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09C00, #E8CB2D 20%, #E8CB2D 80%, #C09C00)" 고종 관련 문서}}} |
생애 · 홍릉 · 어진 · 즉위 배경 · 평가 · 대중매체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a122d, #6d1b43 20%, #6d1b43 80%, #4a122d)" {{{#!wiki style="margin:-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6d1b43><tablebgcolor=#6d1b43> | 흥선대원군 관련 문서 | }}} |
생애 · 섭정 배경 · 평가 · 여담 · 매체 |
1. 개요
조선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의 즉위 배경을 다룬 문서이다.굳이 별도로 문서를 분리해 작성해야 할 정도로 고종의 즉위 배경은 매우 복잡하다. 이는 조선 후기부터 이어진 왕실의 잦은 절손[1] 현상에 기인하며, 상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2. 고종과 선왕 철종과의 관계
<colbgcolor=#bf1400> 2018년 9월 9일에 방영된 KBS 〈역사저널 그날〉에 등장한 철종-고종 가계도 |
고종은 선왕 철종과 즉위 전까지는 법적(양자제도)으로 9촌 관계였으나,[2][3] 실제 혈통상으로는 17촌 차이 나는 먼 친척이었다.(고종은 철종의 17촌 조카 = 7종질 = 7종 조카[4][5][6] 고종은 즉위 후, 순조의 장남 익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철종과 3촌 관계가 되었다. 고종의 직계는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후손으로, 왕실 직계와는 혈통상 거리가 있었으나, 할아버지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왕실의 일원이 되었다.
9촌 역시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먼 친척 관계의 촌수이다. 하지만 17촌까지 가면 혈통상으로도 관계가 없는 완전한 남남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입적하면서 당시 기준으론 친척으로 볼 수 있는 9촌으로 당긴 것이다.
3. 철종 승하 당시 왕실 상황
그래서 흥선군의 정치공작으로 철종과 가까운 다른 왕손을 제치고, 고종이 왕이 되었다는 얘기가 돌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colbgcolor=#bf1400>양자 관계를 배제하고 실제 혈통 계보만 그린, 철종 사망 당시(1864년 1월) 효종 계열 남계 자손 가계도. 연한 노란색 바탕 인물은 친아들 없이 사망한 사람들이며, 저 표의 인물들 중 1864년(고종 즉위년) 1월, 고종의 즉위하는 달 기준 영평군과 재성(경은군)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망했다. |
철종은 예외적으로 선왕 헌종의 숙부 뻘이었지만, 본인 외의 왕족들이 너무 먼 관계여서 법도를 어기고 즉위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철종의 후계자를 정하는 데 있어 법도를 다시 어기는 것은 무리였으므로, 나이가 다소 어리더라도, 헌종과 같은 항렬인 '재O' 돌림 항렬의 후손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 예법에 맞았다. 이 당시 철종의 후계자가 될 종친들 중에서 가장 가까운 혈통은 17촌이었다. 5촌 조카인 재성이 있었으나 밀려났다. 그 이유는 후술된 내용을 참조. 그리고 재성과 영평군을 제외하면, 효종의 남자 후손이 없었으며, 가장 가까운 혈통은 효종의 형제들인 소현세자와 인평대군의 후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중 철종의 조카 뻘인 사람들과 철종의 촌수를 계산하면, 17촌이 되는 것이다. 이들의 공통 조상인 인조를 기준으로, 철종은 인조의 8대손이고, 소현세자파와 인평대군파의 후손들은 9대손이기 때문이다.
철종이 사망할 당시 왕손들은 모두 족보상 사도세자의 후손들이었으며, 정확히는 사도세자의 서자 3명인 은언군, 은신군,[7] 은전군의 후손들이었다. 철종의 조카뻘 왕손들은 은언군 계열인 재덕(덕안군), 재성(경은군), 은신군 계열인 재원(완림군), 재긍(완영군), 재면(흥친왕), 명복(고종), 재선(완은군), 은전군 계열인 재근(인양군) 등이 있었다.[8] 이제, 이들이 왕위 계승자로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살펴보자.
3.1. 은언군가
재덕과 재성은 은언군의 장손 익평군의 아들이었다. 이 중 재덕은 은언군의 제사를 받들어야 하는 종손이었으며 양자였다. 그런데다, 실제로는 중종 때 갈라진 덕흥대원군의 후손이었기에 혈통적으로 너무 멀었으며, 입양 시기도 철종이 죽기 바로 직전이었다.재성은 익평군의 친아들로 철종의 이복형 영평군을 제외하면 철종과 혈연상 가장 가까웠지만, 고작 3살밖에 안 된 너무 어린 아이인데다 서출이었다. 여기서 '서출이 왜 문제인가?'하고 의아해 할 수 있다. 왕족의 서출이면, 일반 사가와는 다르게 왕족으로 대우받고 왕이 된 경우가 이전에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9] 하지만, 그것은 왕의 4대손까지만 적용되는 것이었고, 재성은 왕의 5대손을 넘어갔기 때문에, 일반 사대부가의 서얼과 같은 위치로 간주되었다.[10]
상술한 이유로 인하여 재성은 은언군 가문을 이을 수 없었고, 그로 인해 재덕이 입양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혈통상으로는 재성이 가장 우선적인 왕위 계승자였지만, 밀려났다. 그래서 은언군 가문에서는 왕을 배출할 수 없었다.[11]
3.2. 은신군가
흥선군의 아버지 남연군이 바로 이 은신군의 양자이다. 남연군과 그의 자손들은 실제로는 인조의 아들 인평대군의 직계 후손이었기 때문에, 혈통상으로 그나마 왕통과 가장 가까웠다. 또한, 후손들도 많이 있어 현실적으로도 가장 안정적으로 왕위를 잇고, 이어갈 수 있는 집안이었다.3.3. 은전군가
서열상 은신군가보다 낮았으며, 실제로는 인조 계통조차 아닌 선조의 9남 경창군의 후손이라서,[12] 왕통과의 혈연적 거리가 위의 은신군가보다도 더 멀었다. 법적으로든, 실제 혈연상으로든, 은신군가에게 계승권이 밀리면 밀렸지 결코 앞서지 못하는 처지였다.4. 인평대군파의 종가에서 택군[13]하는 선택지?
<colbgcolor=#bf1400>양자 관계를 배제하고 실제 혈통 계보만 그린, 철종 사망 당시 인평대군 종가 남계 자손 가계도. 진익의 후손만 표시되었으며, 연한 노란색 바탕 인물은 남연군의 일가이고, 밑으로 계보가 이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아들없이 죽었거나 아직 아들을 못 낳은 사람들이다. 빨간색 테두리는 철종의 조카뻘 항렬, 즉 다음 왕 후보가 될 수 있었던 항렬이다. |
하지만 그렇게 따져도 남연군 집안에서 선택해야 했다. 왜냐하면 남연군은 상술했듯 인평대군의 직계 후손인데, 그중에서도 인평대군 4대 종손 진익의 차남 병원의 차남이기 때문이다. 적장손을 옹립하자면서 중간에 갈라진 집안에서 고른다는 말이 모순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본 문단의 요지는 양자 입적 등 법적 요소를 다 배제하고, 오롯이 종가의 적장자 혈통만을 따졌을 때도 남연군 집안이 최우선위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랬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인평대군 종가 자체는 진익의 장남 병순(즉, 남연군의 큰아버지)의 후손으로 이어졌지만, 철종 사망 당시 병순의 후손들 중 철종의 조카뻘 항렬은 없었다. 그리고 당시 인평대군의 종손인 연응은 철종과 같은 항렬이었다.[14]
그래서 차순위인 병원의 후손들 중에서 골라야 했는데, 병원의 장남 도중 계열은 3남 휘중의 장손 재윤이 고종 즉위 후에 양자로 들어가 이었다.
그렇다면, 병원의 차남 계열에서 고를 수밖에 없는데, 그 차남이 바로 남연군이다.
즉, 족보상으로든, 혈통상으로든, 어떻게 따지고 들어가도, 은신군 - 남연군 후손들 중에서 다음 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5. 그럼에도 흥선군의 로비가 즉위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남연군의 후손들은 많았고, 그 중에서 명복이 국왕으로 선택된 것은 전적으로 흥선군의 정치적 로비 덕분이었다. 흥선군의 형들인 흥녕군, 흥완군, 흥인군 모두 아들이 한 명씩 있었으며, 흥녕군과 흥완군의 자식은 양자였지만, 이들도 모두 친동생들의 자식이라 남연군의 자손으로서 혈통에 문제는 없었다.[15] 흥선군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종법상의 서열을 무시하고,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는 방안을 택했다.전통적으로 종법제 하에서 적통 아들이 한 명만 있을 경우, 다른 계통으로 입양시키지 않고, 그 다음 순위의 서열에 있는 사람이 입양되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절대적인 규칙이 아니었으며, 예를 들어 새로 입적하는 집안이 본가보다 서열이 더 높다면, 적통 아들이나 심지어 차기 종손이 입적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사례로는 경창군의 10대 종손이 될 예정이었으나 흥완군에게 출계한 을경(완순군), 경창군의 증손인 연은군 가문의 7대 종손이 될 예정이었으나 영평군에게 출계한 순달(청안군) 등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재원, 재면, 재긍이 철종 혹은 익종의 양자로 들어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던 선택이었다.
정치적인 요소가 작용되었다는 정황은 재긍이 배제된 점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재긍은 생모가 세도 가문인 신 안동 김씨이기 때문에, 안동 김씨 세도를 경계하던 차기 왕위 지명 최종 결정권자였던 효유대왕대비(신정왕후)의 선택을 받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흥선군은 왜 장남 재면이 아닌 차남 명복을 내세웠던 것일까. 위 각주에서 서술했던 것처럼, 당시 재면이 흥완군의 양자로 갔다고 하지만, 그 사실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흥선군은 고종 즉위 후에 재면을 다시 불러들여 본인의 후사를 잇게 했다는 점을 볼 때, 흥완군의 양자라는 사실로 인해 재면이 왕위 계승자에서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도 역시 정치적인 문제가 작용했다. 당시 재면은 19살로 성인에 해당했기 때문에, 그가 왕위에 오를 경우 흥선군이나 대왕대비가 섭정으로서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었다. 그래서 흥선군은 나이가 아직 어린 둘째 아들, 즉 12살의 명복을 왕으로 세운 것이다. 이로써 흥선군은 어린 명복을 왕으로 추대하여 자신이 권력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결국, 혈통 문제와 흥선군의 정치적 사전 작업으로 인해 명복은 제26대 임금, 고종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1] 가문을 이을 자손을 두지 못함[2] 철종이 명경대왕대비(순원왕후) 김씨에 의해 순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정조의 손자가 되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장조)의 이복형인 진종(효장세자)의 양자였으므로, 법적으로 사도세자의 현손(4대손) 고종과 진종의 증손(3대손) 철종은 영조를 공통조상으로 한 9촌 간이다.[3] 고종이 익종(효명세자)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이 되었으므로, 즉위 후에는 철종과 3촌 작은아버지, 조카지간이다.[4] 종질=5촌, 재종질=7촌, 3종질=9촌, 4종질=11촌, 5종질=13촌, 6종질=15촌, 7종질=17촌[5] 실재 혈통상으로 고종 태황제(본인) → 흥선대원왕(1대조) → 남연군(2대조) → 이병원(3대조) → 이진익(4대조) → 안흥군(5대조) → 의원군(6대조) → 복녕군(7대조) → 인평대군(8대조) → 인조(9대조) → 효종(10촌) → 현종(11촌) → 숙종(12촌) → 영조(13촌) → 장조 의황제(14촌) → 은언군(15촌) → 전계대원군(16촌) → 철종 장황제(17촌)[6] 법적으로 고종 태황제(본인) → 문조 익황제(1대조) → 순조 숙황제(2대조) → 정조 선황제(3대조) → 장조 의황제(4대조) → 영조(5대조) → 진종 소황제(6촌) → 정조 선황제(7촌) → 순조 숙황제(8촌) → 철종 장황제(9촌)[7]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제사를 받드는 봉사손으로, 죽은 후에 지명받았고, 항렬상 계보가 명확하지 않아 당시에는 사도세자의 친자로 인식되었다.[8] 철종의 형 회평군은 자식 없이 사망했고, 영평군 또한 후사가 없었으며, 영평군은 후에 양자를 들이게 된다. 또한, 은전군파의 재근에게는 동생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고종 즉위 이후에 태어나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9] 서출로서 국왕이 된 대표적인 예가 영조, 순조.[10] 그의 조상 중 마지막으로 임금이었던 사람은 5대조 영조였다. 고조부 사도세자가 장종(莊宗)으로 추존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한참 뒤인 대한제국 수립(1897년) 이후의 일이었다. 그의 당숙 철종 또한, 서출(여기는 무려 숙종 때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서출이었다.)이었고, 군호도 없었지만, 영조의 4대손이기 때문에, 왕족으로 인정받았다. 군호가 없었던 것은 단지 받을 시기가 늦어져서 그랬던 것 뿐이다.[11] 재성의 나이가 고종과 비슷하거나 더 많았다면, 재성이 즉위할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12] 정확히는 은전군의 양손자로 입적한 완평군(재근의 아버지)이 경창군의 9대손이었다.[13] 擇君. 더 나은 임금을 선택하다.[14] 연응의 아들인 재극은 고종이 즉위한 이후에 태어나서 저 당시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병순의 차남 화중의 손자 재하가 생존해 있긴 했지만, 그는 원래 광평대군파 출신으로 나중에 입양왔다.[15] 흥녕군의 양자는 재원(흥완군의 친자)이고, 흥완군의 양자는 재면(흥선군의 친자)이었으며, 흥인군의 아들은 재긍이다. 재면만 과거형인 이유는 후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