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2:42:43

도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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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은 조선시대 당시 기준}}}}}}}}}
파일:기린 흉배.png 조선의 대원군궁
도정궁 누동궁 운현궁
조선 선조의 잠저
도정궁
都正宮
<colbgcolor=#bf1400><colcolor=#ffd700> 위치 한성부 서부 인달방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왕산로1길
사직로7길 사이 일대)[1]
설립시기 1540년대
해체시기 1950년대
파일:2013052310334273580_3.jpg
<colbgcolor=#bf1400> 도정궁 터의 현재 모습
1. 개요2. 역사
2.1. 창건2.2. 조선 왕실의 뿌리가 되다2.3. 수난과 마지막
3. 주요 건축4. 운경고택5. 역대 도정궁 주인
5.1. 역대 사손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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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친아버지 덕흥대원군과 그 종손들이 머물던 이자 선조의 잠저(潛邸)[2]이다.

사직단의 서남쪽 바로 옆에 있었다. 지금은 거의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없어졌고 몇몇 건물만이 서울 곳곳에 산재해 있다.

2. 역사

2.1. 창건

덕흥대원군중종서자로 왕이 될 수 없었기에, 궁궐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나중에 반드시 밖으로 나가 살아야했다.[3]

정확한 출궁 시기는 모르나 《중종실록》에 이미 1538년(중종 33년)에 덕흥군의 집에 대한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무렵에 궁에서 나갔음을 알 수 있다.[4]

하지만 1540년(중종 35년) 기록에, 공사가 반이나 진행되었는데 집 터에 우물이 안 나온다는 핑계로(...)[5] 터를 옮기는 것이 어떠냐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출궁 당시 살았던 집은 다른 집이었고 저 무렵에 새 집을 짓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저 새 집이 도정궁인 듯 하다.

1544년(중종 39년)의 《중종실록》 기사에 "덕흥군의 집이 지어진 지 오래인데..." 라는 내용을 보아 아마 그 이전에는 완공한 듯하다.

2.2. 조선 왕실의 뿌리가 되다

이렇게만 보면 평범한 일반 왕자저택에 지나지 않지만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덕흥군의 3남 하성군이 명종의 뒤를 이어 선조로 즉위하면서 다른 일반 종친들의 집과는 확실히 다른 대우를 받았다.

덕흥군이 송나라 복왕의 예를 따라[6] 왕의 친아버지 자격으로 대원군 칭호를 받았고[7] 이에 따라 잠저 후원에 대원군 가묘[8] 덕흥궁(德興宮)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덕흥대원군의 종손(宗孫) 4대까지 대군에 준하는 대우를 하고[9] 그 후 사손(嗣孫)들에게는 '당상관 돈녕부 정3품 도정(都正)' 직을 대를 이어 세습하게 했다. 그래서 이 궁의 이름이 '대대로 도정들이 사는 곳'이라 하여 도정궁인 것이다.

조선 후기순조덕흥대원군의 종손들에게 종친부 정1품 군(君) 작위를 대대로 세습하게 했다. 그래서 이후 덕흥대원군의 사손(嗣孫)들은 내내 엄연히 정식 왕족이었고, 그래서 이 도정궁 13대 종손(宗孫) 경원군 이하전안동 김씨에게 밉보이지만 않았어도 헌종 사후 왕위를 계승했을 것이라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10]

2.3. 수난과 마지막

하지만 조선 후기 왕실본가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게, 아니 오히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나름 수난을 많이 겪었다.

1588년(선조 21년) 화재로 불탔다가 선조을 내려 5개월 만에 재건시켰다. 그리고 1860년대 초에는 13대 사손 이하전의 정치적 몰락 때문인지 왕실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 몇 년 간 방치되었다. 그래서 1865년(고종 2년)에 효명세자의 부인인 대왕대비 조씨가 어갑주전(御甲胄錢) 5,000냥을 특별히 획하(劃下)[11]하여 호조에서 수리하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1913년 12월에 화재로 120 ~ 130여 칸이 불탔으나 고종순종의 지원을 받아 재건했다. 8.15 광복 이후에도 후손들이 살았으나 1950년대에 매각했다. 도시 개발 명목으로 부지는 나뉘었고 건물들은 팔리고 헐려 현재는 터에 흔적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다.

3. 주요 건축

사진 설명
파일:도정궁 경원당.jpg
경원당(慶原堂)
조선 철종제주도로 유배갔다가 사형당한 도정궁 13대 사손 이하전(李夏銓)의 봉제사를 지내던 집이다. 흥선대원군이 1872년 경에 지어준 것으로 보인다. 원래 주소사직동 262-85번지로 이하전 생전에는 그의 살림집이었다. 1908년(융희 2년) 이하전이 경원군(慶原君)으로 추봉받으면서 '경원당'이란 이름을 얻었다. 1913년에 불타 1914년 경에 다시 지었고, 성산대로 건설 계획 때문에 1979년 7월 4일 광진구 건국대학교 서울 캠퍼스 내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12] 한 때 사직동 시절 정재문이 기거했다 하여 '사직동 정재문가'라고도 부른다. 건평 36.66평이며 한 건물에 안채와 사랑채가 붙어있어 공간구성이 합리적인 것이 특징이다. 평면으로는 전형적인 한옥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사랑채의 벽체와 창호 등은 서양식일본식이 약간씩 가미되어 있다. 1977년 3월 17일 서울특별시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받았다.
파일:2017-07-07 22-49-49.jpg
덕흥궁(德興宮)
도정궁 후원에 있던, 불천지위 6위를 모신 사당으로 창빈 안씨(중종후궁이자 선조할머니), 덕흥대원군(선조의 친아버지), 하동부대부인 정씨(선조의 친어머니), 하원군 의헌공 이정(선조의 큰형), 남양군부인 홍씨(하원군의 첫째 부인), 신안군부인 이씨(하원군의 둘째 부인) 6분을 모셨다. 1569년(선조 2년) 선조의 명으로 처음 지어졌다. 창건할 때는 가묘(家廟)라고 했으며, 후대로 내려오면서 부터 사묘(私廟), 덕흥사(德興祠), 대원군묘(大院君廟), 대원군 사우(大院君 祠宇), 덕흥대원군 사우(德興大院君 祠宇), 덕흥대원군묘(德興大院君廟), 덕흥궁(德興宮)으로 부르다가 고종 시기에 덕흥대원군궁(德興大院君宮) 또는 덕흥궁(德興宮)으로 불렀다.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광해군의 명으로 다시 지었으며, 선조 이하 역대 임금이 친히 전배와 제향(작헌례)을 행했다. 팔작지붕 형태의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이루어진 정당(正堂)이 있었으며, 정당 앞쪽에는 임금이 친행할 때 배례 공간인 배각이 있었고, 배각 양 옆에 전사청 및 이안청이 있었다. 현재는 도시 개발 및 도정궁 화마로 소실되어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도정궁이 사라진 후 불천지위 6위를 1950년대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339번지 덕릉마을 내 덕릉재실(德陵齋室, 水落山房)로 옮겨 영년봉묘하고, 현재까지 각 기신일마다 후손들이 제향을 받들고 있다.
파일:11079633_1103512949675538_3497105491012652709_n.jpg
장행랑(長行廊)
도정궁의 행랑채로 1920년대 서울 5대 명물 중 하나였다고 한다. 현재는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파일:2017-07-07 23-08-29.jpg
별채
도정궁의 별채로 추정되는 건물로 현재는 현대그룹 소유이다.

4. 운경고택

파일:2017-07-11 10-59-01.jpg
<colbgcolor=#bf1400> 운경고택 정문
현재 도정궁 터 일부에는 운경고택(雲耕古宅)이 들어서 있다. 전 국회의장이었던 운경 이재형이 1953년에 매입한 뒤 1960년대 초부터 머물렀으며 사후 그의 를 딴 재단에 기증했다. 재단에서는 옛 한옥을 2000년 원형대로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조선 시대 당시의 형태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운경고택의 모습을 자세하게 보고 싶다면 참조.

이재형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 선조의 서7남 인성군의 10대 종손(宗孫)이다. 즉 한 때 덕흥대원군의 종갓집이 인성군의 종갓집이었던 셈. 400년만에 본가로 돌아온 인간 연어

고풍스런 분위기로 드라마, 영화 촬영지로 몇 번 나왔다. 대표적인 예로 MBC왔다! 장보리》의 비술채 외관을 이곳에서 찍었다.

5. 역대 도정궁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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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d400>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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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제6대 제7대 -
이정한 이홍일 이세정 이명좌
제8대 제9대 제10대 제11대
이명회 이형종 이풍 진안군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완성군 완창군 경원군 창산군
제16대 - (제17대)
이덕주 (이우갑) (이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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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년 - 1559년), 조선 제14대왕 선조(宣祖)의 생부(生父).

5.1. 역대 사손

1. 의헌공 하원군 이정(河原君 李鋥, 1545년 - 1597년), 호성원종2등공신.
2. 당은군 이인령(唐恩君 李引齡, 1562년 - 1615년)
3. 응천군 이돈(凝川君 李潡, 1579년 - 1617년)[13]
4. 동지돈녕부사 이정한(李挺漢, 1601년 - 1671년)[14]
5. 동지돈녕부사 이홍일(李弘逸, 1640년 - 1718년)[15]
6. 돈녕도정 증 이조참판 이세정(李世禎, 1661년 - 1721년)
6.5. 진사 이명좌(李明佐, 1681년 - 1722년)[16]
7. 돈녕도정 증 이조판서 이명회(李明會, 1685년 - 1727년)
8. 동지돈녕부사 증 좌찬성 이형종(李亨宗, 1706년 - 1759년)
9. 판돈녕부사 이풍(이례)(李灃, 1727년 - 1795년)
10. 진안군 이언식(晋安君 李彦植, 1752년 - 1819년)[17]
11. 완성군 이희(完城君 李爔, 1771년 - 1830년)[18]
12. 완창군 이시인(完昌君 李時仁, 1805년 - 1843년)[19]
13. 증(贈) 경원군 이하전(慶原君 李夏銓, 1842년 - 1862년)[20]
14. 창산군 이해창(昌山君 李海昌, 1865년 - 1945년)[21]
15. 비서감승 이덕주(李德柱, 1887년 - 1962년)[22]
16. 이우갑(李愚甲, 1918년 ∼ 1950년)
17. 이영기(李英基, 1946년~)[23]

6. 여담

  • 1966년 1월에# 동아방송에서 도정궁을 무대로 한 〈도정궁의 낙조〉란 연속 사극을 방송했다. 작가는 이진섭, 연출은 허지영이었고, 천선녀, 김수일, 전운, 윤미림, 김영옥 등이 출연했다.#

[1] (사직동 262번지 일대).[2] '잠길 잠(潛)'에 '집 저(邸)'. 즉 (임금)이 잠겨 있었던 집이라는 뜻으로, 정식 왕의 후계자가 아닌 왕족이 왕이 되었을 때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집이라는 뜻이다.[3] 궁궐 안에 살 수 있는 성인 남자는 단 둘 뿐이다. 왕세자, 상왕세손이 있다면 최대 4명. 그 이외에는 절대 궁궐 안에서 쭉 살 수 없었다. 내시는? 그래서 떼잖아.[4]중종실록》 - 중종 33년 7월 29일 경자(庚子) 두번째 기사: "왕자녀의 저택이 제도에 벗어난 것을 적간하였는데, 덕흥군(德興君)의 집은 50칸이므로 법전에 많이 벗어나지 않았으나 정신옹주(靜愼翁主)의 집은 8칸, 숙정옹주(淑靜翁主)의 집은 11칸이 각각 법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장무소(掌務所) 2칸과 마구 5칸은 왕자녀 집의 원도형에는 없지만 으레 다 있는 것이다. 이것을 제하고 따진다면 정신옹주의 집은 3칸, 숙정옹주의 집은 6칸이 제도에 벗어난다. 이것은 헐라. 적간은 공조가 하였으나 허는 일은 오부(五部)의 관원이 감독하게 하되, 서부(西部)와 중부(中部)에 있는 저택은 반드시 2부의 관원이 감독하게 하라. 그리고 헐어 버릴 때에는 각 집의 종들에게 미리 이르라."[5] 실제로는 안 나오기는 커녕 관리를 보내어 확인해봤더니 네 곳을 팠는데 전부 물이 많았다고 한다(...) 결국 터는 옮기지 않고 원래 장소에 그대로 지었다. 걍 집 짓다 뭔가 맘에 안들어서 강짜부리는 것.[6] 사실 저 사례를 그냥 쓴 게 아니고, 나름 의미가 있어서 적었다. 친아버지를 다른 일반 왕족들과 다르게 높여 대접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이례적인 일이라 무작정 예우하긴 좀 그랬고, 이에 명분거리로 쓰기 위해 중국의 비슷한 사례를 찾아낸 것이다. 실제로 들이 뭘 하려는데 신하들이 반대할 경우, 중국의 예를 언급하면 반발이 무마된 적이 많았다.[7] 단 이때 덕흥대원군은 이미 사망했다. 그 부인 하동부대부인 정씨 역시 마찬가지.[8] 家廟 집안의 사당.[9] 작위 자체는 군이었다. 그나마도 생전에 도정이었다가 사후에 군으로 추증된 사손도 있었다.[10] 이하전조선 왕실 직계와 실제 혈통으로는 덕흥대원군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고 법적으로 보면 중종 때 갈라졌다.(선조명종양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헌종과는 실제로는 25촌(...), 법적으로는 27촌(...)이다. 아무리 항렬이 높다지만 실제 혈통 상 헌종의 7촌 숙부인 사람과 25촌 - 27촌이 되는 사람 중에 누구한테 왕위를 물려줄 것인지는 굳이 말을 안해도 될 것이다.[11] 기획해서 내려 주라는 의미로 오해하기 쉽지만 여기서의 획 자는 자른다는 뜻이다. 재정 용어로, 본래의 재산을 떼어 내려 준다는 뜻이다.[12] 현재 소유와 관리는 건국대학교에서 하고 있다.[13] 여기까지 왕족 예우로 종친부 ''의 칭호를 받았다.[14] 여기부터 대원군 적장손 세습 제도로 돈녕부 도정(정3품 당상관)의 칭호를 받았으며 대원군의 적장손 세습 제도가 시작되었다. 조선의 귀족이었던 셈이다.[15] 4대 사손 이정한양자이자 이정한의 동생 이석한의 장남.[16] 6.5대라는 숫자가 애매한데 왜 이러냐면 원래 7대 사손이었던 이명좌가 신임옥사에 연루되어 사형당했기 때문에 그 뒤를 동생 이명회가 대체한 것이다. 이명회 또한 임인사화에 연루되었지만 살아남았고 후에 영조신원을 복구시켜주면서 이명좌의 자리를 정식으로 대체한 것이다.[17] 여기서부터 다시 대원군의 적장손 세습 제도에 의해 왕족의 예우에 해당한 종친부 ''의 칭호를 받는다.[18] 10대 사손 진안군 이언식양자이자 이언식의 동생 이민식의 장남.[19] 11대 사손 완성군 이희양자이자 이희의 친동생 이옥의 2남.[20] 왜 증이 붙었냐면 이하전은 생전에 군의 칭호를 받지 못했었다. 죽고나서 신원복위된 뒤 대원군 적장손 예우로 추증된 것.[21] 경원군 이하전의 사후 양자로 실제 혈통은 3대 사손 응천군 이돈친동생 밀산군 정혜공 이찬에서 갈라졌다. 이하전과 촌수로는 23촌 숙질간.[22] 여기서부터는 대한제국 멸망으로 대원군의 적장손 세습 작위를 못 받고 상징적의 칭호로 '도정궁 사손'으로 불린다.[23] 여기서부터는 도정궁에서 거주를 못 했지만 경기도 남양주시 대원군의 재실인 '덕릉재실'에서 거주하였으며 상징적 칭호로 '도정궁 사손'으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