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1-27 15:19:47

이도철

고종의 경복궁 탈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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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colbgcolor=#fff,#191919>이도철(李道徹)
성관(聖寬)
두남(斗南)
본관 전주 이씨
출생 1852년[1]
충청도 제천현
(현 충청북도 제천시)
사망 1895년 12월 30일[2]
국적 조선
시호 충민(忠愍)

1. 개요2. 생애3. 사망 이후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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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무장으로 춘생문 사건의 주역이다. 선조의 9남 경창군의 8대손으로, 순조, 전계대원군, 남연군 등과 같은 항렬이다.[3]

2. 생애

1852년(철종 3년)에 충청도 제천현(현재 충청북도 제천시)에서 이덕초(李悳初)의 아들로 태어났다.# 제천향교 교장을 거쳐 1893년(고종 30년)에 의금부 도사로 임명받았다.

1895년(고종 32년)에는 육군 참령으로서 훈련대 3대대 대대장 직을 맡았다. 그해 10월에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당하고 친일 내각이 정권을 장악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하던 고종경복궁에서 탈출시켜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는 춘생문 사건을 기도했다.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춘생문 사건 문서 참조. 그러나 사전에 계획이 탄로나 실패했고, 11월 27일에 관련자들과 함께 체포당해 12월 30일에 새남터에서 춘생문 사건을 같이 기획했던 동지 임최수와 함께 처형당했다. 향년 43세였다.

3. 사망 이후

이도철이 처형당하고 1달이 조금 지난 뒤인 1896년(건양 원년) 2월에 고종은 마침내 경복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로써 친일 내각은 무너지고 친러 내각이 세워졌으며 이도철은 복권되었다. 그 뒤 시호 '충민(忠愍)'과 군부 협판 직을 추증받았으며 가족들은 지원금을 받았다.# 1901년(광무 5년)에는 육군법원장 백성기의 건의로 같이 사형당했던 임최수와 함께 장충단사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삼거리에 있다.

4. 여담

  • 《충민공초》, 《충민공부군행장초》, 도검 등 이도철의 유품을 현재까지 후손들이 소장한다고 한다.#

[1] 행장에는 1853년(철종 4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음력 11월 15일. 이틀 후 조선은 공식적으로 태양력을 도입하였다.[3] 경창군의 서장남 창림군의 7대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