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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 |||
의령원 전경 | |||
출생 | 1750년 9월 27일 (음력 영조 26년 8월 27일) | ||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
책봉 | 1751년 6월 6일 (음력 영조 27년 5월 13일) | ||
한성부 창경궁 명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
사망 | 1752년 4월 17일 (향년 1세) (음력 영조 28년 3월 4일) | ||
한성부 창경궁 통명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
능묘 | 의소묘(懿昭墓) → 의령원(懿寧園) | ||
재위기간 | 조선 왕세손 | ||
1751년 6월 6일 ~ 1752년 4월 17일 (음력 영조 27년 5월 13일 ~ 영조 28년 3월 4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정(琔) | ||
부모 | 부황 장조 의황제 모후 헌경의황후 | ||
형제자매 | 5남 3녀 중 장남 | ||
사당 | 의소묘(懿昭墓) | ||
시호 | 의소세손(懿昭世孫) → 의소세자(懿昭世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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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적장남으로, 제22대 왕 정조의 동복형이다. 정조가 태어난 해에 사망했다.2. 생애
1750년(영조 26년) 음력 8월 27일에 원손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1751년(영조 27년) 5월 13일 왕세손에 책봉되었지만, 1752년(영조 28년) 3살에 훙서했다.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으나 열병이 있었던 듯하다. 시호는 의소(懿昭). 훙서했을 당시 묘는 의소묘였는데, 고종 대인 1870년(고종 7년) 승격되어 의령원으로 개호했다.영조는 첫 손자이자 세손인데도, 처음에는 의소세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자식들 중 누구보다 아끼고 총애했던 딸 화평옹주[1]의 삼년상이 끝나는 달에 의소세손이 태어났는데, 혜경궁 홍씨의 출산을 도운 영빈 이씨에게 "죽은 딸은 잊고 손자 태어난 것만 좋아하느냐"고 핀잔을 줬던 걸 보면 딸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2] 첫 손자를 본 척도 않던 영조는, 어느 날 갑자기 의소의 몸에 화평옹주와 똑같은 위치의 점이 있는 걸 보고 나서야, 이 아이는 화평옹주의 환생이라며 100일 전후에 바로 원손으로 책봉해버릴 정도로 급 총애하기 시작했다. 혜경궁은 의소세손을 향한 총애로 세손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도 그만큼 같이 사랑받기를 내심 기대했으나, 영조는 단지 화평옹주의 환생이라 생각한 의소세손만 총애했다고 한다.
휘가 정(琔)인데 피휘 과정에서 곤란함이 있었던 듯하다. 영조는 아예 의소세손의 이름을 정(定)이라 지으려 했지만, 너무 많이 쓰이는 글자라는 신하들의 반대를 받아들여 정(琔)으로 고쳤다. 영조는 피휘를 위해 읍호는 바꾸더라도 굳이 定이라는 글자까지 피휘할 필요는 없다고 밝혀두었다.
이번 4월 16일 도승지와 이조·병조 판서가 함께 입시하였을 때에 전교하기를,
한유(韓愈)의 휘변(諱辨)[3]에 말하지 않았더냐? ‘대체로 휘(諱)를 잘못 사용한 것은 진나라와 한나라 때가 당나라와 송나라 때보다 심하였으나 삼대(三代: 하·은·주) 때의 일은 아니다.’라고…. 이번에 원손의 이름을 지은 것은 뜻이 깊고 겸하여 종묘사직을 위해 축원하는 뜻이 있다. 그런데 뒤에 생각하니 걸리는 것이 많다. 만일 지금 효유하지 않으면 후일에 반드시 폐단이 있을 것이다. 읍호(邑號)가 동명(同名)인 것은 비록 휘하지 아니할 수 없겠으나, 옛날 문자에 있어서는 응당 사용해야 할 글자 음을 어떻게 모두 휘할 수 있겠느냐? 인정(人定)의 정 자와 정집(定執)의 정 자가 바로 그중 한 가지이다. 이것도 휘해야 하겠느냐? 이러한 국경(國慶)에 어찌 말세의 헛되고 잡스러움을 돕겠느냐? 또 주나라의 아송(雅頌)에는 문왕·무왕의 이름 글자를 휘하지 않았으니 이것도 원인하여 증거로 삼을 수 있는 한 가지이다. 지금 효유하는 뜻을 조보(朝報)에 실어 중외(中外)에서 자세히 알게 하라.
하였다.
비변사등록 영조 27년(1751) 4월 18일(음)
한유(韓愈)의 휘변(諱辨)[3]에 말하지 않았더냐? ‘대체로 휘(諱)를 잘못 사용한 것은 진나라와 한나라 때가 당나라와 송나라 때보다 심하였으나 삼대(三代: 하·은·주) 때의 일은 아니다.’라고…. 이번에 원손의 이름을 지은 것은 뜻이 깊고 겸하여 종묘사직을 위해 축원하는 뜻이 있다. 그런데 뒤에 생각하니 걸리는 것이 많다. 만일 지금 효유하지 않으면 후일에 반드시 폐단이 있을 것이다. 읍호(邑號)가 동명(同名)인 것은 비록 휘하지 아니할 수 없겠으나, 옛날 문자에 있어서는 응당 사용해야 할 글자 음을 어떻게 모두 휘할 수 있겠느냐? 인정(人定)의 정 자와 정집(定執)의 정 자가 바로 그중 한 가지이다. 이것도 휘해야 하겠느냐? 이러한 국경(國慶)에 어찌 말세의 헛되고 잡스러움을 돕겠느냐? 또 주나라의 아송(雅頌)에는 문왕·무왕의 이름 글자를 휘하지 않았으니 이것도 원인하여 증거로 삼을 수 있는 한 가지이다. 지금 효유하는 뜻을 조보(朝報)에 실어 중외(中外)에서 자세히 알게 하라.
하였다.
비변사등록 영조 27년(1751) 4월 18일(음)
그러나 의소세손은 곧 요절하고 만다. 어린 의소가 요절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유모의 잘못된 생활개념 때문이었다. 승정원일기 영조 28년 2월 2일 기록과 영조실록 영조 28년 3월 9일 기록에 따르면 당시 어영대장이자 세손의 외조부인 홍봉한이 세손궁의 유모를 바꾸고 처벌하자는 상소를 올렸는데 영조가 답하기를 ‘보모된 자가 외람되게도 술을 마시고 고기반찬을 먹으며 아이를 흔드는 등의 문제가 있으나 유모된 지가 오래 되어 쉽사리 바꾼다면 어린 세손이 놀랄까 염려스럽다’고 비답한다. 더욱이 한중록에 따르면 어린 세손은 태어날 때부터 신열과 진물이 나는 등의 피부병까지 있어 더 조심해서 살펴야 하는 아기였다.
참고로 궁중의 법도를 따르면 친모 혜경궁은 수유를 할 수 없었다. 홍봉한은 특히 갓난아이에게 젖을 물릴 유모가 술과 고기반찬을 접하는 걸 못내 불쾌하게 여겼는데, 신생아를 흔드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오늘날 기준으로도 아동학대(및 치사)죄로 처벌받을 수 있는 중대한 잘못이다. 아기를 흔들면 진짜로 장애를 입거나 죽기까지 할 수 있다. 더욱이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왕세손으로 책봉까지 받은 직계 왕족에게 일개 궁인에 불과한 유모가 이런 학대를 자행했으니, 그 시대 의학으로 검증하긴 힘들었겠지만[4] 만약 흔들린 아이 증후군으로 사망한 것이 확인됐으면 능지처참에 멸족 당해도 할 말이 없을 중대 사안. 그러나 영조와 사도세자는 처음으로 본 손자가 허무하게 요절하자, 진이 빠져서 푸닥거리를 할 기력조차 없었는지, 유모를 지나치게 벌하기는 싫다며 사실상 자포자기한 태도를 보였고 담당 의관들만 옷 벗는 선에서 사안을 마무리했다.
고종이 장헌세자를 장종으로 추숭할 때 특별히 의소세자가 되었다. 원인 의령원은 현재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있으며, 조카인 문효세자의 원인 효창원과 나란히 있다.
3. 가계도
[1] 사도세자의 동복 누나. 22세에 첫 딸을 낳다가 난산으로 요절했다.[2] 당시 조선 왕실이 왕비는 커녕 후궁 소생의 왕자조차(당장 영빈 이씨 소생의 사도세자도 효장세자 사후 7년 만에 태어났기에, 사실상 외아들이었다) 몇 안 될 정도로, 갈수록 남계 후손이 줄어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첫 손자를 대하는 영조의 이런 행동은 납득하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서자들인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을 손자 대접도 안하던 걸 보면 의소세손은 그나마 나은 수준이었다.[3] 당 덕종 때의 문학가인 한유가 피휘의 진의(眞義)를 변론하여 밝힌 글.[4] 더욱이 그 당시만 해도 흔들린 아이 증후군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이 병이 인정받기 시작한 건 약 두세기 후인 1974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