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실패한 내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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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기의 사건 포함 |
조사의의 난 趙思義之亂 | ||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시기 | 1402년 | |
장소 | 조선 함경도 | |
원인 | 태조와 태종 부자 간의 정치적 갈등의 절정 | |
교전 세력 | <rowcolor=#C00D45,white> 조선 왕실 (진압군) 승 | 조사의 반군 (반란군)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태종 (국왕) | 지휘관 태조 (태상왕) 조사의 (안변 부사) † |
참가자 조영무 (동북면·강원·충청·경상·전라도 도통사) 이천우 (안주도 도절제사) 김계지 (상호군) 박순 (상호군) † 송류 (호군) † | 참가자 강현 † 조홍 † | |
병력 | 40,000명 | 6~7,000명 + α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반군 붕괴 |
결과 | 진압 성공 - 조사의를 위시한 反이방원 세력 제거 - 조사의 등 관련자 사형 | |
영향 | 태조의 정치·군사 영향력 소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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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태조의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 조사의(趙思義, ? ~ 1402년)가 태종 2년(1402)에 일으킨 난. 30여 년 간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던 상승장군 이성계가 직접 전투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조사의를 내세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패배한, 이성계 인생 최후의 전투라고도 할 수 있다.2. 진행
조사의는 태종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 직후, 관직을 잃고 연금상태에 처했지만, 나중에 태종이 태조 이성계의 뜻을 존중하여 동북면(함경도) 지역으로 보내게 되었다. 이후 조사의는 신덕왕후의 원한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동북면 지역의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태조도 함흥부(동북면)에 머물면서 조사의의 난을 인정하여 실리와 명분을 제공했다.2.1. 파죽지세의 반란군
조선 초의 기병. ※출처: 일러스트레이터 불나방 블로그 |
그러자 조정에서는 각 고을의 군사를 동원하여 서북면에는 이천우를 파견하여 서북면으로 이동한 반란군 주력의 진로를 저지하는 한편 동북면 방면으로 조영무가 이끄는 대규모 진압대를 파견했다.
서북면에서 이천우의 습격 기병 100여 명이 사로잡히고 이천우도 간신히 포위망을 탈출하자 기세등등한 조사의의 군대는 평안도 덕천·안주 방면으로 진군하여 군사는 6~7천 명으로 늘어났고, 여진족이 합세하면 1만 명이 될 것이라고 기세를 올렸다.
2.2. 관군의 진압
조영무가 이끄는 관군은 동북면으로 이동하여 배후의 지원을 차단하고, 이천우와 이빈 등은 남은 주력군을 이끌고 적극적인 교전은 회피한 채 조사의 군대가 주둔한 곳들의 코앞 지역들을 점거하고 얼쩡거리며 발을 묶었다.그러다가 음력 11월 27일 당시 안주에 주둔하고 있던 조사의 군대에 포로로 잡힌 김천우라는 사람이 "조영무 대감께서는 동북면으로 향하였고, 이천우 대감과 이빈 대감, 김영렬 대감, 최운해 대감들께서는 맹주에 이르렀고, 또 황주와 봉주 사이로 군사 4만여 명이 나왔는데, 그대들은 그 많은 군사들을 감당할 수가 있겠소이까?"라고 한 마디 하자 군심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탈영병이 발생하다가 조화(趙和)라는 병사가 탈영을 하려고 불을 지르면서 크게 소리를 지르자 와해되었다.#
조사의는 안변으로 돌아갔다가 아들 조홍과 함께 관군에 잡혀 음력 12월 7일 도성으로 압송되었고 같은 달 18일 주살되었다.
3. 진정한 흑막은 이성계
하지만 현대의 연구가들은 이 난리에서 조사의의 비중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정황으로 볼 때, 이 난은 이성계 본인이 일으킨 난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조사의의 난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사실 이성계의 난.우선 신덕왕후 강씨는 본가나 외가나 동북면 함흥과는 상관이 없다.[2] 동북면 출신인 이성계가 중앙정계에 연줄을 만들기 위해 혼인한 것이니 동북면에 기반이 있는 집안 출신은 필요도 없고. 당연히 강씨의 친척 강현[3]이나 인척 조사의도[4] 동북면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태종 이방원 역시 그런 점을 알고 있으니까 이런 위험분자들을 마음놓고 함흥에 처박은 것이다. 이성계의 영지인 동북면, 그리고 이성계의 사병인 가별초는 태조 본인이 나서는 거 아니라면 일면식도 없는 두 사람이 뭐라고 선동하든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테니까. 실제로 난이 진압되자마자 대간에서는 대놓고 동북면 가별치(가별초)가 난의 원인이었으니 혁파하라고 상소를 올렸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처벌받은 인원들을 보면 보다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승녕부 당상관인 정용수와 신효창이 난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귀양가는데, 이들은 바로 태조를 함흥까지 호종한 인원들이었다. 애초에 승녕부 자체가 태상왕(이성계)의 수행을 담당하는 기관인데 이곳 인사들이 처벌받았다는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또한 환관 함승복도 난에 가담했다 하여 처형되었는데, 그 역시 태상왕의 수행 내관이었다. 전근대 왕조 시기에는 명분이 문제되거나 처벌했을 경우 미칠 파장 등이 우려되어 궁궐 내 왕족을 처벌하기 힘들 경우 그 수족 부하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대신하곤 했는데,[5] 이 관점에서 보자면 태조의 수족들을 처벌한 것은 곧 태조가 이 사건의 흑막임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난이 평정된지 17년이 지난 태종 18년에 다시 이 문제가 불거져 당시 태조의 수행내관이었던 안우세, 김수징 등을 문초하였는데, 안우세의 증언을 보면 김화에 도착했을 때 정용수와 신효창이 함승복과 배상충이 북쪽에서 군마를 뽑고 있다고 귀띔했다고 증언했고, 김수징은 조사의가 정용수와 신효창을 태조에게 참소했지만 태조가 물리쳤다고 하여 태조와 조사의의 상하관계를 명백히 입증하고 있다. 이후 숙종대에 박순에게 시호 내리는 문제를 논하다가 갑자기 함승복과 배상충을 태조가 보냈다는 언급이 나타나며 아예 성조(태조)가 조사의의 군중에 머물렀다고까지 언급하고 있다. 무인정사로 순군옥에 갇혔던 조사의가 누구덕에 풀려나서 부사 벼슬까지 할 수 있었을지를 생각하면, 그리고 이미 태종 원년에 태조가 한 번 안변까지 갔다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건 협력관계 따위가 아니라 그냥 대놓고 태조가 미리 사람들을 이리저리 배치해 타이밍을 잡고 대놓고 난을 일으킨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결국 조사의는 별로 한 것도 없었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이방원 입장에서 자기가 후계자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몰아내고 형을 숙청하더니 이제는 아버지와도 싸우고 처벌하는 패륜아가 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하수인에 불과한 조사의를 희생양으로써 주동자로 몰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처벌 수위도 능지형이나 거열형도 아닌 고작 참수형이었다. 당대에 태종 본인이 청송 심씨(심온 가문)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모반의 주범으로 몰린 강상인은 거열형으로 사지가 찢어졌고, 나중에 똑같이 난에 이름이 붙을 정도로 크게 반란을 일으킨 이시애나 이인좌가 빼박 대역모반죄로 걸려 거열형으로 죽은 것과 비교하면 굉장히 편하게 죽여준 것이다. 국왕이 태상왕을 상대로 친정(親征)을 한 유일무이한 사례임을 생각하면, 이는 더더욱 적당히 뭉갤 필요가 있었다.
이 사건 이후 함흥차사의 일화와는 달리 태조 이성계는 어쩔 수 없이(...) 개경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만, 태조 이성계가 반란의 실질적인 주동자였고 적당히 뭉개긴 했지만 그래도 반란은 반란이었는지 영흥부는 영흥군으로, 안변대도호부는 안변현으로 강등당했다가 다음해에 다시 부로 복원되었다. 북방에서 중심이 되는 큰 고장이고 태조의 고향으로써 조선왕조의 출발지와도 같은 곳이니만큼 장기간 격하시켜둘순 없었기 때문이다.
4. 태종의 수상한 행적
현대에 와서 당시 태종 이방원의 행적을 살펴보면 뭔가 찜찜하게 만드는 수상한 행적들을 볼 수 있다.처음 대응부터 수상한데, 조사의가 거병했다는 기록 이후로 태종 이방원은 5일 동안 아무런 군사적 대응을 하지 않았다. 당장 그 배후가 누구인지 생각하면 속히 토벌하라는 명령이 절로 나와야 할 상황에서 5일간 태종이 뭘 했느냐면, "금강산 유람 중"으로 알려진 태조 이성계에게 사람을 보내서 모시려고 한다. 이때까지 조사의는 파죽지세로 승리했다.
관군은 계속 속절없이 밀리는 상황이었는데 반란 발생 16일째인 음력 11월 21일에 태종 이방원은 친히 출병하여 개경을 떠난다.[6] 이 이후 기록 중에서 좀 흥미로운 상황이 보인다. 태종이 하루만에 11월 22일 '원중포'라는 포구로 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태종은 원중포로 간지 4일 만에 볼일 끝났다는 듯이 개경으로 회군해 버린다.# 그리고 더 희한하게도, 그 다음날 조사의의 군사들이 저절로 관군에 겁을 먹거나, 탈영하거나, "스스로 무너졌다"라는 표현 아래 와해되어 버리는 현상이 발생한다.#
태종은 원중포로 가기 14일 전인 음력 11월 8일에는 이성계의 위치를 알린 회양부사(淮陽府使) 김정준(金廷雋)에게 말 1필을 내렸단 기록이 있는데#, 이게 군사작전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는 포상 형식이라는 데에서 이미 무언가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다. 거기다 포상 내용이 "태조가 철령을 지났다고 고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의심을 받는 상황.
사실상 태조 이성계의 이름과 지휘 아래 거병한 반란군임을 감안한 "태조 흑막설"에 대입해 보면 태종이 반란 발생 20일만에 원중포에 있는 태조를 기습하여 사로잡은 뒤 의도적으로 그 정보를 반란군에게 흘린 채 귀환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즉 태종의 행적이 저렇게 모호하게 기록된 것은, 왕이 자기 아버지를 기습해서 포로로 잡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최대한 기록에 남기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이 가설에 따르면 태조가 노환성 지병 때문에 구석진 포구에 숨어서 정양하고 있었고 그 첩보를 빠르게 입수한 태종이 소수의 정예 기습조만 이끌고 가서 순식간에 경호 병력을 무력화시키고 태조를 납치해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태조가 평소처럼 건강했다면 분노하여 직접 군을 통솔하며 선봉장에 서고도 남았을 군인인데, 반란군의 수장이 그런 구석진 곳에 숨어있었다는 건 아무래도 미심쩍은 일이니. 조사의의 난 당시 태조는 70대를 눈앞에 뒀다. 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진 60대 초중반 때도 병환으로 인해 누워있다가 난에 당하고 말았던 태조니 4년이 지난 후라면 더욱 병으로 고생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의미다. 태조의 성격과 이방원에 대한 당시의 증오를 감안하면 직접 반란군을 조련한다고 무리했다가 병에 걸리거나 지병이 심해졌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태종이 원중포에 갔다가 개경으로 돌아간 시기를 기점으로 그전까지 잘 싸우던 반란군이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한 이유도 완벽하게 설명된다. 반란군의 구심점이었던 태조 이성계가 사로잡혔으니 당연히 속수무책으로 털릴 수밖에.
이러한 기록이 제대로 남지 않은 이유로는 이런 해석이 있다. 무패의 상승장군이자 조선의 건국왕으로서 조선왕조에서 숭배해야 할 태조 이성계의 이력에 사상 최초로 패전이 추가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7], 태상왕으로 물러난 개국군주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자기를 쫓아낸 자기 아들인 현직 국왕을 도로 쫓아내려 했는데 그 개국군주를 국왕이 재빨리 몰래 기습하여 납치했다는 기록이 남게 된다. 이는 초기 조선 왕실이 그야말로 천하에 둘도 없을 콩가루 집안임을 대놓고 광고하는 대망신과 마찬가지이므로 왕실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어떻게든 기록을 윤색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8] 게다가 태종까지 겨우 2대, 왕실의 근본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때라 옛 고려 왕실의 그림자가 아직도 진하게 남아있었다. 즉 잘못하다간 크게는 아예 왕실의 존립, 작게는 권위가 엄청나게 흔들리기 딱 좋은 구실이 될 수도 있었던 것.
조사의군 와해 이후 이성계가 개경으로 돌아갈 예정이라는 소식을 전한 것이 조사의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안주 바로 북쪽, 즉 조사의 주둔지의 후방인 연산부였다는 점이나 이방원이 그 소식을 들은 후부터 이성계가 평양을 거쳐 개경으로 돌아오는 데까지 열흘이 걸렸다는 점, 그 동안 알려진 태조의 동선을 고려하면 태종이 개경을 출발한 뒤 짧으면 하루, 길면 5일 만에 태조의 신병을 확보하고 돌아오는데까지는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태조가 조사의 군의 배후에 있었고 군대가 와해되기 이전에 태조의 신병이 태종 측에 확보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조사의의 난 관련 기록이 어느정도 윤색된 정황이 없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재해석이 각광받고 있다. 개전 초기에 이천우의 기병 100여 명이 사로잡힌 것이 태조의 이동 경로에 있던 지역을 습격하려다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관군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작전이라고 볼 수도 있고, 꼭 태종이 직접 습격하거나 데려오지 않아도 태조의 친척인 이천우처럼 가까운 관계의 지휘관을 보내 발만 묶어놓은 뒤 조사의 군대의 와해를 기다렸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5. 결과
조사의의 난은 한 국가의 존위를 훼손하는 군사반란이라는 큰 일임에도 공신, 외척 숙청에 광분했던 태종답지 않게 그리 큰 처벌을 하지 않는다. 뭣보다 건국 초기라 기틀을 확실히 잡을 필요성 때문에라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잔혹하게 때려잡아야 마땅한 시기였음에도[9] 말이다. 구족을 멸할 정도의 대죄인 역모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군사반란 주도자 조사의와 그의 아들을 포함 16명만을 처형한다. 특히, 태조의 측근이자 태조를 따라 동북면으로 갔다가 군사반란에 참여하게 된 정용수, 신효창, 그리고 동북면의 군사 지휘권을 갖고 있었음에도 난에 참여했던 박만 등에겐 매우 관대하게 처벌한다.[10]이때의 기록은 태종실록이 아닌 세종실록에 나오는데, 세종 즉위년 10월 28일자 기사를 살펴보면 "상왕(태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박만은 성품이 물러서 태상(태조)의 명을 어길 수 없었을 것이며, 또 박만 등의 일을 어찌 일일이 법대로만 할 수 있겠느냐' ..."라는 대목이 나온다. 태종 당대의 기사엔 나타나지 않으나, 내용에 '상왕이 말하기를' 이라고 적혀 있는 바, 태종이 직접 조사의의 난에 태조가 가담했음을 시사한 것이다. 위 기사와 태종의 난 가담자들에 대한 태도, 그리고 난이 일어날 당시의 태종의 친정 과정 등을 볼 때, 조사의의 난이 태조가 주도한 것임은 거의 틀림없어 보인다.
결국 조사의의 난을 토벌함으로써 태종은 3차례의 권력투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자신의 왕위계승 정당화와 여말선초의 혼란을 극복하고, 이후 5백년을 이어갈 조선 왕조의 기틀을 공고히 하는 데 성공해낸 것이다.
5.1. 조선의 여진족에 대한 통제력 약화
그러나 건국 초 조선 군사력의 주요 원천 중 하나였던 동북 지역 여진의 군사력은 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이성계가 물러나고 이방원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조선에서 상당한 세력이 이탈하게 된다. 특히 태종 2년(1402) 일어난 안변부사 조사의의 난은 결정적인 계기였다. 안변부사 조사의는 태종의 정책에 반발하여 동북면의 익군(翼軍)과 함주의 가별치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 동북면의 가별초뿐만 아니라 여진의 오도리족, 오랑캐족 등의 대소 추장들이 대부분 가담하였다. 태종은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였는데 이후 여진족과의 관계는 이전의 우호적인 관계에서 대립적인 관계로 바뀌었고 여진족은 조선에 대한 조공을 거부하고 차례로 명나라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게 된다.
- 권병웅, <조선초기 진법의 원리와 문화원형의 시각적 복원 세종시대 『계축진설』을 중심으로>
- 권병웅, <조선초기 진법의 원리와 문화원형의 시각적 복원 세종시대 『계축진설』을 중심으로>
가별초의 핵심 전력 중 하나였던 여진족 추장들은 대부분 '큰어른' 이성계를 따라 난에 가담하였다. 태종의 진압 이후 반역자가 된 그들은 당연히 대부분 조선 왕조와 척을 지게 되었다. 조선과 여진의 관계는 서서히 대립적인 관계로 바뀌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다시 조선 초 여러 차례의 여진족 정벌 전쟁으로 이어진다.
6. 성공했다면?
조사의의 난의 주동자는 결국 태조였다는 가정 하에서 보면 조사의의 난의 성공 이후의 결과는 결국 태조의 복귀다. 따라서 반란이 성공했다면 태조가 복위했을지도 모른다.문제는 그 다음인데, 태조가 주동자였다면 아마도 1차 왕자의 난과 관련된 복수가 목표였을지도 모른다. 그럼 당연히 태종은 폐위는 기본이고 심하면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 그랬더라면 태종의 치세는 물론, 미래의 세종대왕의 치세도, 훈민정음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1차 왕자의 난 참여자 전원도 다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헌데 이들을 모두 쳐내버리면 조선을 이끌어갈 사람이 크게 부족해진다. 안 그래도 1차 왕자의 난으로 일단 정도전을 비롯한 태조를 따르던 이들이 상당수 제거되었는데, 2차로 그 반대파까지 제거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1차 왕자의 난과 관련없이 개국 초라 아직도 조선 왕실에 반대하는 이가 있을 그러잖아도 불안한 상황 속에서 조선을 지지할 이들이 대거 삭제된다는 의미다.
거기다가 단순히 대신만 숙청당하지 않는다. 왜냐면 태종에게 붙은 이들은 태종의 외척, 태종의 형제들, 종친들, 무인들, 심지어 신덕왕후 강씨의 일족(...) 등등 여러 세력들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현보와 같은 여말선초 고려 근왕파 구세력까지 있는 지경. 결국 태조가 복수를 부르짖으며 숙청극에 나서면 1차 왕자의 난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실로 끔찍한 숙청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태조가 어느 정도 완급 조절을 한다면야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결국 태조의 측근들만 남아 당장에 쓸 조선의 인재풀이 매우 좁아지고, 숙청 과정에서의 정치적 불안정이라는 리스크도 생긴다.[11]
더 큰 문제는 당장에는 태조가 복위를 하건 실권을 되찾건 하겠지만 태조가 죽은 뒤는? 태조는 당시 고희가 다 된 노인이었고, 이 사건 이후 6년 뒤 세상을 떠났다. 태조가 죽은 뒤에는 당연히 태조의 아들이 뒤를 이어야 하는데, 태종을 제외하면 이 시기까지 살아 있는 태조의 아들들은 정종, 익안대군, 회안대군에 불과하다.[12] 게다가 이들은 죄다 1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 편에 참여했거나 참여했다는 의혹을 받는다.[13] 태조 뒤에 이들 중 하나라도 즉위하면 태조의 정책은 그대로 엎어질 것이다.[14] 그럼 또 종친들은 어떻냐면 당연히 종친들도 태종의 편, 즉 가족이고 친척이고 태조의 편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자기 편이라고 종친 아무나 왕위를 물려줬다간 1차 왕자의 난보다 더 심한 왕위쟁탈전이 벌어지면서 혼란만 가중되었을 것이다. 결국 조사의 반란이 성공해봤자 태조에겐 복수 성취 밖에 남을게 없고 조선만 더 철처히 만신창이가 될테니 이래저래 실패하는 게 조선에게나 태조에게나 최선이었을 것이다.[15][16]
7. 기타
연려실기술과 같은 야사에서는 박순의 함흥차사와 같은 일화 등으로 당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박순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환궁한 태조가 태종을 여러 차례 죽이려 했으나, 하륜 등의 지략으로 이를 이루지 못했고 그제서야 태조가 태종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실록에 따르면 사실 당시 하륜은 명나라에서 영락제가 즉위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사신으로 가게 되어서 조사의의 난이 발생하기 전인 태종 2년 10월 15일에 조선을 떠났고, 난이 진압되고 시간이 좀 지난 뒤인 태종 3년 3월 17일에서야 조선에 돌아왔다고 한다.[17] 즉, 박순과 함흥차사처럼 이쪽도 사실과는 달랐던 이야기라는 것.8. 사극
8.1. 용의 눈물
조사의의 난을 거의 처음으로 다룬 사극은 용의 눈물.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태조 흑막설을 참고했는지, 태조 이성계가 조사의와 의기투합하여 난을 일으킨 것으로 묘사한다. 다만 조사의가 이방원에게 반란을 일으킨 동기를 묘사하기 위해서인지 이방원과의 악연으로 인해 중앙 조정에서 쫓겨나 복수를 결심했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여기서도 조사의는 안변부사로 제대로 나온다.
실제로는 이성계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지만 이 드라마의 조사의는 신덕왕후에 대한 은혜를 갚는다는 차원에서 조사의가 이성계의 뜻을 받든 주도 하에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조사의가 난을 일으키고 이성계가 동의해준 느낌이다. 그리고 전쟁의 전개도 이방원의 친정군은 서북면에서 조사의의 주력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는 와중에 조영무가 이끄는 별동대가 이성계의 본진인 함흥을 툭툭 건드리는 그림으로 나온다.
여전히 여진족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이성계에게 여진족이 호응하려고 하나 이를 파악한 하륜이 명나라로 직접 가 황제를 만나 여진족을 압박해달라고 요청하며, 황제도 이를 받아들여 결국 여진족은 물러난다. 믿고있던 여진족의 지원이 순식간에 끊기자 애초에 수적으로 열세이던 반란군은 기세가 높다는 걸 이용해 얼른 결판을 내려고 하나 조정에 포섭된 박만의 배신으로 조사의는 사로잡히며, 본거지 함흥도 이숙번 등에게 점령당해 이성계도 완전히 손발이 떨어져나가는 신세가 되며 난이 종료되었다.
결국 이성계는 마지못해 궁궐로 돌아오며, 조사의는 난을 주동했다는 혐의로 처형당한다. 죽기 직전 조사의는 이방원의 추후 행보를 예견하는 독설을 퍼부으며, 그의 말처럼 이방원은 본격적인 외척 박살에 나선다.
원래 용의 눈물의 초기 기획에서는 조사의의 난과 그 이후 연회에서 이방원이 이성계와 만나서 매듭을 짓는 것으로 마무리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당시 인기 등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해 조사의의 난 이후인 태종 치세와 이방원의 양위 이후 사망까지 그려지게 되었다.
8.2. 태종 이방원
용의 눈물 이후 25년만에 사극에서 재현되었다.[18]
1차 왕자의 난으로 이성계는 이방원에 의해 궁궐에 갇힌 채 아무것도 못하는 허수아비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성계는 이방원파의 요구대로 이방과를 세자에 세우는데, 차라리 방과에게 힘을 실어주어 방원을 견제하려는 의도로, 아예 방과에게 선위해버리고, 방과가 가족의 파탄을 막기 위해 이를 받아들이며, 상왕으로 물러난 이성계는 방과를 뒤에서 지원하며 방원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이미 실권을 장악한 이방원 세력에 의해 정종에게 붙여둔 사람들은 모두 사헌부로 압송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이방간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 간의 관계가 파탄 직전에 이르자 결국 정종 이방과는 더 이상의 골육상쟁을 막기 위해 이방원에게 양위를 결심하여 이성계의 기대를 저버리고 만다.
이성계는 세자의 신분으로 자신을 알현한 이방원을 용서할 생각이 없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을 궁 밖으로 내보내달라고 요구하지만, 이방원은 차갑게 거절한다.[19] 이후 이지란에게 동북면, 필요하다면 서북면과 여진족까지 모아 북방에서 도성으로 군사를 모아 진격할 것을 은밀히 하교하지만, 이지란은 내란으로 나라가 망하게 할 순 없다며 거절한다. 결국 이성계는 단식 투쟁을 벌여, 방과로 하여금 자신을 출궁시키는 데에 성공하여 동북면으로 이동한다. 다만 자신이 직접 동북면으로 가면 눈에 띄기 때문에 일단 이방원의 눈을 피하기 위해 양주 회암사에 기거한다.
그리고 21화에서 이성계는 조사의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동북면 일대의 병력을 규합시킬 것을 의뢰하며, 조사의가 이성계의 뜻을 받들었다고 묘사한 용의 눈물과는 달리 확실히 이성계의 주도 하에 이뤄진 사건이라는 스탠스를 취했다.
23화에서 조사의는 이성계의 수결 문서를 들고 동북면과 서북면의 지휘관들을 포섭하여 군사 준비를 마치고 이성계에게 보고하고, 이성계의 지시로 동북면의 군사가 서북면으로 집결하여 총 1만의 반란군이 남하를 시작한다. 이성계는 민심을 고려하여 동북면의 주력군을 미리 서북면에 보낸 뒤 은밀히 후발로 합류한다.
한편 반란 소식을 들은 태종은 각 절제사들과 대신들을 소집하여, 역모를 현비 강씨의 인척인 조사의가 일으킨 역모로 규정하고, 태상왕과는 관련되어 있지 않다고 선언한 뒤, 하륜에게는 입단속을 시킨다.[20] 지휘소를 설치한 뒤 이천우와 5천의 병력을 선발로 보내 싸우게 하는 한편 조영무를 동북면으로 보내어 군수 지원을 차단하게 한다. 그러나 이천우가 이끄는 군대는 패퇴하고 만다. 결국엔 태종은 자신이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이거이와 함께 친정을 감행하고, 이숙번과 박은이 남도 군사를 집결시켜 후발로 오도록 지시한 뒤 직접 전장에 나선다.
태종이 친정을 단행했다는 소식을 들은 태상왕 이성계는 전군을 보내어 전면전을 감행하는 동시에, 기습 병력 300을 따로 빼내어 관군 본영에 있는 태종을 기습하고, 베어도 좋다고 명령한다. 기습 소식을 들은 태종은 출전시키고 남은 병력들을 모두 모아 직접 맞서 싸우고, 위기에 처하는 찰나에 이숙번과 박은, 민무질이 이끌고 온 지원군 덕분에 기습을 격퇴한다.[21] 그리고 포로가 된 반군 지휘관에게 이성계의 위치를 알아낸 뒤 지원군을 이끌고 이성계가 있는 반란군 본영을 기습하여 이성계의 신변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면서 24화 종료.
25화에서는 지휘관을 잃은 조사의마저 이숙번과 박은에 체포당하고 독단으로 난을 일으킨 혐의로 조사의와 이성계를 모셨던 김 내관 등 관련자들 모두 참형당하면서 조사의의 난은 막을 내렸다. 그리고 태조는 태상전에 유폐되었다.
태조는 태상전으로 찾아오는 태종에게 "날 조롱하러 오는 것이냐" 며 비꼬지만 그가 떠나자 통곡에 가까운 눈물을 쏟으며 괴로워하고, 태종 역시 원경왕후 앞에서 "이 죄를 무엇으로 씻어야할지 모르겠다" 며 괴로워하는 가운데 자신을 냉정하게 대하는 이성계에게 "찾아 뵙는 것이 제가 벌을 받는 것이다. 부디 오래오래 살아 벌을 내려달라" 며 허락되지 못할 용서를 구하는 장면이 지나간다. 결국 이 조사의의 난에선 전투의 승리는 이방원이 가져갔을지 몰라도, 이성계와 이방원 둘 중 그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한 전쟁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듯한 묘사.
흥미로운 점은 드라마에서 조사의의 군세가 이성계의 사병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조선은 이미 사병을 모두 혁파해 관군 체제를 완성했기 때문에 조선군과 반란군의 대결은 자연스럽게 國과 家의 대결이 된다.[22] 그리고 승리는 조선군(國). 드라마의 캐치프라이즈인 '家를 넘어 國으로'를 직설적으로 보여준 것으로 볼 여지가 있는 연출이다.
여담으로 반란에 참여한 장병들은 모두 머리에 갈색 띠를 두르는 것으로 피아 식별을 했다. 위화도 회군 당시 회군에 따르는 장병들이 붉은 띠를 둘렀던 것과 대비된다. 또한 위화도 회군에 참여한 군관들은 모두 투구를 쓰고 그 위에 붉은 띠를 둘렀지만, 조사의의 난에 참여한 핵심 군관들은 투구를 쓰지 않았다. 또 반란군이 입은 갑옷은 중앙군보다 더 밝은색 군복을 입었기에 누가 반란군인지 구별하기에도 쉽다. 다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시국에 제작된 탓인지 1화에서 연출된 위화도 회군과 마찬가지로 병사들이 대충 싸우다가 끝내는 듯한 액션 연출은 혹평이 많다.
[1] 그리고 이들은 함흥차사 전설의 주인공이 된다.[2] 신덕왕후의 친가는 곡산 강씨(황해도 곡산군), 외가는 진주 강씨(경상남도 진주시)다.[3] 신덕왕후의 사촌이다.[4] 할아버지 조변이 상장군까지 지냈을 만큼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다. 조사의의 장모가 신덕왕후의 언니이다. 즉 신덕왕후에게는 조카사위가 되는 셈이다.[5] 성종의 왕후였던 폐비 윤씨가 벌인 주술서 사건으로 휘하 나인들이 대신 처벌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모시는 상전을 중심으로 내관과 나인들이 일종의 계파를 형성하기도 했기에 이러한 처벌은 '부하에게 내려진 불명예는 곧 직속상전인 해당 인물의 불명예'라는 인식의 발전이었다. 또한 측근 심복을 숙청하여 계파 자체의 힘을 꺾고 분위기를 암울하게 만들어 그 인물에게도 간접적으로 타격을 주었다. 상식적으로 아무리 계급이 있고 상전을 위해선 경우에 따라 목숨까지 바친다곤 해도, 휘하 내관 및 나인들은 상전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행위에 대해 처벌을 받거나 심지어 죽기까지 한다면 남은 동료들이 말만 겉으로 꺼내지 않을 뿐 분위기가 영 좋을리 없었다.[6] 개경 수비는 장인인 민제를 수성 도통사(守城都統使)로 삼아 맡겨 두었다.[7] 원래는 주력군의 중앙 지휘부에 있어서 주력군을 격파해야만 사로잡을 수 있는 총사령관이 주력군과 떨어져 별도의 장소에 있다는 것부터 태조의 건강 상태가 직접 싸우는 건 물론 지휘/행군조차 못할 지경이란 뜻이라, 패배하고 사로잡힌 건 커리어에 악영향이 될 사유까진 아니다.[8] 한국사 학자들 중에선 애초에 조선왕조가 본토 중국을 뺨 때릴 만큼 강력하고도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가 힘든 강력한 성리학 국교화 드라이브를 건 것도 실질적으론 이성계의 난부터 시작해서 왕자의 난이니, 계유정난이니 도저히 유교적 관점에서 옹호 불가능한 친족살해 중심의 잔혹한 집권, 권력 안정화 과정을 통해 새워진 것에 대한 보상심리로 해석하는 일각까지 있다.[9] 실제로 건국 초기에는 반란이 일어나면 유독 심할 정도로 처참하게 때려잡는게 기본이었고, 이는 왕을 위협할 수 있는 합법적인 힘을 지닌 개국공신들에게도 다를 바 없었다. 특히 조선과 비슷한 시기 건국한 대제국 명나라의 홍무제와 영락제는 군대를 이끌고 직접 선봉에 서서 전쟁하며 유독 더욱 잔인하게 군사반란을 진압하고 공신과 적군들을 대학살해댔다.[10] 심지어 이 중 신효창은 훗날 손녀, 외손녀, 증손녀가 모두 세종의 며느리가 되면서 왕실과도 사돈을 맺는다.[11] 거기에다가 정도전, 남은 같은 핵심 인력들의 대다수는 이미 오래전에 참살된 후였고, 그런 인력들을 구하고 다시금 길러내는 것부터도 쉽지 않았다.[12] 진안대군은 건국 초기에 사망, 덕안대군은 요절, 무안대군과 의안대군은 1차 왕자의 난으로 살해당했다.[13] 그나마 태조와 사이가 좋은 자식이라곤 정종과 이방의 정도지만, 정종은 태조 자신이 마음이 순후하여 내 가슴을 아프게 한 적이 없었다고 하였고, 이방의는 정치적으로 아무 편도 아닌 중립이었다. 즉, 특별히 총애받을 이유도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미움살 이유도 없다는 말.(게다가 이방의는 태조보다 4년 먼저 세상을 떠날 만큼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아서 투병자를 왕위에 올리기도 그러하다.) 그나마 정종은 무인정사 배후론으로 논란이 있긴 하지만, 일단 기록에는 다른 왕자들과는 달리 무인정사 당일에 몸이 아픈 부친 태조를 위해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14] 정종이 그나마 사이가 가깝지만, 정종이 왕이 될 수 있었던 명분이 명분인지라 태조의 정책을 그대로 이을 순 없었을 것이다. 물론 1차 재위를 흑역사로 처리하고 2차 재위를 태조에게 직접 물려받은 것으로 하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15] 덤으로 훗날의 태조에 대한 평판도 더 깎일 것이고. 심지어 한국사에는 창업군주가 적국에 가담하여 자신을 폐위시킨 아들을 사로잡고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의 손으로 멸망시킨 자포자기식 사례마저 있었다.[16] 재미있게도 조사의의 난과 견훤이 스스로 후백제를 멸망시킨 사건 모두 KBS에서 사극으로 다뤘다.[17] 태종 2년 10월 15일 을축 2번째기사, 태종 3년 3월 17일 갑오 1번째기사[18] 세종 시대를 다룬 대왕 세종과 장영실은 물론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는 무인정사까지만 다루고 곧바로 태종 즉위로 넘어가기 때문에 조사의의 난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건 용의 눈물 이후 태종 이방원이 최초다. 나의 나라에서는 태조가 가공인물 남선호와 여진족을 이용해 난을 일으켰지만 엄밀히 말하면 조사의의 난과 제2차 왕자의 난을 섞어 만든 가공의 스토리이기 때문에 제외.[19] 알현이 끝난 후 이방원은 그 정도도 못 들어주냐는 정종 방과의 역정에, 아버지는 무장으로서의 자부심이 높은 분이시니, 이대로 아버지를 밖으로 내보내면 바로 군사를 모아 자신을 칠 것이라고 이성계의 행보를 예상하며 이 때문에 태조를 밖으로 내보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방과도 마지못해 수긍하지만, 아버지가 군을 일으킬 것이란 말에는 회의를 표하는데, 이 때문에 아버지를 독단적으로 궁 바깥으로 보내버리는 실책을 범한다.[20] 부자 간의 내전으로 온 나라 백성들의 손가락질을 넘어 백성들이 반란군에 가담할 수 있다는 점을 이방원이 시사한다. 반대로 이성계 진영에서도 부자끼리의 내전이라는 점을 들어 자신은 조용히 진영으로 가겠다고 하고 이성계가 몰래 가는 장면도 나왔다. 이방원, 이성계 부자 둘 다 이 짓이 막장 중의 상막장 짓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셈.[21] 여기에 정치력과 통솔력은 강하지만 무력은 약한 태종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데, 고려시절에 칼을 직접 잡았을때는 병사 한명 베는것도 쩔쩔매던 태종이 병사 두 셋을 베며 나름 선전하지만 오히려 수세에 몰려 위기에 쳐하다가 장군들과 병사들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22] 조영무와 이름 모를 동북면 노인의 대립도 이를 대변한다. 조영무는 관군의 일면을 보이고, 노인은 이성계를 따르는 가별초의 정체성을 끝까지 내비치며 조영무와 대립하다 그의 손에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