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어진
1. 개요
선원전에서 보관했던 전신상과 선원전의 배치대로 구성한 조선~대한제국 어진 및 복원본 왼쪽부터 차례대로 태조, 세조, 원종[1], 영조,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이다. |
2. 상세
조선시대 어진은 개국 초부터 꾸준히 제작되었으며, 실록에도 태조 이후 역대 왕과 왕후의 어진에 대한 기록이 매우 많이 나온다. 모든 왕이 초상화를 남긴 것은 아닌데, 연산군이나 광해군과 같이 폐위된 임금의 경우는 초상화의 제작 여부가 기록에 나와 있지 않고, 인종과 같이 생전에 어진을 그리지 말라고 지시했고, 그 지침 때문에 사후에도 어진을 제작하지 않은 왕도 있어서 모든 왕의 어진이 있던 것은 아니다. 다만3. 조선의 진전 제도
3.1. 조선 초기(임진왜란 이전)의 진전 제도
태조부터 어진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데, 태조 이성계의 경우 태조의 어진만 봉안한 진전(眞殿, 어진을 모시는 곳)만 여섯 곳[2]었다고 한다. 기록상 가장 먼저 등장하는 태조진전은 영흥의 준원전으로, 환조(태조의 아버지)의 집에 세워졌다. 1396년에 세워져 1398년 2월 처음으로 어진을 봉안했다.다른 초대 임금의 어진을 봉안한 곳은 선원전으로, 기록상 1430년(세종 12년)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초창기에는 선원전에 선왕선후들의 어진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를 보관했다. 일반적으로는 이러하였지만 예외적으로 세조의 어진을 봉안하는 봉선전과 덕종(의경세자)의 어진을 보관하는 의묘후전을 두기도 했다. 둘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세조의 봉선전의 경우는 광릉 앞에 설치되어 고려 시대의 어진 제도를 연상시키는 능묘의 영전 형태였다. (이는 고려시대의 모습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도 있고, 세조의 숭불적인 성격을 반영했다고도 볼 수도 있다.) 의경세자의 의묘후전은 성종 대에 3년 동안만 유지되었는데, 의경세자가 정식 왕으로 등극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선원전에 어진을 봉안하기 전에 임시적인 조치에 가까웠다.
여하튼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의 진전 제도는 한나라나 송나라의 제도를 부분적으로 도입하며 잘 유지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1469년(예종 1년)에 이미 왕과 왕후, 추존왕의 초상화가 33점이나 되었으며, 1548년(명종 3년) 선원전에서 받들던 태조어진만 26점이었다고 한다.
3.2. 조선 중기(임진왜란~숙종 이전)의 진전 제도
조선 초에 활발히 제작되었던 그 많던 어진들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병란을 이겨내지 못했다. 임진왜란 당시 궁궐이 불타며 태조 어진, 문종 어진[3], 세조 어진[4], 덕종 어진만이 남았다고 전해진다.그러나 선원전의 어진 외에도 어진들은 있었기에 몇몇 어진은 남아 있는 상태였는데,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한양 수복 전후로 태종과 세종 어진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당시 태종의 어진은 굉장히 낡고 삭아서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었다고 전해지며[5], 세종의 어진은 강화에서 옮겨와 봉안했다는 기록[6]만 나올 뿐이다. 정유재란 때는 한양이 함락당한 적이 없기 때문에 무사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후 인조 대의 기록에서 형태를 분간하기 어려운 선왕들의 어진을 강화도로 옮길 것인지를 논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7]을 보면 병자호란 때 기타 다른 왕들의 어진들과 함께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란 후의 임금들은 나라가 혼란스러워인지 몰라도 어진을 남기지 않았는데, 선조는 어진 그리기가 싫다며 거부했다고 하며 인조, 효종, 현종, 경종은 어진을 그렸다는 기록이 없어서 이들도 어진이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진전 역시 많은 타격을 받았는데, 선원전과 대부분의 진전이 불타 없어지며 광해군 때 경기전을 중건하며 다시 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한다. 이때 묘향산으로 피난 가 있던 태조의 어진을 다시 봉안했으며, 평양에 영숭전을 다시 중건하며 태조 어진의 이모본을 봉안하기도 했다. 또 태조와 세조 어진을 옮기는 과정에서 한양 남쪽에 남별전을 세우게 되는데, 처음에는 임시적인 곳이었지만 후대로 가며 큰 진전으로 발전하게 된다. 추가로 강화도에 봉선전과 영숭전을 세워 태조와 세조의 어진을 각각 봉안하였지만, 병자호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 인조가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영정을 이곳에 보관하기도 했다.
다시금 체제를 잡아가나 싶었지만 곧이어 두 차례의 호란이 있어 다시 제도가 망가져 버린다. 결국 두 차례의 왜란과 호란을 겪은 후 남아있는 어진은 창덕궁 선원전에 보관한 태조 어진, 전주 경기전에 보관한 또다른 태조 어진, 그리고 남별전에 봉안한 세조와 원종 어진이 전부였다.
3.3. 조선 후기(숙종 이후)의 진전 제도
이후 어진 제작이 다시 활발해진 시기는 숙종부터이다. 태조의 진전이던 준원전과 경기전을 유지하고, 새로 궐내에 선원전을 지었으며, 남별전을 영희전으로 개칭하며 규모를 키웠다. 또 강화도 영숭전의 옛 터에 장령전이라는 진전도 추가로 설치했다. 1713년 숙종이 자신의 어진을 도사하도록 하였는데, 허례허식을 피하라는 어유구를 비롯한 대신들의 상소로 왕의 생존 시에는 궤에 넣어 봉안하다가 왕이 죽고 나서 걸기로 하였다.영조는 춘관통고[8]에 의하면 11점, 정조실록에 의하면 13점의 어진을 그렸다고 전하며, 모사도 여러 번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행사 때마다 어진을 그린 조선 정조도 있었으며, 사도세자가 평양에 놀라갈 당시 화사 변상벽에 의하여 초상화를 남겼고, 정조 즉위 이후 현륭원으로 이동해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다. (선원보에는 영조는 12점, 정조는 7점의 어진을 도사했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기도 하다.)
이러한 형태는 조선 초기와 비교하면 상당히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초창기에는 승하한 선왕을 추모하는 의도나 훼손된 어진의 복원 등의 의미가 컸다면, 조선 후기로 올수록 선대의 위업 계승이나 심지어는 효도를 위한 다양한 명분을 바탕으로 어진이 제작되고 봉안되었다. 가령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묘인 육상궁에 자신의 예순과 팔순 때 그린 어진을 봉안하며 자신의 어머니를 상시 모시고 싶은 마음을 대신해 자신의 초상화를 봉안한다고 하였고, 추가로 1745년 아버지 숙종의 어진이 있는 강화도 장령전의 동쪽 만령전[9]에 자신의 어진을 봉안하기도 했다. 정조 역시 자신의 어진을 경모궁에 봉안하기도 했다.
순조부터 고종 때까지 어진과 진전 제도는 크게 변하지 않고 잘 유지된다. 1892년 선원계보기략에 당시의 어진 현황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 태조 어진 3점
* 세조 어진 1점
* 원종 어진 1점
* 숙종 어진 5점(소본 1점)
* 영조 어진 12점(연잉군 초상 1점)
* 정조 어진 7점(소본 2점)
* 순조 4점(소본 2점)
* 익종 4점(소본 1점)
* 헌종 4점(소본 1점)
* 철종 4점(소본 1점)
* 고종 5점(소본 2점)
1892년 어진 현황
* 세조 어진 1점
* 원종 어진 1점
* 숙종 어진 5점(소본 1점)
* 영조 어진 12점(연잉군 초상 1점)
* 정조 어진 7점(소본 2점)
* 순조 4점(소본 2점)
* 익종 4점(소본 1점)
* 헌종 4점(소본 1점)
* 철종 4점(소본 1점)
* 고종 5점(소본 2점)
1892년 어진 현황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종은 선왕들의 위상을 살리기 위해 어진과 진전 제도에 힘쓴다. 1900년 경운궁에 선원전을 건립하여 어진을 봉안하였는데, 5개월만에 불이 나 새로 선원전을 건립하였다. 1907년에는 탁지부가 황실의 재산 정리 사업을 시작하며 1908년 진전 통합 정책을 펼쳐 준원전과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제외한 모든 어진을 모아 선원전에 보관하기로 했다. 이렇게 준원전과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어진은 창덕궁 선원전에 모이게 되었다.
4. 일제강점기 이후 진전과 어진
1921년, 고종의 3년상이 끝난 후 당시 각 궁궐에 퍼져있던 역대 임금들의 어진들을 한 곳에 모아 모시기로 하고 창덕궁 신선원전을 설치했다. 1921년까지 남아있던 어진들은 태조, 세조, 원종[10],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11], 헌종, 철종, 고종의 어진뿐이었다.[12] 선원전영정수개등록에 의하면 당시 신선원전에는 12명의 임금 어진 46점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후 유일본으로 전해지던 세조와 원종의 어진을 한 점 씩 더 모사하여 모두 48점에 이르게 되었다.1935년 신선원전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어진 현황(네이버 케스트 자료)[13] |
의아한 점은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 불타 없어지기까지 9년이란 시간 동안 어진을 찍어 놓은 사진이 없다시피하다는 것이고 그나마 화재 이전에 용안을 제대로 담은 어진을 찍은 사진도 태조와 순종 단 2명의 어진밖에 없었다.[14] 일제강점기때까지야 왕의 어진이라는 이유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했겠지만 이왕가가 사라지고 구 왕족들에 대한 대접이 좋지도 않았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무관심했다. 만일 이때 어진 관리 차원으로 사진이라도 찍혔다면 조선 왕들의 얼굴을 알 수 있었을거고 약간의 추정, 보정을 거쳐 복원도 가능했을 것이다.[15][16]
4.1. 부산 용두산 대화재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여 한국전쟁 당시에 다른 황실 유물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와 부산 관재청 벽돌식 창고에 보관되었다. 하지만...부산 용두산 대화재 당시.[17] |
결국 신선원전에 대대로 소장되었던 어진 48축[18] 중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어진들은 총 18축 정도밖에 없게 되었다. 밑은 당시 화재에서 건져낸 어진들의 목록이다.
- 태조: 익선관본 1축[19]
- 세조: 없음[20]
- 원종: 사모본 2축[21]
- 숙종: 익선관본 1축(추정)[22]
- 영조: 연잉군 시절 사모본 1축, 익선관본 1축[23]
- 정조: 없음[24]
- 순조: 원유관본 2축, 익선관본 1축 + 익선관본 1축(추정)[25]
- 문조: 면복본 1축 + 면복본 1축(추정)[26]
- 헌종: 익선관본 1축(추정)[27][28]
- 철종: 면복본 1축, 원유관본 1축, 구군복본 1축[29]
- 고종: 익선관본 1축(추정)[30][31]
- 순종: 황룡포본 1축[32]
그 중 9축은 보존 처리 후 2019년 후반부에야 공개될 정도로 심각하게 훼손되었고[33], 나머지 4축도 얼굴 부분이 소실되었으며[34], 얼굴이 보존된 어진은 단 5축밖에 없다.[35][36]
물론 조선 왕들의 경우 어진이 없더라도 얼굴을 복원하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은데, 이는 리처드 3세나 우문옹의 경우처럼 각 왕릉에 묻혀있는 왕들의 두개골만 스캔해도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며[37][38], 어쩌면 썩어서 뼈로 변하지도 않은 채 미라처럼 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어서 운 좋으면 이를 통해 연골 조직까지도 복원할 가능성이 생기게 되는데, 이는 석회·모래·흙을 혼합한 삼물(三物) 반죽으로 무덤을 만들면서 이 삼물 반죽이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공기를 완벽히 차단해 준 덕분에 시신이 썩는 것을 방지하므로 미라화의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조선 시대에 조성된 무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간혹 미라화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하고 1868년 오페르트 일당이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고 기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무덤 조성 방법 때문이었다. 이상 언급한 사례들로 미루어 보면, 그야말로 정성 들여 조성되었을 왕릉 내부의 시신도 미라처럼 되었을 거라는 추론이 아주 불가능한 기대는 아닌 셈. 조선 왕릉 석실에 대해 다룬 기사 다만 아무리 민주주의 공화정 시대라 해도 왕의 얼굴을 복원한답시고 말짱한 남의 무덤을 함부로 파내는 게 여론에는 좋지 않게 비칠 터이고 전주 이씨 종친회의 거센 반발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에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조선 왕실의 어진과 진전' 특별전을 2015년 12월 8일부터 2016년 2월 14일까지 열었다. 이 전시회에 출품된 어진은 태조 어진 2점(청룡포본(복제품), 홍룡포본), 원종 어진 1점(사모본), 영조 어진 2점(사모본, 홍룡포본), 문조 어진 1점(면복본), 철종 어진 1점(군복본), 고종 어진 1점(석지 채용신이 그린 황룡포본), 순종 어진 2점(이당 김은호가 그린 황룡포본, 2014년 복원한 모사도)이다. 다른 어진과는 달리 순조 어진은 전시되지 않았다. 대구의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에서도 2016년 10월 12일부터 12월 24일까지 어진 전시회가 있었는데, 홍룡포본 태조어진(불에 타서 훼손된 원본과 복원본), 익종어진, 원종어진, 영조어진(연잉군초상 포함 두 점), 철종어진(원본과 복원본), 고종어진과 순종어진이 전시되었다.#
그밖에 추존왕의 어진인 환조의 어진을 정종 때 계성전에 모셨다고 하는데#, 후대에 추존왕의 어진은 모시지 않는 것이라는 여론이 나타나 철폐되었다. 이때 환조의 어진은 어디로 갔는지 행방불명이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개성 화장사에 있던 정종 부부의 어진으로 추정되는 어진과 공민왕 내외의 어진이 함께 존재했다 하는데 정종으로 추정되는 어진 역시 그 행방을 알수없는 상태이다. 한국전쟁 당시 화장사가 폭격으로 소실된 것 을 봐서 그때 다른 어진과 함께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쪽에 있던 어진들도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밑에 이베이에 올라온 선조추정어진이나 정조 어진 같은 경우처럼 해외에 반출된 어진들도 꽤 있는 것으로 보인다.
5. 조선 시대의 어진 제작
어진 제작은 도사(圖寫), 추사(追寫)[39], 모사(模寫) 이렇게 3종류로 나뉜다. 다만 도사와 모사는 1713년 이전에는 모사(模寫)라는 단어로 구분 없이 사용되었다.- 도사(圖寫): 왕이 살아있을 때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리는 것. 왕의 용안을 화가가 직접 보고 그렸다.
- 추사(追寫): 왕이 살아있을 때 그리지 못하여 사망 후 그리는 것. 왕의 측근이나 대신들의 도움을 받아 그렸다.
- 모사(模寫): 왕의 어진이 훼손되었거나 새로운 진전에 봉안시에 기존의 어진을 본떠 그리는 것. 원본 초상화를 밑에 받치고 초본을 그렸다.
5.1. 제작 과정
어진의 제작 과정은 크게 다음의 단계를 거친다.- 도감 설치[40]와 화원 선발[41] : 어진 제작을 위해 담당할 사람이나 기관을 설치하는 과정
직접 제작하는 화원을 어진화사(御眞畵師)라고 불렀는데 도화서 화원 가운데 뽑았지만 마땅히 사람이 없을 경우엔 민간의 화가중에 선발해서 그리게 하기도 하였다. 어진화사(御眞畵師)는 보통 6~7명 선이었지만 최대 13명까지 이를 때가 있었다. 어진화사 중에서도 얼굴 부분을 담당하는 (가장 중요한) 집필화사(執筆畵師)[42]와 왕의 몸 중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그리는 동참화사(同參畵師), 물감을 섞는 일을 돕는 수종화사(隨從畵師)로 나뉘어 있다.
어진 제작은 굉장히 큰 영예이자 출셋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진 화사가 되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는데, 가령 이름난 화가인 김홍도는 영조와 정조 어진 도사를 몇 번 한 적이 있지만 한 번도 집필화사가 된 적은 없었다. 또 변상벽은 영조 어진을 도사한 공으로 구산(龜山)의 첨절제사와 곡성현의 현감직을 맡게 된 바가 있다.
- 초본과 직초 : 어진의 베이스가 되는 초본을 그리는 과정과 어진을 그릴 비단 바탕을 만드는 직초 과정
초본 제작은 길일 길시에 시행되었으며, 어진화사는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불경한 곳에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도사(왕의 얼굴을 보고 그리는 과정) 과정은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다시 행해졌는데, 때로는 열세 번까지 초본을 거듭 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초본이 그려지면 홍문관의 대신이나 승지, 사관 등 왕과 가까운 곳에서 일하던 신하들이나 왕 본인이 의견을 내어 수정했다.
- 상초와 정본 채색 : 비단 바탕 위에 초본을 옮겨 그리는 상초 과정과 채색을 하는 과정
파일:어진_채색과정.jpg 연잉군 초상화 복원품 채색 과정
어진의 초본을 완성하면 비단 위에 먹으로 초본을 옮겨 채색을 한다. 옮겨 그릴 때는 얼굴과 몸, 용포, 흉배, 신발 순서로 그림을 그렸는데 얼굴을 그릴 때는 무조건 집필화사가 주관하였다. 채색은 비단 뒷면에다 채색하는 배채(背彩)법을 먼저 적용[43]한 후 앞면에다 채색을 하였다.
채색을 완료한 후에는 왕과 신하들이 심사를 하였고, 때로는 이후에 채색을 덧칠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는 초본과는 달리 신하들이 첨배례(瞻拜禮)를 올렸는데, 이때부터 어진이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왕 그 자체가 되었음을 상징한다.
- 배접과 장축 : 배경이 되는 비단 혹은 종이을 덧붙이는 과정 및 표구하는 과정
완성된 그림은 오랜 보존을 위해 다른 종이에 덧붙이는 과정을 거치고 영정의 네 가장자리를 두르는 장황을 했으며 뒷부분을 다시 비단으로 배접한다. 그리고 옥축, 낙영, 홍사유소[44], 봉안색환[45] 등을 덧붙여 장황을 완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본 문서 맨 상단에 있는 그림들 주위로 붙어 있는 붉은 실 같은 것이 이것이다.
- 표제(標題) : 이 어진이 누구의 것이며 언제 제작되었는지를 표기하는 작업.
조선 초기에는 앞면에 적는 것이 예가 아니라고 하여 작품 뒷면이나 봉안함 겉면에 어느 왕이라고 적기만 하였다. 그러나 1695년 만약 의외의 변으로 어진이 상하게 되면 분간하기 어렵다고 하여 작품의 우측 상단 혹은 좌측 상단에 잘게 써서 표시하게 되었다.[46] 철종의 경우 표제를 본인이 직접 적기도 하였다.
- 봉안과 논상 : 어진을 봉안하고 작품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는 일
어진을 봉안할 때는 엄격한 절차를 거쳤으며, 길한 날을 골라 진전에 봉안했다. 보통은 제사를 같이 지냈다. 어진을 완성하면 가령 태조의 진전은 임진왜란 이전에 총 6곳에 이르렀는데[47] 한양의 문소전, (이성계의 고향인) 영흥의 준원전[48], 평양부의 영숭전, 개성의 목청전, 경주의 집경전[49], (이성계의 본향인) 전주의 경기전에 영전들을 배치했다. 이는 한태조의 묘를 수도뿐만 아니라 군국에 분립하게 했다는 제도를 따른 것이다. 다만 나머지는 모두 임진왜란 때 불탔고[50], 경기전에 있던 어진만이 무사히 남았다. 경기전 어진은 병자호란 등 전쟁에서도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화를 피했다고 한다. 영조 43년(1767) 전주성 안에서 큰 화재가 일어나 2300여 호가 불탔지만 이 화마마저 피하여 지금까지 살아남은 덕에 우리는 태조의 어진만큼은 볼 수 있다.
그리고 어진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는 일을 했는데, 말 한 필을 주거나 품계를 올려주거나 실질적인 벼슬을 주거나[51], 화살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6. 역대 어진 제작 기록
기록상 남은 어진 제작 기록들이다. 어진 화사 대부분 당시 도화서에 속해있어 어진을 제작했고, 당대 이름을 떨쳤던 화원들이다. (일부는 사대부 화가로서 이름을 떨쳐 뽑힌 경우도 있다.) 이들의 작품 중 대다수가 보물이거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rowcolor=#e5bb80> 묘호 | 제작 연대 | 복색 | 화사 | 첫 봉안 장소 | 관련 기록 | |
태조 | 문소전(1410.7) | 조선왕조실록 | ||||
선원전 | ||||||
준원전(1398) | ||||||
집경전(1398) | ||||||
경기전(1409~1410) | ||||||
영숭전(1411 이전) | ||||||
목청전[52] | ||||||
남별전(1619) | ||||||
1688년 모사 | 주관화사 : 윤상익, 조세걸 | 남별전 | 영정모사도감의궤, 승정원일기 | |||
1695년 모사 | 곤복본 (익선관본) | 윤상익, 조세걸 | 남별전 | 승정원일기 | ||
1838년 모사 | 곤복본 | 주관화사 : 이재관, 김건종 동참화사 : 박종황, 이한철, 박기준, 조정규, 김하종, 장준량, 조평 | 창덕궁 선원전 | 승정원일기, 영정모사도감의궤, 헌종실록 | ||
1872년 모사 | 곤복본 | 조중묵, 박기준, 백은배, 박용기, 유숙, 이창옥, 박용훈, 안건영, 조재흥, 서두표 | 경기전 | 고종실록, 어진이모도감도청의궤 | ||
1900년 모사 | 곤복본 | 주관화사 : 조석진, 채용신 동참화사 : 홍의환, 박용훈, 이기영, 김기락, 강필주, 백은배, 서원희, 윤석영, 조재흥, 백희배, 전수묵 | 선원전 | 비서원일기, 어진이모도감의궤 | ||
1901년 모사 (7조 어진 모사 시) | 곤복본 | 주관화사 : 조석진, 채용신 동참화원 : 전수묵, 백희배, 윤석영, 조재흥, 박용훈, 서원희, 홍익환 | 경운궁 선원전 | 영정모사도감의궤 | ||
곤복본 | 목청전 | |||||
정종 | 1399년 (정사공신상과 함께 도사) | 화장사 | 정종실록 | |||
태종 | 1402년 도사 | 경복궁 선원전 | 태종실록 | |||
1443년 모사 | 세종실록 | |||||
세종 | 1444년 | 경복궁 선원전 | 세종실록 | |||
문종 | 경복궁 선원전 | 인조실록 | ||||
단종 | 기록 없음 | |||||
세조 | 1469년 이전 (1872년 세초됨) | 양주 봉선전 | 예종실록 | |||
1492년 | 최경, 안귀생 | 경복궁 선원전 | 성종실록 | |||
1735년 | 박동보, 장득만[53] 등 | 창덕궁 선원전 | 승정원일기, 영정모사도감의궤 | |||
1935년 모사 | 곤복본 | 주관화사 : 김은호 조수 : 장봉운 | 창덕궁 신선원전 | 선원영정모사등록 | ||
덕종 | 1456년 이전 초본 완성 | 최경, 안귀생 | 영모록기 | |||
1472년 추사 | 최경, 안귀생 | 의묘후전 | 성종실록, 춘관통고 | |||
예종 | 1472년 추사 | 최경, 안귀생 | 경복궁 선원전 | 성종실록 | ||
성종 | 1495년 추사 | 경복궁 선원전 | 연산군일기 | |||
연산군 | 기록 없음 | |||||
중종 | 1545년 추사 | 이상좌, 석경, 감교 성세창, 친시인 이성군 관 | 경복궁 선원전 | 인종실록 | ||
인종 | 본인의 뜻을 받들어 제작되지 않음 | |||||
명종 | 이흥효 | 패관잡기 | ||||
원종 | 1632년 | 단령본 | 숭은전 | 춘관통고 | ||
1935~1936년 | 단령본 | 화사 : 김은호 조수 : 장운봉 | 창덕궁 신선원전 | 선원전영정모사동록 | ||
선조 | 공식적으로는 제작 기록이 없음 | |||||
광해군 | 기록 없음 | |||||
인조 | 기록 없음 | |||||
효종 | 기록 없음 | |||||
현종 | 기록 없음 | |||||
숙종 | 1695년 도사 | 조세걸, 장자욱 | 강화 장녕전 | 숙종실록, 승정원일기 | ||
1713년 도사 | 강사포본 | 주관화사 : 진재해[54] 동참화사 : 김진녀, 장태흥, 장득만 수종화사 : 허숙 | 강화 장녕전 | 숙종실록 | ||
곤복본 | 영희전 | 승정원일기, 어용도사도감의궤 | ||||
1748년 모사 | 곤복본 | 주관화사 : 장경주 동참화사 : 장득만, 정홍래, 김희성 수종화사 : 함도홍 등 유화 : 조영석, 윤덕희[55] | 영희전 및 창덕궁 선원전 | 영조실록, 승정원일기, 영정모사도감의궤 | ||
1900년 모사 | 곤복본 | 조석진, 채용신 등 | 영정모사도감의궤 | |||
경종 | 기록 없음 | |||||
영조 | 1714년 도사 | 단령본 대 소 2점 | 박동보 | 경희궁 태령전 | 선원계보 | |
1724년 초본 도사 | 단령본 초본 | 경희궁 태령전 | 승정원일기 | |||
1733년 도사 | 곤복본 | 박동보, 함세휘, 양기성, 진응회 | 경희궁 태령전 | 승정원일기 | ||
단령본 | ||||||
면복본 | ||||||
1744년 도사 | 면복본 (대본) | 주관화사 : 장경주 동참화사 : 김두량, 조창희 | 태령전 | 승정원일기 | ||
면복본 (대본) | 강화 만녕전 | |||||
곤복본 1점 (소본) | 육상궁 | |||||
1745년 도사 | 사립도포본 | 대본 육상궁 | 승정원일기 | |||
단령본 | 소본 창의궁 | |||||
1763년 도사 | 강사포본 | 변상벽 | 창덕궁 선원전 | 영조실록, 승정원일기 | ||
1773년 도사 | 곤복본 2점 | 주관화사 : 변상벽 동참화사 : 김홍도 수종화사 : 신한평[56], 김후신, 김득신, 진응복 감조관 : 김두열 | 경희궁 태령전 | 승정원일기 | ||
육상궁 냉천정 | ||||||
1900년 모사 | 곤복본 | 조석진, 채용신 등 | 경운궁 선원전 | 비서관일기, 영정모사도감의궤 | ||
장조 | 강사포본 | 경모궁 망묘루 | 일성록 | |||
곤복본 | 현륭원 | |||||
정조 | 1781년 도사 | 곤복본 대 소 2점 | 주관화사 : 한종유 동참화사 : 김홍도 수종화사 : 신한평, 허감, 김응환, 장태흥 | 규장각 주합루 | 승정원일기, 규장각 | |
1791년 도사 | 강사포본 | 주관화사 : 이명기[57] 동참화사 : 김홍도 수종화사 : 허감, 한종일, 김득신, 신한평, 이종현 | 대본 1본 규장각 주합루 소본 1본 경모궁 망묘루 → 현륭원 어진 봉안각 | 승정원일기 | ||
1796년 도사 | 주관화사 : 이명기 | 규장각 (1본) | 선원계보 | |||
1900년 모사 | 강사포본 | 조석진, 채용신 등 | 경운궁 선원전 | 비서원일기, 영정모사도감의궤 | ||
순조 | 1808년 도사 | 강사포본(대본), 곤복본(소본) | 경우궁 성일헌, 경모궁 망묘루 | 헌종실록 | ||
1830년 도사 | 강사포본(대본) | 주관화사 : 김건종[58] 동참화사 : 이희민 수종화사 : 김하종[59], 이인식, 장준량, 변용규, 박종환, 박희영, 박기준 등 | 경모궁 망묘루 | 헌종실록, 어진도사사실 | ||
곤복본(소본) | ||||||
1900년 모사 | 강사포본 | 조석진, 채용신 등 | 경운궁 선원전 | 영정모사도감의궤, 비서원일기, 선원계보 | ||
문조 | 1826년 도사 | 면복본 | 경우궁 성일헌(3본), 창덕궁 선원전 | 비서원일기 | ||
1827년 도사 | 면복본 | 경모궁 망묘루(1본) | 헌종실록 | |||
1830년 도사 | ||||||
1900년 모사 | 조석진, 채용신 등 | 경운궁 선원전 | 고종실록, 비서원일기, 영정모사도감의궤 | |||
헌종 | 1846년 도사 | 군복본 | 주관화사 : 이한철 동참화사 : 조중묵, 조정규 수종화사 : 박인석, 박기준 등 | 어진도사사실 | ||
곤복본 | ||||||
면복본 | ||||||
1900년 모사 | 곤복본 | 조석진, 안중식 등 | 영정모사도감의궤 | |||
철종 | 1852년 도사 | 면복본 추정(소본) | 이한철, 조중묵, 김하종, 조평, 박기준, 백은배, 유숙 | 규장각 주합루, 서향각 | 어진도사사실 | |
1861년 도사 | 강사포본, 군복본 | 조중묵, 이한철, 김하종, 박기준, 유숙 | 어진도사사실 | |||
고종 | 1872년 도사 | 군복 대 소본, 곤복본, 복건본, 면복본 | 이한철, 조중묵, 박기준, 백은배, 유숙, 안건영, 박종섭 등 | 창덕궁 선원전 | 봉명사기, 비서원일기 | |
1902년 도사 | 면복본 1점, 곤복본 2점, 군복 대본 1점, 군복 소본 1점 | 주관화사 : 조석진, 안중식 동참화사 : 박용훈, 홍의환 수종화사 : 전수묵, 백희배, 조재흥, 서원희 | 창덕궁 선원전, 풍경궁(익선관본 1점) | 어진도사도감의궤 | ||
1902년 도사 (기로소 입소 기념) | 면복본(대본), 곤복본(소본) | 주관화사 : 조석진, 안중식 동참화사 : 박용훈, 홍의환 수종화사 : 전수묵, 백희배, 조재흥, 서원희 | 경운궁 선원전 | 어진도사시등록 | ||
순종 | 1902년 | 면복본 1점, 곤복본 2점, 군복 대본 1점, 군복 소본 1점, 복건본 1점 | 주관화사 : 조석진, 안중식 동참화사 : 박용훈, 홍의환 수종화사 : 전수묵, 백희배, 조재흥, 서원희 | 경운궁 선원전, 풍경궁(곤복본 1점) | 어진도사도감의궤 | |
1916년 | 곤복본(황룡포) | 주관화사 : 김은호 | 창덕궁 대조전 | 서화백년, 화단일경 | ||
1928년 7월 | 곤복본(황룡포) | 주관화사 : 김은호 수종화사 : 안명준, 백윤문 | 창덕궁 신선원전 | 화단일경, 어진모사급봉안일기,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 |
7.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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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여담
-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2015년 12월 8일부터 2016년 2월 14일까지 '조선 왕실의 어진과 진전' 전시를 열어 조선태조어진과 연잉군 초상, 영조 어진, 철종 어진, 고종 어진 등을 모두 전시하는 전시를 개최했다.
- 중종어진이라고 돌아다니는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은 이시카와현이 소장하고 있다. 해당 그림 설명 페이지 형식과 복장을 보면 전형적인 명나라 그림으로 절대 중종의 어진이 아니다.
9. 참고 문헌
- [왕실문화도감1-조선왕실복식] - 국립고궁박물관, 2012
- [조선 왕실의 어진과 진전] - 국립고궁박물관, 2015
- [왕실문화유산 보존연구 - 순종황제 어진] - 국립고궁박물관, 2015
- [왕실문화유산 보존연구 - 원종어진] - 국립고궁박물관, 2016
- [왕실문화유산 보존연구 - 태조어진] - 국립고궁박물관, 2017
- [어진, 왕의 초상화] - 조선미,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9
- [궁중서화 2] - 국립고궁박물관, 2019
[1] 추존왕, 선조의 5남이자 인조의 아버지[2] 한양에는 문소전, 지방에는 (이성계의 고향인) 영흥의 준원전, 평양부의 영숭전, 태조의 잠저였던 개성의 목청전, 경주의 집경전, (이성계의 본향인) 전주의 경기전이 있었다.[3] 완전한 것은 아니고 얼굴 일부 부분만 남은 조각이었다고 하나, 수염이 긴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고 한다.[4] 세조의 어진은 한 사찰에서 발견되어 다시 궁궐로 돌아와 보존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기록에 따르면 영조가 모사본 제작을 명했다. 기록에는 이 어진을 전쟁통에 구한 인물이 바로 광해군 때 간신 이이첨.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세조의 영정은 봉선사로 옮겨졌는데 하필 이때 일본군이 들어와 봉선사를 불태웠다. 광릉참봉이던 이이첨은 도망가는 승려들을 붙잡아 영정의 위치를 묻고는 홀로 불타는 절간을 헤치고 들어가 영정을 끌어냈다. 이후 영정을 안전하게 호송하기 위해 홀로 머나먼 여정을 떠나게 되는게 낮에는 숨고 밤에 90리를 걷는가 하면, 2번이나 몰래 일본군 진영 한복판을 통과했고. 심지어는 중간에 의병 부대에 합류해 전투까지 치르는 등 갖은 고생을 다한 끝에 의주로 세조의 영정을 무사히 호송했다.[5]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 2월 12일 ; 선조실록 55권, 선조 27년 9월 5일 [6] 선조실록 36권, 선조 26년 3월 16일[7] 인조실록 31권, 인조 13년 5월 14일; 이 기록에 의하면 문종의 어진은 이때까지는 남아 있던 것으로 보인다.[8] 정조의 명으로 유의양이 편찬한 책으로, 예조가 관장하는 모든 예제와 의례 업무를 오례(五禮)를 기준으로 정리한 책이다.[9] 장령전과 만령전은 병인양요 때 소실되었다.[10] 인조의 아버지로 사후 추증되었다.[11] 헌종의 아버지로 사후 추증되었다. 익종으로 추증되었으나 대한제국 시기 문조로 재추증되었다[12] 이후 순종 사후 김은호 화백이 그린 순종의 어진이 추가되었다.[13] 이후에 세조와 원종 어진이 한 점 씩 추가되었다.[14] 세조 어진도 화재 이전에 찍은 사진이 있지만 용안이 제대로 안 보였다.[15] 물론 고종과 순종의 경우 시기상 생전 시절에 찍힌 사진이 많이 남아있으며, 특히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는 고종은 특히 사진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얼굴 복원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16] 다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인들이 개인적으로 수집한 유물들은 꽤 많은 수가 반출되었다. 지금까지 해외반출된 한국 문화재가 가장 많은 곳이 일본이다. 조선 통감이나 총독을 지냈던 이토 히로부미나 데라우치를 포함, 조금이라도 역사나 문화에 관심이 있던 일반 개인들마저(특히 오구라 컬렉션의 오구라 타다노스케, 가루베 컬렉션의 가루베 지온 등) 이런 행위에 동참하는 등 지위고하를 막론하지 않았다. 또한 일제는 조선에 대한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이왕가를 형식적으로는 왕대접 해주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조선의 궁궐 일부를 파괴하고 자신들의 청사를 세웠을 정도로 사실상 무시하는 일면도 있었다. 준원전에서 촬영한 태조 어진만 해도 일본 순사 개인이 촬영한 사진이며 아무리 카메라가 귀하던 시절이였지만 전쟁으로 불탔으나 사진으로 남아있는 류큐 왕국 역대 임금들의 어진처럼 30년이 넘는 식민지배 시절 이런저런 비공식 루트로 조선 왕실의 어진을 찍었음직한 일본인들이 아예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정부나 문화재청에서 작정하고 찾는다면 당시 어진과 관련이 있을 법한 유물(촬영한 사진이나 모사본, 또는 그에 관한 목격 증언이나 신문 기사같은)의 단편적인 흔적을 발견할 가능성이 있을 법하다.[17] 참고로 이 사진은 어진들을 불태운 12월 26일 당시 사진이 아니라, 약 보름 전인 12월 10일에 같은 장소에 있던 또 다른 화재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18] '선원전영정수개등록'에는 46축이 보관되어 있다고 나오지만, 이 보고서 작성 후에 세조와 원종 어진 모사본이 1축씩 추가되었다.[19] 홍룡포본 1축이 얼굴 부분까지 반소된 상태로 전해지고 있다. 1926년 6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태조 어진이 선원전에 있는 또다른 어진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으며, 다른 하나의 어진은 경기전에도 소장된 청룡포본 어진을 원본으로 삼아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20] 다만 1936년에 모사본을 제작할 시에 그린 어진 초본은 김은호의 소장품으로 멀쩡하게 살아남아 1969년 경향신문에 사진이 올라온 것은 물론이고 2016년에 재발견되었다.[21] 밑의 순조와 함께 신선원전에 보관되던 어진들이 후대에 모두 전해지는 유이한 왕이며, 1872년 원본은 표제는 남았으나 얼굴이 소실되었고, 1936년 모사본은 얼굴은 남았으나 표제가 소실되었다.[22] 얼굴은 물론, 표제까지 불타 어진 속 왕은 알 수 없으나 숙종의 어진으로 추측된다.[23] 외부에 어진이 남아있는 전대의 태조와 사진 자료가 풍부한 후대의 고종과 순종을 논외로 치면, 신선원전에 어진이 보관되던 왕들 중 유일하게 얼굴이 남은 어진이 2축 이상 전해지는 왕이다.[24] 세조와 더불어 추정 어진조차 남아있지 않는 유이한 왕이나, 적어도 세조는 전술했듯 초본이라도 멀쩡하게 남아있기라도 하지 정조는 이조차도 전혀 남아있지 않다.[25] 익선관본 1축은 표제가 불타 어진 속 왕을 알 수 없으나 순조의 어진으로 추측된다. 이 추정어진이 진짜 순조 어진이면 순조는 원종과 함께 신선원전에 보관되던 어진들이 후대에 모두 전해지는 유이한 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보면 4축의 어진들이 모두 얼굴이 타버린 상태로 후세에 전해지게 된 것과 똑같다.[26] 전자는 표제는 남았지만 얼굴이 눈썹 말고는 모두 소실되었고, 후자는 얼굴과 표제가 모두 소실되었다.[27] 표제는 물론, 얼굴도 거의 전부 소실되었다.[28] 순종의 황태자 시절 초상화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다만 화재 속에서 가까스로 건져낸 귀의 모양, 크기가 순종의 모습보다는 선원보감 속 헌종 어진과 더 유사한 것을 고려하면 헌종 어진일 가능성이 더 높다.[29] 그들 중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구군복본 1축뿐이다.[30] 신선원전에 보관되었던 어진은 무려 9축으로 왕들 중 제일 많았지만, 화마에서 살아남은 것은 파편 일부만 남은 추정 어진(1872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1축밖에 없다.[31] 현재 남아있는 고종 어진은 황명으로 제작한 어진이 아니라 정식으로 제작 후에 고종의 유지 초본을 가지고 있었던 화가 채용신이 민간인에게 그려준 어진이다. 그래서 황룡포 3점이 남아있지만 모두 같은 나이의 고종이며 초상화로 유명했던 채용신의 평소 실력에 비해 그림의 작품성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는다.[32] 얼굴 부분은 남아있지만, 표제 부분이 훼손되었다.[33] 순조어진 2축, 철종어진 2축, 추정어진 5축(숙종, 순조, 문조, 헌종, 고종 추정어진이 각각 1축씩 있다). 특히 철종 면복본과 고종으로 추정되는 어진의 훼손상태가 극단적으로 심하다.[34] 태조어진 1축, 원종어진 1축, 순조어진 1축, 익종어진 1축[35] 원종어진 1축, 영조어진 2축, 철종어진 1축, 순종어진 1축. 2016년에 발견된 세조 어진 모사본 초본을 정규 어진이라고 치고 1926년 6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사진이 실린 태조 어진이 진짜 신선원전 어진이라고 쳐도 얼굴이 현존하는 신선원전 어진은 7축밖에 되지 않는다.[36] 아이러니한 것은 숙종 이전 재위한 왕 중 어진이 전해지던 왕들은 대략적인 형태로나마 모든 어진의 형태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태조의 경우는 경기전본, 함흥본궁본 흑백 사진과 함께 신선원전 어진으로 추정되는 어진의 흑백 사진이 남아 있으며 세조는 원본과 모사본은 소실되었어도 초본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고 원종은 원본와 모사본 모두 반씩 탄 채로 전해지고 있다.[37] 게다가 다행히도 조선왕릉 대부분은 도굴꾼들이 노릴 만한 물건이 전무하다시피 한데다 후술하겠지만 무덤 양식 자체가 석회층으로 관을 보호하는 회곽묘 형식이라 중장비나 대량의 인력 없이 돌파하기가 힘들어 몰래 빠르게 터는 식의 도굴이 불가능해서 조선 시대는 물론 일제강점기 이후로도 도굴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시신이 훼손될 가능성도 낮은 편이어서 지금도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있을 것이다. 다만 선정릉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도굴당하면서 지금도 가묘 상태이기 때문에 성종과 중종의 얼굴은 이런 방식을 시도할 수조차 없게 되었으며, 정종의 경우 후릉이 있는 개성시가 북한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이 방법을 쓰기엔 불가능까진 아니더라도 매우 힘들 것이다.[38] 다만 눈썹이나 귀, 입술 등 세세한 부분까지는 복원이 불가능하다. 당연하게도 해당 부위들은 뼈가 아닌 털, 연골, 피부기 때문. 실제로 법의학계나 인류학계에서도 얼굴 복원을 할 때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다.[39] 혹은 추화(追畵)[40] 어진 제작을 위해 도감(都監)을 설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왕실 종친들이 주도하는 종부시(宗簿寺)에서 관장하기도 했다.[41] 전문 화원은 아니지만 미술에 조예가 높은 양반 신분 문인화가들이 유화(儒畵)라는 기술적 조언자로 참가해 (그림을 직접 그리지는 않고,) 잘못된 부분에 대해 조언을 해 주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강세황.[42] 주관화사(主管畵師)라고도 했다.[43] 뒷면에다가 색을 칠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색이 선명하게 나오게 하고 변색을 지연시키며, 두껍게 칠하는 안료가 떨어지는 것도 방지하고, 어두운 바탕 위에 물감으로 그릴 때 물감이 번지는 것을 막아주기도 하였다.[44] 붉은 비단실을 묶어 만든 장식끈.[45] 봉안용 고리.[46] 실제로 수백 년 후 용두산 대화재로 많은 어진들이 불타면서 표제만 간신히 남아 어느 왕인지 구별할 수 있게 된 경우가 생기기도 하였다.[47] 궁궐 안에는 선원전에 어진을 봉안했다.[48]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곳에 세워진 진전으로, 1396년 세워져 1443년 태조 어진을 봉안했다. 준원전의 태조 어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도 살아남아 후대에 전해져 모사되게 되었다.[49] 1398년 처음 태조 어진이 봉안되었으며, 초기에는 어용전으로 불렸다. 태종 때 태조진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세종 때 다시 집경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50] 전주 경기전은 정유재란.[51] 영조 어진 제작에 참여한 변상벽은 첫 번째 어진을 제작한 공으로는 구산(龜山)의 첨절제사로, 두번째 어진을 제작한 공으로는 곡성현의 현감직을 얻었다.[52] 유후사진전이란 이름으로 1419년 이전 건립[53] 익안대군 영정을 이모한 경력있음[54] 이항복 반신상을 모사한 경력있음[55] 윤두서의 아들[56] 신윤복의 아버지.[57] 김홍도와 신윤복에 그늘에 가려져 현대에는 잊혀진 화가가 되었지만 정조 당시에는 그 두사람을 능가하는 최고의 초상화가로 이름을 떨쳤다.[58] 김하종과 형제[59] 김건종과 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