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있던 효종의 잠저에 대한 내용은 어의궁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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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 |
용흥궁 龍興宮 | |
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인천광역시 강화군 동문안길21번길 16-1 (강화읍, 용흥궁) |
분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주거지 |
수량 / 면적 | 3동 / 2,496㎡ |
지정연도 | 1995년 3월 2일 |
<colbgcolor=#bf1400> 용흥궁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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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별궁. 25대 임금 철종의 잠저 중 한 곳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다.2. 강화도령의 배경
<colbgcolor=#bf1400> 용흥궁에 살았던 철종 이변(초명 이원범) |
3. 지존이 된 시골 청년, 그 이후
1849년(헌종 15년) 헌종이 후사없이 2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급사했다. 당시 영조의 후손으로서 정통성을 가진 왕족은 이광의 아들들밖에 없었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순원왕후 김씨는 이광의 아들인 이원범을 다음 국왕으로 지명했다.[3]이 시기에 직계 왕통(혈통)이 자주 단절된 이유는 효종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종은 효종의 외아들이었고, 숙종은 현종의 외아들이었다. 숙종은 아들이 몇 명 있었지만 영조 빼고는 대가 끊기고, 영조도 아들을 둘 뒀지만 장남 효장세자는 어린 시절 사망하고 후손을 남긴 아들은 사도세자 뿐이었다. 사도세자는 아들을 다섯을 두었지만 아들 둘의 대는 끊겼고[4] 넷째 은신군과 다섯째 은전군은 10몇 촌이 넘어가는 친척을 입양해 대를 이었다.[5] 은언군은 아들을 7명을 두었지만 후손을 남긴 아들은 전계대원군 밖에 없었다. 즉 헌종 사후 실제 효종의 피를 받은 왕족은 이원범 뿐이었던 것이다.[6] 그래서 비록 선왕 헌종보다 한 항렬 높았지만 궁여지책으로 그가 왕이 되었다. 뭐 무식하기까지 했으니 세도가 입장에선 꿩 먹고 알 먹는 격이었겠지만.[7]<colbgcolor=#bf1400> 〈강화도행렬도(江華島行列圖)〉. 북한의 평양에 있는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
<colbgcolor=#bf1400> 흥선대원군이 쓴 용흥궁 현판 |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받았다.
4. 건축
<colbgcolor=#bf1400> 용흥궁 사랑채 | <colbgcolor=#bf1400> 용흥궁 안채 |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건물의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창덕궁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처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5. 용흥궁 공원
<colbgcolor=#bf1400> 용흥궁 공원[9] |
<colbgcolor=#bf1400> 용흥궁 근처에 있는 성공회 강화성당[10] |
[1]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익선동 일대.[2] 회평군 이명(혹은 이원경), 영평군 이경응(초명은 이욱).[3] 이원범 위로는 작은형 이욱이 있었지만, 대체로 양자로 입적해 '나가는 집안'의 '남은 장자'는 그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므로 둘째가 양자로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이원범으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예로 역시 장남이 아니었던 선조와 고종이 있다.[4] 의소세손과 정조의 대(헌종이 후사 없이 죽으면서 완전히 끊김).[5] 은전군의 양자 풍계군은 은전군과 3촌이라는 아주 가까운 촌수였지만, 풍계군 역시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풍계군의 양자로 들인 왕족이 10몇 촌이 넘어가는 먼 친척이었다. 그것도 철종 즉위 후 이루어진 입양이었다.[6] 은언군의 장손 익평군 이희와 이원범의 형 이욱이 있긴 했지만 각각 은언군 종가와 전계대원군의 대를 이어야 했다. 그래서 이들을 빼면 정말 이원범밖에 없었다.[7] 다만 철종 본인의 항목에선 철종이 일자무식이 아니라는 관점이 우세한 편이다. 그래도 아주 일자무식은 아닐지언정 왕으로서의 기본 소양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것은 철종(조선) 문서 참조.[8] 철종의 친아버지 전계대원군의 종가.[9] 사진 출처 - 강화군 보도자료.[10] 좌측에 보이는 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