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23 12:18:47

제2차 이준용 옹립 사건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시대 실패한 내란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내란 주도 세력
제2차 왕자의 난 <colbgcolor=#ffffff,#1f2023> 이방간, 박포
조사의의 난 이성계, 조사의
이징옥의 난 이징옥
단종 복위 운동 사육신
김처의의 난 김처의
이시애의 난 이시애
임꺽정의 난 임꺽정
정여립의 난 정여립
송유진의 난 송유진
이몽학의 난 이몽학
이괄의 난 이괄
이인거의 난 이인거
삼수의 옥 정인중 등 노론
이인좌의 난 이인좌
나주 괘서 사건 윤지
정유역변 홍상범
황사영 백서 사건 황사영
홍경래의 난 홍경래
임술농민봉기 유계춘 등 진주 사람
이필제의 난 이필제
이재선 추대사건 안기영 등, 이하응
임오군란 김장손, 유춘만오군영의 일원
갑신정변 김옥균급진 개화파
제1차 이준용 옹립 사건 이하응, 위안스카이
이재면 추대 사건 이하응, 위안스카이
동학 농민 혁명 전봉준 등 동학 농민군
제2차 이준용 옹립 사건 이하응
조선군 훈련대 반란사건 이두황조선군 훈련대
갑오의병 김원교, 서상철 등
을미의병 유인석 등 조선 의병
춘생문 사건 임최수, 이도철친러파, 친미파
신축민란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등
을사의병 최익현 등 조선 의병
정미의병 이인영13도 창의군
※ 대한제국기의 사건 포함
}}}}}}}}}

1. 개요2. 배경3. 상세4. 실패 이후

1. 개요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손자 이준용(영선군)을 왕위에 앉히려 했던 사건.

2. 배경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흥선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이후 그는 자신의 손자인 이준용을 왕으로 세우려는 두 번째 시도를 했다.

3. 상세

이를 위해 7월 26일부터 8월 15일 사이에 이준용을 정부의 핵심 직책인 내무대신 대리와 군대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또한, 그의 측근인 이태용과 박준양 등을 군국기무처 회의원으로 발탁해 이준용을 돕게 했다.

그러나 고종과 왕비 민씨를 지지하는 개혁 관료들의 반발과 일본 공사관의 반대로 이 계획은 실패했다.

4. 실패 이후

음모가 발각된 후, 고종과 민씨는 내무대신 박영효와 법무대신 서광범에게 이준용과 그의 측근들을 처벌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1895년 4월 19일 이준용은 체포되었고, 특별재판소에서 심판을 받았다.[1] 재판 결과, 그는 영구 유배형을 선고받았고, 그의 측근 중 박준양, 이태용 등 5명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1] 이후 이준용은 ‘3년간 일본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출국했으며, 1907년 7월 순종이 즉위한 후에야 귀국이 허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