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 관련 문서 |
| 평가 · 목릉 · 선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선조와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왕릉 | 동구릉내 3기 목릉 穆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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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장지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
| 조성형태 |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1] |
| 매장자 | 언덕 좌: 의인왕후 (1600년 8월 5일 사망) 언덕 중: 선조 (1608년 3월 16일 사망) 언덕 우: 인목왕후 (1632년 8월 13일 사망) |
| 조성시기 | 1608년 6월 30일 |
| 홈페이지 | |
1. 개요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
| 목릉(穆陵) 전경 |
위 사진에서 가장 왼쪽이 의인왕후의 능침, 가운데 아래가 선조의 능침, 오른쪽 위가 인목왕후의 능침이다.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각각 다른 언덕에 능이 자리하고 있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더 정확히는 3개의 언덕에 능이 자리한 동원삼강릉(同原三岡陵)의 형식이다.
카카오맵 리뷰 별점 테러를 당했다.[2] 기사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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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촬영된 목릉(穆陵)의 모습[3] |
이후 선조가 광해군 즉위년(1608) 2월에 세상을 떠나자, 1608년 2월 25일에 능호를 숙릉(肅陵)[4]이라고 하였으나#, 태조의 증조모 정숙왕후의 능호 숙릉(淑陵)과 음이 같다는 이유로 피휘하고자 5월 19일에 능호를 목릉(穆陵)으로 고쳤다.## 이후 6월 12일에 건원릉 서쪽 산줄기, 현재 헌종의 경릉이 잇는 자리에 장사를 지냈다.# 이후 인조 8년(1630)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 주장한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현 위치로 옮기고, 의인왕후의 유릉(裕陵)[5]과 목릉(穆陵)의 능호를 합하여 목릉이라 하였다. 즉, 현재 헌종과 그 왕후가 묻힌 경릉은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은 흉당(凶堂)이라는 의미이다.[6]
마지막으로 인조 10년(1632)에 선조의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는데, 이 인목왕후릉은 의인왕후릉이나 선조릉과는 조금 떨어져 있어서 혜릉(惠陵)이라는 별도의 능호를 정하였다가 목릉과 능역을 합치자는 논의 끝에 현재의 모습이 되었고, 능호도 목릉으로 통일되었다.[7] #
3. 형식
조선 왕릉 중에 3개의 각각 다른 언덕에 왕릉이 조성된, 즉 3개의 다른 언덕에 각각 단릉이 조성된 동원삼강릉(同原三岡陵)은 목릉이 유일하다.[8] 목릉에 있는 봉분 3기 중에서 선조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이 같이 둘러쳐진, 상대적으로 위엄 있는 모습이지만, 의인왕후릉과 인목왕후릉은 병풍석은 없이 난간석만 두른 형식으로 조성되었다.또한, 목릉의 정자각은 모든 조선왕릉에 있는 정자각 중에 유일하게 다포 형식이나 보물 1743호로 지정되었다.
비각에는 석비 한 기가 있는데 "조선국 선조대왕 목릉 의인왕후 부중강 인목왕후 부좌강(朝鮮國 宣祖大王 穆陵 懿仁王后 附中岡 仁穆王后 附左岡)"이라는 명문을 새겼다. 참고로 조선왕후 왕릉의 석비 중에서 부중강(附中岡)[9]이라는 용어가 들어간 것은 목릉의 비석이 유일하다. '부중강'이라는 단어가 쓰인 연유와 배경에 대해서는 영조실록의 영조 22년(1746) 12월 23일 기사에 자세히 나온다.링크 표석을 건립한 해는 숭정기원후 120년으로 서기 1747년(영조 23년)이다. 목릉의 비석 안내문에는 숭정기원후 120년을 서기 1748년이라고 설명하였으나, 숭정기원후 120년은 1747년이 맞으므로[10] 비석의 안내문이 오류이다.
과거 수라간[11]은 정자각 왼쪽 아래 편에 위치하였으나, 수복방[12]은 인목왕후릉 아래편에 터만 남아 있었다. 발굴 작업이 진행됐고 2018년 복원되었다. 다만 단청과 관련된 사료가 남아있지 않은지 단청을 하지 않았다. 또 과거 신도의 박석 대부분이 흙에 덮이거나 소실되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2018년 흙에 덮인 박석을 드러내고 사라진 부분에는 새 박석을 깔았다.
목릉의 석물들은 다른 왕릉에 비해 어딘가 조형미가 떨어지고 서투르게 제작된 듯한 모습이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키는 큰데 상체와 하체의 비율이 맞지 않고, 특히 무인석은 얼굴이 지나치게 크고 두 귀가 코끼리 귀처럼 앞을 향한 형상이다. 봉분을 둘러싼 난간석도 조형미가 다소 떨어지는데다 장명등도 뭉툭한 모습이다. 기록에 따르면 석물 자체가 혼란기에 제작된데다 왜란을 2차례 겪으면서 인명피해가 컸던지라 석공을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의인왕후릉 앞에 땅이 직사각형으로 융기된 곳이 보이는데 옛 정자각의 터를 남겨둔 것이다.
의인왕후릉의 바로 뒤쪽으로 동구릉 부지가 끝나고 구리시립묘지가 붙어 보기에 매우 휑하다. 밑에서 바라보면 몇 그루 안 되는 소나무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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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는 공식적으로 목릉을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분류하고 있다.[2] 2025년 현재는 1.1점이며, 기사에서 언급이 안 되었지만 인조의 장릉 또한 별점테러를 당해 1.1점이다.[3] 인목왕후의 능침에서 선조의 능침을 바라본 모습이다. 현재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크게 다른 점이 없는 모습이다. 출처는 조선고적도보[4] 이후 이 능호는 을미사변 후 김홍집 내각에서 고종의 왕후 명성황후가 묻힌 능의 이름으로 재사용하였으나, 아관파천 이후 김홍집 내각 실각 및 명성황후 장례 절차 재개 과정에서 폐기되었다. 이후 새로 정해진 능호가 바로 홍릉(洪陵)이다.[5] 이후에 '유릉'이라는 명칭은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가 같이 묻히는 왕릉에서 능호로 사용되었다.[6] 여담으로 한국전쟁 도중 조선인민군이 남하 도중에 목릉의 석판에 총탄을 갈겨버렸다는 일화도 있다.[7] 혜릉(惠陵)은 훗날 경종의 첫 번째 왕비인 단의왕후의 능호로 재사용되었다.[8] 숙종 과 2번째 왕비인 인현왕후, 3번째 왕비인 인원왕후가 같이 묻혀 있는 명릉이 그나마 비슷한 케이스인데, 명릉은 2개의 다른 언덕에 쌍릉과 단릉이 조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9] 가운데 언덕에 붙어서 위치하다[10] 명나라 숭정제는 1627년에 즉위하였으므로 1627년이 숭정 즉위년, 1628년이 숭정 1년이고, 숭정기원후 120년은 1747년이다.[11] 제향에 쓰이는 음식을 보관하는 곳[12] 왕릉을 지키는 수복(守僕)이 머무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