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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중추원 초대 부의장 | |||
<colbgcolor=#0B0B3B><colcolor=#ffde09> 제26대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김윤식 金允植|Kim Yun-sik | |||
이름 | <colbgcolor=#fff,#1f2023>김윤식 (金允植) | ||
출생 | 1835년 (헌종 1) 10월 29일 (음력 10월 3일) | ||
경기도 광주부 (現 경기도 광주시) | |||
사망 | 1922년 1월 21일 (향년 86세) | ||
경성부 자택 (現 서울시 종로구 봉익동 자택) | |||
묘소 |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삼패리 평구마을 (현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 ||
저서 | 《운양집》, 《임갑령고》 《천진담초》, 《음청사》 《속음청사》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B0B3B><colcolor=#ffde09> 본관 | 청풍 김씨 (淸風) | |
증조부모 | 증조부 : 김기건 | ||
조부모 | 조부 : 김용선 | ||
부모 | 부 : 김익태(金益泰)[1] 모 : 전주 이씨 | ||
배우자 | 윤씨 | ||
활동 | 1874년 ~ 1922년 | ||
신장 | 9척(187cm) (?)[2] | ||
학력 | 한학 수학 (1874년, 증광시 병과) | ||
직업 | 학자, 시인, 정치인 | ||
종교 | 유교(성리학) → 대종교 | ||
자 | 순경 (洵卿) | ||
호 | 운양 (雲養) | ||
작위 | |||
경력 | 대한제국 외부대신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초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 }}}}}}}}} |
김윤식 초상화[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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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도 울적하여서 새파란 하늘 높이 올라갔다네
굽어보니 공자님 가르침의 이 나라에 조석연기 나는 굴뚝 몇몇이런가
돌아가려도 한땐들 마음 편히 쉴 곳 없어
아아, 고래고래 울부짖으며 풀어헤친 머리로 훌쩍 내려왔다네[6]"
운양 김윤식
조선 말기의 정치인. 자는 순경(洵卿), 호는 운양(雲養), 본관은 청풍.굽어보니 공자님 가르침의 이 나라에 조석연기 나는 굴뚝 몇몇이런가
돌아가려도 한땐들 마음 편히 쉴 곳 없어
아아, 고래고래 울부짖으며 풀어헤친 머리로 훌쩍 내려왔다네[6]"
운양 김윤식
대표적인 친청파이자 온건개화파[7]로 김홍집 내각의 외부대신으로서 갑오개혁을 추진하기도 했다. 러일전쟁 직후부터 친청/친러 개화파들이 그러했듯이 소극적인 친일 성향을 보이게 되며 경술국치 이후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 되는 등의 행보를 보인다. 1919년 3.1 운동 때 이용직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제출해 작위를 박탈당하고 옥고를 치렀다.[8]
2. 생애
2.1. 생애 초기
1835년 음력 10월 3일, 경기도 광주부에서 이조판서와 좌찬성 등을 역임한 김익태와 부인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효종 때 영의정을 지냈고 대동법을 추진한 관료인 김육의 9세손이다. 8세가 되던 해에 부모님을 잃고 숙부인 청은군 익정의 집이 있는 양근에서 생활했다. 1850년 그는 유신환(1801~1859)의 문하에 들어가 남정철, 민태호, 박홍수[9] 등과 학문을 배웠다. 그가 30세가 되던 해에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대과에서는 합격하지 못해 10여 년 동안 학문에만 전념했다. 1859년 유신환이 사망하자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파의 시조로 꼽히는 박규수의 문하로 들어가 개화 사상을 배웠으며 1874년 40세의 나이로 증광시 병과에 합격해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2.2. 관직 생활
고종과 관료들의 모습 (1890년) 가운데가 고종, 왼쪽부터 이정로, 심상한, 김윤식, 김성근, 이용원, 김병익, 민종묵, 서정순, 이주영, 김영전 |
1880년대 당시 고종은 실질적으로 친정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고종은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 세력을 신임했고 여흥 민씨 세력은 그를 등용했다. 1876년 황해도의 암행어사로 파견되었고 순천부사를 지냈으며 1881년 영선사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양무운동으로 개화되던 청나라의 모습을 보고 돌아왔는데 이는 이후 김윤식의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는 천진에 파견되어 있었는데 조선의 민씨 세력들로부터 반란이 일어났으니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라는 급보를 받은 김윤식은 이홍장과 위안스카이를 찾아 도움을 요청했다.[10] 그는 청나라 군대와 함께 귀국한 뒤 임오군란 진압에 개입하며 흥선대원군을 톈진으로 압송시키게 했다. 이후에는 강화유수, 공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동도서기론적인 정책들을 추진했고 통리기무아문의 여러 요직을 역임했으며 1884년 러시아와의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1884년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게 되며 실패하자 이는 그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김윤식은 박영효의 아버지 박원양을 장사지낸 혐의와 흥선대원군을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귀국시키려던 위안스카이와 동조했다는 혐의로 실각해 1886년 광주유수로 좌천되었다가 충청남도 면천으로 유배되었고 이후 김홍집 내각에 외부대신으로 합류하기 전까지 8년 동안 유배 생활을 지냈다.
2.3. 김홍집 내각
1894년 온건개화파 김홍집을 중심으로 갑오개혁이 실시되며 김홍집 내각의 외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김홍집 내각의 외부대신으로서 조선의 외교 정책을 담당했고 개화에 힘썼다.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일본이 청나라에게서 요동(랴오둥) 반도를 할양받게 되자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3국이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이 다롄을 러시아에 양도하도록 압박했고 결국 일본은 다롄을 양도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에 조선에서는 박정양, 이완용 등을 중심으로 한 친미/친러 성향의 내각이 수립하자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켜 정국을 반전시킨 후 김홍집, 조희연, 정병하 등을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해 그는 외부대신으로서 내각에 다시 합류했다. 다시 수립된 친일 내각은 단발령, 종두법 등 을미개혁을 시행했고 태양력을 채용하는 등의 개혁 정책을 펼쳤지만 단발을 강요하는 등의 정책은 백성들의 반발이 매우 심했고 특히 을미사변으로 반일 감정이 극심해져 있던 상황에 김홍집 내각 자체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수립된 내각이었기에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다.1896년에는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등과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 참여하고 독립신문 발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해산되며 실패로 끝이 났으며 최익현을 비롯한 위정척사파들의 공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고종은 을미사변 직후 경복궁을 일본군과 친일 내각이 장악한 것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1895년 임최수, 청안군, 이범진 등의 정동파 관료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 등의 도움을 받아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으나 친위대장 이진호가 군부대신 서리 어윤중에게 밀고해 실패로 끝이 났다. 그러나 3개월 후 다시 이범진, 이윤용, 이완용 등을 비롯한 정동파 관료들의 철저한 준비 끝에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는데 성공해 김홍집 내각은 붕괴하게 되었다. 김홍집 내각의 을미개혁 역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인 아관파천이 일어나고 친일 내각이 무너지며 을미개혁 역시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2.4. 실각 및 유배 생활
당시 외부대신이었던 김윤식을 포함해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내부대신 유길준, 군부대신 조희연, 탁지부대신 어윤중, 법부대신 장박(장석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등이 면직되고 역적으로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 체포된 김홍집과 정병하는 순검들에게 살해당했고 고향으로 도피했던 어윤중도 원한이 있던 향반 무리에 의해 살해당했다. 새롭게 출범한 김병시 내각은 반일 성향의 내각으로 김윤식을 을미사변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묵인한 죄로 강하게 탄핵했고 결국 1897년 제주도로 종신 유배형에 처해졌다. 1898년 12월 대표적인 위정척사파인 최익현은 김윤식, 유길준, 서재필 등을 사형할 것을 주장했는데 김윤식은 제주도에서 지도로 옮겨가며 11년 동안 유배 생활을 보냈다. 그나마 일진회가 김윤식 사면 운동에 앞장섰지만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가 1907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고령을 이유로 석방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 73세였다.2.5. 말년
1908년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을 역임했고 1910년 어전 회의에서 한일 병합에 대한 안건에 '不可不可'라고 대답하였으며[12] 경술국치 직후 자작 작위와 5만원의 위로금을 받고 1912년 8월 9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고 1916년 박제순에 이어 경학원 대제학을 지냈다. 이때 김윤식은 속음청사에 군주 즉 순종이 일본의 작위를 받았는데 자신이 받지 않으면 군신일체가 깨지기에 부득이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여 이용직과 함께 독립 청원서인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를 총독부와 일본정부에 보냈다가 경학원 대제학과 자작 작위 등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고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고령[13]을 이유로 집행유예로 석방되었으나 대일본장서를 윤문한 손자는 투옥기간 중 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조선귀족 자작 시절 모습[14] |
2.6. 사망
1922년 1월 21일, 경성부 종로구 봉익동 자택에서 향년 86세로 조용히 사망했다. 김윤식은 “내 장의를 간소하게 거행하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은 사회장을 결정했다. 1922년 1월 24일 이를 위해 박영효와 이용직을 장례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추대했으며 사회장위원회를 구성하고 업무를 나눠 진행하지만 1922년 1월 27일부터 김윤식 사회장을 반대하는 주장이 터져 나왔고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회혁명당과 조선공산당 등의 공산주의 세력이 김윤식의 사회장 반대를 주장했다. 조선 사회에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자 조선귀족 자작이었던 김윤식의 장례식을 사회장으로 하는 것은 과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들은 1922년 1월 30일과 1922년 2월 1일 등 2차례에 걸쳐 반대를 위한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제1차 강연회의 주제는 김윤식의 사회장 반대였고 제2차 강연회 주제는 사회장을 주도한 자들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사회장을 반대한 사람들은 사회장을 주도한 자 모두를 민중의 적으로 규정하고 계급 투쟁을 선언한 것이다. 결국 사회장위원회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김윤식의 사회장을 취소하게 되는데 박영효의 설명에 따르면 사회장을 강행해 반대 운동이 더 격렬해지면 고인에 대한 도리가 아닐뿐더러 분쟁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김윤식의 장례식은 그가 사망한지 2주만인 1922년 2월 4일 1,000여 명의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3. 여담
- 김윤식은 현재는 물론 당시에도 논쟁적인 인물이었다. 경술 국치 당시 의견과 독립청원서를 근거로 민족주의자로 보고 김윤식의 장례식을 사회장으로 치르자는 세력과 김윤식이 조선총독부 내에서 귀족 작위를 받은 점과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한 점을 들어 반대하는 세력 간의 논란이 생겼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대일본장서 사건 또한 김윤식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강조하는 지점이 다르다. 친일파로 보는 입장에서는 대일본장서를 '일본 천황에게 독립을 청원한 문서'[15]라고 보는 반면 민족주의자로 보는 관점에서는 '일본 의회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한 문서'로 보고 있다. 비록 중추원 부의장이었고 조선귀족 자작이었지만 1919년 이용직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고 3.1 운동에 동조한 점이 인정되어 친일인명사전에 실리지 않았고 각종 친일파 명단에 실리지 않았다.
- 저서로는 <음청사>와 <속음청사>가 있다. 문집인 <운양집>은 2014년 번역이 되어 출판되기도 하였다.
4. 대중매체
- 현기영 <변방에 우짖는 새>
제주도에 유배를 온 유배인으로 등장한다.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소설의 가장 중요한 두가지 사건인 방성칠의 난과 신축민란을 목격한다. 이 소설자체가 그의 저서 속음청사에 기초하기 때문에 사건자체에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한 파트에 주인공을 맡는 등 꽤나 중요한 인물이다. 다만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이재수의 난>에서는 이재수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가 등장하지 않는다.
5. 같이 보기
김홍집 내각 (갑오개혁 ・ 을미개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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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대신 | 군국기무처를 통한 개혁 | 박영효 | 박정양 | 유길준 | |
농상공부대신 | 엄세영 | 김가진 | 정병하 | ||
신기선 | 이범진 | ||||
군부대신 | 조희연 | 안경수 | 조희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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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대신 | 김윤식 | 김윤식 | 김윤식 | ||
학부대신 | 박정양 | 이완용 | 서광범 | ||
※ 2차 내각은 출범당시 3차 내각은 특정기간을 기준으로 함. | }}}}}}}}} |
고종의 경복궁 탈출 계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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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
온건개화파 溫乾開化派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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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 ~ 1897) | |||||||
김가진 | 김기수 | 김윤식 | 김홍집 | 민영익 | |||
박정양 | 신기선 | 조희연 | 어윤중 | 장석주 | |||
대한제국 (1897 ~ 1910) | |||||||
<rowcolor=#000> 친일파 (개화당) | 친청파 | ||||||
김종한 | 김춘희 | 안경수* | 김성근 | 김윤식 | |||
유길준* | 윤웅렬* | 이두황 | 민영익 | 박제순 | |||
이지용 | 이진호 | 장석주 | 성기운 | 신기선 | |||
조민희 | 조중응 | 조희연 | 심순택 | 이용직 | |||
* 급진개화파로 보는 시각도 있다. | |||||||
조선의 붕당 (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수구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
[1] 이조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한 조선의 관리.[2] 동학농민혁명자료총서에서 동학 농민 혁명 당시 김윤식의 키가 9척(九尺)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척 단위인 30.3cm로 계산하면 273cm가 나오지만 김윤식의 키를 표현하는 9척은 당시 조선 후기 시대의 척 단위인 30.3cm가 아닌 조선시대에 쓰였던 척 단위 중 하나인 주척(20.8cm)을 사용하고 표현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주척인 20.8cm을 쓸 경우 187cm 정도 현실적인 수치가 나온다. 주척으로 계산한 키도 저 당시의 남성 평균 키가 161cm였음을 감안하면 당시에는 엄청난 장신이다. 그러나 아래 단체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다른 문신들과 키가 거의 비슷하고, 187cm로 보이지도 않는다. 기록이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박탈] [박탈] [5] 조선인의 모습을 많이 그린 것으로 유명한 영국의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Llizabeth Keith, 1897-1956)가 지은 "Old Korea 1920-1940"이라는 책에 수록된 초상화로 1919년 3.1 운동 직후 엘리자베스 키스가 한국을 여행하던 중 미국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주선으로 김윤식과 만나 김윤식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이다.[6] 欲乘飛艇上靑天
俯視齊州幾點烟
回棹終無休泊處
狂吟披髮下翩然[7] 한국사를 배울 때도 개화 사상의 대두 때 개화파 및 분파된 이후 온건개화파에 항상 이름이 나온다.[8] 3.1 운동은 국내외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김윤식 등의 사례처럼 친일 행적을 보이던 이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김윤식 외에도 이용직이 독립청원서를 제출해 작위가 박탈당한채 수감되었고 이종건이 작위를 반납하려다 거부당했으며 을사오적 중 1명인 권중현과 정미칠적 중 1명인 이재곤이 작위 반납을 시도했지만 이 역시도 거부당했다.[9] 훗날 을사오적으로 세간의 비판을 받는 박제순 전 총리의 부친이다.[10] 때문에 김윤식이 갑신정변에 청나라를 끌여들였다는 의혹을 받고 있지만 김윤식의 요청 때문에 청나라가 개입한 것인지, 다른 역학적 요인 때문에 개입한 것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11] 경술국치 때의 이 대답은 상당히 애매한 대답이었는데 '不可 不可'로 해석하면 '절대로 안 되며 절대로 안 된다'는 대답이지만 '不可不 可'로 해석하면 '딱히 도리가 없으므로 해야 함'이 되어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당시 그의 입장을 찬성으로 볼 수도 있고 반대로 볼 수도 있다.[12] 김윤식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이 반응을 해석하는데 약간의 차이가 있다. 김윤식을 친일파로 인식하는 입장에서는 '不可不 可(딱히 도리가 없으므로 해야 함)'라고 해석하여 김윤식이 병합에 찬성했다고 보는 반면 민족주의자로 보는 입장에서는 '不可 不可(절대 절대로 안 됨)'로 해석하여 한일 병합에 반대했다고 보고 있다.[13] 당시 85세로 21세기 현대에서도 85세면 나름 고령자 취급을 받는데 평균 수명이 현대보다 훨씬 낮았던 19세기 태생 인물로서는 엄청 장수한 셈.[14] 출처: "이미지로 보는 한일병합사(映像が語る日韓併合史)"[15] 실제로 그의 청원서의 문장들을 두고 너무 저자세이다, 굴종적이다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는 한문으로 작성된 문장을 영어로 번역되었고 이 영어로 번역된 청원서를 다시 중역하면서 생긴 오역에서 생긴 오해이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키스의 평가에서는 상당히 세련되면서 진중하게 조선 독립을 요구한 청원서라고 극찬한바 있다. 또한 청원서를 말 그대로 일제에 조선 독립을 청원 했다는 점에서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근왕파이자 조선의 마지막 내각 관료로써 신하가 대한제국의 독립을 청원 하는 것은 당연하다.
俯視齊州幾點烟
回棹終無休泊處
狂吟披髮下翩然[7] 한국사를 배울 때도 개화 사상의 대두 때 개화파 및 분파된 이후 온건개화파에 항상 이름이 나온다.[8] 3.1 운동은 국내외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김윤식 등의 사례처럼 친일 행적을 보이던 이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김윤식 외에도 이용직이 독립청원서를 제출해 작위가 박탈당한채 수감되었고 이종건이 작위를 반납하려다 거부당했으며 을사오적 중 1명인 권중현과 정미칠적 중 1명인 이재곤이 작위 반납을 시도했지만 이 역시도 거부당했다.[9] 훗날 을사오적으로 세간의 비판을 받는 박제순 전 총리의 부친이다.[10] 때문에 김윤식이 갑신정변에 청나라를 끌여들였다는 의혹을 받고 있지만 김윤식의 요청 때문에 청나라가 개입한 것인지, 다른 역학적 요인 때문에 개입한 것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11] 경술국치 때의 이 대답은 상당히 애매한 대답이었는데 '不可 不可'로 해석하면 '절대로 안 되며 절대로 안 된다'는 대답이지만 '不可不 可'로 해석하면 '딱히 도리가 없으므로 해야 함'이 되어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당시 그의 입장을 찬성으로 볼 수도 있고 반대로 볼 수도 있다.[12] 김윤식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이 반응을 해석하는데 약간의 차이가 있다. 김윤식을 친일파로 인식하는 입장에서는 '不可不 可(딱히 도리가 없으므로 해야 함)'라고 해석하여 김윤식이 병합에 찬성했다고 보는 반면 민족주의자로 보는 입장에서는 '不可 不可(절대 절대로 안 됨)'로 해석하여 한일 병합에 반대했다고 보고 있다.[13] 당시 85세로 21세기 현대에서도 85세면 나름 고령자 취급을 받는데 평균 수명이 현대보다 훨씬 낮았던 19세기 태생 인물로서는 엄청 장수한 셈.[14] 출처: "이미지로 보는 한일병합사(映像が語る日韓併合史)"[15] 실제로 그의 청원서의 문장들을 두고 너무 저자세이다, 굴종적이다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는 한문으로 작성된 문장을 영어로 번역되었고 이 영어로 번역된 청원서를 다시 중역하면서 생긴 오역에서 생긴 오해이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키스의 평가에서는 상당히 세련되면서 진중하게 조선 독립을 요구한 청원서라고 극찬한바 있다. 또한 청원서를 말 그대로 일제에 조선 독립을 청원 했다는 점에서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근왕파이자 조선의 마지막 내각 관료로써 신하가 대한제국의 독립을 청원 하는 것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