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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자작 |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
<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 |
자 | 치경(穉慶) |
호 | 산남(山南), 춘관(春觀) |
본관 | 풍천 임씨[1] |
출생 | 1860년 (철종 11) 12월 17일 |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 |
사망 | 1919년 2월 12일[2] (향년 58세) |
경기도 경성부 | |
묘소 |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사당리[3] |
직업 | 정치인, 관료 |
작위 | 조선귀족 자작 |
약력 | 내부대신, 탁지부대신 조선귀족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비고 | 정미칠적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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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09년, 순종이 순행을 마치고 돌아와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친일 관료들과 기념촬영한 사진. 중앙에는 순종이 앉아있고 그 오른쪽에는 이재각, 민병석, 조중응, 김윤식, 이지용, 조민희, 고희성이 서 있으며 어진 뒤에는 이병무, 윤덕영이 서 있다. 순종황제의 왼쪽에는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송병준, 박제순이 서 있다. |
조선과 대한제국의 정치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1907년 정미 7조약에 찬성해 정미칠적이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귀족령」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사망하기 전까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2. 생애
1860년(철종 11) 12월 17일 한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임백희(任百熙, 1829 ~ ?)와 어머니 연안 이씨[4]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생5대조부 임서(任遾, 1708 ~ 1764. 1. 24)[5]는 1735년(영조 11) 식년 생원시에 3등 29위로 입격한 뒤 1763년(영조 39) 안산군수(安山郡守, 종4품)을 역임했고, 고조부 임종주(任宗周, 1734 ~ 1781. 7. 23)는 1772년(영조 48) 탕평정시(蕩平庭試)에 갑과 1위로 장원급제한 뒤 1775년(영조 51)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다. 증조부 임로(任魯, 1755 ~ 1828. 8. 22)는 1806년(순조 6) 음관으로 선공감 가감역관(繕工監假監役官, 종9품)에 임명되면서 관직에 진출해 1817년(순조 17) 보은군수(종4품)에 올랐으며, 조부 임익상(任翼常, 1789 ~ 1866. 3. 12) 또한 1835년(헌종 1) 음관으로 선공감 가감역관에 임명되면서 관직에 진출해 1851년(철종 2) 통훈대부(通訓大夫) 안주목사(安州牧使, 정3품)에 올랐다. 아버지 임백희는 1852년(철종 3) 식년 진사시에 2등 20위로 입격했다.임선준은 고향인 충청도 진천현(現 충청북도 진천군)으로 내려가 체류하던 중 1885년(고종 22)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 7위로 급제해 그해 4월 2일 승정원 가주서(假注書, 정7품)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886년 12월 29일 승정원의 정식 주서(注書, 정7품)에 임명되었고, 1894년까지 성균관 전적(典籍, 정6품), 사간원 헌납(獻納, 정5품), 홍문관 부수찬(副修撰, 종6품), 서학 교수(西學敎授, 종6품), 부사과(副司果, 종6품), 홍문관 수찬(修撰, 정6품), 총어영 군사마(摠禦營軍司馬), 강동현감(江東縣監, 종6품), 부사직(副司直, 종5품),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 정6품), 홍문관 응교(應敎, 정4품), 세자시강원 필선(弼善, 정4품), 사복시 정(司僕寺正, 정3품),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 종3품), 세자시강원 문학(文學, 정5품), 부호군(副護軍, 종4품),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정3품)·우부승지(右副承旨, 정3품)·좌부승지(左副承旨, 정3품),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정3품), 호조 참의(參議, 정3품),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정3품), 병조 참지(參知, 정3품) 등의 관직을 두루 지냈다.
갑오개혁 후 1895년 4월 7일 제용원 주전사 장(濟用院主殿司長), 1895년 6월 5일 시종원 좌시종(侍從院左侍從), 1903년 10월 7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이어 1903년 11월 14일 비서원 승(祕書院丞) 겸(兼) 태의원 소경(太醫院少卿)에 임명되었다.
1907년 1월 9일 성균관장(成均館長)에 임명되었으며, 1907년 5월 22일 학부 대신(學部大臣)이던 이완용이 의정부 참정대신(參政大臣)에 임명되면서 내각이 성립되자 내부대신으로 입각하였고 대한의원장(大韓醫院長)을 겸임했다. 1907년 5월 한국 시찰을 위해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를 환영하기 위해 전현직 대신과 관리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신사회'의 평의원에 선출되어 환영 행사를 주관했으며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 대수장을 받았다.
1907년 6월 고종은 을사조약이 무효라며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헤이그 특사로 보내고 뜻을 전하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이준이 죽자 일본의 압박으로 임선준이 내부대신에 올랐다. 1907년 7월 내부대신으로 고종의 강제 퇴위에 앞장섰으며 정미 7조약(한일 신협약) 체결에 동조해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학부대신 이재곤, 탁지대신 고영희, 군부대신 이병무, 법부대신 조중응, 농상공부대신 송병준과 함께 정미칠적으로 지탄받았다.
1907년 영친왕과 대한제국 내각의 모습[6][7] |
1908년 5월 6일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에 임명되어 지방의 일본 소유로 된 군용지와 철도 용지 등을 면세했으며 의병에게 처단당한 인물의 친족에게 보상금을 지원했다. '대동학회'의 회원, '대한여자흥학회' 고문, '대한산림협회' 명예 회원, 유교 진흥을 위해 세워진 '승종교회' 찬성장 등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10년 8월 6일 중추원 고문(中樞院顧問)에 임명되었고, 경술국치 후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관제가 시행되면서 조선총독의 자문 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10여 년 동안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으며 1910년 10월 7일 「조선귀족령」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 1월 은사 공채 5만원을 받았고 1911년 2월 조선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 봉수식'에 의복을 갖추어 참석했으며 1911년 8월 29일 '병합 1주년'을 기념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빛나고 빛날지니! 아. 천년 만년이여라는 「합병 기념 축사」를 게재하여 일제의 조선 지배와 일본 천황을 찬양했다. 1912년 8월 '한국 병합 기념장'을 받았고 1912년 12월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16년 8월 28일[출처] |
1917년 5월 조선의 유력자인 귀족과 실업가 등이 발기하고 경성일보사·매일신보사가 주관한 '남북 만주 시찰단' 환영 원유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17년 10월 일제의 협력과 지원하에 조직된 친일 불교 단체인 '불교옹호회'의 고문에 위촉되었다. 1918년 9월 '경성구제회'에 기부했고 죽기 전까지 떵떵거리며 살다가 1919년 2월 12일 사망했다. 사망 당일 특지로 정4위에 추서되었고, 작위는 외아들 임낙호(任洛鎬, 1896 ~ 1921. 9. 15)가 이어받았다.
3. 여담
- 형 임대준(任大準, 1857 ~ 1903. 5. 5)[9]의 차녀, 즉 조카딸 임건구(任乾九)는 이완용의 큰며느리로, 이완용의 장남 이승구(李升九, 1879 ~ 1905. 7)와 결혼했다.
- 형 임대준 또한 1882년(고종 19) 증광 문과에 병과 30위로 급제한 뒤 1891년(고종 28) 형조 참의(參議, 정3품), 1893년(고종 30) 영변대도호부사(寧邊大都護府使, 정3품) 등에 올랐다.
4. 관련 인물
5.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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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
[1] 죽애공파(竹崖公派) 25세 준(準) 항렬.[2] 풍천임씨세보 제3권 90쪽에는 1월 18일에 사망한 것으로 등재돼 있다.[3] 풍천 임씨 집성촌이다. 임선준의 증조부 임로(任魯, 1755 ~ 1828. 8. 22)가 이 마을의 입향조이다.[4] 이공우(李公愚)의 딸이다.[5] 임선준의 고조부 임종주는 임서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출생 이후 큰아버지 임손(任遜, 1705 ~ 1780. 12. 23)에 입양되었다.[6] 둘째 줄 왼쪽에서 첫번째 인물이 임선준.[7] 사진 속 임선준의 모습을 확대한 사진 #[출처] 《이미지로 보는 한일병합사(映像が語る日韓併合史)》[9] 초명 임계준(任啓準).