외국인 노동자'스러움', 흑인'다움', 장애인'스러움', 동성애자'스러움' 들은 일종의 기생충이자 이물질과도 같은 것으로, 이것이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넘어서 침입해 들어오는 것은 주체에게 극도의 위협감을 줄 수 있다. 가장 직접적인 투사의 방식은, 결국 이런 성질들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 것이다.
"Misogyny" 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여성 이슈에 끌고 들어온 이브 세지윅(E.K.Sedgwick), 그리고 그 이론을 일본과 국내에 소개한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의 저자 우에노 치즈코에 따르면, 여성에 대한 혐오, 즉 타자화는 오히려 동성사회성(homosociality), 즉 남성들 사이의 연대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요청되었다고 설명될 수 있다. 이들에 따르면, 남성들은 강력한 연대를 바탕으로 그들의 기득권을 체계적으로 유지하며, 다른 남성들에게도 이 연대에 들어올 것을 권유하는 포섭을 시도한다. 헌데 여기서 동성 간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을 촉진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소유물로서의 여성을 교환하고 거래하는 여성혐오가 나타났고, 반대로 동성 간의 관계가 과도하게 친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동성애 혐오가 나타났다는 것. 물론 동성사회성에 대해서는 여성학계 외부로부터 많은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 관점에서 본다면 어째서 이브 세지윅이 처음으로 여성혐오를 주창했던 책의 이름이 《Between Men》 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을 차용한 문화비평을 시도하는 쪽에서는 이런 혐오를 무의식적 억압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즉 사람들은 마음 속에서 객체화된 대상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함으로써 그들의 혐오를 작동시킨다는 것이다. 헌데 정신분석학에서 가정하는 기본적인 전제는, 그렇게 억압한다고 해도 그 무의식이 어디 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때로 그 무의식은 기괴하게 왜곡되고 일그러진 형태로 다시금 귀환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조적 정동은 종종 정반대로 뒤집히기도 한다. 여성에 대한 맹렬한 숭배와 미화가 어느 한 순간 여성혐오로 돌변하고,[4] 부모와의 관계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어린아이가 뜻밖에도 친부살해의 욕망으로 불타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얘기다. 특히 이는 심리내적으로 미분화된 사람일수록 거의 종이 한 장 차이 수준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휙휙 바뀔 수 있다. 자크 라캉은 상징적 거세를 당해 자신의 육체를 잃은 남성들에게는 (상징계에 진입하지 못하여 그런 거세를 당하지는 않았다고 여겨지는) 여성의 존재가 끊임없이 자신의 거세를 되새기게 하므로 그들에 대해 혐오를 느끼게 된다고 하였으며,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자본주의나 가부장제와 같은 지배 질서에 도리어 오이디푸스적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종합적으로 보면 혐오는 결국 우위항이 열위항에 대해서 보이는 정동으로, 주체가 주체로서 실존하기 위해서 객체에게 보이는 반응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주체는 초월과 불멸을 지향하려 하고, 그러려면 자신의 발목을 잡는 열등한 객체를 어떻게든 털어내고 내몰고 쫓아내야만 한다. 객체는 자신의 영토에 스물스물 기어들어와서 자신을 더럽히는 끈적한 오염물인 것이다. 그런 객체를 조금이라도 용납했다간, 그것만으로도 주체는 더 이상 주체로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렇게 본다면 주체가 객체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째서 '혐오' 인지도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성혐오자들은 제 아무리 여성들에게 사근사근히 대하더라도 정작 자기 자신이 '계집애 같다' 는 말을 들으면 펄쩍 뛰고, 동성애 혐오자들은 늘상 쿨한 태도로 취존을 외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만큼은 '게이 같다' 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한다. 그런 것들이 자신을 열등한 객체로서 타락시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들은 혐오가 권력적 우위항의 강자들에 의해서 어떻게 표출되는지에 관심을 가져 왔다. 가장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신체적이거나 언어적인 폭력, 즉 살인(대량학살)이나 성범죄, 욕설과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기사도처럼 언뜻 호의적으로 보이는 태도 역시 구조적 수준에서는 혐오 정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인 수준에서는 그것이 베풀어지는 상대방에 대한 분명한 호의적이고 이타적인 모습이 나타나지만, 사회적 구조 수준에서는 "상대방이 여러 이유로 자신과 대등한 주체가 되지 못하기에 우월한 나님이 친히 도움을 주어야 한다" 는 암묵적 전제가 반영되어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혐오 내지 증오(hatred)나 경멸(contempt), 역겨움(disgust)이 구조적 정동으로서의 혐오와 동일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
반면 구조적 정동이 권력적 열위항의 약자들에게는 어떤 효과를 갖는지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다. 일차적으로 이는 탈권력화(disempowerment), 즉 상대방 주체에게 주체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그 과정을 좀 더 구체화하려는 많은 노력들이 있어 왔다. 예컨대, 약자들은 즉각적으로 모멸감이라는 구조적 정동을 경험하며, 그에 대한 정동적 반응으로서 두 갈래의 기로에 서게 된다. 첫째, 만일 이들이 구조적 정동으로서 분노를 선택한다면 이 정동은 약자들의 권력감을 다시 회복시키며 저항과 항의라는 전복적 실천을 이끌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변화(social change)까지도 기대할 수 있다. 페미니즘의 궁극적 목표가 바로 이것. 둘째, 반대로 이들은 구조적 정동으로서 수치심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때 약자들은 스스로가 마치 평가 받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자기 스스로도 자기대상화(self-objectification), 자기검열, 자기규율을 통해 가능한 한 강자들이 부여하는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결과적으로 약자들은 억압의 구조에 공모함으로써, 상기했던 탈권력화가 나타나게 되고 구조적 현재상태(status quo)도 지속된다.
교차페미니즘 연구자들이나 퀴어 연구자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소수자성이 존재함을 가정하기에, 혐오 정동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소수자성을 성찰하지 못한 것으로 설명한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아무도 진정한 의미의 우위항에 속한다고 장담할 수가 없으며, 모두가 혐오의 표적으로 노출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실의 많은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한 채로 우위항의 이데올로기를 사회화하여 살아가게 되며, 자신이 그것을 사회화했다는 사실만으로 자기 자신이 그 우위항의 일원이 되었다고 지레짐작하곤 한다. 반대로 자신이 소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자기 내면의 다수자성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루인(2015)[5]이 언급한 페미니스트들에 의한 MTF혐오, 동성애자들에 의한 바이혐오를 들 수 있다.
5.2. 분노
혐오가 우위항이 열위항에게 보이는 정동으로 정의된다면, 분노는 열위항이 우위항에게 보이는 다양한 정동들 중 하나이다. 특히 분노는 바로 위에서 서술했듯이 사회적 약자들이 기득권과 지배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사회가 그렇게 배열되어 있는 방식" 을 뒤흔드는 반란적이고 전복적인 실천을 수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사회적 약자들이 분노하지 않았다면 세상은 아무리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하더라도 늘 그렇듯이 항상 고스란히 동일하게 흘러왔을 것이며, 그 모순과 부조리의 일차적 경험자인 약자들이 침묵하는 한 진보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상 분노는 진보의 원동력인 셈이다.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구조적 정동은 개인적 정동과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오해들과 논란들이 발생할 수 있다. 예컨대, 2010년대에 이슈가 되는 것처럼 어떤 여성들은 정말로 한국 남성에 대해서 극단적인 경멸과 증오심, 역겨움을 경험할 수 있다. 이들은 개인적으로는 모든 남성들을 버러지처럼 여기고, 끝없는 적개심을 드러내며, 그들이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도덕적인 비난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개인적 정동일 뿐이며, 이 사람이 여성인 이상, 이 모든 정동은 사회구조적 수준에서 본다면 열위항이 우위항의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서 "분노" 로 이름붙여질 수 있게 된다. 남성혐오가 그 정의상 사회구조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언어도단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온갖 난리통이 벌어지게 되는데 문제는 구조적 정동을 들어서 개인적 정동을 도덕적으로 합리화하려는 경우이다.[6] 구조적 정동이 합리화하는 것은 열위항과 우위항의 계급투쟁의 관점에서나 의미를 가질 뿐이지, 특정 개인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마음까지 필연적으로 합리화하지는 않는다. 이런 개인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불평등과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에 대해 고찰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하는 것이 구조적 정동이 갖는 역할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사회적 문제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 당사자의 남을 미워하는 마음은 여전히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근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사회적 퇴행들 중의 일부는 자기 나름대로의 대의명분으로 도덕적 라이선스를 취득한 사람들의 적개심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의 도덕적 선의는 종종 사회적 집단행동의 브레이크를 해제하기도 한다.
이래저래 나쁘게 평할 만한 지점들도 많았지만, 지금껏 인류 역사의 사회구조적 발전이 분노에 상당 부분 빚을 지고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분노를 통해서 인류는 더 나은 삶의 방식을 찾아갔고 더 민주적인 의사결정의 길을 발견했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힐 수 있게 되었고 세상의 다양성과 변화무쌍함을 좀 더 잘 견딜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운동가들과 혁명가들, 열사들이 외쳤던 "분노하라!" 의 목소리는 실제로 그 이후의 더 나은 사회를 살아가는 후손들이 읽는 역사책의 한 장을 장식했다. 물론 그들 중에는 찌질한 사회불만분자들도 섞여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개인적 정동이 아무리 소시민적이고 편협하며 근시안적일지라도, 구조적 정동으로서 그들이 공유했던 분노는 더 많은 사람들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었다. 단, 그 분노는 옳지 않은 행위에 대한 도덕적 분노여야 한다. 깡패들이 불끈불끈 화를 잘 낸다고 해서 그걸로 무슨 진보가 이루어지겠는가.
5.3. 관련 문서
6. 광업, 지질학 용어
Geode'정족'이라고도 한다. 암석이나 광맥의 빈 공간에 결정을 이룬 광물이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을 이른다. 수정과 같은 광물이 주로 발견되는 곳이다.
[1] 임옥희 (2015). 주체화, 호러, 재마법화. 김수기 편저,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pp.47-88). 현실문화, 서울.[2] 혐오라는 단어의 선정과 번역 자체부터 이미 무수한 논란을 낳고 있지만, 일단 여기서는 구조적 정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분야에서 혐오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므로 마찬가지로 혐오라는 표현을 채택하기로 한다.[3] 여기서 또 '혐오'라는 단어가 이해하기 어려우면 대상화로 바꾸어서 보면 이해하기 쉽다. 즉, 여성을 주체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어떤 물건 혹은 도구처럼 본다던지. 극단적으로는 여자를 오나홀처럼 본다는 서술을 생각해보자. 오나홀에 대해 혐오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도 다양하겠지만, 최소한 오나홀을 자기와 같은 사람처럼 보지는 않는다는 점은 모두 동의할 것이다.[4] 실제로 정신분석을 파는 문화비평가들은 데이트 폭력을 이 방향으로 접근한다.[5] 루인 (2015). 혐오는 무엇을 하는가: 트랜스젠더퀴어, 바이섹슈얼 그리고 혐오 아카이브. 김수기 편저,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pp.165-226.) 현실문화, 서울.[6] 약간 다른 논리로 "우위항의 개인적 정동으로서의 적개심과 열위항의 개인적 정동으로서의 적개심에는 차이가 있다" 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마찬가지로 사회구조적 성찰을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구조적 정동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지 않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