厚陵
1. 고려왕릉
22대 임금 강종이 묻혀있는 고려왕릉. 현재는 위치가 유실되었다.고려사절요 1217년 3월 기사에 따르면 후릉의 위치는 안종의 무릉 옆이다.
후릉을 무릉 옆에 장사지냈던 것 때문에[1] 풍수가 맞지 않는다고 낭장 김덕명(金德明)이 최충헌에게 간언하여 후릉의 이장이 논의되었고, 후릉개장도감이 설치되었으나 곧바로 없앴기에 실제로 이장이 이루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안종의 무릉 인근에 2기의 왕릉급 고분이 소재하고 있는데, 이 중 하나가 후릉으로 추정된다.
2. 조선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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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정종의 왕릉 | 북한소재 조선왕릉 후릉 厚陵 | |
매장지 | 경기도 개성시 |
조성형태 | 쌍릉(雙陵) |
매장자 | 봉분 좌 정종 (1419년 10월 24일 사망) 봉분 우 정안왕후 (1412년 8월 2일 사망) |
조성시기 | 1412년 9월 13일 |
홈페이지 |
조선 제2대 국왕 정종과 왕비인 정안왕후가 묻혀있는 능.
모든 조선 왕릉[2]을 통틀어 유일하게 북한 지역에 있는 왕릉이다. 다만, 왕비릉 까지 포함한다면 조선 태조의 1비인 신의왕후가 묻힌 제릉과 함께 북한에 소재하고 있다. 이 때문에 다른 왕릉과는 다르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는 등재되지 못했다.
후릉의 석물은 조선왕릉의 석물들 중 가장 작은데 이게 조선 후기에 이르면 귀감이 됐다. 특히 숙종은 이를 검소함으로 인식해 왕릉 석물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후 능묘를 보수하거나 새로 만들 때 쓰이는 석물의 크기를 후릉처럼 작게 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석물들이 다른 석물들에도 영향을 줘 조선 후기의 석물들은 전반적으로 작아지게 된다.
보존 상태는 영 좋지 못한 상황으로 정자각은 주춧돌만 남은 상태이며, 비각과 수라간, 향어로 등도 모두 소실되어 표석 하나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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