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9-22 20:05:25

민태곤

조선귀족
朝鮮貴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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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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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여흥 민씨[1]
출생 1917년 12월 17일
경기도 경성부 입정정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입정동)
사망 1944년 11월 22일[2]
학력 대전중학교 (졸업)
도호쿠제국대학 (서양사학 / 제적)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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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민태곤은 1917년 12월 17일 경기도 경성부 입정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입정동)에서 조선귀족으로 남작의 작위를 받은 아버지 민규현(閔奎鉉, 1900 ~ 1934)과 어머니 의령 남씨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고조부 민종묵이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수여받은 이후로부터 대대로 습작을 해왔으나, 증조부 민철훈(閔哲勳, 1856 ~ 1925. 5. 11)[3]이 1920년 6월 29일 조선귀족 자작윤덕영과 함께 창립하여 취체역으로 있었던 해동은행(海東銀行)에서 잇따른 내홍으로 인해 그해 12월 6일 사임했으며#, 또한 11촌 지간의 족질(族姪)[4] 민재기(閔載祺, 1886 ~ 1948. 2. 2)와 함께 앞선 1919년 12월 21일 충청남도 천안군 천안면 읍내리에 창립한 주식회사 백제상사(百濟商事) 또한 경영 악화를 겪게 되었다.

결국 백제상사는 민철훈의 사후 1926년 2월 17일 주주총회에서 해산이 결의되어 결국 폐업했고#, 이를 전후하여 민태곤의 아버지 민규현을 비롯한 식구들은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소정리(현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소정리)로 이주하였다.# 1930년 1월에는 아버지 민규현이 몰락해 가는 조선귀족들의 파산을 구호하기 위해 조직된 재단법인 창복회(昌福會)에서 150엔을 수령해가기도 했으니, 명색은 '귀족'이었지만 사실상 평민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1934년 12월 15일 아버지의 별세로 남작 작위를 승계받았지만 내심 한민족을 억압하는 일제에게 반감을 품었다. 대전중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미야기현 센다이시 아오바구 오타마야시타(靈屋下)에 거주하면서 도호쿠제국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 서양사를 전공했다.[5]

1940년 그는 같은 해 5월경부터 뜻을 함께하는 오창근(吳彰根)[6] 등 조선인 유학생들과 모임을 거듭한 후, 조선민족 독립을 위하여 지도자로서 조선민중을 지도, 계몽할 수 있는 이론체계를 정비함과 동시에 자기의 실력양성에 노력하기로 합의하고 동지 규합에 나서기로 하였다. 마침내 신정호준(新井鎬俊) 등 5명을 동지로 결집하여 총 12명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후 각자 하숙집에 수차례 모인 그들은 한민족의 독립운동이 발전할 수 없었던 것은 중심모체가 없었기 때문이며 이제 이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각 운동자의 지도계몽에 임하자고 결의하였다. 그리고 실천활동으로, 첫째 동지를 규합하고 독립운동 단체의 건설을 위해 사회주의사상의 채용 및 연구, 둘째 조선 내 신분제도의 타파, 셋째 학생들에 대한 군사교육 및 창씨개명 반대, 넷째 조선에서의 의무교육제도 실시, 다섯째 재일 조선인 노동자의 생활개선 등을 협의하였고, 카를 마르크스의 《임금 노동과 자본》 등 사회주의 계통의 서적들을 공부하며 이론적인 모색을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일이 발각되었고, 민태곤은 1941년 12월 9일 동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 5개월 간 미결수로 옥고를 치르다가 1943년 4월 22일 센다이지방재판소에서 기소유예 판결을 받고 출옥하였다.[7]

그러나 동지들보다 먼저 풀려났다는 미안함과 자괴감, 그리고 수감 생활 동안 얻은 폐결핵으로 고통받다가 1944년 11월 22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민태곤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3. 여담



[1] 공목공파 29세 태(泰) 항렬.[2] 음력 10월 7일.[3] 당연하겠지만,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민철훈과는 동명이인이다.[4] 민재기의 조부 민종렬(閔種烈, 1831 ~ 1899. 6. 15)과 민태곤의 고조부 민종묵은 본래 친형제였기 때문에 민재기는 민종묵에게 생가 쪽으로는 5촌 당질(堂姪)이 된다.[5] 남동생 민태윤(閔泰崙, 1924년생)의 구술에 의하면, 민태곤은 도호쿠제국대학 졸업과 동시에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자리가 내정되어 있었다고 한다.#[6]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오창근과 동명이인이다.[7] 오창근, 황채연 등 다른 동지들은 1943년 9월 18일 센다이지방재판소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민태곤이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받은 것은 조선귀족 신분이 작용한 것으로 파악된다.#[8] 묻지마라 갑자생으로 유명한 1924년생이다. 조선 귀족가문이었기에 징병을 피할려면 피할 수 있었겠지만, 영락한 가세 속에서, 그리고 형의 항일비밀결사 경력에 대한 총독부 당국의 따가운 눈총 속에서 민태윤은 징병을 회피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1945년 1월 16일 입대 후 허난성 신샹시(河南省 新鄕市)의 중국 북지파견군 시미즈부대(沈部隊)에서 7개월 여를 주둔하며 미군의 공습을 일상으로 겪다가 7월 경 용산으로 귀환했다. 다시 1945년 8월 초순에 흥남비료공장 인근에 배치되어 참호를 파다 해방을 맞이해 8월 19일 화물차를 타고 서울로 귀환했다. 살아 돌아온 그는 경성경제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교가 서울대 상대로 통합되는 ‘국대안’의 파동 속에서 졸업하지 못하고, 결혼과 함께 국립도서관에 취직한다. 얼마 뒤에 집안 친척이 실장으로 있는 신탁은행(후일의 한일은행) 조사실로 직장을 옮겼다가 한국 전쟁을 겪게 된다. 피난하지 못한 민태윤은 길거리 등에서 여러 차례 인민의용군 징집을 당하지만 기를 쓰고 도망쳤고, 수복 후에는 국민방위군에 징집될 위기에 처하자 교통부 철도국원이 되었다. 이후 그는 교통부 본부 항공과로 옮겨가 근무하다 조중훈이 인수하여 민영화된 대한항공의 기획팀에서 근무하다가 1979년에 퇴임했다. 이후 형의 독립운동 자료를 얻기 위해 일본 내각총리대신, 법무대신, 대법원, 도호쿠대학이 있는 센다이의 지방법원장과 검찰청장한테 다 편지를 보냈지만, 관련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그러던 중 교토대학의 미즈노 나오키 교수의 자료 제공으로 드디어 2009년 형 민태곤의 서훈을 이룰 수 있었다.[[http://www.koreanhistory.org/8304]|출처][9] 휘문고등학교조선귀족 자작 민영휘가 설립한 학교인데, 실제로 집안 어른들이 '휘문중학교'가 제일 좋은 학교라면서 진학을 적극 권유했다고 한다.# 민영휘는 민태곤·민태윤 형제에게 족숙(族叔) 뻘이긴 하지만, 족보상으로 무려 49촌 지간으로 사실상 남이나 다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