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20:40:57

기와집

한옥의 종류
초가집 기와집 너와집 귀틀집 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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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구조3. 역사4. 현대5. 해외에서6. 기타

1. 개요

지붕으로 기와를 사용한 . 와가()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가장 일반적인 기와집 재료로 찰흙으로 만든 검은색 기와를 사용하였으며 한옥 건축사 전체로 본다면 청자 기와도 사용하는 등 실제로는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2.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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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들보
  • 대공
  • 용마루
  • 빼도리
  • 처마
  • 서까래 : 지붕의 뼈대를 이루는 나무
  • 추녀 : 처마의 네 귀퉁이에 있는 큰 서까래
  • 추녀마루
  • 굴도리
  • 보뺄목
  • 들어열개
  • 분합문
  • 합각마루
  • 목기연
  • 합각
  • 소로
  • 머름
  • 초석(주춧돌)
    • 단추형 초석
  • 한벌대
  • 디딤돌
  • 두벌대기단
  • 석계
  • 노둣돌
  • 석함
  • 대청
  • 암기와
  • 수기와
  • 암막새
  • 수막새

3. 역사

3.1. 신라

신라 시기 건물들은 굉장히 화려한 편이었다. 서라벌 일대는 바닥에 타일을 깔기도 했었고 일부 진골급 귀족들은 황금으로 기와를 만들어 올린 금입택을 짓기도 했다. 또한 경주 월성, 동궁과 월지 유적 발굴 결과 처마 끝부분을 하나씩 하나씩 황금장식을 붙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청기와를 올린 집도 있었고 수키와 끝 수막새 위에 황금장식을 올리기도 했으며 나무 골조 부분을 빨갛게 칠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3.2. 고려

고려청자의 영향으로 청자로 기와를 굽기도 했다. 이 시기에도 황금 기와는 있었고 신라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물론 하층민들이야 기와집은 언감생심이었지만, 충선왕 시기 개발로 개경 일대를 기와집으로 도배한 기록이 있고, 특히 고려는 불교국가다 보니 궁궐보다 이 더 으리으리한 경우도 제법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벌귀족의 세가 커서였는지 정함, 권준 등 권세가 집이 궁궐급이나 그 이상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사실 원래 이시기 기와집은 크기 제한이 있어서 99칸을 넘는 집을 짓고 사는 것은 금지였다고 한다. 99칸이 넘는 기와집은 무조건 궁궐이나 관아, 성균관같은 대형교육시설이었다는 얘기다. 다만 은근슬쩍 무시되는 법이었는지, 이 규정 이상으로 규모가 큰 국가 사찰도 있었고, 최충헌 같은 권신들은 100칸을 훌쩍 넘는 기와집을 보유하기도 했다. 물론 99칸이라고 해도 180평에 해당되는 크기이기 때문에 매우 널찍했던 건 마찬가지라 일반인들은 저렇게 지으라고 해도 못 짓는다.

3.3. 조선,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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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가 그린 평안감사향연도의 일부. 출처.

유교의 영향으로 기와집들이 이전보다 검소해졌다. 검은 기와를 올렸고 '사치스럽지는 않되 초라하지 않다.'라는 정신으로 서까래와 공포를 알록달록하게 칠했다. 이를 상록하단 단청이라고 부른다. 양반 중에서도 특히 신분이 높은 사람이 거주할 경우 푸른 유약을 발라 만든 청기와를 사용해 지붕을 만들기도 하였다.

영조 대에 태어난 학자 박제가 말에 의하면 18세기 당시 한양에 4만 가량의 기와집이 있었던 모양.# 또 조선시대 기와집은 전근대시대 세계 대다수 문명과 비슷하게 남자와 여자가 생활하는 공간이 구분되어 있었다.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 무렵엔 개량형 기와집도 등장했는데, 경성부의 인구가 지방에서 상경해 오는 사람들로 인해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땅도 부족해지자 궁여지책격으로 기존의 기와집보다 훨씬 좁게 만들면서 2층까지도 만든 개량형 기와집이 등장하게 되었고[1] 현재 서울에 남은 기와집 가운데서 상당수가 이런 개량형 기와집이다.

4. 현대

이촌향도 등이 겹치면서 아파트촌이 대세가 된 현대에도 기와집은 제법 남아있다. 다만 과거 전통 양식의 기와집은 아니고, 현대식 건축물에 지붕기와를 덮은 형태가 많다.[2] 전통 기와집들은 부동산 투기재개발로 사라지는 경우도 많고, 운치있다고 한옥 기와집을 선호하는 풍조는 여전히 있으나 현실 여건상 도심지보단 외곽 지역에 지어지는 경우가 많다보니, 전통 기와집이나 개량형 기와집은 현재는 도심지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다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한옥 기와집 말고 20세기 중후반 흔히 지어졌던 양옥 단독주택들처럼 집 자체는 서양식 벽돌을 이용해 짓되, 지붕은 기와로 장식하고, 온돌도 깐, 일종의 퓨전식 집은 이때도 많았다. 오늘날에도 골목골목 다니다 보면 가끔 개발되지 않고 보존된 진짜 전통 혹은 개량식 기와집들이 종종 보이기도 한다.

일대가 역사유적지구로 많이 묶인 경주시는 일부면을 제외한 지역에서 다량의 원조 검은 기와를 볼 수 있다. 경주가 서라벌 시기 천년 왕국 신라의 수도였고 이후에도 고려 시절 동경 등 주요 도시로 꽤 오랜 기간 남았던 만큼 재개발 제한이 있는 것 + 역사성에 대한 자부심 등이 결합되어 경주IC는 고사하고 주유소에도 기와를 얹어놓은(...) 진풍경도 볼 수 있다.
파일:경주 주유소 클라스.jpg

현대에도 기와집을 새로 짓는 경우가 많고 검은색 기와를 올린 집, 파란색 기와를 올린 집, 빨간색 기와를 올린 집들이 많은데 검은색 기와를 올린 집 중에서 아주 가끔씩 기와집 느낌나도록 흉내만 내려고 하얀 찰흙 위에 기와 얹어놓고 암막새와 수막새로 막아놓지도 않은 집이 있다.

5. 해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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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야 같은 일본식 전통 가옥이나 중국의 사합원, 토루, 베트남식 전통 가옥도 기와를 얹기 때문에 의미 그대로의 기와+으로 불리기도 한다. 구글에 나라 이름+기와집으로 검색하면 많은 이미지 결과를 찾아볼 수 있다. 애초에 기와집 자체가 한자문화권에서 흔한 집이다.

전통적으로 서민들은 초가집에 사는 경우가 많았던 한국, 일본, 베트남과 달리 중국에서는 서민층들도 기와집에 사는 경우가 많았다. 핑야오 고대도시도 참고. 이는 화북 지역에 석재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벽돌과 기와제조업이 성행한 영향도 있었다. 물론 중국이라고 해서 죄다 기와집을 짓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고, 땅덩이가 컸던만큼 지역에 따라선 토굴에 살거나 수상가옥에 사는 경우도 있는 등 주거 형태가 상이한 편이었다.

동아시아권 뿐만 아니라 유럽권에서도 기와집은 흔하게 쓰였다. 애초에 메소포타미아, 고대 이집트, 그리스 등 서양권에서 쓰던 건축 기술이 동아시아권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하산에는 러시아의 영토이지만 북한, 중국의 3개국 국경지대라서 그 2개국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기와집이 있다.

6. 기타

대한민국의 대통령 관저였던 청와대도 일종의 기와집이다. 청와대(靑瓦臺)라는 명칭 자체가 푸른 기와를 덮은 집이라는 뜻. 물론 전통양식의 기와집은 아니고 지붕만 전통 양식으로 꾸민 서양식 건물이다. 군사정권 영향으로 비판하는 쪽에선 박조건축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

김일성이 북한 인민들에게 제시한 이밥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의 한 기준이기도 하다. 비단옷은 지금도 무리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이기는 하고, 북한의 경제개발기에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도심지에는 아파트를 대량 건축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애초에 이촌향도 현상이 벌어지면 단독주택만으론 도시 인구 수용이 불가능하다.

물론 아파트도 지붕만 기와집 형식으로 지을 수 있긴 하다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와집은 아니다. 기와아파트.

경춘선 김유정역의 신역사가 기와집 형태로 지어졌다. 이외에 전주역, 영월역, 남원역, 구례구역, 곡성역 등 기와 지붕을 얹은 역들이 꽤 있다. 아무래도 운치가 있기 때문에 현대식 건축 디자인들이 판치는 시대에도 기와 지붕 형태는 꽤 오랜 기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오죽하면 전통적인 기와 재료는 안쓰는데 걍 디자인만 비슷하게 만들어서 지붕에 얹기도 할 정도.


[1] 엄밀히 말하면 다시 보편화한 것이다. 조선 전기 때까지만 해도 2층 건물은 보편적이었고, 그 이후에도 덕수궁 석어당창덕궁 경훈각 등의 2층 건물들이 남아 있었고, 사료에서도 2층 건물에 대한 기록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 다만 조선 후기에는 소빙하기로 온돌 수요가 대폭 증가하면서, 온돌을 2층에 설치하기 힘들고[3] 땔감으로 나무를 쓰면서 목재 자체가 많이 비싸진지라 2층 한옥은 상가 건물이나 궁궐, 절, 일부 관공서를 제외하면 많이 사라진 것이었다.[2] 사실 오늘날 국내외 건축물들이 주로 그렇다. 건축 기술이 발전하는데 어찌보면 당연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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