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08 23:10:56

완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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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실선은 친자, 점선은 양자 관계임
※ 왕족 / 황족으로서 경술국치 이전에 정식 봉호를 은 사람만 기재함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 † 기호는 사후 추증된 인물이며, 흥선헌의대원왕을 제외하면 대한제국 수립 이전 사망한 왕족임
※ 영친왕은 이은의 황태자 책봉과 더불어 폐기된 작호로, 황태자 자격으로 받은 '의민황태자'라는 시호가 있으나,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지은 사시(私諡)이므로 표기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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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장종의 현손
대한제국 장조[1]의 현손
완영군 | 完永君
봉호 완영군(完永君)
이름 이재긍(李載兢)[2]
순경(舜卿)
시호 헌간(獻簡)
출생 1857년 3월 12일 (음력)
사망 1881년 1월 23일 (음력) (향년 23세)
1. 개요2. 생애3. 사후4. 후손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왕족이자 관료. 이름은 이재긍(李載兢). 흥선대원군의 셋째형 흥인군 이최응의 장남이자 유일한 아들이다.

2. 생애

1857년(철종 8년) 3월 12일, 한성부에서 흥인군 이최응과 당시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 김만근의[3] 딸 군부인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재긍은 고종사촌동생이었지만, 이재긍의 아버지 흥인군이 고종의 아버지 흥선군의 형이었기 때문에 가문서열은 이재긍이 더 높았다. 따라서, 철종 사후에 왕위 계승 순위에서도 고종보다 앞섰으나, 왕이 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신정왕후(조 대비)와 흥선군의 정치적 거래, 어머니가 안동 김씨라는 점[4], 그리고 흥인군 가문을 이을 독자였기 때문이었다.

고종 즉위한 후, 세자시강원설서[5]를 거쳐 1871년(고종 8년), 왕족 자제들만 응시할 수 있는 선파유생전시(璿派儒生殿試)에 합격한 후 궁궐의 별입직(別入直) 군관이 되었다.

1873년(고종 10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6] 이후, 1874년(고종 11년), 삼촌 흥선대원군이 실각했음에도, 명성황후가 그를 중용하여 관직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는 이재긍의 아버지 흥인군이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오히려 민씨 척족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이후, 조정 내에서 승승장구하며 여러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규장각 대교, 문례관, 세자시강원 보덕, 승정원 승지도승지, 성균관 대사성, 규장각 직제학, 홍문관 부제학, 이조 참의 및 참판, 동지돈녕부사, 통리기무아문 당상 및 선어학당상, 예조 참판 및 판서 등 다양한 요직을 거쳤다.

3. 사후

고종이 여러 차례 약재를 내려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결국, 1881년(고종 18년) 1월 23일, 23세의[7]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사망 후 시호 '헌간(獻簡)'을 받았다. 1899년(광무 3년) 9월,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고조부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되면서 황제의 4대손에 해당되어 '완영군(完永君)'으로 추증되었다.[8] 1904년(광무 8년) 5월 24일, 의정부참정 겸 홍문관 대학사 규장각학사로 추증되었다.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천리 향천사 뒷산 계좌(癸坐)에 있으며, 묘비문은 윤용구가 짓고, 글씨는 홍정후가 썼다.

이재긍의 부인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만인 1885년(고종 22년)에 남편과 마찬가지로 요절했다. #

4. 후손

슬하에 자식이 없었던 관계로, 같은 전주 이씨 출신인 광흥령 이희하(李熙夏)의 아들 이용구(李龍駒)를 양자로 입적했다. 그런데, 이희하 - 이용구 부자는 광평대군로, 흥인군 집안과는 무려 400년 전 세종대왕의 아들 대에서 갈라진 계통이다. 즉, 혈연상으로 너무나도 먼 친척이라 사실상 남과 다름없는 가문에서 양자를 들인 것이다. 이재긍과 이용구의 혈통상 촌수는 무려 35촌에 달한다.

이용구는 양자로 입적된 후, 이름을 '이은용(李垠鎔)'으로 개명했다. 하지만, 1900년(광무 4) 고종의 3황자가 '이은(李垠)'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자, 다시 '이지용(李址鎔)'으로 개명했으니, 바로 을사오적의 멤버인 그 이지용이다.

이지용은 두 아들, 이해충과 이해문을 두었다. 장남 이해충은 세 아들(이경주, 이문주, 이홍주)을 두었음에도, 본가인 광평대군파에서 조카 뻘 항렬에 해당하는 이영주를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았다. 이해충이 일찍 사망한 탓에, 이영주는 이지용 사후 흥인군계의 종손이 되었으며, 이지용이 보유했던 조선귀족 백작 작위를 승계받고,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했다. 8.15 광복 이후, 반민특위로부터 소환장을 받았으며, 1955년 4월에 사망한 것 외에는 알려진 정보가 많지 않다.

둘째 아들 이해문은 이해주, 이석주, 이철주 등 3남을 두었다. 그러나, 그 외의 정보는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1] 남연군의 양아버지 은신군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봉사손이었다. 그러나 계대 문제로 조선 시대 당시에 은신군의 후손들은, '우리는 연령군의 제사를 챙길 뿐, 엄연히 사도세자(장조)의 자손'이라고 인식했고, 왕실에서도 그들에게 영조 - 사도세자의 후손 자격으로 군호를 주었다. 20세기 중반부터는 연령군을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연령군, 낙천군, 은신군 문서 참조.[2] 장조의 현손 항렬 대에서는 이름에 '어진사람 인(儿)'이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정조의 증손인 헌종은 '환()'으로 안에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고종은 '형()'으로 좌우로 밖에 나뉘어 있으며, 초명 '재황(載)'에는 '황(晃)'의 밑에 발의 형태로 들어가있다. 은언군의 증손인 덕안군은 '재덕(載)', 청안군은 '재순(載)'으로 파자하지 않으면 잘 알아보기 어려운 형태이다. 은신군은전군의 증손으로 완림군은 '재원(載)', 완순군은 '재완(載)', 완영군은 '재긍(載)', 흥친왕은 '재면(載)', 완은군은 '재선(載)', 인양군은 '재근(載)', 의양군은 '재각(載)', 예양정은 '재규(載)'로, 고종의 초명과 마찬가지로 발의 형태로 온전히 들어가있다. 완평군의 둘째 아들 '재현(載)'은 본가의 양자로 들어가 황실 종친 자격을 잃었지만 이름자에 '儿'은 그대로 있다. 유일하게 경은군 '재성(載星)'이 규칙을 적용받지 않았는데, 서자인 데다 작호를 받은 게 굉장히 늦은 시기여서 그런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중 (헌종을 제외하고) 장조의 실제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은 유일하게 이 규칙을 사용하지 않은 이재성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입양을 통해 족보상 후손이 된 경우였다.[3] 병자호란순국김상용의 8대손이다.[4] 당시 차기 왕위 지명권자 신정왕후(조 대비)는 안동 김씨 세도를 극도로 경계하던 사람이었다.[5] 世子侍講院說書. 조선시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정7품 관직. 세조가 기존의 좌·우정자를 설서로 개칭하고, 1명으로 줄였으며, 영조가 겸설서 1명을 추가했다.[6] 병과 합격자는 정9품계를 받았으며, 이미 관직에 있을 경우에는 1품계를 추가로 올려주었다.[7]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로 25세.[8] 봉호는 왕실 본관 완산(전주)의 '완(完)'과 어머니 김씨의 본관 안동의 별칭 영가(永嘉)의 '영(永)'에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