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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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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의미3. 역대 군주
3.1. 한국사3.2. 중국사3.3. 베트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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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太宗
한 왕조(王朝)의 선조(先祖) 가운데 그 공과 덕이 태조(太祖)에 버금갈 만한 임금
네이버 한자사전

동아시아 묘호의 한 종류.

2. 의미

일반적으로 국가의 기틀을 다진 황제에게 붙이는 묘호. 국가를 창건했기 때문에 붙는 태조란 묘호와 다른 점은 국가의 창건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국가의 창건자에 준하는 공적을 세워야 받을 수 있는 묘호다. 태종 묘호를 받은 군주로는 김춘추(신라 태종), 이방원(조선 태종), 유항(전한 태종), 이세민(당 태종), 조광의(북송 태종), 야율덕광(요 태종), 완안오걸매(금 태종), 오고타이(원 태종), 주체(명 태종→성조), 홍타이지(청 태종) 등으로 한결같이 해당 왕조의 기틀을 쌓는 과정에서 업적과 무게감이 대단하며 상당수는 묘호조차 필요 없이 본명만으로도 전근대, 현대의 역사서에 이름을 남길만한[1] 명군들이다.

대부분 건국 초기의 극심한 혼란을 수습하고 나라를 안정궤도에 올려놓아 이후 수백년간 왕조가 지속될 수 있는 기반을 굳건히 한 군주에게 태종이라는 묘호가 붙는다. 으레 태조가 되는 첫 임금 때에 나라가 완전히 안정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태조가 즉위하는 건 보통 커리어를 쌓고 지지기반이 확실해진 중장년층 이후이기에 시간적 여유도 부족하고, 임금도 결국 사람이라서, 개국공신들과 그 난세를 피땀을 함께 흘리고 함께 뒤집어쓰면서 헤쳐나오는 과정에서 얽히고 설킨 게 많은데 하루아침에 안면몰수하고 모질게 대하기 힘들다. 물론 세상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라 첫 번째 군주 대에 송태조(조광윤)처럼 개국공신들을 잘 구슬리고 퇴직금 쥐어주면서 개국공신들의 세력을 평화롭게 와해시키는 케이스도 있고[2] 홍무제(주원장)처럼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을 중국사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잔인하게 숙청하며 개국공신들이 찍소리도 못하게 하는 케이스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교통정리에도 한계가 있어서 결국 후대 황제인 송태종, 영락제가 숙청 작업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송태조, 홍무제 정도면 역사적으로 봐도 개국공신들을 잘 정리한 군주들인데도 말이다.

결국 대체로 2~3번째쯤에 즉위하는 태종이 만만치 않은 반대세력을 굴복, 제거하는 과정에서 숙청 등 상당한 진통을 겪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 과정을 제대로 못 해결하면 오대십국시대오호십육국시대 혼란기의 수많은 나라처럼 태조 - x[3] - 말제로 초라하게 끝나는 것이다.[4] 때문에 태종이란 묘호를 가진 군주는 대체로 강한 의지를 지닌 파워풀한 군주라는 인상이 강하다. 또 태종이란 묘호를 받은 군주들은 명군이라 평가받는 군주들이 많은 편이다.

보통 창건자인 태조의 (장남이 아닌) 아들[5]인 군주에게 태종이라는 묘호가 붙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왕조의 창건시 태조와 함께 국가 창건에 큰 공을 세운 경우가 많은데다가 왕조의 창건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 흔히 야기되는 혼란을 수습하고 왕조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교통정리 및 왕조의 체제를 제대로 형성해야 하는 막대한 책무가 이 2세대 임금에게 부여되기 때문이다. 개인사로 보면 전대 왕조가 끝물에 다다른 혼란기부터 역사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해 가끔씩은 자기 스스로도 건국에 공을 세우고[6] 건국 이후에는 대업을 물려받아 비로소 완성시켜 태평성대를 일으키고 죽으며 후대에 융성한 장수 왕조로 만드는, 고진감래라는 역사적인 흐름을 겪고 스스로 세우는 인물들이기에 매우 파란만장하면서도 영웅적인 서사에 어울리는 시대상, 인물상이다. 창건자가 어렵게 나라를 세웠더라도 그 아들 세대에서 왕조를 유지하지 못하고 멸망한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중국사만 봐도 100년 이상 장수한 통일 국가들 6개[7]는 모두 2대나 사실상 2대 자리에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은 군주가 있었으며 단명한 통일 국가들 4개[8]는 모두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은 군주가 없다. 실제 태종의 묘호를 받은 군주 중에는 왕조 건립에 지대한 공을 세웠거나 왕조 초기의 불안정한 상황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여 나라를 안정기에 올려 놓은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로 중국사 통일 왕조 중 후한[9]을 제외한 6국의 태종들은 6명[10] 전부 레전드급 황제들이다. 한국사에서 태종의 묘호를 받았다고 확실히 밝혀진 2명[11] 역시 레전드급 군주이다.

그래서 반드시 제2대 임금이라고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는 것은 아니며, 다른 묘호를 받는 경우도 많다. 물론 그 와중에 가까운 형제나 친척을 살해하는 등 도덕 윤리 면에서 점수를 깎아먹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가 이세민, 조광의, 주체, 이방원[12] 등이다. 원 태종과 청 태종의 경우 쿠데타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역시 적장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형들의 약점을 잘 파고들어 실력과 정치력으로 대권을 차지[13]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정복왕조였던 원과 청의 경우 적장자 계승 원칙이 분명하지 않았던 유목민족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유능한 자가 큰 유혈사태 없이 황제가 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위에도 나오지만 적장자 계승 원칙이 분명한 유교 국가의 태종들은 대부분 유혈사태 내지는 뒷말이 무성한 구리구리한 과정을 겪고 보위에 올랐다.

또한 앞서 설명한 이유로 인해 제3대 임금이나 그 다음대의 임금도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을 수 있다. 당장 신라태종 무열왕도 중시조라는 평가를 받기에 그런 사례며, 조선 태종도 해당된다. 다만, 태종 무열왕의 경우는 묘호 자체가 원래 중국의 제도고 신라 초기에는 서해안에 항구가 없어 중국과 본격적으로 교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김춘추 시대에 들어서 중국에서 묘호 제도를 새로 도입한 것에 가깝고[14] 이방원의 경우에는 사실 전임 군주인 정종이 숙종 때까지도 묘호를 받지 못한 군주였고 사실상 이방원의 바지사장에 불과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질적인 조선의 2대 국왕 자격으로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은 셈이다.

3. 역대 군주

3.1. 한국사

성명 묘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김춘추(金春秋) 신라태종
(新羅太宗)
무열대왕
(武烈大王)
654~661 29대 왕
이방원(李芳遠) 조선태종
(朝鮮太宗)
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
(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1400~1418 3대 왕

3.2. 중국사

성명 묘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자지(子至) 태종
(商太宗)
문왕
(文王)
BC 1582~BC 1571 4대 왕
유항(劉恆) 태종
(漢太宗)
효문황제(孝文皇帝) BC 180~BC 157 5대 황제
(한태조 유방의 4남)
이웅(李雄) 성한태종
(成漢太宗)
무황제(武皇帝) 304~334 1대 황제[15]
장무(張茂) 전량태종
(前涼太宗)
성왕(成王) 320~324 3대 왕
사마욱(司馬昱) 동진태종
(東晉太宗)
간문황제(簡文皇帝) 371~372 8대 황제
부등(苻登) 전진태종
(前秦太宗)
고황제(高皇帝) 386~394 5대 황제
석구멱(石寇覓) 후조태종
(後趙太宗)
효황제(孝皇帝) - 후조태조 추존
탁발사(拓跋嗣) 북위태종
(北魏太宗)
명원황제(明元皇帝) 409~423 2대 황제
유욱(劉彧) 유송태종
(劉宋太宗)
명황제(明皇帝) 465~472 6대 황제
소강(蕭綱) 소량태종
(蕭梁太宗)
간문황제(簡文皇帝) 549~551 2대 황제
이세민(李世民) 태종
(唐太宗)
문무대성대광효황제
(文武大聖大廣孝皇帝)
626~649 2대 황제
(당고조 이연의 차남)
성라피(盛羅皮) 남조태종
(南詔太宗)
위성왕(威成王) 712~728 귀의왕 추존
야율덕광
(耶律德光)
태종
(遼太宗)
효무혜문황제(孝武惠文皇帝) 927~947 2대 황제
왕린(王鏻) 태종
(閩太宗)
혜황제
(惠皇帝)
927~935 3대 황제
이칭 혜종(惠宗)
단사량(段思良) 대리태종
(大理太宗)
성자문무황제(聖慈文武皇帝) 946~951 3대 황제
조광의(趙匡義) 태종
(宋太宗)
지인응도신공성덕문무예렬대명광효황제
(至仁應道神功聖德文武睿烈大明廣孝皇帝)
976~997 2대 황제
(송태조 조광윤의 아우)
이덕명(李德明) 서하태종
(西夏太宗)
광성황제(光聖皇帝) 1009~1032 서하경종 추존
완안성(完顏晟) 태종
(金太宗)
체원응운세덕소공철혜인성문렬황제
(體元應運世德昭功哲惠仁聖文烈皇帝)
1123~1135 2대 황제
패아지근와할태
(孛兒只斤窩闊台)
태종
(元太宗)
영문황제(英文皇帝) 1229~1241 2대 칸[16]
(원태조 테무친의 4남)
주체(朱棣) 태종
(明太宗)[17]
체천홍도고명광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
(體天弘道高明廣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18]
1402~1424 3대 황제
(명태조 주원장의 4남)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태종
(淸太宗)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1627~1643 2대 황제
(청태조 누르하치의 8남)

3.3. 베트남사

성명 묘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이불마(李佛瑪) 태종
(李太宗)
대행황제
(大行皇帝)
1028~1054 2대 황제
진경(陳煚) 태종
(陳太宗)
통천어극융공무덕현화우순신문성무원효황제
(統天御極隆功茂德顯和佑順神文聖武元孝皇帝)
1225~1258 초대 황제
여원룡(黎元龍) 후여태종
(後黎太宗)
계천체도현덕성공흠명문사영예인철소헌건중문황제
(繼天體道顯德聖功欽明文思英睿仁哲昭憲建中文皇帝)
1433~1442 2대 황제
막등영(莫登嬴) 태종
(莫太宗)
흠철문황제
(欽哲文皇帝)
1530~1540 2대 황제
완복빈(阮福瀕) 태종
(阮太宗)
선위건무영명장정성덕신공효철황제
(宣威建武英明莊正聖德神功孝哲皇帝)
1648~1687 4대 왕[19]

[1] 이것은 왕위에 오르기 전이나 후계자가 되기 전에 남긴 명성도 상당하다는 의미이다. 대부분은 왕조 개국 이전부터 명성이 있었다.[2] 다만 천하통일이라는 대업의 완성은 본인 대에 보지 못하고 동생 송태종 재위기에 성사되었다.[3] 보통 여기에 1명에서 3명 정도의 군주가 들어가며, 군주 숫자에 상관 없이 대부분 혼란기로 인해 재위기가 짧은 군주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기간은 짧은 편이다.[4] 후주처럼 창업주가 일부러 조카 중에 매우 유능한 인물을 골라서 2대 황제로 계승시켜 놓았지만 하필 그 2대 황제가 요절해서 저 테크를 탄 불운한 경우도 있다.[5] 당나라, 명나라, 원나라, 청나라, 조선 등이 있다. 송태종 정도를 제외하면 중국사에 거론되는 대부분의 태종이 창건자 태조의 아들이다. 다만 송나라(북송)의 경우 태조의 아우 조광의가 제2대 황제가 되어 태종 묘호를 받았다.[6] 당태종이나 조선 태종은 특히 건국 이전에도 두각을 일으켜서 이름을 알린 인물들이다.[7] 전한, 당, 송, 원, 명, 청. 후한은 전한을 명목적으로 이은 나라이기 때문에 묘호 중복 문제를 피하기 위해 태종이 없다. 그러나 이당(李唐)은 태종이 있다.[8] 진(秦)(다만 이 나라는 시황제가 묘호를 폐기해서 묘호가 없던 나라이기는 했다), 신(어차피 1대로 단명한 나라라 2대 군주 자체가 없기에 2대 군주의 묘호가 있을 수가 없다), 서진, 수.[9] 상술했다시피 전한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건국되었고 전한에 이미 태종이 있어 명목상 같은 국가에서 중복된 묘호를 올릴 수 없었기 때문에 태종이 없었다. 그리고 이쪽은 사실 개국에 준하는 공을 세운 넘버2라 할 존재도 없이 광무제가 다 해버렸다.[10] 한문제, 당태종, 송태종, 오고타이 칸, 영락제, 숭덕제.[11] 김춘추, 이방원[12] 사실 이방원은 이 목록에 끼기에는 매우 귀여운 수준이다. 가장 행동이 비슷했던 이세민만 해도 자기 형과 아우 본인들 뿐만 아니라 그 일가족까지 모두 도륙냈으며 주체는 10족을 멸한다는 희대의 연좌제를 실행한 인물이다. 이방원은 그 일생일대의 경쟁자를 제거할 때도 후계는 남겨줬다. 거기다 명분으로 봐도 저들과 낄 수준은 아닌데 영락제는 건국에는 지분은 하나도 없었으니[20] 비교 자체가 불가고 당태종 역시 비슷하게 지분이 컸지만 대신 분명히 결격 사유도 없고 인망도 높은 동복 형 이건성을 죽이고 올라간 것이다. 이방원은 반대로 자기가 건국에 공이 지대했음에도 훨씬 어린 이복동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긴 경우였기에 명분이 매우 높았으며, 그 이복동생을 죽이는 일에는 그 이복동생의 외가 친척들마저 동조했을 정도였다. 조광의의 경우가 그나마 이방원의 건전한(?) 숙청과 비교할 수 있으나, 조송 황실 최대의 미스터리인 촉영부성 떡밥이 두고두고 회자되기는 하지만 그 역시 형 조광윤이 젊은 장군일 때부터 형을 따라 공을 세우고 후덕한 이미지로 일관한 형의 뒷편에서 많은 정치적 공작을 성공시키며 송의 개국에 공헌한 형의 충복이자 잠재적 경쟁자로 발돋움한 것이 이성계, 이방원 부자의 관계와도 유사했다.[13] 우구데이는 주치의 혈통 논란으로 인한 주치와 차가타이와의 심한 갈등에서 반사이익을 봤고, 홍타이지 역시 4대 버일러 중 막내였다가 한에 올랐으나 아민과 망굴타이를 숙청한 후 다이샨의 항복을 받아내며 전제권력을 얻었다.[14] 신라의 56대 임금 중에서는 순서로 따지면 2대 남해 차차웅, 업적으로 따지면 5대 파사 이사금 정도가 다른 왕조의 태종에 해당하는 임금의 유형에 가깝다. 단지 신라 초기에는 묘호라는 개념이 중국에서 수입되기 전이라 없어서 지정하지 않았을 뿐이다.[15] 실질적으론 3대 군주.[16] 몽골 제국의 2대 칸이었던 점이 고려되어, 원나라 개국 후 세조 쿠빌라이 칸에 의해 원나라의 태종으로서 추존되었다.[17] 이후 성조(成祖)로 고침[18] 이후 계천홍도고명조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啓天弘道高明肇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로 고침.[19] 양군공(陽郡公) 현주(賢主). 황제가 아니라 제후에 해당한다.


[20] 1360년생인데, 명 건국 1368년으로 10살도 안 되었으니(...) 덧붙이자면, 주원장은 1398년에 죽을 때까지 태조 치고는 정말 긴 30년이나 재위했다. 정말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와서 성장환경부터가 장수 및 건강에 (-)면 (-)였지 절대 (+)일 수가 없었던데다가, 장노년때 숙청을 몇만 명 단위로 하면서 스트레스를 안 받았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데도 30년 재위 & 향년 70세(1328년생)를 기록한 것은 정말 독보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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