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닥터 진》의 인물에 대한 내용은 철종(닥터 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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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제25대 국왕 철종 | 哲宗 | |||
대한제국 추존 황제 철종 장황제 | 哲宗 章皇帝 | |||
출생 | 1831년 7월 25일 (음력 순조 31년 6월 17일) | ||
한성부 경행방 향교동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낙원동 일대) | |||
즉위 | 1849년 7월 28일 (18세) (음력 헌종 15년 6월 9일) | ||
한성부 창덕궁 인정문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
사망 | 1864년 1월 16일 (향년 32세) (음력 1863년, 철종 14년 12월 8일) | ||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별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
능묘 | 예릉(睿陵) | ||
재위기간 | 조선 제25대 국왕 | ||
1849년 7월 28일 ~ 1864년 1월 16일 (음력 철종 즉위년 6월 9일 ~ 1863년, 철종 14년 12월 8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원범(元範) → 변(昪)[1] | ||
부모 | 친부 전계대원군 친모 용성부대부인 | ||
양부 순조 숙황제 양모 순원숙황후 | |||
형제자매 | 3남 중 3남 | ||
배우자 | 철인장황후 (1851년 혼인) | ||
후궁 | 귀인 박씨, 귀인 조씨, 귀인 이씨, 숙의 방씨, 숙의 범씨, 숙의 김씨, 궁인 이씨, 궁인 박씨 | ||
자녀 | 1남 1녀 (5남 6녀)[2] | ||
종교 | 유교 (성리학) | ||
자 | 도승(道升) | ||
호 | 대용재(大勇齋) | ||
봉호 | 덕완군(德完君) | ||
전호 | 효문전(孝文殿) | ||
묘호 | 철종(哲宗) | ||
존호 | 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 (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3] | ||
시호 | 조선: 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 (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 대한제국: 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 (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 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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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25대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묘호는 철종(哲宗), 추존된 시호는 장황제(章皇帝), 휘는 원범(元範)이었으나 왕이 된 후 피휘를 하기 위해 개명했다. 순조의 양자로 즉위했기에 효명세자와 항렬자를 맞춰서 변(昪)으로 개명했다. 자는 도승(道升).국왕이 되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보낸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그를 칭하는 별명은 '강화도령'이다. 왕조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어 즉위한 방계 출신 군주이며 당대 실권자인 신 안동 김씨 세도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차기 군주로 옹립되었다.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고 《삼정이정절목(三政釐整節目)》을 도출하는 등 민생을 돌보려는 시도도 했었으나 제왕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탓에 정치적 감각의 부족으로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했고 32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요절했다. 조선 임금 중 마지막으로 재위 중에 종신(終身)하게 된 왕이자 왕좌를 이어받게 되는 자손 없이 종신한 마지막 임금이다.[5] 또한 조선왕조실록 중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마지막 실록이 편찬된 국왕이기도 하다.[6]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철종(조선)/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철종은 명암이 분명한 군주이다. 철종은 역대 조선왕조의 왕들 중 태종, 세종 정도를 제외하면 피지배층 백성들의 삶과 그 고통을 가장 잘 알고 공감하고 있는 왕이었기에[7] 백성들에게 동정적이었고 무너져가던 조선을 되살리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나 선대 왕인 헌종이 외가나 처가 등을 통해 정치적인 기반을 가지고 세도 가문을 견제해가며 나름 왕권을 구축했던 것에 비해 방계 왕족 출신인 철종은 그런 정치적 기반이 없었기에 개혁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8]기본적으로 정통성이 매우 약했기 때문에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선 양모인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엄청난 핸디캡을 안고 있었다. 오히려 이만한 핸디캡을 안고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의 설치 및 《삼정이정절목(三政釐整節目)》의 도출 등의 성과를 낸 것만으로도 역량이 없는 인물은 전혀 아니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선대인 헌종에 비해 정치적인 역량은 많이 뒤쳐졌다고 볼 수 있다. 세도 정치라고는 하지만 세도 가문들이 고려시대 무신정권도 아니고 국왕의 역량에 따라 충분히 통제할 수도 있었다는 게 중론이기 때문이다. 헌종 때에는 국왕이 세도 가문끼리 경쟁 구도를 만들어 세도가들을 어느 정도 제어하는 모습이 있었으나 철종 때에는 이러한 모습 없이 사실상 안동 김씨가 독주하는 모습이 만들어졌던 것도 그만큼 역량 면에서 철종이 선대보다 뒤떨어졌던 것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9][10]
치세 후반으로 갈수록 자포자기하듯 문란한 생활을 하며 정치에서 손을 뗐던 것을 두고 명백한 암군이라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딱히 왕으로서 뭘 더 해볼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다소 가혹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명군이고 암군이고간에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지극히 제한되어있는 마당에, 이분법적인 평가를 들이미는 것은 비합리적일뿐더러 학술적으로 큰 의미도 없다. 오히려 지극히 취약한 권력기반을 가지고도 개혁을 시도라도 해봤다는 것을 어느정도 감안해줄 필요가 있다.[11]
종합해보면 왕으로서의 역량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나 정조 말년부터 터져 나온 조선 사회의 모순이나 문제점들을 수습해나가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인물이며 애당초 왕권과 멀었던 인물이란 것도 고려해야 한다.
4. 어진
대한민국 보물 제1492호 | |
<colbgcolor=#315288> 철종어진 哲宗御眞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12, 국립고궁박물관 (세종로, 국립고궁박물관) |
분류 | 유물 / 일반회화 / 인물화 / 초상화 |
수량/면적 | 1점 |
지정연도 | 2006년 12월 29일 |
제작시기 | 1861년(조선 시대) |
<colbgcolor=#bf1400> 부산 용두산 대화재의 영향으로 절반이 타버린 철종의 어진들. 왼쪽부터 구군복본, 면복본, 원유관본이다. |
왼쪽 어진은 1861년(철종 11년)에 구군복 차림을 한 30세의 철종을 그린 어진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 중에서도 유일한 왕의 구군복 어진이라 예술성이나 역사성에서 상당히 중요한 그림이다. 이 어진은 2006년 보물 제1492호로 지정됐으며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오른쪽의 어진은 구군복 어진과 동시에 도사한 것이어서 강사포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는 구군복본과 거의 차이가 없다. 가운데 어진의 경우 1852년(철종 2년) 당시 21세였던 철종의 모습을 그린 면복본 어진이다. 비록 표제 부분이 중간중간 타버렸지만 남아있는 부분을 통해 이 어진이 철종의 어진임을 확인하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문서 상단의 어진은 그나마 얼굴이 남아있던 덕에 이를 바탕으로 복원한 것.
조선 25대 임금 철종의 구군복 어진 |
조선 25대 임금인 철종의 어진에 그려진 경우처럼 임금이 입는 구군복은 하나의 예술품으로서 수수한 멋스러움의 일반 구군복들보다 훨씬 더 화려하다. 임금용 구군복은 위쪽 사진의 사또나 포도대장같은 관리들이 입고있는 일반적인 구군복과는 비교도 안되는 화려한 디자인을 내기 위해서 곤룡포와 마찬가지로 양쪽 어깨와 가슴과 등에 용을 수놓은 자수(흉배)를 부착하였다.
철종의 나이 30세 때인 1861년(철종 11년)에 어진화사가 시행되었는데 이후 20세기에 들어 발발한 한국 전쟁으로 인해 서울에 있던 수많은 왕실 문화재들을 부산으로 옮기면서 어진들도 함께 옮겨졌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정부에서는 문화재들을 서울로 옮기거나 하는 등의 별다른 조치없이 그냥 부산에 계속 방치해 놔두고 있었다. 하지만 1954년 큰불이 나면서 어진의 절반가량이 타 버렸고#, 남은 부분을 기반으로 1987년에 복원한 것이다. 철종의 어진은 화재로 인해 반 이상이 타버렸으며 순조, 효명세자 등 얼굴 부분까지 타면서 아예 복원이 불가능하게 된 다른 왕들보다는 그나마 다행인 편이지만 입 부분이 타 버렸다. 구군복 어진의 경우 진작부터 공개되어 왔지만 나머지 두 어진의 경우 훼손 상태가 심각하다 보니 남아있는 부분이나마 보존 처리만 마치고 그동안 국립고궁박물관의 지하 깊은 수장고에 계속 보관되어 왔다가 2019년 하반기에서야 뒤늦게 공개되었다.
<colbgcolor=#bf1400> 《선원보감》에 실린 철종 초상화 | <colbgcolor=#bf1400> 《열성어진》에 실린 철종 초상화 |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에 남아있는 간략한 철종의 초상화가 있는데 위의 어진과 비교해보자. 얼굴을 실제 어진과 자세하게 비교하자면 과도하게 치켜세운 눈썹과 눈을 빼면 전체적인 분위기는 비슷하다. 태조, 세조, 원종, 영조와 함께 가장 뚜렷한 외모의 어진을 남긴 임금이다.
어진을 자세히 보면 경산일록에서 철종의 외모에 대한 기록에서 "이마가 각지고 콧마루가 우뚝하며 두 광대뼈에는 귀밑털이 덮여 있다. 귀의 가장자리는 넓고 둥글었으며 입술은 두꺼웠고 손은 컸다."라는 기록과 거의 일치하다.#
4.1.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철종 어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철종어진
- 국립고궁박물관: 철종 어진
- 답사여행의 길잡이 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방화수류정
- 대한민국 구석구석: 방화수류정(동북각루)
- 수원화성 테마관: 방화수류정
- 두산백과: 철종 어진
4.2. 대한민국 보물 제1492호
《철종어진》은 오른쪽 1/3이 소실되었지만 남아 있는 왼쪽 상단에 “予三十一歲 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이라고 적혀 있어 이 어진이 철종 12년(1861)에 도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규장각에서 펴낸 『御眞圖寫事實』에 의하면, 李漢喆과 趙重黙이 주관화사를 맡았고, 金夏鍾, 朴基駿, 李亨祿, 白英培, 白殷培, 劉淑 등이 도왔다고 한다. 당시 1개월여에 걸쳐 絳紗袍本과 軍服本을 모사했으나 현재 구군복본만 현전한다.
이 《철종어진》은 임금이 具軍服으로 입고 있는 초상화로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리고 군복의 화려한 채색, 세련된 선염, 무늬의 정세한 표현 등에서 이한철과 조중묵 등 어진 도사에 참여한 화원 화가들의 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점 등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ㅇ 규격(세로x가로): 202×93㎝
이 《철종어진》은 임금이 具軍服으로 입고 있는 초상화로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리고 군복의 화려한 채색, 세련된 선염, 무늬의 정세한 표현 등에서 이한철과 조중묵 등 어진 도사에 참여한 화원 화가들의 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점 등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ㅇ 규격(세로x가로): 202×93㎝
5. 가계
5.1. 친가(전주 이씨)
- 고조부: 영조(英祖) 이금(李昑)
- 고조모: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 부황: (추존)순조 숙황제(純祖 肅皇帝) 이공(李玜)
- 모후: (추존)순원숙황후 김씨(純元肅皇后 金氏)
5.2. 외가(용담 염씨)
5.3. 처가(안동 김씨)
- 장인조부: 거창부사(居昌府使) 김인순(金麟淳)
- 장인조모: 정부인 신씨(貞夫人 申氏)
5.4. 배우자 / 자녀
《선원계보기략》에 따르면 5남 6녀를 두었으며, 그중 5녀와 6녀는 《철종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소개하는 철종 생애(5) 문단에서는 2명의 후궁과 1명의 딸을 더 기록하고 있으나 그 근거는 알려지지 않았다.- 정비: 철인장황후 김씨(哲仁章皇后 金氏)
- 후궁: 귀인 박씨(貴人 朴氏)
- 서1남: 왕자(1854년 음력 7월 10일 인시 ~ ?)
- 후궁: 귀인 조씨(貴人 趙氏)
- 후궁: 숙의 방씨(淑儀 方氏)
- 후궁: 숙의 김씨(淑儀 金氏)
- 서3녀: 왕녀(1856년 음력 7월 5일 ~ ?)
- 후궁: 숙의 범씨(淑儀 范氏)
- 후궁: 궁인 이씨(宮人 李氏)[18]
- 후궁: 궁인 박씨(宮人 朴氏)
- 서5녀: 왕녀(? ~ ?)[21]
중전도 왕자를 한 명 낳고 여러 후궁들에게도 자식을 여럿 보았지만 그나마 오래 살아 옹주 작호를 받고 혼인까지 한 영혜옹주를 제외하면 다들 작호를 받기 전(7세~9세 이전)에 사망했다. 영혜옹주 역시 자식 없이 일찍 죽어서 철종의 후사는 끊겼다.
6. 여담
- 강화도 시절에 대해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가톨릭 신부 최양업의 편지에 따르면 민간에 알려진 바로는 철종이 친척 집에서 종 노릇도 해봤고 매양 주인에게 채찍으로 맞았다고 한다.현재의 임금님은 사냥꾼으로 불렸고, 자기 친척 집의 종 노릇을 했습니다. 장날이 되면 가장 값싼 일꾼 노릇을 했고, 인정머리가 털끝만큼도 없는 주인의 채찍을 거의 매일 맞았습니다.전 임금님이 승하함에 따라 군인들 한 패거리가 강화도에 몰려가서 그를 현재 임금님으로 모셔왔습니다. 그런즉 조선왕조의 창업 이래 500년 역사상 왕가에 이와 비슷한 사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왕족의 공개된 수치와 치욕을 정화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 황제의 권위로 그러한 불명예를 척결하고 조선 왕에게 영예(榮譽)를 회복시켜 주기를 청하는 사신을 중국 황제에게 보낸 것입니다.
다만 최양업 신부가 조선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고 그렇기에 어디까지나 카더라를 인용한 것에 불과하므로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곤란하다. 당시에 그런 소문이 돌았다는 것은 사실이더라도 그 소문의 신빙성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실제 귀양 제도에 대해 살펴보면 이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지방 관청에서 관리하고 식량을 대주고 동향을 보고하는 사람이 항상 있었는데 이를 보수주인(保授主人)이라고 한다. 유배의 형벌을 받은 이들을 감시 혹은 관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철종은 친척이 극히 귀해 후에 외가 친척을 사칭한 인간도 생겼을 정도인데 무슨 친척 집에서 일한단 말인가. 다만, 식량을 대주는 대신 일을 시키거나 혹은 제대로 식량을 대주지 않아서 일을 해야 하는 경우는 많았다. 마치 고구려의 미천왕과 인생 역전이 비슷한데 어쩌면 미천왕의 얘기에서 차용했을 수도 있다. 물론 당시 조선에 이런 소문이 돌았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철종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라 할 수 있으며 신빙성과는 별개로 나름 의미있는 사료라고 할 수 있다. 강화도 시절은 당대 백성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는지 덕지덕지 살이 붙어서 과장된 루머가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 잠저시절을 겪어본 왕은 많아도 농민까지 겪어본 왕은 철종이 유일하다.
- 강화도에서 엉겁결에 왕이 되었다는 사실과 빈농으로서 산 전력 때문인지 강화도에서 자란 까막눈 왕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출생지는 수도 한양으로 기초교육은 받았기 때문에 문맹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의 행장에 의하면 4세에 《천자문》을 이미 배웠으며 즉위 이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근년에 통감 2권과 소학 1권, 2권을 읽었다"라고 철종 본인이 직접 이야기한 바 있다. 천자문 이야기는 행장에 기록된 것이라 4살에 배웠다는 것은 띄워주기였다 해도 즉위 시점에서 이미 공부한 상태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유배당한 것은 14세가 되었을 때의 일(1844년, 헌종 10년)이고 1849년(헌종 15년)에 왕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실제로 강화도에서 산 기간은 겨우 5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다만 14세부터 청년기를 강화도에서 보냈기 때문에 아주 억지스러운 수식어까지는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보통 기억이 희미한 7~8살까지를 빼면 왕이 되기 전의 사실상 반을 강화도에서 보냈다고 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실 14살부터 19살까지면 중1부터 고3 나이까지인데 이 시기를 농사하면서 지냈다면 그냥 농사꾼이나 다름없다. 《천자문》, 《통감》, 《소학》은 모두 초급 교육에나 쓰이던 교재들이라 19살 기준으로는 부족한 면이 많고, 아버지의 사망이나 강화도로 유배되는 등의 사정으로 그 이상 나가지 못한 것은 물론 그나마 어렸을 때 배웠던 것도 많이 잊어버려 처음부터 다시 공부했다고 한다.[23] 흔히 알려진 대로 일자무식은 아니었지만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졸업에서 중학교 중퇴 후 공부를 오래 쉬다가 고3 나이 정도에 다시 중학교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한 수준이니 한 나라를 통치하는 군주로서는 확실히 부족한 면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왕족(종친)을 교육하는 기관이 있었지만 성종 때의 구성군 사건 이후로 직계 왕족의 5대손까지는 관직에 오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종친들은 학업을 열심히 하지는 않아, 《통감》, 《소학》은커녕 천자문조차 제대로 떼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왕족이기 때문에 관직에 나가지 않아도 먹고살 걱정은 없었기 때문. 특히 왕위에 가까운 왕족일수록 영특하다거나 공부를 열심히 한다거나 해서 쓸데없이 찍히는 일[24]은 삼가야 했을 테니 더더욱 그런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 로맨티시스트라는 얘기가 있는데, 강화도 시절 ‘양순’이라는 이름의 하층 계급 여인과 결혼을 생각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철저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천한 신분의 양순이 궁에 들어간들 무수리 정도밖에 할 수 없는 처지라 바로 철종의 후궁이 되는 건 불가능했다. 심지어 이런 내용의 야사까지도 있는데 양순에 대한 상사병으로 괴로워하는 철종을 보다 못한 조선 왕실이 몰래 사람을 보내 양순을 독살했다는 것. 나중에 이를 안 철종은 비탄에 잠겨 국사도 멀리한 채 황음의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독살인지 어떤지는 얘기마다 다르지만 일찍 죽었다는건 공통적으로 전해진다.
다만, 적어도 독살 부분은 조선 왕실에 대해 무지한 이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조선에서 국왕은 초월적인 존재라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라면 신분을 무시하고 후궁으로 삼을 수 있었다. 너무 미천해 바로 후궁으로 삼을 수 없다면 궁녀로 삼은 뒤 승은을 내리면 되고, 이마저도 경우에 따라선 생략이 가능하다.[25]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가 무수리 또는 천민 궁녀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조선 초기의 일이기는 하나 태종의 후궁인 효빈 김씨나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는 노비 출신인데도 정1품 빈까지 되었다. 경종~영조 시대 이후로 법적으로는 궁녀는 노비만이 될 수 있었으므로 천한 신분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26]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천한 신분이라서가 아니라, 철종이 왕이 된 뒤 정신없어서 못 챙기고 있다가 부르려고 보니 병에 걸려 이미 죽었다거나 하는 등 그녀가 입궁하지 못했던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선 후기는 선왕의 7촌(재종숙)으로서 강화도에서 농사짓던 촌놈인 철종이 즉위할 정도로 왕족이 귀해진 상태라 더는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왕이 마음에 들어해 후사를 볼 가능성이 높은 여자가 있다면 노비고 뭐고 알 바 없고 역적 후손이라도 족보 세탁이건 뭐건 해서 어떻게든 데려오려고 날뛸 법한 시점이었다. 그런데도 못 데려왔다는 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거나, 이야기 자체가 거짓말이라고 봐야 한다. - 특히 신분을 감안해보면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안동 김씨 입장에서도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천한 신분이기에 결국 안동 김씨와 맞서기는 불가능하고, 후궁의 자식들은 모두 태어나는 즉시 왕비의 자식으로 양자 입적된다.[27] 그런 이유로 수렴청정 또한 후궁은 절대로 할 수 없으며, 더 중요한 사실은 적자가 없다거나 요절했다거나 하지 않는 이상 웬만한 경우에서는 적자가 세자가 되어 다음 왕이 된단 것이다. 그 관점에서 본다면 안동 김씨 입장에서는 양순이 후궁이 되어 철종의 아들을 낳았다 한들 왕비가 아들 하나 낳기만 기다리면 된다. 양순이 낳은 자식이 왕이 되어도 수렴청정은 어디까지나 생모가 아니라 왕비가 하니까 그것도 상관없다. 더구나 양순이 낳은 자식도 후사를 얻기 위해선 결혼을 해야 하는데 그 아내를 안동 김씨에서 배출한다면 문제없다. 덤으로 양순이 중전이 될 가능성은 전무한데, 신분도 신분이지만 이미 숙종 시절에 후궁이 된 여자는 절대로 중전이 될 수 없게끔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왕의 나이가 점점 많아지는데 적자가 없으면 어쩔 수 없이 서자가 세자에 책봉될 테고, 한번 세자로 책봉되면 죽거나 정말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 하지만 왕위를 계승해도 역시나 천한 여자의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정치력과 능력이 비범하지 않은 이상[28] 안동 김씨에게 휘둘리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안동 김씨의 권세를 몰아내겠다고 왕이 작정한다면야 가능은 하겠지만 그러려면 상당한 결단력, 의지, 정치력, 배짱, 노력이 필요할 텐데 그러기가 어디 쉽나? 헌종의 전례가 있으니만큼 유난증을 떨었을 가능성도 없잖아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극단적인 수를 쓸 정도까지는 아니다. 막말로 진짜 저런 독살 사건이 벌어졌다면 위험해지는 건 안동 김씨일 수도 있다. 명분이 궁색하기는 하겠지만 왕 몰래 누굴 죽이는 것 자체가 일단 불법이고 조선 시대 왕은 정말 꼭지가 확 돌아버리면 없는 명분과 근거를 지어내서라도 누구 하나 죽여버리는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철종이 정말 꼭지가 돌아서 누구 하나 족쳐야 한다면 당시 안동 김씨의 수장급 인사인 김좌근 같은 인물은 당연히 위험하고, 그가 죽기라도 하면 나머지 안동 김씨들은 같은 꼴 되기 싫으니 버로우를 타야 하고 그만큼 철종의 권력은 강화되고 다시 안동 김씨들은 버로우행. 살더라도 일단 명목상 왕을 정말 꼭지돌게 만들었기에 또 꼭지가 돌까봐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29] 이 사건을 빌미로 철종이 왕다운 왕이 돼보자고 안동 김씨와 전면전을 걸어버리면 안동 김씨 입장에서는 딱히 맞설만한 명분도 없고[30] 게다가 철종이 타 가문들에게 "나와 함께 안동 김씨를 조져주면 너희들에게도 한 자리 주겠다."고 딜까지 걸어버리면 진짜 힘든 싸움이 된다.
- 경기도 파주 근방에 염종수라는 한 남자가 살고 있었는데, 새 임금 철종의 외가 집안이 용담 염씨(龍潭 廉氏)라는 것을 알았다. 그걸 보고 '용담 염씨는 자신의 본관인 파주(坡州) 염씨(廉氏)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기 때문에 엄격히 따지면 상감마마와 자신은 한 뿌리가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 다음에 철종의 외할아버지인 염성화(廉成化)의 가계(家系)가 자신의 가계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족보를 위조하는 엄청난 짓을 꾸민 다음 본인이 철종의 외숙부가 된다고 거짓 상소를 올렸다. 친척 하나 없어 항상 외로움을 느끼던 철종은 염종수 부자를 대궐로 불러와 잘 대접해고 벼슬도 주었다. 그렇게 잘 살게 된 염종수는 완전범죄를 꾸미기 위해 철종의 외할아버지 묘 앞에 비석을 세운 다음 거기에다 원래의 용담(龍潭)이라는 글자 대신에 자신의 본관인 파주(坡州)라고 새겨 넣는 짓까지 벌였으며, 그 뒤 본인의 권세를 이용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았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나중에 강화도의 파주 염씨 성을 가진 진짜 외숙부인 염보길(廉輔吉)이 그 사실을 밝혀내면서 결국 염종수는 기군망상죄로 목이 달아났고 그의 아들은 노비로 전락했으며 외할아버지의 묘도 다시 용담으로 복귀되었다. 철종의 진짜 외숙부인 염보길은 실제로 강화도에서 하인으로 살고 있었는데 염보길은 안동 김씨의 세력이 무서워서 차라리 하인으로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해 이후 평생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 채로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31]
- 조선 후기의 농민 봉기가 철종의 재임기에 제일 심했는데, 저 멀리 미국도 비슷한 시기에 남북 갈등기를 겪는 큰 고통을 겪었다. 즉, 조선과 미국 모두 비슷한 시기에 큰 어려움을 겪은 셈. 그래서 결국 이 왕 치세기의 말에 미국은 남북 전쟁이 발발했다.[32] 다만 두 국가의 차이점이라면 미국은 국력이 성장하던 시기였고 조선은 국력이 떨어지던 시기라는 차이가 있다.
- 그가 사망하기 전 즈음에는 세계 최초 사진기가 개발된지 40년이나 되었고, 미국 대통령도 1840년대부터 사진을 찍었다는 것을 본다면, 조선이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면 사진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7. 대중매체
출신 배경 때문에 여러 대중매체에서 철종은 '왕이 된 어리버리한 듣보잡 방계 왕족' 이미지로 자주 묘사된다. 그나마 긍정적으로 묘사할 경우 강화도 생활 등에서 백성들의 삶을 접하고 이를 통해 나름대로 국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본인의 능력과 제반 조건이 너무 부족해서 실의에 빠지고 정치에 뜻을 잃게 되는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7.1. 소설
- 소설가 김동인의 작품인 《운현궁의 봄》(1933)[33]에서는 다소 긍정적인 묘사로 나온다. 강화도 생활을 통해 백성들에게 어진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은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행하려 노력하는데, 당시의 노대신인 정원용에게 민생의 어려움을 꾸짖는 장면에서 이 모습이 잘 나온다. 하지만 당시의 국정은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해결이 안된다는 점 때문에 결국 정무에서 손을 놓게 된다.
7.2. 영화
- 1963년 개봉한 영화 《강화도령》에서는 배우 신영균이 연기했다. 국내에서 철종에 대해 만들어진 첫 영상 창작물이다. 야사에 알려진 철종의 첫사랑을 처음으로 영상화했으며 작품은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에서 무료로 공개했다.#
- 2014년 개봉한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의 내레이션으로 극 중 시대적 배경을 '철종 13년(1862년)'으로 설명하지만 시대적 배경으로 언급만 될 뿐 등장하지는 않는다.
7.3. 드라마
- 1990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대원군에서는 배우 최수종이 연기했다. 극 중에서는 "양순이(신윤정)가 보고 싶다"며 궁궐을 나가려고 하다가 병사들이 가로막자 담을 넘으려던 모습을 보였고 내관들은 지존인 왕의 몸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어서 그저 말로만 "아니 되옵니다"라고 안타까워 했다. 결국 양순이의 죽음으로 그야말로 삶을 놔버린 것처럼 방탕에 빠졌다. 병으로 쓰러질 무렵 안동 김씨에게 비웃듯이 "과인이 죽으면 참 당황하겠지?"라고 말하며 마치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 듯이 묘사됐다.
- 2007년 MBC 드라마 《궁S》에서는 가수 세븐이 연기한 "영성공 이후'로 등장하는데, 철종을 모티브로 하여 만든 가공의 현대 등장인물이다. 한편 여자 주인공의 배역명은 '양순의'인데 철종의 첫사랑 '양순'에서 따왔다.
<colbgcolor=#bf1400> 《닥터 진》의 철종 |
- 2017년 채널A 드라마 《천일야사》 - '철종의 외삼촌을 사칭한 천하의 사기꾼 염종수' 편에서 등장. 배우는 재연배우인지라 미상이다. 여기서 철종은 외로운 임금이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술에 취한 철종과 염종수가 방에서 허물없이 누워있는데 염종수가 "만약에 자신이 가짜 외숙부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철종은 "자신도 어차피 가짜 왕이니 상관없다, 가짜 숙부더라도 곁에 있어달라"고 말한다. 이에 염종수는 "가짜 왕의 가짜 외삼촌"이라며 웃는데 얼핏 보면 호탕한 웃음 같으면서도 결국은 왕을 기만한 비웃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역사대로 염종수가 사형되는 결말로 끝나[35] 이 장면이 더 씁쓸하게 느껴진다.
- 2020년 TV조선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에서는 배우 정욱이 연기했다. 여주인공인 이봉련(고성희)의 아버지로 나오는데 정치에 뜻을 잃은 데다가 몸이 안 좋아 종친에게 양위하려 한다.
<colbgcolor=#bf1400> 《철인왕후》의 철종 |
7.4. 만화
- 2017년 《툰드라쇼: 조선왕조실톡》: 252. 경운기를 탄 임금님에서는 개그맨 유병재가 연기했다. 자신을 모시러 온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러 오는 줄 알고 도망가는 모습이 묘사된다. 여기서도 철종의 운명은 불행하기 그지없는데, 첫사랑 양순(허안나 분)을 잊지 못해 궁으로 데려오려 하지만 조 대비가 보낸 자객에 의해 양순이 살해당한 이후에는 모든 의욕을 잃고 주색에 빠져 살다 슬하에 자식 없이 요절했다. 단, 양순이 일화는 야사에서 채용했다.
7.5. 게임
- 《빅토리아 3》에서 헌종의 후계자로 고증이 되어있는데[36], 게임 시작 기준 5살이고 왕인 헌종도 9살이라 왕과 후계자가 모두 꼬꼬마들이다. 개발 버전 기준으론 헌종의 단명이 구현되지 않아서 헌종이 장수할 경우 헌종보다 먼저 죽을 수도 있다.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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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금으로 즉위하기 전에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의 하교에 따라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피휘 문제에 따른 휘를 정할 때 같은 항렬대에 있는 익종의 이름과 항렬자를 맞춘 글자로 이름을 개명했다.[2] 이 중 영혜옹주만 작호를 받고 혼인할 정도로 성장했다.[3] 굵은 글씨은 황제 추존 시 추가한 존호이다.[4] 1908년(융희 2년), 대한제국의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5] 다음으로 즉위한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으로 조선통감부의 강압에 의해 태자에게 양위했고 1910년 일제에 의해 이왕(李王)으로 격하되었다가 1919년에 서거했고 그 당시에는 조선왕조는 이미 멸망하여 국상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못하고 일제 치하의 장례로 치러졌다. 그의 태자이자 후대 왕이며 조선왕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도 마찬가지이다.[6] 고종실록과 순종실록도 엄연히 실록이긴 하지만, 당시 국권을 찬탈한 일제의 입김과 영향이 있어 따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7] 조선 역사상 평민과 같은 삶을 살고 그 애환을 몸소 체험한 임금은 철종이 유일하다. 그나마도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마주해본 임금은 임진왜란 시기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 정도이나 광해군도 당시엔 세자 신분으로서 대우를 받았다.[8] 적서의 구분이 심하던 조선에서 따지고 따지자면 철종은 정통성이 심하게 약했다. 본인도 전계대원군의 서자, 전계대원군도 은언군의 서자, 은언군도 사도세자의 서자, 사도세자도 영조의 서자, 영조도 숙종의 서자이다. 그나마 사도세자까지는 서자일지라도 왕세자였기 때문에 희석이 될 순 있으나 3대째 서자인 방계 왕족은 힘으로 정책을 밀어붙이기엔 불리한 출신이다.[9] 사실 철종은 방계 왕족이기에 순조의 적장손인 헌종에 비해 정통성 면에서 큰 핸디캡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헌종 때에 세도 가문 간에 균형이 맞추어졌던 것에 비해 철종 치세의 모습은 갭이 너무 심하기는 했다. 이는 정통성 외에 국왕 스스로의 역량이 선대에 비해 낮아진 것도 한몫할 수밖에 없다.[10] 사실 조선에서 왕이 되기 위해선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해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맨투맨으로 붙어 공부와 시험을 계속 치러야했고, 일정 이상의 학문과 무예를 갖추지 않으면 안됐다. 실제로 철종 전까지 왕들은 대부분 짧게나마 세자 기간을 거쳤고, 방계 왕들도 선대 왕의 조카거나 동생인 식이라 왕자로서 예법이나 교양은 갖췄다. 그러나 출생부터 즉위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지던 방계 왕족으로 19세까지 평범하게 살던 철종에게 이런 복잡한 정치판을 개혁할 역량을 기대하긴 애초에 무리이다.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도 방계 왕족 A에 불과한 신분으로 즉위했으나 아직 12세의 어린 나이였고, 머리가 좋고 준비도 철저했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보좌를 받을 수 있었다.[11] 이는 선대 왕인 헌종도 마찬가지였다. 두 왕 모두 집권 후반으로 갈수록 문란한 성생활을 하며 정치와 멀어지다가 요절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허나 헌종의 경우 정말 여색에 빠졌던 게 아니라 안동 김씨의 전횡에 질려서 다음 후대만큼은 안동 김씨 출신 왕비에게서 자식을 보지 않겠다는 의지를 무언으로 표명했다는 말도 있고 또 저러면서도 나랏일은 나랏일대로 성실히 보았다. 헌종은 친정 이후 꾸준히 왕권 회복을 시도했으며 죽기 직전에는 외척들에게 넘어가있던 병권의 상당수를 회수했을 정도였다. 병권은 어느 시대나 권력에 직결되어 있는 만큼 헌종이 왕권강화를 위히 힘썼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849년(헌종 15년)에는 병조의 수장인 병조판서나 오군영의 수장들을 모두 외척이 아닌 사람들로 앉히기까지 했다.[12] 아버지는 김동악(金東岳)이다.[13] 아버지는 지우영(池右英)이다.[14]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따르면 태어난 당일 죽었다고 하나, 검증되지 않는다.[출처] 傳曰, “宮人方氏生女, 今爲三歲(궁인 방씨가 낳은 딸이 지금 3살인데), 昨日酉時, 又爲生女, 護産等節, 依例擧行.” - 《승정원일기》 2539책 (탈초본 123책), 철종 4년(1853년, 청 함풍(咸豊) 3년) 2월 22일 정유 5/24 기사.[16] 숙의 방씨가 낳은 3살된 딸 아기씨가 오시(午時, 오전 11시~낮 1시)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중략) - 《선전관청일기(宣傳官廳日記)》 계축년(1853년, 철종 4년) 3월 20일. (淑儀方氏所生三歲女阿只午時喪逝事承傳成單問安)[출처] [18]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는 6녀와 7녀를 낳았다고 소개하고 있지만 《선원계보기략》에 따르면 철종의 6녀와 5남의 어머니가 궁인 이씨이다.[19]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따르면 1858년 10월 13일에 태어나 1858년 10월 15일에 죽었다고 하나, 검증되지 않는다.[20]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따르면 태어난 지 4개월 만에 죽었으며 어머니가 궁인 이씨가 아니라 귀인 이씨(貴人 李氏)라고 하나, 검증되지 않는다.[21] 1858년생이라고도 하나 알 수 없다. 영혜옹주보다는 어리다.[22] #.[23] 게다가 철종은 자신이 즉위하던 해에는 읽은 게 없다고 했다. 공부를 아주 안 한 건 아니지만 열심히 한 것은 아니며 왕위와 멀었던 만큼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농사지으며 살아야 했던 사정상 그러기도 힘들었을 것이다.[24] 당시 안동 김씨 세도가에서 ‘왕족이 똑똑하면 명이 짧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방계 왕족 정도는 속속히 솎아 쳐낼 수 있던 안동 김씨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똑똑한 왕족은 견제를 많이 받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말은 굳이 세도정치 시기가 아니라 어떤 시대라도 똑같았다. 왕 자신 역시도 자신의 왕위를 넘볼 만한 쓸데없이 똑똑한 왕족은 기왕이면 없는 게 낫다.[25] 태종의 후궁이었던 가희아는 본디 천한 기생 신분이었지만 궁녀가 되는 과정조차 전혀 없이 갑자기 혜선옹주로 봉해지며 후궁이 되었다.[26] 혜경궁 홍씨가 양인을 궁녀로 뽑았다가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야단을 맞은 일도 있다. 물론 순조 대 공노비 혁파 등으로 노비 출신 수급은 차츰 어려워졌고 철종~고종 시대에 특히 지밀, 침방, 수방의 궁녀들은 대부분 중인 출신이었으며 집안에서 대를 이어 궁녀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위에서 인용한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편지에서 볼 수 있듯이 철종의 강화도 시절에 대한 과장된 소문은 이미 당대에도 돌아다녔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27] 신분상 모든 후궁의 자식들은 왕비의 자식이 되는 셈이다.[28] 영조는 정통성 문제를 자기 자신의 정치력과 능력으로 어찌어찌 해결했다.[29] 애초에 이 시기의 안동 김씨들도 철종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았고 자기네들 권력과 큰 관계가 없어보인다 싶으면 철종이 하고자 하는대로 존중해주는 면도 있었다. 예시로 조병현은 풍양 조씨의 일원으로써 헌종 재위기 말년에 안동 김씨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 때에는 헌종의 비호로 넘어갔지만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면서 결국 사사되었다. 그러나 조병현은 불과 몇년 뒤, 그것도 철종 재위기에 철종의 의사로 사면된다. 안동 김씨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사면하기 껄끄러운 면이 있음에도 그래도 자기네들 권력에 직접적인 영향은 안 간다고 봤는지 왕이 행하고자 하는대로 해준 것.[30] 사랑하는 상대가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일개 천출인데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독살이든 뭐든 죽여버린다는 극단적인 수를 썼다면 철종이 이들보다 더 극단적이고 분별없는 짓을 저지르지 않은 이상 다른 이들 입장에선 너무하다는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이 시대 왕에게는 자식을 많이 낳아 후손을 번창시켜야 한다는 의무가 있는데다 안 그래도 철종이 왕이 된 것도 정조 계열이 독자로 근근이 대를 이어오다 단절되었다. 제3자 입장에서 본다면 명분은 철종에게 있다.[31] 사실 왕족도 그렇지만 왕의 외척도 왕족처럼 태어나면서 부귀가 주어지는 자리는 아니다만 그래도 조용히 살기만 해도 자리보전은 가능하다. 왕 입장에선 외척 또한 친위 세력인 데다 어쨌든 친척은 친척이니 외면하진 않을 것이고 이 야사에 따르면 철종은 자기 친척은 잘 대해주는 만큼 먹고 살 걱정은 던다.[32] 그래서인지 이 왕과 얼추 비슷한 시기에 임기를 보냈던 재커리 테일러, 밀러드 필모어, 프랭클린 피어스, 제임스 뷰캐넌 등의 대통령들은 평가에서 전부 하위권 라인에 속해있다. 다만 이 왕 재임기의 거의 말년에 미국 대통령을 지냈던 에이브러햄 링컨은 1위이다.[33] 현대 흥선대원군의 이미지를 구축한 것으로 알려진 작품.[34] 철종의 첫사랑을 소재로 한 드라마로 《조선왕조 오백년》의 신봉승이 집필하고 김재형이 연출.[35] 염종수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철종의 모습이 다른 데다가 그 무엇보다도 기억 속 진짜 외숙부는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었는데 염종수는 거리낌없이 복숭아를 먹었다.[36] 헌종이 자식을 낳아서 철종이 후계자에서 쫓겨나거나 하진 않는다. <빅토리아 시리즈>는 인물보다는 국가 중심의 게임이라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처럼 인물 기믹에 그렇게 세세하게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